⊙ 사람의 마음을 얻은 齊王 전횡, 그를 위해 죽은 500빈객들
⊙ 자객으로 죽은 동생 섭정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죽음 무릅쓴 누이 섭영
⊙ 아버지의 복수를 이루고 吳王 부차에게 간하다 죽은 오자서
⊙ 곰의 쓸개를 핥으며 치욕을 씻은 월왕 구천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자객으로 죽은 동생 섭정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죽음 무릅쓴 누이 섭영
⊙ 아버지의 복수를 이루고 吳王 부차에게 간하다 죽은 오자서
⊙ 곰의 쓸개를 핥으며 치욕을 씻은 월왕 구천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사마천이 ‘열장부’라고 평가한 오자서.
공자는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마땅함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궁형(宮刑)이라는 인생 최대의 치욕을 당한 입장에서는 차라리 자결함으로써 치욕을 끝내는 것이 마땅함에 가깝다. 그러고도 그냥 살아간다는 것은 공자 말대로 ‘요행히 죽음을 면한 삶’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기》 열전에는 치욕이나 굴욕을 당하기보다는 자결로 삶을 마감한 의인(義人)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전담(田儋) 열전〉이 대표적이다.
‘義人의 전형’ 제나라 왕 전횡
![]() |
| 중국 화가 쉬베이훙(徐悲鴻)이 그린 〈전횡 500의사〉. |
그로부터 1년여 후에 한나라는 항적(項籍·항우)을 멸망시켰고 한왕(漢王·유방)은 세워져 황제가 됐고 이에 팽월을 세워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횡은 주살(誅殺)될까 두려워해 그 무리 500여 명과 함께 바다로 가서 섬에서 살았다. 고제(高帝·유방)는 이 소식을 듣고서, 횡의 형제들은 본래 제나라를 평정한 바 있는 데다가 제나라 사람들 중에 뛰어난 이들이 대거 그를 따르니 지금 바다에 있는 자들을 거두지 않을 경우 뒤에 반란이 있을 것을 걱정해 마침내 사자를 보내 횡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불러오게 했다. 횡은 사죄하며 말했다.
“신(臣)은 폐하의 사신 역이기(酈食其)를 삶아 죽였고, 지금 듣건대 그의 동생 상(商)이 한나라의 장수가 됐고 뛰어나다 하니 신은 두려워 감히 조서를 받지 못하겠습니다. 부디 그냥 평민으로 남아 바다의 섬이나 지키며 살게 해주십시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자 고황제는 마침내 위위(衛尉) 역상(酈商)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제나라 왕 횡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 감히 그를 따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자가 있다면 그 일족을 멸할[族夷=族滅] 것이다.”
이에 다시 사자에게 부절(符節)을 지니고 가서 조서의 뜻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횡이 오게 되면 큰 인물은 왕으로 삼고 작은 인물은 곧 후(侯)로 삼을 것이다. 오지 않으면 군대를 발동해 주살할 것이다.”
전횡은 마침내 자신의 빈객 2명과 함께 역마를 타고서[乘傳] 낙양에 이르렀다. 낙양에서 30리쯤 떨어져 있는 시향(尸鄕)역에 이르렀을 때 전횡은 사자에게 감사하며 말했다.
“남의 신하 된 자가 천자를 알현하는 것이니 마땅히 몸을 씻고 머리를 감아야 합니다.”
그곳에 멈추어 머물렀다. 그리고 빈객(賓客)들에게 말했다.
“나는 애초에 한나라 왕과 더불어 왕 노릇을 하면서[南面] 스스로를 고(孤·제후의 자칭)라고 했는데 지금은 한왕은 천자가 되고 횡은 도망친 포로가 돼 북면(北面)하여 그를 섬기게 됐으니 그 치욕스러움[媿=恥辱]이 참으로 너무도 심하구려. 또 나는 남의 형을 삶아 죽였는데 그 동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같은 군주를 섬겨야 하니, 비록 그가 천자의 명령을 두려워해 감히 나를 괴롭히지는 못한다고 해도 내 홀로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겠소? 또 폐하께서 나를 보고자 하는 까닭은 그저 내 얼굴과 모습을 한번 보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오. 폐하께서 낙양에 계시니 지금 내 목을 베어 30리를 말로 내달리게 하면 모습은 아직 썩지 않아 오히려 알아볼 수 있을 것이오.”
전횡이야말로 사마천이 내세운 의인(義人)의 전형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횡을 따라 죽은 빈객들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찔러 빈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목을 받들고 사자를 따라가서 그것을 고제에게 바치게 했다. 고제가 말했다.
“아! 다 이유가 있었구나! 평민 집안에서 일어나 형제 3명이 번갈아 왕이 됐으니 어찌 뛰어나지 않겠는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는 두 빈객을 제배(除拜)하여 도위(都尉)로 삼고 병졸 2000명을 동원해 왕의 예(禮)로써 전횡을 장사지냈다.
이미 장례가 끝나자 두 빈객은 그 무덤 곁에 구덩이를 파고 둘 다 목을 찔러 횡의 뒤를 따랐다. 고제는 이를 듣고서 크게 놀랐으며 전횡의 빈객들을 모두 뛰어난 자들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고제는 그 나머지 500명이 여전히 바다 가운데 있다고 들었다며 사자를 시켜 그들을 불러오게 했다. 가서 보니 전횡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그들도 모두 자살했다. 이를 통해 마침내 전횡 형제는 능히 선비들의 마음을 얻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일에 대해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전횡은 절의가 높아 그 빈객들이 그의 의로움을 흠모해 횡을 따라 죽었으니 어찌 지극한 뛰어남[至賢]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런 까닭에 그의 열전을 지었다.”
동생의 이름을 위해 죽은 섭영
사마천의 《사기》에는 지금 읽어도 눈물짓게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객 열전(刺客列傳)〉에 나오는 자객 섭정(聶政)과 그 누나 섭영(聶榮)의 이야기다.
섭정은 한(韓)나라 엄중자의 부탁을 받고 재상 협루를 암살하게 된다. 그 정치적 배경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열전이다.
(섭정이 엄중자의 부탁을 받고) 칼을 차고 한나라에 도착했을 때 한나라 재상 협루는 마침 관부(官府) 당상에 앉아 있었는데 무기를 들고 호위하는 자들이 아주 많았다. 섭정이 곧장 들어가 섬돌에 올라가 협루를 찔러 죽이니 좌우에 있던 부하들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섭정이 크게 소리치고 칼로 쳐서 죽인 사람이 수십 명이었다. 그런 다음에 스스로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자기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결국 죽었다.
한나라는 섭정의 시신을 가져다가 저자에 드러내 놓고[暴·폭] 그가 누구인지 물었으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한나라는 현상금을 걸고 재상 협루를 죽인 자를 말해 주는 사람에게 천금(千金)을 주겠다고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를 아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섭정의 누나 섭영은 어떤 사람이 한나라 재상을 찔러 죽였는데 범인이 누구인지를 모르며 그 시신을 드러내 놓고 현상금으로 천금을 걸었다는 소문을 듣고 마침내 통곡하며 말했다.
“그는 내 동생일 것이다. 아, 엄중자가 내 동생을 알아주었구나!”
곧바로 일어나 한나라 시장으로 가서 보니 죽은 자는 과연 섭정이었다. 시체 위에 엎드려 매우 슬피 울며 말했다.
“이 사람은 지(軹) 땅 심정리 사람 섭정입니다.”
시장을 오가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
“이자는 우리나라 재상에게 포악한 짓을 해 임금께서 그 성과 이름을 알고자 현상금으로 천금을 걸었는데 부인은 듣지 못했소? 어찌 감히 와서 이자를 안다고 하시오?”
섭영이 말했다.
“그 말은 들었습니다. 섭정이 오욕을 무릅쓰고 시장 바닥에 몸을 던진 것(개백정을 한 일을 말한다)은 늙으신 어머니가 다행스럽게 살아 계시고 제가 시집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이미 천수(天壽)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셨고 저도 이미 시집을 갔습니다. 엄중자는 마침내 곤궁하고 천한 형편에 있는 제 동생을 살펴보고 그와 사귀었으니 그 은택이 매우 두텁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장부는 본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고 했습니다. 동생은 지금 내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연루될까 봐) 자신의 몸을 해쳐 자취를 없앴습니다. 내 어찌 죽음을 당하는 벌이 두려워 끝내 뛰어난 동생의 이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한나라의 시장 사람들은 대경실색했다. 그녀는 마침내 “하늘이시여!”라고 크게 세 번 외치고는 몹시 슬퍼하다가 섭정 곁에서 죽었다. 진(晉)나라 초(楚)나라 제(齊)나라 위(衛)나라에서 그 소식을 듣고 모두 말했다.
“섭정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의 누이 역시 열녀(烈女)이다. 만일 섭정이 진실로 그의 누나가 참고 견디는 성품이 아니라서 시신이 버려지고 해골이 드러나는 고통을 두려워 않고 반드시 몹시 험한 천 리 길을 달려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누이와 동생이 함께 한나라 시장 바닥에서 죽게 될 것을 미리 알았다면 분명 감히 엄중자에게 자기를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중자도 실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 능히 장부를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烈丈夫 오자서
이어서 사마천은 진왕(秦王·후의 시황제)을 찌르려다 실패한 자객 형가(荊軻) 이야기를 다룬다.
사실 항우(項羽)의 죽음 또한 치욕을 견디지 못한 선택의 결과이다. 그는 고향인 강동(江東)의 부로(父老)들을 대하는 것이 부끄러워 자결하였다. 이런 의인(義人)의 이야기는 열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사마천의 삶은 분명 이들과 같은 의인(義人)의 길은 아니었다. 의인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치욕을 이겨 내고 더 큰 일과 명분을 위해 가는 사람이 있다. 사마천은 후자(後者)의 길을 걸었다. 이런 사람에게 사마천은 열장부(烈丈夫)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먼저 오자서(伍子胥)에 대한 사마천의 평부터 보자.
“원한으로 인한 해독이 사람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참으로 심하도다! 왕도 신하에게 차마 그렇게 해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같은 반열에 있는 동료끼리야 어떻겠는가! 만일 오자서가 (아버지) 오사(伍奢)를 따라 함께 죽었더라면 땅강아지나 개미[螻蟻·누의]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작은 의리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그 이름을 후세에 드리웠으니 참으로 비장하도다!
바야흐로 오자서는 장강(長江)에서 곤궁함에 빠지고 길에서 빌어먹을 때 단 한순간도 초(楚)나라를 잊을 수 있었으랴! 그랬기에 남몰래 치욕을 견뎌내고 공명을 세웠으니, 열장부가 아니면 어느 누가 능히 이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자서(子胥)는 자(字)이고 이름은 원(員)이다. 춘추시대 초(楚)나라에서 오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사가 평왕(平王)의 아들인 태자 건(建)의 스승으로서 태부(太傅) 직책에 있을 때, 평왕이 비무기(費無忌)의 참언으로 태자를 죽이려 하고 오사를 감옥에 가두었다. 비무기는 평왕을 부추겨 오사를 인질로 삼아 그의 큰아들 오상(伍尙)과 오자서를 불러들여 죽임으로써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다. 오상은 이것이 함정인 줄 알면서도 부름에 따라 아버지와 함께 살해되었으나 오자서는 복수를 기약하며 도주하였다.
송(宋)나라와 정(鄭)나라를 거쳐 오(吳)나라로 간 오자서는 오왕 합려(闔閭)를 보좌하여 나라를 강국으로 키웠다. 오나라가 초나라를 함락시킨 뒤에 오자서는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미 도망친 뒤였다. 이에 평왕의 묘를 찾아 시신을 파낸 뒤 채찍질을 300번 함으로써 복수하였는데, ‘굴묘편시(掘墓鞭屍)’는 여기서 유래한 고사성어이다.
오자서는 그의 혹독한 행동을 나무라는 친구 신포서(申包胥)에게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답하였는데, 여기서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오자서는 초나라를 함락시킨 공으로 신(申) 땅에 봉해져 신서(申胥)라 불리게 되었다. 국세(國勢)가 점점 번성한 오나라는 주변국들을 공격하며 위세를 떨쳤는데, 한번은 월(越)나라를 공격하였다가 월왕 구천(勾踐)의 반격에 밀려 패퇴하였으며 합려는 이때 입은 상처로 죽고 말았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는 와신(臥薪)의 생활을 하며 원한을 되새긴 끝에 월나라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구천은 부차와 대신들에게 재물을 바치며 강화를 요청하였다. 이에 오자서는 “월나라는 오나라에게 치료하기 어려운 뱃속의 질병과 같으므로 지금 멸망시키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간언하였는데, ‘심복지환(心腹之患)’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부차는 오자서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점차 그를 멀리하였다. 오자서는 오나라의 앞날에 화가 미칠 것이라고 판단하여 아들을 제나라에 맡겼는데, 그와 사이가 나쁜 태재(太宰) 백비(伯嚭)가 이 일을 내세워 모함을 하였다. 그러자 부차는 오자서에게 촉루(屬鏤)라는 명검을 내려 자결하도록 명하였다. 열전의 유명한 장면이다.
오자서의 죽음
(부차가) 마침내 사람을 보내 오자서에게 촉루검을 내려주며 말했다.
“그대는 이 칼로 죽으라!”
오자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해 말했다.
“아! 참소하는 신하[讒臣] 백비가 나라를 어지럽히는데 왕은 마침내 도리어 나를 죽이는구나. 내가 네 애비[若父·약부]를 패주(覇主)로 만들었다. 네가 아직 임금으로 세워지기 전에 여러 공자(公子)들이 세워지려고 다툴 때 나는 선왕(先王)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간쟁(諫爭)하여 너를 지켰으니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거의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이미 세워지고 나서 오나라를 나누어 내게 주겠다고 했을 때도 나는 도리어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네가 아첨하는 신하[諛臣]의 말만 듣고서 덕망 있는 어른[長者]을 죽이려 하는구나!”
마침내 사인(舍人·가신)에게 일러 말했다.
“반드시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그것으로 왕의 관(棺)을 짤 목재로 쓰도록 하고, 내 눈알을 파내 오나라 동문(東門) 위에 걸어 월나라 놈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지켜보게 하라!”
마침내 자기 목을 찔러[自剄=自刎] 죽었다.
오왕이 이를 듣고는 크게 화를 내며 마침내 자서 시신을 말가죽 주머니[鴟夷]에 채워 넣어 강물에 내던지게 했다. 오나라 사람들은 그를 가엾게 여겨 강변에 사당을 세우고는 그래서 이름이 서산(胥山)이 되었다.
곰의 쓸개를 핥은 월왕 구천
![]() |
| 월왕 구천. |
구천 15년 오왕 부차가 황지(黃池)로 북상하여 진(晉)나라와 싸우는 틈을 타 오나라 수도로 공격해 들어간 뒤 오나라의 항복을 요구했다. 나중에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이어 북쪽으로 회(淮)를 건너 서주(徐州)에서 제후들을 모으고 주(周)나라에 조공하면서 방백(方伯)의 명을 받아 패주가 되었다.
물러날 때를 알았던 범려
![]() |
| 범려. |
범려는 월왕 구천을 섬기면서 이미 온갖 고생을 하며 온 힘을 다했고 구천과 20년 넘게 깊이 모의하여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회계산에서 당한 치욕을 갚아 주었다. 그 후에 북쪽으로는 군대를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건너 제나라와 진(晉)나라에 이르렀고 중원을 호령하며 주나라 왕실을 높이니 구천은 패자(覇者)가 되었고 범려는 상장군으로 일컬어졌다.
월나라로 돌아온 범려는 큰 명성 아래서는 오래 머물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또 구천은 사람됨이 환난은 함께할 수 있어도 편안함을 함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서 구천에게 사직하겠다는 글을 썼다.
“신이 듣건대 군주가 근심이 있으면 신하는 수고로움을 떠맡고,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군왕께서 회계에서 치욕을 당하셨는데도 신이 죽지 않은 것은 이 복수를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설욕했으니 신은 회계에서 치욕을 당한 죄를 청합니다.”
구천이 말했다.
“고(孤)는 장차 그대와 나라를 나누어 가지려 한다. 받지 않으면 장차 그대를 주벌(誅罰)할 것이다.”
범려가 말했다.
“군주는 명령을 행하고 신하는 자기 뜻을 행합니다.”
마침내 값싼 보물과 구슬 등을 꾸려 가까운 자기 무리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사마천은 월왕 구천을 이렇게 평하였다.
“우왕(禹王)의 공로는 크도다! 구천(九川) 물길을 터서 서로 통하게 하고 구주(九州)를 획정했기에 지금까지 중원이 다스려지고 평안하다. 먼 후예인 구천에 이르러 온갖 고생을 하고 노심초사하여 끝내 강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쪽으로는 중원 나라들에서 열병식을 거행하고 주(周)나라 왕실을 높여 패왕이라고 일컬어졌다. 구천을 뛰어나다[賢]고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기》 속에 숨쉬는 열장부의 길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의인의 길을 버리고 열장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이는 세속 사람들의 생각과는 많이 어긋나는 길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재능에 따라, 뜻에 따라 의인의 길을 갈 수도 있고 열장부의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이때 쓰는 말이 ‘어쩔 수 없이[不得已]’이다. 정(正)을 버리고 중(中)을 택할 때, 상도(常道)를 벗어나 권도(權道)를 행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을 쓴다. 정도보다는 상황의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는 불가피함을 뜻하는 것이다.
장다커(張大可)는 《사마천 평전》에서 말했다.
“주나라 문왕(文王)은 유리(羑里)에 갇혀서 《주역(周易)》을 풀어 냈고, 공자는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곤액(困厄)을 당하여 《춘추(春秋)》를 지었으며, 굴원(屈原)은 쫓겨난 다음에 〈이소(離騷)〉를 지었다. 좌구명(左丘明)은 시력을 잃고 《국어(國語)》를 지었으며, 손자(孫子·손빈)는 발꿈치를 베는 월형(刖刑)을 받고 《병법》을 논하였다.”
이들 또한 사마천이 열장부의 길을 가는 데 든든한 정신적 후원자들이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