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6년 만 12세 남학생 평균 신장 131.8cm, 평균 체중 28.3kg→현재 154.4cm, 47.7kg
⊙ 영아 사망률, 출생아 1000명당 152.2명(1953년)→2명
⊙ 한국의 산업용 로봇 밀도, 노동자 1만 명당 1000대로 세계 1위(2023년)
⊙ 평균 가구원 수 평균 5.2명(1970년)→2.2명(2022년)
박한슬
1991년생. 차의과학대 약학과 졸업, 연세대 통계·데이터사이언스 석사 / 《중앙일보》 《주간조선》 칼럼니스트, 서울시 청년정책자문단 / 저서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숫자 한국》 외 다수
⊙ 영아 사망률, 출생아 1000명당 152.2명(1953년)→2명
⊙ 한국의 산업용 로봇 밀도, 노동자 1만 명당 1000대로 세계 1위(2023년)
⊙ 평균 가구원 수 평균 5.2명(1970년)→2.2명(2022년)
박한슬
1991년생. 차의과학대 약학과 졸업, 연세대 통계·데이터사이언스 석사 / 《중앙일보》 《주간조선》 칼럼니스트, 서울시 청년정책자문단 / 저서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숫자 한국》 외 다수

- 1965년 어린이날을 기념해 서울시와 대한소아과학회가 마련한 우량아 선발대회. 신장, 체중, 머리 둘레, 가슴둘레 등 발육 정도를 심사 기준으로 삼았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광복이란 용어를 채택하고 있으나, 오직 독립운동의 성과만으로 우리가 식민 지배를 벗어났다고 보긴 어렵다. 국제정치학적으로 살폈을 땐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열강(列强) 간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결과가 영향이 훨씬 심대(深大)해서다. 물론 당대 지식인들이라고 이런 상황을 모르진 않았으나, 우리는 해방 대신 광복이란 용어를 골라야만 했다. 당위적(當爲的) 선언으로 현상(現象) 기술을 대체해야 할 정도로 독립 신생국의 국체(國體)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광복이라는 주체적 서사(敍事)는 어려운 현실을 잊고 국가를 유지하는 튼튼한 거멀못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80년의 세월이 흘러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2025년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이제 우리는 ‘광복’이라는 자긍심 넘치는 서사 뒤에 가려져 있던 ‘해방’의 복합적이고 냉정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정도의 국가적 성숙에 이르렀다. 더 이상 당위가 현실을 압도할 필요가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지난 80년간의 경이로운 도약 과정을 숫자들을 통해 짚어 보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광복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바른 자세이리라.
1936년 학생 신장·체중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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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대구 대륜고 학생들의 모습. 1936년 18세 남학생의 평균 신장은 162.6cm로 현재보다 11.4cm가 작았다. |
해방 이전 조선인들의 생계는 그리 녹록지 못했다. 쇼와(昭和) 13년(1938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자료에 ‘학교별 생도 신체검사 성적(學校別生徒身體檢査成績)’이 실렸다. 1936년 한 해 동안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신장·체중·가슴둘레를 측정한 자료다. 보통학교의 만 12세 남학생의 평균 신장은 131.8cm, 평균 체중은 28.3kg으로 확인된다. 현재 대한민국의 만 12세 남학생 평균 신장이 154.4cm, 평균 체중이 47.7kg인 데 비해 발육 정도가 확연히 낮았다.
이 차이는 나이를 먹으며 더 벌어진다. 1936년 당시 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만 18세 남학생의 평균 신장은 162.6cm, 평균 체중은 53.6kg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만 18세 남학생은 평균 신장 174cm에 평균 체중은 67.4kg을 웃돈다. 올해 첫아이를 품에 안아 보니, 내가 굶을지언정 아이를 굶기지는 않는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됐다. 부친과 모친께서도 그랬을 테고, 조부와 조모도 그러셨을 테다. 그러니 당시의 아이들 발육 상태는 그즈음 생계의 가늠자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 테다. 같은 유전자를 타고난 손자 세대는 잘만 먹여 키워도 174cm까지 자랐다. 현대의 청소년 성장 도표 기준으로 18세에 53kg이면 하위 3% 수준이다.
세대 전체의 평균이 그 수준이었으니,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배를 곯고 살았다는 얘기고 부모는 그보다도 못 먹었다는 게 자연스러운 추정이다. 구전(口傳)으로 듣는 경험담이 아니라, 숫자로 충분히 증빙되는 처참한 시대상이다.
미 군정기 원조 총액 4억여 달러
그랬다 보니 해방 직후 미국 군정(軍政) 시기 미국이 가장 신경 쓴 것 중 하나가 식량 원조였다. 미군정이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행정권을 이양하기까지 점령지역 행정구호(GARIOA) 프로그램을 통해 남한에 지원한 원조 총액은 약 4억900만 달러였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7조5000억원 규모다. 그중 상당수가 식량 지원이었으니, 미군 아저씨가 꼬마들 손에 쥐여 준 ‘초콜릿’으로 상징되는 개인적 호의를 넘어 해방 직후 배곯는 아이들을 미국이 먹여 살린 셈이다. 선비들이 입으로 아무리 광복을 외쳐 대도 범부의 애국심을 지탱해 준 건 서방의 식량 원조였다.
미국의 적극적인 식량 원조에도 불구하고 아동의 영양 부족 상태는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전쟁의 여파를 극복하고 본격적인 국가 정비가 이루어진 게 1960년대 중반 무렵부터다. 거시적 문제들을 어느 정도 추스른 정부는 1969년이 되어서야 ‘국민영양 실태조사’를 처음으로 실시하는데, 전체 국민 기준으로 하루 평균 섭취 열량이 2105칼로리에 불과했다. 권장량 2400칼로리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아동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동덕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를 지낸 고(故) 한만숙 교수는 1960년대에 12세 아동의 영양 섭취를 분석했는데, 겨우 하루 1480~1665칼로리의 열량만 섭취하고 있는 걸로 확인됐다. 연령에 무관하게 영양 결핍이 만연했던 시기다.
이런 아동기의 영양 부실은 단순히 신장과 체중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영양 부족을 겪는 아이들은 쉽게 쇠약해져 병을 앓기 쉽다. 의료 여건도 마땅찮던 시기에 굶어서 체력이 떨어진 아이가 버텨 낼 재간은 없으니, 자연히 영아(嬰兒) 사망률도 높았다. 1953년 우리나라 영아 사망률은 출생아 1000명당 152.2명으로 추정된다. 즉, 한 해에 태어난 아이 1000명 중 152명이 돌 전에 사망했다는 뜻이다. 한 해 78만 명 정도 태어나던 시대이니, 갓 태어난 아이 11만 명이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현재 영아 사망률은 1000명당 2명 수준, 76분의 1로 급감했다. 우리나라가 지난 80년간의 발전으로 이뤄 낸 성과다.
우량아 선발대회의 추억
더 이상 배곯지 않는 지금,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어떤 문제를 겪고 있을까?
1955년에 창경원(현 창경궁)에서 해방 10주년을 맞아 산업박람회가 열렸다. 그때 처음으로 등장한 제품이 국내 어린이 영양제의 원조 격인 원기소(元氣素)다. 매년 분유회사에서 우량아(優良兒) 선발대회를 열던 시기다. 아이들의 영양 보충을 위해 비싼 영양제를 사 먹이고 갖은 보약(補藥)을 해 먹이던 게 그 시절의 흔한 풍경이라면, 배곯던 아이들이 낳은 손자손녀는 이제 영양 과잉 문제와 싸우고 있다.
2024년 질병관리청에서 발표한 ‘청소년 건강행태조사’에 따르면 중학생의 비만율은 10.4%로 확인된다. 고등학생은 이보다 더 심각하다. 고등학생의 14.5%가 비만인 걸로 추정되는데, 2010년대 초만 하더라도 고등학생의 비만율이 5% 남짓이었으니 10여 년 새 3배로 늘어난 셈이다.
영양 결핍이 영아 사망률을 끌어올렸다면, 비만은 여아(女兒)에서 성(性)조숙증을 일으키는 위험 요인이다. 너무 이른 나이에 초경(初經)을 시작하면 키 성장이 조기(早期)에 멈추고, 여성 호르몬에 장기간 노출되면서 유방암 같은 질환의 위험성이 커질 수 있다.
해방 후 80년간 대한민국이 겪은 변화는 이 영양 전환 모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땅의 아이들이 ‘어떻게 배를 채울 것인가’를 고민하던 시대에서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적게 먹을 것인가’로 바뀌었다. 질적 변화가 생긴 것이다.
구로‘공단’에서 구로‘디지털단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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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4월 1일 구로공단 준공식 풍경. 구로공단은 지금 스타트업 기업들이 모인 ‘구로디지털단지’로 변신했다. 사진=조선DB |
해방 직후 대한민국엔 제대로 된 산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가 만든 주요 산업시설이 모두 이북에 남겨진 탓에, 해방 시점 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의 60~70% 수준에 그쳤다. 국민의 74%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는 나라에서 자원으로 삼을 수 있는 건 인력(人力)뿐이었다. 1960년대부터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지만, 기술이 없던 탓에 노동집약적인 경공업(輕工業)이 주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을 보여 주는 상징적 공간이 바로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를 대표하던 서울 구로공단이다.
탄핵사태로 보수가 괴멸한 지난 대선에서 가까스로 40%대의 지지율을 사수한 김문수 후보와 그의 부인 설난영이 구로공단 출신이다. 가발과 섬유, 신발 같은 경공업 제품을 생산하여 수출하던 이곳의 풍경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와 그에 못지않게 바삐 움직이는 젊은 노동자들의 손으로 채워졌다. 당시 한국의 유일무이한 경쟁력은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이었고, 국가는 이를 동력으로 수출 주도 성장이라는 대전략을 밀어붙였다.
1964년부터 조성된 옛 ‘구로공단’은 진작에 ‘구로디지털단지’로 탈바꿈했다. 굴뚝에서 연기를 뿜어 대던 공장과 미싱기를 돌리던 여공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도회적(都會的) IT 기업과 스타트업들이 들어섰다. 낮은 부가가치에도 가족 부양을 위해 땀 흘리며 일하던 육체노동자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식노동자로 질적 변화를 겪은 것이다.
소프트파워 코리아
이런 변화가 구로공단에서만 일어난 건 당연히 아니다. 수제(手製) 신발공장이 밀집했던 서울 성수동은 각종 기업의 깜짝 이벤트성으로 열리는 팝업(pop-up) 스토어의 세계적 성지(聖地)가 되었고, 철공소가 밀집했던 문래동과 인쇄소가 밀집했던 을지로는 국내 젊은이와 외국인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세련된 문화 공간이 됐다. ‘한강의 기적’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다음 세대에 이루어진 변화도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수준인 건 마찬가지인 셈이다.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이자, 정치외교학자 조지프 나이가 얘기한 ‘소프트파워’의 핵심인 문화산업을 우리 손으로 육성해서 세계에 판매한다는 걸 해방 즈음에 상상한 이가 과연 있었을까?
특히 최근 진행 중인 IT와 로보틱스, 인공지능(AI)이 결합한 변화는 값싼 노동력에 의존하던 노동집약적 공장을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화 공정으로 대체하고 있다. 국제로봇연맹(IFR)의 2021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산업용 로봇 밀도는 노동자 1만 명당 1000대에 달해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이는 전통적인 제조업 강국인 독일이나 일본은 물론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의 322대를 압도적으로 상회하는 수치다. 사람의 손 대신 로봇이 생산의 주역이 된 스마트팩터리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근래엔 여기서 한 술 더 떠, 최소한의 관리 인원만 상주하고 실질적인 완전 자동화를 달성한 ‘다크 팩터리(dark factory)’도 등장했다. 기계는 조명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으니 공장에 불을 켜지 않아 붙은 이명(異名)이다. 상황이 이러니 기성세대가 익숙한 형태의 산업 논리는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노동시간을 추가로 투입하면 성과도 선형적(線形的)으로 비례해 산출되던 형태의 노동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가계 저축률 18%(1980년대)→3.5~4%
이렇게 노동의 형태가 바뀌자, 돈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극적으로 변했다. 일을 더 하면 더 큰돈을 벌던 시대가 흘러가 버린 건 물론이고, 우직하게 일만 하는 사람보다 재테크에 관심을 두고 종잣돈을 열심히 굴리는 사람들의 자산이 훨씬 더 크게 느는 걸 봐버려서다. 노동을 통해 얻은 노동소득을 저축하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게 됐다.
과거 근검절약(勤儉節約)이 국민적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절, 가계(家計)의 저축은 단순히 미래를 위한 대비를 넘어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애국적 행위로 간주됐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까지도 한국의 가계 순(純)저축률은 18%에 육박할 정도로 높았다. 이렇게 축적된 민간의 자본은 고스란히 은행으로 흘러들어 가 다시 중화학공업 육성 같은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의 종잣돈으로 활용되었다. 즉, 국민 개개인의 높은 저축성향이 국가자본 축적의 기저를 이룬 셈이다.
하지만 노동소득 자체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아지고, 이를 저축하는 것보단 투자해 돈을 벌거나 그냥 써버리자는 문화가 확산되며 이러한 경향은 급격히 꺾였다. 실제로 2006년경 가계 순저축률은 3.5%까지 떨어졌고, 최근에도 약 4% 내외에 머무르고 있다. 심지어 부채를 통해 자산을 형성하려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일부 계층에서는 순저축이 사실상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저축이 미덕이던 시대는 가고,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과 ‘빚투(빚내서 투자)’로 상징되는, 적극적 부채 활용을 통한 투자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는 거시경제 지표에 명확히 드러난다. 195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67달러에 불과했다. 해외 원조 없이는 국가 운영이 불가능했던 최빈국이었다. 그러나 불과 몇 세대가 지나는 동안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2023년 구매력 평가(PPP)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약 5만3000달러 수준에 도달하며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미군정 시기 미국이 지원한 원조 총액은 현재 가치로 약 7조5000억 원 규모였다. 이 돈으로 전 국민이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았는데 이 금액도 2025년 대한민국에서 보면 정부 1년 예산의 1%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원조로 연명하던 나라가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막대한 부(富)를 창출하고 소비하는 국가로 변모했다. 배를 곯아 가며 번 돈을 꼬박꼬박 저축하던 노동자의 시대는 이제 빚을 내서라도 원하는 것을 소비하고 투자하는 선진국형 소비자의 시대로 완전히 전환되었다. 해방 80년이 만든 또 하나의 극적인 풍경이다.
전체 가구 33.4%가 1인 가구(2021년)
한 민족의 이동(移動) 양태는 그 사회의 발전 수준과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거대했던 인구 이동은 단연 6·25전쟁의 피난 행렬이었다. 전쟁의 참화(慘禍)를 피해 남으로 남으로 향한 피난민 수는 900만 명에 육박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규모의 난민 사태다. 그 시기 이북에서 월남(越南)한 실향민들은 아직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이산가족은 이젠 그 수가 점차 줄어 가는 실정이다.
6·25전쟁으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 국민의 이동은 과거와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코로나19 대유행 전인 2018년 한 해에만 해외로 출국한 한국인 여행자 수가 약 2870만 명에 달했다. 보따리를 이고 지고 국도를 따라 걷던 피난민의 후예들이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권 중 하나를 들고 지구 반대편까지 자유롭게 날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외부로의 확장’은 내부 공동체의 구조적 변화와 맞물려 진행되었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은 농촌에 기반한 대가족(大家族) 공동체였다. 3대가 한 지붕 아래 모여 살며 농업이라는 공동의 생산활동에 종사하고, 강력한 가부장적 질서와 유교적 규범을 공유하던 집단은 산업화 이전까지 가장 보편적인 삶의 형태였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이 견고했던 공동체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70년 가구당 평균 5.2명에 달했던 가구원 수는 2022년 2.2명으로 반토막 났다. 더욱 극적인 변화는 1인 가구의 폭발적인 증가다. 2021년 기준 전체 가구의 33.4%가 1인 가구로 채워지면서 이제는 가장 주된 가구 형태로 자리 잡았다. 대가족이라는 집단주의적 유산 위에서 극단적 개인주의의 산물인 1인 가구가 번성하게 된 셈이다. 이들은 더 이상 지역이나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와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세계시민으로 성장했다.
‘아프리카의 녹색혁명’ 이끄는 통일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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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중 구호물자로 들어온 옷들을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미국 원조담당관. 해방 이후 한동안 한국은 외국의 원조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나라였다. 사진=조선DB |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한 농업 협력이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식량 부족을 해결해 줬던 귀중한 통일벼는 맛과 재배 조건 등이 맞지 않는 탓에 국내에서 더는 재배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옛 유산이 이제는 아프리카의 식량난 해결에 기여하는 ‘아프리카의 녹색혁명’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흔히 안남미(安南米)라 불리는 길쭉한 쌀을 먹던 아프리카 지역에서, 기후 조건이 우리나라보다 재배에 적합한 통일벼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우리가 겪었던 문제를 해결한 경험과 기술을 이제 다른 개발도상국에 전수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어떤 국가로 기억될 것인가’
이러한 변화가 얼마나 극적인지를 이해하려면, 우리 민족의 국제외교 데뷔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907년 고종의 밀사(密使)였던 이준(李寯·1857~1907년) 열사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순국해야 했던 사건은 주권 없는 국가가 열강에 어떻게 외면당하는지를 보여 준 비극이었다. 나아가 식민지 백성이 파리 만국박람회 ‘인종관’에 전시되어 서구인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했던 치욕의 역사는 제국주의 시대의 위계질서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로 취급받았는지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렇지만 우리나라가 G7 정상회의에 참관국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 파트너국으로 초청받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지난 80년간의 여정을 통해 국제사회의 변방에서 핵심 행위자 중 하나로 부상(浮上)했음을 명백히 보여 주는 증표다. 이러한 초청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修辭)를 넘어 전 지구적 공급망 재편, 기후 변화 대응, 기술표준 경쟁,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첨예한 안보 이슈를 논의하는 테이블에 한국이 정식으로 자리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나라도 국제질서의 주요 의제를 설정하고 그 방향성에 영향을 미치는 능동적 주체의 하나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글로벌 중추(中樞) 국가라는 위상은 달콤한 성취인 동시에 무거운 책무를 동반한다.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과정이 때로는 국익(國益)과 일정 부분 상충될 수도 있어서다. 과거 변방 국가로서 누렸던 ‘자유로운 방관자’의 특권은 이제 사라졌다. 특히나 우리의 가장 든든한 우방이었던 미국조차도 트럼프가 재집권하며 우리를 슬하(膝下)에서 밀어내고 그간 미뤄 둔 ‘청구서’를 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방 80주년을 맞는 우리가 마주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처럼 달라진 국가적 위상에 걸맞은 새로운 시대정신과 시민의식을 내면화하는 일이다. 수십 년간 우리 내면에 잠재해 온 피해자 의식과 약소국 콤플렉스를 과감히 떨쳐 내고, 세계 10위권 국가의 국민다운 주권적 의식을 갖춰야만 한다. 배곯던 아이는 이제 세계 무대에 선 어른이 됐다. 그러니 물질적 성장에 걸맞은 책임을 지는 정신적 성숙 또한 이룩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광복이 완성될 수 있다. 해방 후 80년간 바삐 걸어왔지만, 이제 우리는 ‘어떻게 더 성장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넘어 ‘어떤 국가로 기억될 것인가’라는 새로운 질문에 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