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 《주역》이라는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논어》라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사마천에게 깊은 영향
⊙ 역사를 보는 《논어》의 기본 원칙은 군군신신(君君臣臣)
⊙ 공자, 단순한 도덕을 뛰어넘는 거시적 역사관 제시
⊙ 사마천, 《사기》 열전에서 《논어》를 직간접으로 인용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역사를 보는 《논어》의 기본 원칙은 군군신신(君君臣臣)
⊙ 공자, 단순한 도덕을 뛰어넘는 거시적 역사관 제시
⊙ 사마천, 《사기》 열전에서 《논어》를 직간접으로 인용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그런데 《논어》 공부가 심화되면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되자 김종서를 보는 시각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실마리는 태백(泰伯) 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증자(曾子)의 말이다.
〈증자(曾子)가 말했다.
“육척 고아(임금)를 부탁할 만하고[可以託六尺之孤·가이탁육척지고] 사방 100리 나라를 맡길 만하고 대절(大節)에 임해서 (그 절개를) 빼앗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군자다운 사람일까? (진정) 군자다운 사람이다.”〉
증자의 이 말은 군자다운 신하의 등급을 열거한 것이다. 이 중 첫 번째가 “육척 고아(임금)를 부탁할 만하고”이다. 둘째는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지방관에 관한 언급이고 셋째는 비상사태에서 절의를 잃지 않는 의사(義士)나 열사(烈士)에 관한 이야기다.
이 중 첫 번째는 탁고지신(託孤之臣)이라고 하는데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죽고 열 살 남짓 된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주공(周公)이 정사를 보필하게 되었을 때가 바로 탁고지신의 임무를 부여받은 상황이다. 이 신하는 고아 신세인 임금을 충심으로 보필하고 왕위를 노리는 세력으로부터 어린 임금을 지켜내야 한다.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만고역적이 된다.
즉 탁고지신은 종묘에 배향되는 최고의 신하 사직지신(社稷之臣)보다 윗등급인 셈이다. 조선 시대만 놓고 보면 정도전(鄭道傳·1342~1398년)이 세자 방석을 부탁받은 탁고지신인 셈이었으나 방석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다음으로 김종서인데 그 또한 단종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리고 선조 말 영창대군을 부탁받은 유영경(柳永慶·1550~1608년) 또한 탁고지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탁고지신이 역사 서술에서 갖는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김종서를 끝까지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은 범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를 평가의 원칙으로 삼았다면 지금처럼 김종서를 무조건 훌륭한 인물로 여기는 우(愚)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를 보는 공자의 눈
《논어》는 이처럼 우리에게 역사를 제대로 보고 읽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원칙은 늘 그렇지만 군군신신(君君臣臣)이다. 그래서 난신(亂臣)에 대한 비판이 가열찬 것이다. 《논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위정(爲政) 편에서 자장(子張)이라는 제자가 벼슬을 구하는 법에 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많이 듣고서 (그중) 의심스러운 것은 제쳐놓고 그 나머지에 대해 신중하게 말한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고 많이 보고서 (그중) 타당하지 못한 것은 제쳐놓고 그 나머지에 대해 신중하게 행한다면 뉘우침이 적을 것이다.”〉
이는 진중한 처신의 문제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역사를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임을 알 수 있다. “신중하게 말한다면”과 “신중하게 행한다면”을 합쳐서 “신중하게 역사를 쓴다면”으로 고칠 수 있다.
같은 위정 편에서 다시 자장과의 대화다.
〈자장이 물었다.
“10왕조 이후의 일도 알 수가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은(殷)나라는 하(夏)나라 예(禮)를 이어받았으니 거기에서 덜어내고 더한 것은 알 수가 있고 주(周)나라는 은나라 예를 이어받았으니 거기에서 덜어내고 더한 것은 알 수가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주나라를 이어받는 나라가 있다면 설사 100왕조 뒤에라도 (그 예의 모습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공자는 팔일(八佾) 편에서 두 차례에 걸쳐 거시적인 역사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공자가 말했다.
“하나라 예를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지만 (하나라를 이어받은 은나라 제후국) 기(杞)나라가 충분히 징험해 줄 수 없고 은나라 예를 내가 능히 말할 수 있지만 (은나라를 이어받은 주나라 제후국) 송(宋)나라가 충분히 징험해 줄 수 없다.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문헌이 충분하다면 나는 능히 그것을 징험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주나라는 하 은 이대(二代)를 거울로 삼았다. 찬란하도다 그 문(文)이여! 나는 주나라를 따르리라.”〉
공자, “관중은 禮를 알지 못했다”
![]() |
| 관중 |
관중은 춘추 시대 제나라 영상(潁上) 사람이다. 이름은 이오(夷吾)이고, 자는 중(仲)이다. 가난했던 소년 시절부터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던 포숙아(鮑叔牙)와의 깊은 우정을 나눈 관포지교(管鮑之交)가 유명하다. 처음에 공자 규(公子糾)를 섬겨 노(魯)나라로 달아났다. 제 양공(齊襄公)이 피살당하자 공자 규와 공자 소백[公子小伯·환공(桓公)]이 자리를 두고 다투었는데, 실패하고 공자 규는 살해당하고 자신은 투옥되었다. 그때 포숙아는 소백 편에 섰는데, 그가 추천하자 환공이 지난날 원한을 잊고 발탁하여 경(卿)에 오르고, 높여 중보(仲父)라 불렸다. 제도를 개혁하고 국토를 효율적으로 구분했다. 도성 또한 사향(士鄕) 15군데와 공상향(工商鄕) 6군데로 나누고, 지방을 오속(五屬)으로 구획해 오대부(五大夫)가 나눠 다스리도록 했다. 염철관(鹽鐵官)을 두고 소금을 생산하면서 돈을 제조하게 했다. 이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상업과 수공업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했다. 대외적으로는 동방이나 중원의 제후와 아홉 번 회맹(會盟)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했고,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초(楚)나라를 누르려고 했다. 제 환공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이 되었다.
왜 이런 인물에 대해 공자는 “그릇이 작았다” “예를 알지 못했다”라고 비판한 것일까? 이는 그가 은근히 임금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던 마음을 품은 것에 대한 지적이다.
역사가 아니라 도덕교과서 추구하는 한국 역사학계
그러나 사람을 평가하는 공자의 시야는 훨씬 넓다. 이 시야가 바로 역사를 보는 시각이다. 헌문(憲問) 편에서는 어짊[仁]의 차원에서 관중을 이야기한다. 먼저 제자인 자로(子路)가 말한다.
“(제나라) 환공(桓公)이 공자 규를 죽였을 때 소홀(召忽)은 죽었는데 관중(管仲)은 죽지 않았습니다. (관중은) 어질지 못하다 하겠습니다.”
소홀과 관중 모두 공자 규의 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찌 보면 자로가 한 이 말은 전형적으로 유가(儒家)답다. 그러나 공자는 늘 그보다 넓고 깊게 바라본다. 공자의 답이다.
“환공은 제후들을 아홉 번 모으면서도 무력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관중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의 어짊만 하겠는가? 그의 어짊만 하겠는가?”
예(禮)가 아니라 인(仁)을 말했다는 것은 일의 이치[事理=禮]보다는 일의 형세[事勢=命]를 중시했다는 뜻이다. 정(正)보다는 중(中)을 중시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우리 역사학계는 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가 아니라 도덕교과서일 뿐이다.
《논어》의 知人之鑑
《논어》에서 사람을 보는 거울, 즉 지인지감(知人之鑑)은 고스란히 역사 속 인물을 재는 잣대가 된다. 《논어》에는 사람을 재는 몇 가지 흥미로운 잣대가 나온다. 그중 둘만 살펴보자. 자한(子罕) 편이다.
〈공자가 말했다.
“더불어 배울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 모두와) 더불어 도리를 행하는 데로 나아갈 수는 없으며, 또 더불어 도리를 행하는 데 나아간다고 해서 (그 사람들 모두와) 더불어 조정에 서서 일을 할 수는 없으며, 또 더불어 조정에 서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 모두와) 더불어 권도(權道)를 행할 수는 없다[可與共學未可與適道 可與適道未可與立 可與立未可與權].”〉
여학(與學), 여적(與適), 여립(與立), 여권(與權) 순으로 차례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여립(與立)이란 여립어조(與立於朝), 즉 조정에 함께 선다는 말이다. 즉 함께 조정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니 여의(與議)와 통한다. 그리고 이보다 높은 최고 단계가 바로 여권(與權), 즉 함께 권도를 행하는 사람이다. 다시 여립(與立)은 정(正), 여권(與權)은 중(中)이다. 기본적으로 신하는 정, 임금은 중인데 신하 중에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중을 발휘해야 하는 자리가 바로 재상 혹은 정승이다. 이 밖에 책사(策士) 또한 임금의 허락 범위 안에서 중을 발휘해야 하는 사람이다. 관중에 대한 높은 평가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직접 연관된 경우
태백, 요, 순, 양녕
《한서(漢書)》를 지은 반고(班固)와 비교하면 사마천이 《논어》를 활용한 빈도는 많지 않다. 그러나 사마천은 곳곳에서 적절하게 《논어》를 활용하여 역사 속 인물들을 평가하고 있다.
〈오태백 세가(吳泰伯世家)〉 태사공왈(太史公曰)에서 태백 편 첫 장을 인용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공자가 말했다.
“태백(泰伯)은 아마도[其] 지극한 다움[至德]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 천하를 사양하였으나 백성들은 그를 칭송할 수가 없다.”〉
〈세가〉에는 ‘아마도[其]’라는 말만 빠져 있고 나머지는 똑같다. 지덕(至德)은 막연한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보듯이 얼마든지 자기가 차지할 수 있는 왕의 자리를 스스로 사양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진심으로 사양하는 행위다. 그래서 ‘세 번’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순(舜)임금은 효(孝)라는 다움으로 요(堯)임금에게 발탁이 됐고 다시 그는 우왕(禹王)을 얻어 천하를 물려주었다. 이번에 잣대는 효라는 다움이 아니라 치수(治水)라는 공로였다. 하지만 우왕은 천하를 뛰어난 이를 얻어 물려주지 않고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할 때 태백 편 18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공자가 말했다.
“높고 높도다! 순임금과 우왕이 천하를 소유하면서 그 과정에 조금도 개입하지 않음이여!”〉
두 사람은 각각 요임금과 순임금에게 발탁되었다. 이 과정에서 천자가 되려고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사양할 줄 아는 지덕(至德)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임금이 되기 위해 움직였다면 순임금이나 우왕은 지덕하다고 할 수 없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충녕대군이 형 세자를 꺾어 임금이 되기 위해 움직였다면 고전을 꿰뚫고 있었던 태종은 충녕에게 임금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될 수 있는데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줄 아는 것이 바로 지덕이다.
이 때문에 태종은 세자에서 폐위된 이제(李禔)에게 군호를 내려주면서 양(讓)이라고 한 것이다. 나머지 두 형제는 효령(孝寧)이고 충녕(忠寧)이었다. 그리고 숙종 때 양녕사당을 지어 지덕사(至德祠)라고 하였다.
은나라 말기의 3현인
![]() |
| 미자 |
〈미자(微子)는 떠나갔고 기자(箕子)는 종이 되고 비간(比干)은 간언하다가 죽었다. 공자가 말했다.
“은(殷)나라에는 어진 사람 세 명이 있었다.”〉
그런데 〈송미자 세가〉에서는 공자칭(孔子稱)이라 하여 이 글 전체를 공자가 한 말로 처리하고 있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도 관중 때와 마찬가지로 역사 인물을 보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시대는 은나라 말기다. 주왕(紂王) 이복형 미자(微子)는 은나라를 떠나갔다고 한다. 그런데도 공자는 어진 사람 세 명 중에 미자를 포함시킨다.
미자는 어떤 사람인가? 이름은 계(啟)이며, 은나라 29대 제을(帝乙)의 장자(長子)로서 주왕 이복형이다. 어머니가 정후(正后)가 아니었기 때문에 왕위(王位)를 계승받지 못했으며, 미(微) 땅에 봉(封)해져 미자라고 불렸다. 주왕의 폭정(暴政)에 대해 미자는 여러 차례 간언(諫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자는 은나라 예악(禮樂)을 담당하는 태사(太師), 소사(少師)와 상의를 하여 아우인 자연(子衍)과 함께 은나라를 떠나 봉지 미(微)로 돌아갔다.
은나라가 멸망한 뒤 미자는 주(周) 무왕(武王)을 찾아가 투항하였다. 당시 미자는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왼손으로는 양(羊)을 끌고 오른손으로는 띠를 잡고 무릎을 꿇으며 은나라 종사(宗祀)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간청했다. 무왕은 미자의 청을 받아들여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은나라 도읍인 은(殷)에 봉하여 은나라 종사를 잇도록 했다. 그 후에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무왕 동생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섭정(攝政)이 되어 주나라를 통치하였다. 그러자 무경은 이에 불만을 품은 무왕의 다른 형제들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삼감(三監)의 난(亂)’이라고 하는데, 반란은 3년 만에 진압되었고 무경은 주살되었다. 주공은 반란을 진압한 뒤 옛 은나라 영역을 송(宋)과 위(衛) 둘로 나누었다. 이런 후 위에는 막냇동생인 강숙(康叔) 희봉(姬封)을 봉하여 은나라 유민(遺民)들을 통제하였고, 송에는 미자를 봉하여 은나라 종사를 잇도록 했다.
미자를 仁者로 보아야 하는 이유
이럼에도 일반 사람들의 눈높이로는 간언하다가 종이 된 기자(箕子)나 목숨을 잃은 비간(比干)과 달리 은나라를 떠나버린 미자는 인자(仁者)로 보기 어려울 수 있다. 사마천은 미자를 인자로 보아야 하는 이유를 상세하게 적고 있다.
〈미자가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다.
(주왕 대신) 조이(祖伊)는 주(周)나라 서백(西伯) 창(昌)이 다움을 닦고 기(杞)나라를 멸망시키자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서 이를 주왕에게 아뢰었다. 주왕이 말했다.
“내가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하늘이 나에게 명을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 사람이 나에게 무얼 어쩌겠는가?”
이에 미자는 주왕은 끝내 간언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여기고 죽으려 하다가, 떠나려고 마음을 먹은 뒤에는 능히 스스로 결정을 할 수가 없어 마침내 태사(太師·기자)와 소사(少師·비간)에게 가서 물었다.
“은나라는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해 사방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先祖·탕왕)께서는 위로 큰 공업을 이루셨지만 주왕은 술에 빠져 부인 말만 들으면서 아래로 탕(湯)의 덕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렸습니다. (그 결과) 은나라 사람들은 이미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할 것 없이 모두 초야에서 도적질을 하고 법을 어기며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고 왕실의 경사(卿士)들은 서로를 본받아가면서 법도를 지키지 않으니 모두가 죄를 짓고도 마침내 누구 하나 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도 이에 들고일어나 모두 서로를 적이나 원수처럼 여깁니다.
지금 은나라는 이에 나라의 법도가 무너져내려 마치 물을 건너려 하는데 나루터나 물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은나라가 드디어 망하려 하면서 지금에[越=於] 이르렀습니다.”
이러며 물었다.
“태사여, 소사여! 내가 이에 나가서 도망쳐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경대부들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대들이 알려줄 뜻이 없어 우리가 엎어져 무너진다면 어찌할 셈입니까?”
태사가 이렇게 말했다.
“왕자시여! 하늘이 엄중한 재앙을 내려 은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는데도 (주왕은)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늙은이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지금은 은나라 백성들도 마침내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지금 진실로 나라를 잘 다스려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진다면 몸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어도 끝내 다스려질 수 없다면 떠나는 것이 낫습니다.”
(미자는) 드디어 떠나갔다.〉
이처럼 사마천은 충실한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논어》에 함축된 의미를 풀어내기도 했다.
《논어》로 열전 이름을 정한 경우
〈유림열전〉을 둔 이유
사마천은 〈유림열전(儒林列傳)〉을 둔 이유를 《논어》를 끌어와서 풀어낸다. 태사공왈을 끝이 아니라 첫머리에 두어 왜 〈유림열전〉을 두었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말하노라. 아아! 저 주(周)나라 왕실이 쇠약해지자 ‘관저(關雎)’[註-《시경(詩經)》 첫 번째 시이다. 《논어》에서는 이 시를 평하여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고 짤막하게 표현하였다]가 지어졌고 (주나라)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이 쇠락하자 예악(禮樂)이 무너졌으며 이에 제후들은 마음대로 행동하였고 정령(政令)은 (천자가 아니라) 강한 제후국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왕도(王道)가 폐기되고 사도(邪道)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이에 《시경》과 《서경(書經)》을 차례대로 편술하고 예악을 정리하여 일으켰다. 공자는 제(齊)나라에 가서 소(韶)(註-순임금의 음악이다)를 듣고는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온 다음에는 음악을 바로잡으니 《아(雅)》와 《송(頌)》이 각기 제자리를 얻었다(註-이 문장은 그대로 《논어》에 나온다). 세상은 혼탁하여 누구도 공자를 능히 쓸 수가 없었으니 이 때문에 중니(仲尼)는 70여 임금을 찾아갔으나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말하기를 ‘만일 나를 써주는 임금이 있다면 한 달이면 성과를 낼 수 있다(註-《논어》에 나온다)’라고 했다. 서쪽 교외에서 사냥을 하다가 누군가가 기린을 잡았다고 하자 ‘내 도리는 다했구나’라고 했다.〉
〈순리열전〉과 〈혹리열전〉
이를 통해 유림이라는 학자 그룹이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확정한 것이다. 그리고 〈순리열전(循吏列傳)〉과 〈혹리열전(酷吏列傳)〉을 나란히 둔 까닭도 〈혹리열전〉 첫머리에 있는 태사공왈을 통해 밝힌다.
〈공자가 말했다.
“백성들을 정치 법령으로 이끌고 형벌로 단속하면 백성들이 처벌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다움으로 인도하고 예로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느껴서 더욱 바르게 된다.”〉
《논어》 위정 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를 통해 사마천은 가혹할 혹(酷)을 무엇보다 법을 각박하게 쓰는 정치에 한정시켰다. 참고로 공자는 《논어》 요왈(堯曰) 편에서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정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단계적으로 밝혔다.
“(미리) 가르치지 않고서 (죄를 지었다고) 죽이는 것을 잔학[虐]이라 하고, (미리) 경계하지 않고 결과만 책하는 것을 포악[暴]이라 하고 명령을 태만하게 늦추고서 기한을 재촉하는 것을 도적[賊]이라 하고 어차피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똑같은데 출납에 인색한 것을 창고지기[有司]라고 한다.”
혹리의 반대가 순리(循吏)이다. 법을 잘 지키며 백성들을 보호하는 관리를 말한다. 〈순리열전〉 첫머리에 있는 태사공왈에서 말한다.
“법령이란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한 것이고 형벌이란 백성들이 간사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막는 것이다. 문무(文武)(註-여기서 문은 법령, 무는 형벌을 가리킨다)가 갖춰져 있지 않을 때 선량한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행실을 닦는 것은 관리가 일찍이 법령을 어지럽게 집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직분을 받들고 이치를 따르면 실로 잘 다스려질 수 있는데 어찌 반드시 (형벌의) 위력과 가혹함[威嚴]이 필요하겠는가?”
위정 편에서 말한 덕정과 형정의 차이를 사마천의 시각에서 풀어내고 있다.
《논어》의 문장을 녹여 넣은 경우
‘有司’-시시콜콜한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다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하면서 곳곳에 공자 특유의 표현들을 적절히 녹여 넣어 글에 힘을 더하고 있다. 공자는 “출납에 인색한 것을 창고지기[有司]”라고 했다. 태백 편에서 증자도 같은 뉘앙스로 소소한 일에 구애되는 것을 ‘유사(有司)’라고 부르고 있다.
〈증자(曾子)가 큰 병에 걸리자 맹경자(孟敬子)가 병문안을 왔다.
증자가 말했다.
“새가 장차 죽으려 할 때면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때면 그 말이 좋다고 했소.
군자가 귀하게 여기는 도리 세 가지가 있으니 용모를 취할 때는 사나움과 거만함을 멀리하고 안색을 바로 할 때는 신실함에 가깝게 하고 말의 기운을 낼 때는 비루함과 도리를 어김을 멀리해야 합니다.
(이 밖에) 변두(籩豆·註-제사 때 쓰는 그릇)와 같은 제기를 다루는 일은 담당부서[有司]가 있습니다.”〉
사마천도 〈효무제 본기〉 태사공왈에서 이를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나는 천자를 따라 순수(巡狩)하며 천지의 여러 신과 명산대천에 대해 제사를 지냈고 봉선에도 참가했다. 수궁(壽宮)에 들어가서는 황제를 모시고 신에게 올리는 제문과 기도를 듣고서 방사와 사관(祠官)들의 말을 탐구했고 이에 물러나서는 예부터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해 순서대로 논술하여 제사와 관련된 안과 밖을 갖춰 볼 수 있게 여기에 갖추었다. 훗날의 군자들은 이를 통해 제사의 실상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제사 때 쓰는 시시콜콜한 조두규폐(俎豆珪幣)(註-조두는 희생을 올려놓는 도마 모양의 제기이고 규폐는 신에게 바치는 폐물이다)와 술을 따르는 세세한 예법에 관한 것들은 유사가 있다.”〉
즉 사마천 자신은 이런 시시콜콜한 일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음을 “유사가 있다”라는 말을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위정 편 “설사 100왕조 뒤에라도 (그 예의 모습을) 알 수가 있다”라는 표현을 본 바 있다. 원칙과 내용, 즉 문질(文質)을 함께 안다면 먼 미래의 일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알 수 있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이를 놓칠 사마천이 아니다. 아첨과 교태로 임금의 비위만을 맞추려 하는 자들을 다룬 〈영행열전(佞幸列傳)〉 태사공왈이다.
〈“심하구나!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수시로 바뀌는 것이. 미자하(彌子瑕)[註-위(衛)나라 영공(靈公)의 신하다. 그의 일은 《설원(說苑)》에 나온다. 미자하는 위나라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는 임금이 타는 수레를 몰래 훔쳐 타면 발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났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듣고서 밤에 달려가 그에게 알려주었다. 미자하는 제 마음대로 임금의 수레를 타고서 대궐을 나갔다. 임금이 이를 듣고서 훌륭하다고 여겨 말했다.
“효자로다. 어머니 때문에 발꿈치 자르는 죄를 범했구나!”
임금이 과수원에 놀라갔는데 미자하가 복숭아를 먹다가 맛이 달자 다 먹지 않고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말했다.
“나를 사랑해 좋은 맛마저 잊었구나.”
미자하의 용모가 쇠하자 그에 대한 임금의 애정도 식었다. 임금에게 죄를 짓자 임금이 말했다.
“이 자는 옛날에 일찍이 내 수레를 내 이름을 대고 속여서 탔고 또 일찍이 제가 먹던 복숭아를 나에게 먹게 했다.”
자하의 행동이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전에는 뛰어나다고 하더니 뒤에는 죄를 얻은 것은 사랑하고 미워함에 변화가 생겨난 때문이다]의 행적은 후세 사람에게 영행(佞幸)으로 총애를 받는 자의 운명을 충분히 살필 수 있게 해준다.
이 일은 설사 100세(世) 이후라도 같을 것임을 우리는 얼마든지 알 수 있다.”〉
《주역》과 《논어》
이 밖에도 유공(唯恐) 혹은 유공(惟恐)이라는 표현도 자주 활용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오직 이것만은 두려워해야 한다는 강조 표현이다. 유공(猶恐)이라고도 한다. 물론 《논어》에 등장하는 말이다.
〈공자가 말했다.
“배울 때는 도리에 미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고[學如不及] (도리에 미쳤으면) 오히려 그렇게 도달한 도리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지켜내야 한다[猶恐失之].”〉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다. 공자는 《주역》이라는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논어》라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사마천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