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사기》 읽기 ⑤

《사기(史記)》 열전(列傳), 두 배로 재미있게 읽는 법

세상의 부조리와 군주의 폭정을 고발하다

  •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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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이열전〉 〈굴원가생열전〉 통해 세상의 부조리함 탄식
⊙ 周 武王도 또 하나의 폭군으로 간주… 공자의 역사 해석에 반기
⊙ 〈순리열전〉 〈혹리열전〉의 대조 통해 漢 武帝 시대가 ‘폭정의 시대’였음을 폭로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백이·숙제의 죽음을 다룬 〈채미도〉.
사마천은 〈백이열전(伯夷列傳)〉을 70열전의 첫머리에 두었다. 왜 사마천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첫머리에 두었을까? 시기적으로 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사람들이니 은(殷)나라에서 주(周)나라가 건국되던 시기의 백이와 숙제가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사람들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 역사가이자 사상가인 사마천이 〈백이열전〉을 맨 앞에 두었을 리 만무하다.
 
  〈백이열전〉에서 백이와 숙제 두 사람의 행적을 서술하는 부분은 전체의 6분의 1도 안 된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이다. 아버지는 숙제를 (후사로) 세우고 싶어 했는데 아버지가 졸(卒·사망)하자 숙제는 백이에게 양보했다. 백이가 말했다.
 
  “아버지의 명이다.”
 
  드디어 (나라 밖으로) 달아나 떠나갔다. 숙제 또한 한사코 (왕으로) 서려 하지 않고 달아났다. 나라 사람들은 그 가운데 아들을 세웠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들을 잘 모신다는 말을 듣고서 아마 가서 귀의하려 한 것 같다. 드디어 거기에 이르렀을 때 서백은 졸했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나무 신주를 (수레에) 실은 채로 호(號·시호)를 문왕(文王)이라 하고서 동쪽으로 (은나라 마지막 천자) 주(紂)를 정벌(하려)했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은 채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이에 곧바로 전쟁을 한다면 이를 효(孝)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弑害)하는 것을 어짊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좌우에서는 (무기로) 쳐 죽이려 했다. 태공(太公)이 말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이다.”
 
  그들을 도와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무왕이 이미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자 천하는 주나라를 종주(宗主)로 삼았지만 백이와 숙제는 그것을 치욕스럽게 여겨 의리상으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숨어서 고사리를 뜯어 그것을 먹었다. 굶주리다가 장차[且] 죽음에 이르러 노래를 지었다.〉

 
 
  사마천이 ‘채미가’를 실은 이유
 
공자
  여기까지는 그 당시 전해 오던 이야기를 사마천이 잘 정리한 것이다. 이어 그는 《시경(詩經)》에는 실려 있지 않은 일시(逸詩)인 두 사람의 ‘채미가(采薇歌)’를 통해 백이와 숙제를 찬양했던 공자(孔子)를 향해 중대한 의문을 던진다.
 
  〈저 서산(西山)에 올라
  그곳 고사리를 캤네
  사나움으로 사나움을 바꾸고서도[以暴易暴]
  그 잘못됨을 모르는구나
  신농(神農) 우(虞·순임금) 하(夏·우왕)(의 도리) 돌연 사라졌으니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아 죽음뿐이도다
  명(命)이 쇠했구나!〉

 
  끝내 두 사람은 굶어 죽었다. 이에 사마천은 “이로 미루어 보건대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공자를 향한 질문이다. 《논어(論語)》에는 백이, 숙제의 원망 문제가 두 차례 나오는데 먼저 공야장(公冶長)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백이와 숙제는 구악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망함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때의 구악이란 대개 왕위 승계를 둘러싼 때의 일을 가리키기 때문에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의 일과는 무관하다. 이와 연관된 술이(述而)편에 나오는 자공(子貢)의 질문에 대한 공자의 대답이다.
 
  〈자공이 물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옛날의 뛰어난 사람이다.”
 
  “원망함이 있었습니까?”
 
  “어짊을 구하다가 어짊을 얻었으니 다시 무슨 원망함이 있었겠는가?”〉

 
  어짊을 구하다가 어짊을 얻었다는 말은 부자 사이에 그 분수를 다하고 형제 사이에 그 분수를 다하여 그 뜻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이를 공자는 무왕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하려 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 같은 적용에 다소 억지가 있다고 보아 질문을 던진 것이다. 실제로 “사나움으로 사나움을 바꾸고서도[以暴易暴] 그 잘못됨을 모르는구나”라는 대목은 무왕을 마찬가지로 임금 자리를 찬탈하는 또 하나의 폭군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사마천은 공자의 역사 서술 방식은 받아들이되 역사를 보는 시각은 달리함을 분명히 한 것이다. 주나라를 긍정하는 공자와 달리 폭정(暴政) 일반에 대한 비판 정신을 중시한 사마천의 역사관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과도 같은 도리라는 것이 이것인가 아닌가”
 
  사마천은 부조리(不條理)한 인간사에 깊은 회의(懷疑)를 던진다. 다시 〈백이열전〉이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하늘과도 같은 도리는 따로 사사로이 가까이함이 없고 늘 좋은 사람과 함께한다.”
 
  백이와 숙제의 경우 좋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어짊을 쌓고 행실을 깨끗이 하기를 이와 같이 했는데도 굶어 죽다니! 또 70 제자의 무리 중에서 중니(仲尼·공자)는 오직 안연(顔淵·안회)만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추천해 말했다. 그러나 회(回)의 경우에 누차 굶었고 술지게미와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했는데 결국 일찍 죽었다. 하늘이 좋은 사람에게 갚아주고 베푸는 바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도척(盜蹠)은 날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사람의 살을 회 쳐 먹었다. 사납고 거칠게 굴고 희번덕 부릅뜨고 노려보면서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천하를 휘젓고 다녔으나 끝내 수명을 다 마치고 죽었다. (그렇다면) 이는 무슨 다움[德]을 따른 것인가? 이는 그중에서도 더욱 크게 훤히 밝혀지고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예를 들어 근세(近世)에 이르러서는 행실이 도리에서 벗어나고 오로지 금하고 꺼려야 할 일만 골라가면서 어기는데도 종신토록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면서 부유함이 여러 세대에 걸쳐 끊어지지 않는 자들이 있다. (반면에) 어떤 이는 땅을 가려서 발로 딛고 때에 맞은 다음에야 입 밖으로 말을 내고 길을 갈 때는 샛길로 다니지 않으며 공적이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재앙이나 불행을 만난 경우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나는 심히 당혹스러우니 혹시라도 이른바 하늘과도 같은 도리라는 것이 이것인가 아닌가?〉

 

  이처럼 〈백이열전〉은 내용 대부분이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 사마천의 당혹감으로 가득하다. 이런 당혹감을 이해할 때 왜 그가 시대적으로 떨어져 있는 초(楚)나라 굴원(屈原)과 한(漢)나라 가의(賈誼)를 합전(合傳)하여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을 지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암군을 만난 굴원
 
굴원
  다음은 관련한 〈굴원가생열전〉의 대목이다.
 
  〈굴평(굴원–편집자 주)은 왕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데 귀 밝지 못해 헐뜯고 아첨하는 말이 군주의 눈 밝음을 가로막고 간사하고 왜곡된 말이 공정함을 해치며 반듯하고 바른[方正]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근심을 하며 깊이 생각에 잠겨 ‘이소(離騷)’를 지었다. 이소란 곧 근심에서 떠난다[離憂]는 뜻이다.
 
  무릇 하늘이란 사람의 시작이며 부모란 사람의 근본이다. 사람은 궁벽함에 이르면 근본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수고롭고 힘들어 피곤이 극에 이르면 일찍이 하늘을 향해 부르짖지 않는 자가 없고 질병과 고통으로 참담하게 되면 일찍이 부모를 향해 부르짖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이다. 굴평은 바른 도리에 따라 곧게 행동하고 진심을 다하며 모든 지혜를 바쳐 임금을 섬겼건만 중상모략하는 자의 이간질로 궁벽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고 진심을 다했으나 비방을 받게 되면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암군(暗君)에 대한 굴원의 원망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사마천에게 있어 군주에 대한 맹목적 복종이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이어 한나라 문제(文帝) 때 천재 가의를 말한다.
 
 
  좌천된 천재 가의
 
사마천
  〈이때 가생의 나이 20세 남짓으로 박사 중 최연소자였다. (하지만) 매번 불려 가 천자의 물음에 의견을 낼 때면 나이 많은 선생들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가생은 남김없이 다 대답했는데 그것도 사람들이 각자 마음속에 생각은 떠오르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까지도 다 명확하게 답했다. 여러 유생들은 이에 마침내 자신들의 재능이 가생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게 됐다. 문제는 이를 흡족히 여겨 등급을 뛰어넘어 1년 안에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게 했다.
 
  가생이 볼 때 한나라가 일어나 (효문제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 천하가 태평하니 마땅히 역법(曆法)을 고치고 복색(服色)과 제도를 바꿔 관직 이름을 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모든 분야에 걸쳐 의례와 법률의 초안을 만들었는데 색깔은 황색을 높이고 숫자는 5를 기준으로 삼으며 관직 이름을 모두 새롭게 만들어 위에 아뢰었다. (그러나) 문제는 겸손한 데다가 (즉위 초라)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렇지만 여러 법령들을 개정하고 또 열후(列侯)들은 각자의 봉국(封國)으로 나아가도록 한 것 등은 모두 가생이 발의한 것들이다. 이에 천자는 신하들과 상의해 가생에게 공경(公卿) 자리를 맡기려고 했다. 그러자 강후(絳侯), 관영(灌嬰), 동양후[東陽侯·장상여(張相如)], (어사대부) 풍경(馮敬) 등의 무리는 모두 가생을 싫어해 마침내 이렇게 가생을 헐뜯었다.
 
  “낙양 사람은 나이도 어리고 학문도 미숙한데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러 모든 일을 어지럽히려 하고 있습니다.”
 
  이에 천자는 뒤에 마찬가지로 그를 멀리하면서 그의 의견을 쓰지 않았고 마침내 가생을 장사왕(長沙王) 태부로 삼았다.
 
  가생은 이미 하직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서 떠나가는데 장사라는 곳은 지대가 낮고 습기가 많다는 말을 듣고서 스스로 자기 수명이 길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더구나 좌천을 당해 떠나가는 중이라 마음이 울적했다. 마침 상수(湘水)를 건널 때 부(賦)를 지어 굴원을 조문했다.〉

 
반고
  사마천은 이처럼 가의가 상수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삼아 굴원과 연결지은 것이다. 그러나 굴원의 불우함에 비한다면 가의는 아직 나이도 어렸고 원망을 품을 정도는 아니었다. 굴원과 가의 두 사람을 연결지은 사마천의 의도는 그의 ‘태사공왈’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내가 이소(離騷), 천문(天問), 초혼(招魂), 애영(哀郢)(이것들은 모두 굴원의 작품들이다)을 읽어보니 그 속뜻이 슬펐다. 장사(長沙)에 가서 굴원이 빠져 죽은 연못을 바라보고 일찍이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람됨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생이 굴원을 조문한 글을 읽어보니 기이하게도 굴원이 그만한 재능을 갖고서 다른 제후들에게 유세했더라면 어느 나라인들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스스로 이렇게 생을 마쳐버렸다. (그런데 가의의) 복조부(服鳥賦)를 읽어보면 그는 죽음과 삶을 한 가지로 보고서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가벼이 여겼으니 다시 마음이 맑아지기는 했지만[爽](註–《집해(集解)》 서광(徐廣)이 말했다. “판본에 따라 석(奭)으로 되어 있다.”) 나는 그러나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도다[自失=茫然自失]!”
 
  반고(班固)는 가의를 불우의 인물로 보는 사마천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한서(漢書)》 〈가의전(賈誼傳)〉 맺음말에서 반고는 이렇게 말했다.
 
  “가의는 타고난 수명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비록 공경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불우(不遇)했다고는 할 수 없다.”
 
  사마천의 해석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정통 보수(保守) 역사가 반고의 면모를 볼 수 있다.
 
 
  한 무제에 대한 사마천, 반고, 사마광의 각기 다른 시각
 
사마광
  중국의 젊은 역사학자 강붕(姜鵬)은 《혼군 명군 폭군》(김영진 옮김, 왕의 서재)이라는 흥미로운 저작을 발간, 한나라 무제라는 동일 인물에 대한 사마천, 반고, 사마광의 각기 다른 시각을 《사기》 《한서》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서술된 내용을 통해 소개하였다. 한마디로 사마천은 한 무제를 절묘하게 비판하며 미신을 숭상한 혼군(昏君)으로 보았고, 반고는 한 무제를 위대한 한나라 제국을 건설한 명군(名君)으로 보았으며, 사마광은 냉철하게 그를 깎아내리며 폭군(暴君)으로 보았다. 다만 이때 사마천은 무제와 동(同)시대 사람이었고, 반고는 후한(後漢) 초기 사람으로 한나라 역사를 매우 긍정적으로 본 사람이었으며, 사마광은 무제와 천 년 이상의 시간차가 있어 매우 비판적으로 본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를 강붕은 이렇게 비유했다.
 
  “한 무제를 하나의 명산(名山)으로 본다면 사마천은 산중에서 산속을 가장 진실하고 자세하게 보고 빠져나왔다고 할 수 있다. 반고는 서한(西漢)과 동한(東漢)의 교체기에 서서 서한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을 남긴 황제를 기술함에 마치 산 아래에서 산 전체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썼다고 할 수 있다. 그 산은 매우 웅장하게 보였을 것이다. 사마광은 한 무제 시대와 너무 차이가 나서 마치 다른 산 위에서 조망하듯이 기술했다. 옛 시(詩)에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의 교훈을 통해서도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의 목적을 적절하게 비유하고 있다.”
 
 
  급암의 말을 빌려 한 무제를 비판하다
 
  분명 사마천은 한 무제에 대해 원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군주제하에서 당대 역사를 쓰면서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곳곳에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급암(汲黯)이라는 사람의 입을 통해 자신의 뜻을 슬쩍 드러낸 것이 대표적이다. 〈급암 정당시 열전(汲鄭列傳)〉
 
  〈천자는 바야흐로 문학(文學·유학)하는 유자들을 불러놓고 말하기를 나는 이러저러하고자[云云](註–《집해》 장안(張晏)이 말했다. “말한 바는 어짊과 의로움[仁義]을 베풀고 싶다는 것이다.”) 한다고 하였다. 급암이 대답해 말했다.
 
  “폐하께서는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시면서 겉으로는 어짊과 의로움을 베푸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야 어찌 요(堯)임금과 순(舜)임금[唐虞]의 다스림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상은 아무 말 없이 화가 나서 낯빛까지 바뀌더니 조회(朝會)를 끝내버렸다. 공경(公卿)들은 모두 급암을 걱정하였다. 상은 조정을 나서면서 좌우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심하구나, 급암의 꽉 막힌 우매함이여!”
 
  여러 신하들이 간혹 급암을 꾸짖으면 급암은 이렇게 말하였다.
 
  “천자께서는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두어 보필하는 신하로 삼으셨는데 어찌 아첨하여 천자의 뜻만 따라 하면서 폐하를 옳지 못한 지경에 빠지게 하겠소? 또 그런 지위에 있는 이상 비록 자기 몸을 희생시키더라도 조정을 욕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인의(仁義)를 굳이 ‘운운(云云)’으로 표현한 데서 사마천의 마음이 생생하게 와닿지 않는가? 여기서 급암의 말은 고스란히 사마천의 속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한 무제 정치에 대한 우회 비판
 
한 무제
  사마천은 〈굴원가생열전〉처럼 합전을 통해 자기 뜻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순리열전(循吏列傳)〉과 〈혹리열전(酷吏列傳)〉이라는 대비를 이루는 두 열전을 통해서도 자기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순리(循吏)와 관련해서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법률을 받들고 이치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관리들은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능력을 뽐내지 않는다. 백성들이 그들을 칭찬하는 일이 없지만 스스로도 잘못된 짓을 하지 않는다.”
 
  〈순리열전〉에는 모두 5명이 소개되어 있다. 춘추시대 초나라 손숙오(孫叔敖), 정(鄭)나라 자산(子産), 노(魯)나라 공의휴(公儀休), 초나라 재상 석사(石奢), 진(晉)나라 문공 때의 옥관(獄官) 이리(李離)가 그들이다. 진한(秦漢)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특히 한나라 사람을 한 명도 꼽지 않은 것에서 사마천의 비판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런 비판 의식은 〈혹리열전〉에서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이를 숨길 의도에서였는지 사마천은 〈순리열전〉 바로 뒤에 〈혹리열전〉을 붙이지 않고 그사이에 〈급정열전〉과 〈유림열전(儒林列傳)〉을 두어 마치 둘의 대비 효과를 최대한 줄이려 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반고는 물론 《한서》가 한나라 역사서였기 때문이겠지만 〈순리전(循吏傳)〉에서 유방 때의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문제와 경제(景帝) 때의 하남태수 오공(吳公)과 촉군태수 문옹(文翁)을 순리로 꼽았다. 무제 때는 “강도 재상 동중서(董仲舒)와 내사(內史) 공손홍(公孫弘), 예관(倪寬)만이 봐줄 만한 관리였다”고 말한다. 즉 무제 때에도 순리가 없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반고는 〈순리전〉과 〈혹리전〉을 바로 이어서 배치했다는 점에서도 사마천과 달랐다.
 
 
  〈혹리열전〉 통해 무제 시대 고발
 
  사마천은 〈혹리열전〉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은 혹독한 법령에 있는 게 아니라 도덕에 있다”고 선포하며 혹리들을 향한 비판의 포문을 연다. 이는 공자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논어》 위정(爲政)편이다.
 
  〈공자가 말했다.
 
  “(백성을) 법령으로만 이끌고 형벌로만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은 법망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백성을) 다움[德]으로 이끌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부끄러움이 있게 되고 또한 (감화되어) 바르게 된다.”〉

 
  사마천의 비판 방향은 고후(高后) 때의 후봉(侯封), 경제 때의 조조(鼂錯), 질도(郅都)를 제외하면 10명 가까이가 모두 무제 때의 혹리들이다. 이는 무제 시대가 백성들에게는 폭정(暴政)의 시대였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핵심 인물은 장탕(張湯)이다. 그에 대한 사마천의 묘사가 문학작품에 가까울 정도로 생동감을 주는 것은 그의 각박함, 잔혹함을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장탕(張湯)은 두(杜) 땅 사람이다. 아버지는 장안(長安) 승(丞)이었는데 하루는 외출을 하고 어린 장탕이 집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와서 쥐가 고기를 훔쳐간 것을 알고 노하여 탕에게 회초리를 들었다. 장탕은 구멍을 파고 연기를 피워 훔쳐간 쥐와 먹다 남은 고기를 찾아내고서 쥐를 탄핵하여 매질을 하고 영장을 발부하여 심문하고는 문서로 기록하고서 논고하는 절차를 밟아 쥐를 체포하고 고기는 압수하고 판결문을 갖춘 다음에 대청 아래에서 사지를 찢어 죽이는 책형을 시행하였다. 아버지는 이 광경을 목도하고서 아들이 작성한 판결문을 읽어보았더니 노련한 옥리(獄吏)가 작성한 듯하여 크게 놀라서 드디어 판결문 작성법을 익히도록 하였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탕은 장안의 관리가 되어 오랫동안 일하였다.〉
 
 
  장탕이 무제를 섬기는 모습
 
장탕
  무제를 섬기며 일할 때의 장탕의 모습을 사마천은 이렇게 묘사했다.
 
  〈이 무렵 상이 바야흐로 유학에 관심을 두자 장탕은 중대 사건을 판결할 때면 유학 경전의 뜻에 부합하고자 하여 마침내 박사(博士) 제자(弟子)들을 청해 《상서(尙書)》와 《춘추(春秋)》에 정통한 자를 가려 정위(廷尉)의 사(史)로 삼아 의심스러운 법령들을 바로잡았다. (논란이 되는 안건을 올릴 때에는) 반드시 미리 먼저 상을 위해 그 사안의 근원들을 나눠서 밝혀놓은 다음에 (그중에서) 상이 옳다고 하는 바를 받아들여 그것을 판결의 원안(原案)으로 삼고 이를 정위의 판례에 분명하게 기록해 둠으로써 주상의 눈 밝음을 드높였다.
 
  아뢴 안건이 꾸지람을 받을 경우 탕은 즉각 사죄하고서 상의 뜻이 가는 쪽을 따랐는데 (이럴 때에는) 반드시 정(正) 감(監) 연(掾) 사(史) 등의 속관(屬官)들 가운데 뛰어난 자를 끌어들여 말하기를 “진실로 신을 위해 그들이 낸 의견은 상께서 신을 꾸짖으신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아 어리석게도 이런 과실을 범하게 됐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장탕은 언제나 잘못된 보고로 인한 죄를 용서받았다. (반대로) 안건을 아뢰어 상이 이를 좋다고 할 경우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이 아뢴 바를 잘 알지 못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정 감 연 사 아무개가 작성한 것입니다.”
 
  그가 부하들을 천거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들의 좋은 점을 내세우고 허물을 숨겨주려 한 것이 이와 같았다. 관련 사안에 대해 상의 뜻이 죄를 주려는 쪽에 있으면 (탕은) 감이나 사 중에서 아주 심하게 벌주는 자에게 맡겼고, 상의 뜻이 풀어주려는 쪽에 있으면 감이나 사 중에서 가볍고 공평하게 처리하는 자에게 맡겼다. 다루는 사안이 힘센 자와 관련된 것이면 법조문을 교묘하게 적용하여 반드시 죄를 들춰냈고 하층민에다가 파리하고 힘없는 백성인 경우에는 때를 살펴 (상에게) 구두로 이렇게 말했다.
 
  “조문에 따르면 법에 걸리지만 상께서 재량껏 잘 살펴주십시오.”
 
  이에 (상은) 자주 탕의 말을 들어주었다.〉

 
  장탕은 모함에 걸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마천은 〈평준서(平準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탕이 죽었는데 백성들 중 누구도 그를 애도하지 않았다[不思].”
 
  역사 평가의 잣대를 백성에 두었던 사마천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이처럼 백성을 괴롭힌 혹리에 대한 사마천의 비분강개는 혹리 왕온서(王溫舒)를 평할 때 더욱 절절하게 드러난다.
 
 
  혹리 왕온서
 
  〈왕온서는 평소 광평군에 있을 때에도 하내군의 토호 집안과 간사한 집안을 다 알고 있었는데 그가 부임했을 때는 9월경이었다. 군(郡)에 영(令)을 내려 개인 소유의 말 50필을 차출하여 하내군(河內郡)에서 장안(長安)에 이르는 각 역에 배치하였고(譯註–천자와의 통신을 신속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부하들에 대해서는 광평군에서와 같은 방략을 써서 군내의 토호나 교활한 자들을 잡아들였는데 군내에서 이들과 연좌된 호족이 1000여 가구였다.
 
  글을 올려 청하기를 “죄가 큰 자는 처벌이 일족에게 미치게 하고 죄가 작은 자는 당사자만 죽인 다음 그들의 가산(家産)을 모조리 거둬들여 그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자들에게 변상토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글을 아뢴 지 2~3일도 지나지 않아 그리하라는 허락을 얻었다. 이에 따라 논보(論報)하니 처형된 자들이 흘린 피가 10여 리까지 흘렀다. 하내의 백성들은 모두 그가 아뢰는 글이 귀신처럼 빠른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12월이 다 갈 무렵이 되자 군(郡) 안에서는 (온서에 대한) 원성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감히 밤에 나다니는 자도 없어졌으며 들판에는 개를 짖게 하는 도둑들도 사라졌다. 어쩌다가 잡지 못하여 이웃의 군국(郡國)으로 달아나 버린 도둑들은 거기까지 가서 잡아왔다. 때마침 봄이 되자 온서는 탄식하며 말했다.
 
  “아! 겨울을 한 달만 더 늘릴 수 있다면 나의 일을 다 처리했을 텐데!”(註–사형은 겨울에만 집행할 수 있었다.)
 
  그가 사람을 죽이고 주벌(誅罰)하기를 좋아하여 위세나 부리면서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천자는 이 소식을 듣고서 그를 유능하다고 여겨 승진시켜 중위(中尉)로 삼았다.〉

 

  자연스럽게 천자의 눈 밝지 못함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리고 왕온서가 기병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또 다른 간사한 일로 이권에 개입했다 발각돼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두 동생과 양쪽 사돈 집안까지 멸족을 당하니 광록(光祿) 서자위(徐自爲)의 입을 빌려 이렇게 개탄한다.
 
  “슬픈 일이로다! 무릇 옛날에는 삼족을 멸하는 형벌이 있었을 뿐인데 왕온서의 죄는 동시에 오족(五族)을 멸하는 데에 이르렀도다!”
 
 
  “이런 자들을 어찌 다 열거할 수 있으랴”
 
  태사공왈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 밖에도 촉군태수 풍당(馮當)은 포악하게 사람들을 학대하였고, 광한군(廣漢郡) 이정(李貞)은 제멋대로 사람들의 사지를 찢었으며, 동군(東郡) 미복(彌僕)은 톱으로 사람 목을 자르고, 천수군(天水郡)의 낙벽(駱璧)은 범인을 망치로 쳐서 자백을 강요하였고, 하동군(河東郡) 저광(褚廣)은 함부로 백성을 죽였으며, 경조(京兆)의 무기(無忌)와 풍익(馮翊)의 은주(殷周)는 흉악하기가 살모사나 매와 같았고, 수형도위(水衡都尉) 염봉(閻奉)은 범인을 방망이로 구타하다가 뇌물을 바치면 죄를 용서해 주었다. 이런 자들을 어찌 다 열거할 수 있으랴! 이런 자들을 어찌 다 열거할 수 있으랴!”
 
  이 비분강개함이 실은 한 무제를 향한 것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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