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서 가장 맛있는 물 중 하나와 고가네센간(黃金千貫) 고구마로 빚은 미야자키 기리시마주조의 쇼추
⊙ 맥주 후발 주자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 천연수와 독일·체코에서 들여온 홉으로 승부수
⊙ 天孫 강림의 땅 미야자키, 가토 기요마사의 구마모토, 征韓論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쓰마
牟鍾赫
1971년생. 중국정법대학 경제법학과 / 한국 투자기업 노무관리 컨설턴트, 중국문제 기고가, 방송 VJ·PD, 취재 코디네이터로 활동 / 저서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웹소설 《七天的愛在新疆》(중국어)
⊙ 맥주 후발 주자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 천연수와 독일·체코에서 들여온 홉으로 승부수
⊙ 天孫 강림의 땅 미야자키, 가토 기요마사의 구마모토, 征韓論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쓰마
牟鍾赫
1971년생. 중국정법대학 경제법학과 / 한국 투자기업 노무관리 컨설턴트, 중국문제 기고가, 방송 VJ·PD, 취재 코디네이터로 활동 / 저서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웹소설 《七天的愛在新疆》(중국어)

- 아오시마신사로 가는 길, 썰물에 모습을 드러낸 도깨비 빨래판.
구마모토 기차역에 도착하니 구마모토의 마스코트인 구마몬(くまモン)이 맞아 주었다.
구마몬의 탄생은 신칸센과 관련이 있다. 규슈 신칸센의 종착역이 가고시마(鹿兒島)로 정해지면서, 구마모토현은 신칸센이 그냥 통과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구마모토를 바깥에 홍보할 마스코트를 구상했다. 그렇게 해서 도시 이름 ‘구마(熊)’를 원용하고 사투리로 사람인 ‘몬’을 더해서 구마몬이 탄생했다.
구마몬은 2010년 처음 공개된 직후부터 일본 지방 캐릭터 그랑프리에서 1위를 차지했다. 또한 오늘날까지 최고의 마스코트로 손꼽힌다. 굿즈 왕국답게 인형, 학용품, 옷, 과자, 사탕 등 수많은 관련 상품을 팔고 있다. 구마몬 캐릭터를 붙인 술까지 개발했다. 구마모토현이 지역 주민에게 저작권료를 받지 않고 라이선스를 주어 상품화를 권장한 덕분이다. 구마모토 기차역에는 다양한 캐릭터 상품을 파는 매장이 성업하고 있고, 역무원 복장을 하거나 우체통 위에서 편지를 들고 있는 등 곳곳에 구마몬이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와 구마모토성
구마모토 기차역에서 노면전차를 타고 구마모토성으로 갔다. 구마모토성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축조했다.
가토는 어릴 때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의탁되어 자랐고, 혈연관계로 얽혀 있었다. 성인이 되자 가토는 도요토미가 아끼는 무장(武將)이 되어 큰 공을 세웠다. 이에 1591년 도요토미는 가토를 구마모토로 전봉(轉封)시켜 다이묘(大名)로 삼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로 진군한 가토는 선조의 아들인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주로 경상도에 머물면서 조선을 짓밟았고 울산왜성을 쌓았다.
울산왜성은 태화강 옆에 위치하여 배로 일본에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성을 축조하는 데 필요한 장비를 가져와서 견고히 쌓았다. 그 덕분에 가토는 1598년 1월과 10월에 이어진 조선군과 명군의 연합 공격을 막아 냈다. 비록 승리는 했으나 가토는 끔찍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으로 돌아간 가토는 구마모토성을 쌓으면서 울산왜성의 경험을 녹여 넣었다. 성 안팎의 모든 공간에 먹을 수 있는 작물을 심었고, 우물을 120개나 조성했다. 1601년부터 축조한 성은 1607년에 완성됐다. 일설에 따르면 조선에서 포로로 잡아온 조선인들을 축조 공사에 동원했다고 한다.
세이난전쟁 당시 정부軍 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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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마모토성 천수각. 1960년 복원한 것이다. |
1632년 호소카와 다다토시(細川忠利)가 새 다이묘로 임명되어 구마모토번(藩)을 이끌었다. 구마모토성을 오늘날처럼 완성한 이도 호소카와다. 그 뒤 구마모토성은 지진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파괴됐으나 호소카와 가문에 의해서 재건되기를 반복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인 1877년 세이난(西南)전쟁이 발발하자, 정부군은 구마모토성을 거점으로 농성전에 들어갔다. 반란을 일으킨 사쓰마(薩摩)군은 구마모토성을 포위한 뒤 50여 일 동안 치열한 공성전을 벌였으나 점령에 실패했다. 결국 정부군의 지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사쓰마군은 물러났다. 전투 중 천수각(天守閣), 혼마루고텐(本丸御殿) 등 대부분 건물이 소실됐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천수각은 1960년에 콘크리트로 복원한 것이다. 1998년부터는 성 전체의 복원 정비사업을 진행했다.
그 와중에 2016년 지진이 일어나 천수각 등 건물과 성곽 일부가 다시 파괴됐다. 2021년 천수각 복구는 완료됐으나 다른 건물과 성곽은 여전히 보수 중이다. 필자가 찾았을 때도 성 곳곳이 공사판이었다.
이렇듯 우리와 깊은 인연으로 얽혀 있는 구마모토성이기에, 긴 시간 동안 머물면서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산토리의 프리미엄 몰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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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마모토공장 내 시음장에서 산토리 맥주를 따라 주는 직원. |
본래 산토리는 경쟁사인 아사히(朝日)나 기린(麒麟)에 비해 맥주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졌다. 아사히는 오랜 시간 일본 맥주시장에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했고, 기린은 일본 최초의 맥주회사라는 상징성이 컸다. 또한 아사히는 엄청난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는 ‘슈퍼드라이’를 갖고 있다. 기린은 ‘이치방 시보리(一番搾り)’와 함께 맥아를 전혀 쓰지 않으면서 맥주 맛을 내는 알코올 음료로 소비자를 사로잡고 있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산토리가 절치부심해서 내놓은 제품이 알코올 도수 5.5%인 ‘프리미엄 몰츠’다.
프리미엄 몰츠는 싹이 균일하게 튼 보리만 골라 사용한다. 쓴맛과 향을 내는 재료인 홉은 전량 독일의 할러타우와 체코의 사즈 종(種)을 공수해 온다. 현지 농장에서 엄격한 평가를 거쳐 통과한 홉만 선택한다. 게다가 일체의 화학적인 처리를 거치지 않은 천연수를 찾아 사용한다. 제조 과정에서 맥아즙을 2번 끓이고 향을 내는 홉을 첨가하는 시점도 타사(他社)와 달라 독특한 맛을 낸다. 이런 차별화를 통해 프리미엄 몰츠는 홉의 향이 진하고 쓴맛이 강하며 맛의 여운이 오래 남는 특징을 갖고 있다.
야마사치히코와 진무천황
일본 고대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신화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天照)가 지상을 다스리고자 손자인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에게 명을 내렸다. 니니기노미코토가 하늘에서 내려와 닿은 곳이 히무카(日向·미야자키의 옛이름)다. 니니기노미코토는 산과 땅의 신인 오오야마쓰미(大山祇)의 두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중 고노하나노사쿠야히메(木花開耶姬)와 사이에서 호데리노미코토(火照命), 호스세리노미코토(火須勢理命·火闌降命),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尊) 세 아들을 낳았다.
불이 활발하게 타고 있을 때 태어난 호데리노미코토는 우미사치히코(海幸彦)라고도 부른다. 불이 사라졌을 때 태어난 막내인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는 야마사치히코(山幸彦)라고도 부른다. 이름처럼 우미사치히코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야마사치히코는 산에서 사냥을 하는 특기를 갖게 됐다. 후일 야마사치히코는 우미사치히코와의 싸움에서 승리해 그를 복종시키고 히무카를 통치했다. 야마사치히코의 손자가 일본 최초의 천황인 진무(神武)천황이다.
이런 우미사치히코와 야마사치히코 신화가 깃들어 있는 곳이 미야자키(宮崎)현 아오시마(靑島)다. 따라서 아오시마신사에서 우미사치히코와 야마사치히코를 모신다.
도깨비 빨래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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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최초의 천황인 진무천황을 모시는 미야자키신궁. ‘신사’보다 격이 높은 ‘신궁’이다. |
도깨비 빨래판과 아오시마신사는 썰물일 때는 섬처럼 변한다. 도깨비 빨래판은 섬 주변을 8km 정도 둘러싸며 펼쳐져 있다. 바닷물이 빠져나가 해수면이 가장 낮아졌을 때 도깨비 빨래판의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는데, 필자가 찾은 시간대가 그러했다.
미야자키는 천손(天孫)인 니니기노미코토가 강림한 땅으로 예부터 일본에서 아주 중요시됐다. 또한 규슈의 동쪽 끝으로 태평양에 연해 일출을 가장 먼저 맞이한다. 신화에 따르면 진무천황은 미야자키를 떠나 지금의 나라(奈良)인 야마토(大和)를 정복하고 도읍지로 삼아 일본을 세웠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일본에서 천손 사상이 깃들어 있는 천황가의 원류(源流)로 관심을 받아 왔다. 미야자키시 도심에 세워진 미야자키신궁(神宮)은 진무천황과 그의 부모를 모시는 신사로, 고대부터 천황가 사람들이 자주 찾았다.
일본에서 가장 맛있는 물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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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리시마주조 시음장에서는 5종류의 기리시마 쇼추를 맛볼 수 있다. |
기리시마주조는 1916년에 에나쓰 요시스케(江夏吉助)가 가와토에나쓰(川東江夏)상점을 창업하면서 시작됐다. 처음부터 쇼추 술도가였는데, 브랜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33년에 ‘기리시마’를 상표 등록했다. 기리시마는 미야자키현과 가고시마현에 걸쳐 있는 기리시마긴코완(霧島錦江灣) 국립공원에서 따왔는데, 기리시마주조가 그 밑자락에 위치한 데서 착안했다. 1949년에 회사 이름을 지금처럼 바꾸었다.
1955년은 기리시마주조에 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최신식 천공 기술을 사용하여 천연 지하수맥을 발견한 것이다.
물은 술을 빚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기리시마긴코완 국립공원의 지하수맥은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다양한 지층을 통과하면서 150m 지점에 형성된 차갑고 맑은 물이다. 양이 40억 톤에 달한다. 무엇보다 적정량의 미네랄과 탄산가스가 함유되어 있고 철 성분은 없다. 따라서 물맛이 부드럽고 효모 배양에 이상적이라서 쇼추를 빚기에 적합하다. 기리시마주조는 이 천연 지하수를 쇼추 제조에 사용했다. 또한 일본 후생성이 검증하는 일본에서 가장 물맛이 좋은 32개 물 중 하나로 인증받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리시마주조는 1965년부터 국립공원 주변의 농가에서 수확되는 고가네센간(黃金千貫) 고구마로 쇼추를 빚는 실험을 시도해 성공했다. 고가네센간은 햇살을 많이 받고 자라 다른 고구마보다 알이 굵고, 녹말 성분이 많아 맛이 좋고 달콤하다. 따라서 고구마 품종 중 쇼추를 빚는 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지역 농가의 수입을 증대할 수 있었다.
고구마 쇼추는 어떻게 빚을까? 먼저 기본 원료인 쌀을 찌고 식힌 뒤 곰팡이를 배양한다. 이때 적절한 환경과 온도를 갖추어야 한다. 배양한 곰팡이를 탱크에 넣고 물과 효모를 더해서 1차 발효에 들어간다. 그사이 농가에서 수확해 가져온 고가네센간을 선별한다. 엄선한 고구마는 91도까지 찐다. 이를 다른 탱크에 넣고 물을 더해서 2차 발효에 들어간다. 이렇게 발효가 끝난 두 원료를 증류기에 넣고 지속적으로 섞으며 좋은 쇼추를 증류해 낸다. 이를 일정 기간 숙성시켜 완성한다.
사쓰마와 시마즈 가문
1854년 에도막부는 매슈 페리 제독이 이끌고 온 미국 구로후네(黑船) 함대의 포함(砲艦) 외교에 굴복, 미일 화친조약을 맺었다. 이어 1858년에는 미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는데, 일본에게 불리한 불평등조약이었다. 일본은 유럽 나라들과도 같은 조약을 맺었다. 그 여파로 막부의 권위는 실추했고, 전국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벌어졌다. 유명무실하게 존재하던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배격하자는 것이다. 그 중심이 된 것이 조슈(長州)와 사쓰마였다. 조슈는 오늘날 야마구치(山口)현, 사쓰마는 규슈의 가고시마현이다.
사쓰마는 가마쿠라(鎌倉)막부 이래 시마즈(島津) 가문이 다이묘를 계속 맡아 통치했다. 이미 전국시대에 주요 다이묘 중 하나로 군대가 강성했다. 또한 1609년에는 류큐(琉球)왕국을 정복해서 조공을 받아 경제력이 커졌다.
사실 사쓰마는 가고시마시 앞의 사쿠라지마(櫻島) 화산을 품고 있어, 토양이 물이 잘 빠지는 화산재 성분이라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다. 사쿠라지마 화산은 해발 1117m인데 지금도 수시로 활동하는 활화산으로 유명하다. 분화가 일어나면 연기가 수천m까지 솟아오른다.
그렇기에 사쓰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밭농사와 어업, 밀무역이 주된 경제원이었다.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몰래 들여와 경작한 담배, 고구마 등이 지역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이런 토대 위에 사쓰마는 세력을 키워 나갔다. 19세기 시마즈 가문은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1851년에 다이묘가 된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1809~1858년)의 행보가 두드러졌다. 서구 과학기술을 적극 도입해 공장을 짓고 증기선 군함을 건조하는 등 군비 확장에 힘썼다. 또한 양녀를 막부의 쇼군(將軍)에게 시집보내 중앙정치에도 관여했다.
규슈의 관광열차
관광열차는 자주 운행하지 않기에 사전에 발권받아야 하며 당일 구입은 불가능하다. 필자가 이곳을 여행할 때는 여름방학 기간중이어서 이부스키노 다마테바코의 가장 좋은 좌석은 이미 자리가 없었다. 그나마 바다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좌석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덕분에 이부스키 여행과 함께 이부스키노 다마테바코의 경험이 깊은 추억으로 남았다. 다만, 이부스키노 다마테바코의 객차 외형은 일반 전철과 다를 바 없다. 반면에 유후인노모리는 특색 있는 겉모습과 높은 좌석이 인상적이었다. 필자는 JR 규슈 레일패스 7일권으로 일본의 다채로운 기차 여행을 톡톡히 즐겼다. |
메이지유신과 사이고 다카모리
구로후네 사건 이후 사쓰마에서는 존왕양이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사쓰마가 막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밀무역으로 성장했고, 반골(反骨) 기질이 강한 사무라이(侍)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시마즈 가문은 존왕양이파를 탄압했지만,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하급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한 도막파(倒幕派) 세력이 사쓰마의 실권(實權)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1828~1877년)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1878년)였다. 결국 도막파는 조슈와 삿초(薩長)동맹을 맺어 에도막부를 붕괴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사쓰마의 도막파는 메이지유신 이후 중앙 정계와 군대에 대거 진출했다. 하지만 한반도를 정벌하여 일본의 국력(國力)을 배양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을 둘러싸고 1873년 정변이 일어나서 사이고가 낙향했다. 사이고는 그를 따르는 사무라이들을 이끌고 1877년 세이난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중앙 정계에 진출한 오쿠보를 중심으로 한 다른 사쓰마 출신들은 반란 진압에 적극 나섰다. 결국 반란은 실패하고 사이고는 할복자살했다. 그 후에도 사쓰마 출신은 정계와 군대의 요직을 계속해서 차지할 수 있었다.
오늘날 가고시마현에서는 세이난전쟁과 사이고를 옹호하는 여론이 강하다. ‘반란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실상 근대 일본의 첫 총리인 오쿠보, 그리고 조슈 출신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1833~1877년)와 함께 ‘유신 삼걸(三傑)’로 꼽힌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사쓰마는 서구 과학기술과 대중문화를 도입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일찍부터 궤도를 부설하여 노면전철을 운행했고, 가고시마시 중심가인 덴몬칸(天文館)은 규슈 남부 최대의 번화가로 성장했다.
중국 白酒와 사쓰마의 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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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쓰마무소에서는 쇼추를 빚는 작업장을 직접 볼 수 있다. |
기원이 정확하지 않지만, 쇼추는 중국의 증류주 기술이 오키나와(沖繩)에 있던 류큐왕국을 거쳐 전해졌다고 본다. 수수와 밀로 증류주를 빚는 중국 북부와 달리 남부는 쌀을 원료로 술을 빚었다. 이를 중국에서는 ‘미향형 바이주(米香型白酒)’라고 부른다. 하지만 미향형 바이주는 고체 발효제인 소곡(小麯)을 사용하는 점이 일본 쇼추와 전혀 다르다. 누룩을 발효시켜 고체로 만드는 기술은 중국만의 전매특허다. 이에 반해 쇼추의 누룩은 쌀을 찌고 식힌 뒤에 적절한 환경을 맞춰서 발효시킨다. 사쓰마무소의 쇼추도 마찬가지다.
증류한 이후 술을 숙성시키는 방식도 양국이 약간 다르다. 중국은 증류한 바이주를 항아리에 담아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지하나 동굴에서 적어도 1년 이상 숙성시킨다. 그에 반해 사쓰마무소가 생산하는 쇼추는 보급형은 스테인리스 탱크에 넣어 급속 숙성시키고, 고급형은 참나무 통에 넣어 천천히 숙성시킨다. 그리고 숙성 과정에서 약간의 효모를 첨가하는 중국과 달리, 사쓰마무소는 각기 다른 탱크나 통의 술을 서로 혼합해 사쓰마무소만의 맛과 향을 만들어 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