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侖世
1955년생.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現 한국고전번역원) 졸업 / 現 ㈜인산가 회장, 《인산의학》 발행인, 전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월간조선》 명예기자 / 저서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네》 《자연치유에 몸을 맡겨라》 《내 안의 자연이 나를 살린다》 등
1955년생.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現 한국고전번역원) 졸업 / 現 ㈜인산가 회장, 《인산의학》 발행인, 전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월간조선》 명예기자 / 저서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네》 《자연치유에 몸을 맡겨라》 《내 안의 자연이 나를 살린다》 등
광분첩석후중만 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상공시비성도이 고교유수진롱산
온 산봉우리 뒤흔들며 미친 듯 내닫는 물소리에
지척간에서도 사람들 말소리 알아듣기 어렵네.
속세의 시비 소리 귀에 들려올까 늘 걱정하여
흐르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에워싸게 하는구나!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 옆으로 홍류동 계곡의 급류 소리가 온 산을 뒤흔들며 굽이쳐 흐르는 장관이 연출된다. 길 중간쯤에 자리한 농산정(籠山亭) 건너편에는 통일신라 말엽의 대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탈속(脫俗)의 소회를 읊은 칠언절구의 둔세시(遁世詩)가 석벽에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바로 ‘가야산 독서당에 제하다(題伽倻山讀書堂)’라는 제목의 시다. 이 시를 ‘등선시(登仙詩)’라고도 하는데, 최치원 선생이 이 시를 쓴 다음 신선이 돼 하늘로 올라갔다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공식 기록부터 먼저 살펴본다.
속세의 시비 소리가 귀에 닿을까…
최치원(857~908년?)은 신라 말기의 문신(文臣)이요 유학자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해운(海雲)·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서기 868년 12세 나이에 당(唐)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병마도통사 고병(高騈)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당 전역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승무랑 시어사(承務郞侍御史)로서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귀국해서는 헌강왕에 의해 중용(重用)되어 왕실이 후원한 불교 사찰 및 선종 승려의 비문을 짓고 외교문서의 작성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진성여왕 8년(894년)에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릴 때 최치원은 천령군(함양) 태수로 나가 있었는데, 지금 함양에는 최치원이 올라가 노닐었다는 학사루(學士樓)가 있고, 그가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물길을 돌리고 제방을 쌓아 그 위에 조성했다는 상림(上林)도 남아 있다. ‘시무십여조’를 통해 의국(醫國), 즉 나라의 병을 고치려던 계획은 좌절됐으나, 당시 변방이던 천령의 태수로서 홍수 때마다 물난리로 큰 자연재해를 입던 병폐를 고쳐 그 이후 1000년이 넘는 세월 다시는 자연재해가 범하지 못하는 복된 땅으로 만든 이적(異蹟)을 보였다.
선생은 ‘시무십여조’를 올린 뒤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중앙 조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변방 태수 등을 지내다가 마침내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피해 산림과 각지를 유랑하다가, 마지막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 이후는 기록이 없어 언제 어떻게 생애를 마쳤는지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특별한 혜안(慧眼)을 지니셨던 선친(仁山 金一勳)께서는 내게 종종 고운 선생의 이 시 해석과 함께 선생의 생애와 관련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이야기를 들려 주곤 하셨는데, 그 요지를 간추려 소개한다.
먼저 시의 앞 2구, “온 산봉우리 뒤흔들며 미친 듯 내닫는 물소리에 / 지척간에서도 사람들의 말소리 알아듣기 어렵네”라 한 것은 말 그대로 홍류동 급류 소리에 파묻혀 사람들의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뒤 2구를 선친은 “속세의 시비 소리가 귀에 닿을까 걱정하여 흐르는 물소리로 하여금 산을 ‘귀먹게’ 하였구나(故敎流水盡聾山)”라고 해석했다. 후세의 학자들이 필사하는 과정에서 ‘귀머거리·어둡다’라는 뜻의 롱(聾)자 대신 대그릇이나 새장을 뜻하는 롱(籠)자를 써서 시의 본래 취지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즉,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 흐르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모두 귀먹게 하였구나!”로 풀이하는 것이 고운 선생 시의 본래 취지에 부합한다는 이야기다. 당시 신라 조정 관료들의 시기 질투와 정쟁(政爭), 도적떼들의 봉기로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고운 선생은 국가 발전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더는 없을 것 같다는 판단에 따라 속세의 시비 소리가 도저히 미치지 못할 가야산 깊은 골 홍류동 계곡으로 들어가 은거(隱居)한 것이다.
유·불·선 꿰뚫은 聖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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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게티이미지 |
지난 3월 25일, 의성과 경북 일대를 덮친 산불에 천년 고찰 고운사(孤雲寺)가 일부 소실됐다. 신라 신문왕 원년(68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운사는 본래 이름이 고운사(高雲寺)였으나, 유·불·선에 통달해 신선이 됐다는 고운 선생이 여지(如智)·여사(如事) 두 대사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지은 후 그의 호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개명했다고 전해 온다.
고운사나 해인사 말고도 최치원의 흔적은 1100년 세월을 뛰어넘어 각지에 뚜렷이 남아 있다. 부산 해운대는 최치원의 또 다른 호인 ‘해운’에서 연유했다. 최치원이 이곳을 다녀가면서 남겼다는 ‘해운대 석각(石刻)’이 남아 있다. 경남 하동 쌍계사에는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는 석각과 그가 비문과 글씨를 쓴 ‘진감선사 탑비(眞鑑禪師塔碑)’가 남아 있다. 경북 문경, 충남 홍성과 보령, 경남 창원 등 최치원의 필적이라 전하는 전국의 석각은 32곳, 그를 기리는 사우(寺宇)나 서원(書院)은 24곳에 이른다.
고운 선생의 ‘가야산 독서당에 제하다’ 시는 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당리당략의 정쟁에 매몰돼 나라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오늘의 정치꾼들에게 ‘나라를 좀먹는 정쟁 때문에 신라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은유적으로 잘 말해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