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슬의 ‘건강의 지평선’ ⑤ 연금 개혁과 세대갈등

연금 갈등, 노인의 사회적 역할 재정립으로 풀어가야

  • 글 : 박한슬 의료 칼럼니스트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 다음 세대에게 부담 떠넘기는 ‘연금 개혁’에 젊은 세대 반발
⊙ 연금 갈등, 노인을 어떻게 대우하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합의하는 계기 되어야
⊙ ‘노인’이라는 인구집단이 이렇게 늘어난 건 지극히 현대적인 일
⊙ 노인, 사회적 역할·경제적 역량 소실되면서 ‘사회적 성원권’ 상실

박한슬
1991년생. 차의과학대학교 약학과 졸업, 연세대 통계·데이터사이언스 석사 / 《중앙일보》 《주간조선》 칼럼니스트, 서울시 청년정책자문단 / 저서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숫자 한국》 외 다수
지난 3월 21일 연금개혁청년행동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야가 합의한 연금개혁안을 비판했다. 사진=조선DB
최근 국민연금을 둘러싼 세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18년 만에 연금 개혁이 이루어진 건 고무적인 일이지만, 소위 ‘더 내고, 더 받는’ 형태의 연금 개혁이 세대 간 불평등을 만들지 않겠느냔 비판이 나오고 있어서다. 대표적인 비판자는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이다. 이 의원은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기성 세대의 노후(老後)를 보장하기 위해 미래 세대의 소득을 과도하게 끌어다 쓰는 구조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라며 “앞으로 대한민국은 전형적인 항아리형 인구 구조로 진입하게 된다. 미래 세대는 윗부분, 즉 기성 세대의 연금 부담을 떠안기 어렵다. 항아리는 결국 깨질 수밖에 없다”라고 밖혔다.
 
 
  ‘국가 지급 보장’이라는 눈속임
 
2023년 3월 17일 프랑스 노동총동맹(CGT) 등은 마크롱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연금개혁법안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진=AFP/연합뉴스
  관료들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초유의 ‘대행(代行)의 대행’이란 막중한 역할까지 떠안았던 최상목 기획재정부 장관 역시 대행 시절 국무회의에서 “국민연금이 지금처럼 운영된다면, 2041년에 적자(赤字)로 전환되고, 2056년에는 기금이 완전히 소진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비판들과 무관하게 국회는 여야 합의로 ‘더 내고, 더 받는’ 형태의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기금 소진 시기가 2056년에서 2072년으로 늦춰지고, 적자 전환 시점 역시도 2054년으로 늦춰졌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개혁이라고 할 법한 조치이긴 하나 본질적으로 구조가 바뀌었다고 보긴 어렵다. 2072년을 기점으로 연금이 고갈되면, 그 시점에서 ‘근로’를 하고 있을 2012년생부터 2054년생은 월(月) 소득의 3분의 1가량을 보험료로 내야 현재와 같은 수준의 연금 지급이 가능해진다. 올해 갓 중학교에 입학한 아이들과 그 이후에 태어날 아이들에게 막중한 부담을 짊어지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런 비현실적 보험료 인상 시나리오를 벌충하기 위해 국가가 연금 지급을 보장하라는 ‘국가 지급보증’이 법률에 명문화되었으나, 세금 역시 미래 근로 세대가 내는 돈이란 걸 고려하면 눈속임에 불과하다. 법이 통과되었음에도 계속해서 여진(餘震)이 이어지는 이유다. 문제는 이것이 비단 우리나라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아마도 프랑스의 연금 개혁을 둘러싼 갈등일 것이다. 프랑스의 연금은 우리나라와 달리 나이대에 따라 연금이 차등적으로 지급된다. 60세 이상이면 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 65세 이전에는 원래 받을 수 있는 금액에서 일정 부분 차감한 금액을 지급하는 형태다. 우리나라 몇몇 직장에서 시행하는 임금피크제를 거꾸로 적용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프랑스는 2010년 별도의 감액 없이 연금을 100% 수령할 수 있는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늦추는 정책 변화를 강행했다. 동시에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최소 연령도 60세에서 62세로 늦췄다.
 
  이로 인해 대규모 총파업과 시위가 이어졌는데, 이렇게 해도 개혁이 불충분하다는 얘기가 많아 2023년에는 재차 연금 수령 가능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개혁을 진행해 큰 사회적 갈등을 빚었다. 1990년대 독일, 2000년대 일본, 2010년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이들 국가에서 연금 갈등이 계속 빚어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좁게는 사회보험이라는 제도 자체가 인구 증가를 전제하고 설계되었다는 점 때문이지만, 조금 더 넓은 시각에서 살피면 ‘노인 문제’라는 게 지극히 현대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각각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부과식 사회보험
 
현대적 사회보험의 창시자 비스마르크.
  사회보험의 기원은 독일 제국(1871~191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제국의 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보수적인 통치 체계와는 별개로 의료보험과 산업재해보험, 연금보험을 도입해 복지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그 이면에 자리 잡은 동기는 사회주의와의 전쟁이었다.
 
  19세기 말 유럽은 산업화에 따른 노동자 계급의 성장과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특히 독일 내에서는 사회민주당(SPD)이 조직적 세력으로 성장하며, 기존 지배 질서에 위협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운동을 강경하게 탄압하는 한편, 사회주의자들의 주요 주장인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을 국가가 일부 수용함으로써 국민이 사회주의의 품으로 넘어가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다.
 
  애초 이런 목적으로 도입된 사회보험이다 보니, 재원(財源)은 국가와 사용자인 기업, 그리고 노동자 3자가 비용을 분담하는 형태로 충당해 국가가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그런데 여기에 맹점(盲點)이 하나 있었다. 재정적으로만 따지면, 재원을 수십 년 모아 적립된 금액을 순차적으로 지급하는 형태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런 식이면 보험료를 납부하는 시민들이 보험의 효용을 느끼는 데 수십 년이 걸린다. 게다가 초기 재원 마련을 위한 국가의 부담도 크다.
 
  사회주의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사회보험을 고안한 입장에선 과도한 국가의 재정 부담도, 지나치게 늦어지는 국민들에 대한 혜택도 모두 부적절한 결과다. 그러니 그해에 걷은 돈으로 해당 연도에 필요한 지급액을 모두 충당하자는 부과식(賦課式) 보험이 자리를 잡았고,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회보험의 보편적인 형태가 됐다. 재정보단 이념이 앞선 선택이었다.
 
  문제가 되는 건, 적립된 재원 없이 그때그때 필요한 금액을 걷는 방식으로 연금을 충당하는 체계가 피라미드형 인구 구조라는 대전제 없이는 성립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부과식 사회보험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계(契)와 닮았다. 20명의 계원이 계를 꾸려, 매달 10만원씩 곗돈을 붓는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달에 곗돈을 타는 1명을 제외하곤 매달 190만원의 곗돈이 모인다. 1명 정도는 곗돈으로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도 있을 정도의 금액이다. 그런데 한 번에 2명이 곗돈을 타 간다면 어떨까. 180만원을 둘이 나누니 90만원이고, 이것만으로 한 달을 살라고 하기엔 너무 팍팍하다. 그러니 무언가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것이 1970년대 즈음에 발생한 일이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서유럽 지역에서 인구 전체 기준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 5% 수준에 불과했다. 20명 중 1명꼴이다. 그런데 1970년대 즈음부터는 노인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0%로 올라갔다. 곗돈 낼 사람이 점차 늘어나는 걸 전제로 설계된 부과식 사회보험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대안으로 제안된 게 적립식(積立式) 사회보험이다. 적립식 보험의 골자는 가입자별로 계좌를 별도로 구분해, 해당 계좌에 납입된 금액과 그 수익만큼만을 노후 연금으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싱가포르의 CPF
 
  싱가포르의 중앙적립기금(CPF)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CPF도 우리나라 국민연금처럼 법적으로 가입과 납부가 의무화되어 있다. 근로자들은 월 소득의 20% 정도를 CPF 계좌에 납부하고, 고용주는 여기에 짝을 맞춰 17% 정도의 금액을 함께 납입한다. 결과적으로 월 소득의 37% 정도가 꼬박꼬박 개인연금 계좌에 쌓이는 식이다. 납입 기간과 소득 수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렇게 납입한 금액을 최종적으로 연금으로 돌려받을 때는 중산층 기준으로 소득의 30~40% 수준이니, 우리 국민연금이 목표로 하는 43% 수준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다.
 
  후속 세대에게 기대지 않고도 이런 수준의 보장이 가능한 이유는 적립식 보험인 CPF와 연계된 싱가포르 국부펀드(GIC) 덕분이다. CPF는 싱가포르 국민들에게서 걷은 보험료를 이용해 싱가포르 특별 국채(SGS)를 매입하고, 해당 특별 국채는 GIC에 투자되어 수익을 발생시킨다. 이를 통해 안정적으로 불어난 연금 재정이 싱가포르 국민들의 노후를 책임지는 구조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가입하는 개인형 퇴직연금(IRP) 같은 금융상품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방식은 연금액이 개인이 납입한 금액에 비례하는 구조라, 사회보험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보긴 어렵다. 공동체 내에서 위험 분담을 위해 사회보험을 꾸리는 것인데, 기여한 만큼만 가져가라는 건 부조(扶助)의 원칙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형태다. 그래서 등장한 게 바로 혼합형이다.
 
 
  657만원 납부하고 1억2000만원 수령
 
  혼합형 사회보험이란 적립식과 부과식을 조합한 형태의 사회보험이다.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표면적으로는 적립식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싱가포르의 CPF와 달리 명시적으로 본인 계좌에 납입된 금액과 그 수익금만큼을 연금으로 수령하는 형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월 30만원의 국민연금을 10년간 납입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실제로 내가 수령하는 금액은 매월 32만원 정도로, 납입한 금액보다는 크다. 문제는 국민연금이 종신(終身) 지급을 약속하고 있단 점이다. 예컨대 국민연금을 50세에 가입해, 60세까지 10년간 붓고, 61세부터 연금을 수령하기 시작했다면, 70세만 되어도 내가 그간 낸 금액을 모두 되돌려 받는다. 71세부터 사망 기간까지는 온전한 수익 구간이다. 납부한 금액은 물론 그 금액에 따른 수익금을 사망 시까지 계속 받는다는 말이다. 한데 이렇게 수익금을 계속해 지급하게 된다면 누군가는 이 수익금에 따른 빈자리를 채워줘야만 한다. 이런 이유에서 국민연금은 일정 부분 부과식 보험의 성격을 띤다. 그래서 혼합형이다.
 
  최근 논란이 된 어느 연금 수령자의 사례가 대표적인데, 해당 연금 수령자는 99개월간 657만원가량을 납부하고 2001년부터 연금 수급자가 되어 2024년 1월까지 총 1억2000만원가량의 연금을 수령했다. 적립식 보험의 계산으로만 따져봐도, 납입액에 비해 20배 정도의 수익을 올린 셈이다. 국민연금 도입 초창기의 이례적 사례라고 치부하고 넘길 수도 있지만, 현행 제도도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의 차이가 지나치게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속 불가능한 건 마찬가지다.
 
  현행 보험료율을 기준으로 하면 25년간 매월 30만원을 납부하고, 은퇴 이후 80만원을 받는다. 단순 셈으로는 연금을 10년만 수령해도 납부한 금액을 모두 돌려받는 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대수명은 평균 84세다. 60세에 은퇴해도 24년인데, 납부한 금액 이상을 수령하니 이에 대한 그 비용을 누군가 부담해야만 한다. 그 누군가가 바로 후속 세대다.
 
 
  연금 자동조정장치
 
  이런 재정 파탄을 막기 위해선, 적극적인 개혁 조치가 도입되어야 한다. 대표적인 게 바로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운영 중인 연금 자동조정장치다.
 
  우리에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은 숱한 역사 갈등으로 익숙하다 보니, 그를 일본 보수화의 주역으로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다르다. 그는 우리 또한 본받아야 할 만한 다양한 사회개혁을 남겼다. 특히 2004년에 그의 주재로 도입한 연금 자동조정장치는 현재까지도 굳건하게 유지되는 일본 후생연금(厚生年金) 재정을 만들어낸 1등 공신이다.
 
  연금 자동조정장치가 도입되면 매번 정치인들의 법률 개정을 통해 연금 보험료율과 연금지급액을 변경하는 게 아니라, 인구 구조 변화와 물가 변화 등의 기존에 설정한 변수에 따라 자동적으로 보험료율과 연금지급액이 변화한다. 이렇게 2004년 13.58%이던 보험료율은 순차적 인상을 거듭해 2017년 이후 18.3%로 유지되고 있다.
 
  정치적 문제 때문일 테지만 연금 보험료율 인상이 부담된다면, 차라리 자동조정장치와 같은 수단이라도 도입했어야 했다. 애초에 적립식이라는 형태를 유지할 것이었다면, 이보다 훨씬 전에 연금 보험료율을 대폭 인상하기라도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누구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게 이번의 ‘더 내고, 더 받는’ 형태의 초라한 개혁이다. 세대 간 연대(連帶)라는 아름다운 이상을 불만 없이 따를 수 있다면,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 그 자체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번 국민연금 개혁안에 대한 찬성은 38%에 그쳤다. 이뿐일까. 20대와 30대에서는 반대율이 60%에 육박했다. 최소한 젊은 세대에선 반 이상이 세대 간 연대라는 이상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다. 젊은 층은 왜 이토록 노령 인구에 대한 지원에 반감을 갖고, 또 노인들 스스로도 일정 부분 겸연쩍음을 느끼는 걸까.
 
 
  시민권의 발전 단계
 
  사회학자 토머스 험프리 마셜(T. H. Marshall)은 1950년 저서 《시민권과 사회계급》에서 시민권(市民權)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했다. 마셜은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려면 세 단계의 권리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첫 번째는 시민적 권리다. 재산권, 표현의 자유, 법 앞의 평등 등 전통적인 서구 사회의 국가와 시민 대립에서 쟁취해 낸 소극적 자유권이다.
 
  두 번째는 정치적 권리다.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선거권, 피선거권을 포함한 정치 참여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마지막은 사회적 권리다. 최소한의 교육, 최소한의 의료, 최소한의 주거와 같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권리를 오롯이 누릴 수 있어야 비로소 사회적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성원권(成員權)을 가진 공동체 구성원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공동체 바깥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효과 또한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불법체류자에 대한 의료를 고려해 보자. 인간이라면,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의학적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라도, 즉 불법체류자가 국내에서 건강보험을 도용해 몰래 진료를 받았다는 기사를 접하면 화가 날 것이다. 구성원이 아닌 사람이 공동체의 자원을 헐어 썼다는 인식을 받기 때문인데, 바꿔 말하면 특정 계층 혹은 인구집단이 사회적 자원을 소모하는 것에 반감이 든다는 것 자체가 그네들의 성원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말도 된다.
 
 
  ‘노인’ 인구집단 증가는 현대적 현상
 
  이런 상황을 노인 집단에게 적용해 보자.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는 많은 국가가 노인들의 성원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애초 ‘노인’이라는 인구집단이 이렇게 늘어난 게 지극히 현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1930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의 평균수명은 60세를 밑돌았다. 전쟁의 영향과 상대적으로 높았던 영아(嬰兒)사망률도 고려해야 하지만 장수(長壽)하는 노인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다. 평균수명이 70세를 넘기 시작한 게 1965년이니, 노인이라는 인구집단이 유의미하게 커지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다.
 
  서구만의 특징이라기엔,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40년대 말 일본의 평균수명은 50세에 못 미쳤고, 평균수명이 70세를 넘기 시작한 건 1970년대부터다.
 
  현상이 발생한 지는 기껏해야 50여 년,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다뤄진 지는 4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새로운 문제다. 아직 노인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대우하고,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성원권을 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두 번째는 노인의 사회적 역할이 상당 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제각기 역할을 가진다.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 남성은 고된 농사일을 담당하고, 여성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식이다. 이 시기에 노인은 원로 혹은 어른이라는 소임을 수행했다. 전통 사회에서 지식의 전승은 주로 구술(口述)에 의해서 혹은 경험으로 전승되는 경향이 짙었고, 노인이 수십 년간 생활하며 갖춘 농업 기술에 대한 지식과 지역 풍습, 생활 지식은 귀중한 사회의 자산이었다.
 
  산업 사회로 넘어와서도 이런 경향은 어느 정도 이어졌는데, 좁은 사회일수록 혈연에 기반한 사회적 인맥이 강하게 발휘된 탓에 공적인 법과 제도보단 인적 연결을 통한 문제 해결이 빨랐다. 원로로서 노인의 역할이 일정 부분 유지될 수가 있던 것이다. 그런데 후기 산업 사회로 이행하며, 노인의 사회적 역할은 점진적으로 상실되기 시작했다. 인맥이나 혈연보단 공식적 법과 제도가 자리를 잡았고, 지식 전승 역시 고도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노인의 성원권이 옅어진 이유다.
 
 
  노인의 경제적 역량 사라져
 
  세 번째는 노인의 정년 제도와 노동시장에서의 배제로 노인의 경제적 역량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앞서 사회보험이 독일 제국에서 출발했음을 설명한 바 있다. 이때 연금을 수령할 수 있는 나이로 설정된 게 65세다. 65세 이후에는 은퇴해야 한다는 식의 강제적인 정년 규정이 아니라, 이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면 은퇴 후 국가의 보조를 받을 수 있다는 간접적인 정년 규정이다. 이후 서구와 북미에서 65세에 대한 정년이 점차 자리를 잡았고, 일본에서도 65세 정년이 자리를 잡으며 우리나라에도 이런 제도가 그대로 이식됐다.
 
  그런데 이런 조치는 노령 인구집단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단, 생산성이 떨어지는 노인 노동력을 직장 내에서 내쫓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노인 집단을 노동시장에서 일괄적으로 배제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정 인구집단이 경제 생활에서 제외되면, 그 집단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정말로 생계가 곤란해 폐지나 고물을 수집하는 노인들도 있지만, 경제적 소일거리를 잃은 공허감에 이런 일에 종사하는 이들도 있단 걸 고려하면 노인의 성원권 문제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우리나라 또한 1990년대 정도까지는 아직 굳건히 유지되던 유교적 가치관이 노인에 대한 사회적 우대를 일정 부분 지탱했지만, IMF 사태 등 사회적 가치관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사건을 겪으며 노인을 오롯한 사회적 구성원이라 보는 경향이 희박해졌다. 유교적 장유유서(長幼有序) 문화보단, 서구적 평등의 가치를 더 내재화한 젊은 세대일수록 노인에 대한 지원에 반감을 갖고, 이를 꺼리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기왕 정치적 부담 때문에 연금 개혁이 더딘 작업이 될 거라면, 차라리 사회적으로 노인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절차부터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건 노인의 경제적 역할 복원이다. 과거 노인의 연금 수령 연령과 정년이 65세 즈음으로 맞춰진 건, 실제 그 시기 노인들의 건강 상태가 나빠, 그 나이 즈음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의학적으로는 노쇠(老衰·frailty)라 부르는데, 당뇨병이나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이 관리되지 않을수록 그리고 고된 육체노동 등으로 인해 인체의 예비력(reserve)이 떨어질수록 노쇠의 정도는 가팔라진다.
 
 
  연금 개혁 전, 노인 역할 정립부터
 
택배 일을 하는 노인. 노인들이 적당한 소일거리가 될 수 있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은 세대 간 갈등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진=조선DB
  일찍부터 만성질환을 관리하고, 예전과 같은 고된 육체노동에 만성적으로 시달리지 않는 요즈음의 노인들은 과거 노인에 비해선 노쇠 정도가 훨씬 양호하다. 실제로 법정 노인 연령대가 되었다고 무조건 은퇴하고, 경제 활동을 멈춰야 하는 게 아니다.
 
  물론 이들이 바뀌어 가는 산업 질서에 빠르게 적응하길 바라는 건 어려울 수 있다. 식당에서 키오스크 조작법을 두고도 쩔쩔매는 노인들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고, 최근 인공지능의 발전에 힘입어 산업 분야의 디지털화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모든 노동이 이렇게 재편된다고 볼 수는 없다. 되레 노인이 더 능숙하게 할 수 있는 형태의 육체노동 일자리들은 인력 수급에 난항을 겪을 수도 있다. 고령화의 반대말은 저출산이고, 노동시장에 신규로 진입하는 젊은이들이 줄어들면 그 자리가 공백으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임금이 그리 높지는 않더라도, 사회적 성원권을 회복하기엔 적당한 소일거리가 충분히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손자나 손녀를 돌보는 돌봄 노동에 손을 보탤 수도 있다. 이 역시 사회적 역할이고, 가족과 국가에 대한 기여다. 사회에서 노인의 자리를 어떻게든 발굴해 채워줘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역할 재정립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연금 갈등도 조금은 완화될 수도 있다. 성원권을 가진 동등한 사회 구성원이 약자(弱者)로 전락했을 때, 그에 대한 기여가 조금은 더 너그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금 개혁을 둘러싼 갈등을 계기로 누가 더 내고, 누가 더 받느냐는 일차원적인 논의를 넘어 우리 사회가 노인을 어떻게 대우하고 또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합의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