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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10〉

黨爭 최대 수혜자이자 피해자 鄭仁弘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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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홍,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 광해군 때 北人정권의 영수로 영의정까지 올라갔으나 仁祖反正 후 처형
⊙ 선조, “정인홍은 빌붙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 일단 불러온 이상 쓰임이 있도록 해야”
⊙ 유영경, 선조 말기에 득세… 이산해·정인홍 등의 공격에도 살아남았으나 광해군 즉위 후 賜死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있던 西宮은 오늘날의 덕수궁이다. 사진=조선DB
  먼저 정인홍(鄭仁弘·1535~1623년)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정인홍은 조식(曺植)의 수제자로서 최영경(崔永慶), 오건(吳健), 김우옹(金宇顒),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경상남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했다. 1573년(선조 6년) 학행으로 천거돼 6품직에 올랐다. 이는 곧 과거를 거치지 않고 문과 장원급제가 맡게 되는 6품직에 바로 올랐다는 말이다. 당시 세 정승과 이조가 토의해 5명을 꼽아 올렸는데, 그들은 바로 전 참봉(參奉) 조목(趙穆)과 생원(生員) 정인홍, 학생(學生) 이지함(李之菡)·최영경·김천일(金千鎰)이다. 이는 훗날 서인(西人)-노론(老論)이 내세우는 ‘산림숭용(山林崇用)’의 길을 열었다는 의미가 있다. 사실상 과거를 무력화(無力化)함인 동시에 왕권(王權)을 은근히 약화하는 뜻 또한 있다.
 
  1575년 황간현감에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이듬해 사헌부 지평을 거쳐 1581년 장령으로 승진했다. 당시 정인홍의 풍모를 전하는 실록의 기록이 있다. 《선조실록》 선조 14년(1581년) 1월 26일 기록이다.
 

  〈정인홍은 사람을 탄핵할 때 강한 세력을 피하지 않고 금령(禁令)을 매우 엄하게 펴서 한때 기강이 자못 숙연함을 깨닫게 했다.〉
 
  그 무렵 정인홍은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 동지들과 함께 동인(東人) 편에 서서 서인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을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해직당하고 낙향했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강경파인 북인(北人)에 가담해 영수(領首)가 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성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고, 10월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고령·함안 등지를 방어했으며, 의병 활동을 통해 강력한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구축했다. 1602년 대사헌으로 승진했고, 이후 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儒籍에서 삭제되기도
 
정인홍 등 北人의 支柱였던 조식. 사진=한국선비문화연구원 제공
  또 그는 1598년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和議)를 주장했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파직하게 한 다음, 홍여순(洪汝諄)·남이공(南以恭) 등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이어 유성룡과 함께 화의를 주장했던 성혼(成渾) 등 서인을 탄핵했다. 북인이 선조 말년에 소북(小北)과 대북(大北)으로 분열되자,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 등과 대북을 영도했다.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적통(嫡統)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항해 광해군을 적극 지지했다. 1607년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하고자 할 때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반대하자 탄핵했다가 이듬해 소북 이효원(李效元)의 탄핵으로 영변에 유배됐다.
 
  그러나 선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배 도중 풀려나와 대사헌에 기용돼 소북 일당을 추방하고 대북정권을 수립했다.
 
  대북정권의 고문 내지 산림(山林)의 위치에 있던 정인홍은 유성룡계의 남인과 서인 세력을 추방하고 스승 조식의 추존(追尊)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문묘종사(文廟從祀)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방하는 소(疏)를 올려 두 학자의 문묘종사를 저지시키려 하다가 8도 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襟錄·유적(儒籍)]에서 삭제되는 등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612년(광해군 4년) 우의정이 되고, 1613년 이이첨과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좌의정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618년 인목대비 유폐사건에 가담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함)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가산이 적몰(籍沒)당했으며, 끝내 신원(伸寃)되지 못했다.
 
 
  정인홍에 대한 선조의 평가
 
  훗날의 인목대비인 새 신부와 대례(大禮)를 열흘 정도 앞둔 선조 35년 7월 2일, 선조는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좌의정 김명원(金命元), 우의정 유영경 등 3정승을 불러들여 정인홍의 사람됨에 관해 깊이 있는 토론을 한다.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정인홍은 조식의 제자로 선조 6년(1573년) 학행이 있다 하여 문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헌부 지평, 장령 등을 지냈다. 선조 초반 사림을 중시하던 분위기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품이 워낙 직선적이었기 때문에 1581년 서인의 정철과 윤두수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본인이 해직돼 낙향했다. 정인홍이 중앙정치의 중요한 인물로 다시 부상(浮上)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의병장으로서 그가 남긴 혁혁한 전공 때문이었다.
 
  이런 공을 높이 사 선조는 1602년(선조 35년) 2월 정인홍을 오늘날의 검찰총장 격인 대사헌으로 발탁했다. 파격(破格)이었다. 이때 정인홍의 나이는 이미 칠십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정인홍은 1년도 되지 못한 11월경 본인의 건강과 반대파의 견제를 넘지 못하고 대사헌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선조가 3정승을 불러 정인홍 문제를 이야기한 것은 그에 관한 논란이 절정에 이를 때였다. 3정승은 하나같이 정인홍의 과격함을 들어 조정에 두기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선조의 생각은 달랐다. 인재를 보는 눈이 남달리 뛰어났던 선조의 면모는 이날 3정승과의 대화에서도 두드러진다. 3정승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난 선조는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밝힌다.
 
  “인홍에 대해 혹자는 과격하다고 하고 혹자는 말에 병통이 있다고도 하지만, 그 사람은 다른 이와 같지 않아서 빌붙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굳센 절조(節操)는 백 번 꺾으려 해도 꺾지 못할 것이다. 일단 불러온 이상 쓰임이 있도록 해야지 어찌 몰아낼 수 있겠는가.”
 
  선조가 이처럼 아꼈던 정인홍도 결국은 11월 조정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인목왕후는 국혼 이듬해 첫딸 정명공주를 낳았다. 문제는 3년 후인 1606년(선조 39년) 아들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서손(庶孫) 출신이던 선조가 마침내 왕실의 정통성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늦은 나이에 본 유일 적자 영창대군에 대한 선조의 사랑은 극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뒤집어 보면 서자 출신 세자 광해군에 대한 외면으로 이어진다는 뜻이었다.
 
 
  유영경의 ‘하례 정치’
 
  이 무렵 유영경의 정치적 부상이 눈에 띈다. 선조 37년 5월 22일 선조는 영의정에 윤승훈, 좌의정에 유영경, 우의정에 기자헌(奇自獻)을 임명했다. 마침내 유영경이 최고의 권력실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날 실록은 윤승훈에 대해서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성미가 급하고 쉽게 화를 내는 인물”로, 기자헌에 대해서는 “당파에 물들지 않고 마음가짐이 공평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기자헌과 관련해서는 “그가 정승이 됐으니 조정도 편안해지고 만백성도 편안해지겠다”고까지 극찬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유영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을 하지 않고 있다.
 
  유영경(1550~1608년)은 선조 5년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임진왜란 때 의병 모집에 공을 세웠고 황해도관찰사에 올랐다. 원래는 유성룡과 함께 동인에 속해 있다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뉠 때 이발과 함께 북인에 몸을 담았다. 1599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다시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갈리자 남이공·유희분 등과 함께 소북의 편에 섰다. 당시에는 대북파가 득세할 때였기 때문에 한동안 소외돼 있다가 1602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으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다.
 
  유영경은 당파에 의존하기보다는 선조의 심기를 미리 살핌으로써 단계단계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선조는 관리로서 능력이 뛰어난 점을 들어 그를 중용했다. 물론 적극적으로 선조의 마음을 미리 헤아리는 그의 행태가 싫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스럽게 그는 소북의 지도자가 돼 허욱·이효원·송준·성이문 등을 거느리면서 기자헌·정인홍으로 대표되는 대북파와 치열한 암투를 전개했다. 적어도 선조가 죽기 직전까지 유영경은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했다.
 
  무엇보다 그는 광해군에서 영창대군으로 마음이 바뀌고 있던 선조의 속마음을 미리 알아차렸다. 다시 말해 광해군 입장에서 볼 때 유영경은 인목왕후보다 더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선조 38년 8월 1일, 선조는 3년 동안 실어증(失語症)을 비롯한 오랜 질병으로 인하여 경연(經筵)을 중단하다가 재개하게 됐으니 왕세자가 신하들과 함께 하례(賀禮)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넌지시 꾸짖는 내용의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물론 이것은 원래의 예법(禮法)에 있는 것이기는 했다. 그 점을 미리 살피지 못한 예조(禮曹)가 잘못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선조는 약해지고 있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했다. 거기에 바로 유영경이 있었다.
 
  다음 날 영의정 유영경, 좌의정 기자헌, 우의정 심희수의 3정승이 하례를 하겠다고 말했다. 세자와 예조에서까지 나서고 심지어 사헌부는 진하(進賀)의 예를 미리 살피지 못한 예관(禮官)들을 처벌하겠다고까지 했다. 그때서야 선조는 마지못한 듯 진하를 받아들인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유영경이었다.
 
  유영경은 바로 다음 해인 1606년(선조 39년) 1월 1일이 되자 즉위 40년이 됐다며 진하할 것을 주청했다. 이때도 선조는 처음에는 짐짓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거부했다. 사실 그때까지 조선의 국왕 중에 40년을 넘긴 임금은 한명도 없었다. 중종이 재위 39년을 기록한 것이 최고였다. 실은 40년을 기념하자면 다음 해에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선조는 1567년(정묘년)에 즉위했지만 이 해는 명종 22년이므로 1568년(무진년)이 선조 원년이다. 따라서 1606년은 즉위 39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밀어붙였고, 결국 1월 15일 하례와 함께 대대적인 사면이 단행됐다.
 
 
  영창대군 탄생
 
  그러고 나서 3월 7일 문제의 대군, 영창대군이 세상에 나왔다. 영의정 유영경은 즉각 좌부승지 최염을 시켜 “세종 때에도 광평대군과 임영대군이 태어났을 때 하례를 올렸다”며 “대군 탄생을 축하하는 하례를 올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좌의정 허욱과 우의정 한응인은 “대군 한명을 낳았다고 반드시 하례할 것까지 있느냐”고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유영경은 선조의 뜻이 대군에게 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대군의 지위를 튼튼히 하기 위해 이처럼 하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하례는 이루어졌다.
 
  회복되는 듯하던 선조의 건강은 선조 39년(1606년) 4월을 지나면서 급속하게 나빠지기 시작한다. 세자와 약방 도제조(都提調) 유영경의 문안인사가 이어졌고, 매일 침을 맞아야 했다. 증상은 왼쪽 팔에 마비 증세가 오고 다리에서부터 어깨를 거쳐 귀밑까지 통증이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한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선조는 자신의 증상을 스스로 진단하고 때로는 적절한 처방을 제시하기도 했다. 9월이 되면서 병세가 조금씩 악화돼갔다. 당시 선조의 치료를 담당한 어의 중에는 《동의보감》 저자인 허준도 포함돼 있었다. 이런 증세는 큰 차도를 보이지 않고 1년 이상 계속됐다.
 

  선조 40년(1607년) 10월 9일 새벽, 선조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갑자기 기가 막히면서 쓰러졌다. 궁중 나인이 달려와 이 같은 사실을 세자에게 알렸고 곧바로 세자를 비롯해 유영경·허준 등이 달려왔다. 이들이 왔을 때 선조는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숨막히는 정적만이 편전을 짓누르고 있었다. 허준 등이 각종 약을 번갈아 먹인 끝에 마침내 의식이 약간 돌아온 선조는 “이 어찌 된 일인가, 이 어찌 된 일인가”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이날 하루 만에도 여러 차례 의식이 멀어지다가 돌아오다가를 반복했다. 의원들은 ‘한기엄습(寒氣掩襲)’이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의식이 잠깐 돌아오자 선조는 임해군·정원군·인성군·의창군 등 아들들을 궐내에 들어와 머물도록 명한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감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임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난 큰아들로 광해군의 형이고, 정원군과 의창군은 인빈 김씨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이다. 정원군은 다름 아닌 인조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인성군은 정빈 민씨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이날 밤부터 세자 광해군이 선조 곁에서 시병(侍病)에 들어갔다. 흥미로운 것은 무슨 약을 써야 할지를 선조 자신이 일일이 지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의들은 중풍이라고 진단한 반면 선조 자신은 심질(心疾), 즉 마음의 병이라고 보았다. 이틀 후인 10월 11일 선조는 3정승을 빈청에 모이도록 한 다음 비망기를 내렸다.
 
  “나는 본디 질병이 많아서 평일에도 만기(萬機)의 정무는 절대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지금은 병에 걸린 지 1년이 다 돼가는데 조금도 차도가 없어 정신이 혼암하고 심병이 더욱 침중하다. 이러한데도 왕위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세자 나이가 장성했으니 고사에 의해 전위(傳位)해야 할 것이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攝政)하는 것도 가하다. 군국(軍國)의 중대사는 이처럼 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속히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송석경, 허준 탄핵
 
허준
  당연하고도 적절한 조치였다. 그런데 영의정 유영경은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과 함께 전위 의사를 거두어줄 것을 청했다. 자신은 그 뜻을 받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날 인목왕후도 한글로 된 문서를 통해 선조의 명을 따를 것을 3정승에게 지시했다. 그것이 어린 영창대군을 살리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11월 13일 사간 송석경이 허준이 너무 독한 약을 써서 치료에 효과가 없다며 허준을 탄핵했다. 그러나 송석경의 타깃은 허준 뒤에 있는 인물, 즉 약방 도제조를 겸하고 있는 영의정 유영경이었다. 그 배경에 대해 이건창은 “이산해와 이이첨은 유영경에게 쫓겨나서 오래도록 쓰이지 못했는데 광해군의 은밀한 부탁을 받고 그 다음 날 계획을 세우고 광해군 빈(嬪)의 오빠 유희분과 밤낮으로 모여 의논했다”고 쓰고 있다. 즉 송석경의 허준 탄핵은 유영경을 제거하기 위한 이산해와 이이첨의 계략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희분은 종3품인 사헌부 집의였다.
 
  처음에는 이들의 계략이 적중되는 듯해 보였다. 이틀 후 유영경이 허준에 관한 탄핵은 결국 자신의 책임이라며 대죄(待罪)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선조의 대답은 너무나 명쾌했다.
 
  “송석경을 비롯한 대간들이 허준을 논죄하고자 하는 진의를 모르겠다. 이는 그에게 약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또 나로 하여금 정양(靜養)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허준은 별로 잘못된 약을 함부로 쓴 죄가 없다. 그대는 사직하지 마라.”
 
  누구보다도 한의학을 잘 아는 선조이기에 이 같은 판단을 할 수 있었다.
 
 
  “길이 같지 않으면 서로 꾀하지 않는 법”
 
  결과적으로 이에 힘을 얻은 유영경은 역공(逆攻)에 나선다. 유영경은 자기 사람인 송단을 시켜 다른 문제로 송석경을 탄핵하도록 했고, 선조는 송석경을 파면시켜버렸다. 자신들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북파의 이산해와 이이첨은 먼저 이성과 이담을 보내 영남의 정경세(鄭經世·1563~1633년)를 움직이려고 시도했다. 정경세라면 선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정경세는 1586년(선조 19년) 문과에 급제해 요직을 두루 거쳤고, 1598년 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재임 중 진휼(賑恤)과 교화에 힘써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때는 대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이성과 이담은 유영경이 왕세자를 위태롭게 하려고 한다면서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릴 것을 권했다. 그러나 스승의 정적(政敵)인 이산해의 계략을 모를 리 없는 정경세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길이 같지 않으면 서로 꾀하지 않는 법이다.”
 
  사실 그는 유성룡의 제자로 원래는 퇴계학파의 남인(南人)이었지만 당색(黨色)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정경세는 율곡학파의 서인들과 친했고, 특히 김장생과 가까웠으며 훗날 송시열과 함께 서인 중에서 노론의 양대산맥을 이루게 되는 송준길을 사위로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이후 정경세는 광해군 집권과 함께 성균관대사성,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내지만 광해군 2년 정인홍 일파의 탄핵을 받아 광해군 시절 내내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1623년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경학과 예학에 깊은 조예가 있던 그는 정계에 복귀해 대사헌, 도승지, 형조·예조·이조판서와 대제학 등을 두루 역임하게 된다. 애당초 이산해 일파와는 함께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선조, “世子는 天子의 策命 받지 못해”
 
이산해
  여기서 그만둘 이산해와 이이첨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재기를 꿈꾸던 두 사람은 대사헌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고 있던 정인홍을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정인홍으로서도 피할 이유가 없었다. 1월 18일 올린 상소에서 정인홍은 성품대로 직격탄을 쏘았다. 선조가 당초 약속한 대로 전섭(傳攝·왕권을 전위하고 세자로 하여금 섭정케 함)을 하고 선조는 몸조리에 전념하면 되는데 유영경이 권세를 장악해 이를 가로막고 있으니 앞날이 걱정된다는 내용이었다.
 
  “신이 보건대 전하의 부자(父子)를 해치는 자도 영경이고 전하의 종사(宗社)를 망치는 자도 영경이며 전하의 나라와 백성을 해치는 자도 또한 영경입니다.”
 
  너무 나갔다. 선조는 격분했다. 사흘 후 유영경이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만류하며 이렇게 말한다.
 
  “정인홍의 상소를 보니 극히 흉악하나, 다만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심병(心病)이 있어 똑바로 보지 못하고 슬쩍 보아 넘겼을 뿐이다. 그중에 나에게 관계된 말이 있었으나 또한 말한 까닭을 모르겠으니 더욱 음흉하다. 인홍이 이유 없이 임금의 마음을 동요시키고 영상(領相)을 모함했으니, 여러 소인 중에 영상을 모함하려는 자가 유언비어를 조작하여 남쪽 지방에 전파시킨 것을 인홍이 주워 모아 이 상소를 한 것인가. 그 말을 비록 따질 만한 것이 못 되지만 무사(無事)한 중에 일을 만들어내어 지친 간에 부득불 이로 인하여 의심하고 틈이 생겨 조정이 혹 조용하지 못하면 큰 불행이다.”
 
  병중에 있었지만 선조는 정인홍의 상소가 이산해 무리의 움직임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다음날 승정원에 내린 비망기에는 선조의 본심이 좀 더 정확하게 드러나 있다.
 
  “정인홍이 세자로 하여금 속히 전위를 받게 하려고 했으니 그 스스로 모의한 것이 세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여겼겠지만 실은 불충(不忠)함이 극심하다. 제후(諸侯)의 세자는 반드시 천자의 명을 받은 뒤에 비로소 세자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세자는 책명(策命)을 받지 못했으니 이는 천자도 허락하지 않은 것이고 천하도 알지 못한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전위를 받았다가 만일 중조(中朝)에서 힐문하기를 ‘그대 나라에서 말하는 세자는 중조에서 책봉을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그대들 임금이 사적(私的)으로 스스로 전위했다. 그대들 임금 자리도 천자의 벼슬이라 그대들 임금이 마음대로 할 바가 아닌데 세자도 어찌 감히 사사로이 스스로 받겠는가. 중간에 그렇게 된 까닭이 있는가’ 하고 불측(不測)한 누명을 세자에게 더하고 대신에게 힐문하면 어떻게 결말을 짓겠는가.”
 
  결국 선조는 정인홍을 비롯해 이이첨과 이산해의 아들인 이경전 등을 귀양 보내라고 명했다.
 
 
  선조의 죽음
 
  그 바람에 광해군의 입장은 더욱 곤란해졌다. 결국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 광해군은 1월 25일 자신의 곤란한 입장을 솔직하게 밝혔다.
 
  “뜻밖에 정인홍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만들어 위로 천청(天聽)을 번거롭혔습니다. 성상의 하교에 ‘지친 간에 부득불 이로 인해 의심하여 틈이 생기겠다’고 하셨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신은 만 번 죽는 것 이외에는 다시 상달할 바가 없으니 땅에 엎드려 황공할 뿐입니다.”
 
  흔히 선조를 폄하할 목적으로 이때 선조가 광해군을 박대했다고 쓴 글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단 한 차례 선조가 광해군의 세자 지위를 놓고 중국의 책봉을 받지 못한 것과 관련해 부정적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이때의 문제와 전혀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이때 선조는 광해군을 위로하고 있다.
 
  “근래 인심이 극히 흉하여 기필코 조정에 일을 일으키려고 불측한 말을 만들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으니 몹시 마음이 아프다. 세자는 명위(名位)가 이미 결정돼 내가 세자와 조금도 틈이 없는 것은 하늘이 아는 바이다. 누가 감히 흉역한 마음을 두겠는가. 저 소인들이 스스로 흉악한 계책을 만들고 일망타진의 계책을 꾸며 조정을 괴란(壞亂)시키고 부자(父子)를 이간시키려고 했으니 그 마음이 몹시 흉참(凶慘)하다. 그러나 이는 입에 담을 것도 못 되니, 세자는 안심하고 그 일을 마음에 두지 마라.”
 
  이렇게 해서 이산해의 계략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세자 건저의(建儲議) 문제로 정철을 나락으로 밀어넣을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선조는 이미 그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인 2월 1일 선조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1608년 2월 1일 아침, 선조는 약방의 문안 인사에 “지난밤에는 편히 잘 잤다”고 답한다. 오전에는 이이첨과 이경전을 따르던 무리의 귀양을 청하는 사헌부 지평 신광립의 보고를 받는 등 통상적인 집무를 행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오후 2시경 갑자기 선조의 건강은 악화돼 위급한 지경에 이른다. 곧바로 왕세자가 달려왔고 이어 완평부원군 이원익(李元翼), 중추부 영사 이덕형, 오성부원군 이항복(李恒福) 등 원로대신들이 들어왔다.
 
  어의 허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선조는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했다.
 
 
  宣宗에서 宣祖로
 
  얼마 후 인목왕후는 미리 써놓은 선조의 유언을 공개했다.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마라. 이로써 너에게 부탁하니 모름지기 내 뜻을 몸받아라.”
 
  보기에 따라서는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리고 인목왕후는 옥새를 광해군에게 넘겼다. 물론 광해군은 처음에는 받을 수 없다고 여러 차례 사양했다. 그러나 왕위는 결국 광해군에게 가도록 돼 있었다. 선조의 묘호(廟號)는 선종(宣宗), 능호(陵號)는 목릉(穆陵)으로 정해졌다.
 
  그 다음 날 오늘날의 덕수궁 자리에 있던 정릉동 행궁에서 광해군은 보위(寶位)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난리통에 왕세자가 된 지 16년 만이었다. 이때 광해군은 34세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처음으로 한 주요 국사(國事)는 묘호를 선종에서 선조로 바꾼 것이었다. 2월 8일 대신들이 의견을 모아 광해군에게 건의했다.
 
  “신들의 의견은 모두 ‘대행(大行) 대왕께서는 나라를 빛내고 난(亂)을 다스린 전고에 없던 큰 공렬이 있으니, 진실로 조(祖)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예부터 제왕이 공을 세운 경우에는 조(祖)라고 일컫고 덕(德)이 있는 경우에는 종(宗)이라고 일컫는 뜻이 이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묘호를 조라고 일컫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를 선종이 아니라 선조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광해군 집권은 결과적으로 선조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만다. 그것은 선조가 멀리했던 ‘소인배들’의 득세와 더불어 찾아왔다. 선조의 죽음과 광해군의 즉위는 정치적 역학(力學) 관계의 대역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최대의 관심은 역시 영의정 유영경의 처리 문제였다. 유영경은 일단 2월 10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광해군은 일단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의 초보자라도 유영경이 궁지에 몰린 쥐 신세가 돼버린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숙청
 
  홍문관·사헌부·사간원 등에서 들고일어났다. 유영경이 광해군에게 가한 아홉 가지 죄목을 거론하며 목을 베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충성 경쟁이 시작됐고, 그 대열에는 한때 유영경에게 붙었던 자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유영경은 표변(豹變)해버린 세상 인심을 탓할 여유가 없었다. 벌써 목에 칼이 닿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유영경은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후임은 조정 내외의 신망이 큰 이원익이었다. 결국 유영경은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를 가 그곳에서 사약(賜藥)을 받았다.
 
  광해군 집권 열흘은 마치 혁명이 난 듯했다. 하루아침에 친형 임해군이 대역죄인으로 내몰리고 영의정 유영경은 파직당하고 정인홍은 영웅이 돼 돌아왔다. 당시 상황에 대해 실록은 “조야가 마음 아파 했다”고 적고 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선조의 유교(遺敎)는 휴지조각으로 변했다. 특히 소인배들을 물리치고 군자를 가까이하려 한 선조의 오랜 노력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물론 여기서 유영경이 군자였는지는 판단을 유보한다. 그러나 적어도 선조가 오랜 경험을 통해 배척하려던 이산해나 이이첨은 광해군으로서는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정인홍 또한 군자인지 소인배인지는 모르겠으나 국가 경영을 논할 수 있는 경륜(經綸)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원상(院相)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던 이산해야 광해군 집권 직후 얼마 안 가서 세상을 떠났으니 알 수 없지만, 훗날 광해군을 폐주(廢主)로 만든 양대 인물이 결국은 이이첨과 정인홍이었다는 점에서 선조의 판단은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조는 죽었다. 대북의 세상이었다. 이들은 먼저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을 죽이고 이어 진릉군·영창대군·능창군·연흥군을 차례로 죽였다. 이어 인목대비를 폐모(廢母)시켰다.
 
  대북파가 ‘중립외교’를 했다 하여 광해군 시대를 재평가하자는 움직임이 우리 학계에는 일부 있다. 그러나 선조와 광해군의 인사원칙과 정책을 조금이라도 비교해본다면 그런 주장은 한 치의 설 자리도 없다. 내성외왕(內聖外王)에 다가가려 했던 선조의 꿈은 결국 아들 광해군이 산산조각을 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어이없이 신하들의 정변(政變), 즉 인조반정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로 인해 온갖 악명을 선조가 덮어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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