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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책으로 세상 읽기

세르히 플로히의 《체르노빌 히스토리》

1986년 체르노빌을 빼닮은 2021년 K방역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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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정책, 保身주의, ‘가짜 뉴스’ 타령, 탁상행정, 展示행정, 책임 전가라는 면에서 흡사
⊙ 체르노빌 사고 1년 전 原電 관련 부정적 보도 금지
⊙ “책임 안 지려는 소련 관료들은 소련이라는 체제의 회사원이었다”
⊙ 주민 疏開 호소하는 原電 민방위대장에게 “자네는 민심 동요자!”라고 질책
⊙ 고르바초프, 정상 상태임을 과시하기 위해 키예프에서 노동절 행사 강행 강요
⊙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신뢰와 연대감은 체르노빌 참사에 대한 정보를 다루는 정부의 방식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참사에도 불구하고 독립 후 原電 계속
  지난 7월 23일 MBC는 도쿄올림픽 개막식 방송을 하면서 몇몇 나라를 소개할 때에 ‘부적절한’ 사진이나 자막을 사용했다. 이 일은 외국 언론에도 널리 보도되었다.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MBC는 사과하고 관련자들을 문책했다. 하지만 MBC 보도는 대한민국의 국가 이미지와 국격(國格)에 쉽게 만회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MBC가 부적절하게 소개한 국가 가운데서도 가장 악성(惡性)은 우크라이나를 소개할 때 1986년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原電) 사고 사진을 사용한 것이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안겼는지를 도외시한 무지하고 무신경하고 무자비한 행위였다. “제정신이냐?”는 비난이 빗발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체르노빌 히스토리》(책과함께 펴냄)는 바로 이 체르노빌 원전 사고라는 비극(悲劇)을 다룬 책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다룬 최초의 포괄적 역사서’(《타임스》)라는 평가를 받는 이 책의 저자는 세르히 플로히. 저자는 “나는 역사학자이자 사고 생존자로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저자의 이력을 보면, 이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957년 소련 고리키(현 러시아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난 저자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대학을 졸업한 후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타라스 세프첸코 키예프국립대학에서 국가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역사에 관한 한 탁월한 책을 많이 냈다. 탈냉전(脫冷戰) 이후인 1991년에 캐나다로 이주해 앨버타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있다가 2007년부터 하버드대학 ‘미하일로 흐루세프스키’ 석좌교수 겸 우크라이나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학자로서 이력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세르히 플로히가 체르노빌에서 500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강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고로 직접 피해는 보지 않았지만, 경찰관으로 현장에 파견되었던 대학 동기는 이후 한 해 최소 한 달 이상은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저자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부터 소련 붕괴에 이르는 기간 동안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우크라이나인들의 정치·사회 의식에 미친 영향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이자 사고 생존자로서 저자는 이 책에서 옛 소련공산당 및 KGB(소련국가보안위원회・비밀경찰) 문서들을 활용해,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이 사고가 소련과 우크라이나에 미친 정치·사회적 영향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아주 잘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번역은 2006~2008년 주(駐)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낸 허승철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했다. 역사와 정치는 물론 원전과 관련된 기술적 내용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깔끔한 번역이 돋보인다.
 
 
  체르노빌 原電 소장의 예언
 
허승철 전 駐우크라이나 대사.
  책은 1986년 4월 28일 오전 7시경, 스웨덴의 원전 당직 근무자가 방사선 측정기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타난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원전 내에서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그다음에는 어디선가 원자폭탄이 터진 것으로 여겼던 스웨덴 방사능안전국은 방사선 역학 계산 등을 통해 소련 남동쪽에서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음을 짐작했다. 스웨덴 당국이 수차례 소련 당국에 설명을 요구했지만, 소련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보다 두 달여 전인 1986년 2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7차 공산당대회 이야기로 넘어간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처음 열린 이 대회에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소장인 빅토르 브류하노프도 참석해 있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강력한 원전인 체르노빌 발전소 소장 브류하노프와 소련 원자력 산업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체르노빌 원전소장 브류하노프는 발전소를 위한 명목으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원전 근무자들을 위한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사용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비정상적인 관행에 익숙해진 나머지 점점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라고 개탄한다. 브류하노프는 “작업의 신뢰성과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가 일하는 곳은 일반 기업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리 경미한 사고라도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일이다.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소련 전체가 그런 재앙을 감당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브류하노프의 말들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예언’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경미한 사고라도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되는’ 체르노빌 원전에서 결국 ‘작업의 신뢰성과 안전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면서 엄청난 ‘재앙’이 발생했고, 우크라이나와 소련은 그 재앙을 감당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 논리가 지배한 原電
 
  사고는 기술적인 문제, 현장 실무자들의 미숙함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소련 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된 거대한 인재(人災)였음이 드러난다.
 
  체르노빌 원전은 1977년 12월 1호 원자로가 가동을 시작한 이래, 1978년 12월 2호기, 1981년 12월 3호기, 1983년 12월 4호기가 가동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12월마다 원자로 설치가 완료되고 전력 생산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공산당 지도자와 정부 관리들은 연간 보고에 자신들의 성과를 올리고 싶어 했다. 건설 담당자들과 원전 운영자들은 연말까지 주어진 과업을 완수하지 못하면 두둑한 보너스를 놓칠까 싶어 그랬다는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나기 직전 고르바초프 체제가 막 출발했다는 사실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젊은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브레즈네프 시절 이후 늙은 지도자들의 통치 아래서 쇠락해가던 소비에트 경제를 재건하겠다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에너지 문제 해결이 급선무였다. 이 사실을 잘 아는 공산당 간부들은 원자로를 최대한 많이 건설하기 위해 새 원자로 1기의 건설 기간을 3년에서 2년으로 단축했다.
 
  새로 에너지전력부 장관이 된 아나톨리 마요레츠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나기 두 달 전 열린 공산당대회에서, 여러 개의 원자로를 갖춘 원전 건설 기간을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보다 앞선 1985년 12월 키예프 지역 공산당위원회는 마요레츠가 임석한 자리에서 공사 속도를 가속화하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마요레츠는 에너지 분야에서 업적을 만들어 고르바초프의 총애를 받고 싶어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정기검사를 위해 원전 가동을 중지하는 간격을 늘리고, 수리에 필요한 시간을 줄이라고 요구했다. 그런 식으로 체르노빌 원전은 1985년에 목표 생산량을 10% 초과 달성했다. 과학기술이 아니라 정치 논리가 원전을 지배했던 것이다.
 
 
  방사선 차단벽 없는 원자로 만든 이유
 
브류하노프 체르노빌 원전소장.
  하지만 현장 상황은 엉망이었다. 사용 후 핵연료를 보관할 저장소에 쓰이는 철재 구조물 356t이 불량품이었다. 어떤 공급자가 공급한 자재의 70%가 불량품이었다. 일부 자재는 견적에 맞지 않아 현장에서 다시 가공해야 했고, 다른 자재들은 아예 조달되지도 않았다.
 
  체르노빌 원전소장 브류하노프는 원전이 위치한 프리퍄트시 공산당 위원회 회의에서 “원전 건설 작업의 비효율성은 부적합한 건설 부품과 형편없는 작업장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면서 “일례로 모서리 각도를 맞추는 것과 같은 단순한 작업을 할 때에도 비뚤어진 문틀과 창틀, 못이 박힌 마감재, 잘못된 배관 설치 등 곳곳에 문제가 있었다”고 불평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상당 부분 공산주의 체제가 낳은 고질적인 문제였다.
 
  사고를 낸 체르노빌 원전이 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원자로와는 달리 방사선을 막을 콘크리트 구조물이 없는 등 안전상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고 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소련은 왜 그런 문제가 많은 원자로를 채택했을까?
 
  원래 체르노빌 발전소에서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많이 사용하는 ‘가압경수로형 원자로(PWRs)’와 흡사한 방식의 VVER 원자로를 채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중형기계제작부가 새로 개발한 RBMK 원자로 채택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름만 들어서는 무슨 일을 하는 부서인지 얼른 감이 오지 않는 중형기계제작부는 소련의 원자력 프로그램, 특히 핵무기 개발을 담당하는 거대한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였다. 중형기계제작부는 RBMK 원자로가 건설 및 유지비용이 적게 들고 출력이 강력하다는 이유로 RBMK 원자로를 밀었다. 설계자들은 RBMK원자로가 아주 안전해서 원자로 오작동 시 방사선을 막는 콘크리트 구조물 없이도 원자로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 주장은 입증되지 않은 것이었다. 원전 건설을 담당하는 에너지전력부는 파워게임에서 중형기계제작부에 밀렸다.
 
 
  原電 관련 부정적 보도 원천 봉쇄
 
  사고의 전조(前兆)는 있었다. 1982년 9월 핵연료 채널 하나가 폭발하여 농축 우라늄이 원자로 노심(爐心)으로 누출되는 사고가 있었다. 운영자들이 문제 발생 사실을 깨닫고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는 데까지는 30분이 걸렸다. 이보다 앞선 1975년 11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RBMK형 원자로 내 연료 채널 하나가 녹아서 150만 퀴리의 방사선이 누출되는 사고가 있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오염안전 기준의 30만 배에 해당하는 방사선이 누출됐지만, 이 사고는 은폐되었다.
 
  체르노빌 원전의 수석기술자 니콜라이 포민은 1986년 2월 영어잡지 《소련생활》에 기고한 글에서 체르노빌 원전의 냉각 수조(水槽)에 물고기를 기른다고 밝혀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이는 원전의 안전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말이 됐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있기 두 달 전 기고한 이 글에서 포민은 혹시 사고가 나더라도 자동 안전장치가 즉시 원자로를 가동 중단시킨다고 호언장담했다. 1982년에 있었던 사고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어이없다. 1985년 여름 취임한 마요레츠 에너지전력부 장관이 “에너지원이 미치는 생태학적 영향의 부정적인 결과(자기장, 방사선 누출, 대기·수원·토양오염)에 대한 보고서는 신문, 잡지, 라디오 방송, TV 방송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훈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과 관련된 일체의 부정적 보도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소장 브류하노프는 원자로에서 방사선이 누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배수로와 배기구에서 방사능 물질을 함유한 물이 시간당 50m3씩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증기 배수구는 간신히 오염수를 처리하고 있었고, 그나마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도 알고 있었다. 바로 원전 가동을 중단하고 문제 부분을 수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연간 전기생산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할 게 뻔했다. 브류하노프는 공기(工期) 마감과 목표량에만 관심이 있는 당 관료에게 질책당하고, 자신의 이력에 금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마 목이 달아났을 것”
 
원전 폭발 사고가 난 체르노빌 원전 4호기. 사진=퍼블릭도메인
  1986년 4월 25일, 결국 ‘올 게 왔다. 체르노빌 원전은 4호기의 정기 수리 작업을 위해 원전 가동을 일시 중단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기간 중에 기술자들은 증기 터빈 발전기를 관성(慣性)으로 얼마나 돌아가게 할 수 있으며, 에너지를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을 하기로 했다. 원자로 가동이 중단되는 비상사태에 대비한 실험이었지만, 이 실험이 엄청난 비상사태를 야기하고 말았다.
 
  세르히 플로히는 《체르노빌 히스토리》에 이 실험에서 기술자들이 큰 긴장감 없이 다분히 타성적(惰性的)으로 실험에 들어가고, 일상적인 교대근무 원칙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관계자들이 문제를 발견해 당황하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야기하게 되는 과정을 드라마처럼 그려낸다. 그 과정을 여기서 상술(詳述)할 필요는 없겠다. 기술자들은 문제 발생을 인식했을 때, 바로 원전 가동을 중단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원자로 4호기 교대팀장 이고르 카자치코프의 말은 인용해둘 가치가 있다.
 
  “왜 나나 동료들이 원자로 가동 중지를 하지 않았는가? 우리 중 누구도 이 조치가 사고를 유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자로 생산자 매뉴얼에서는 가동 중지 지연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원자로 가동을 중지시켰다면 호되게 질책을 받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예정된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서둘렀다.”
 
  ‘만일 원전 가동을 중지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카자치코프는 이렇게 답했다.
 
  “아마도 나는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대통령이 요구하는 탈원전 정책의 절차적 하자(瑕疵)를 지적하는 부하 직원들에게 강요하면서 “너 죽을래?”라고 협박했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모습이 떠오른다. 카자치코프의 작업을 이어받은 교대팀장 유리 트레후프가 송전감독관으로부터 어렵게 가동 중지 허락을 받아냈지만, 원자로는 이미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버렸다.
 
  4월 26일 새벽 1시23분44초, 원자로가 폭발했다. ‘엘레나’라는 별명을 가진, 4호기 지붕을 덮고 있던 200t 무게의 콘크리트 덮개가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다시 원자로 위로 떨어졌다. 그러면서 덮개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소련이라는 ‘회사’의 회사원
 
  대재앙이 시작됐지만, 원전 관계자들은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그들은 ‘원자로는 폭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에 애처로울 정도로 매달렸다. 원전소장 브류하노프는 방사선 측정 결과를 보고하는 원전 민방위대장 세라핌 보로베프를 방에서 내보냈다. 보로베프는 원전의 공산당 위원장 세르게이 파라신을 찾아갔지만, 파라신은 “소장에게 가서 잘 말해보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키예프주 당위원회 부위원장 볼로디미르 말로무시를 비롯한 지역의 공산당 간부들이 달려왔지만 그들이 하는 소리는 한결같았다.
 
  “겁먹지 말게! 사고대책위원회가 곧 도착해서 조사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네.”
 

  관료들의 이러한 작태에 대해 소련 시절을 겪었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소련의 관료들은 오랜 기간 공산당 통치가 그들에게 가르친 대로 나서서 책임지지 않는 것을 답습했다. 그들 모두 공황을 확산시켰다는 비난을 받을까 봐 두려워했고, 자신의 상급자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까지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회사원이었고, 그 ‘회사’는 소련이라는 체제였다.”
 
  소련이라는 ‘회사’의 임원이나 CEO도 하급 당 관료들보다 나을 것은 없었다. 4월 26일 새벽 5시경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첫 보고를 받았다. 체르노빌 원전에서 폭발과 화재가 있었으나 원자로는 무사하다는 보고였다. 소련 과학아카데미 원장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로부터 평소 “RBMK 원자로가 사모바르(러시아의 찻주전자-기자 주)보다 위험하지 않으며 붉은광장에 설치해도 될 정도로 안전하다”는 말을 들어온 고르바초프는 일단 안심했다. 에너지전력부 장관 마요레츠는 현장으로 가기 위해 새벽 5시에 사무실을 나섰지만, 그의 관심사는 사고가 아니라 전력 공급에 얼마나 차질이 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현실 부정
 
  원전 사고 현장으로 달려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원자력산업 전문가 블라디미르 마린 등 고위 인사들은 원자로의 핵반응 영역에서 튀어나온 것이 분명한 흑연 조각들이 발에 차이고 호흡 곤란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원자로 폭발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원전이 위치한 프리퍄트시 공산당 시당 위원장은 시내 상황이 평온하고 예정된 결혼식들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나마 우크라이나 내무부 장관인 헨타디 베르도프 장군이 프리퍄트 시민들을 소개(疏開)해야 할 경우에 대비해 버스 약 1100대를 징발해놓았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마요레츠 에너지전력부 장관이 펄쩍 뛰었다.
 
  “주민 소개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당신들, 공황사태를 일으킬 셈이오?”
 
  체르노빌 원전의 민방위대장 보로베프는 키예프에 있는 우크라이나공화국 민방위본부에 전화를 걸어 방사선 누출의 심각성을 보고하면서 주민들에게 사태를 알려야 한다고 건의했다가 이런 소리를 들었다.
 
  “자네는 민심 동요자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런 보고를 하면 우리 목이 날아가는 걸 모르나?”
 
  후일 우크라이나 민방위본부는 실제 보고 시각보다 나중에 보로베프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것처럼 관련 기록을 조작했다.
 
  RBMK 원자로 개발에 참여하고 체르노빌 원전에 이를 채택하도록 밀어붙였던 중형기계제작부 장관 예핌 슬라프스키는 그날 저녁 열린 회의에서 2시간 내내 RBMK 원자로의 우수성을 역설했다.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리 없었다. 우크라이나공화국 수뇌부는 원자력 관련 과학자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마지못해 프리퍄트 시민들의 소개에 동의했다. 당국은 소개 작전에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원전 관계자들에게 함구령(緘口令)을 내렸고, 언론의 보도와 취재를 막았다. 폭발이 일어난 지 36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소개까지는 1시간 반밖에 안 남았지만, 쇼핑센터의 식당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어린이들과 부모들로 가득했다.
 
  소개되는 시민들도, 소개 작전을 진행하는 당국자들도 방사선 오염에 대한 경계는 전혀 없었다. 시민들은 방사선에 오염된 옷과 소지품들을 가지고 프리퍄트를 떠났다. 주민들을 소개시키는 데 동원됐던 버스들은 전에 다니던 정규 노선에 다시 배치됐다. 이 버스들은 고준위(高準位) 방사선의 슈퍼 전파자가 됐다.
 
 
  사고 사흘 만에 첫 보도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 사진=퍼블릭도메인
  고르바초프 당시 공산당 서기장은 집권 이후 ‘글라스노스트(정보 공개・개방)’를 주창했지만, 말만큼 행동이 뒤따르지는 않았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한 후 고르바초프는 한동안 국제사회의 빗발치는 정보 공개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소련 정권이 해오던 대로 ‘귀를 막고 입을 닫는’ 쪽을 선택했다.
 
  소련 방송은 사고가 일어난 지 거의 사흘이 지나고, 스웨덴이 자국에서 측정된 고준위 방사선 수치를 공개한 지 12시간이 지난 후인 4월 28일 저녁에야 이렇게 보도했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원자로 1기가 손상됐다. 사고 결과를 처리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고,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도움이 제공되었다. 사고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사고 조사를 진행할 것이다.”
 
  그게 다였다.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당시 공산당 수뇌부가 전보다 전향적(前向的)인 태도를 취한 결과가 고작 그 정도였다.
 
  더 어이없는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4월 30일, 우크라이나공화국 공산당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5월 1일과 2일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열리는 노동절 행사에 관한 것이었다. 언필칭 ‘노동자·농민의 나라’인 소련에서 노동절 행사는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의장 발렌티나 세프첸코는 모스크바에서 노동절 행사를 예정대로 진행하라는 지시를 내려보냈다고 회고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정치국은 노동절 퍼레이드 시간과 참가 인원수를 축소하되, 행사는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서방과의 프로파간다 전쟁에서 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볼로디미르 셰르비츠키는 정치국원들과 시 당국자들이 자녀와 손자・손녀를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참가해 키예프 시민들에게 상황이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촉구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키예프 시내 중심부를 행진하는 행복한 시민들을 보여주는 TV 방송과 신문 사진은 모든 것이 정상이고, 공산당이 통제력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내외 시청자, 신문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좋은 메시지가 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 노동절 행사 강행 강요
 
체르노빌 원전 사고 후 소련 당국은 군 헬기를 투입해 원전 방사능 제거 작업을 벌였다. 사진=퍼블릭도메인
  5월 1일 아침, 퍼레이드가 예정된 키예프시 중심부 흐레샤티크 거리의 방사선수치는 시간당 2500마이크로뢴트겐까지 치솟았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볼로디미르 셰르비츠키는 행사 시작 직전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도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었다. 후일 셰르비츠키의 아내는 “고르바초프가 ‘만일 퍼레이드를 진행하지 않으면, 당신은 당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술회했다. 셰르비츠키는 “그(고르바초프)는 지옥에나 가라고 해”라고 저주를 퍼부으면서 행사장 단상에 올랐다. 우크라이나공화국 공산당 제1서기라는 고위 간부도 소련 체제하에서는 ‘고위직 회사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통 복장을 한 민속공연단, 마르크스·엥겔스·레닌 등 ‘공산주의의 영웅들’과 고르바초프 이하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들의 사진을 든 젊은이들이 행진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행사에 참석한 부모들, 아이를 목말을 태우고 행진하는 젊은 아버지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방사선 피폭자가 됐다. 4월 24일부터 5월 12일까지 키예프에 머물렀던 한 임신부는 그해 7월 사산(死産)했다. 그는 후일 조사위원회에 보낸 서면 답변에서 “그날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인사했던 우크라이나 지도자들 모두를 저주한다”고 했다. 키예프의 노동자 레오르히 랄은 우크라이나 의회 조사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정부는 나를 기만했고, 배신했다. 체르노빌 사고가 났을 때, 나는 이것을 우리 정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외국 정부의 발표를 듣고 알았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정부의 희생자들은 또 있었다. 현장으로 달려간 키예프의대 학생들을 비롯한 의료진, 치안 유지를 위해 투입된 경찰·예비군·군인, 방사선 차단을 위해 모래주머니를 투하하는 작업에 투입된 헬기 조종사, 그리고 콘크리트로 폭발한 원자로 주위를 밀봉하는 작업에 동원된 노동자 등이 그들이다. 그들에게는 변변한 방사선 방호 장비도 제공되지 않았다. 방사선에 오염된 흑연 조각들을 손으로 치우는 작업에 투입된 군인들은 납조각을 넣어 만든 사제 방사선 방제복으로 ‘중요한 부위’를 가려야 했다. 사실 이러한 작업 가운데 상당수는 그 효과는 분명치 않지만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의 거짓말
 
  우크라이나인들을 비롯해 소련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한 것은 러시아어나 우크라이나어로 방송되는 〈미국의 소리〉나 〈자유라디오〉 방송이었다. 그러는 동안 KGB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관련된 ‘가짜 뉴스’(실은 ‘진짜 뉴스’)를 추적하고 단속하느라 바빴다.
 
  고르바초프가 원전 사고에 대해 TV를 통해 공식적으로 입을 연 것은 사고 발생 18일 후인 5월 14일이었다. 그는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우리는 모두 최근에 불행이 닥친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1941년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이 국민들에게 쓴 ‘형제자매 여러분’이라는 말 대신, ‘우리’라는 말을 씀으로써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신뢰와 연대감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소련 시대에 그런 것들이 조금이라도 존재했다 하더라도, 체르노빌 참사에 대한 정보를 다루는 정부의 방식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고르바초프는 이 연설에서 “우리는 주요 보도원들에게서 믿을 만한 정보를 얻는 대로 소련 국민들에게 전달했고, 외교 채널을 통해 외국 정부에도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이날 연설의 절반 이상을, 사태의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미국·서독 등 서방국가들을 비난하는 데 할애했다.
 
  5월 8일 서방기자단과 한스 블릭스 IAEA 사무총장이 현장을 방문했다. 소련 당국자들은 서방기자들이 방문할 병원의 침대보를 새것으로 갈고, 블릭스 사무총장이 헬기를 타고 갈 때 군사기지를 보지 못하도록 막는 데 신경을 썼다.
 
 
  꼬리 자르기
 
폐허가 된 체르노빌. 사진=퍼블릭도메인
  이런 상황에서 사고 원인에 대한 솔직한 진단이 나올 수 없었다. 사고대책위원회는 그해 7월 소련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원자로 건설 과정의 결함을 인정하면서도 “운영 책임을 맡은 인력이 범한 실수가 사고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해 8월 25~29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체르노빌 사고 관련 국제학술회의에서 소련 대표 발레리 레가소프는 전에 없이 솔직한 태도로 소련 원자력 프로그램의 실태와 사고 경위・대책 등에 대해 보고했다. 세계는 소련의 달라진 모습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레가소프도 “사고의 근본 원인은 원전 운영자들이 유발한, 극히 일어나기 힘든 운영 절차와 운전 모드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체르노빌 원전소장 브류하노프를 비롯한 원전 관계자들이 사법 처리 대상이 됐다. 브류하노프, 수석기술자 니콜라이 포민, 차석기술자 아나톨리 댜틀로프 등은 방사선 피폭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법정에 섰다. 이들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는 징역 2~4년이 선고됐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였다. 반면에 문제의 원자로를 개발하고 채택을 강요했던 중형기계제작부 장관 예핌 슬라프스키를 비롯한 고위층 인사들은 조용히 공직에서 물러나는 데 그쳤다.
 
  이런 이야기들은 책을 읽는 이들을 우울하게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비겁한 자들의 이야기와는 달리 영웅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원전 폭발 사고 직후 현장으로 달려가 자기가 죽게 될 줄도 모르고 사투(死鬪)를 벌였던 소방관과 경찰관들, 추가 폭발을 막기 위해 원전 4호기 밑에 고인 물을 빼내려 방사능으로 오염된 저수조로 뛰어든 잠수부들의 얘기는 감동적이다. 쉬쉬하며 모스크바로 이송된 소방관·경찰관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던 가족들의 이야기는 가슴을 시리게 한다.
 
 
  우크라이나 독립 촉진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고르바초프는 사태 초기에 기존 소련 공산정권이 해오던 타성에 따라 행동했지만, 곧 그 한계를 깨달았다. 그는 소련 체제의 변화를 위해 글라스노스트(개방),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저자는 “이 전환점은 소련 언론 발전과 미소(美蘇) 관계, 소련 붕괴의 시작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련은 이제 최후의 단계에 들어섰다. 앞으로 수많은 나쁜 뉴스가 터져 나오고 체르노빌 사고 이후 소련 정권은 이를 국민과 세계에 숨길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제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추진한 정치개혁을 노쇠한 소련 체제는 견뎌내지 못했다. 결국 1991년 12월 소련제국은 붕괴하고 말았다.
 
  우크라이나 독립은 소련 체제의 붕괴를 앞당긴 힘 중 하나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환경·반핵(反核)운동을 중심으로 시민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우크라이나인들은 모스크바(러시아)와는 다른 우크라이나의 정체성(正體性)을 찾아 나섰다. 이러한 노력은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에 힘입어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흐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1991년 8월 수구(守舊) 세력의 쿠데타가 불발로 끝난 후, 소련 체제가 자신들을 어떻게 기만(欺瞞)했는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감연히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던 소련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체르노빌 사고는 우크라이나 독립의 기폭제였던 셈이다.
 
 
  우크라이나, 原電 포기 안 해
 
  그런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 수감 중이던 체르노빌 원전 관계자들은 가석방 등의 형태로 석방됐다. 독립 우크라이나에서 이들은 모스크바의 러시아인들에게 이용당하다가 억울하게 죄를 입은 희생양(犧牲羊)으로 비쳤다.
 
  이들만 되살아난 것이 아니었다. 원전도 되살아났다. 저자에 의하면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초기에 투입됐던 소방관 28명을 비롯해 모두 50명이 급성 방사선 피폭으로 사망했고, 4000명 이상이 이후 방사선 피폭 관련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저자는 사망자 추산치는 2005년 유엔의 담당 부서가 내놓은 4000명에서부터 국제그린피스가 낸 9만명 사이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소련 체제 붕괴를 전후한 몇 년 동안 체르노빌 원전을 비롯한 우크라이나 내의 원전 폐쇄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처럼 보였다. 하지만 독립국이 된 우크라이나는 현실적으로 원전만 한 에너지원을 찾아낼 수 없었다. 폭발한 4호기를 제외한 나머지 체르노빌 원전들은 우여곡절 끝에 2000년 문을 닫았지만, 우크라이나는 원자력 발전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부제(副題)가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방식’인 이 책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문재인 정권하의 대한민국이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하는 방식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소련보다 얼마나 나은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고위층, 의학의 논리가 아니라 정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방역 및 백신 정책, 윗전의 눈치를 보면서 보신(保身)에만 급급한 관리들, 불리한 뉴스는 ‘가짜 뉴스’로 몰아버리려는 정부, 현장 상황에 무지한 (혹은 현장 상황을 무시하는)탁상행정,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식’ 홍보, 통치 세력의 뜻에 영합하는 전시(展示)행정, 책임 전가(轉嫁)…. 35년 전 소련의 모습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보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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