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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지금을 읽는 ‘新당의통략’ 〈7〉

지옥 문을 연 기축국옥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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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감사 한준이 정여립의 모반 사실 告變하면서 東人 숙청의 피바람 불기 시작
⊙ 박충간·이축이 주도하고, 조정의 명망이 있던 한응인을 끌어들여 송익필과 교신하며 사건을 만들어냈을 가능성
⊙ 정여립과 친분이 있으면 罪 얻어… 1000여명 처형
⊙ 東人은 물론 東人의 기반인 호남 소탕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송익필이 숨어 살았던 전북 진안의 운장산. 사진=조선DB
  선조 22년(1589년) 기축년(己丑年)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비극을 잉태한 해다. 우리가 흔히 ‘정여립(鄭汝立)의 난(亂)’으로 부르기도 하고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부르기도 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에 대해 가해자 서인(西人)과 피해자 동인(東人)의 사건에 대한 시각이 극과 극으로 다르고, 특히 그 후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해 서인 정권 300년이 이어지면서 사실상 피해자의 입장과 진술은 어디서도 말할 수 없게 되면서 사건의 실상에 접근하는 일 또한 어렵게 돼버렸다.
 
  그런 점에서 비록 소론(少論)의 입장이기는 하나 크게는 서인에서 분파된 노론(老論)과 소론 중 하나인 소론 집안의 이건창(李建昌)이 쓴 《당의통략(黨議通略)》은 분명 이때 일어난 비극의 전반적 성격을 아는 데는 결정적 길잡이임이 분명하다. 이건창은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이 정여립이 아니라 송익필(宋翼弼)임을 분명히 하는 데서 글을 시작한다. 먼저 이건창이 전하는 이 사건의 개요를 보자.
 

  “송익필은 하처(下賤·낮은 천민)로 태어났으나 재주와 기개가 있어 이이(李珥), 성혼(成渾)이 그를 친구로 사귀었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서인의 모주(謀主)라고 불렀다.
 
  이때 송익필은 사람들과 방죽둑을 다투다가 형관(刑官)에게 쫓기는 신세가 돼 군색하기가 심해져 이 사건을 벗어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성혼·정철의 문인과 빈객들 중에서 호남에 사는 사람들과 서로 왕래하며 모의해 정여립이 모반하려는 실상을 다 얻어 시골사람을 시켜 고변하게 했다. 정여립은 호남에 살았는데 정여립을 고변한 글은 처음에 황해감사로부터 왔다. 이는 송익필이 황해도 배천(白川)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운장산과 구봉산
 
  송익필은 그에 앞서 전라도의 산속에 숨어 있다가 이 무렵 아버지 송사련의 고향이기도 한 황해도로 숨어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당시 송익필이 전라도에서 숨어 지냈던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에 있는 운장산(雲長山)이 그것이다. 《두산백과》를 찾아보니 운장산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돼 있다.
 
  〈높이는 1126m이다. 산 이름은 산중(山中) 오성대에서 은거하던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 운장 송익필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지며, 19세기 중엽까지는 주줄산으로 불렀다.〉
 
  사소한 오류가 몇 가지 있다. ‘오성대’는 ‘오상대’의 잘못이다. 전하기로는 바로 이곳에서 송익필이 숨어 지냈다고 한다. 또 그는 중종 때 태어나기는 했지만 명종 때를 지나 선조 때 활약했던 주자학의 거두다. 그리고 운장은 그의 자(字), 구봉(龜峰)은 그의 호(號)다. 그는 호보다는 자를 중시한 인물이다. 우리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송익필의 재전(再傳)제자인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그의 묘갈명(墓碣銘)에는 이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증언이 들어 있다.
 
  “선생은 자신이 고도(古道)를 지키는 입장에 서서 제아무리 공경(公卿) 귀인(貴人)이라도 이미 그와 허교(許交)를 했을 경우 모두 대등한 위치에서 대했고 호칭도 그들의 자를 부르고 관직으로 부르지 않았으므로 욕을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선생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호(號) 구봉은 그가 평생 제자를 가리키며 살았던 지금의 경기도 파주출판단지 옆에 있는 심학산(尋鶴山)의 옛 이름 구봉산(龜峰山)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도 그 일대의 지명이 구산동(龜山洞)이다.
 
 
  황해감사의 告變
 
  《당의통략》에서 다음으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정여립은 호남에 살았는데 정여립을 고변한 글은 처음에 황해감사로부터 왔다. 이는 송익필이 황해도 배천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부분이다.
 
  첫째, 정여립이 설사 모반을 꾸몄다 해도 전라도 관찰사가 고변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충청도와 경기도를 지나야 있는 황해도 관찰사가 고변을 했다.
 
  둘째, 그 이유를 이건창은 “이는 송익필이 황해도 배천에 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핏 보면 잘 연결이 안 되는 문장을 통해 아마 이건창은 이 사건의 진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남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라고 하지만 여전히 송익필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첫째 문제부터 짚어보자. 《선조실록》에는 1589년 10월 2일 황해감사가 밀계(密啓)를 올린 것으로 적고 있다.
 
  〈황해감사의 비밀 서장을 입계(入啓)하자, 그날 밤 삼공(三公) 및 육승지를 불러 인대(引對)하고, 입직(入直)한 도총관(都摠管) 및 옥당(玉堂·홍문관 관리)이 다 입시(入侍)했는데, (황해도) 안악(安岳)·재령(載寧) 등처에서 일어난 역모 사건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 등처로 나누어 보냈는데, 전라도에는 정여립이 괴수였다. 검열(檢閱) 이진길(李辰吉)을 정여립의 생질(甥姪)이라 하여 입시에서 제외했다가, 얼마 안 돼 하옥시켰다.〉
 
 
  “정언신, 홀로 나지막한 소리로 킬킬 웃어”
 
  그런데 훗날 서인 입장에서 고쳐쓴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날의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적고 있는데, 주로 정여립의 역모 행태와 그 수하들이 황해도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를 실명을 다 언급하며 전하고 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이 얼마나 서인들의 악의(惡意)에 의해 고쳐졌는지 다음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선조가 고장(告狀)을 읽어나가니 좌의정 이산해(李山海)를 비롯한 입시한 신하들이 벌벌 떨고 “모두 목을 움츠리고 등에 땀이 배었으나 정언신(鄭彦信)은 홀로 나지막한 소리로 킬킬 웃으니 상이 그 소리를 들었다”고 적고 있다. 정언신은 우의정으로 정여립의 친척이기도 해 얼마 후에 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자리에서 “킬킬 웃으니”라는 것은 이날 《수정실록》의 기록 자체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황해감사 한준(韓準)이 올린 밀계의 개략적 내용은 이렇다. 이 밀계에는 황해도의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이 연명(連名)을 했다. 밀계의 골자는 홍문관 수찬을 지낸 전주의 정여립이 모반의 괴수로, 한강이 얼게 되면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한양으로 쳐들어가 장군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역모에 가담했던 안악의 조구(趙球)라는 사람이 자복을 하는 바람에 역모 사실을 알게 되어 보고한다고 돼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준이라는 인물에 주목해야 한다. 훗날 그는 이조판서까지 오르게 된다. 또 그는 이 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봉해진다. 평난공신은 도대체 뭔가?
 
 
  西人 일색의 平難功臣
 
이항복
  고변으로부터 두 달쯤 지난 1590년 1월 1일 선조는 역모 가담자들을 어느 정도 소탕했다고 여기고선, 난을 평정했다고 해 ‘평난공신(平難功臣)’을 책봉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번 역적의 변고는 종전에 없던 일인데 그 거사(擧事)가 두어 달밖에 안 남았었으니, 만약 박충간(朴忠侃) 등이 협모(協謀)하여 체포하고 의로움에 의거해 토적(討賊)하지 않았던들 종묘사직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것이 신하 된 자의 직분이라고는 하지만 진실로 평범하게 포상할 수는 없다. 그 충성을 포상하고 그 공을 보상하는 식전(式典)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조종조의 전례에 의해 원훈(元勳) 박충간·이축(李軸)·한응인·민인백(閔仁伯)·이수(李綏)·강응기(姜應棋)는 우선 공신으로 삼으라.”
 
  그래서 얼마 후에 등급을 정해 모두 22명이 3등까지 녹훈된다. 1등은 박충간·이축·한응인 3인이고, 2등은 민인백·한준·이수·조구·남절(南截)·김귀영(金貴榮)·유전(柳琠)·유홍(兪泓)·정철(鄭澈)·이산해·홍성민(洪聖民)·이준(李準) 12인이며, 3등은 이헌국(李憲國)·최황(崔滉)·김명원(金命元)·이증(李增)·이항복(李恒福)·강신(姜紳)·이정립(李廷立) 7인이다. 1590년 8월 15일에 임금은 이들에게 교서를 내리고,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를 열어 특전(特典)을 베풀었다. 이 중에서 좌의정 이산해를 제외한다면 거의 서인 일색이다.
 
  여기서 눈길이 가는 인물은 이항복이다. 훗날인 선조 37년(1604년) 5월 16일 그가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 사관은 그에 대해 ‘인간의 수치스러운 일을 알고나 있는가?’라고 적고 있다. 기축옥사로 동인은 없어지고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으로 갈렸으니 대체로 북인들이 쓴 《선조실록》임을 감안할 때 이 사건에 대한 북인들의 분노를 읽어볼 수 있는 실마리라 하겠다.
 
  고변 자체만 놓고 본다면 당연히 1등이 돼야 할 한준은 2등으로 밀렸고, 그 아래에 있던 박충간·이축·한응인 세 사람만 나란히 1등이었다. 즉 한준은 문서 전달자에 불과했고, 실제 공작은 박충간·이축이 주도하고, 조정의 명망이 있던 한응인을 끌어들여 세 사람이 송익필과 교신하며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크다. 모두 서인이기 때문이다.
 
  박충간은 그 후 형조참판까지밖에 못 올랐다. 이축은 형조판서와 우참찬을 역임했다. 셋 중에 가장 높이 오른 한응인은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2등에 책록된 민인백은 정여립이 있던 곳의 현감으로 송익필의 친구 성혼의 문인이다. 도대체 전라도의 한 현감이 무슨 공로가 있어 한준과 나란히 2등에 책록된 것일까? 또 이수나 조구는 황해도에 있으면서 정여립에 가담했다가 등을 돌려 고변을 한 인물이다. 오히려 처벌받아야 할 자다. 남절은 안악군수 이축의 집안 동생으로 민간에 떠도는 역모설을 이축에게 전달한 것이 전부다.
 
 
  피바람의 시작
 
정철
  이렇게 해서 장장 1년 가까이 끌게 되는 기축옥사의 서막이 열렸다. 그런데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10월 2일에 고변이 이뤄졌고 당일에 모두 잡아들이라는 선조의 엄명이 있었다.
 
  5일 후인 10월 7일에 정여립이 도망쳤다는 의금부 도사 유담의 보고가 올라왔다. 그리고 10월 11일 4년째 낙향해 있다가 맏아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경기도 고양에 와 있던 돈녕부 판사 정철이 나름의 정보망을 동원해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선조에게 밀계를 올렸다. 실록에는 그 내용에 대해 “역적을 체포하고 한양과 지방의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정철의 등장 또한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서인의 《선조수정실록》은 정철의 등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먼저 황해도 쪽에서 관련 혐의자들이 속속 잡혀 들어왔다. 이들의 입에서는 정여립과의 공모 ‘사실’이 하나둘 드러났다. 물론 자백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고변으로부터 보름이 지난 10월 17일 정여립이 진안의 죽도에 숨어 있다가 관군에게 발각돼 포위되자 스스로 칼자루를 땅에 꽂고 엎어져 자기 목을 찔러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아들 정옥남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틀 후 선조는 창경궁 선정전에서 정옥남을 친국(親鞫)했다. 그리고 10월 27일 백관들이 차례로 서서 보는 가운데 역모 관련자들은 능치처참을 당해 저잣거리에 머리가 내걸렸다. 정여립의 시신도 한양으로 가져와 저잣거리에 내걸었다. 그러나 피바람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당쟁에 유생·생원들이 동원되는 시초
 
  옥사가 진행되는 동안 동인의 이산해·정언신은 의정부에 포진해 있었고, 이발·백유양 등은 언론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정여립의 역모를 이이의 문인들의 모함으로 보았다. 심지어 정여립은 역적질할 사람이 못 된다고까지 거들었다. 오판(誤判)이었다.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여립의 모반계획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났다. 적어도 이에 관해서는 동인 입장에서 서술된 《선조실록》이나 서인의 입장에서 서술된 《선조수정실록》이나 견해를 같이한다. 두 실록의 서술이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그 이후부터다.
 

  《선조실록》은 그 정도에서 끝날 일을 엄청나게 확대한 인물로 정철을 지목한다. 이 점은 사실이다. 10월 28일(《선조수정실록》은 11월 1일) 양천회라는 생원이 글을 올린다. 역모 관련자들이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 바로 다음 날이다. 조헌(趙憲)의 소(疏)를 연상시키는 이 글은 그 후에도 당쟁에서 유생이나 생원들이 동원되는 시초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양천회는 자신이 호남 출신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같은 호남인 정여립과 이발을 한데 엮고 있다. 이미 송익필이 모사(謀事)하는 서인은 정여립을 이발(李潑)을 잡는 미끼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양천회의 상소
 
  〈신은 호남 출신으로 역적의 정상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여립은 흉악하기 짝이 없고 탐학음잔(貪虐淫殘)하여 사림(士林)의 매도를 받아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그가 당초 글 읽는 사류(士流)에 붙어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차지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발 형제가 남도(南道)에 왕래하면서 서로 결합하였습니다.
 
  그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세상에서 큰 명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발 형제도 그들을 존경할 때였으므로 여립을 천거하여 새로 그 문하(門下)에 드나들다가, 이이와 성혼이 세력을 잃은 뒤에는 여립이 맨 먼저 창끝을 돌려 이발 등과 안면을 바꾸고 붕당을 지어 남을 참소하고 재얼(災孼·재앙)을 만들어 충현(忠賢)들을 모함할 계획을 세웠는데, 다행히 천감(天鑑)이 매우 밝아 간사한 짓을 환히 살피고 채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립이 앙심을 품고 상을 원망하여 역모를 일으켰으니, 불궤(不軌·역모)의 마음을 몰래 지니고 도참설(圖讖說)을 퍼뜨려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고 도당을 모아들인 음모비계(陰謀秘計)와 패역완흉(悖逆頑兇)은 신자(臣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으로, 예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아무리 많았어도 여립보다 더한 자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종묘사직의 위령(威靈)과 천지의 묵우(默祐)로 흉모가 먼저 드러나자 형세가 궁지에 몰려 스스로 목 찔러 죽었으니, 어찌 국가의 큰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조정의 신하들이 처음에는 이 변을 듣고 도리어 역적 구출에 전력하여, 혹자는 이이의 제자들이 무고하여 사건을 야기시켰다 하고, 혹자는 여립의 사람됨은 충성이 태양과 같다 하였고 심지어 한준을 그르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조정의 논의가 그러했기 때문에 의금부 도사 유담 등이 감히 출동에 태만하고 포착(捕捉)에 소극적으로 임하였던 것입니다. 신이 지난 4일 오후에 유담 등을 이산현(尼山縣) 앞에서 만났는데, 휘장을 쳐놓고 휴식하는 모습이 평일과 다름없었으며, 나팔이 계속 울리고 뒤따르는 자들이 길을 메웠습니다. 그는 미관(微官)인 무부(武夫)로서 조정의 뜻을 받들고 시의(時議)에 부합할 줄만 알 뿐이니, 어찌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알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태학(太學)의 제생(諸生·여러 유생)도 구출론을 제의하여 상소를 올려 구출하려고까지 한 자가 있었습니다. 추관(推官·수사책임자) 또한 사실대로 심문하지 아니하므로 외부의 여론이 자자하여 심지어 억수(億壽)의 초사(招辭)에, ‘경중(京中)의 가까운 친족 중에 정여립과 서로 가깝게 왕래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고 하자 정언신이 ‘속히 곤장을 세게 치라’ 하고 심문하는 바가 전혀 없었고, 추관 중에 힐문(詰問)하려는 이가 있으면 정언신은 문득 언짢아하는 기색을 보였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정여립과 친분 있으면 罪 얻어
 
  이어 양천회는 명백하게 사건의 처리 방향까지 제시한다. 즉 실상을 떠나 친분만으로도 처벌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원흉이 오형(五刑)에 복주(伏誅)되고 친당이 연좌율(連坐律)에 처해졌으며 그 문생이나 친구를 경중에 따라 죄를 적용시킨 것은 그들이 모두 역모에 참여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다만 평소 역적과 절친한 사이였다면 오늘의 사리나 형편으로 보아 약간의 견벌(譴罰)을 보여서 악(惡)을 미워하는 의리를 엄격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곧 역란(逆亂)의 싹을 봉쇄하고 미연의 화(禍)를 막자는 것입니다. 지금 역적이 죽음을 함께할 벗으로 결탁하여 심복이나 형제와 같은 사이로는 이발·이길(李洁)·백유양 등이 있고, 절친한 친척 사이로는 정언지(鄭彦智)·정언신 등 많이 있어 서로 친밀하고 다정한 사이임을 길 가는 사람도 다 아는 사실인데, 오히려 조정의 녹을 먹고 대궐에 드나들며 길거리에서 소리치는 등 의기양양한 기세가 평일과 다름이 없는데 한 사람도 소장(疏章)을 올려 자핵(自劾)하는 자가 없으므로, 인심이 저마다 통분(痛憤)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일개 생원의 작품일 수 없었다. 글은 이산해와 정언신, 즉 좌의정과 우의정 등 동인 핵심을 겨냥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사건은 역모라는 사실 규명에서 벗어나 정여립과의 친분 문제로 죄를 얻게 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양천회는 정여립과 친분이 두터웠던 조정의 인물로 김우옹(金宇顒)과 최영경(崔永慶)까지 언급한다. 《선조실록》은 그래서 “이 소(疏)는 정철 등이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즉 동인들)을 모조리 죽이기 위하여 양천회를 사주(使嗾)하여 올린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조헌이 ‘송익필의 사주’로 글을 올렸다는 동인들의 지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양천회는 글의 말미에서 조헌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전날 조헌이 여러 차례 소장(疏章)을 올려 귀근(貴近)을 논박하였습니다. 비록 그 말이 우직하고 인거(引據)가 과도하였으나 그 본심을 따져보면 사실 충군애국(忠君愛國)에서 나온 것인데, 죄를 얻고 먼 곳에 유배되어 한 몸으로 도깨비들의 재해를 막고 있어 역적들의 마음을 유쾌하도록 만든 것 같으니 국맥(國脈)을 손상하고 사기(士氣)를 좌절시킴이 너무 심합니다. 지금이라도 속히 조헌을 소환하여 진언(盡言)에 대한 상(賞)을 내리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급변하는 정국
 
  11월 4일에는 예조정랑 백유함이 상소를 올려 김우옹·이발·이길 등이 정여립과 친밀하게 지낸 사실을 보고했다. 백유함은 이이의 후견자던 백인걸의 아들로 백유양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눈 밝되 굳세지 못했던[明而不剛] 선조의 마음은 급속하게 동(東)에서 서(西)로 돌아섰다.
 
  11월 7일 우의정 정언신과 이조참판 정언지가 파직되었다. 두 사람은 형제로 정언지가 형이고 정여립과는 먼 친척 간이었다. 다음 날 정철이 우의정, 성혼이 이조참판으로 바뀌었고 백유함은 사간원 헌납, 최황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조사는 이어졌고 이발·백유양도 새롭게 관련자 명단에 포함돼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당초 계획한 대로 11월 18일 일본으로 보내는 통신사로 정사(正使) 황윤길, 부사(副使) 김성일, 서장관 허성을 선발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12월 14일에는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가 소(疏)를 올렸다. 이 또한 유생 수준에서 올릴 수 있는 글이 아님은 물론이다. 주요 부분만 발췌해보자. 이 글은 잘 읽어보면 정반대의 내용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많다.
 
  〈이산해는 본시 음휼(陰譎)한 자질로 부시(婦寺)의 태도를 외식(外飾)하여 성상(聖上)을 속여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요즈음 역적과의 상면(相面)이 비록 드문 편이나, 그 간담(肝膽)이 서로 맞아 교의(交誼)가 깊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보아온 터이니 어찌 엄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적신(賊臣)의 집에서 문서를 수색해낼 때 익산군수(益山郡守) 김영남(金穎男)은 이산해 등의 수필(手筆)을 남몰래 찾아내어 소각시킨 뒤에 이산해에게 편지를 보내 ‘걱정하지 말라’ 하였고, 이발은 자신이 여립과 심교(心交)하였다 하여 궐하(闕下)에 대죄(待罪)하려고 멀리 산해에게 문의하니, 산해는 경솔히 움직일 필요가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적변(賊變)이 보고된 처음에 이산해와 정언신 등이 국가를 걱정하지 않고 다만 화(禍)가 사당(私黨)에 미칠까 염려하여 포적사(捕賊使)에게 말하기를 “지금 해서(海西·황해도)에 이이의 제자가 많은데 감사(監司·한준)는 식견이 없고, 수령 중에 서인(西人)이 많다. 반드시 무고(誣告)하고 얽어매어 조정의 진신(搢紳)들을 모함하려는 계략을 만날 것이니 공(公) 등은 이를 잘 처리하라”고 하였습니다.〉
 
 
  ‘排節義說’
 
유성룡
  〈전 현감 정개청(鄭介淸)은 오랫동안 여립과 교우가 친밀하여 온갖 사설(邪說)에 서로 호응한 자입니다. 여립은 일찍이 말하기를 “남자는 양(陽)에 속하여 여자와 같지 않으니,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소위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촉(王觸)의 일시적인 말이고 성현의 통론(通論)은 아니다”라고 하였고, 정개청은 일찍이 ‘배절의설(排節義說)’을 만들어 후배나 제자들을 현혹시키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 폐단이 반드시 간귀(姦宄)를 야기시켜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성인이 《춘추(春秋)》와 《강목(綱目)》을 저술할 때 절의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는데, 지금 정개청은 글을 읽는 데 힘써 유민(流民) 출신으로 사대부의 서열에 참여한 뒤에는 감히 터무니없는 말을 마구 만들어 스스로 역란(逆亂)의 길에 빠졌으니, 군친(君親)을 망각하고 버리는 마음이 뚜렷합니다.〉
 
  ‘배절의설(排節義說)’이란 정개청이 본래 서인 박순(朴淳)의 문인이었으나 박순이 영의정에서 파직되자, 동인 이발·정여립과 교분을 맺음으로써 스승을 배반했다는 비난을 받고는 ‘절의청담변(節義淸談辨)’을 지어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니 정철(鄭澈) 등 서인들이 ‘배절의론’이라고 비난한 데서 생긴 말이다. 뒤로 가면 기축옥사가 왜 일어났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나온다. 유성룡(柳成龍)을 끌어들이는 대목이다.
 
  〈유성룡은 소위 사류(士類)로 일신(一身)에 큰 명망을 차지하고 시론(時論)을 주관하면서 남의 말을 교묘히 피합니다. 이전의 일은 추구(推究)할 필요가 없으나, 요즘 국사가 날로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도 사당(邪黨)을 배치시킬 뿐, 충현을 끌어들여 지난번의 과오를 고치는 계책으로 삼겠다는 한마디의 말도 없습니다. 유성룡은 진실로 역모에 가담한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 만약 반성해본다면 태양 아래서 어떻게 낯을 들고 살 수 있겠습니까.〉
 
 
  西人의 호남 소탕
 
  양천회와 정암수의 소를 통해 서인들이 노리는 사건 진행 방향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동인 소탕이다. 그러나 서인이 기록한 《선조수정실록》 선조 22년(1589년) 10월 기록에는 이미 저들이 이발 형제가 이끄는 동인의 근거지가 되고 있던 호남 소탕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의 글이 나온다. 서인 계통 사관의 평이라는 점에서 이런 의심은 더욱 개연성을 가질 수 있다.
 
  〈호남의 풍속이 진취(進取)하기를 좋아하고 거취(去就·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를 가볍게 여기므로 사자(士子·선비)가 더러움에 오염되어 풍습이 크게 훼손되었다. 대개 명종 말엽으로부터 유학(儒學)이 성대히 일어나서, 부형의 가르침이나 사우(師友)의 모임에는 대부분 예법(禮法)을 강구하고 도의(道義)를 담론하는 것으로 일삼으니, 세상 사람들은 자못 좋아하지 않았다. 당론(黨論)이 나누어지고 스승이 모함당한 뒤로부터 선비의 습속이 방달(放達)을 숭상하여 학문을 강론하는 자가 적어졌다. 여립의 옥사가 일어나게 되어서는 학사(學士)와 대부들이 억울하게 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진의 제생(諸生)도 유학으로 이름 삼기를 부끄럽게 여겨 기폄(譏貶)을 피하였다. 그리하여 풍속이 크게 무너졌으니 이는 모두 정여립이 역적질한 빌미였던 것이다.〉
 
  즉 호남이어서가 아니라 호남이 동인과 이발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정철은 소수파였고 그래서 어쩌면 그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양천회와 정암수를 동원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건창이 이 일을 정여립의 난이 아니라 ‘기축국옥(己丑鞫獄)’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더욱 실상에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다. 좀 더 중립적 입장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기 위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이 사건에 대한 학계의 몇 가지 시각을 소개한다.
 
 
  기축옥사의 원인
 
  〈이때의 상소로 조정의 동인계 고관과 함께 호남 지방 사류가 다수 연좌되었다. 그리하여 그 뒤부터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남 지역 사류 간 반목과 대립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여러 가지 문제를 낳게 되었다. 또 진주에 거주하던 처사 최영경은 모주인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옥사하였는데, 그의 연좌 또한 지극히 모호한 내용이어서 많은 말썽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약 3년여 동안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또는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무려 1000여인에 이르는 대옥사로 발전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 문제는 그 뒤 당쟁의 전개 과정에서 주요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이 옥사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누어진다.
 
  첫째, 노비 출신인 송익필이 당시 서인의 참모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친족 70여인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키려는 동인의 이발·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
 
  둘째, 당시 위관(委官)으로 있던 정철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설.
 
  셋째, 이이(李珥)가 죽은 뒤 열세에 몰린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이라는 설.
 
  넷째, 일부 조작된 바도 있으나, 당시 정여립이 전제군주정치 아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선양(禪讓)에 의한 왕위계승 방식을 주장하는 등 혁명성을 가진 주장이 옥사를 발생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설, 즉 정여립의 모역상도 어느 정도는 인정된다고 보는 설 등으로 아직 정설은 없다.〉
 
  필자는 대체로 첫째와 둘째, 그리고 셋째가 혼합돼 일어난 사건으로 보면 진상에 어느 정도 가깝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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