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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사상 크로스 〈4〉 묵자와 홉스

‘個人’의 발견과 홉스

글 : 임건순  동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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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有機體로서 세계관, 하늘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믿음이 강한 동양의 신화적 세계관 아래서는 개인주의 싹트기 힘들어
⊙ 서양, 기독교 세계관하에서 ‘神 앞에 선 主體로서의 개인’ 자각하면서 개인주의 싹터
⊙ 홉스, 가장 단순하고 작은 단위에서 단계적으로 가장 복잡하고 큰 것으로 갈릴레오적 방법론 원용해 個人과 權利의 개념 발견
⊙ 개인은 자연권을, 자연권은 자연법을, 자연법은 국가를 필요로 해

임건순
1981년생.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수료 / 저서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손자병법: 동양의 첫 번째 철학》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병법노자: 생존의 기술, 승리의 조건, 변화의 전술》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세, 동아시아 사상의 거의 모든 것》 등
홉스는 폭력과 전쟁으로 가득한 종교전쟁과 영국 내전의 시대를 살면서 ‘국가’라는 안전장치에 대해 고민했다.
  홉스는 단절자(斷切者)다. 전통적인 사상과 단절을 이루어냈다. 기존의 세계관(世界觀)에 마구 균열(龜裂)을 냈다. 그리고 홉스는 생성자(生成者)이다. 끊어버리고 무너뜨리면서 대신해 만들어낸 것들이 있다. 그러면서 근대(近代)로 가는 큰 흐름을 열었다. 그가 단절자로서 끊어버린 것들이 있고 그러면서 만들어낸 것들이 있다. 유기체(有機體)로서의 세계관, 정치와 도덕의 결합 이런 것들을 퇴장시키고 유물론적(唯物論的) 세계관, 현실로서의 정치, 개인주의(個人主義) 등을 만들어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개인’과 ‘개인주의’다. 홉스가 말하는 자연권(自然權)과 자연법(自然法)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사회계약(社會契約)과 국가 건설을 이해하려면 그가 말하는 개인, 개인주의에 대한 이해가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그런데 홉스의 개인주의는 서구(西歐)가 긴 시간에 걸쳐 진행시켜온 개인의 발견, 개인주의의 발전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홉스의 공(功)과 지분을 제대로 평할 수 있고 그가 서구의 근대에 기여한 바가 눈에 제대로 들어온다.
 
  사실 홉스를 떠나서도 개인, 개인주의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한 주제다. 왜 서양이 동양과 다른 길을 걸었는지, 우리 동양이 왜 서구에 뒤처지게 되었는지, 개인주의의 역사를 공부하면 적잖이 이해할 수 있다. 그 개인과 개인주의에 대한 심화학습은 한국 사회가 더욱 선진화되고 근대성의 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다.
 
 
  가옥구조와 개인주의·집단주의
 
  서구의 개인, 개인주의를 말하는 데 있어 우선은 기후와 주거양식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어디까지나 인간은 환경에 많은 부분 지배를 받는 존재고 인간이 만든 관념과 철학 역시 환경, 특히 기후, 주거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마을은 외부로부터 폐쇄적인 경우가 많다. 외부에 잘 노출도 안 되고 입구에선 장승이 경계를 하는 듯 보인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자체가 좁고 마을 앞에 강이나 시내가 성의 해자(垓子)처럼 둘러싸고 있는 경우도 있다. 재밌는 것은 마을 자체는 폐쇄적이지만 가옥과 집 자체는 개방적이라는 것이다. 옆집에서 뭐하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쉽게 알 수 있는데 고온다습(高溫多濕)한 여름을 나야 하기에 통풍(通風)이 중요하고 그러다 보니 열린 가옥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나 여행 관련 책들에서 보이는 서구의 집들을 보면 우리와 반대인 거 같아 흥미롭다. 특히 지중해(地中海) 쪽의 집들이 재밌는 게 이웃을 향해 열려 있는 게 아니라 닫혀 있다. 그 지역들을 보면 우리와 달리 기후에서 습기가 문제가 아니다. 큰 일교차(日較差)가 문제다. 집을 지을 때 습기보다 일교차를 막아야 하고 단열·방음에 신경 써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가옥이 외부로 닫힌 구조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 자체는 우리와 다르게 외부 세계로 열려 있는데 반면 집 자체는 동네 이웃집끼리 서로 닫혀 있다. 서구의 마을과 집들이 그러한데 그래서 안전과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가옥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유럽의 기후와 기후가 만들어낸 주거양식이 개인, 상업과 교역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개인주의란 사상의 발아(發芽)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고온다습한 여름 기후, 그로 인해 통풍을 중시하는 가옥 구조, 이웃끼리 힘을 합쳐 농사일을 해야 하는 삶, 이런 환경이 동아시아인들이 개인에 대한 관념, 개인주의적 사고를 가지기 힘들게 막지 않았을까?
 
 
  神話的 세계관에서는 ‘개인’ 나올 수 없어
 
  개인과 개인주의 발아와 발전 문제 뒤에는 신화적(神話的) 세계관의 문제도 크게 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동양은 서양에 비해 그 신화적 세계관의 힘이 유달리 강했는데 그 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신화적 세계관이란 게 대체 뭘까? 유기체, 연결성(連結性), 이 두 가지만 기억하면 충분하다. 우주를 단순한 물리적 사물의 집합체(集合體)로 보는 게 아니라 유기체로 보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연결된 유기적 생명체로 보는 것이다. 우주는 커다란 유기적 생명체이고 각 생명은 분절(分節)된 채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직관적 체험에 의해 우주와 세계의 연결성을 깨달을 수 있고 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이 가능한데 나와 우주는 분리된 적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다는 게 바로 신화적 세계관이다. 신화적 세계관은 서로 간의 연결성과 연대성(連帶性)을 강조한다. 감정과 감성으로 그 연결성을 느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거기서 행복과 깨달음, 편안함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신화적 세계관이 동양인들의 사고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교(道敎)와 불교(佛敎) 수행의 핵심은 그런 연결성을 깨닫는 것이다. 샤머니즘과 토속신앙, 그리고 풍수지리(風水地理) 등은 신화적 세계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공자와 맹자, 주희의 성리학도 신화적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않다. 일례로 《논어》를 읽다 보면 주술(呪術)을 멀리하는 합리성(合理性), 인본주의(人本主義), 지적(知的) 정직성, 건강한 회의와 비판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공자 역시 신화적 세계관에서 절연(絶緣)된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인본적·현실적·실용적 사상을 말했고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대표되는 주술과 폭력의 세계를 부정했다지만 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하늘과 인간의 상관관계(相關關係)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늘과 인간의 연결, 연관성을 부정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에 바탕을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유기체로서 세계관, 하늘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믿음은 동아시아인들만 가진 것이 아니다. 원시적·신화적 사유(思惟)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의 고등종교들에서도 보이는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서구와 비교할 때 더욱 강력하고 더 긴 세월 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을, 그리고 중국의 사상가 중에는 자연을 철저히 기계적으로 파악한 사람을 거의 찾을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신화적 세계관의 힘이 강력한 문명권에서 개인, 개인주의가 나올 수 있을까? 연결성을 강조하고 자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찾아가는 우주란 것의 일부로서 인간을 말하는 곳에서 개인의 발견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힘든 이야기일 것이다.
 
 
  唯一神이 없으면 개인도 없다
 
로마 성시스티나 성당 벽화 속의 아담과 이브. 인간은 神의 피조물이지만, ‘善惡果를 따 먹을 수 있는’ 자유의지도 가졌다.
  개인, 개인주의를 말함에 있어 유일신(唯一神) 전통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동아시아에는 중동(中東) 지방처럼 유일신 종교의 전통이 없었다. 동양 정신세계는 신이 있고, 그 신 앞에 홀로 서는 인간, 분리된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의식이 없었다. 단 묵자(墨子)를 제외하고. 묵자가 있었지만 전국(戰國)시대 200년간에 한정된 일이다.
 
  유대-기독교의 신은 태초 그 이전부터 홀로 존재해오다가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한다. 인간은 피조물(被造物)일 뿐이다. 수양과 깨달음을 통해, 덕(德)의 실천을 통해 우주와 연결되고 때론 우주적 사업에 참여자로서 가담할 수 있다고 하는 우리 동양과는 달리 유일신 전통에서는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피조물은 그 창조자인 신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피조물인 인간은 자신의 운명이 신에 종속되어 있지만 분리된 존재이기에 인간은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졌다. 자유의지를 가졌기에 타락할 수도 있었다. 선악과(善惡果)를 먹은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될 사고지만 사고는 터지고 말았고 이로써 인간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신의 정원에서 쫓겨났다. 애석한 일인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신과 분리된 존재이기에 자유의지를 가졌고 그래서 저지른 일인데 말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다시 신에 다가가려고 한다. 그 역시 자유의지를 가졌으니 행하려고 하는 것인데 말처럼 쉽지 않다. 인간이 신과의 분리를 극복하며 옛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을 경주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고 그 노력이 좌절되어 만들어지는 긴장과 허무 역시 고통스럽다. 그러한 긴장, 고통, 허무를 홀로 떠안고 감내하는 주체로서의 개인, 이러한 것은 동양의 정신세계에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선 없었던 개인과 개인주의가 유럽에서는 탄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렇게 유일신적 전통의 배경이 중요하다. 그나마 동양에서 유일하게 묵자가 개인을 말했던 것도 유일신 사상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창조자로서의 신과 피조물로서 인간을 전제하진 않았지만, 유일신을 말한 묵자는 개인을 말했다. 단적으로 말해 유일신이 없으면 개인도 없다. 이렇게 개인의 탄생과 개인주의의 성립과 발전 뒤에는 중동에서 발원(發源)한 기독교의 영향이 중요하다.
 
 
  종교개혁과 개인
 
비텐베르크성 성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건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은 ‘神 앞의 個人’을 발견하면서 근대 개인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기독교적 가르침으로부터 바로 근대적 개인주의가 출현한 것은 아니다. 가톨릭적 중세(中世)에는 동아시아와 비슷하게 전일성(全一性)과 통일성을 강조했고 세상을 유기체로서 보는 시각이 강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게 가톨릭이다.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의 정치적 힘과 계서제적(階序制的)인 수직질서에 의해 질식되어 사라져버렸던 기독교 본래의 정신이 회복되었다. 이제 형식, 계율(戒律), 교회와 사제라는 매개체는 중요하지 않다. 각자 내면의 신앙이 중시되었다. 나 자신의 믿음, 뜨거운 신앙만 가지고 믿으면 된다. 철저한 믿음만이 신에 다가가게 해주고 구원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홀로 서면서 점점 인간은 개인이 된다. 개인이 된 나와 하느님 사이에는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데 신교(新敎)를 통해 개인주의라는 씨가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홉스, 有機體로서의 국가 거부
 
  중세 유럽이나 동아시아나 거칠게 보면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유기체로서의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있었고, 유기체로서의 세상에 인간들이 매몰되어 있었다. 사회와 국가는 자연적으로 생성되고 유지된다고 보았고,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 의존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사회든 국가든 공동체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다. 그들도 동양의 관점과 비슷하게 세상을 본 것이다. 유기체적 국가관은 목적론적 국가관과 함께했다. 그 점도 동양이나 서양이나 비슷했는데 서양에서는 유기체로서의 국가가 신의 의지와 신성함을 정치로써 구현해야 했고, 동양은 과거의 성인 군주들이 보여준 덕치의 이상을 국가가 정치로써 구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홉스는 유기체로서의 국가도 거부했고, 고귀한 목적론(目的論)으로 살피는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도 거부했다.
 
  유기체로서의 국가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욕구를 가진 개인들이 사는 공간이 세상이다. 그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매일같이 싸우는데 사회와 국가는 유기체일 수가 없다. 국가 유기체론은 홉스에게 거부되었다. 우주가 유기체? 만인(萬人)이 만인과 싸우는데 무슨 유기체인가? 내전(內戰) 상황에서 시달린 홉스는 가톨릭교회가 중심에 서서 질서를 이룬 채 돌아가던 중세 유럽의 완전 붕괴를 목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기존의 세계, 유기체로서의 세상의 모습을 완전히 머리 안에서 삭제해버리면서 기존의 목적론적 국가관도 폐기해버렸다.
 
  종교전쟁과 정치적 내전이 일상화되어 있던 그때 홉스에게 있어 정치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정치의 목적이 우주의 섭리와 종교적 진리의 구현, 지고선(至高善)의 성취? 홉스에게는 정치 생활의 목적이 우주의 섭리나 신의 의지에 부응하는 지고선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았다. 윤리적 목표와 이상을 지향함? 그런 것 모른다.
 
  그런 한가한 소리 할 때가 아니었다. 정치는 윤리적 규제나 종교적 이상(理想)과 무관하다. 아니 무관해야 한다. 냉정하고 무서운 현실이란 조건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내 생명, 재산을 지키는 것일 뿐이다. 지위와 권력, 사회적 재화를 얻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란과 파괴적 갈등을 막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지난 시간에 말했다. 홉스가 보기에 인간은 정념과 욕망에 가득 찬 존재라고, 그게 인간의 본질이며 그런 감정들이 현실의 인간을 움직인다. 동력(動力)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항상 추구해야 할 지고선이란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지고선과 반대인 궁극적인 악이 있을 수 있고?
 
 
  정치와 윤리는 상관없다
 
  〈어떤 사람이 욕구하거나 욕망하는 대상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 사람에게는 선이며 미워하거나 혐오하는 대상은 악이다. 무시하는 대상은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결국 선과 악, 무시란 언제나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달리 쓰이는 것이므로 순수하고 절대적인 선-악-무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과 악의 일반적인 기준은 대상 그 자체의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없는 곳에서는 개인에게서 나오고 국가가 있는 곳에서는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혹은 중재자나 혹은 심판관에게서 나오기도 한다.〉 《리바이어던》 6장
 
  마키아벨리처럼 홉스에게도 정치는 종교, 윤리와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둘 다 종교, 윤리에서 정치를 확실히 독립시켰는데 홉스는 여기에 더하여 권력(추구의 욕망)을 정치에 한정시키지 않고 일반화·보편화시켰다. 무슨 말이냐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권력을 추구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고 모든 인간은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홉스가 보는 인간은 재산이면 재산, 명예면 명예, 지식이면 지식 뭐 하나라도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싸우는 동물들이다. 그것들을 위해 쟁투하는데 저것들 모두가 권력이다. 이렇게 권력을 위해 싸우는 존재, 늘 권력욕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인간인데, 그러니 인간은 개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권력을 두고 대립자로서 나와 타자(他者)를 늘 구분하고 인식하는 존재니 인간은 개인일 수밖에 없다.
 
  절대적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인간이 더 많은 권력이란 것을 늘 더 가지기 위해 싸우는데 유기체로서, 연결된 그물코 같은 사회 안에서의 부분적 존재가 인간일까? 홉스의 인간관·세계관은 서로 간의 쇠사슬을 완전히 끊어버렸고 인간 정신이 개인주의적으로 발전하도록 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그런 홉스의 뒤에는 갈릴레오의 영향도 있다. 개인주의자 홉스에게 과학자 갈릴레오가 있는데 과학의 발전을 수용하고 과학에서 발전된 학문적 방법론을 인간과 사회 연구에 도입했던 것이 그의 개인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權利’의 발견
 
홉스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분해종합방법’을 援用했다.
  홉스는 유물론적 입장에서 물체와 운동을 연구하면서 《리바이어던》을 비롯한 자신의 주요 저서에 갈릴레이의 ‘분해종합방법(分解綜合方法)’을 원용했다. 분해종합방법이란 것은 쉽게 말하자면 쪼갠 다음에 합치는 것이다. 일단 최대한 분해해야 하는데 연구대상을 최대한 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합친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인식 대상으로까지 나누고 그러고 나서 종합하는 것이다.
 
  가장 단순하고 작은 단위에서 단계적으로 가장 복잡하고 큰 것으로 나아가는 이런 갈릴레오적 방법론을 홉스는 정치와 사회 분석에 활용한 것이다. 사회와 공동체도 쪼갠다. 기존의 사회를 가장 단순한 요소인 개인들로 분해하고 거기서 시작했다. 그 개인들은 각자 욕망, 이성이 있고 의지가 있다. 욕망이 있어 싸우기도 하지만 이성이 있어 협력을 해낼 수가 있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리를 양도할 수 있다. 생존과 평화를 향한 각자 개인의 의지를 종합하면 집단의지(集團意志)라는 것이 만들어지는데 개인들의 의지가 합쳐지고 동의가 모여서 국가가 형성된다. 집단의지가 만들어지며 주권까지 만들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철저히 개인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가장 작은 단위인 개인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홉스는 개인을 만들었고 개인을 발견했는데 더 나아가 그는 권리(權利)까지 발견하고 말했다. 그게 다 홉스가 개인을 보았기에,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목적론에 함몰된 유기체로서의 국가를 버리고 그 국가 안에 매몰된 사람들을 구해서 개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근대를 열고 있었다.
 
  개인이 있어야 권리란 게 있을 수 있다. 개인 없이 권리는 없다. 그리고 근대 이전의 정치철학은 ‘법’을 출발점으로 하는 반면 근대 정치철학은 ‘권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개인을 말하는 홉스는 권리를 말했고 그는 자연권이라는 개념을 내세우는데 이렇게 홉스가 근대에 공이 크다.
 
 
  自然權과 自然法
 
  홉스가 말하는 자연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생존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자연권이란 모든 사람이 자연상태에서 생존이란 욕망을 위해 자기 의사대로 몸부림치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권리라고 보는 것이다. 생존이란 욕망을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할 자유가 있는데 그게 바로 홉스의 자연권이다. 인간은 살고자 한다. 하지만 자연상태에서 생존하는 것은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데, 그런 수단과 방법을 찾고 사용할 자유를 자연권이라고 한다.
 
  그런데 욕망에 따라 자연권을 사용하면 결국 싸움은 종식되지 않고 자신의 생존과 자유가 침해되는 역설적(逆說的)인 상황과 결론이 발생한다. 욕망을 위해 자연권을 쓰는데 역설적으로 욕망의 최소한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
 
  그럼 여기서 질문을 해봐야 한다. 그러면 대체 홉스는 왜 자연권을 말했던 것일까? 바로 자연법을 말하기 위해서다. 홉스의 자연권은 자연법을 요청한다. 생존이라는 자연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연법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홉스가 말하길 ‘자연권은 인간의 욕망이 낳은 것이고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理性)이 낳은 것’이라고 한다. 욕망을 가지는 개인이 자신의 이성을 발휘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자연법이다.
 
  〈자연법이란 이성에 의해 발견된 계율 또는 일반 법칙이다. 자연법은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거나 생명 보존의 수단을 포기하는 일을 금지한다. 또한 자연법은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금지한다.〉 《리바이어던》 14장
 
  〈진정한 이성은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지성의 다른 어떤 능력이나 영향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내가 정의한 자연법은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과 신체의 보존을 위해 행하거나 행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관련된 올바른 이성의 명령이다.〉 《리바이어던》 14장
 
  홉스가 정의한 이러한 자연법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성이 찾아낸 것이다. 절대로 신이 만들고 신이 준 것이 아니다. 홉스 이전에도 자연법이란 게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적 신의 질서에 종속된 것이다. 홉스에게 있어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생겨난 것일 뿐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살기 위해, 자연권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인간은 그 자연법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고자 한다.
 
 
  ‘국가’라는 안전장치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인간은 자연상태에 놓였을 때 모두가 위험을 느끼지만 정작 무엇이 진정으로 위험한가? 어떤 위험을 뿌리 뽑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다. 모두가 만족하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것은 제거하자, 어떤 것만큼은 하지 말자, 어떤 것만큼은 뿌리를 뽑자, 이렇게 판단을 해서 결론을 내려야 하지만 인간들은 모두가 개인이다. 그 개인마다 그 위험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그렇기에 합의는 쉽지 않다. 없애야 할 위험에 대한 생각이 개인마다 다른데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혼란 때문에 문제인 상황에서 그 혼란이 더 심해진다.
 
  그래서 홉스는 말했다. 그러므로 이때 개인들 각자는 사적(私的)인 판단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공통의 권력(勸力)’이 내리는 판단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욕망 때문에 싸우고 자연권을 발동하면서 서로 죽이고 죽는 인간, 하지만 이성을 통해 깨닫게 된다. 내가 놓인 위험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통의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공통의 권력을 세우는 것이 자연법에 따른 의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통의 권력에 의해서 자연법이 만들어졌다고 창출되었다고 문제가 끝나는가? 위험이 제거되고 평화가 오는가? 아니다. 자연법이 실현되려면 다른 안전장치가 있어야 한다. 단순히 안전장치가 아니라 그 장치가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한다. 자연권이 자연법을 요청했듯이 자연법도 요청하는 게 있다. 그것도 강력히!!
 
  자연법은 필연적으로 국가라는 안전장치를 요구한다. 공통의 권력인 국가가 존재해야만, 그 국가가 인간의 외부에서 작용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로서 기능을 해야만 자연법이 실행될 수 있다. 국가는 힘에 의해 지지되고 필요하다면 처벌도 할 수 있는 공통의 권력인데, 개인은 자연권을, 자연권은 자연법을, 자연법은 이제 국가를 필요로 하고 소환을 한다. 그래야 홉스가 생각한 평화, 개인들에게 생존을 보장하는 평화가 만들어진다.
 
  지금까지 서구의 개인, 개인주의가 어떻게 생겨났고, 발견 혹은 발전되었는지 동양과 비교 대조해서 논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홉스가 보탠 힘과 만든 공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그 개인을 가지고 홉스의 자연권과 자연법을 이야기했다. 한정된 지면에 서구 개인주의의 역사에 대해 압축적으로 다루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쉽게도 홉스를 중심으로 이야기했고, 묵자 이야기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묵자도 홉스처럼 유기체적 국가관, 사회설과 싸우려고 했다. 묵자는 천명(天命)으로 대표되는 유기체적 국가관, 그리고 유가(儒家)의 예(禮)로 대표되는 자연법과 다른 의미의 규범을 주장했다. 그도 홉스처럼 단절자이자 생성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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