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대 국회 후반기 구성 때 黨命 거역, 鄭求瑛 국회의장 추대하려다 무산
⊙ JP, 1965년 당의장으로 복귀했지만 인사·공천 등에서 힘 못 써, 사무국 직원들 “JP에게는 편도
敵도 없다. JP는 편도 적도 모른다”
⊙ 朴正熙, “종필이는 주변의 못된 것들 때문에 큰일”
⊙ 3선 개헌 반대하다 전향한 JP…, 술 한 병 들고 우리 집 찾아와 개헌 찬성 설득
⊙ 鄭求瑛 찾아가 3선 개헌 찬성 압박하던 車智澈, 金載圭와 다퉈
芮春浩
⊙ 88세. 동아대 경제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 6·7·10대 국회의원, 공화당 원내 부총무, 공화당 사무총장, 국회상공위원장, 민추협 부의장,
한겨레민주당 상임대표 역임.
⊙ JP, 1965년 당의장으로 복귀했지만 인사·공천 등에서 힘 못 써, 사무국 직원들 “JP에게는 편도
敵도 없다. JP는 편도 적도 모른다”
⊙ 朴正熙, “종필이는 주변의 못된 것들 때문에 큰일”
⊙ 3선 개헌 반대하다 전향한 JP…, 술 한 병 들고 우리 집 찾아와 개헌 찬성 설득
⊙ 鄭求瑛 찾아가 3선 개헌 찬성 압박하던 車智澈, 金載圭와 다퉈
芮春浩
⊙ 88세. 동아대 경제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 6·7·10대 국회의원, 공화당 원내 부총무, 공화당 사무총장, 국회상공위원장, 민추협 부의장,
한겨레민주당 상임대표 역임.
이렇게 해서 제3공화국이 출범했지만, 공화당도, 나라도 좀처럼 안정되지 못했다.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자의 반 타의 반(自意半 他意半)’으로 외유(外遊)를 떠났던 JP가 돌아와 당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공화당 창당 전부터 JP에게 반대하던 세력들은 사무국 중심의 당체제를 비판하면서 사사건건 그와 맞섰다. 제6대 총선을 앞두고 영입된 김성곤(金成坤)·백남억(白南億) 등 구(舊) 정치인들도 반(反)JP 대열에 합류했다. 반면에 공화당 사무국 요원 출신들은 ‘창당이념 고수’를 외치면서 JP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1964년 5월, 나는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사무총장은 박정희 총재, 김종필 당의장 다음가는 자리였다. 왜 5·16 주체도 아닌 나를 그런 요직에 앉혔을까? 아마 공화당 사전(事前) 조직 가운데 내가 담당했던 경남 조직이 공화당의 조직원리에 가장 충실했던 점, 그래서 중앙정보부장 시절 JP가 지방 조직 담당자들 가운데 나를 가장 먼저 만났던 점 때문이 아닌가 싶다.
6·3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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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P(오른쪽)는 6·3사태 후 당의장직에서 물러나 외유를 떠났다. 흰색 점퍼를 입은 사람이 필자. |
학생 시위가 격화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6월 3일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6·3사태다.
그날 공화당 당무회의를 하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JP에게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어 내게도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청와대로 들어갔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가라. 지금 JP가 군(軍) 장성들에게 시달리고 있을 테니 빨리 출국하라고 하라”고 했다.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갔더니 민기식(閔機植) 육군참모총장, 김계원(金桂元) 참모차장을 비롯해 장성들이 가득했다. JP를 데리고 나왔다. JP는 출국하기 전에 내게 당부했다. “정구영(鄭求瑛) 전 총재께 다시 당의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세요. 당은 예 총장이 길재호, 조시형, 민병권, 김용태, 신윤창, 오학진, 이병희, 김동환 의원 등과 함께 꾸려나가 주세요.”
JP가 나가고 난 후, 공화당은 이래저래 위축이 됐다. 밖에서 보기에는 제3공화국의 집권여당으로 위세가 당당한 것 같았지만, 일단 정권이 출범하자 당이 정부에 밀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해 4월 진해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과 JP 회동 후, 이후락(李厚洛) 대통령 비서실장이 당을 ‘(정부의) 방계(傍系) 조직’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당 출신 인사들이 정부나 국영기업체 등으로 진출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가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 7명의 당 인사를 정부 차관으로 보냈지만,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돌아왔다.
청와대서 타 온 黨 경비 20만원 더 와 반납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금 문제였다. JP가 다시 외유를 나간 후 당의장이 된 정구영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청와대에서 정치자금을 조달하다 보니, 이런저런 잡음이 나온다. 대통령께 누(累)가 될 수도 있다. 청와대는 이 문제에서 손을 떼고 앞으로는 당이 정치자금을 조달하도록 해달라”고 건의했다. 박 대통령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당의 힘만 가지고는 정치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나라 전체가 가난하던 시절이라 손을 벌릴 곳이 없었다. 정치자금을 내려는 사람도 최고권력자를 상대하려고 하지 당을 상대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정구영 당의장의 실험은 두 달 만에 끝나고 말았다. 결국 다시 청와대에 가서 당 운영경비를 받아오게 되었다.
한번은 내가 청와대에 가서 경비를 타왔다. 당에 와서 보니 평소보다 20만원 정도 돈이 더 왔다. 정구영 의장에게 이야기했더니, 청와대에 가서 반납하고 오라고 지시했다. 한참 망설이다가 청와대에 가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정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이미 20만원이 더 간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박 대통령은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하면서 “정 선생님의 훌륭한 점이 바로 그런 청렴함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JP를 뺀 신주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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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총장 시절 기자회견을 하는 필자. 사무국 중심체제를 둘러싼 주류-비주류 갈등으로 편한 날이 없었다. |
나는 사무국 중심체제(사무국-국회의원 이원체제)의 고수를 주장했다. 나는 공화당이 조국 근대화의 중추세력으로 영속(永續)하기 위해서는 특정 지도자에게 의존하는 사당(私黨), 지역구나 자신의 이익에 몰두하는 국회의원들의 붕당(朋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무국 중심체제는 그러한 목적을 담보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나는 그것이 외유를 떠나면서 내게 당을 맡긴 JP의 뜻이자, 박정희 총재를 올바로 모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것을 ‘P(박정희)-K(김종필) 라인 고수’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다 보니 나는 비주류(非主流·反JP계)로부터 ‘주류 강경파’로 꼽혔다. “예춘호는 얼굴만 봐도 재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사무국에 밀려 당내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회의원들의 불만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국가재건최고회의, 군 장성, 구 정치인 출신 국회의원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데 앞장섰다. 나와 가깝게 지내던 민관식(閔寬植) 의원도 “공화당이 과거 포말(泡沫) 정당들과는 달라야 한다”면서도 “국회의원들이 당에서 소외되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결국 1965년 2월 당헌 개정안이 통과됐다. 사무총장이 갖고 있던 당무집행권과 인사권은 당의장에게, 재정권은 재정위원장에게 넘겼다. 서열도 당내 3위에서 총재-당의장-중앙위원장-정책위 의장의 뒤를 이은 5위로 밀려났다.
결국 공화당 창당 당시의 사무국 중심체제(이원체제)는 상당 부분 후퇴하고 말았다. 이후 김성곤 재정위원장, 백남억 정책위 의장, 길재호 사무총장, 김진만 원내총무를 축으로 하는 신주류(新主流)가 형성됐다. 후일 3선 개헌(改憲)을 앞장서 추진한 것도 이들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첫 번째 抗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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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과 정구영 선생. 박 대통령이 1963년 8월 30일 대장으로 예편한 후 공화당에 입당할 때의 사진이다. |
나를 비롯한 주류에서는 후반기 국회에서는 정구영 선생이 국회의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JP에게 이러한 뜻을 표시했다. 그는 “자신 있느냐? 얼마나 표를 모을 수 있겠느냐?”고 묻더니 약간의 활동자금을 주었다. “필요하면 당직자들과 함께 총재(박정희 대통령)를 찾아가 이효상 국회의장 지명을 재고하도록 건의해 보자”는 뜻도 표시했다. 다행히 많은 의원이 정구영 선생을 국회의장으로 추대하는 데 동조했다. 반면에 김성곤 의원 등 비주류는 이효상 국회의장을 밀었다.
국회의장 선출을 위한 투표가 실시됐다. 정구영 69표, 이효상 55표. 정구영 선생이 앞서기는 했지만, 당선 정족수인 88표에는 미치지 못했다. 나는 전에 이야기한 대로 당의장인 JP와 함께 청와대로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이효상 국회의장 지명의사를 번의(飜意)하도록 요청하려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JP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백남억 정책위 의장, 김동환 원내총무 등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2시간을 기다렸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를 만나주지 않았다. 대신 이후락 실장이 “2차 투표는 결속해서 이효상 의원을 당선시키도록 하라”는 박 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李孝祥 지지’로 선회한 JP
국회로 돌아왔더니, 그렇게 찾아도 없던 JP가 국회의원 휴게실에서 열리고 있는 공화당 의원총회에 참석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총재의 뜻을 받들어 이효상 의원을 지지하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정구영 선생도 “당 지도체제의 권위를 위해 당연히 총재가 지명한 이효상 의원을 당선시켜야 한다. 설사 내가 당선되더라도 당명(黨命)을 거역하면서 의장직을 수락할 수는 없다”고 발언했다.
나만 모양이 우습게 되었다. 의원들은 ‘1차 투표에서 정구영 의원이 표를 더 많이 얻으면, JP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번의를 요청하러 나설 것이라더니,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한 눈초리였다. 결국 2차 투표 결과 이효상 의원이 다시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항명(抗命)파동으로 정구영 의원을 미는 데 앞장섰던 김용태(金龍泰), 김종갑(金鍾甲), 민관식, 신관우(申觀雨) 의원 등이 정권(停權) 처분 등 징계를 받았다. 나는 얼마 후 당직 개편에서 사무총장과 당무위원직에서 해임됐다.
사람들은 흔히 1969년의 4·8항명파동(권오병 문교장관 해임건의안 통과), 1971년의 10·2항명파동(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건의안 통과)을 기억하지만, 사실 이것이 박정희 정권 시절에 있었던 첫 번째 항명파동이었다.
힘 빠진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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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5월 3일 제6대 대통령 선거 후, 공화당 당사에서 김종필 당의장과 나란히 앉아 개표상황을 지켜보는 박정희 후보. |
JP는 앞에서 말한 항명사태 이후 당직에서 물러나 있던 나를 비롯해 김성희(金成禧)·윤천주(尹天柱)·이영근(李永根)·정태성(鄭泰成) 의원을 자신의 보좌역으로 임명했다. 우리는 열심히 JP를 보좌했지만,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가던 JP에게 큰 힘이 되지는 못했다.
당직 인사에서도, 1967년 제7대 총선 공천에서도 JP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군 장성 출신인 김종갑 전 의원 등 좋은 분들이 공천에서 탈락했다.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개 박정희 대통령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당의장이던 JP에게 그런 사람들을 구제해 달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예 총장, 내가 힘이 없어요.”
나의 경우를 봐도 인사에서 JP가 얼마나 힘을 쓰지 못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제7대 국회를 구성할 때, 나는 JP로부터 “재정경제위원장을 맡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얼마 후 길재호 사무총장이 통보해 온 자리는 상공위원장이었다.
이처럼 이른바 신주류가 형성되고 JP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구주류로 밀려나는 데도 JP가 힘을 쓰지 못하자, 사무국 요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했다.
“당의장(JP)은 편도 없고 적(敵)도 없다. 편도 모르고 적도 모른다.”
그건 JP의 성격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 그의 정치인생을 결정지었다.
1967년 6월 8일 제7대 총선이 있었다. 지난 4년간 경제발전에 대한 국민들의 긍정적인 평가 덕분에 과반수(過半數) 의석 확보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공화당은 지역구와 전국구 합쳐서 129석을 차지한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45석에 그쳤다. 공화당의 압승이었다. 야당은 관권(官權)개입, 대리투표 등이 자행된 부정선거였다면서 6개월 동안 국회 등원(登院)을 거부했다.
사실 무난하게 재선된 나는 처음에는 야당의 부정선거 주장이 선뜻 납득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지역, 특히 일부 농촌 지역에서의 사례를 들어보니 뭔가 무리한 짓이 있기는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때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3선 개헌의 또 다른 전조(前兆)는 고다마 사건과 국민복지회 사건이었다.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는 일제시대 때 중국에서 ‘고다마 기관’이라고 하는 비밀정보기관을 운영했고, 나중에는 록히드 사건에도 연루되는, 일본 정계 흑막(黑幕)의 인물이었다. 한일수교가 된 후 그는 유명한 야쿠자 출신 사업가인 재일교포 정건영과 함께 한국을 드나들었다. 1967년 어느 날 이들이 한국을 찾았다.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경호실장 등과 어울리는 회식 자리에서 고다마가 김형욱 부장에게 물었다.
박정희, “팔은 안으로 굽는다”
“한국에서 진짜 지도자는 어떤 분이시오?”
김형욱은 당연히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고다마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석정선(육사 8기·중앙정보부 차장 역임), 김용태(공화당 원내총무 역임), 김종락(JP의 형) 세 분을 만났더니, ‘이 나라에는 JP가 있으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앞으로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려면 실권자인 JP와 손을 잡아야 한다, 혁명을 주도하고 오늘날까지 주요 정책을 결정해 온 것도 JP다, 박정희 대통령은 상징적 존재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박종규 실장으로부터 이 ‘불충(不忠)발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노발대발했다. 박 대통령은 김형욱 부장에게 “고다마에게 부탁해 석정선, 김용태, 김종락 등과 다시 한 번 만나 대화를 녹음해 오라고 하라”고 지시했다.
고다마와 다시 만난 석정선 등은 고다마가 자기들에게 호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했다. 이들의 얘기가 고스란히 녹음되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석정선 등 세 사람은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곤욕을 치렀다.
이 사건으로 JP는 난처해졌다. 마치 그가 ‘박정희 이후’를 노리는 것처럼 음해하는 자들이 있었다.
나는 박종규 경호실장을 통해 청와대로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나는 JP에게는 추호도 다른 뜻이 없다고 역설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나를 편하게 대해주었다. 여느 때처럼 육영수 여사가 술상을 봐왔다. 거나하게 취한 박 대통령은 옛날 JP와의 만남, JP와 조카딸(박영옥)의 결혼, JP의 장단점 등에 대해 말했다. 못마땅하다는 듯한 말투로 “종필이는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직접 나에게 얘기하지 않고 남을 시켜 전한다”는 말도 했다.
“예 총장, 팔은 안으로 굽지 밖으로 안 굽는단 말이야. 종필이에게 꼭 전하시오. 종필이는 주변의 못된 것들 때문에 큰일이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JP의 측근으로 알려진 몇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기까지 했다. 나는 대통령께 “JP를 의심할 일은 전혀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런 식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만난 것이 네 번이었다. 나는 박 대통령과 나눈 이야기들을 JP에게 전했다.
국민복지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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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공화당에서 제명당한 김용태 전 원내총무. |
김형욱 부장은 서울 명동에 있는 세종호텔 등에서 복지회에 가입한 사람들을 불러 조사했다. 김용태 전 원내총무는 중앙정보부 감찰실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나에게도 중앙정보부 국장이라는 사람에게서 “만나뵐 수 있겠느냐”는 전화가 걸려왔다. 의아했다. 중앙정보부에서 내게 용무가 있을 때에는 김형욱 부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세종호텔로 갔더니 정보부 요원이 인근 작은 호텔로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갔더니, 김형욱의 측근으로 악명이 높던 방준모 감찰실장이 나를 맞았다. 그는 “김용태 의원과 관련된 일인데 사실대로 대답해 주셔야 한다”면서 “국민복지회라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전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문건을 보여주면서 “예 의원님이 경남·부산 책임자로 되어 있다. 김용태 의원과 가장 가까운 사이인데, 그가 하는 일을 예 의원께서 모를 리가 없다”고 추궁했다.
나로서도 그 부분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방 실장의 말처럼 당시 김용태 의원과 나는 무척 친하게 지냈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 나와 상의가 없었다? 더욱이 국민복지회의 핵심인물로 지목된 최영두 전 의원은 JP보다는 오히려 반JP파인 장경순(張坰淳) 국회부의장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때는 현직 의원 신분도 아니었고, 정치적 비중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JP의 대권 도전을 돕기 위한 조직을 만든다면서 그런 사람과 일을 한다? 모든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청구동으로 JP를 찾아가 국민복지회 관련 서류들을 들이대면서 “김용태의 국민복지회와 관련이 없다면 김용태를 자르고, 대통령께는 철부지들이 멋모르고 장난을 친 것이라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압박했다.
5월 25일 공화당은 당무회의를 열어 김용태 의원, 최영두 전 의원 등 국민복지회 관련자들을 제명했다. 유승원 정보비서관으로부터 국민복지회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수사를 지시한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JP, 당의장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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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5월 31일 당의장직에서 사퇴한 JP는 바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다음날 이후락 비서실장은 부산대 총장실에서 JP를 만나 사퇴 철회를 권고했다. |
“당의장께서 당무회의를 마치면서 김용태 의원 제명 이후 불필요한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줄 것과 자신의 신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박정희 대통령을 잘 모시고 일사불란한 체제를 확립해 나가주기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사의(辭意)를 표명하실 것 같습니다.”
나는 사회를 조창대 의원에게 맡기고 청구동으로 달려갔다. 이미 김택수, 양순직 두 의원이 와 있었다. 내가 들어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조시형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도 도착했다. JP는 조 수석에게 봉투를 하나 건네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예춘호 같은 이가 왜 나쁜 사람이란 말인가!”
가슴이 찡했다. 반JP 세력으로부터 ‘주류강경’으로 몰려 온갖 음해를 받고 있는 나에 대한 연민(憐憫)의 정(情)이 느껴져서였다. 문득 박정희 대통령이 “종필이는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직접 나에게 얘기하지 않고 남을 시켜 전한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말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대통령이 안 계신데(그날 박정희 대통령은 전방시찰 중이었음), 이런 식으로 사의를 표명하면 안 됩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각하를 직접 만나뵙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나는 조시형 수석을 따라 나가서 당부했다.
“JP가 준 봉투는 대통령께 전달하지 마시고, 우선 김 의장이 괴로워하는 것만 대통령께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시형 수석도 동의했다. 저녁에 나와 조 수석은 다시 청구동으로 갔다. 소식을 듣고 온 주류(JP계) 의원 수십명이 응접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JP와 조 수석, 나는 건넌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 수석이 말했다.
“4시경 일선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대통령께서는 어떻게 보고를 받으셨는지, 이미 당무회의 전후의 상황을 소상히 알고 계셨고, 무척 화를 내셨습니다. 게다가 영식(令息) 지만 군이 감기로 열이 몹시 나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눈치만 살피다가 말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지만 군이 감기에 걸려 박 대통령의 신경이 곧두서 있다는 얘기에 JP는 “우리 진이가 감기 걸렸을 때 ○○약을 쓰니까 잘 듣던데…”라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느껴졌다.
3金 중 가장 탄압 많이 받은 사람은 JP
나는 3김씨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가장 많은 핍박을 받은 사람은 단연 JP라고 생각한다. YS나 DJ가 박정희 정권 시절 탄압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JP가 받은 핍박에는 못 미쳤다. 중앙정보부의 도청이나 감시는 다반사였다. JP와 가깝다고 알려졌다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곤욕을 치른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YS나 DJ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소장(少壯)의원이었던 1960년대 후반에는 더더욱 그랬다. 반면에 JP는 자신에게 도전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다. JP가 박정희 정권 내내 핍박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JP는 한 번도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를 훼손하거나 박 대통령 이후를 염두에 둔 발언을 한 적이 없다. 박 대통령에 대해 안 좋은 뜻을 표시하거나, 5·16혁명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내세우는 말도 한 적이 없었다. 나도 그에게 박정희 대통령 이후를 도모하라는 권유 같은 것은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요즘 JP가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회고록을 보니, 옛날과는 달리 자신을 내세우는 듯한 대목이 많이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지도 오래됐고, 이제 그 시절을 함께한 사람들도 거의 사라졌다는 생각 때문일까….
9인 위원회 결성
청구동 JP집을 나와 새벽 한 시까지 조시형 정무수석비서관과 의견을 나누었으나,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그와 헤어진 나는 북아현동 정구영 선생의 자택을 찾아갔다. 이미 낮에 찾아뵙겠다고 말씀을 드려놓았었다. 야심한 시각임에도 정 선생은 주무시지 않고 있었다. 내가 상황을 보고드리자 정 선생은 이렇게 탄식하셨다.
“기어이 올 게 오고야 말았군!”
정 선생이 말씀하시는 ‘올 것’이란 게 무엇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3선 개헌이었다. 부정선거 시비를 야기한 제7대 총선, 고다마 사건, 국민복지회 사건, JP의 당의장직 사퇴…. 모두가 3선 개헌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정구영 선생 댁에는 나, 박종태(朴鍾泰), 김우경(金遇敬), 이호범(李浩範) 의원 등이 모였다. 우리는 3선 개헌이 다가오고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기로 했다. 1차로 윤천주, 김성희, 이영근, 정태성, 박종태, 양순직, 김택수, 김우경, 나, 이렇게 아홉 명이 중심적 역할을 하기로 했다. 우리의 모임은 가칭 ‘9인 위원회’라고 하기로 했다. 물론 우리의 정신적 지도자는 정구영 선생이었다.
당의장직에서 사퇴한 JP는 한동안 부산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며 소일했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JP에게서 연락이 왔다. 설악산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정구영 선생께 이 이야기를 했더니, JP에게 서울 소식이라도 전할 겸 한번 다녀오라고 했다.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가족여행을 가는 것처럼 꾸미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지금처럼 도로사정이 좋을 때가 아니어서 밤 10시가 되어서야 목적지인 속초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JP와 만나 그동안 서울에서 일어났던 일, 정구영 선생을 중심으로 한 9인 위원회 활동 등에 대해 보고했다. JP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가끔 긍정적인 표정을 짓기도 했으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 서울로 떠난다”고 하자, 그는 내 손을 꼭 쥐고는 한동안 묵묵히 서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나도 가슴이 뭉클했다.
미국에서 접한 改憲 추진 소식
1968년 12월, 나는 상공위원회 소속 신민당 송원영 의원 등과 함께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걸프사가 비용을 댔다. 1964년 미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에 갈 뻔했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산됐던 적이 있던 터라 나로서는 벼르고 벼르던 외유였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구영 선생의 와병(臥病)이었다. 정 선생은 JP의 공직 사퇴로 공석이 된 부여 지역구 국회의원 자리를 메우기 위한 8·12보궐선거에 출마한 김종익(JP의 형)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섰다가 쓰러졌다. 한때 위독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고, 그 무렵에는 상당히 병세가 호전되고 있었다. 하지만 70세가 넘은 고령(高齡)이어서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다른 하나는 3선 개헌 추진이 본격화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박종태 의원을 만나 “정구영 선생의 병세가 나빠지거나, 3선 개헌 움직임이 본격화되면 언제든 연락을 달라, 그러면 즉시 달려오겠다”고 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수시로 한국 뉴스를 접할 수 있는 지금과 달리 당시는 한번 한국을 떠나면 국내 뉴스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해가 바뀌었다. 뉴욕의 숙소로 《동아일보》의 최영철(崔永喆·국회부의장 역임) 기자와 김영수(10대 국회의원 역임) 기자가 찾아왔다. 이들은 윤치영 공화당 의장 서리, 길재호 사무총장 등이 3선 개헌 필요성을 밝혔고, 공화당 의원총회에서도 이 문제로 한바탕 논란이 있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3선 개헌 논의는 대통령 임기 만료를 1년 앞둔 1970년이 되어야 시작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72일로 예정된 일정이었지만, 바로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길에 이탈리아에 들렀다. 대사는 후일 국방부 장관을 지내게 되는 유재흥(劉載興) 장군이었다. 그는 “오늘 신문을 보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개헌 논의를 중단하라는 담화를 발표했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개헌 반대파임을 알고 귀띔해 주는 것 같았다. ‘유 대사도 개헌에 반대하는구나. 박정희 정권 안에도 개헌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귀국해 보니 이미 개헌 논의는 불이 붙어 있었다. 논란이 거세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적어도 본인의 임기 중에는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라며 짐짓 개헌 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2·28 재선거 등에서 야당은 개헌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서명운동
귀국 후 JP를 만났더니,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냉담했다. 정구영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내가 미국으로 나가자 “예춘호가 개헌 찬성파 쪽으로 전향하기로 이후락 비서실장과 합의했다”고 음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기가 막혔다. 3선 개헌 저지를 위해 구성한 9인 위원회 멤버 중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이탈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개헌 반대 세력을 하나로 묶어 그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벤트가 필요했다. 우리는 우선 ▲창당 이념 구현 ▲당내 민주주의 실현 ▲지도체계(P-K라인) 재확인 ▲부정부패 근절 등의 내용을 담은 건의문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리기로 하고 당내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얼마 후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나를 불렀다. 이미 신윤창 의원이 불려가 박 대통령에게 야단을 맞고 온 터라 긴장했는데, 박 대통령은 의외로 온화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박 대통령이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지? 무슨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던데, 무엇을 하고 있소?” “각하께 몇 가지 건의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건의를 하려고 서명을 받는단 말이오? 건의 내용은 뭐요?”
“요즘 저희는 각하를 뵙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내에서 거론되는 몇 가지 당면 문제를 문서화해서 서명을 받아 연명으로 건의드리려 하고 있습니다.”
내친김에 건의문의 요지까지 말씀드리자, 박 대통령은 웃으면서 말했다.
“임자들이 여기 들어오는 것이 뭐 그리 어려워서 그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거요? 절차를 밟고 여기에 와서 직접 이야기를 해야지. 오늘은 부산 사람끼리 모여 저녁이나 같이하면서 잡담이나 합시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 비서실장을 불러 조시형 정무수석비서관, 김현옥 서울시장을 불러오라고 했다. 식사를 하면서 한동안 옛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후락 실장과 김현옥 시장이 먼저 자리를 떴다.
나와 조시형 수석만 남게 되자 박 대통령은 다시 화제를 서명운동 쪽으로 돌렸다. 나는 JP 사퇴 이후 당내 사정 등을 설명하면서 P-K라인 재확인의 필요성을 간곡히 이야기했다. 박 대통령은 부정부패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나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무거운 표정으로 듣고 있던 박 대통령이 말했다.
“예 총장, 필요악(必要惡)이라는 말이 있잖아? 정주영 사장의 말이 ‘외화 가득률을 높이려면 해외 공사를 수주해야 하는데, 다른 나라들은 그 공사 관계자들에게 구전(口錢) 같은 걸 먹여서 일을 따 간다. 우리도 얼마간의 구전을 들이더라도 꼭 그 공사를 얻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디다. 구전이 나쁘다는 걸 누가 모르겠소?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공사를 얻어야 한다면, 그것이 바로 필요악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이런 일 하나하나를 놓고 볼 때 국민들이 당장은 못마땅해 하겠지만, 일만 잘해 놓으면 언젠가 모든 국민이 이해해 줄 것 아니겠소?”
상시 도청당한 공화당 국회의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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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항명파동으로 제명당한 후 국회 휴게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왼쪽은 양순직 의원. |
야당이 해임건의안을 제출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당연히 공화당 의원들에게 부결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3선 개헌에 반대하던 우리는 이번 기회에 개헌 반대파 의원들의 힘을 시위(示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1969년 4월 8일, 재석 152석 중 찬성 89표, 반대 57표, 기권 3표로 권 문교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은 가결되었다. 투표에 참여한 공화당 의원은 100명, 야당 의원은 신민당 41명, 정우회 11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공화당 안에서 반대표가 40표 이상 나왔다는 얘기다.
박정희 대통령은 격노했다. 그날 오후 총재상의역(相議役), 당무위원, 국회 상임위원장, 시도지부 위원장 등 당 간부 40여 명을 청와대로 불러 확대간부회의를 주재했다. 박 대통령은 나를 호되게 질책했다.
“예 총장(당시 나는 사무총장이 아니었지만, 모두들 나를 그렇게 불렀다)! 당의 사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맡았던 자가 개인적으로 동조자를 규합하고 은어(隱語)를 써가면서 야당 총무와 결탁, 반당(反黨)행위를 한 데 대해서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나는 이미 이날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마지막 당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찬성표를 던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상공위원장으로서 상공위원들에게 권유한 일은 없으며, 은어를 쓴 일도 없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은어를 써가면서”라고 한 것은 동료의원끼리 통화할 때 별명 같은 것을 부르곤 했던 것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그 통화를 도청하는 중앙정보부 요원의 귀에는 은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건 중앙정보부가 국회의원들을 상시적으로 도청하고 그것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1978년 오랫동안 재야(在野)활동을 하던 내가 제10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김성진(金晟鎭) 공화당 중앙위원회 의장은 다음과 같은 축전(祝電)을 보내왔다.
〈10년 전 청와대연석회의에서 호되게 질책당하던 때의 의연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이번 당선은 당연한 것이며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김성곤
그날 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당 총재직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당의 확고한 지도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면서 “당은 일주일 이내에 이번 사건을 주동한 반당분자를 철저히 규명하고, 그들이 몇십 명이 되더라도 가차없이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이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은 김진만 원내총무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으로 김택수 의원을 임명했다. 부총무에는 김우경 의원이 임명됐다. 두 사람 모두 3선 개헌에 반대하는 9인 위원회 멤버였다. 그들이 개헌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면 3선 개헌을 앞둔 중차대한 시기에 그들에게 원내사령탑을 맡길 리가 없었다. 개헌 반대 전선에 균열(龜裂)이 생긴 것이다.
4월 14일 공화당 당기위원회는 나와 양순직, 정태성, 박종태, 김달수 의원 등 5명에 대한 제명을 결정했다. 결정이 나기 전 김택수 원내총무는 의원총회에서 우리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의원총회가 열리자 김택수 원내총무는 개회를 하자마자 제명선언을 하고 바로 폐회선언을 해버렸다. 김달수 의원은 “이놈들아, 이럴 수가 있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국회의원 휴게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나는 “권 문교 해임건의안 표결 때 항명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창당에 참여한 내가 당을 떠나는 것은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기자회견을 하는 내내 김성곤 의원이 자리를 같이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일어서자 그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꽉 쥐면서 말했다.
“또 기회가 있겠지요!”
지난 몇 년 동안 김성곤 의원과 나는 줄곧 대척점(對蹠點)에 섰었다. 그때도 그는 3선 개헌 추진 세력의 선봉장이었고, 나는 그 반대파의 선봉장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개헌 반대라는 대의(大義)에 동조하다가 뒤통수를 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니, 오히려 그가 소신 있는 사나이로 느껴졌다.
JP의 變心
당에서는 쫓겨났지만, 3선 개헌만은 저지하겠다는 결의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구영 선생과도 그렇게 다짐했다. 개헌 반대 투쟁에서 우리가 가장 기대를 걸고 있던 사람은 JP였다. 당시 JP는 부인 박영옥 여사의 수술 때문에 일본에 가 있었다.
JP에 대한 핍박이 심해졌다. 청구동 자택에 있던 공용전화가 모두 철거되고, 집 주위에는 기관원들이 배치됐다. 김형욱의 주장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JP를 구속하라는 지시까지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JP는 김형욱에게 “나는 개헌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내가 알기에 JP는 “우리 손으로 만든 헌법을 우리가 훼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에 대해 김형욱은 “박 대통령이 천 년 만 년 대통령을 할 것도 아닌데, 네가 그분을 잘 보필하면 언젠가 천하의 대권이 누구에게로 돌아가겠나? 이번에는 개헌에 찬성해 주기 바란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김형욱의 회고에 의하면, 자기가 설득을 거듭하자 JP는 “대통령의 임기를 6년제가 아닌 4년으로 하고 3선만 허용하는 것으로 한다면 개헌을 지지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 항간에는 개헌 추진 세력이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하고,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박정희 대통령이 연임(連任)할 수 있도록 하려 한다는 얘기가 돌고 있었다. 이 부분은 후일 유신헌법에서 현실로 나타난다.
결국 JP는 4월 말에 이르러 “북괴의 전면 도발행위가 쇄도하고 있는 우리나라를 계속 안정과 번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박 대통령의 강력한 영도(領導)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서 개헌 지지선언을 했다.
JP가 무너지자, 개헌 반대에 앞장섰던 국회의원들도 차례로 투항했다. 신민당 의원들 가운데서도 조흥만, 성낙현, 연주흠, 임갑수, 한통숙 의원 등이 개헌 찬성으로 돌아섰다.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들을 회유하는 데 정치자금이 오갔다고 주장했다. 아마 개헌에 반대하던 공화당 소속 의원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도 그런 매수행위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볼 때 그다지 경제적 여유가 없던 사람인데 나중에 보니 부동산이나 회사를 소유하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6월 어느 날, JP가 정태성 의원과 함께 술을 한 병 들고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당에서 제명된 지 2달여 만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손만 굳게 잡고 서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말했다.
“고생이 많지요?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안녕하셨습니까? 여러 가지로 죄송합니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JP와 변변한 안주도 없이 통음(痛飮)했다. 이런저런 지나간 얘기들을 하다 보니 세 사람 모두 거나하게 취해버렸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한 시. JP가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 당에서 추진 중인 개헌에 협력하자고 권하기 위해 왔습니다. 예 총장이 언제까지 이렇게 고생을 해야겠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는 공직사퇴 후 말할 수 없이 많은 곤욕을 치렀소. 그래도 헌정수호를 할 수 있다면 버텨야 하겠지만, 이 이상은 어려울 것 같소. 차라리 각하를 모시고 개헌에 협력하고, 그것을 통해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막상 JP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니, 충격이었다.
JP, “나는 박 대통령 도와야겠소”
“의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는데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박 대통령 외에 누가 이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 길밖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장기집권을 조장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개헌 지지로 돌아서는 것은 지도자를 모시는 참된 자세라고 할 수 없기에 저는 현재의 입장을 고수하겠습니다.”
JP는 간곡하게 말했다.
“예 총장, 내가 당신 뜻을 모르겠소? 내가 겪었던 것을 동지들에게 안기고 싶지 않은 심정을 생각해 주시오.”
“의장님, 우리가 남의 힘으로 해방이 된 후 20여 년 동안 의회정치, 정당정치를 해왔지만, 사실상 독재정치였습니다. 정당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많은 정당이 지도자와 함께 부침(浮沈)을 같이했습니다. 우리가 만든 공화당만큼은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야당이 여당이 되고, 여당이 야당도 되는 것이 참된 민주정치 아니겠습니까?
부당한 표현일지는 몰라도, 국민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공화당이 8년간 실정(失政)을 했다고 생각해서 야당을 선택하면, 권력을 내놓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4년, 혹은 8년 후에 김종필 중심의 공화당이 국민의 신임을 회복한다면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때 박정희 대통령의 못다 한 일을 계승해서 해나가면 됩니다. 그게 박정희 대통령도 살리고, 공화당도 살리는 길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당정치를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 진정한 민주질서를 발전시키는 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지도자로서 떳떳한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의장님은 개헌 반대 입장을 고수해야 합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JP가 말했다.
“여보, 예 총장, 그것이 될 법이나 한 얘기요. 잘 생각해 보시오. 하여튼 나는 박 대통령을 도와야겠소.”
JP가 다녀간 후 허탈감이 밀려왔다. 최악의 경우에도 공화당 내에서 10명 정도만 버텨주면 개헌 저지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JP가 나에게까지 찾아와 설득할 정도면, 다른 의원들에게도 설득 작업을 들어갔다고 보아야 했다. 정태성 의원이 JP와 함께 우리 집을 찾은 것은 그도 이미 마음을 돌렸다는 얘기였다.
JP는 연일 골프모임이나 회식 자리를 마련해서 개헌 반대파들을 설득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사람들은 4·8항명파동으로 제명된 다섯 명과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제명된 김용태 의원이었다.
한번은 JP가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식 자리에 나를 불렀다. 나는 거절했다. 그러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전화를 걸어와 자기와 저녁식사나 같이하자고 했다. 그것도 거절하자 그는 “5분만이라도 좋으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그것마저 거절할 수는 없어서 한남동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최종적인 권유라고 하면서 “다시 함께 박 대통령을 모시자”고 했다. 나는 말했다.
“나야 민간인으로 공화당 창당에 참여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당신은 김 의장과 함께 목숨을 걸고 혁명을 했던 사람 아닌가? 그 후에도 다른 최고위원들과 대결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김 의장과 함께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이게 뭔가? 어떻게 당신이 김 의장에게 그럴 수가 있나? 지금이라도 혁명정신으로 돌아가 박정희 대통령과 김 의장을 잘 모셔야 하지 않겠나?”
그날따라 김형욱도 나와 통하는 것이 있었는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을 주고받았다. 대주가(大酒家)인 김형욱도 만취해서 몇 번이고 내게 “앞으로 내가 김 의장을 잘 모실게” 하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권력의 냉정한 메커니즘 속에서 그도 별수 없었다.
차지철과 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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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보안사령관 시절의 김재규. |
차지철은 전날에도 충북 옥천에 머무르고 있던 정구영 선생을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개헌 찬성을 압박하고 돌아갔었다. 정 선생의 자택을 찾아온 차지철은 가족들에게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말한 후, 사랑채에서 정 선생에게 박 대통령의 친서에 대한 회답을 달라고 졸랐다.
나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랑채 문을 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때 김재규(金載圭) 육군보안사령관도 정구영 선생을 찾아왔다. 정구영 선생의 아들 중 한 명이 육사 2기로 김재규와 절친한 사이였다. 김재규는 정 선생을 무척 존경했다. 그도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정 선생을 설득하러 온 것이었다.
내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재규까지 오자, 어색해진 차지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선생과 김재규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주기 위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후 김재규도 밖으로 나왔다. 내가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데 등 뒤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차지철이 정구영 선생께 무례하게 군 데 대해 김재규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10·26 후 나는 ‘두 사람의 불행한 관계는 그때부터 싹튼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차지철이 전화를 걸어왔다. “예 의원, 내가 이번에 이사를 했는데 식사라도 한 번 했으면 합니다. 우리 집에 한 번 와주십시오.”
6·7대 국회의원을 함께했지만, 우리는 특별히 가깝게 지낼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차지철은 대인관계가 그리 원만한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게는 “형”이라고 부르면서 살갑게 대했다. 그가 첫 부인과 이혼하고 재혼을 하면서 국회의원 중에서 결혼식 하객으로 부른 두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다른 한 사람은 박종태 의원이었다.
차지철의 집은 동교동에 있었다. 그의 집에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느니 하는 소문이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 그런 대단한 호화주택은 아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마시면서 차지철이 말했다.
“형, 나도 노모(老母)를 모시고 있어요. 내 딴에는 효도를 한다고 하는데, 잘 안 되네요. 형도 아시겠지만, 내가 어제 정구영 의장님께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습니다. 집에 와서도 그 때문에 한 잠도 못 잤어요.”
박 대통령을 위해서라면 물 불 안 가리는 그가 밤잠을 못 자고 후회할 정도면, 그가 얼마나 정구영 선생에게 무례하게 했을지 짐작이 갔다. 차지철은 “정 의장님께 내가 무척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정 선생 댁으로 가서 차지철의 말을 전하자, 정 선생은 “그에게도 노모가 있었군요”라면서 말을 돌렸다.
박정희와 DJ의 만남이 무산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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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원 시절의 차지철. |
아마 그해 5월쯤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김대중(DJ)씨가 나를 보자고 해서 갔더니 이런 얘길 했다.
“예 의원,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한번 만났으면 합니다. 나 때문에 박 대통령이 대통령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박 대통령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일을 못 하는 것도 아니지 않소?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면 내가 박 대통령에게 협조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것이고, 박 대통령이 나를 도와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그러니 예 의원이 힘을 써서 박 대통령과의 만남을 한번 주선해 주시오.”
나는 당시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에게 기별을 넣었다. 차지철은 즉시 만나자고 했다. 경호실장 방으로 찾아갔더니, 그는 나를 무척 반겨주었다. 식사를 같이하면서 DJ의 뜻을 전했다.
얼마 후 차지철에게 연락이 와서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는 “각하께 말씀드렸더니, 각하께서도 좋다고 하신다”고 했다. 차지철은 그 무렵 재야활동을 하고 있던 박종태·양순직 전 의원의 안부를 물으면서 “다음에 올 때는 두 분과 함께 들어오라”고 했다.
네 번째 만남 때 양순직·박종태 두 사람과 함께 들어갔다. 오래간만의 만남이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식사를 하면서 지난 시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양순직 전 의원이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말했다.
“이제 각하께서 그만두실 때도 되지 않았소? 차 실장도 각하께서 그 자리에서 잘 내려오실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소?”
순간 차지철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이 XX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지금이 어떤 때인데 그런 소릴 해? 나가요. 나가!”
우리는 글자 그대로 밥을 먹다 말고 쫓겨나왔다. 박정희 대통령과 DJ의 만남도 물 건너 가고 말았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과 DJ는 한 번도 만남을 갖지 못했다. 만약 그때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혹시 역사는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JP의 집에서 박 대통령과 마지막 통화
다시 3선 개헌 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9월 8일, 드디어 3선 개헌안이 발의(發議)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신민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농성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거기에 동참할 생각으로 국회로 나갔더니, 텅 비어 있었다. 농성이 연기된 것이다.
양순직 의원 집으로 갔더니 김용태 의원이 와 있었다. JP가 내가 야당 농성에 동참한다는 얘길 듣고 그를 보낸 것이다. 김 의원은 “기분도 그런데, 공이나 치러 가자”고 나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청구동 JP의 집이었다.
JP는 밝은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김종락·김종익 등 그의 형들도 함께 있었다. JP는 “예 총장, 이게 무슨 짓이오”라면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JP는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다. JP가 전화기에 대고 “각하, 예춘호 의원이 내 집에 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잠시 대화가 오가더니, JP가 수화기를 내게 넘겼다.
“예 총장, 전화 좀 받아보시오.”
나는 나직하게 “전화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JP는 “그럴 것까지는 없잖아요”라면서 수화기를 내게 넘겨주었다. 박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총장….”
“네, 각하. 예춘호입니다.”
박 대통령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소”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잇지 못하던 박 대통령은 “예 총장, 이리로 좀 오시지요”라고 말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청와대에서 육 여사가 내온 술상에서 술잔을 기울일 때, 박 대통령은 나를 얼마나 다정하게 대해주었던가? 하지만 3선 개헌을 두고 그분과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가서 뵐 면목이 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다시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이렇게 말했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예 총장, 김 의장하고 잘 상의해서 개헌을 통과시키도록 합시다. 그리고 모든 걸 잊고 옛날로 돌아가서 함께 일합시다. 믿고 있겠소.”
박 대통령과의 통화가 끝난 후, JP는 집요하게 나를 설득했다. 나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멋쩍은 인사를 남기고 JP의 집을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