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단한 젖가슴’의 럿셀, 20세기 최고의 상업배우 마릴린 몬로와 쌍벽
⊙ 럿셀, ‘야한’ 서부극으로 이름을 알리고, 웃기는 음악극으로 입지 굳혀
⊙ 개리 쿠퍼의 얼굴은 ‘아메리카의 지도’… 미국 역사를 은막에서 재현해
⊙ “Yep”과 “Nope”의 쿠퍼는 ‘남자 신데렐라’이자 천부적인 서부극 배우
安正孝
⊙ 71세.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코리아헤럴드》 기자, 《코리아타임즈》 기자·문화체육부장,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 주요 작품으로 소설 《전쟁과 도시》(후에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은마는 오지 않는다》(후에 《銀馬》) 《악부전》 《솔섬》 등이 있다.
번역서로 《백년동안의 고독》을 비롯해 150여 권이 있다.
⊙ 럿셀, ‘야한’ 서부극으로 이름을 알리고, 웃기는 음악극으로 입지 굳혀
⊙ 개리 쿠퍼의 얼굴은 ‘아메리카의 지도’… 미국 역사를 은막에서 재현해
⊙ “Yep”과 “Nope”의 쿠퍼는 ‘남자 신데렐라’이자 천부적인 서부극 배우
安正孝
⊙ 71세.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코리아헤럴드》 기자, 《코리아타임즈》 기자·문화체육부장,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 주요 작품으로 소설 《전쟁과 도시》(후에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은마는 오지 않는다》(후에 《銀馬》) 《악부전》 《솔섬》 등이 있다.
번역서로 《백년동안의 고독》을 비롯해 150여 권이 있다.
하워드 휴스가 제작하고 감독한 럿셀의 첫 영화 <무법자(The Outlaw· 1943)>의 주인공은 21명을 살해하고 21살에 죽었다는 ‘희대의 살인마’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1859~81)다. 그러나 훗날 역사가들은 서부의 전설이 된 빌리는 악당이 아니라 동네 싸움에 엉겁결에 말려들었다가 오명을 얻게 된 평범한 시골 청년일 따름이라고 밝혀냈다. 하지만 영화 <무법자>를 얘기할 때는 그런 진실 여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무법자>에서는 명보안관 와이엇 어프를 도와
닥(Doc=doctor) 할리데이는 일반의가 아니라 치과의사였다. 그런데도 <황야의 결투(My Darling Clementine)>에서는 닥 할리데이(빅터 머튜어)가 수술까지 척척 해내는가 하면, 유랑극단 배우가 까먹은 셰익스피어 대사를 대신 줄줄 읊어대는 지식인으로 나온다. ‘전설’이란 흔히 이런 식이다. 그리고 그가 어프와 함께 결투에 참가한 ‘O.K. 목장’도 목장(ranch)이 아니라 읍내에서 소를 잠시 가둬 두는 ‘우리(corral)’였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영화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결투와는 달리, O.K. 우리 앞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총질은 겨우 30초 만에 끝났다고 한다.
영화 <무법자>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이런 잡다한 사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유일무이하고 전무후무하게 ‘야한 서부극(sex western)’이라는 딱지가 붙은 영화 <무법자>의 제목만 들어도 당시 미국인들은 제인 럿셀의 ‘대단한 젖가슴’에 관한 소문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무법자>는 1941년에 제작을 끝냈지만, 1943년까지 극장에 내걸지를 않았다. 그것도 일부 극장에서만 상영했다. 그러고는 “이런 더러운 영화는 상영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요란하게 조작해, 한 주일 만에 간판을 내리게 했다. 검열 당국과의 길고 지루한 대결이 뒤를 이었고, 국민적 야한 기대감은 점점 비등했다. 결국 전국적인 상영이 1946년에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젖가슴을 치켜올리도록 럿셀을 위해 특별히 제작했다는 브래지어에 엄청난 호기심을 보이지만, 이 영화의 내용이나 작품성 따위는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단한 젖가슴에 대한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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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릴린 몬로와 함께 출연한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의 한 장면. 제인 럿셀은 ‘검은 머리 똑똑녀’란 애칭을 얻었다. |
상품화 전략에 휘말려 단순한 성적인 호기심의 대상(sex symbol)으로 전락하여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마릴린 몬로와 마찬가지로, 자칫 완전히 눈요깃감으로 희생될 뻔했던 제인 럿셀을 구해낸 사람은 ‘스벵갈리’ 하워드 혹스였다. 혹스는 사실상 <무법자>의 연출을 맡았지만 조감독 취급을 받아서, 영화가 개봉될 당시에는 포스터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언젠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스파르타쿠스(Spartacus)>를 연출하면서 주연배우에 제작자이기도 했던 커크 더글라스의 간섭 때문에 겪은 섭섭한 심사를 털어놓기도 했었는데, 1960년대까지도 실체를 잘 드러내지 않아서 ‘괴팍한 은둔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었던 백만장자 하워드 휴스 밑에서라면 혹스의 발언권이 얼마나 위축되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갈 일이다.
하워드 혹스는 ‘멍청한 금발 미녀(dumb blonde)’로서의 정체성을 맹렬하게 판촉하여 20세기 최고의 상업배우가 된 몬로와 쌍벽을 이루는 ‘검은머리(黑髮) 똑똑녀’ 제인 럿셀을 짝짓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래서 세상에 태어난 작품이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Gentlemen Prefer Blondes·1953)>였다. 시끄러운 동작이나 괴성이 아니라 재치가 넘치는 대사를 바닥에 깔았던 성적인 희극영화 <금발>을 보면, (몬로보다 몸집이 거의 두 배나 되어 보이는) 럿셀이 금발 멍청녀 몬로뿐 아니라 ‘육체파’인 그녀 자신을 비웃어 주는 대사가 사방에서 번득인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몬로는 ‘다이아몬드’라는 소리만 나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는 여자다. 그런 몬로가 여객선을 타고 유럽으로 항해하던 중에 만난 늙은이 찰스 코번이 남아프리카에서 두 번째 가는 다이아몬드 광산의 주인이란다. 그래서 이 말을 듣고 몬로는 코번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당장 꼬리를 치며 접근한다. “사람들이 워낙 얘기를 많이 하길래 훨씬 나이가 많은 분인 줄 알았죠.”
늙었다는 약점을 잡혀 못내 서운해진 코번이 묻는다. “도대체 무엇에 비해서 내가 더 늙었단 말인가요?”
코번이 워낙 고령이어서 비교할 대상이 선뜻 생각나지 않아 몬로가 우물쭈물하자, 럿셀이 냉큼 옆에서 거들어준다. “피라미드요.”
나중에 능구렁이 코번 영감이 몬로와 단둘이 선실에서 무엇인가 한참 수상한 짓을 부린 다음에 뒤늦게 방으로 들어간 뒤 제인 럿셀이 “저 색골 영감이 무슨 짓을 하더냐”고 묻자 몬로가 신이 나서 설명한다.
“남아프리카 얘기를 해 줬어. 거긴 아주 위험한 곳인가 봐. 비단구렁이가 사방에서 우글거린다는구먼. 피기(Piggie, 뚱돼지)가 비단구렁이 역할을 맡았고 난 염소를 했어.”
마릴린 몬로와 럿셀
비단구렁이 코번 노인이 염소 몬로를 온몸으로 칭칭 감는 시범을 얼마나 열심히 연기했을지를 상상해 보라. 그리고 이런 생생한 시범이 이루어지는 동안, (몬로의 약혼자 아버지가 파견한) 사립탐정이 밖에서 그 장면을 몰래 사진으로 찍는 현장을 럿셀이 포착한다. 그 얘기를 럿셀에게서 나중에 듣고 몬로가 묻는다. “도대체 그런 사진을 왜 찍었을까?”
몬로의 멍청한 질문에 기가 막힌 럿셀이 비꼰다. “그야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보내려고 찍었겠지.”
하지만 마릴린 몬로는 자신의 성공적인 생존에 필요한 분야에서만큼은 똑똑하기가 그지없다. (멍청한 면에서 몬로와 궁합이 참으로 기막히게 잘 맞을 듯싶은) 몰래 약혼자 토미 누난이 파리에서 몬로와 합류하여 비밀 결혼식을 올리리라는 정보를 입수한 누난의 재벌 아버지가 유럽까지 뒤쫓아 가서, 몬로를 직접 만나 카페에서 극적인 대결을 벌인다.
“아가씨, 날 호락호락하게 보지 말라고. 아가씨가 걔를 사랑한다는 말을 바보 같은 내 아들은 믿었을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그런 수작 절대로 안 통해.”
“하지만 난 정말로 그이를 사랑하는걸요.”
“돈 때문에 그러겠지. 아가씨가 내 아들과 결혼하려는 이유가 돈이 아니라는 소릴 나더러 믿으라고는 못하겠지?”
“정말이라니까요.”
“그 애의 돈 때문이 아니라면 왜 내 아들하고 결혼하려고 그래?”
“그야 아버님의 돈 때문이죠.”
그리고 몬로는 ‘여자라면 당연히 얼굴을 밑천으로 삼아 시집을 잘 가서 팔자를 고쳐야 하는’ 당위성을 누난의 아버지한테 이렇게 납득시킨다.
“남자가 돈 많은 거하고 여자가 예쁜 거하고 똑같다는 사실을 모르시나요? 단순히 여자가 예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결혼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예쁘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잖아요? 만일 아버님한테 딸이 하나 있다면, 그 딸이 하필이면 가난한 남자하고 결혼해야 좋으시겠어요? 똑같은 걸 원한다고 해서 제가 왜 나쁜가요?”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예비 시아버지가 감탄한다. “사람들은 네가 바보 같다고 나한테 그러더구나. 하지만 얘길 들어보니까 내 생각에 넌 조금도 멍청하질 않아.”
의기양양해진 몬로가 내친김에 한마디—
“전 중요한 일에 대해선 똑똑해질 줄도 알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똑똑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아드님은 예외지만요. 그이는 내 지성에 대해서 항상 관심이 많답니다.”
그리고 돈과 사랑과 결혼의 분야에 대해서라면 몬로는 혼자 잘난 척하는 럿셀에게도 할 말이 많다. “넌 사랑이 없는 결혼으로 인생의 끝장을 보고 싶진 않겠지?”
어이가 없어진 럿셀이 되묻는다. “사랑이 없는 내 인생이라고?”
“그래. 돈 걱정을 하느라고 세월을 다 보내야 하는 신세라면 여유가 없어져서— 사랑할 시간을 어떻게 내겠니?”
몬로에 맞선 <신사는 흑발과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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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신사는 흑발과 결혼한다>의 포스터. 왼쪽이 제인 럿셀이다. |
전쟁 직후 한국에서는 워낙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마릴린 몬로를 ‘주연’이라고 홍보했지만, 굳이 서열(billing)을 따지자면 <신사는 금발>은 엄연히 럿셀의 영화였으며, 이런 인기의 떡고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하워드 휴스는 뮤지컬 <프랑스 항로(The French Line·1954)>를 기획했다. 석유 재벌 상속녀인 럿셀은 돈만을 노리고 주변에 꾀어들거나 반대로 돈 때문에 그녀를 기피하는 남자들에게 시달리던 나머지, 오영진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에서처럼 참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파리로 가는 배를 탄다.
럿셀은 왜 영화에서마다 그렇게 파리로만 찾아갔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녀의 몸매를 최대한 시각적으로 살려내기 위해 아예 3-D 입체영화로 <프랑스 항로>를 제작한 휴스의 의도는 물론 속이 빤했다. 그래서 또 한바탕 검열 당국과의 신경전이 벌어졌지만, 제인 럿셀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육체파’건 무엇이건 일단 ‘딱지’가 붙으면 대중에게 각인된 모습을 바꾸기가 좀처럼 쉽지 않기 마련이어서, 럿셀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추방된 창녀가 하와이에서 벌이는 매춘 행각을 담은 <메이미 스토버의 반항(The Revolt of Mamie Stover·1956)>처럼 그렇고 그런 영화를 계속 만들어야 했다. <거인(The Tall Men·1955)>의 경우도 비슷했다. 클락 게이블과 캐머론 밋첼 형제, 그리고 돈 많은 목장주 로벗 라이언과 함께 몬태나로 소몰이에 나선 럿셀의 옷차림을 포스터에서 보면, ‘야한 서부극’ <무법자>를 관객에게 연상시키려는 계산이 지극히 노골적이다.
‘야한’ 서부극으로 이름을 처음 알리고 웃기는 음악극으로 입지를 굳힌 제인 럿셀이 가장 확실하게 진가를 발휘한 분야는 (당연히) 웃기는 서부극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를 실으며 《뉴욕 타임스》는 ‘서부극의 명배우 89살에 타계(Star of Westerns Dies at 89)’라는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럿셀 서부극은 정통 서부극에서 조금 비켜난 형태를 취했다. 노래가 분명히 삽입되었으나 장식적인 춤이 거의 나오지를 않아 ‘뮤지컬’이라고 부르기도 좀 어려운 럿셀의 서부영화에 구태여 이름을 지어 준다면, ‘보드빌 서부극(vaudeville western)’쯤 되지 않을까 싶다(보드빌은 노래, 춤, 만담, 곡예 등을 섞은 쇼).
럿셀 보드빌 서부극의 대표작은 <쌍권총 미인(The Paleface·1948)>이었다. 원제의 ‘하얀 얼굴(paleface)’이라는 말은 인디언이 백인을 부르는 ‘영어’ 명칭이며, 우리말 제목의 ‘쌍권총을 휘두르는 미인’은 인디언에게 무기를 밀매하는 악당들을 색출하라고 정부에서 고용한 ‘컬라미티(Calamity, 재앙 혹은 골머리라는 뜻) 제인 럿셀’을 일컫는 별명이다.
노래, 춤이 나오는 보드빌 서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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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쌍권총 미인>의 한 장면. 제인 럿셀이 출연한 ‘보드빌 서부극’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
이렇게 뒤바뀐 남녀의 성역할은 <쌍권총 미인>의 속편 <요절(腰折) 쌍권총의 아들(Son of Paleface·1952)>에서 훨씬 더 확실해진다. 인디언을 눈 감고도 쏴 죽였다는 전설적인 영웅 밥 호프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산을 물려받으려고 하버드 졸업생인 외아들이 보스턴에서 고물 자동차를 타고 매연을 마구 뿜으며 서부에 나타난다. 하지만 아버지 호프가 숨겨 놓은 금궤는 찾을 길이 없다. 대신 ‘하얀 얼굴’ 영웅이 꾸어간 돈을 대신 안 갚으면 아들이라도 목을 매달겠다고 쫓아다니는 빚쟁이들에게 몰린 호프는 다시 동부로 도망칠 기회만 엿본다.
전편에서 정의의 사도였던 럿셀은 속편에서 악의 화신으로 변신한다. 그녀는 쌍권총을 차고 말을 달리며 횃불(The Torch) 역마차 강도단을 진두지휘하는 악당 여두목이며, 강도질을 하지 않을 때는 ‘더럽고 부끄러운 술집(Dirty Shame Saloon)’에서 밤무대 가수로 일한다. 라틴어와 프랑스어는 유창하지만 아버지 호프처럼 진정으로 남자다운 구석이 별로 없는 아들 호프는 술집에서 럿셀을 들어올려 높은 자리에 앉히려고 낑낑대다가 실패하며 관객을 웃기는 위인이다. 그리고 관능적이라기보다는 그냥 무작정 커서 접근하기가 겁날 정도로 건장한 럿셀은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해) 수면제를 탄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은 호프를 단숨에 번쩍 들어 벽에다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 강도질을 나간다. 영화사가들이 쌍권총 2부작을 뒤바뀐 성역할의 지표라고 꼽는 이유다.
서부극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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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권총 미인>의 속편인 <요절 쌍권총의 아들>에 출연한 제인 럿셀. |
호프-럿셀의 쌍권총 영화 역시 마찬가지여서, <쌍권총의 아들>에서는 빙 크로스비가 동부의 우울한 도시인으로, 그리고 세실 B. 드밀 감독은 호프의 인물사진을 찍어 주는 동네 아저씨로 ‘깜짝 출연(cameo)’을 한다.
뿐만 아니라 ‘쌍권총 영화’와 매우 비슷한 내용과 방식으로 웃기는 서부극 <요절 대열차강도(腰折大列車强盜(Alias Jesse James·1959)>에서는 총을 제대로 쏠 줄조차 모르는 보험설계사 호프가 열차강도 제시 제임스 일당과 동네 한복판에서 서부판 시가전을 벌일 때, 당시 여러 서부 영화나 텔레비전 연속물에서 명사수로 활약하던 인물들이 단체로 ‘우정 출연’을 해서는 뒷골목 여기저기 숨어 호프 몰래 비공식적으로 전투에 참가한다.
<대열차강도>에서는 <초연(硝煙, Gunsmoke)>의 맷 딜론 보안관으로 유명한 제임스 아네스, <와이엇 어프>의 휴 오브라이언, <매브릭(Maverick)> 제임스 가너, <데이비 크로켓> 페스 파커, <애니 오클리>의 게일 데이비스, B 급 영화 서부극의 영웅 로이 로저스, 호프의 단짝 빙 크로스비, 존 포드 사단의 워드 본드뿐 아니라, <론 레인저(The Lone Ranger)>의 인디언 친구 톤토(Tonto, Jay Silverheels)까지 활을 쏘며 ‘음지’에서 호프를 돕는다. 이 마지막 장면이 나오면 극장 안은 그야말로 장마당처럼 폭소판이 되고는 했다.
서부극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이름이 떠오르는 배우 개리 쿠퍼(Gary Cooper, 본명 Frank James Cooper·1901~61)가 이런 자리에서 빠질 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열차강도 한 명을 멋지게 쏘아 넘기고 나서 총구의 연기를 입으로 불어 버리고는 말한다. “Yep(좋았어).”
그리고 이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기 훨씬 전에, 10만 달러 생명보험에 가입한 은행 강도가 죽으면 보험회사가 망할 판이어서, 모자에 끈으로 연결한 쌍권총으로 무장하고 제시 제임스 대신 몰래 밥 호프가 먼저 달려가 결투에 참가한다. 그리고 무사히 돌아온 호프는 (개리 쿠퍼의 말투를 흉내 내어) 론다 플레밍이 묻는 모든 질문에 “Yep”과 “Nope”이라는 단음절 대답만으로 일관하며 잘난 체를 한다.
단음절의 대답, “Yep”과 “N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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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효가 그린 제인 럿셀 캐리커처. |
젊은 시절의 제임스 스튜어트, 그리고 헨리 폰다와 마찬가지로 쿠퍼는 어딘가 조금쯤은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였다. 아마도 키가 지나치게 커서 어색할 정도로 두 다리가 헐렁헐렁해 보이고, 실제 나이보다 얼굴이 훨씬 늙은 인상을 주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쿠퍼는 로벗 테일러나 루돌프 발렌티노처럼 미남이라고 선뜻 주장하기는 어려운 연기자였다. 그리고 이렇게 빈틈까지 완벽하게 갖추었던 그는 수많은 영화에서 진실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귀감을 보여, 1960년대까지 고달픈 시절을 헤쳐 나가야 했던 미국인들에게 많은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
쿠퍼의 ‘완벽한 빈틈’은 아메리카 국민으로 하여금 그를 언제라도 당장 달려와서 도와줄 선량하고 어수룩한 이웃으로 착각하도록 효과적인 촉매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프랭크 캐프라의 <군중>에서 민중을 대변하는 인물 존 도우(John Dow)의 역할이 쿠퍼에게로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리고 캐프라가 다시 <디즈 씨 뉴욕에 가다(Mr. Deeds Goes to Town·1936)>에서 그를 민중의 구세주로 뽑았던 까닭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디즈 씨>의 쿠퍼는 외딴 시골 마을에서 작은 사업을 하며, 취미삼아 기념 카드에 짤막한 시를 써 주고 용돈을 번다. 툭하면 웅장한 방귀 소리를 내는 투바를 즐겨 불면서 한가하게 살아가던 그는 양귀자의 소설에 등장하는 ‘원미동 시인’과 영락없다. 이름까지도 유명한 미국 시인과 마찬가지로 ‘롱펠로우(Longfellow=‘꺽다리 친구’라는 뜻이기도 함)’다.
그러다가 쿠퍼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2천만 달러의 유산을 아저씨로부터 물려받는다. 그의 주변에는 당장 사기꾼들과 기회주의자들이 파리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한다. 졸부가 된 쿠퍼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서 바보처럼 쩔쩔맨다. 하는 짓이라고는 하나같이 어린애였던 그를 보고 언론에서는 ‘남자 신데렐라(Cinderella Man)’라는 별명을 붙여놓고 놀려대는가 하면, 여기자 진 아더는 “멍청한 촌놈(dumb hick)”이라며 그를 비하한다.
물론 이런 소박한 인물구성은 캐프라 영화의 특징적인 매력이므로 관객은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작품이 보여주는 대로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어쨌든 그러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탐욕에 눈이 먼 주변의 인간 군상이 드러내는 추악한 행태에 회의를 느낀 쿠퍼는, 차라리 이런 더러운 돈은 다 없애버려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그는 공황기를 맞아 굶주리는 빈곤한 사람들에게 농장을 사라고 마구 돈을 나눠주다가 정신이상으로 몰려 청문회로 끌려 나간다. 큰돈을 관리할 능력이 그에게 없다고 증명하여 재산을 가로채려는 변호사의 농간 때문이다.
남자 신데렐라와 착한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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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리 쿠퍼 캐리커처. |
개리 쿠퍼는 그의 딸이 얼굴에 침을 뱉어 준 패트리샤 닐 말고도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그레이스 켈리 등 함께 공연한 여러 여배우들과의 염문을 끊임없이 일으켜서 사생활이 비교적 지저분하기는 했지만, 은막에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착한 미국인이었다.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할리우드의 주류 전쟁영화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미 해군 항공모함 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부분만 골라 색채로 제작한 흑백영화여서 우리나라의 영화수입 업자가 ‘부분 천연색’이라는 이상한 명칭을 붙였던 <기동부대(Task Force·1949)>는 쿠퍼의 대표적 애국영화였다. <기동부대>에서 그는 상관인 월터 브레난의 지원을 받아 가며, 군 수뇌부와 정계의 반대를 이겨 내고 해군의 항공력을 증강해야 한다는 투쟁을 27년 동안 벌이는 장교의 역을 맡았다.
<기동부대>의 주인공을 닮아도 너무나 닮은 실존인물 빌리 밋첼의 생애를 담은 <군법회의(요즈음 용어로는 군사재판·The Court Martial of Billy Mitchell·1955)>에서 그는 해군 전투력에 제공권을 보완하는 업적을 달성하기는 하지만, 워낙 주관이 뚜렷해서 빈번한 항명으로 상부와 충돌을 일으켜 강등을 당하기까지 한다. 영화에도 상세하게 반영되었지만, 밋첼 준장은 우방이었던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는 미국의 주적이 되리라며 냉전시대의 도래를 예언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개리 쿠퍼에게 첫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 준 <요크 상사(Sergeant York·1941)>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무공훈장을 받아 유명해진 미군 병사 앨빈 요크(Alvin York)의 전기 영화다. 마을 사격대회에서 대단히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는 하던 산골 청년 요크는 벼락을 맞고 종교적인 깨우침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전쟁이 터져 군대에 징집된 다음에 양심적 병역 거부자(conscientious objector)가 되어 살상 행위에 ‘가담’하지를 않겠다고 버틴다. 하지만 결국 월터 브레난 목사의 끈질긴 설득 끝에 (산 위에 올라 계시를 받고!) 전쟁터로 돌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혁혁한 무공을 세운다.
앨빈 요크는 자신의 무용담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에 끝내 반대하다가, 성경학교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결국 동의하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영화로 제작될 때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그랬듯이) 개리 쿠퍼에게 주연을 맡겨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고 한다.
대법원 판사였던 아버지 목장에서 말을 타고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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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리 쿠퍼는 1960년대 ‘믿음직한 미국인’의 상징이었다. 영화 <디즈 씨 뉴욕에 가다>의 한 장면. |
<하이눈(High Noon·1954)>에서는 쿠퍼가 신부로 맞은 그레이스 켈리가 퀘이커 교도여서 마을 사람들이 냉담하게 등을 돌려, 버림을 받고 혼자서 네 명의 악당과 싸워야 하는 주인공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출옥한 악당 패거리가 돌아와서 마을을 다시 타락한 악의 소굴로 만들어도 상관없으니 그냥 도망치라”면서 주민들은 쿠퍼에게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젊은 조수 로이드 브릿지스는 개인적인 명성을 노리며 보안관 자리를 물려받아 쿠퍼를 내쫓고 공을 세우려고 혈안이다. 그리고 이미 보안관 자리를 내놓은 그가 다시 총을 들면 결별하겠다며 기차를 타러 역으로 나가 버린 신부 켈리.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길거리에 혼자 서서 진땀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텅 빈 마을을 둘러보는 쿠퍼에게 끝까지 애정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한때 그의 애인이었던 멕시코 여인 케이티 후라도뿐이다. 그래서 “나를 버리지 말라(Do not forsake me)”며 텍스 리터(Tex Ritter)가 부르는 주제곡은 행진곡처럼 참으로 절도 있고 씩씩하면서도 장송곡처럼 지극히 슬프고 애절하다. 이 노래는 훗날 프랭키 레인(Frankie Laine)이 가사 내용을 조금 수정하고 다시 불러 더욱 유명해졌다.
개리 쿠퍼가 생애 최고의 연기로 두 번째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탄 <하이눈>은 상영시간(85분)과 영화 속에서 진행되는 시간이 일치하여 더욱 긴장감을 높인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치열한 결투가 끝난 다음 비겁한 마을 사람들이 교회에서 환호성을 올리며 영웅을 치하하면서 몰려나오자 쿠퍼가 보안관 배지를 떼어 땅바닥에 버리는 장면은 훗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더티 해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대로 표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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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해군 항공모함 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화 <기동부대>. |
무려 92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쿠퍼는 볼 때만 재미있고 마음속에 별로 건더기가 남지 않는 범작 또한 많이 남겼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나마 인기가 괜찮았던 쿠퍼 서부극을 꼽는다면, 세미놀 인디언들에게 쫓기는 병사들을 이끌고 ‘야만적인 신사’ 쿠퍼 해군 대령이 플로리다 늪지대(Everglades)를 거쳐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하는 <북은 울린다(Distant Drums·1951)>, 쿠퍼가 텍사스에서 캐나다까지 올라가 반란 진압을 돕는 <북서기마경관대(The Northwest Mounted Police·1940)>, 귀족의 사생아인 잉그릿 버그만이 어머니의 복수를 하려고 파리에서 뉴올리언스로 돌아와 텍사스 도박사 쿠퍼와 사랑에 빠지는 <사라토가(Saratoga Trunk·1945)>, 지금의 피츠버그 일대에서 개척자들과 인디언들이 전쟁을 벌이는 세실 B. 드밀의 정통서부극 <정복당하지 않는 사람들(Unconquered·1947)>, 석유 재벌 앤토니 퀸의 아내 바바라 스탠윅이 헤어졌던 옛사랑 쿠퍼와 불륜을 맺으려고 맹렬하게 덤벼드는 <황야의 선풍(旋風·Blowing Wild·1953)>, 통쾌무비 멕시코 혁명 활극 <베라 크루즈>, 사나이 우정이 감동적인 <악의 화원>, 얌전하기 짝이 없고 이름까지 웃기는 ‘멜로디 존스’(쿠퍼)가 악당 댄 듀리에로 오인을 받아 고생하다가 여자(로레타 영)의 총 솜씨 덕택에 겨우 곤경을 벗어나는 희극 <무숙자(無宿者·Along Came Jones·1945)>, 남북전쟁 직후 전설적인 총잡이 와일드 빌 히콕(Wild Bill Hickok·본명 James Butler Hickok·1837-76)의 도움을 받아 쿠퍼가 가족의 복수를 실현하는 <초연(硝煙)의 달라스(Dallas·1950)> 정도가 되겠다.
서부의 유명인이 ‘배우’로 등장한 영화 <평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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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리 쿠퍼에게 첫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 준 영화 <요크 상사> 한 장면. |
<평원아>에는 히콕의 친구였던 버팔로 빌 코디(Buffalo Bill·본명 William Frederick Cody·1846~1917)도 등장한다. 역시 명사수였던 들소 사냥꾼 코디는 나중에 서부 곡마단(the Wild West Show)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계속했다. 이 서부 곡마단에서는 바바라 스탠윅의 영화에 등장하는 애니 오클리뿐 아니라, 커스터 장군의 제7기병대 208명을 리틀 빅혼(the Little Bighorn) 강변 전투에서 통쾌하게 괴멸시킨 수(Sioux)족 인디언의 시팅 불(Sitting Bull) 추장 같은 서부의 유명인들이 ‘배우’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평원아>에서는 진 아더가 서부의 다른 전설적인 인물 컬라미티 제인(Calamity Jane)으로 나온다. 제인 럿셀이 주연한 <쌍권총 미인>의 여주인공이기도 했던 컬라미티는 훗날 도리스 데이의 뮤지컬 서부극 <컬라미티 제인>에서 하워드 킬(히콕)을 남몰래 사랑(주제곡의 제목이 ‘Secret Love’였음)하는 말괄량이로 다시 두각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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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하이 눈>으로 개리 쿠퍼는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탔다. |
서부의 여걸로 알려진 마사 캐너리(Martha Jane Canary·1852~1903)의 별명이 왜 ‘재앙’이나 ‘골머리’를 뜻하는 컬라미티(Calamity)가 되었는지는 지금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그녀에 관한 여러 가지 무용담이 얽힌 주장이 난무하지만, 할리우드 키드의 짐작으로는 그녀의 성 Canary(재잘거리는 ‘카나리아’)와 calamity(재수 없는 여자)라는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생겨난 별명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컬라미티에 관해서는 인디언과의 전투, 군 복무, 히콕에 대한 짝사랑, 약자를 편드는 착한 마음씨에 얽힌 일화가 무척 많지만, 대부분 컬라미티 자신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 그런 얘기들 가운데 진실이라고 증명된 내용은 거의 없다. 컬라미티가 그만큼 ‘뻥치기(tall tale)’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애니 오클리처럼 관객 앞에서 ‘공연’을 자주 했는데, 무대에서 같은 얘기를 그녀가 되풀이할 때마다 내용이 번번이 크게 달라지고는 했단다.
씩씩한 서부인에서 은행 강도로까지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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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리 쿠퍼는 영화 <평원아>에서 진 아더와 함께 출연했다. |
어느 평론가는 개리 쿠퍼의 얼굴을 ‘아메리카의 지도(map of America)’라고 표현했는데, 그가 미국의 역사를 은막에서 생생하게 재현했다는 뜻이겠다. 하지만 쿠퍼는 ‘지도’가 아니라 ‘역사’라는 표현이 더 알맞을 듯싶다. 그리고 쿠퍼 서부극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1950년대 중반부터 낭만적인 정통극의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수정주의 서부극이 도래하리라는 필연적인 역사의 전조를 보였다. 나약하거나 불순하거나 사악한 면을 전혀 보이지 않고 언제나 착하고 꿋꿋하던 영웅 쿠퍼의 일방적인 모습이 영화에서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무숙자>에서 그는 총 솜씨가 ‘여자만도 못한’ 희극적 면모를 이미 노출시켰고, 남북전쟁 영화 <콜로라도의 혈전(Springfield Rifle·1952)>에서는 비겁하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는가 하면, <교수목(絞首木, The Hanging Tree·1959)>에서는 부정한 아내를 죽였다는 부끄러운 과거의 악몽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서부의 사나이(Man of the West·1958)>에 이르자 쿠퍼는 기(관)차가 뿜어내는 연기에 화들짝 놀라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여전히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사나이의 자취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제 쿠퍼는 피로감이 역력하고 나약한 늦중년이 되었다.
시골 마을에 학교를 세우고는 동네 사람들에게서 모금을 한 돈으로 선생을 구하러 대처로 나가던 ‘서부의 사나이’는 도중에 열차강도를 만나 옛 고향 근처에서 사기꾼 아더 오코넬과 술집 여가수 줄리 런던과 함께 허허벌판에서 낙오한다. 그는 빼앗긴 돈을 찾기 위해 강도단의 본거지로 찾아간다. 그를 따라간 오코넬과 런던은 가족만으로 구성된 떼강도의 두목 리 J. 콥이 쿠퍼의 삼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거에 쿠퍼는 콥의 부두목으로 크게 활약했던 은행 강도였다. 잠깐 갈등을 하는가 싶더니, 끝내 쿠퍼는 마지못해 콥을 따라 다시 은행을 털러 나서지만, 결국 삼촌과 사촌을 모조리 처치한 다음 여교사 겸 아내가 될 줄리 런던과 함께 서부의 마을로 돌아간다.
무성영화에서부터 말을 타기 시작하여, 흑백 고전과 테크니컬러 시대에 선량하고 씩씩한 서부인으로 명성을 날렸던 개리 쿠퍼는, 이렇게 시네마스코프 대형 화면에서 은행 강도로까지 전락하고는,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