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는 합당작업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北朝鮮共産黨과 朝鮮新民黨은 7월 28일부터 사흘 동안 양당연석 중앙확대위원회를 열어 합당을 결의했다. 北朝鮮勞動黨 결성대회는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열렸다.
南韓의 左翼3黨의 합당작업은 朴憲永의 독단으로 말미암아 난관에 부딪혔다. 3당 모두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獨促國民會 부위원장 申翼熙는 8월 29일의 國恥기념일 행사를 大韓民國임시정부옹립 國民大會로 치를 계획을 세웠다. 국민대회 이름으로 행정기관을 접수한다는 일종의 쿠데타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사전에 미군첩보대(CIC)에 탐지되어 좌절되었으나 회의장에는 李承晩 대통령, 金九 부통령 등으로 된 臨時政府閣僚名單이 인쇄된 전단이 뿌려졌다.
미군정부는 8월 24일에 법령 제118호로 「過渡立法議院 창설에 대한 法令」을 발표했다.
9월 들어 미군정부의 강경조치가 시작되었다. 9월 4일에 《朝鮮人民報》, 《現代日報》, 《中央新聞》 세 신문이 정간된 데 이어 9월 7일에는 朴憲永을 비롯한 共産黨 간부들에게 체포령이 내려져, 중앙위원회 서기국장 李舟河와 민족전선 부의장 洪南杓는 9월 8일에 체포되었다.
1. 北朝鮮勞動黨의 결성과 남한 3黨합당 작업의 난항
우여곡절 끝에 좌우합작위원회의 제1차 정식 회담이 열린 이튿날인 1946년 7월 26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기습적으로 발표한 ‘합작 5원칙’은 좌우합작 작업을 무산시키려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朴憲永)의 위기감에 따른 모험주의적인 공작의 소산이었다.
右翼도 ‘合作 기본대책 8원칙’ 발표
합작위원회의 제2차 회담이 예정된 우익 정파들은 7월 29일 오전 9시에 창덕궁(昌德宮)에서 민주의원과 비상국민회의의 합동회의를 열었다. 좌우합작위원회에 제출할 우익의 합작기본대책을 토의하기 위한 회의였다. 회의는 합작위원회의 우익 대표들이 작성한 8개항의 ‘합작 기본대책’을 약간 수정하여 다음과 같이 확정했다. (1)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노력할 것.
(2)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할 것.
(3) 소위 신탁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후에 그 정부가 자주독립정신에 입각하여 해결할 것.
(4) 임시정부 수립 후 6개월 이내에 보통선거에 의한 전국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
(5) 국민대표회의 성립 후 3개월 이내에 정식 정부를 수립할 것.
(6) 보통선거를 완전히 실시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를 절대 보장할 것.
(7) 정치, 경제, 교육의 모든 제도, 법령은 균등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정할 것.
(8)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징치하되 임시정부 수립 후에 특별법정을 구성하여 처리케 할 것.
좌우합작위원회의 제2차 회담은 이날 오후 2시에 덕수궁(德壽宮)에서 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좌익 대표들은 회담장에 나타나지 않고 김세용(金世鎔) 비서만 와서 여운형이 몸이 좋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회담을 다음 회담일인 8월 2일까지 연기할 것을 요청했다. 우익 대표들은 좌익의 ‘합작 5원칙’은 이미 신문에 보도되었으므로 우익도 다음 회담까지 침묵하고 있을 수 없고 또 상대방에게 검토할 시간을 줄 겸 하여 송남헌(宋南憲) 비서로 하여금 김세용과 함께 좌익쪽 의장인 여운형에게 제출하게 했다. 그리고 바로 신문에 발표했다.1)
우익이 ‘합작기본대책 8원칙’을 발표하자 민족전선 사무국은 7월 31일에 “우익의 ‘합작 8원칙’은 이승만 박사의 반동정치노선에서 일보도 전진하지 못한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우익에서 제시한 합작기본대책 8개 조건에는 행동통일의 원칙이 표명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 그들은 민주주의 정책에 대하여 열성이 없을 뿐 아니라 인민을 위한 진보적 개혁을 태업(怠業)하고 방해하려는 반동적 기도를 이번 8개 조건에서 명시한 것이다. … 8개 조건의 합작대책은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반동정치노선에서 일보도 전진하지 못한 것으로서 우익 자체의 반동성을 고백한 데 불과하다. …”
그러면서 이 담화는 우익의 8개 조건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제7항과 제8항인데, 그것은 민주주의적 개혁을 태업하고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숙청을 방해하여 그 토대 위에서 반동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2)
이 담화는 좌우합작 작업을 파괴하려는 박헌영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呂運亨은 연천에 가서 金日成 만나
좌익인사들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을 8월 2일의 회담일까지 연기하자고 제의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7월 31일에 여운형이 은밀히 북한 지역인 강원도 연천(漣川)으로 가서 김일성(金日成)과 회담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김일성은 황해도와 강원도 지역을 시찰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된 직후인 2월과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던 4월에도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왔다. 4월 19일부터 25일까지의 방북에 대해서는 하지(John R. Hodge) 사령관의 정치고문 랭던(William R. Langdon)이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4월의 한국 정세보고에도 언급되어 있다.3)
7월 31일의 두 사람의 회동은 북조선공산당의 공작원으로 서울에 와 있던 성시백(成始伯)을 통한 편지 왕래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국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회동은 하루로 끝났다. 두 사람은 연천군 공산당 사무실에서 점심을 함께 들면서 하루 종일 회담했다고 한다.4)
여운형이 김일성과의 회담을 앞두고 그와 협의할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보존되어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이 문서는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에 암살될 때에 가지고 있던 손가방에 김일성과 김두봉(金枓奉) 앞으로 보낸 편지 등 다른 몇 가지 문서와 함께 들어있던 것이다. 원문사본은 없고 영문으로 번역한 것을 하지의 정치고문 제이콥스(Josehp E. Jacobs)가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것이다. ‘인민당의 계획’이라는 이 문서의 ‘인민당의 요구’ 부분은 박헌영의 좌우합작에 대한 태도변화를 비판하면서 자신에 대한 지지와 성원을 간곡히 요망하는 것이었다. 이 문서에는 인민당은 북조선과 모스크바에 정부설계를 배울 대표를 파견하기를 원한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러한 요망사항이 두 사람의 회담에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北韓의 합당작업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북한조선노동당의 고위간부였던 박병엽(朴炳燁)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의 두 사람의 회동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된 의제는, 첫째로 남한 좌익 3당의 합당문제, 둘째로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이 주도하고 있는 좌우합작 작업, 셋째로 미군정부에 대한 대응전술문제였다.
남북한의 좌익정당 합당문제는 7월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에 스탈린(Iosif V. Stalin)이 제시한 과제였다. 그것은 동부 독일을 비롯하여 소련군이 진주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실행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여운형과 김일성이 만났을 때에는 북한에서 이미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의 합당 절차가 끝나 있었다. 조선신민당은 중국 연안(延安)에서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하던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의 김두봉 주석 등 간부들이 1945년 12월에 입국한 뒤에 평양에 머물면서 1946년 2월 16일에 명칭을 바꾼 것이었다. 독립동맹 간부들이 입국한 뒤에 서울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여 결성되어 있던 독립동맹경성특별위원회도 7월 14일에 남조선신민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5)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작업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김일성 일행이 모스크바에서 귀국하고 열흘쯤 지난 7월 22일에 북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민주당,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의 4개 정당과 북조선직업동맹, 북조선농민동맹 등 15개 사회단체가 참가하여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결성했다.6) 그 이튿날 조선신민당은 중앙상무위원회를 열고 “현 단계의 조선신민당 과업과 목적이 북조선공산당의 과업과 목적들과 합치되므로” 두 당의 합동을 북조선공산당에 제의하기로 결의했고 그 결의에 따라 신민당 위원장 김두봉은 두 당의 합당을 제의하는 편지를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일성에게 보냈다. 북조선공산당은 7월 24일에 중앙상무위원회를 열어 신민당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의하고, 그 뜻을 김일성의 편지로 김두봉에게 전했다. 이러한 절차는 소련군 사령부의 종용에 따른 것이었을 것이다.
모든 절차는 속전속결이었다. 마침내 7월 28일부터 사흘 동안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양당연석 중앙확대위원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두 당은 “북조선의 근로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대중적 정당”으로 합동할 것을 결의했다.7) 두 당의 합당 뉴스는 남한 신문에도 일제히 보도되었다.8)
신민당의 지식인 당원들은 공산당과 합당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김두봉이 양당연석 중앙확대위원회에서 양당합당을 제의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신민당의 오늘의 발전은 우당인 북조선공산당의 절대한 원조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신민당의 발전에 따라 거기에는 비록 약간이나마 상호 마찰을 피하지 못하는 양당의 조직체의 결함을 지적할 수 있다. 즉 북조선공산당은 지식분자를 전체적으로 포함하지 못한 데에서, 또 조선신민당은 노동자 농민을 전체적으로 포함하지 못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상의 점에서 불필요한 분란과 마찰을 절멸하기 위하여 조선신민당은 북조선공산당에 대하여 양당 합동 문제를 제의한 것이다.”9)
合黨은 지도부의 완전합의로
남한의 좌익정당 합당은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세 정당의 합당을 말하는 것이었다. 여운형과 김일성은 이날의 회동에서 합당의 절차를 비롯하여 새 정당의 정강정책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합당작업은 3당 지도부의 완전 합의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당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리하여 합당의 필요성은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민당이 먼저 제의하기로 했다. 김일성은 공산당 프락치를 중심으로 한 3당합당이 되어서는 안 되고, 또 합당에 따른 각 당의 내부 분열이 없도록 지도력을 발휘해 줄 것을 여운형에게 부탁했다고 한다.10)
3당합당의 중요한 목적은 대중정당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정강 정책도 그것에 부합되는 것이어야 했다. 두 사람은 정강에 인민공화국 체제의 국체와 인민위원회 제도, 사회주의적 사회개혁의 실시 등을 포함시켰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 의제인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좌우합작 작업에 대해서는 김일성은 부정적이었다. 김일성은 미군정부가 미소공위가 재개될 경우 임시정부수립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활용할 입법기구를 만들기 위하여 김규식과 여운형을 내세워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같은 조직을 이남에서 만들려고 한다고 보았다. 그러기 위하여 여운형을 좌익진영에서 떼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여운형은 미군정부가 자신을 이용하려 하는 것은 틀림없으나, 자신과 김규식은 분명히 미군정부와 다른 목적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운형은 남쪽에서 좌우익이 합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남북이 합작하면 전 민족적인 통일전선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미소공위에서 임시정부수립 문제를 논의하더라도 쉽게 합의를 끌어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김일성도 이 말에 동의했다.
여운형은 또 박헌영이 좌우합작을 방해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그렇게 하지 않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부탁했다. 박병엽은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좌우합작 작업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배후에서 도와주도록 계속 종용했으나 박헌영이 그것을 사실상 묵살했다고 증언했다.11)
마지막으로 미군정부에 대한 대응전술 문제에서 여운형은 박헌영의 ‘신전술’에 북조선공산당도 동의하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공산당의 전술과 인민당의 전술이 같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12)
共産黨 프락치들의 주동으로 합당결의
북한에서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이 전격적으로 추진된 것과는 달리 남한의 좌익정당 통합작업은 격심한 혼란과 진통을 겪었다. 그것은 박헌영이 다른 좌익정당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합당작업을 추진하겠다고 한 김일성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조선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에 심어 놓은 공산당 프락치들을 동원하여 합당작업을 추진하려 했기 때문이다.
연천에서 김일성과 만나고 온 이튿날인 8월 1일에 여운형은 장건상(張建相), 이만규(李萬珪), 이여성(李如星), 김오성(金午星) 등 인민당 지도자들을 만찬에 초청하여 김일성과의 회담에 대하여 설명했다. 여운형은 자신이 3당합당을 추진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고 참석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장건상은 갑작스러운 일이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지지했다.
김오성과 김세용은 8월 2일에 합당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인민당 중앙정무위원회 회의를 소집했다. 김오성은 공산당 프락치였다. 이상백(李相佰), 이임수(李林洙) 등의 반대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합당에 찬성했다. 같은 날 인민당 안의 공산당 프락치 회의도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는 공산당 서기국장 이주하(李舟河)가 참석했다. 8월 3일 오후에 열린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는 논란 끝에 인민당이 공산당과 신민당에 합당을 제의하기로 결의했다. 회의는 여운형, 장건상, 이만규, 이여성 등 9명을 협상추진위원으로 선출하고, 여운형 명의로 된 합당제안문을 발송했다. 그런데 여운형은 이날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제안문은 김오성이 작성한 것이었다.13)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튿날로 인민당의 제안을 “승낙하며 접수한다”는 회답문을 보냈고, 신민당 중앙위원회는 8월 7일에야 3당합당 문제를 구체화하는 교섭에 응할 용의가 있다는 백남운의 선언문을 여운형에게 전했다.14)
反朴憲永派는 당대회 소집 주장
그러나 3당합당 작업은 이내 각 당의 내부분열을 가져왔다. 분열은 조선공산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8월 4일의 공산당중앙위원회에서 강진(姜進), 서중석(徐重錫), 김철수(金綴洙), 이정윤(李廷允), 김근(金槿), 문갑송(文甲松) 6명은 합당문제는 당대회에서 결정해야 할 중대한 사인인 만큼 당대회를 소집해야 하고 당대회에서는 당 중앙간부도 새로 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부결되고 합당준비위원 9명의 선거권도 박헌영에게 위임되자, 「합당문제에 대하여 당내동지제군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청년해방일보(靑年解放日報)》호외로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당내의 반박헌영파가 박헌영파의 파벌적 전횡을 통렬하게 비판한 최초의 문서였다.15) 공산당은 8월 7일에 중앙위원회를 긴급히 소집하여 이정윤을 당적에서 제명하고, 나머지 5명에 대해서는 무기정권을 결정했다.16) 이들은 모두 일본점령기때부터 공산주의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던 원로 및 중진들이었다. 이때부터 이 여섯 사람은 ‘대회파’라고 불렸다.
대회파들은 같은 날 당원대회를 급속히 소집할 것을 제창했다.17) 대회파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지방 공산당원들도 나타나 대회파라는 큰 반박헌영 세력이 형성되었다. 8월 9일에는 서울, 인천, 영등포, 소사, 부평 등지의 공산당원 177명이 경인선 부평구의 어떤 산 계곡에 은밀히 모여 열성자대회 준비위원회를 열고 토론 끝에 대회파들에 대한 지지와 박헌영 일파의 반성을 촉구하기로 결의했다.18)
좌익 3당의 합당문제에 대하여 대표적인 두 우익정당인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이 비슷한 내용이면서도 뉘앙스가 다른 논평을 내고 있어서 흥미롭다.
한독당 선전부장 엄항섭(嚴恒燮)은 8월 6일에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북한에서 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동하고 남한에서도 공산, 신민, 인민 3당이 합당하게 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 북한에서 공산당과 신민당이 해소되고 새로이 노동당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특별히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없던 공산당을 새로 조직하는 것이 세계 각국에서 나타나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존한 공산당을 해소하는 것은 당 자체로서 현 단계의 한국에서는 그 당의 존재의 가능성이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19)
한민당의 논평은 한결 가시돋친 것이었다.
“북조선에서 공산당과 신민당이 합하여 북조선노동당이 되었다는 보도에 뒤를 이어 남조선에서도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이 되리라는데, 이것은 ‘인민공화국’ 창립, 신탁통치 찬성, 위조지폐 사건 등 온갖 죄악을 일으킨 공산당이 그 자체의 이름으로는 도저히 민심을 수습할 수 없으므로 노동당이란 미명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민중은 이 계략에 기만되어서는 안된다. 공산당의 중진들이 반박헌영운동을 일으켜 애국적 공산당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주목할 현상이다.”20)
좌익정당들에 대한 두 당의 입장이 그대로 대비되는 논평이었다.
人民黨과 親民黨도 분열돼
조선인민당도 혼란에 빠졌다. 위원장 여운형은,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곧잘 그랬듯이, 요양을 빙자하여 서울을 떠나있었다. 인민당의 간부가 되어있는 공산당 프락치 김오성이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부에 보낸 보고서는 이때의 여운형의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현재 여운형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은 좌우합작 운동의 결말을 지어야 할 필요성과 미군정부의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의 행동이 확고한 사상성의 결여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는 판단도 전적으로 가능하다. 또한 공산당 지도자들의 방자한 행동에 대해 경고하려는 희망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를 노리면서 그는 당수직을 그만두고 좌익정당의 합당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반대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21)
8월 12일에 열린 인민당의 중앙집행위원회는 8월 16일에 확대위원회를 열어 합당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확대위원회는 전당대회의 권한을 대행하는 최고 결의기관이었다. 확대위원회에 대비하여 8월 14일에는 공산당 프락치 회의가 열려 공산당 정치국원 이승엽(李承燁)이 참석한 가운데 대책을 숙의했다.
회의가 열리기에 앞서 찾아온 기자에게 부위원장 장건상은 “나의 정치신념으로는 현 단계에서는 미군정 협력과 좌우합작 추진이 당면한 정치적 과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만큼 이 두 문제가 확대위원회에서 부인된다면 나 개인으로서는 탈당까지 각오하고 있다”라고 비장한 결의를 표명했다.22) 장건상의 이러한 말은 여운형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었다.
8월 16일 오후 1시부터 광화문의 당사 회의실에서 열린 확대위원회는 긴장이 감돌았다. 회의에는 세 가지 제안이 제기되었다. 첫째는 다른 정당들과의 합당을 빨리 추진하는 것, 둘째는 공산당의 내부 분열이 수습될 때까지 합당작업을 중지하는 것, 셋째는 다른 정당들과의 합당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회의는 6시간에 걸쳐 논쟁을 계속했다.23) 그러자 회의를 진행하던 장건상이 긴급제의로 여운형의 당수 사임문제를 토의할 것을 요구하면서 여운형의 사표를 낭독했다. 그러나 합당파들은 그것은 반동분자의 모략이라고 일축하고 표결을 강행하여 48대 31로 합당을 결의했다. 그러자 황진남(黃鎭南), 이임수, 이상백 등 26명은 회의장을 떠났다. 회의장이 혼란에 빠지자 장건상도 의장사퇴를 선언하고 퇴장했다. 그러나 합당파는 현우현(玄又玄)을 의장으로 선출하여 회의를 속개하고 협상추진위원 11명을 선정하는 등의 의사를 진행했고, 합당반대파는 별실에서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여운형의 사임문제에 관한 결의문을 작성했다.24)
남조선신민당도 적극추진파와 신중파로 양분되었다. 위원장 백남운은 8월 17일의 기자회견에서 3당합당 문제와 관련하여 “민주역량을 총 집중하여 민주연맹 기능을 확대 강화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를 원칙적으로 찬성한다”고 말하고, 그러나 “이는 다수당이 소수당을 병합하는 것이 아니고, 일당이 타당에 흡수되는 것도 아닌, 민주적 협동에 의해야 하며 평등적으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은 “여운형, 박헌영 양씨가 나와 개별적으로 회합하여 양해가 성립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신민당은 본부가 평양에 있기 때문에 평양과도 연락 중”임을 밝혔다.25) 백남훈은 특히 합당문제를 둘러싼 공산당과 인민당의 내부 혼란이 수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부위원장 정노식(鄭魯湜)을 비롯한 몇몇 중진급 간부들은 적극 추진을 주장했다. 백남운을 지지하는 지구당에서는 중앙위원불신임안을 제출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신민당도 중앙위원회파와 반간부파로 분열되었다.26)
朴憲永이 소련군에 지원 요청
좌익3당의 합당작업이 난항을 거듭하자 박헌영은 8월 20일에 소련군 사령부의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 장군과 로마넨코(Andrei A. Romanenko) 장군에게 세 가지 사항을 시급히 지원해 줄 것을 요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박헌영의 요망사항은 첫째로 북한의 조선신민당 지도부가 남조선신민당에 공산당 반대파와 일체의 관계를 끊고 좌익정당의 합당문제와 관련한 공산당중앙위원회의 노선과 정책을 지지하라는 내용의 지령을 발송해 달라는 것이었다. 둘째로는 북조선공산당 명의로 공산당 반대파의 행동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남은 것들”, 곧 소련군 사령부가 남한의 조선공산당에 보내주는 당 활동자금을 보내주는 것이었다.27) 이 세 번째 요구는 소련군 사령부가 남한의 조선공산당에 정기적으로 활동자금을 보내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입증해 준다.
박헌영의 요구에 대한 소련군 사령부의 조치는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를 통하여 실행되었다. 북노당 창립대회는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사흘 동안 평양에서 개최되었는데, 대회는 마지막 순서로 「남조선에서 삼당이 통일당으로 합동하는 사업진행에 대한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결정서」를 채택했다. 「결정서」는 남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종파적 및 분렬적 행동을 감행한” 강진, 김철수 등 6명을 중앙위원으로부터 제명한 결정은 정당한 것이라고 천명했다. 뿐만 아니라 인민당과 신민당에 대해서도 “진실한 민주주의 역량의 연합을 반대하며 당내의 분렬을 책동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러한 “결정적 대책”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28)
그러나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의 이러한 「결정서」는 박헌영일파의 독단을 강화시킴으로써 좌익3당의 내부분열을 더욱 부채질했다.
2. 좌절된 임시정부擁立國民大會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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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 解放紀念式에서 하지 사령관이 吳世昌 대회장에게 맥아더사령부가 보내온 舊韓國 옥새를 전하고 있다. |
이승만은 8월 14일에 민주의원 의장 명의로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에게 승전 기념일 축전을 쳤다. 이 축전에서 이승만은 “카이로선언에 언급된 ‘적당한 시기’란 바로 지금이므로 이 공약이 즉시 이행되도록 각하에게 절실히 호소한다”고 말했다.31) 같은 날 민족통일총본부도 “지난날의 역사적 전철을 회고하고 각기 자기비판과 반성에 노력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32)
8월 15일에 한미공동 주최로 군정청 광장에서 거행된 8·15 세계평화 및 해방기념식은 질서 정연했다. 단상에는 하지 사령관을 비롯한 미군정부 간부들과 기념행사 회장 오세창(吳世昌)을 비롯하여 이승만과 김구 및 우익정당 간부들이 열석했다. 이승만과 김구와 함께 김규식, 여운형, 허헌 세 사람도 기념사를 할 예정이었으나 세 사람은 참석하지 않았다. 민족전선 주최의 8·15 기념 시민대회는 서울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한미합동 기념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도쿄(東京)의 맥아더사령부로부터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문과 구한국정부의 인장과 옥새 8개, 그 밖의 한일병합관계 서류를 오세창에게 반환하는 의식이었다. 이 물품들은 미군정장관이 보관했다가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돌려주기로 했다.33)
의병장 柳麟錫의 묘소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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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국한 뒤에 처음으로 해방기념일을 맞아 의병장 柳麟錫의 묘소를 찾아 告祝하는 金九. |
“구(九)는 후조〔後調 : 高能善〕 선생의 제자로서 일찍부터 선생을 모앙(慕仰)하야 만사일생(萬死一生) 가운데도 항상 붙들고 나아감이 있었으니, 이는 곧 유시(幼時)부터 박히어진 구세필보〔九世必報 : 자손대대로 반드시 갚아야 함〕의 대의라. 이제 백수잔년(白首殘年)으로 고국에 돌아와 선생의 구앙(舊仰)을 찾으니 감회 어찌 새롭지 아니하오리까. 일현(一炫)의 향(香)으로써 무한한 심사(心事)를 하소하노니 영령은 앞길을 가르치소서.”
이러한 글귀는 이 무렵 김구의 착잡한 심경을 잘 드러낸 것이었다.34)
김구는 그곳에서 점심을 들고 오후에 춘천에서 해방기념 강연을 하고 일박했다. 이튿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가평(加平)에 들렀을 때에도 그곳 독촉국민회 지부 주최로 강연회가 열렸다.35)
8월 19일에 김구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 명의로 각 연합국의 원수와 정당 수령에게 “각하 및 각하의 정부가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에 의하여 공약한 한국의 독립을 즉시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 임시정부 수립을 급속히 원조하도록 연합제국과 진력하심을 경촉함”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36)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는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게 된 것이다.
金九가 사표 제출하기도
같은 날 열린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제2일 회의에서는 위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그것은 일부 위원들이 한독당과 민주의원 및 이승만이 주도하는 민통총본부나 독촉국민회와의 관계를 규명하자는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당지도부와 중간간부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었다. 지도부는 중앙집행위원회가 자신들을 배척하려는 모략이 있다고 지적했다. 마침내 격분한 김구가 사표를 제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37) 이날의 회의와 3일째인 8월 20일의 회의에서 민족패류 규정 등 제출된 의안들을 처리한 다음 4일째인 8월 21일의 회의에서는 중앙집행위원의 자격을 심사한 결과 민영선(閔泳善) 외 12명을 제명했다. 김구 위원장의 사표처리 문제는 안재홍 등 5인위원으로 하여금 김구의 사표를 반려하도록 했다. 김구는 사의를 고집했으나, 안재홍 등의 설득으로 유임하기로 했다. 회의 5일째인 8월 23일에는 전형위원 7명을 선정하여 다음과 같이 간부인선을 마치고 폐회했다.
위원장 김구, 부위원장 조소앙(趙素昻).
중앙상무위원 김구, 조소앙, 엄항섭, 양우조(楊宇朝), 안재홍, 명제세(明濟世), 최익환(崔益煥), 박용희(朴容羲), 방응모(方應謨).38)
이튿날 중앙상무위원으로 김의한(金毅漢), 조헌식(趙憲植), 정형택(鄭亨澤)을 증선했다.39)
합당 이후 처음 열린 회의이기는 했으나,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회 회의가 이처럼 5일이나 계속되고, 또 김구가 사표를 제출해야 할 만큼 격앙되었던 것은 급변하는 국내정세에 대한 대처방안과 관련하여 논란이 격심했을 뿐 아니라 미군정부로부터의 소외와, 특히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김구가 이승만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한 일부 중앙집행위원들의 불만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한독당은 7월 18일에 김구도 참석하여 열린 중앙상무집행위원회에서도 민통총본부와 한독당의 관계를 논의하고, 당원들이 개인자격으로 민통총본부에 참가하는 것은 무방하나 한독당으로서는 참가하지 않는다고 결의했었다.40)
“各道 各郡 各面에 民統總本部 조직하자”
그동안 발언을 자제하면서 활동준비작업만 해 오던 이승만은 운니동의 구왕궁 아악부(舊王宮雅樂部) 자리에 민통총본부 사무실을 마련하고 8월 12일에는 다음과 같이 부서를 결정하여 발표했다.
총무국장 김상덕(金尙德)
선전부장 홍성하(洪性夏)
재무부장 김양수(金良洙)
정경부장 이윤영(李允榮)
노동부장 전진한(錢鎭漢)
부녀부장 박현숙(朴賢淑)
청년부장 김효석(金孝錫)41)
이승만은 이어 8월 19일에 민통총본부에서 오랜만에 기자들을 만났다. 그는 기자들에게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통일된 공론이 그 나라를 운전하는 것이니, 우리도 각 당파가 각각 상이한 기치하에 분열되지 말고 애국정신으로 총 집결하여 통일된 공론을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표현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각도, 각군, 각면에 민통총본부를 조직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경향의 일반동포가 내게서 무슨 발표가 있기를 고대하는 중 혹은 정부를 조직하자, 또는 자율적으로 독립을 전취하자 하여 공론이 자못 비등하나, 아무리 급하더라도 시기를 따라서 계단을 따라 진행하지 못하면 도리어 위험한 경우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이렇게 전제한 이승만은 그의 지론인 민족통일의 필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러므로 … 모든 동포는 독립이 지체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민족통일을 속성하기에 노력하여 각도, 각군, 각면에 총본부 사무소를 조직하여 모든 단체나 개인을 다 화동(和同)해서 다 한덩어리를 만들기로 노력하시오. 사심과 사욕을 버리고 전민족 통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남녀가 참 유공(有功)한 인격자로 인증될 것이다.”
성명서 발표가 끝나자 기자들은 민족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좌우합작을 더욱 촉진할 의사가 없느냐고 물었다. 이승만은 공산당의 내분을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좌익에서 외부세력의 영도하에서 이탈하여 한민족을 위한 무산운동에 노력하기로 결의한 일부가 있다는 말을 전문하였다. 이것이 사실인지 그 여부는 모르겠다. 과연 사실이라면, 실천적인 인물만 나선다면 지금이라도 나 자신이 솔선해서 심방하여 협력하겠다.”
그러고는 민주의원 결성 당시에도 좌익을 대표하여 여운형을 위시한 몇몇 인사가 협력 의사를 표시하고도 실천하지 아니하여 통일의 완성을 기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42)
李始榮 사퇴하자 申翼熙 등도 총사퇴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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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獨促國民會 위원장 李始榮. |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정치이념에도 불구하고 각 지도자들의 파지(把持)하고 있는 그 구구한 정견과 방략의 사곡〔邪曲 : 요사스럽고 바르지 못함〕 고집을 볼 때에 끝없는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아울러 합류불능(合流不能)을 통감하는 바이다. … 특히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중앙간부를 말하면 … 악탁(惡濁)사회에서 생장한 우리로서 누구나 장공속죄〔將功贖罪 : 죄지은 사람이 공을 세워 속죄함〕할 대결심을 다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끔 그들의 동작이 법규나 조리에 맞지 못하는 표현이 있을 때에는 물의가 선등〔喧謄 : 시끄럽게 떠들음〕하여 나로 하여금 극도의 불안을 느끼게 할 뿐이요 광정〔匡正 : 바로 잡아 고침〕할 도리가 없으므로 …”43)
구한국의 평안남도 관찰사, 한성재판소장 등을 역임하고 한일병합 뒤에는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여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한 이시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작업에 참여하여 귀국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지킨 지조있는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지적한 독촉국민회 내부의 위험한 ‘중앙간부’란 부위원장 신익희(申翼熙)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시영이 사퇴성명서를 발표한 것도 신익희의 오만한 행동 때문이었다. 여운형 피습사건이 발생하자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독촉국민회를 테러집단이라고 규정하면서 해산을 요구한데 대해 신익희가 이시영의 허락도 없이 위원장 이시영의 명의로 민족전선의 의장단인 장건상, 김원봉과 사무국장 이강국(李康國)을 경기도 검찰부에 고발한 것이었다.44)
“申翼熙 자신이 大統領 되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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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獨促國民會 부위원장 申翼熙. |
“신익희를 수령으로 김구 선생을 지지한다 하나 사실은 표면(으로만) 김구 선생을 옹호한다 하며, 일편 이 박사 타도를 음모하고 자파세력을 부식하여 신익희 자신(이) 대통령이 될 야심을 갖고 있다. 신익희의 야심을 김구 선생이 간파하고 재삼 해산을 권고하였으나 신(申)은 이 권고에 불응하고 재벌가 이종회(李鍾會)의 물질적 후원으로 야망 달성에 전력 중이며, 정치공작대원을 백의사(白衣社), 독촉국민회 각 단체에 광범위로 잠입시켜 세력 부식에 활약 중인 바 거듭 신익희의 동작은 특히 경계 주의를 요함.”46)
이러한 비밀 보고를 받고 있던 이승만은 이시영이 사퇴를 성명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8월 23일에 독촉국민회 앞으로 편지를 보내어 간부 일동의 인책 사임을 권고했고, 이튿날에는 직접 독촉국민회에 나가서 사임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신익희 부위원장을 포함한 간부 35명은 긴급상무집행위원회를 열고 간부 일동이 사임하기로 결의했다.47)
이승만은 이어 8월 24일에 민통총본부에서 김구와 만나 독촉국민회 문제를 협의하고,48) 9월 7일과 8일 이틀 동안 서울에서 독촉국민회 지방지부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했다.49)
國恥紀念大會를 임시정부 옹립 국민대회로
이 무렵 신익희는 비밀리에 환국정부(還國政府)옹립 국민총본부를 구성하고 8월 29일에 서울 공설운동장에서 열릴 국치(國恥)기념일 행사를 대한민국임시정부 옹립을 선언하는 국민대회로 진행할 계획을 추진했다. 국민대회 이름으로 미군정부의 청사를 접수하고 ‘독립정부’를 선언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첩보대(CIC)의 보고에 따르면, 원래 이 계획은 8월 15일로 예정되었던 것인데, 이승만과 김구가 거부하여 실행되지 못하고 8월 29일로 연기되었다고 했다. 자금도 신익희가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CIC는 8월 16일에 공산당 간부이자 민족전선 간부인 김광수(金光洙)한테서 이 계획을 제보받았다. 이어 8월 21일에는 한국민주당의 장덕수(張德秀)가 CIC 본부에 사실을 알렸다. 8월 22일에는 이승만 자신이 CIC 직원을 만났다. 그는 신익희의 임시정부 결성 계획에 대한 소문을 들었으나 신익희로부터 직접 듣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신익희에게 자신은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의 계획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했다. 같은 날 이승만의 비서장인 윤치영(尹致暎)도 CIC 직원에게 신익희의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시영이 사퇴성명서를 발표한 것도 사실은 신익희의 이러한 일종의 쿠데타 음모를 알았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보고를 받은 하지 장군은 “이 박사는 신익희의 그러한 식의 행동을 밟아 누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 우익청년단체들을 붙들어 놓겠다고도 했다”면서 통열하게 비판했다.50)
“임시정부 각료명단은 李承晩만 알아”
문제는 이승만이 이 계획에 얼마나 관여하고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승만은 8월 26일에 기자단과 만나 국치일 기념행사와 관련하여 “과도한 흥분으로 불상사가 발생할 우려가 불무하니, 온건한 사상과 질서 있는 행동으로 문화민족의 영예를 지키며 국제적 환시리에 감탄하리만큼 각자 애국정신의 진정한 발로가 있기 바란다”는 담화를 발표했다.51) 행사 이틀 전인 8월 27일에 CIC 직원들이 신익희를 만나 합동심문을 벌였다. 신익희는 이승만과 김구도 모든 계획을 알고 있으며, 반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CIC 직원들이 임시정부 요원들의 명단이 있느냐고 묻자 신익희는 자기는 모르며, 아는 사람은 이승만뿐이고, 명단도 그가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52)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이때의 임시정부 옹립 국민대회계획에 관한 일체의 문건이 이화장(梨花莊)의 이승만문서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원고지에 필사된 한국정부옹립 국민총본부 위원일동 명의의 「선언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추대의 이유」, 「추대 후 임시정부의 임무」 및 한국정부옹립 국민총본부의 조직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추대식 계획서 등의 문서와 활자로 인쇄된 ‘대한민국 국민대회’ 명의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정식추대선언문」과 「결의문」, 전단 「대한민국임시정부 각료」, 「대한민국 국무의원」 등의 문건들이 그것이다.
이 문건들의 주장은 요컨대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할 필요 없이 기존의 임시정부가 귀국 전에 선포한 9개항의 「당면정책」에 따라 과도정권을 수립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국민총본부 위원일동’ 명의로 된 「선언서」는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우리에게는 1919년 3·1독립운동에서 나온 정부가 있다. 이 정부는 30년에 뻗친 우리 독립투쟁의 계속이며 우리 독립정신의 상징이다. 이승만, 김구 양씨 등 당시의 인물들이 지금까지 생존하야 해방조국에 환국한 일,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 이제 우리 민족은 약속한 일도 없이 그들을 국부(國父)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제 새삼스럽게 신정부를 수립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이에 우리 3천만은 일어나서 총의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추대한다. 그리고 우리 3천만은 이 정부에 충성과 복종을 바친다. 이 정부와 그 국민이 있는지라, 이에 우리는 독립국가이다. …”
그러면서도 각료들과 국무위원의 명단에는, 중경임시정부의 구성을 뼈대로 하기는 했으나, 남북한에 걸친 국내의 여러 인사들을 새로 포함시키고 있어서 흥미롭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김구, 국무총리 김규식을 비롯한 20명의 각료 명단에는 좌익인사로 여운형(우정부 장관), 허헌(공무부 장관), 김두봉(광무부 장관) 세 사람을 포함시켰고, 33명의 국무위원 가운데 좌익인사는 김일성, 박헌영, 김원봉, 장건상 4명이 들어 있다.53)
신익희는 바로 CIC 본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여러 곳의 그의 거처와 민통본부의 그의 사무실이 수색당했을 뿐만 아니라 서류가방까지 압수되었다.
‘是日也放聲大哭’ 풀이하기도
애국단체연합회 주최로 거행된 8월 29일의 국치기념일 행사는 1만명 가량의 주로 우파 정당 관계자들이 모여 큰 소란 없이 거행되었다. 어떤 사람이 임시정부 옹립 계획을 소개하려 하자 바로 경찰에 제지되었다. 그러나 대회장에는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과 국무위원 명단이 인쇄된 전단 등이 뿌려지기도 했다.54)
이날의 이승만의 축사는 미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방성대곡(放聲大哭)’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참뜻은 왜놈이 국권을 빼앗고 또한 매국노가 나라를 팔아먹은 것, 그것보다도 2천만 동포가 그때에 가만히 있었다는 것을 탄함이라는 것으로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 사람 새 백성이 되었다. … 남북으로부터 시급히 정부를 세워 달라는 요구의 혈서가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현 단계에 시급히 정부를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오늘과 같이 우리 민족이 분열되어서는 정부를 세웠다 하더라도 그 정부는 파괴될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세포조직을 굳게 하여 그 토대 위에 정부를 세워야 한다. 오늘 국치일을 당하여 우리가 정부를 설립하려면 사색당파의 정신을 버리고 오늘이라도 정당과 사회단체는 곧 해체하고 먼저 뭉치자. 그리하여 우리와 목적이 같은 연합국과 벗이 되어 합력하자. 내가 이제껏 많은 모둠을 하였지만 성과를 못 이룬 것은 연합국에 앉은 사람이 우리가 해놓은 것을 인정 못한다는 것이지 그 일이 해롭다는 것은 아니다. 독단정부나 임시정부를 설립하지 않은 이유는 국민들이 조직적이 되어야 하는 때문이다. …”55)
이승만은 다음날 민통총본부 선전부로 하여금 전날의 기념식장에서 임시정부 각료 명단이 실린 전단이 뿌려진 것에 대해 “일종의 모략 장난에 불과한 것”으로서 민통총본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담화를 발표하게 했다.56)
김구는 이날 서울운동장의 국치기념일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기념식장의 해프닝이 화제가 되자 김구도 “지난 8·29 국치일에 내력 불명의 소위 대한민국 국민대회가 임시정부라는 것을 멋대로 조직 발표하여 세인의 이목을 현란케 한 것은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 본의가 자주정부가 하루빨리 출현하기를 갈망하는데 있다 할지라도 그 수단 방법이 정상적으로 되지 못한 이상 그 결과는 일종의 아희(兒戱)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57)
좌익정파들은 민족전선 주최로 종로 YMCA 회관에서 600여명이 모여 따로 국치기념식을 가졌다.58)
3. 朴憲永에게 체포령 내려
3당 통합문제로 좌익정당들이 분규에 빠지자 좌우합작 작업도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8월 하순에 이르러 미군정부와 우익정파들은 좌우합작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8월 19일에 요양 중인 김규식을 중심으로 우익쪽 합작위원들이 화합한데 이어 이튿날에는 민주의원에서 합작문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는 버치(Leonard M. Berstch) 중위도 참석했다. 그리하여 8월 21일 저녁에는 삼청동의 김규식 집에서 우익대표 전원이 모여 토의한 다음 우익대표단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희구하는 좌우합작은 정치적 야합이 아니고 역사적 현단계에 의한 행동통일을 하여 현하의 국제적 관련성에서 실천가능한 타당성을 따르자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금후로도 우리의 임무를 포기하려고는 아니한다. 다만 어떤 일방의 지령이나 사주를 받아 국가독립을 불원하는 반민족, 비애국적 분자를 제외하고 진정한 좌측 지도자와는 본래의 우리의 종지(宗旨)와 기도대로 적극적으로 제휴할 용의를 가졌으며 이렇게 됨으로써 시국의 타개를 희도(希圖)하고 있다.”59)
이러한 성명은 “어떤 일방의 지령이나 사주”에 따라 행동하는 공산당을 제외할 것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하지 사령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8월 24일에 좌우합작 양쪽 대표인 김규식과 여운형에게 격려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는 “나는 좌우를 물론하고 진실로 애국적 지도자라면 소수의 비애국적 불찬성자를 무시하고 국민의 그 위대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 서로 손을 잡고 이 목적을 완성키 위하여 매진하리라고 확신한다”라고 하여 공산당을 배제할 것을 공언했다.60)
그리고 이날 미군정청은 법령 제118호로 전문12조로 된 「조선과도 입법의원의 창설에 대한 법령」을 공포했다. 기존의 민주의원은 법률에 근거한 기관이 아니었으나, 새로 창설될 입법의원은 “임시조선민주정부의 수립을 기하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개혁의 기초로 사용될 법령 초안을 작성하여 군정 장관에게 제출하는” 직무를 행사하는(제2조) 군정청의 한 기관으로 설치되는 것이었다.
한편 박헌영이 북한의 소련군사령부로 보낸 것으로 보이는 한 남한정세보고서는 이 무렵의 여운형의 복잡한 정치 행태를 짐작하게 한다.
8월 26일 아침에 여운형은 같은 민족전선 의장단의 한 사람인 김원봉(金元鳳)에게 사람을 보내어 김규식의 병세가 몹시 악화되었으므로 한번 문병해 주기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여운형의 요청에 따라 김원봉이 김규식의 집을 방문하자 그곳에는 이미 여운형과 버치가 와 있었고 김규식의 병세는 전혀 악화되어 있지 않았다.61) 8월 28일에는 신민당의 백남운과 인민당의 장건상도 김규식을 집으로 찾아가서 요담을 나누었다.62)
社會主義 71%, 資本主義 14%, 共産主義 7%
입법의원 설립을 앞두고 7월에 미군정부는 여론조사 실시 이래 가장 큰 규모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지 1만장을 무작위로 배포하여 8,476명의 대답을 받은 것인데, 30개의 문항 가운데에는 당시의 국민들의 사회의식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내용들이 있다.
(2) 어떤 정부형태를 바라는가?
1. 1인 독재 219(3%)
2. 과두제 323(4%)
3. 계급지배 237(3%)
4. 대의정치 7,221(85%)
5. 모르겠다 453(5%)
(3) 어느 것을 선호하는가?
1. 자본주의 1,189(14%)
2. 사회주의 6,037(71%)
3. 공산주의 574(7%)
4. 모르겠다 653(8%)
(16) 한국정부 수립 후 전 일본인소유 토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1. 정부소유 3,062(36%)
2. 소작농에 매도 2,592(31%)
3. 소작농에 나누어 줌 2,516(30%)
4. 모르겠다 283(3%)
(17) 한국정부 수립 후 조선인 대지주 토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1. 현소유자의 소유로 인정 960(11%)
2. 지주의 소유토지면적을 제한하고, 나머지 토지는 적당한 가격으로 정부에 매도 4,130(47%)
3. 지주의 소유토지면적을 제한하고 나머지 토지는 정부가 몰수 2,935(35%)
4. 모르겠다 428(5%)
(18) 남조선에 입법기관설립을 희망하는가?
1. 예 3,798(45%)
2. 아니오 3,440(41%)
3. 모르겠다 1,225(14%)
(21) 남조선의 임시대통령 선거는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가?
1. 입법기관이 선출 763(8%)
2. 인민이 직접 선거 5,805(69%)
3. 군정부가 임명 393(5%)
4. 모르겠다 345(4%)
(27) 당신은 자신이 어느쪽이라고 생각하는가?
1. 우익 2,525(30%)
2. 좌익 1,374(16%)
3. 중립 4,554(54%)
(28) 다음의 어느 것을 지지하는가?
1. 민주의원 2,019(24%)
2. (김구의)임시정부 1,144(14%)
3.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1,478(17%)
4.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174(2%)
5. 조선민족통일총본부 861(10%)
6. 어느 것도 지지하지 않음 2,777(33%)63)
그런데 이 여론조사 결과를 이승만의 R.I.B.K.가 재빨리 입수하여 신문보도보다 먼저 이승만에게 보고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64)
이 여론조사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선호하는 사회체제로 응답자의 71%가 사회주의를 들고 있는 점이다. 자본주의를 선호한 응답자는 14%밖에 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일반국민들, 특히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는 대표적인 지식인 정치가였던 안재홍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1789년의 프랑스의 인권혁명, 또 그 산물인 민주주의(미국에 의하여 남조선에 부식되고 있음)는 이미 금권정치화하여 인류는 그 자본적 민주주의(의) 수정 재출발을 요하는 터이요, 1917년의 러시아의 공산혁명도 경제평등의 원칙에서는 프랑스혁명 원칙의 미비한 점의 대수정을 요구하는 것이 명확함을 승인하겠으나, 조선의 국정(國情)과 역사전통과 민족의 본능적인 감정 및 의식(이것은 결코 경시 무시함을 허치 않음)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임을 허치 않는 것이며, 우리는 균등사회, 공영국가를 목표로 삼는 신민주주의를 내용으로 하고 토대로 하는 … 만민공생의 신민족주의의 신국가를 재건할 경륜 및 포부에서 …”65)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은 이승만의 그것과 확실히 동이 뜬 것이었다.
하지가 정면으로 共産黨 공격해
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이후로 미군정부에 대한 공산당의 모략선전과 파괴활동이 격렬해지자 하지 사령관은 8월 31일에 “조선민중에게 보내는 말씀”이라는 긴 성명을 통하여 공산당을 신랄하게 매도했다.
“나는 최근에 조선에 있는 어떤 정당이 구두로나 신문, 팸플릿, 벽보 등을 통하여 연속으로 쏟아내는 악질의 선전을 흥미있게 보고 있다. 특히 그들의 선전 ‘노선’의 표적은 미합중국과 남조선주둔 미군대표자와 미국인 지도하에 운영되고 있는 미군정부이다. … 전력을 다하여 한국재건을 원조하는 미국의 전 노력을 불신임하게 하자는 목적이 분명히 있다.”
이렇게 전제한 하지는 공산당이 미국이 조선인에게 허여한 언론, 출판 등의 자유를 역이용하여 조선을 원조하는 미국의 노력을 부당하게 공격하고 미국의 노력에 협조하는 조선 애국자들에 대해 허위의 사실을 선전하고 있다고 규탄하고, 그러한 사실은 「미태평양사령부 포고령 제2호」에 규정된 범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포고령 제2호」는 미군정부의 법령을 위반한 자는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하지는 최근의 몇 가지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면서 하나하나 반박했다. 그것은 미국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 한다는 주장, 입법기관은 군정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 어려운 식량사정에 대한 여러 가지 모략과 선동, 경찰에 대한 허위선전 등이었다.66)
“共産黨안의 ‘愛國志士’들과는 합동할 필요 있어”
공산당내 대회파들은 8월말에 조선공산당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경남도인민위원회위원장이며 민족전선중앙위원인 윤일(尹一)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리하여 9월 2일에는 준비위원회 대표 2명을 인민당과 신민당의 합당 반대파에 파견하여 정식으로 합당교섭을 하게 했다.67)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이 발표한 다음과 같은 담화는 눈여겨볼 만하다.
“정부수립이 지연되는 중 민심이 초조하여 의혹이 생기기에 이른 고로 불평분자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을 전취하자는 언론으로 선동의 파당을 소취〔嘯聚 : 불러 모음〕하는 파동이 있으니 심히 위험한 일이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이승만은 정부수립이 늦어지는 것은 한국인이 통일이 되지 못했다는 구실로 연합국이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통일을 완성하여 “남이 핑계할 말이 없게 만들어서” 우방의 협조를 얻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도모하는 것이 유일한 방책이라고 강조했다. 그러고는 공산당내의 ‘애국지사’들인 대회파들과는 협조할 필요가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파 중에 애국정신을 가진 인도자들이 반역분자들의 내막을 각오하고 통일을 파괴하는 자들과 대립하여 분투하는 중이니, 우리는 이 애국지사들과 합동하여 민족통일을 촉성하면 외국을 의지하는 매국노 외에는 다 악수 병진하여 목적을 달성할 것이니, 선동자를 극히 주목할 것이다.”68)
이승만의 이러한 발언은 대회파의 장로 김철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때에 공산당 대표로 참석하여 성실성을 보였던 김철수에 대하여 이승만은 “매우 침착하고 진실하게 보이는 분으로 타협성이 많아 보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공산당의 내분은 격화되고 있었다. 북조선노동당 결성대회의 「결정서」에 고무된 박헌영은 9월 4일 저녁에 신민당 회의실에서 3당합동 준비위원연석회의를 개최하고 합당 작업을 일방적으로 강행했다. 참석자들은 공산당 내의 박헌영파와 인민당과 신민당 내의 공산당 프락치 등 합당 지지자들이었다. 연석회의는 3당이 남조선노동당으로 합당한다는 「결정서」를 가결하고 기초위원이 제출한 「선언」과 「강령」 초안도 토의하여 결정했다. 그리고 3당의 합동준비위원들로 남조선노동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위원장으로는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은 여운형을 추대했다.69)
이때부터 공산당에 대한 미군정부의 강경 조치가 시작되었다. 9월 4일에는《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 《현대일보(現代日報)》, 《중앙신문(中央新聞)》 세 신문이 정간되었다.70) 이어 9월 7일에는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등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71) 중앙위원회 서기국장 이주하와 민족전선 부의장 홍남표(洪南杓)는 9월 8일에 검거되었다.72) 검거선풍이 시작된 것은 공산당의 투쟁이 폭력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박헌영의 이른바 ‘정당방위의 역공세’라는 ‘신전술’에 따른 것이었다.
獨促國民會 지도부에서 신익희 빠져
독촉국민회의 제3회 전국대표대회는 예정대로 9월 7일과 8일 이틀 동안 정동(貞洞)예배당에서 전국 면단위까지의 대표자들과 중앙위원 등 1,400여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대회소집의 주목적은 이시영의 사임을 계기로 총사직을 결의한 중앙위원 대책을 비롯한 인사개편 문제였다. 임원총사직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그 개선은 총재 이승만에게 일임했다. 대회 첫날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그동안 좌우합작으로 통일을 해 보자고 애쓰던 것도 다 헛일이 되고, 지금 와서는 이런 분자와는 합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도 조선문제에 대하여서는 소련과 합작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우리의 나갈 일은 오직 한덩어리가 되는 데 있다. 통일되면 정부가 곧 수립될 수 있는 것이니, 조선 애국공산당과는 합할 수 있다. 지령을 받아가지고 독립을 방해하는 분자는 자멸케 되었다. …”73)
이승만은 이 성명에서도 이처럼 “애국공산당”과 “지령을 받아가지고 독립을 방해하는 분자”들을 구별해서 말했다.
이튿날 대회에서 인사말을 한 김구는 이시영 위원장의 후임으로 김규식을 추천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건강과 좌우합작 작업을 이유로 사양했다. 그리하여 중경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이던 조성환(曺成煥)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부위원장에는 국학자 정인보(鄭寅普), 총무부장에서 방응모(方應謨)가 선정되었다. 대회 의장인 신익희와 배은희(裵恩希)는 22명의 중앙상무집행위원에도 포함되지 않았다.74)
敦化門 앞에서 권총 저격 받아
9월 12일에는 대한건국청년회, 역도청년회 등 크고 작은 21개 우익 청년단체가 통합하여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하는 결단식이 오전 10시부터 종로 YMCA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이승만, 김구, 이범석(李範奭)을 비롯하여 하지 사령관과 러치 장관의 대리인,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 등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 결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에 권총 저격을 당했다. 돈암장을 떠나 창덕궁(昌德宮) 뒤를 거쳐 돈화문(敦化門) 앞 네거리를 지날 쯤에 잠복했던 괴한이 이승만의 승용차 뒷유리창에 네발을 쏘았다. 네발 모두 유리창 언저리에 맞았으나 차체를 뚫지는 못했고 같이 탔던 사람들도 모두 무사했다.75) 범인은 10월 1일에 체포되었는데, 평안남도에서 온 김광명(金光明)이라는 스물두 살의 공산당원이었다.76)
김구에 이어 축사에 나선 이승만은 피격 사실을 그 특유의 우스개로 소개하여 청중을 웃기는 여유를 보였다.
“지금 내가 이곳으로 오는 길에 어디서 땅땅 하는 소리가 나기에 길에서 노는 아이들이 딱총을 놓는 줄 알았더니 그것이 나를 향하여 권총을 쏜 모양이다. 그런데 생각하면 네발씩이나 총알을 발사했으면 나를 맞혀야 할 터인데 맞히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총을 쏜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인 줄 믿는다.”
내빈들의 축사가 끝나자 대회는 긴급동의로 이승만을 총재로, 김구를 부총재로 추대할 것을 결의했다. 단장으로는 유명한 역도선수였던 역도청년회 회장 서상천(徐相天)이 선출되었다.77)⊙
1) 《東亞日報》1946년 7월31일자, <右翼側의 八大原則, 지난 卄九日正式으로 手交>. 2) 《朝鮮人民報》1946년 8월1일자, <右翼의 合作八原則은 反動性告白에 不過>. 3) Langdon to Byrnes, May 14, 194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6, vol. Ⅷ,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1, p.678. 4)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출판사, 2010, pp.137~139.
5) 심지연,《朝鮮新民黨硏究》, 동녘, 1988, pp.76~82. 6) 김학준,《북한의 역사(제2권) 1946년 1월~1948년 9월》,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pp.407~411. 7) 김학준, 위의 책, pp.411~419. 8) 《서울신문》1946년 7월31일자, <北朝鮮勞農黨(?)으로> ;《東亞日報》1946년 8월2일자, <新民·共産兩黨, 北朝鮮에서 合黨> ;《獨立新報》1946년 7월31일자, <北朝鮮共産黨과 新民黨이 合同!> ;《朝鮮人民報》1946년 8월1일자, <北朝鮮勞動黨新發足>. 9) 《朝鮮人民報》1946년 8월1일자, <新民黨主席金枓奉氏報告>. 10)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p.151~155. 11) 위의 책, pp.156~158. 12) 같은 책, pp.161~162.
13) 김오성, <인민당의 합당 활동에 대한 보고서>,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소련군정문서, 남조선정세보고서 1946~1947》, 국사편찬위원회, 2003, pp.136~137. 14) 《朝鮮日報》1946년 8월6일자, <人民黨의 合黨提議, 共産黨서 受諾回答> 및 1946년 8월8일자, <左派合黨을 新民黨受諾>. 15) 《東亞日報》1946년 8월7일자, <朝共合黨으로 分裂> ;《朝鮮日報》1946년 8월8일자, <朝共黨中央委員會, 合黨意見不一致>. 16) 임경석,《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 pp.357~360 ;《東亞日報》1946년 8월9일자, <反幹部行動에 除名과 無期停權>. 17) 《朝鮮日報》1946년 8월13일자, <一派專橫克服淸算과 黨大會召集提唱>. 18) 《東亞日報》1946년 8월28일자, <過誤를 淸算, 再出發決議>. 19) 《朝鮮日報》1946년 8월7일자, <左翼合黨은 歡迎>. 20) 《東亞日報》1946년 8월10일자, <左翼의 無誠意暴露>.
21) 김오성, 앞의 글,《소련군정문서, 남조선정세보고서》, pp.140~141. 22) 《東亞日報》1946년 8월17일자, <呂黨首의 辭任說 뒤이어 張建相氏도 脫黨?>. 23) 찌혼 이바노비치(박헌영), <합당문제에 대하여>(1946.8.19),《소련군정문서, 남조선정세보고서》, pp.132~ 133. 24) 김오성, 앞의 글,《소련군정문서, 남조선정세보고서》, p.139 ;《朝鮮日報》1946년 8월18일자, <人民黨도 遂分裂>. 25) 《朝鮮人民報》1946년 8월18일자, <友黨統一靜觀中> ;《서울신문》1946년 8월18일자, <新民黨白委員長談>. 26) 김남식,《南勞黨硏究》, 돌베개, 1984, p.254. 27) 박헌영, <친애하는 동지들에게(L장군과 R장군에게).>(1946.8.20),《소련군정문서, 남조선정세보고서》, pp.143~144.
28) <조선로동당 창립대회 회의록>,《朝鮮勞動黨大會資料集(第Ⅰ輯)》, 國土統一院, 1980, pp.79~80. 29)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p. 45. 30) 《朝鮮日報》1946년 8월14일자, <韓國獨立黨中央執行委員會>. 31) 《朝鮮日報》1946년 8월18일자, <李博士, 美大統領에게 電請>. 32) 《朝鮮日報》1946년 8월15일자, <碎身의 精神으로 最大의 努力緊要>. 33) 《東亞日報》1946년 8월16일자, <沈痛속에 마지한 八·一五記念日> ;《朝鮮日報》1946년 8월17일자, <軍政廳廣場慶祝式典莊重>.
34) 白凡紀念館 소장, <柳麟錫祭文> ;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8, pp.202~203. 35) 《自由新聞》1946년 8월21일자, <金九總理講演, 加平서 盛況> ;《大東新聞》1946년 8월31일자, <金九先生講演盛況>. 36) 《朝鮮日報》1946년 8월27일자, <臨時政府를 急速援助>. 37) 《서울신문》1946년 8월24일자, <金九氏辭任? 韓獨中委紛糾>. 38) 《朝鮮日報》1946년 8월25일자, <韓國獨立黨中執委員會>. 39) 《서울신문》1946년 8월25일자, <韓獨 「中委」委員을 改增選>. 40) 《서울신문》1946년 7월21일자, <「民統」加入은 個人資格>. 41) 《朝鮮日報》1946년 8월13일자, <民族統一本部, 各部署決定發表>.
42) 《東亞日報》1946년 8월20일자, <統一돼야 政府선다> ;《서울신문》1946년 8월20일자, <獨立遲滯됨을 걱정말라>. 43) 《朝鮮日報》1946년 8월18일자, <李始榮氏全公職辭退> ;《서울신문》1948년 8월18일자, <同志의 反省促求>. 44) G-2 Weely Summary No.50(1946.8,18,- 8.25) 45) 金惠水, <1946년 이승만의 사설정보조사기관 설치와 단독정부수립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제5집, 한울, 1996 참조.
46)
53)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十四) 建國期文書 2 》, pp.465~512. 54) 《駐韓美軍史(2) FUSAFIK 2》, p.229. 55) 《東亞日報》1946년 8월30일자, <含淚憤激의 國恥記念式盛大> ;《서울신문》1946년 8월30일자, <行政機構移讓을 高調>. 56) 《大東新聞》1946년 9월1일자, <虛僞造閣 삐라에 對하여, 民統서 一般에 注意>. 57) 《서울신문》1946년 9월3일자, <所謂「組閣」發表에 對해 金九氏談>. 58) 《朝鮮日報》1946년 8월30일자, <六百餘名一堂에>. 59) 《朝鮮日報》1946년 8월23일자, <眞正한 左側指導者면 積極提携를 要望>. 60) 《朝鮮日報》1946년 8월28일자, <左右合作에 하지中將書翰>.
61) <합당문제에 대하여, 1946년 8월27일>,《소련군정문서, 남조선정세보고서》, p.149. 62) 《서울신문》1946년 8월29일자, <左右合作은 別無進前>. 63) 《東亞日報》1946년 8월13일자, <軍政廳輿論調査(一)> ; 申福龍 編,《韓國分斷史資料集Ⅵ》,原主文化社, 1993, pp.7~41. 64)
66) 《朝鮮日報》1946년 9월1일자, <하지中將으로부터 朝鮮民衆에게 보내는 말씀>. 67) 《獨立新報》1946년 9월4일자, <合黨促進運動을 展開>. 68) 《朝鮮日報》1946년 9월4일자, <左翼愛國者에 期待>. 69) 《朝鮮日報》1946년 9월6일자, <左翼三黨合同을 決定> ;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174. 70) 《朝鮮日報》1946년 9월7일자, <三新聞停刊>. 71) 《東亞日報》1946년 9월8일자, <朴憲永, 李康國 等의 朝共幹部에 逮捕令>. 72) 《東亞日報》1946년 9월10일자, <極左系列에 檢擧의 旋風!>.
73) 《朝鮮日報》1946년 9월8일자, <愛國鬪士大會同>. 74) 《朝鮮日報》1946년 9월10일자, <中央黨務執行委員도 總改選> ;《東亞日報》1946년 9월19일자, <大韓獨促國民會部署決定>. 75) 《朝鮮日報》1946년 9월13일자, <李承晩博士被襲>. 76) 《東亞日報》1946년 10월4일자, <李承晩博士狙擊犯被逮>. 77) 《東亞日報》1946년 9월13일자, <卄八靑年團體 한 데 뭉쳐 大韓獨立靑年團結成.> ; 鮮于基聖, 《韓國靑年運動史》, 錦文社, 1973, pp.688~6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