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군은 신사가 돼야 한다”며 선비 士에 착안, 1945년 11월 11일 11시 해방병단 결성
⊙ 의학 대신 항해학 택한 손원일, “나라를 되찾는 날엔 우리도 바다로 뻗어나가야”
⊙ 남편은 월급 갹출, 부인은 바자회 등 열어 백두산함 구입
⊙ 손원일, 국방부 장관 되자 이미 고위직에 있던 처남 내보내
⊙ 이승만이 大將 시켜준다고 하자 “개인에겐 더없는 영광… 국가적으론 도움 안 돼”
⊙ 국가보훈부, 손원일 독립운동했음에도 동화양행 문제 삼으며 독립유공자 불인정
⊙ 손원일, 여운형의 건준과 함께했지만 그 실체 깨닫고 결별
⊙ 6·25 전쟁 발발 하루 앞두고 진해로 복귀한 백두산함, 北 수송선 격침해 부산 지켜
⊙ 윤두호-윤영하, 이인호-이제욱, 조천형-조시은 등 代를 이어 바다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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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두호-윤영하, 이인호-이제욱, 조천형-조시은 등 代를 이어 바다 지켜
동상을 배경으로 두고 판옥선 형태로 만든 특설 무대는 충무공이 해전을 지휘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우뚝 솟은 두 돛대에는 옅은 감청색으로 ‘8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해군 창군 원로, 해군·해병대 장병, 예비역, 예비 해군 등 약 300명이 모여 “우리 바다를 우리가 지켜왔다”며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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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 11일 서울 광화문 이순신동상 앞에서 80주년 해군 창설 기념식이 열렸다. 사진=조선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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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길 해군참모총장이 지난 11월 11일 서울 광화문 이순신동상 앞에서 열린 80주년 해군 창설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1945년 11월 11일 11시, 해방병단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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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1월 11일 11시 서울 종로구 구 표원전에서 해방병단 창설식이 열렸다. |
왜 11월 11일일까.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孫元一·1909~1980년) 제독은 ‘해군은 신사(紳士) 중의 신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비 사(士)자를 파자(破字)하면 십일(十一)이 되기에 1945년 11월 11일로 날을 정했다. 창설식도 오전 11시에 열렸다. 손원일은 이곳에서 이렇게 다짐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
수향(水鄕) 손원일의 부친은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던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1882~1931년)다. 손정도는 유림(儒林)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선교사를 만나 1910년 목사가 됐다. 일제는 손정도에게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가쓰라 수상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손정도는 1년 뒤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가족도 핍박을 받았다. 일제는 손정도에게 ‘거주 제한 1년’이라는 처분을 내렸고, 그는 전남 진도로 1년 동안 유배를 가야 했다. 1914년 10월 경성(현 서울)으로 돌아온 손정도는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1915년 4월 덕수궁 뒤편에 있는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6대)가 됐다. 이때 교회에 출석했던 학생이 이화여고 재학생 유관순이다.
임정 의정원 초대 의장 손정도
손정도는 자신 때문에 교회에 피해가 올까 1918년 6월 담임목사직을 사직했다. 이후 평양을 거쳐 1919년 상하이로 이동했다. 손정도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입법 기구) 초대 의장을 맡았는데, 지금으로 치면 국회의장이었다.
1921년 상하이를 떠나 본업인 목사로 되돌아간 그는 지린(吉林)으로 거처를 옮겨 만주 동포들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땅을 매입해 농업공사(公司)를 설립했다. 하지만 일제의 핍박과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을 맞지 못한 채 1931년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손원일은 주로 모친과 함께 지냈다. 독립운동하느라 바빴던 부친과는 4년가량(경성 4년, 평양 한 달) 함께한 게 전부다. 이럼에도 아버지에게 영향받아 민족주의 성향이 있었다. 1921년에는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동했다. 1925년 이곳에서 길림유자회(吉林幼者會), 여길학우회(旅吉學友會) 활동을 했는데, 이로 인해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두 단체는 지역 청소년에게 조선 독립에 대한 선전 운동과 집회 활동을 하던 단체였다. 일본이 작성한 비밀 보고서를 보면 손원일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분류, 감시했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손원일이 1934년 잠시 국내에 들어왔을 때, 경찰에 연행된 뒤 독립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2개월 동안 고문을 당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집안에선 손원일이 의과대학에 진학하길 원했다. 손정도는 아들에게 베이징 유학을 이야기했고 이에 자극받은 손원일은 무리하며 공부하는 바람에 눈병을 앓게 됐다. 이 후유증으로 평생 도수 높은 안경을 끼게 됐다. 그의 나이 17세 때인데 이 때문에 베이징 유학은 없던 일이 됐다.
손원일은 베이징 대신 1926년 가을 상하이로 갔다. 하루는 입학할 대학을 알아보다가 한 의과대학의 수술 실습 장면을 보게 됐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수술복이 피투성이가 된 의사를 본 손원일은 의학이 자신과 맞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
중국 제일 항구인 상하이항에는 수많은 상선과 군함이 드나들었다. 이를 본 손원일은 이렇게 생각했다.
“바다에 미래가 있다. 지금은 비록 나라를 잃었지만 언젠가 나라를 되찾는 날엔 우리도 바다로 뻗어나가야 한다.”
중국 해군 항해사 모집에 선발돼
손원일은 해군이 되는 법을 수소문했지만, 당시 중국 해군은 푸젠성(福建省)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대안으로 항해술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찾다가 상하이에 있는 난징(南京) 중앙대학 항해과에 진학했다. 본교는 난징에 있었지만 항해과는 상하이에 있었다. 원일은 제3기 항해과 신입생 모집에 합격했다. 3년간 교육을 받은 후 1년간의 해상 실습을 거쳐 3등 항해사 자격을 얻었다. 자격증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해군에서 해외에 파견할 항해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는 상선의 사관도 해군에서 모집해 배치하던 때였다. 손원일은 원양 항해를 하면서 세계를 돌아보는 게 꿈이었다. 합격자는 5명인데 조선인은 손원일뿐이었다.
1930년 말, 손원일은 중국 해군에서 배정한 대로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상선 하벤슈타인호에 타게 됐다. 이 배는 함부르크에서 지중해, 수에즈, 인도양, 싱가포르, 요코하마,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갔다. 선원들은 모두 독일인이었다. 이때 독일어를 배우게 됐는데 훗날 서독 대사가 됐을 때 요긴하게 썼다.
1931년 초, 22세인 손원일은 2등 항해사로 승진해 당시 1만1500t급 최신형 화객선 람세스호로 옮겨 탔다. 대양을 누비며 다양한 문물을 체험했다. 이 경험은 해군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해군이 국제적 시각을 갖춘 신사여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했다. 훗날 그는 상하이행을 두고 “하나님의 인도”라고 표현했다. 베이징은 내륙에 위치해 배가 드나들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재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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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원일 가족. 가운데는 손원일의 어머니 박신일 여사와 손원일·홍은혜 부부의 3남. 사진=조선DB |
두 사람은 1936년 11월 일요일 정동교회에서 선을 봤다. 서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홍은혜 집안에서는 “신랑이 여덟 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재혼이 아니냐”고 물었다. 결혼 대신 조건이 붙었고, 졸업 후 결혼하기로 했다. 약혼은 석 달 뒤 손원일의 집에서 진행됐다. 이날 사회자가 “키스하라”고 하자, 신랑은 입술을 내밀었고, 신부는 혀를 내밀었다. 홍은혜는 이를 생애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했다. 홍은혜가 이화여전을 졸업한 1939년 3월 11일, 두 사람은 결혼했다. 당시 손원일은 30세, 홍은혜는 22세였다. 홍은혜는 남편을 따라 해군의 어머니가 되는 운명을 선택했다.
1940년 초, 손원일은 식료품 수출입 무역회사인 동화양행(東華洋行)에 취직해 중국 지사에서 1945년 8월 14일까지 근무했다. 동화양행은 중일 전쟁으로 특수(特需)를 누렸다.
독립운동을 했지만 손원일은 독립유공자가 아니다. 2019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해 길림유자회와 여길학우회 활동 등을 근거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으나 당시 국가보훈부는 동화양행 경력을 이유로 독립유공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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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원일 제독과 홍은혜 여사의 결혼식 당시 사진. |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손원일은 해군 창설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함께할 동지를 찾지 못했다. 8월 21일 풀통을 들고 거리로 나가 대원 모집 벽보를 붙였다.
‘조국의 광복에 즈음하여 앞으로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있는 동지들을 구함.’
같은 날 오후 서울 종로4가 전매청 공장 벽돌담에 또 다른 청년이 벽보를 붙이고 있었다. 손원일이 붙인 벽보와 내용이 비슷했다.
‘우리의 바다는 우리가 지키자, 조국의 바다를 지켜 나갈 충무공의 후예를 모집함.’
손원일의 부탁을 받고 벽보를 붙이러 다니던 김영철(1906~1971년·3대 해군사관학교장)은 이 벽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니, 우리 것과 똑같네?”
김영철은 이 청년을 붙잡고는 손원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먼저 벽보를 붙인 이는 정긍모(1914~1980년·제3대 해군참모총장)였다.
손원일과 정긍모 중 누가 먼저 벽보를 붙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둘은 의기투합했다. 다섯 살 위인 손원일이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정긍모는 한갑수(1921~2012년)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했다. 한갑수는 진해고등해원양성소(현 한국해양대학교) 출신이었다.
해사대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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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 해군훈련소에서 훈련하고 있는 모습. |
장정 80명을 먹이고 가르치는 건 쉽지 않았다. 손원일은 궁리 끝에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建準)를 찾아갔다. 건준은 조직 확장을 위해 해사대를 흡수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건준에 해사과를 설치하자고 했고, 손원일은 내키진 않았지만,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9월 1일 건준에 가입해 해사과를 만들었다.
손원일은 좌경화된 건준에서는 해사대의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보고 9월 30일 건준을 탈퇴했다.
손원일은 자금 확보를 위해 조선해사보국단(朝鮮海事報國團)의 선원 계장을 지낸 석은태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의논 끝에 두 단체를 합치기로 하고 명칭은 ‘조선해사협회(朝鮮海事協會)’로 정했다.
미군정청 운수부 해사국장은 칼스텐(Carsten) 미 육군 소령이었다. 11월 1일 칼스텐은 손원일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해안 경비와 밀수 방지를 주 임무로 하는 운수부 해사국에 코스트가드(coastguard·해안경비대)가 필요한데 당신들이 맡아줄 수 있습니까?”
이에 손원일은 “우리는 조국의 해군을 건설하려는 것이지 해안경비대가 돼 군정청 심부름을 하려는 게 아니다”고 했다. 그러자 칼스텐은 “머잖아 당신네 나라에 정부가 수립되면 해안경비대가 해군으로 바뀐다. 그렇게 되도록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한국은 해방병단, 미군정청은 해안경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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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인 조선해안경비대가 도열하고 있다. |
해방병단은 이날 오후 7시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역을 출발해 다음 날인 12일 오전 6시 진해역에 도착했다. 상황은 여의치 않았고 이 중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손원일은 “앞으로 이보다 더한 고생도 각오해야 한다. 갈 사람은 가도 좋다”고 했다. 13일 아침이 되자 단원 중 17명이 돌아가겠다고 했다. 손원일과 간부들은 주머니를 털어 이들의 여비를 마련해 줬다.
1945년 11월 14일 오전 우여곡절 끝에 진해 군항에 있는 옛 일본 해군 항무부(港務部) 건물을 거처로 삼고 해방병단 본부 겸 숙소로 정했다. 이날 오후 시무식을 가진 후 첫 업무를 시작했다. 해군은 이곳에 ‘해방병단 시무지지(海防兵團 始務之地)’라 새긴 표지석을 세웠다.
17명이 이미 빠져나갔는데 16명이 또 그만두겠다고 했다. 결국 37명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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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해군에서 인수한 고속어뢰정(PT) |
해방병단은 해군 장교 경력자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일본 해군에서 복무했던 이용운(제4대 해군참모총장)이었는데, 그는 일본인의 양아들로 들어가 일본군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인력 양성이 시급했다. 해방병단은 주요 일간지에 사관후보생 모집 공고를 내고 벽보를 붙였다. 공고를 보고 전국에서 900여 명이 몰려들었다. 90명을 선발해 경쟁률은 10대1. 이들이 해군사관학교 1기생들이다. 곧이어 1946년 1월 17일 사관학교가 창설됐다. 한국 측은 이를 해군병학교(현 해군사관학교)라고 불렀다. 손원일이 해군병학교장을 겸직했다. 1946년 6월 15일 해방병단이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되자 해군병학교도 해안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됐다.
해군 군가들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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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 해군훈련소에서 포 운용 훈련을 하고 있다. |
1946년 9월 어느 날 아침 창문을 열던 홍은혜는 군가를 듣고는 남편을 급히 불렀다.
“여보, 저 노래 좀 들어보세요. 아직도 일본 곡조로 된 군가를 부르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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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해안경비대 구용호의 승조원들. |
그날부터 손원일 부부는 군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곡명은 ‘바다로 가자’였다. 이 군가는 ‘해군가’(1956년)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홍은혜는 이후 ‘해군사관학교 교가’ 전국 공모에서도 당선됐다. ‘해방행진곡’ ‘대한의 아들’ ‘해사 1기생가’ ‘해군부인회가’ 등도 그녀의 작품이다.
해사 1기생은 당초 3년간 교육받고 임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군사영어학교(군영) 교장 출신 리스(Rease)는 “해방병단에도 영어 소통이 가능한 군영(군사영어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출신자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군영 출신 22명 중 7명은 해방병단으로 전군(轉軍)했고, 15명은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사) 1기로 입교해 교육받은 후 해군으로 전군했다. 당시만 해도 군영은 교육 기간이 짧았다(6개월 미만).
손원일은 군영에서 전군한 이들이 해사 1기생과 함께 교육받길 원했지만, 군영 출신 전군자들은 자신들을 1기보다 먼저 임관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손원일은 간부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임관을 나눠서 하면 추후 파벌이 형성되지는 않을까 우려됐다. 이에 전군자 22명과 3년 교육 과정 중 1년만 채운 해사 1기를 함께 임관시켰다. 해사 1기생들은 졸업도 하기 전에 임관해야 했다. 해사 2기생은 1년 10개월을 4학기로 나눠 교육받았다. 해사 3기생은 2년 6개월(5학기)이었다.
일본이 버리고 간 배로 ‘충무공정’ 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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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함창에서 최초로 건조한 충무공정(PG-313). 사진=해군 |
조함창을 둘러보던 손원일은 녹이 슨 채 용골(keel)과 골격(frame)만 갖춘 배 한 척을 발견했다. 이 배는 일본이 만들다가 중단한 배였다. 손원일은 이를 완성해 보라고 지시했다.
1947년 2월에는 일본이 버리고 간 배를 인력 60여 명, 건조비 2396만원을 투입해 7개월 만에 건조했다. 배수톤수 287t, 길이 46.6m, 폭 6.7m인 경비정으로 ‘충무공정(忠武公艇)’이라고 명명했다. 한국 해군 조함(造艦)의 효시(嚆矢)였다. 이 군함은 성조기나 일장기가 게양돼 있던 기존 함정과 달리 우리 손으로 건조를 마쳤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이 때문에 ‘충무공함’이라 높여 부르기도 했다. 통상 ‘함(艦)’은 500t 이상일 때 붙는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조선경비대(육군 전신)와 조선해안경비대(해군 전신)는 1948년 9월 1일 대한민국 국군으로 편입됐고 9월 5일에는 그 명칭이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바뀌었다.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부는 해군 총사령부가 됐고, 손원일은 해군 총사령관이 됐다. 1948년 12월 10일 손원일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로써 손원일은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해군 제독이 됐다. 국군 조직이 점차 확대 개편되며 1949년 2월 손원일은 소장으로 진급했다. 직책은 ‘해군총참모장(현 해군참모총장)’.
“군인은 정치담을 말고 도별담을 폐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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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1주년을 맞아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손원일 해군참모총과 함께 생도들을 사열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
“군인은 정치담을 말고 도별담(道別談)을 폐지하자.”
이는 해군 창설 초기부터 손원일이 군의 정치 참여와 출신지별 파벌 조성을 원천적으로 막아보려고 애쓴 사실을 보여준다.
손원일은 장병 인사 기록 카드에 원적과 본적을 빼고 현주소만 쓰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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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대 창설의 주역 신현준 장군. |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은 해병대 탄생에도 힘썼다. 해병대는 1948년 여수·순천 10·19사건을 계기로 창설됐다. 남로당이 5·10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제주 지역에서 소요 사태(4·3 사건)를 일으키자, 정부는 14연대에 제주 지역 소요 사태 진압을 명령했다. 하지만 14연대 소속 좌익 성향 군인들이 이 명령을 거부하면서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소요 사태는 해안을 낀 제주도와 여수에서 발생했다. 정부는 진압 작전에서 고전했다. 1949년 4월 15일 신현준(申鉉俊·1915~2007년)을 중심으로 창설 요원 380명(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병사 300명)이 진해 덕산비행장에 모여 창설식이 거행됐다. 해병대 창설 20일 뒤인 1949년 5월 5일 해병대령이 공포되며 정식 군으로 인정받았다.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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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PC-701) |
실정을 아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손원일을 만날 때마다 전투함을 확보할 수 있는 묘안이 없냐고 물었다. 인맥을 통해 미국 측에 전투함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의 정책 변화로 전투함은 직도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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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원일 제독(오른쪽)과 미 7함대사령관이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해군 |
“사랑하는 조국이여, 우리에게 배를 주소서! 배가 없이는 바다에서 싸울 수 없습니다.”
박봉이었지만 장교는 봉급의 10%, 병조장은 7%, 부사관과 수병은 5%를 매월 월급에서 군함 건조 기금으로 내놓았다. 해군부인회에서도 바자회 등을 열어 기금에 보탰다. 국민들도 동참해 4개월 만에 목표로 한 1만5000달러를 모았다. 모금 기간에 군함 건조 방안을 고심했는데 건조 기술과 시설이 미비해 건조 경비가 구매보다 더 소요될 것으로 판단됐다.
“애드미럴 손, 직접 미국 가서 군함 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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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본토를 출발한 백두산함(PC-701)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3인치 함포를 무장하고 있다. 사진=해군 |
손원일은 인수 요원을 이끌고 미국으로 갔다. 미국은 3인치 포가 철거된 길이 52.9m, 속력 18노트에 450t인 군함을 내놓았다. 요구액은 1만8000달러. 이 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무장이 해제된 구잠함(驅潛艦·PC-823)이었다. 이후 미국 해양대학교에서 실습선으로 활용했는데 함명은 ‘엔사인 화이트 헤드(Ensign White Head)’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이 학교 출신 화이트 헤드 해군 소위를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손원일은 이 배를 ‘백두산’이라고 명명했다. 우연인지 의도한 것인지 영문명과 같은 뜻이었다. 전투함이었지만 제대로 된 무장은 없었다. 인수 후 1949년 12월 26일 명명식을 한 뒤 뉴욕항을 출발했다. 1950년 새해 첫날 마이애미를 출항해 파나마 운하로 향했다. 중간에 유류를 공급받고는 1월 24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고국의 전투함이 온다는 소식에 동포들이 이를 보기 위해 기대를 안고 부두로 나왔으나 미국 군함과 비교해 너무 작은 배를 보고는 실망했다고 한다. 손원일은 3인치 포 장착을 위해 몇 번이고 미국에 사정했고 결국 승인을 얻어냈다. 미국의 승인을 기다리느라 하와이에서 2개월을 보냈다. 괌에서 3인치 포탄 100발을 구매하곤 배에 실었다. 뉴욕항을 떠나 석 달 반, 진해를 떠나 7개월 만에 1950년 4월 10일 다시 진해에 입항했다. 이후 주요 항구 도시를 순방하며 해상 훈련을 하다가 1950년 6월 24일 진해로 복귀했다.
대한해협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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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 해군훈련소에서 갑판 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해군 |
레이더가 변변치 않을 때라 육안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날 밤 9시30분 괴선박을 발견했다.
백두산함은 이 괴선박에 정체를 밝히라고 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당시 소위로서 백두산함 갑판사관이자 포술사였던 최영섭(崔英燮·1928~2021년·해사 3기) 예비역 대령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괴선박에 가까이 가서 서치라이트(조명)를 대고 보니까 앞에 85mm 대포가 있고 중갑판 양쪽에는 기관포가 달려 있었습니다. 갑판 위를 보니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빼곡히 서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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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에 성공한 후 9월 28일 서울 중앙청에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
백두산함은 적선 아래쪽을 노리기 위해 접근했다. 다가갈수록 명중률은 높아졌고, 900m까지 접근했을 때 포탄이 적선 마스트에 명중했다. 적 수송선은 발광 신호를 보냈고 이를 본 백두산함은 적선을 더 정확하게 포격했다. 백두산함은 함포로 20발을 쏴서 5발을 맞췄다. 한데 3인치 함포를 계속해서 쏘다 보니 격발 장치가 고장 나버리는 문제가 발생했다. 백두산함은 대신 기관총으로 반격했다. 적선에 너무 가까이 간 나머지 적 공격으로 백두산함 승조원 2명이 전사했다.
오전 1시38분 적 수송선이 침몰했다. 적선에는 아군의 교두보가 될 부산을 교란할 북한군 600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이 부산에 상륙했다면 UN군과 미군의 지원이 원할치 않아 6·25 전쟁의 양상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손원일이 이끄는 해군은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작전 등을 통해 충무공의 후예임을 입증했다. 미국 측 인사를 만날 때면 해군 전력 확충을 위해 한국에 군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손원일의 노력으로 6·25 전쟁 기간에만 함정 30척을 추가 확보했다. 대표적으로 두만강함(PF-61), 압록강함(PF-62), 대동강함(PF-63) 등이 있다. 북진(北進)해 영토를 수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함명이다.
大將 진급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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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가 손원일 제독의 이름을 딴 잠수함인 손원일함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은 대장으로 진급시키고 싶다며 ‘애드미럴 손’을 불렀다. 손원일은 정중히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대장으로 진급하려면 우리 해군에 적어도 구축함이나 순양함이 몇 척 있어야 하고 병력도 지금보다 두 배는 더 있어야 합니다. 미 해군과의 지휘권 관계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원활한 작전 협조를 위해선 지금 중장 계급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에게는 더없는 영광이지만 지금 대장으로 진급하는 건 국가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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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은혜 여사가 젊은 시절 부부 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조선DB |
그는 1956년 5월 26일 국방부 장관에서 사임한다. 정무직이라는 특성과 정치 공세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955년 벌어진 ‘원면(原綿) 파동’이 있다. 국방부가 장병들의 월동 피복용으로 사용할 면을 빼돌려 손원일이 부정축재를 한다는 주장이 국회에서 나왔다. 실상은 이승만의 비호를 받는 이기붕(李起鵬)계와 일부 육군 고위층이 연루된 사건이다.
이후 손원일은 주(駐)서독 공사·대사, 한국홍보협회 회장,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을 지내다 1980년 2월 15일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해군장(葬)으로 치러졌으며 그가 조성한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백두산함, 유지·관리 비용 없어 고철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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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함의 마스트. 유일한 백두산함의 흔적이다. |
해사 박물관장인 박준형 교수는 “해군 장병들이 매일 출근할 때 이 노래를 듣는다”고 했다. 조형물 뒤편 부두 쪽으로 걸어가면 마스트가 우뚝 서 있는데, 대한해협해전의 주역 백두산함이 남긴 마지막 흔적이다. 백두산함은 1960년 8월 폐선 처리됐는데, 유지·관리 비용에 따른 어려움으로 결국 고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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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박준형 교수. |
“백두산함이 1950년 4월 10일 진해에 입항합니다. 이후 우리 해역을 한 바퀴 돌며 인사를 하고는 6월 24일에 다시 이곳으로 복귀합니다. 하루 있다가 실전에 투입됩니다. 대한해협해전은 우리 해군이 독자적으로 수행한 첫 전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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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사관학교 교수부장 신성재(해사 47기) 대령. |
“1953년 6월 30일 손원일 제독은 해사 7기 졸업식에서 ‘충무공 정신의 요체는 망신순국(忘身殉國)’이라고 했습니다. 창군 표어인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삼가 이 몸을 바치나이다’ 역시 그 정신의 뿌리는 충무공에서 유래합니다. 손 제독은 우리 해군에 3가지 측면에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신적 차원에서는 ‘충무공의 후예’라는 의식과 신사도·선비 정신입니다.
물질적 측면에서는 1951년부터 과학 기술에 기반한 해군력 건설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 영향으로 해군에선 1970년대 ‘기술군’이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선구적 혜안으로 해군이 추구할 가치를 제시했습니다.”
‘이모부라는 말은 꺼내지도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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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군 원로인 차윤(해사 6기) 예비역 해군 소령과 홍순성(해사 9기) 예비역 해군 준장이 80년 전 해방병단이 결성된 터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경남 마산 출신인 차씨는 바다가 좋아 해군을 택했다. 해군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애국가를 부를 때도 가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해군 만세”로 부른다고 했다.
해사에 진학한 것은 이모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했다. 신상명세서를 써낼 때도 이모부나 이모 이름은 적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1949년 해사에 입학해 1952년에 임관했는데, 6·25 전쟁이 한창일 땐 오전에 경남 함안 지역으로 가 경계 근무를 서고 오후에는 학교로 돌아와 수업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모부가 말한 “해군 장교는 신사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지정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 때문에 군에서 일찍 전역한 뒤 해외와 민간, 정부 기관에서 지정학을 연구했다.
손원일 제독은 1972년 한국홍보협회 회장을 할 때 해사 출신에 영어가 능통한 사람을 찾다가 주변에서 차씨를 추천받았다. 손 제독이 차씨를 보더니 “자네가 자넨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조카이자 해사 후배인 차씨의 이름과 얼굴도 모르고 있었다.
“손원일과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이득을 본 사람은 저희 가족 중에 없어요. 손 제독이 국방장관이 되자마자 본인 실력으로 국방부 고위직(일반 공무원)에 있던 우리 삼촌(홍은혜의 둘째 오빠이자 손원일의 처남)을 국방부에서 내보내기도 했어요.
홍보협회에서 일할 때도 제게 ‘이모부라는 말은 꺼내지도 마라’고 했죠.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했어요 . 해사의 교훈인 ‘진리를 구하자, 허위를 버리자, 희생하자’를 손원일 제독은 실천했죠.”
차씨는 “박정희(朴正熙) 정부에서 정일권(丁一權) 당시 총리가 후임으로 손 제독을 추천했는데 손 제독이 이를 거절했다”고 했다.
‘부인대학’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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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기지사령부에 있는 손원일 제독 동상. |
홍씨는 홍은혜 여사와의 인연을 소개했다.
“집사람이 홍은혜 여사와 가까워요. 해군대학 총장 시절 일입니다. 당시 해군대학에 남편들이 공부하러 가면 부인이랑 아이들은 할 게 없어요. 하루는 제가 홍 여사님한테 제안을 했죠. ‘저기 가만히 노는 애들을 위해 유치원이라도 만듭시다.’ 홍 여사님이 좋다고 하시곤 관사에 사는 애들을 모아 유치원을 만들었어요. 또 ‘남편은 공부하는데 부인은 놀 수 없지 않으냐’고 했더니 ‘부인대학’을 만들자고 하셨어요. 경남대·마산대와 협력해 해군대학 부인대학을 만들었죠. 이걸 보고 육군·공군대학에서까지 따라 하더라고요.”
소령 시절 ‘손원일상’을 받은 최일(해사 40기·예비역 해군 대령, 손원일함 초대 함장) 잠수함연구소장. 최 소장의 모친은 홍은혜 여사가 이모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땐 손원일 제독 집에서 하숙을 했다. 최 소장에겐 홍 여사가 이모할머니다. 최 소장의 부친도 해사 출신 장교였으나 임무 중 순직했다. 손원일 제독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손원일상은 신망이 두터운 이가 받는 상이다(연 해군·해병대·사관생도 각 1명 수상).
손 제독 집안에서 해사에 진학한 사람은 세 명(차윤, 최일, 최일 소장 부친)밖에 없다. 손원일·홍은혜 부부는 친인척을 환대하기는커녕 철저하게 거리를 뒀다.
최일 소장의 이야기다.
“홍은혜 여사가 진해 해군사관학교 교회에 자주 왔습니다. 제가 교회 성가대 부장 생도였는데, 저를 보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인사도 한 번 안 해줬습니다. 그렇게까지 공과 사를 구분했으니 지금 이렇게 존경을 받는 게 아닐까요. 이렇게 철저하신 분이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졌을 땐 한 달 내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손원일의 부친 손정도 목사는 ‘걸레 철학’을 강조했다.
“비단옷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걸레는 하루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되므로 없어서는 안 된다. 나는 걸레와 같은 삶을 택해 불쌍한 우리 동포들을 도우며 살겠다.”
최 소장은 손원일 제독도 “걸레 철학을 실천한 분”이라고 했다.
손원일이 남긴 정신적 유산인 ‘망신순국’은 우리 조국의 바다를 지키고 해군을 지탱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대를 이어 바다를 지키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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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해군 관함식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첨단 전력이 해상과 공중에서 기동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육군에 강재구(육사 16기) 소령이 있다면 해군에는 이인호(1931~1966년, 해사 11기) 소령이 있다. 해병 청룡부대원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이인호 대위. 베트콩을 소탕하기 위해 동굴 수색 작전을 지휘하던 중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이 부하들에게 날아오자 자기 몸을 던져 수류탄을 덮쳐 대원들을 살렸다. 사후(死後) 소령으로 추서됐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이인호 소령의 아들 이제욱씨도 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해사 40기로 입교해 해병대를 선택해 중령까지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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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연평해전 전사자 고 조천형 중사의 딸 조시은 소위와 천안함 용사 고 김태석 원사의 딸 김해나 소위. 사진=해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