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 정보기관의 데이터 담은 《남조선 해방전쟁 프로젝트》 펴내
⊙ “어디 찔리는 구석 있으니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해 버린 거겠죠”
⊙ 이미 제 갈 길 가는 북한… “현 대북 정책은 짝사랑이자 아부”
⊙ 평화 분위기 틈타 과감해지는 대남 공작… “北, 적화 야욕 포기한 적 없어”
⊙ “AI 시대에도 간첩은 여전히 핵심 전술… 국내 간첩 수 외려 증가 예상”
⊙ “여순사건, 북한 입장에서는 ‘의로운 군인들의 의거’”
⊙ “한국 ‘북한학’, 사실 아니라 관념 가르치는 허술한 학문”
김동식
1962년 황해도 출생.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 / 국군기무사령부(現 국군방첩사령부) 대남공작분석관,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역임. 現 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사)북한전략센터 이사장
⊙ “어디 찔리는 구석 있으니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해 버린 거겠죠”
⊙ 이미 제 갈 길 가는 북한… “현 대북 정책은 짝사랑이자 아부”
⊙ 평화 분위기 틈타 과감해지는 대남 공작… “北, 적화 야욕 포기한 적 없어”
⊙ “AI 시대에도 간첩은 여전히 핵심 전술… 국내 간첩 수 외려 증가 예상”
⊙ “여순사건, 북한 입장에서는 ‘의로운 군인들의 의거’”
⊙ “한국 ‘북한학’, 사실 아니라 관념 가르치는 허술한 학문”
김동식
1962년 황해도 출생.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 / 국군기무사령부(現 국군방첩사령부) 대남공작분석관,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역임. 現 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사)북한전략센터 이사장

- 사진=월간조선
북한의 노골적인 반응, 우리는 아랑곳 않는다. 오늘도 대화와 협력을 말한다. 이런 시기, 사람들은 생각한다. 지속하면 평화 협력이 가능하지 않을까.
착각이다. 지난 11월 3일 만난 김동식(62) 대북전략컨설팅 대표는 “북한은 단 한 번도 적화(赤化) 야욕을 포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북한 정권이 존속하는 한 대남(對南) 전략의 최대 목표는 ‘대한민국 체제 전복(顚覆)’이라는 얘기다. 어떻게? 간첩을 보내서.
혹자는 묻는다. 요즘 시대에 무슨 간첩이냐고. 여기 산 증인이 있다. 196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김 대표는 1981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하며 엘리트 스파이로 양성됐다. 15년간 대남 공작원으로 활동하며 두 차례 남파(南派)됐다. 1990년과 1995년, 반(半)잠수정을 타고 침투했다. 첫 번째 공작에는 성공해 27세의 나이에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지만, 두 번째는 충남 부여에서 임무 수행 중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유명한 ‘부여 간첩사건’이다.
이후 전향한 그는 국군기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 대남공작분석관과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을 지냈다. 2013년 1월에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7월 자서전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를 출간했다.
그런 그가 12년 만에 신간을 출간했다. 《남조선 해방전쟁 프로젝트》다. 북한이 지난 80년간 전개해 온 다양한 형태의 대남 공작을 사건별로 조명했다. 1, 2권 합해 700여 페이지에 달한다.
남북 양쪽 정보기관 데이터 모두 녹여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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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95년 10월 부여에서 검거된 김동식 대표가 그해 12월 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안기부청사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조선DB |
“10여 년 전부터 준비했던 건데, 사정상 중단됐다가 끝에 가서 속도가 붙은 겁니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부터 아쉬웠던 게, 대남공작사를 제대로 정리해 둔 자료가 없다는 점이었어요. 좌파들은 학생·노동운동사 등 자기들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데 반해서요. 간첩 활동 역사를 이왕 쓸 거면 남과 북의 사정을 모두 아는 사람이 하는 게 좋잖아요. 자연스럽게 이 일을 맡게 된 거죠.”
단순한 사건의 연대기(年代記)가 아니다. 일견 그냥 술술 풀어쓴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안에 담긴 정보의 가치와 밀도는 남다르다. 남북 양쪽 정보기관의 데이터를 모두 녹여 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렇다.
“북한 공작 부서는 완전히 성과주의예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한국에 나와 본 경험이 없으면 서열이 가장 아래입니다. 저는 핵심 요원으로 대접받았던 터라 내부의 여러 극비문서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한국에서는 기무사 분석관 등으로 일하며 각종 대(對)간첩작전 자료와 좌익 간첩사건 30년사, 50년사 같은 문서 등도 접했죠. 이 같은 자료를 체계적으로 모으고 종합해 이번 책에 담아냈습니다.”
— 정권에 따라 간첩들의 동태가 달라진다고 들었습니다.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시기 대남 공작이 더 과감해진다면서요?
“정권의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죠. 이쪽에서 세게 대응하면 저쪽은 위축될 수밖에 없고, 반대로 풀어 주면 내 세상이다 싶어서 활개 치는 건 당연한 얘기죠.”
— ‘활개 친다’고 함은?
“좀 더 적극적이고 노골적이라는 거예요. 침투 횟수도 많아지고 활동 범위도 넓어지는 거죠. 느슨하면 그만큼 들어오기도 쉽잖아요. 또 국내에 있는 간첩들도 그 틈을 타서 드러내 놓고 활동합니다. 과거 통합진보당처럼 말이죠. 걔네들은 좀 엉터리로 하다가 걸렸지만.”
“남북관계, 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을 것”
—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알려진 모(某) 인사를 둘러싸고 요즘 말이 많습니다. 이력이 확인되지 않고 있어 북한 출신이라는 얘기도 들리는데요.
“그건 제가 판단할 건 아니고요, 신경 쓰고 싶지도 않고.”
— 아무래도 허무맹랑한 공격이겠죠? 어떻게 간첩이 버젓이 그 정도 중책(重責)을 맡겠습니까.
“해당 인물의 사정을 떠나서, 간첩이 그 정도 중책을 맡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당에서는 꾸준히 한국 사회 지도적 위치에 진입해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주문합니다. 그래야 좌지우지할 수 있으니까요. 북한 입장에서 간첩이 정책을 결정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1월 1일 경주 APEC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적대적 어휘 사용을 두고 “변화의 과정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표현”이라면서 “과거보다는 강도가 완화된 것 같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완전히 아전인수(我田引水)죠. 이런 기조라면 남북관계가 더 나빠지지는 않겠죠. 한데 더 좋아지기도 어렵습니다. 북한은 ‘알아서 기는구나’ 하면서 소 닭 보듯 내버려 둘 뿐이에요.
커다란 착각 중 하나가 ‘우리가 뭘 갖다 주면 북한이 호응할 것’이라는 건데, 그들은 필요할 때만 나옵니다. 예컨대 쌀이 필요하다 싶으면 그걸 어떻게 받아 낼까 계산하다가 ‘이산가족 상봉 한번 해주지 뭐’ 이런 식이에요. 이마저도 지금은 씨알도 안 먹히죠. 러시아 덕분에 살 만하거든요. 이제는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 이날 이 대통령은 북한의 신뢰를 얻기 위해 ‘선제적 조치’를 지속하겠다고도 밝혔습니다.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전단 살포 금지에 이어 ‘9·19 남북 군사합의 복원’이 거론되는데요.
“그냥 짝사랑이고 읍소(泣訴)고 아부일 뿐입니다. 북한은 이미 두 국가 체제로 가겠다고 못 박았잖아요. 이젠 ‘통일’이란 단어 자체를 안 써요. 그런 상황에서 9·19 합의를 복원하자고요? 쟤네들은 벌써 손 털고 제 갈 길 가는 중인데, 할 이유가 없겠죠.”
“통일은 평화든 무력이든 상대 흡수해야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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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포된 김동식의 진술에 따라 1995년 10월 25일 경찰 관계자들이 성남시 분당구 중앙공원 내 묘지 망부석 옆에서 무전기와 난수표 등을 찾아 꺼내는 모습. 사진=조선DB |
“‘양쪽에서 다 뺨 맞는 정책’이라고 봐요. 핵잠을 들여오겠다는 건 명백히 군사력 강화 메시지인데, 동시에 평화를 운운하니 양쪽 모두에게 신뢰를 잃는 겁니다. 대신 물밑 협상을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했어야 해요.”
— 북한은 이런 한미 간 움직임을 내부적으로 어떻게 해석할까요?
“신경 안 쓸 겁니다. 김정은이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수십 년 동안 보수 정권이든 진보 정권이든 다 상대해 봤지만 똑같더라.’ 이미 결론 내고 제 갈 길 간다니까요.”
— 북한도 지난 3월 5000t급 이상 잠수함 건조 현장을 공개하며 핵추진 잠수함을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현실성 여하를 떠나 한국과 시점(時點) 을 다투는 모양새인데, 어느 쪽이 우위를 점할 수 있을까요?
“북한이 먼저 건조할지 모르지만, 미국과 협력한다면 기술은 확실히 우리가 우위입니다. 북한도 일부 러시아 기술을 이전받을 텐데, 미국과는 게임이 안 됩니다. 북한이 겉으로 보면 대단해 보일 수 있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다 썩어 있어요. 별거 없습니다. 물론 해킹은 잘하죠.”
— 반잠수정 기술은 북한이 더 뛰어나지 않나요? 그동안 남파 간첩은 꾸준히 있어 왔지만, 우리가 북한 침투에 성공했다는 얘긴 못 들어 봤는데요.
“그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수뇌부 결단이 없었던 거죠. 역대 대통령 그 누구도 북한에 간첩을 보내겠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 대통령의 헌법적 의무가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거긴 한데, 역대 정부는 그걸 ‘평화통일’로만 좁게 해석했어요. 동·서독도 평화통일을 했다고 했지만 결국 흡수통일이잖아요. 통일이란 건 평화든 무력이든 상대를 흡수해야 가능한 건데, 지금껏 그런 생각을 가진 대통령이 없었죠. 북한을 향한 응징·보복이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고요.”
— 이번 정권에서 남북 혹은 미북 간 의미 있는 대화가 가능할까요?
“남북 대화는 없다고 봅니다. 지금 북한은 레버리지(지렛대)가 전혀 필요 없어요. 문재인 정권 때야 (북한이) 트럼프를 직접 상대하기 어려우니 문 대통령을 징검다리로 이용했는데 이제는 트럼프한테 바로 만나자고 하면 되니까요. 미북 간 대화는, 장담은 못 하지만, 쉽지 않을 거라 봐요. 북한이 아쉬울 게 없거든요. 다만 러시아·중국이 무너지거나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면 달라질 수 있겠죠.”
“직접 남파 여전히 있을 것”
— 요즘은 간첩들이 다 중국·동남아 등을 거쳐 우회 침투를 하죠.
“저는 지금도 직파(直派)가 있을 거라고 봐요. 그 숱한 남파하던 사람들이 지금 다 뭘 하겠습니까.”
— 우회하고 있지 않을까요?
“공작에서는 항상 A, B 플랜을 모두 준비합니다. 둘 중 하나만 할 거란 생각은 상식적이지 않아요. 우회 침투와 직접 침투는 장단점이 분명합니다. 전자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불확실해요. 해외에서 신분증 위조하는 데 한계가 있고, 긴 동선의 미행도 따돌려야 하죠. 공항에서 다 찍히니 노출 가능성도 있고요. 반면 후자는 그런 제약이 없습니다. 마음먹으면 당일에도 넘어올 수 있어요. 공작금 전달도 훨씬 용이하죠. 외국에선 외화 소지 한도가 있고, 계좌를 썼다간 추적을 당할 수도 있는데, (직파는) 그냥 현찰을 건넬 수 있으니까요. 다만, 더 위험하죠.”
— 반잠수정을 타고 해안가 근처에 도달해서 현금 다발을 메고 헤엄쳐 들어오는 겁니까?
“그렇게 가져와서 해안가나 묘지 같은 곳에 묻어 두고 애들한테 메일이나 무전으로 ‘어디에 돈 묻어 놨으니까 갖다 써라’ 하는 거죠. 그걸 ‘무인 포스트’라고 하고요.”
— 만약 그 돈을 누가 훔쳐 가버리면 쫓아가서 죽입니까?
“안 죽여요. 훔쳐 가는 경우는 0.00001%도 안 될 겁니다. 왜요? 묻어 놓은 돈 찾아보게요?”
— 아직도 직파가 있다는 게 안 믿겨서요. 1997년 최정남·강연정 부부 간첩 이래 직파 검거 사례가 없지 않습니까.
“그들이 마지막 직파 간첩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잡힌’ 간첩인 거죠. 공작원 외에 전투원이라고 있어요. 침투만 전문으로 합니다. 루트를 개척하고, 사람을 데려오고 데려다주는 역할을 계속 해요. 공작원들은 우회를 한다고 해도 전투원 인력은 여전히 제 할 일을 할 겁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늘 준비 태세인 거죠.
세상이 참 넓고도 좁은 게, 얼마 전 한 탈북민을 만났는데 저와 친했던 동기를 알더군요. 마찬가지로 영웅 호칭을 받았던 친군데, 전투원이었어요. 소식을 물었더니, 죽었대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한국에 나왔다가 죽었답니다. 아마 침투 중이나 복귀 중 해상에서 변을 당했겠죠.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일들이 지금도 일어난다는 거예요. 직파 간첩이 안 잡힌다? 그게 아니라 못 잡는 겁니다. 저도 그렇고, 부부 간첩도 침투 중에 잡힌 건 아니잖아요.”
북한이 보는 여순사건
혹독한 훈련의 연속이었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북한 내 유일하게 노동당이 직접 관장하는 대학이다. 이곳에서 4년간 매일 20kg짜리 배낭을 메고 10km씩을 뛰었다. 태권도·유도·합기도 등을 혼합한 종합무술인 격술(擊術)을 연마했고, 잠수·수영 실력을 단련했다. 주체사상 무장과 함께 한국사·지리 등 대한민국 정세도 습득했다. 졸업 후에도 처음 남파되기까지 꼬박 5년간 ‘적구화(敵區化)’ 훈련은 이어졌다. 외부와 차단된 초대소에서였다. 서울 토박이 출신의 한국말 강사와 1년간 합숙하면서 표준어와 한국 고등학교 졸업생 수준의 상식을 익혔다. 그리고 1990년과 1995년 두 차례 제주도로 침투했다. 4·3사태와 같은 사건이 많은 제주는 북한 입장에서는 용이한 침투 지점 중 하나라고 한다.
— 직파가 있다면, 요즘도 제주로 들어올까요?
“대한민국에 바다가 어디 제주도만 있습니까.”
— 북한에서 한국사 공부를 따로 했다고요. 북한에서는 여순사건을 어떻게 규정합니까?
“의로운 폭동으로 봅니다. 당시 여수 14연대 안에 있던 공산당원들이 지휘관들을 죽이고 부대를 장악했잖아요. 여수·순천 시내를 완전히 점령했으니 북한 입장에서는 ‘의로운 군인들의 의거’인 거죠.”
— 지난 10월 30일 국정감사에서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여순사건을 ‘반란이 아니다, 분명히 바로잡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때 여수경찰서장 포함 얼마나 많은 경찰이 사망했습니까? 그건 북한 경찰청장이 할 말이죠.”
— 두 번째 침투 때 부여에서 체포됐죠. 간첩들은 생포시 자결(自決)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총을 맞았기 때문에 앰플을 깨물 시간이 없었죠. 깨어나 보니까 이미 다 털린 후였고요.”
“두 번째 침투 전부터 의문 들기 시작”
— 간첩은 충성하는 대상에게 목숨까지 바치는 확신범인데, 전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뭡니까?
“그들도 대한민국에 자유가 있다는 건 알아요. 저 역시 처음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두 번째 침투 2년 전쯤부터 살짝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노동당 간부로 현장에 나갔었는데, 인민들의 삶이 너무 비참하더군요. ‘이건 아니다’ 싶었죠. 이게 모두 우상화, 독재, 세습에서 파생되는 문제란 걸 알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두 번째로 침투했다가 잡힌 거예요.
한동안은 전향을 거부했어요. 자결하지 못한 것만 해도 배신자인데 전향까지 하면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이 위험해지니까요. 그러다가 2년쯤 뒤 남파 간첩으로 검거된 최정남을 만나 저희 가족이 이미 숙청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완전히 미련이 끊어졌죠. 오히려 ‘저 체제는 무너져야 한다, 그게 인민을 위한 일이다’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참 묘한 일이다. 대한민국 체제 전복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가 이제는 북한 체제 붕괴를 말한다. 책 출판과 각종 방송 출연 및 강연을 통해서다. 올해 4월에는 작정하고 유튜브 채널도 개설했다. ‘김동식 TV’다. 어디서 듣기 힘든 대남 공작과 김정은의 실체를 가감(加減) 없이 접할 수 있다. 반년 만에 2만 5000명의 구독자가 모였다. 강연 활동도 활발하다. 경찰, 국정원, 방첩사 등의 실무자들을 위한 특강과, 학생들의 요청으로 대학에도 출강한다. 인터뷰 중에도 강연 요청 전화가 이어졌다.
— 인공지능(AI) 시대에도 북한은 여전히 간첩을 핵심 전술로 여길까요?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여전히 많아요. 극비가 저장된 서버에 AI가 스스로 들어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꺼내 오진 못하잖아요. 기업의 기술을 빼서 중국 쪽으로 흘려보내는 일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개입해야 하고요.”
“손발 다 잘라 놨는데 뭘 가지고 어떻게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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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 1일 조선인민군 제11군단 지휘부를 방문한 김정은. 김동식 대표는 김정은의 이 방문은 러시아 추가 파병을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사진=조선중앙TV / 뉴시스 |
“북한 내부 인원은 조금 줄었을 겁니다. 대신 더 머리 좋은 놈들을 골라 특화시키겠죠. 인터넷 출현 당시에도 그랬어요. 해킹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선전·혼란을 일으키는 게 가능해지면서 10명 몫을 2명이 했죠. 한편 한국 내 간첩은 더 늘었을 거라 봐요. 제가 잡혔던 1995년 무렵에는 한국 내 활동 중인 공작조가 10개 정도, 조직당 40~60명에 최대 100명 수준이었는데, 이건 많을수록 좋거든요. 더 빨리 물들일 수 있으니까요.”
— 이런 상황에서 간첩 수사를 경찰이 전담하게 된 걸 어떻게 생각합니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어디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폐지해 버린 거겠죠.”
— 한국의 방첩(防諜)기관이 이렇게 된 데에 북한의 대남 전략이 어느 정도 작용한 걸까요?
“그렇다고 봐야죠. 북한이 줄곧 외쳤던 게 ‘국가보안법 철폐, 공안 기구 폐지’잖아요. 지령도 꾸준히 내려보내고요. 흔히들 간첩 대응책을 많이 묻는데, 지금 뭐 방법이 없어서 못 합니까? 손발 다 잘라 놨는데 뭘 가지고 어떻게 하겠어요?”
— 한국 사회가 북한을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북한의 정치 시스템, 권력 구조, 정책 결정 시스템을 너무 모릅니다. 자주 하는 소리가 북한 온건파·강경파 얘긴데, 북한에 그런 게 어딨습니까. 김정은 지시대로 안 움직이면 날아가는데요. 김정일이 선군(先軍)정치 얘기했다고 ‘군이 당보다 더 세다’ 하질 않나…. 모두 내부 권력 구조를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제대로 된 대북 정책이 나오려면 북한을 잘 알아야 합니다. 북한은 10~20년씩 그 안에서 굴러먹은 전문가 집단인데 우리는 신참 연구자한테 정책을 세우라고 하니 어디 당해 내겠습니까?
언론도 순 엉터리예요. 지난 11월 1일 한중(韓中) 회담이 있던 날, 김정은이 러시아 파병 부대를 찾아 ‘차력쇼’를 관람했다는 보도가 쏟아졌어요. 그런데 그 많은 기사 중 한 건도 김정은이 ‘왜’ 거길 갔는지는 안 썼더군요.”
“한국 사회는 실력보다 타이틀, 출신으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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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식 대표는 신간 《남조선 해방전쟁 프로젝트》에서 북한이 지난 80년간 전개해 온 다양한 형태의 대남 공작을 사건별로 조명했다. 사진=투나미스 |
“추가 파병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격려를 겸해서 추가 파병 준비가 얼마나 됐는지 확인하러 가지 않았을까요? 김정은이 움직일 땐 반드시 목적이 있어요. 그게 뭔지 읽어 내야 북한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 한국에서 북한학 박사를 땄죠. 북한에서 영웅 칭호까지 받은 사람이 한국인에게 북한을 배운 셈인데, 수업은 어땠습니까?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는 ‘남조선 정세 및 환경’이라는 과목이 있었어요. 쉽게 말하면 ‘남한학’이죠. 거기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를 객관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삼권분립, 원내교섭단체, 선거 제도까지 정확히 설명했죠. 반면 한국의 북한학은 교수들이 자기 생각만 늘어놓더군요. 사실이 아니라 관념을 가르치는 겁니다. 저는 1990년 초 김정일의 특별지시로 북한 학자들에게서 주체사상을 집중적으로 배웠는데, 한국의 대학원에서 접한 ‘주체사상연구’ 수업은 순 엉터리였어요. 학생들이 던지는 질문에 제가 다 답할 정도였습니다. 북한학이라는 게 그만큼 허술한 학문이라는 얘깁니다. 단적으로, 북한학을 제일 잘 아는 건 북한에서 온 사람인데, 지금 북한학 정교수 중 북한 출신이 있습니까? 교수진을 봐도 정치학, 사회학, 역사학 하다가 본류(本流)에 못 들어간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자기 밑에 뽑는 사람들은 전부 실력이 아닌 학연으로 뽑고요.”
그는 “한국 사회는 실력보다 타이틀, 출신으로 평가한다는 것을 대학원에서 절감했다”고 했다.
— 북한과 한국에서 산 세월이 반반인데, 언제 ‘나도 한국 사람 다 됐구나’ 하고 느낍니까?
“아직도 여긴 타향이에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데, 한국 사회에서는 섞일 수 있는 범위가 좀 제한돼 있다고 느껴요. 주로 공적(公的)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물론 친한 친구도 있긴 하지만, 친근하게 어울릴 집단이 없어요. 초·중·고라도 다녔으면 달랐을 텐데, 동창도 고향 친구도 없으니 늘 외롭죠. 한국 사람들의 다소 배타적인 면도 한몫했고요.”
“거길 다시 가는 미친 놈이 어딨나”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생을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않은 채 가명(假名)으로 살았다. ‘김동식’도 체포된 뒤부터 쓰기 시작한 가명이다.
— 김동식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습니까?
“과거 침투 당시 실존 인물로 신분을 위장해 지냈는데 이름이 ‘김돈식’이었어요. 도타울 돈(敦)자였죠. 1965년생이었고. 그때 썼던 이름을 그대로 쓸까 하다가, 흔치 않은 이름이라 중간 글자만 바꾼 겁니다.”
— 도타울 돈자를 쓰는 ‘65년생 김돈식’씨는 간첩에게 신분이 도용됐다는 사실을 모르겠죠.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꿈에도 모르겠죠. 뭘 하고 있는지는 글쎄요,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요.”(웃음)
— 전향한 간첩의 삶은 어떤가요? 가령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믿음을 줘야 한다는 부담감 같은 건 없었는지.
“굳이 ‘저를 믿어 주세요’ 하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남을 의식하지도 않았고, 눈치도 안 봤고요. 간혹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러든가 말든가 신경 안 썼어요.”
— 이중간첩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까?
“내가 다시 북으로 갈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북한을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는 거예요. 거기다 딱 한마디 했어요. ‘거길 다시 가는 미친놈이 어디 있냐’라고요. 물론 여름이면 지금이라도 수영해서 넘어갈 수는 있어요. 근데 안 가는 겁니다. 왜 갑니까?”
— 직파 간첩이라면 신체적인 조건은 당연히 좋아야겠고, 정신적 무장도 필요하죠. 스스로 보통 사람들보다 멘털이 강하다고 느낍니까?
“잘 참는 편이긴 해요. 부닥치는 문제에 해결 의지도 강한 편이고. 공작이라는 게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다 보니, 안 되면 되게 한다는 정신이랄까, 뭐 그런 게 있죠.”
“진짜야? 아빠 끝내준다”
— 2009년 황장엽 비서 암살을 위해 탈북민으로 위장한 공작원이 침투했었죠. 암살 위협을 받은 적은 없나요? 북한 입장에서 엄청난 반역자인데.
“없어요. 전쟁을 치를 것도 아니고, 나 하나 분풀이로 죽이겠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와서 이득 볼 게 없잖아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조심스럽긴 했는데, 이제는 다 컸고요.”
그는 한국에서 두 아들을 뒀다.
— 그때까진 아이들이 아버지의 정체(?)를 몰랐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둘이 중학생, 초등학생이었는데, 2013년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 출간 후 아내가 아이들에게 말해 줬어요.”
— 반응이 어땠다던가요?
“‘진짜야? 아빠 끝내준다’고 했다더군요. 애들은 역시 애들이구나 싶었죠.”
—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을 해본 적 있습니까?
“몇 차례 갔었죠.”
— 목숨 걸고 침투해 들어왔던 제주도를 가족들과 여행으로 가서 보는 기분은 어땠습니까?
“침투했던 지점에 가면 표지판이 붙어 있습니다. ‘남파 간첩 김동식 침투 지점’이라고요. 제주 해경에서 안보 교육 차원에서 해놨다더군요. 아내와 큰아이 군 휴가 나왔을 때 그 표지판 같이 보고 그랬죠. 좀 민망해서 경찰에게 철거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안 된대요. 거기 말고도 몇 군데 있어요. 묘지에도 있고, 정방폭포, 강화도, 분당 공원, 청주, 뭐 전적지가 여럿 돼요. 가끔 지인들이 전화 해서 ‘야, 여기 네 표지판 있다’ 그래요.”
— 그 지역을 혼자서 가보기도 합니까?
“일부러 혼자 찾아가면 정신이 좀 이상한 거 아닌가요?”
“공작에서 진다는 건 곧 죽음”
—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가장 바꾸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요?
“있다고 해도, 안 바뀌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직업적 성격일 수도 있는데, 공작은 현실이에요. 그것도 굉장히 냉엄한. 영화처럼 낭만 있지도 않아요.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예요. 어떻게 보면 스포츠 선수들은 되게 행복한 거예요. 오늘 지면 내일 이길 수도 있잖아요. 근데 공작에서 진다는 건 곧 죽음이에요. 그런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돌이킨다는 말에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매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고, 앞으로 잘 나아가는 방향을 설정하는 거죠.”
— 앞으로의 방향은 어떻게 설정했습니까?
“대한민국 안보를 위해 기여하는 겁니다. 지금 정부는 평화를 외치지만, 평화는 결코 말로 지켜지는 게 아니에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북한의 대남 공작을 너무 모르고, 경각심조차 없어요. ‘평화’라는 말에 취해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북한의 대남 적화 의지는 단 한 번도 꺾인 적이 없어요. 북한 체제가 존재하는 한, 대남 공작은 계속됩니다. 그 현실을 꾸준히 알리는 게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다음 세대를 위한 책임이기도 하고요. 이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숙명(宿命)에 가깝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