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을사조약 120주년

‘메이지유신’ 전문가 박훈 교수에게 듣는 한일 역사의 갈림길

“한일의 운명을 가른 것은 당시의 정치적 리더십”

  •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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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2000년 역사상 가장 형편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지리멸렬한 리더십”
⊙ “메이지 시대 리더들, ‘공공에 대한 헌신’ ‘외세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컨센서스 가져”
⊙ “세계사적으로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는 시대착오적”
⊙ “1898년은 조선이 잃어버린 기회… 의회 개설되어 이승만·안창호 등 1870년대생들이 활약할 기회 생겼다면?”
⊙ “도쿠가와 시대 이래 일본은 ‘상자 사회’… 자유주의적 전통 부재”
⊙ “메이지유신에서 보듯, 일본은 앞으로도 ‘연속하면서 변혁’하는 길을 갈 것”

朴薰
1966년생.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同 대학원 석사, 일본 도쿄대 문학박사 / 《한국일보》 《서울경제신문》 기자,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 연구위원, 국민대 조교수, 서울대 인문대 역사학부 교수 /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위험한 일본책》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 《일본이란 무엇인가》(역서), 《일본사 시민강좌》(공저)
사진=조선DB
어지러운 국내 정치,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보면서 여기저기서 ‘나라 안팎의 상황이 120년 전 을사조약(乙巳條約) 무렵과 같다’는 탄식이 나오고 있다. 금년은 을사조약 120주년이 되는 해다. 내년은 강화도조약 150주년이 되는 해다. 일본도, 우리도 외세의 포함(砲艦)외교에 의해서 개항을 강요당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양국의 군주였던 고종(高宗·1852~1919년. 재위 1864~1907년)과 메이지(明治) 천황(1852~1912년. 재위 1867~1912년)은 나이도, 재위 기간도 비슷하다. 하지만 고종은 망국(亡國)의 군주가 되어 메이지 천황의 신하가 되어버렸다. 반면에 메이지 천황 시절 일본은 국가의 생존을 걱정하던 처지에서 세계 5대 열강(列强)이니 7대 열강이니 하는 반열에 올라가게 됐다.
 
  추석을 앞두고 박훈(朴薰·59) 서울대 인문대학 역사학부 교수를 만난 것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박 교수는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등을 쓴 일본 근대사 전문가다. 근래에는 《위험한 일본책》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 등의 저서를 통해 근대 한일 역사를 비교하면서, 해방 이후의 한일 관계사, 오늘날의 한일 관계 등에 대해서도 활발하게 발언하고 있다. 박 교수와의 인터뷰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양국 역사가 엇갈린 이유, 일본의 흥기(興起)와 조선의 망국, 을사조약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해방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한일 관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일 양국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에도 시대 일본, 도시화율·식자율에서 세계 최고 수준”
 
도쿠가와 막부 시대 에도 니혼바시 풍경 그림. 도시화와 상업의 발달을 잘 보여준다.
  ― 19세기 말 20세기 초 사이에 한국과 일본의 운명이 그렇게 엇갈리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가장 포인트를 두는 부분은 정치적 요인입니다. 저는 역사에서 인간의 주체적인 움직임의 허용 범위를 넓게 보고, 인간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당시 양국 정치 리더십의 현격한 차이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책들에도 나오지만, 에도(江戶) 시대에 이미 일본은 경제·사회·문화 면에서도 조선을 훨씬 앞서가고 있었더군요.
 
  “경제적, 특히 상업과 화폐 경제 같은 데서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또 군사 지배였기 때문에 규율 같은 면에서도 우리와 완전히 달랐죠. 특히 당시 일본은 세계 최고의 도시화율을 자랑하는 국가였습니다. 18세기 일본은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에 전 인구의 5~6%가 살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유럽은 10만 명 이상의 도시에 2%의 인구가 거주했을 뿐입니다. 에도(江戶·지금의 도쿄)에 100만 명, 오사카(大阪)에 38만 명, 교토(京都)에 34만 명이 살았습니다. 인구 5만~10만 명 수준의 조카마치(城下町·영주의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방도시)가 즐비했습니다. 반면에 조선은 농업 수준의 발전은 상당했지만, 도시화율은 굉장히 떨어진 농촌 지향의 사회였습니다. 수도 한성의 인구가 30만 명이 안 됐고, 일본의 조카마치 수준의 도시라야 평양, 개성, 대구 등 손꼽을 정도였습니다.”
 
  ― 교수님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보면, 메이지유신은 무력(武力)에 의한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타도라는 정치 혁명 이전에 ‘지식정보 혁명’이었더군요.
 
  “에도 시대의 출판·인쇄 등은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식자율(識字率)은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정보의 유통, 즉 도서나 정보가 어느 계층까지 내려갔는지, 어느 지역까지 책을 봤는지 하는 것도 일본과 조선 간에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중화문명 받아들이면서도 도그마화하지 않아”
 
  ― 일본인들은 성리학 유일사상체계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는 것도 눈에 띄더군요.
 
  “난학(蘭學)을 중심으로 한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흡수했고, 중화(中華)문명을 열심히 흡수하면서도 상대화했습니다. 중화문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걸 도그마화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도쿠가와 시대 제일가는 성리학자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1618~1682년)가 ‘중국이 일본을 무력으로 복속시키려 한다면, 요순문무(堯舜文武)가 대장이 되어 온다고 하더라도 석화시(石火矢)로 깨부수는 것이 대의(大義)’라고 한 것은 유명한 얘기죠.”
 
  ― 그렇지요.
 
  “이렇게 다양한 객관적인 변수들이 있었지만, 결국 한국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것은 당시의 정치적 리더십이었습니다. 저는 악조건들이 있더라도 정치 리더들의 정치적 리더십과 또 국민들의 팔로우십이 작동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해방 후 여러 악조건하에서도 정치 리더들은 독재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리더십을 발휘했고, 국민들도 열심히 분발해 팔로우십을 보여주면서 기적을 이루었잖아요?”
 
  ― 맞습니다.
 
  “저는 구한말(舊韓末)에도 이런 노력이 있었으면 위기를 극복하는 게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럴 기회도, 시간도 있었는데, 고종을 비롯한 우리 리더들이 너무나도 형편없었어요. 2000년 역사상 가장 형편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정도의 지리멸렬한 리더십을 보여줬기 때문에 기회를 놓친 거죠. 일본에 먹히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역사상 가장 큰 국력 격차가 나버린 거죠.”
 

  ―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 리더들과 관련해 가장 인상적인 점은 무엇입니까.
 
  “‘공공(公共)에 대한 헌신’입니다. 당시의 플레이어들을 보면, 1850년대에 미국 매튜 페리 제독이 왔을 때에 20~30대에 불과했는데도, 애국심이라고 할까, ‘공공에 대한 헌신’이라고 할까, 이런 마인드가 아주 두드러졌던 것 같아요. 제가 너무 좋게 보는 건지는 몰라도, 그들 사이에도 권력 투쟁은 있었지만, 극단적인 사적(私的) 욕망을 향한 마음은 제어하는 그런 컨센서스가 있었어요.”
 
  ― 그렇죠.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외세가 눈앞에 강력하게 등장하는 상황에서도 당시 모든 정치 세력 간에 외세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컨센서스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막부나 번(藩)들에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다들 그건 꺼려했어요. 우리가 구한말 친러파, 친미파, 친청파, 친일파로 나뉘어 선(線)을 넘는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죠.”
 
 
  ‘독서하는 사무라이들’
 
박훈 교수의 저작들.
  ― 아까 에도 시대 일본에서는 중화문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걸 도그마화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에도 시대 일본에서는 성리학(주자학)은 물론 양명학(陽明學), 서양 관련 학문인 난학, 국수주의(國粹主義)적인 미토학(水戶學) 등의 국학(國學) 등 다양한 학문들이 공존했습니다. 이런 다양성이나 유연함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일본에서는 유학(儒學)이 조선보다 몇백 년 늦게 보급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18세기 후반에서야 사무라이들이 본격적으로 유학을 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슈의 메이린칸(明倫館) 같은 번교(藩校·에도 시대 말기 지방 번들이 세운 일종의 공립학교-기자 주)들도 그때 초보적인 게 세워졌다가 19세기 중반이 되어 개축(改築)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합니다. 이 무렵 유학은 조선에서는 비록 정통 학문이지만 이미 한풀 꺾이고 더 나아가 사회적 병폐로까지 변질되었지만, 일본 사무라이들한테는 뉴트렌드에 가까운 신흥 학문이었어요. 이들 ‘독서하는 사무라이’들이 주자학을 익히면서 ‘사(士)’라는 정체성(正體性)을 깨닫고, 페리 내항 이후 정치운동에 뛰어들면서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된 거죠.”
 
  ― 그렇군요.
 
  “원래 일본에서 유학은 정치권력과 연결된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무라이는 공부를 안 했으니까요. 유학은 사무라이 밖에 있는 유자(儒者)라고 하는 특수 계층들이 하는 공부였기 때문에 권력과의 연계성이 떨어졌죠. 일본에서는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하지 않았잖아요?”
 
 
  “학문이 정치와 구별돼”
 
  ― 그렇죠.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성리학(주자학)이 됐든 뭐가 됐든, 그게 어떤 학문 외적(外的)인 권위를 가지고 사람을 구속할 수 없었어요. 이 때문에 항상 상대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었죠. 주자학이 제일 세긴 했지만, 주자학을 하다가 양명학으로 옮겼다가 다시 주자학을 하는 사람도 많았고, 주자학자 중에도 탁월한 난학자들이 많았어요. 또 국학과 주자학을 믹스하기도 했는데, 미토학은 ‘주자학의 국학화’ 혹은 ‘국학의 주자학화’라고 할 만한 것이었죠. 조선 선비들이 보면 완전히 사문난적(斯文亂賊)에 가까운 것이었죠.
 
  하여튼 학문이 정치와 구별돼 있었다는 것은 지금도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보면 정치가 학문을 억압하려고 하고, 역사관도 다 규정하려고 하잖아요?”
 
  ― 정말 큰일 날 일이죠.
 
  “권력으로 사상이나 학문을 단일화시키고 줄 세우려 한 발상이 조선을 망하게 한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지만, 일본은 처음부터 학문으로 출발한 정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가지 못한 것이죠.”
 
 
  “외국에 대한 관심, 위기의식에서 나와”
 
  ―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등 교수님의 저작들을 보면, 일본은 에도 시대부터 외국에 대한 관심이 무척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본 언론사들은 중동이나 동남아 국가 등에까지 수십 명의 특파원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외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이런 관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에도 시대 후반기를 중심으로 말씀드리면, 역시 위기의식이겠지요. 저는 이걸 ‘과장된 위기의식’이라고 합니다만, 어쨌든 위기감이 들면 당연히 상대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 ‘과장된 위기의식’이요?
 
  “실제적으로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위협을 관념적으로 과장한다는 얘기지요. 그 위기의 근원이라는 게 중국이나 조선은 아니었고, 중국이나 조선은 일본이 꽤 아는 상대들이었으니까요.”
 
  ― 그럼 위기의 근원은 어디였습니까.
 
  “역시 서양이죠. 일본은 전국(戰國) 시대의 경험도 있고요. 전국 시대에 포르투갈인이나 스페인인들이 일본으로 많이 왔었고, 일본인들도 동남아로 많이 나갔잖아요. 곳곳에 니혼마치(日本町)라고 하는 일본인 타운도 만들 정도로. 당시 무역이나 인적 교류, 정치적 교류가 엄청났거든요.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이전에 이미 그런 경험을 해봤어요.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본 열도(列島)가 밑으로 쫙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나가사키(長崎) 같은 데서 보면, 홍콩·마카오·동남아 같은 곳을 쉽게 인식할 수 있었어요. 우리 부산에서는 그런 곳들이 별세계(別世界) 같지만 말입니다. 이 시기에 일본이 서양 세계를 경험했던 것을 ‘제1차 웨스턴 임팩트’라고 하는데, 그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 그런 접촉이 도쿠가와 시대의 쇄국(鎖國) 정책으로 단절되었지요.
 
  “나가사키 데지마(出島)에 네덜란드인만 들어올 수 있게 했는데, 이게 또 젖줄이 되었지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에도 시대에 출판 문화가 엄청나게 발전했던 것도 외국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에도 시대에 소설로 먹고사는 전업 작가가 나올 정도였던 걸 보면, 기가 막히더군요.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막부 말기의 식자율이 30% 이상이었다니까, 전 세계적으로도 아주 높은 수준이었죠. 이것도 도시에 인구가 집중돼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죠.”
 
 
  ‘표변’할 수 있는 유연성
 
1864년 시모노세키 전쟁 당시 조슈의 포대를 점령한 서양연합군. 이후 조슈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대양이’로 ‘표변’한다.
  ― 그것이 비록 과장된 것이었다고는 해도 일본 지배층인 사무라이들이 ‘위기의식’을 가졌던 것은 역시 그들이 기본적으로 무사(武士), 군인이었던 데서 비롯된 걸로 봐야겠지요?
 
  “그렇죠. 무사란 전투에서의 승패가 모든 것인 사람들이니까요. 또 13세기 말 몽골의 침략을 제외하면, 역사상 한 번도 외국의 침략을 받은 적이 없는 나라가 서양의 위협 앞에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에 놓였다는 인식이 위기의식을 더 자극한 것 같아요.”
 
  당초 에도 막부 말기에 서양 세력이 밀려오자 각지의 소위 지사(志士)들은 너도나도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다. ‘천황을 받들어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구호였다. 하지만 1863~1864년 조슈가 서양 5개국 함대와 1862년 사쓰마(薩摩)번이 영국과 무력 충돌을 벌였다가 참패한 후, 이들은 서양을 따라 배우자는 쪽으로 입장을 급선회한다. 칼부림이나 하면서 눈앞의 서양인들을 배척하는 것은 ‘소(小)양이’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어 나라의 독립을 보전하고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대(大)양이’라는 논리였다. 박훈 교수는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에서 이를 ‘표변(豹變)’이라고 표현하면서 “지도자는 표변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이 그렇게 ‘표변’할 수 있었던 유연성도 역시 무사 문화와 관련이 있는 걸까요?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박살이 나니까 거기에서 바로 현실 인식을 하게 된 거죠. 사무라이에게는 전쟁의 승패가 모든 것인데, 전쟁에서 졌으면 할 말이 없는 거죠. 그러면 다른 방책을 강구해야죠.”
 
  ― 그렇겠지요.
 
  “그리고 사실 상층부의 양이론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양이’라는 게 그냥 정치적 전술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어요. 어차피 서양과 경쟁하고 전쟁하려면 농업만으로는 안 되고 무역을 통해 부(富)를 획득해야 한다는 얘기들을 자기들끼리는 많이 했어요. 막부가 천황의 칙허(勅許) 없이 서양과 조약을 맺었다고 공격한 것은 다 막부를 때리기 위해 주장했던 것들이었죠. 그러니 메이지유신을 하자마자 바로 문명개화를 선언한 것이죠.”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은 쇼카손주쿠에서 이토 히로부미 등 메이지유신의 리더들을 길러냈다. 사진=배진영
  메이지유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년)이다. 조슈의 젊은 사무라이로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사설 학당에서 ‘유신 3걸’ 중 하나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가쓰라 고로로(桂小五郎)라고도 함. 1833~1877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년), ‘일본 육군의 대부(代父)’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년) 등의 제자들을 길러낸 인물이다. 국수주의적 입장에서 대외 팽창주의를 주장했던 그는 아베 신조(安倍晋三·1954~2022년) 전 일본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박훈 교수의 책들, 특히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에 요시다 쇼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 근래 일본에서는 쇼인의 역할이 메이지유신 이후 권력을 잡은 조슈 출신들에 의해 굉장히 과장됐다, 그래서 근래에는 교과서에서도 쇼인이 퇴출되었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역사 속 인물이란 실체와 달리 축소되거나 과장되기 마련이죠.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상이 있기 때문에 자꾸 재해석되고 소환되잖아요. 쇼인이나 사카모토 료마(板本龍馬·1836~1867년) 모두 서른 살 전후에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대단해야 얼마나 대단했겠냐’ 싶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수정주의적인 견해도 나오는 것이죠. 그들이 어느 정도 과장된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로 별거 없다면 과장했겠습니까?”
 
 
  ‘일본의 박정희’ 오쿠보 도시미치
 
메이지유신 후 근대화 작업을 이끌었던 오쿠보 도시미치.
  ― 그럴 만한 근거는 있다는 얘긴가요.
 
  “그렇죠. 특히 쇼인 같은 경우는 그가 남긴 저작들이 있잖아요. 쇼인의 저작들을 보면, 그가 열 살 때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깊이와 통찰이 남다르고 ‘이걸 읽는 당시의 청년들의 가슴을 정말 격동시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쇼인이 당시 전국적인 지명도까지는 아니어도 교토나 시코쿠(四國), 간사이(關西) 지역의 이른바 지사들한테는 꽤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료마도 마찬가지고요. 쇼인이 ‘독립불기(獨立不羈)한 지 3000년이 된 대일본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의 속박을 받는 것을, 혈기가 있는 자가 보고도 참을 수 있겠는가. 나폴레옹을 일으켜 프라이하잇(Vrijheid·네덜란드어로 ‘자유’)이라고 부르짖지 않으면 배 속의 갑갑함을 다스릴 수가 없다’ 한 것을 보면, 보통 선동가가 아닙니다.”
 
  ― 메이지유신의 인물들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좋아한다기보다 제일로 평가하는 사람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1878년. 사쓰마 출신의 정치인으로 ‘유신 3걸’ 중 한 사람-기자 주)입니다. 그는 손에 피와 땀을 묻히면서 일을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1828~1877년) 같은 로망은 없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재상(鐵血宰相)’이었지만, 근대 일본의 인프라는 거의 그의 손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저는 오쿠보를 ‘일본의 박정희(朴正熙)’라고 말하곤 합니다. 오쿠보가 암살당한 후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인데, 일본은 오쿠보-이토 라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화와 민족주의
 
요코스카에 있는 페리내항기념비. 글씨를 쓴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로, 페리 내항을 근대화의 계기로 만든 일본인들의 자신감이 엿보인다. 사진=배진영
  ― 일본의 경우 신정(新正)을 지키는 것이나 한의학(漢醫學)이 거의 사라진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서양화, 근대화가 뿌리내린 것 같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일제(日帝) 시대 이후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근대화를 추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와서는 ‘전근대로의 회귀(回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근대화에서 역행(逆行)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요.
 
  “이른바 모던 에이지(modern age)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과 모더나이제이션(modernization)을 두 기둥으로 합니다. 일본은 메이지 정부가 일본인의 힘으로 정권을 바꾸고 근대화를 추진했으니, 이 둘이 행복하게 결합한 것이죠. 거기에 외세의 개입이나 민족적 자존심의 손상은 없었어요. 우리는 강화도조약이라고 하면 ‘일본에 당했다’는 생각부터 하지만, 일본인들은 페리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일본인들은 ‘페리 덕분에 일본이 근대화를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일본이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죠.”
 
  ― 그렇죠. 요코스카(橫須賀)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가 글씨를 쓴 ‘페리내항기념비’나 하코다테(函館)에 있는 페리 동상을 보면 그런 일본인들의 기분이 느껴지더군요.
 
  “우리는 불행히도 내셔널리즘과 모더나이제이션이 행복하게 결합하지 못했어요. 구한말 모더나이제이션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결국 내셔널리즘을 지키지 못했다는 정치적 비판을 뒤집어쓰게 되었죠. ‘개화파의 몰락’ 혹은 ‘개화파의 친일화’죠.
 
  그러다 보니 역사 서술이나 역사 인식에서 근대화는 ‘하긴 해야 하는데 뭔가 결함이 있는 것,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죠. 이에 근대화의 전반적인 수용을 주저하게 된 거고. 그 틈을 민족주의에 기댄 사람들이 공격하면, 방어를 못 하는 거예요. 그걸 못 하니까 조선에 대한 애잔한 동경, 고종에 대한 현창(顯彰) 같은 게 나오는 것이죠. 고종은 제가 볼 때는 2000년래 최대의 암군(暗君)인데도, 부인이 일본놈에게 죽고 본인은 일본에 나라를 뺏겼다는 민족주의적 감정 때문에 평가를 받고 있는 거예요.”
 
 
  “일본, 1905년에야 조선 침략으로 전환”
 
  박훈 교수의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의 역사 서술에서는 항상 일본을 악마화한다. 결국 한국을 집어삼킨 일본의 행위를 소급적용하는 사고습관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군들 한국병합에 분노하지 않으랴. 그러나 모든 시기와 사건에서 일본은 항상 침략적이었다고 무작정 전제하는 것은 역사를 규탄의 재료로만 삼는 자세다. 이런 역사 교육은 맹목적인 적개심만 갖게 해 우리의 현명한 대일 태도를 방해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얻어야 하는 것은 규탄만이 아니라 지혜다. 게다가 일방적인 일본의 악마화는 다른 세력들, 예를 들어 청이나 러시아 세력에 대한 비판을 무디게 한다. 더욱 심각한 점은 수많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 야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우리 자신, 특히 당시의 위정자들을 민족주의 혹은 반일이라는 이름으로 감싸는 것이다. 아마도 2000년 한국 역사상 가장 무능했을 당시의 위정자들을 치켜세우는 최근의 일부 논의는 그 적나라한 폐해다.〉
 
  ― 교수님 책을 보면, 일본이 강화도조약 이후 일관된 그랜드 디자인을 갖고 조선 침략을 추진할 의지나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일본이 조선 침략으로 본격적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시점은 언제라고 봐야 할까요? 역시 청일 전쟁일까요?
 
  “저는 1905년이라고 봅니다. 일본은 1895년까지는 자기들이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을 온전히 소유하거나 컨트롤할 능력이 없다고 봤던 것 같아요. 실제로 청일 전쟁 후에 삼국간섭(1895년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함께 시모노세키조약으로 할양받은 랴오둥반도를 중국에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해 성사시킨 사건)이 일어나잖아요? 이후 일본 정부 회의에서는 조선에 대해서도 방기(放棄) 방침을 표명합니다. 일본이 조선에 간섭할 능력이 없고, 야욕이 덜하던 이 시기에 개화파가 자주적인 개혁을 시작해 그 방향으로 15년 정도 쭉 해나갔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쓸데없는 얘기고….”
 
 
  ‘친일 근대화’에서 ‘반일 근대화’로
 
독일식 군복 차림의 고종.
  ― 고종에게 씨알이나 먹혔겠습니까.
 
  “결국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겼지요. 아시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개화파들은 일본을 지지했습니다. 안중근(安重根·1879~1910년)의 〈동양평화론〉에도 일본에 대한 기대가 적혀 있어요. ‘나도 일본에 기대를 걸었는데, 러시아를 깨고 정말 한국을 개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는데 어찌하여 외교권을 뺏으면서 이런 헛짓을 하느냐’는 게 안중근의 주장이잖아요? 한국 개화파 입장에서는 이게 정확한 비판이었던 거죠.”
 
  ― 한국의 개화파 입장에서는 배신감이 컸겠지요.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된 것도 그때까지 일본에 기대를 걸었던 이들이 일본을 규탄하면서 집결했기 때문입니다. ‘친일 근대화’에서 ‘반일(反日) 근대화’로 돌아서게 된 거죠. 저는 대한민국의 기원이 신민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 문제를 놓고 일본 사람들과 얘기할 때에도 ‘강화도조약 때부터 너희가 계속 침략을 꾀했다’라고 하기보다는 ‘일본이 한국의 개화파를 도와주려 하기도 했다’라는 걸 인정하면서 ‘1905년에 너희가 한국 개화파를 배신한 게 문제’라고 하면, 대화가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는 시대착오적”
 

  ― 일본에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요.
 
  “일본이 1905년에 러일 전쟁에서 이기고 조선이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었을 때, 갑신정변 이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년) 등이 쭉 지지하고 연대(連帶)해 왔던 한국의 개화파들을 좀 더 배려했으면 어땠을까요? 해방 후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군대를 주둔시키고 일본공사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국 근대화 정권을 부조(扶助)하는 쪽으로 정책을 펼쳤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으로 조선을 보호국화한 것은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이토는 이런 생각을 조금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군부(軍部)의 야마가타 아리토모나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1855~1911년) 외상 등이 폭주하기 시작한 거죠. 조선이 너무 약하니까, 그냥 무력으로 점령하면 간단하게 될 줄 알았던 거죠. 사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세계사적으로 보면, 아주 시대착오적인 것이었어요.”
 
  ―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식민지화는 대개 1880년대 이전에 이루어졌습니다. 1880년대 이후 세계 각지에서는 민족주의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조선도 마찬가지였어요. 또 세계는 이미 ‘제국 해체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어요. 조선이 식민지화된 지 불과 20~30년 사이에 식민지의 자치권이 확대되거나 독립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어요. 그런데 일본은 장기간에 걸쳐 역사를 공유하고 교류를 해온 같은 문화권의 이웃 나라를 식민지로 삼은 것이죠. 35년밖에 못 갈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것이죠.”
 
 
  ‘근대’와 ‘민족’
 
  ― 근래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는 데까지는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이토는 그때 이미 나이가 68세였고, 정계에서 영향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대세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안중근의 행위는 우리에게 하나의 상징 자본으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민족이 근대화를 원했고,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배우려고 했지만, 일본 밑에 들어가서 일본인이 되어서 하는 근대화는 거부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일제하에서 경제적 발전이 있었고, 그들이 남겨놓은 인프라들이 해방 후 우리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해도, 일제의 지배 아래서 우리 민족이 순응만 했다면, 민족의 체면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모더나이제이션의 두 축이 ‘근대’와 ‘민족’인데, ‘민족’만을 추구하다 보면 ‘근대’에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북한처럼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근대만 추구하다가 민족이라는 아이덴티티가 사라져 버리면, 그것도 모더나이제이션이 아닌 거죠. 근대사(近代史)의 주체는 민족이고, 근대의 목적은 근대화입니다. 모더나이제이션은 민족이 주체가 되어 근대화를 추진할 때 완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과 ‘근대’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민족, 민족 하는 사람들은 민족에만 너무 매달리는 거죠. 반면에 이완용(李完用·1858~1926년)이나 윤치호(尹致昊·1865~1945년)처럼 개화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사람들은 ‘근대’에만 매몰되었던 것이고.”
 
 
  조선의 잃어버린 기회, 1898년
 
한성감옥 시절의 이승만(왼쪽 서 있는 사람). 이상재(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 아까 구한말 조선에 그래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기회가 있었다면 언제인가요.
 
  “갑신정변, 갑오개혁, 그리고 삼국간섭 이후 등이 있겠지만, 저는 1898년이라고 생각합니다.”
 
  ― 어떤 의미에서 1898년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1898년에 일본과 러시아는 니시-로젠 협정을 맺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고 과도한 개입을 하지 않기로 약속합니다. 일종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진 것이죠. 그사이에 조선에서도 유교적 세계관과는 결을 달리하는 청년들이 나타나지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가한 젊은 활동가들은 한국사에서 처음 출현한 근대인들이었습니다. 만민공동회의 활동은 당시 정부 고관들까지 참여한 관민(官民) 일체의 개혁운동이었습니다. 이 결과 당시 그해 11월 5일 중추원(中樞院)을 개편해 의회를 설립한다는 ‘중추원 신관제(新官制)’, 즉 의회설립법을 공포하기에 이르죠. 고종도 일단 승낙을 했는데, 의회 개원(開院) 전날인 11월 4일 밤 친위(親衛)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의회 설립은 무산됩니다.”
 
  ― 그랬지요.
 
  “그러면서 이승만(李承晩·1875~ 1965년)은 감옥에 갇히고, 안창호(安昌浩·1878~1938년)는 미국으로 건너가고, 김구(金九·1876~1949년)는 입산하고, 안중근은 고향에 처박히고, 서재필(徐載弼·1864~1951년)도 미국으로 돌아가잖아요?
 
  이후 고종은 1899년에 시대착오적인 ‘대한국제(大韓國制)’를 반포(頒布), 전제(專制) 정치를 선언하면서 다 말아먹지요. 고종이 이런 망동(妄動)을 하지 않았다면, 1910년경 조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때쯤이면 30대 중반이 된 이승만, 안창호, 김구, 안중근 같은 분들이 의회에서 활약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 상쾌한 상상이네요.
 
  “어쩌면 이승만, 윤치호, 이상재(李商在·1850~1927년) 같은 분들이 힘을 모아서 입헌군주정(立憲君主政)을 수립하거나 우리 손으로 왕조를 무너뜨렸을 수도 있었겠지요. 이랬다면 지금과 같은 ‘조선 향수(鄕愁)’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옛날에는 갑신정변 실패가 아쉬웠는데, 요즘은 갑오개혁과 1898년이 참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런 면에서 고종의 반동(反動)은 비난받아야 합니다.”
 
  ― 구한말 개화파 중에서 ‘인물이다’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승만의 식견을 보면, ‘이건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싶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 크게 활약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김옥균(金玉均·1851~1894년)은 비상하기는 하지만, 너무 래디컬했고…. 식견을 보면 역시 윤치호인데, 정치가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서재필도 서생(書生)에 가깝고…. 일본의 기도 다카요시나 오쿠보 도시미치 같은 인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상자 사회’ 일본
 
  ― 일본 근현대사를 보면 보수주의의 전통은 보이는데, 제대로 된 자유주의 전통은 보이지 않는 것이 흥미롭더군요.
 
  “제가 보기에도 그런 측면은 한국보다도 없는 것 같아요. 메이지 초기에 자유주의 사조를 열심히 받아들였던 나카에 조민(中江兆民·1847~1901년) 같은 사람들은 있었는데, 자유주의적 전통은 보기 힘들어요.”
 
  ― 왜 이런 것일까요.
 
  “도쿠가와 시대(17~19세기)에 만들어진 체제의 사회적 특질이 모더나이제이션으로 변용을 겪으면서도 강인하게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런 점에서는 한국이나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 자유주의 전통의 부재(不在)가 도쿠가와 시대에 기원한다는 말씀인가요.
 
  “도쿠가와 시대라는 건 완전히 자유주의하고 관련이 없는 사회거든요.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은 수백 개의 상자가 위아래로 서열적으로 쌓여 있고, 모두 그 상자 안에서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였어요. 각각의 나와바리에 딱 갇힌, 그 안의 규율, 매뉴얼, 관례, 신분, 이에(家·집안), 직업, 지역에 매우 고착된 사회였습니다. 조선은 거기에 비하면 유동성이 큰 사회였습니다. 미국의 그레고리 헨더슨이 말한 것처럼 한국이 ‘소용돌이 사회’라면 일본은 ‘상자 사회’였어요. 그런 사회에서 자유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할 수 있겠죠.”
 

  ― 그럼 일본은 개인주의, 자유주의와는 영 인연이 없는 나라인가요.
 
  “일본은 개인주의는 없지만 고립주의는 허용합니다.”
 
  ― 무슨 의미인가요.
 
  “사회나 공동체보다 개인을 우위에 두고, 사회에 대한 개인의 비판, 저항, 이탈을 용인하는 것을 개인주의라고 한다면, 일본은 개인주의가 매우 희박한 사회입니다. ‘공기’를 읽고서 그에 맞춰 말하거나 행동하지요. 하지만 그 속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긴장과 반발의 에너지를 무마하는 장치가 ‘고립의 허용’인 거죠. ‘오타쿠’가 그 예(例)입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개인주의나 자유주의라고 하기는 좀 어렵겠지만, 뭔가 개인의 활동 범위나 주장 영역이 넓은 사회죠. 한국의 다이너미즘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이게 발전을 추동(推動)한 측면도 있어요.”
 
 
  ‘연속하면서 변혁’하는 나라 일본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일본인들은 요시다 쇼인(왼쪽)이나 사카모토 료마를 소환한다.
  박훈 교수는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들은 근현대 일본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메이지유신을 불러낸다. 그 방식은 당연히 일정하지 않다. 민족주의자들은 요시다 쇼인을 끄집어내며 강렬한 일본 정신을 찬양하고, 국제주의자들은 사카모토 료마를 상기하며 그의 오픈 마인드를 강조한다. 메이지유신은 지금도 일본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역사 기억 투쟁의 주전장 중 하나다.〉
 
  ― 앞으로 일본은 쇼인의 길을 갈 것 같습니까, 료마의 길을 갈 것 같습니까.
 
  “미래학자가 답해야 될 질문인데… 사실 그 두 사람의 차이가 실체적으로 그렇게 컸는지는 저도 의문입니다. 제가 하려는 얘기는 그들을 소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죠. 손정의(孫正義) 소프트뱅크 회장처럼 국제화를 지향하는 사람은 료마를, 아베 신조처럼 내셔널리즘을 주장하는 사람은 쇼인을 소환하는 거죠. 하지만 저는 일본이 어느 길을 가든, 지금까지 추진해 온 ‘연속하면서 변혁’하는 패턴을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역사를 보면 ‘단절’이라는 게 없잖아요.”
 
  ― 그렇더군요.
 
  “대표적인 게 천황이죠. 메이지유신이라는 그 거대한 변혁을 수행하면서도 기존 사회의 어떤 부분은 잔존시켰고 연속성을 중시했지요. 메이지유신의 과정은 격렬하지 않고 매우 타협적이었습니다. 우리처럼 무슨 대규모 집회 시위가 일어나서 사회를 뒤집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지요.
 
  우리는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을 좋은 거로 알지만, 사실 피를 덜 흘리면서 변혁하는 메이지유신 같은 패턴도 인류의 한 유산으로서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앞으로도 그 길로 갈 것입니다.”
 
 
  과거사 문제
 
  ― 실제로 일제 식민 시대를 경험했던 분들이 사회의 주역이었던 1960~1980년대보다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했던 이들이 사회의 주역이 된 1990년대 이후에 반일 감정이 더 심해지고, 걸핏하면 ‘죽창가(竹槍歌)’가 나오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실제로 체험한 사람은 인생이라든가 경험이라는 게 얼마나 다채롭고 복잡한 것인지를 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관념적으로 단순화시켜 생각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또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 사회의 ‘표 싸움’도 이유로 꼽을 수 있겠지요.”
 
  ― ‘표 싸움’이요?
 
  “시청률, 신문 판매 부수, 시장, 선거 같은 것들이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됐잖습니까? ‘반일 비즈니스’를 하면 장사가 잘되지요. 저도 일본 때리는 책을 쓰면 아주 잘 팔릴 겁니다. 물론 ‘반일 비즈니스’가 그렇게 잘되는 것은 전부터 오랫동안 교육이나 드라마, 영화를 통해 ‘일본 악마화’를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 일본 천황과 역대 총리들이 여러 차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과를 했음에도 한국인들은 여전히 ‘진정성이 없다’거나 아예 ‘일본은 사과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요.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한 50번 넘게 천황, 의회, 총리 레벨에서 사과를 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국가 간의 사과에서 ‘진정성’의 측량이 가능한 건가요? 고노(河野) 담화(1993년), 무라야마(村山) 담화(1995년), 간 나오토(管直人) 담화(2010년), 아베 담화(2015년) 등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사과를 담고 있습니다. 그때쯤 과거사 문제는 봉합이 됐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우리 역사상 특이한 국가”
 
  ― 하지만 이후 일본의 공기가 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우리는 일본에 사과를 더 요구하기보다는 과거에 했던 사과들을 인정하면서 ‘그대로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 무슨 의미입니까.
 
  “예컨대 각료 중에서 과거사에 대해 딴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1980~9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자르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독일에서는 과거사와 연관된 망언(妄言)을 하면 큰일이 나는데, 일본에서는 망언을 해도 아무런 조치가 따르지 않잖아요?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니 우리 국민들은 ‘일본인은 한 입으로 두 말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후 아직은 일본에 대해 날을 안 세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에 있는 이들의 발언을 보면 그들의 ‘혼네(本音·진심)’는 결국 ‘반미(反美)·반일·친중(親中)·종북(從北)’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에서도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이 얼마 전 ‘한국은 중국으로 슬라이딩하고 있는 나라’라고 표현했더군요.
 
  “큰일입니다. 일본에서도 점점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대한민국은 해양 문명을 받아들이고, 중화 질서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상 특이한 국가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반이 그만큼 약하다는 얘기도 되겠죠. 역사적인 구속성(拘束性)에서 보면 중국 또는 대륙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럴수록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외부 세력과의 협조·연계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앞마당을 같이 쓰는 이웃’이라고 했는데, 누가 제공했는지 모르겠지만 참 좋은 워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조가 오래 지속되길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지난 9월 22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經濟新聞)》에는 트럼프가 한국과 대만을 동북아방위선(신애치슨라인)에서 제외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석 기사가 실렸다. 박훈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한국인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의 역사》 속 일본이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평온이 깨지고 ‘쇼와 군국주의’를 거쳐 태평양 전쟁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회 체제가 한 세대 정도 유지되면 사람들은 그게 영원할 줄 안다. (중략)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이 결코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시작된 지 얼마 안 됐고, 바로 앞에 낭떠러지나 갈림길이 있을지 모른다는, 역사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키울 필요가 있다. 전쟁 발발에 대한 감각도 마찬가지다.〉
 
  ― 전 세계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자유주의 세계질서가 무너지면서 ‘정글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방공(防空)훈련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중일(中日) 전쟁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일본이 중국과 전쟁할 줄 상상이나 했나’고 했더니 학생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 뭐라고 하던가요?
 
  “‘방공호 들어가면 머리는 감을 수 있나요?’라고 하더군요. 이런 상황이니 정말 정말 걱정입니다. 앞으로 10년이나 버틸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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