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성신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과 함께 〈오건조약청체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 보도로 반일 여론에 불 댕겨
⊙ 《대한매일신문》, 장지연 구속 후 〈오건조약청체전말〉 전재, 번역해서 해외로도 널리 전파
⊙ 이토 히로부미 방한 초에는 경계심 없이 단순 사실 보도
⊙ 일진회, “우방의 지도에 따라 문명을 진보시키고 독립을 유지함이 좋을 것”
⊙ “국권 회복 못 하면 2천만 동포가 모두 소나 말과 같이 부림을 당하고 도축을 당할 것”(《대한매일신보》)
鄭晉錫
1939년생. 중앙대 영문학과 졸업, 영국 런던대 정경대학(LSE) 언론학 박사 /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언론중재위 위원, 방송위 위원, LG상남언론재단 이사, 한국외국어대 언론학 교수, 同 사회과학대학장, 정책과학대학원장 역임 / 저서 《한국언론연대기》 《항일민족언론인 양기탁》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선각자 서재필》 《언론조선총독부》 등
⊙ 《대한매일신문》, 장지연 구속 후 〈오건조약청체전말〉 전재, 번역해서 해외로도 널리 전파
⊙ 이토 히로부미 방한 초에는 경계심 없이 단순 사실 보도
⊙ 일진회, “우방의 지도에 따라 문명을 진보시키고 독립을 유지함이 좋을 것”
⊙ “국권 회복 못 하면 2천만 동포가 모두 소나 말과 같이 부림을 당하고 도축을 당할 것”(《대한매일신보》)
鄭晉錫
1939년생. 중앙대 영문학과 졸업, 영국 런던대 정경대학(LSE) 언론학 박사 /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언론중재위 위원, 방송위 위원, LG상남언론재단 이사, 한국외국어대 언론학 교수, 同 사회과학대학장, 정책과학대학원장 역임 / 저서 《한국언론연대기》 《항일민족언론인 양기탁》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선각자 서재필》 《언론조선총독부》 등

- 사설 〈시일야방성대곡〉과 기사 〈오건조약청체전말〉이 실린 1905년 11월 20일 자 《황성신문》과 장지연.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당시 언론은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시야가 좁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침략의 구체적인 방안을 실천으로 옮기려고 한국에 오던 때까지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시일야방성대곡〉은 당시 언론의 무지를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관민 상하가 크게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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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히로부미의 방한 사실을 알리는 1905년 11월 7일 자 《대한매일신보》. |
그러나 세상일은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뜻밖에 5조항의 조약은 무슨 연유에서 나왔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할 징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의 원래의 뜻은 어디에 있었던가.〉
논설은 국제적인 세력 균형이 크게 요동치는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고 이토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굳게 부식할 방략을” 제시할 것으로 잘못 판단하고 항구(부산)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고 지적한다. 당시 대한제국은 군국주의 일본의 급격한 세력 확장에 대응할 능력이 크게 부족한 상태였다. 언론도 이토의 한국을 향한 자신감 넘치는 침략의 발걸음이 가진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1905년 11월 7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다음 내용으로 이토의 방한을 알렸다.
〈대사(大使)영접 일본국 위문대사 이등 후작이 본월 8일경 부산항에 도착할 것인데 그가 상경할 때에 소승(所乘)할 어차(御車) 1량을 이달 7일 부산항에 미리 대기할 것이며 수행원 일행이 상경할 시에는 특별 차 1대와 합쳐 3대를 예비하도록 예식원(禮式院·대한제국 시기 대외 교섭과 예식, 황제의 친서·국서를 담당하던 궁내부 산하 관서-필자 주)에서 농부(農部)에 연락하였다더라.〉
이토의 방한에 예식원은 그를 최상의 예우를 갖추어 부산에서부터 영접하고 있다. 신문 어디를 봐도 비판적 시각은 보이지 않는다.
사태 파악 미흡한 예고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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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도착한 사실을 알리는 1905년 11월 11일 자 《대한매일신보》. |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정동 손탁호텔에 들어갈 때 말 탄 기병대 병정이 좌우로 나열했다. 경무청 총순(總巡·판임관으로 순검을 지휘하는 직책) 2명이 말을 타고 이토가 탄 가마를 선도하고 다른 2명은 가마 뒤에서 호텔까지 호위했는데 정거장에서 호텔에 이르기까지 도로 좌우에는 매 50보마다 순검 1인씩 나열 경위(警衛)하면서 엄숙하게 경례했다. 이토가 황제를 폐견(陛見)할 때와 통상 출입할 때, 서울을 떠나 귀국할 때에도 호송절차는 동일하다.〉(〈대사 영접절차〉, 《황성신문》, 11월 10일 잡보)
〈이처럼 정부는 이토에게 극진 최상의 예우를 했다. 그런 와중에 8일 11시에는 일본 기병이 대포 11문을 끌고 종로에서 광화문까지 행진하자, 관람객이 구름처럼(雲屯) 모였다. 일본군이 무력(武力)으로 을사늑약을 강제하기 위한 시위를 벌이는 모습을 군중이 구경한 것이다.〉(〈대포순유(帶砲巡遊)〉, 《황성신문》, 11월 10일 잡보)
《대한매일신보》 11일 자 1면에는 〈伊藤候(이토 후작)〉라는 논설이 실렸다. 이토의 방문은 “일본이 한국을 지휘할 날이 머지않았을 것이라”는 일본 신문 보도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약간 비판적 논평을 가했다. 같은 날 잡보란에는 토막 기사 3건이 실렸다.
〈▲ 이토가 9일 오후 6시 서울에 와서 정동 손탁의 집(호텔)에 묵었다.
▲ 어제(10일) 오후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일황(日皇)의 편지(御書)와 선물을 봉정했다.
▲ 어제 오후 3시에는 각부 대관을 회견하기 위해 정부 각부에 전화했다.〉
일진회 성명서
나흘 전인 11월 6일 자 《황성신문》은 1면에 〈일진회(一進會)선언서〉를 실었다. 요지는 일본의 선의(善意)를 믿고 일본의 지도를 따르는 게 한국이 택할 길이라는 것이었다.
〈… 일본은 선진 선각국이다. 동양의 평화 극복하기를 주의하고 십수 년 내로 절치부심하여 갑오년에 일청전쟁과 오늘날의 일러전쟁이 모두 의협심에서 나온 것이다.
… 대일본제국이 대한제국 권의(權義)에 대하여 양국 관계가 장차 크게 변화할 것이라는 이야기로 근래 여항(閭巷)의 논의가 왁자지껄하다.
… 우방(友邦)의 지도에 따라 문명을 진보시키고 독립을 유지함이 좋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분연히 의(義)를 부르짖을 용기가 없고, 물러나서는 우방의 성심을 신뢰하지 않으며, 다만 의심만 키워서 간사한 자들의 교묘한 말로써 군소(群小)를 현혹하고 거짓 계교로 농단하다가 반드시 교의(交誼)를 손상시키고 망국(亡國)의 화(禍)를 자초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므로 차버리는 것은 국권(國權)이고 손상되는 것은 교의이다. 이런 까닭에 감정이 악의(惡意)로 바뀌어 거의 망하기에 이르게 되니, 이는 장차 어찌하겠는가.〉
《대한매일신보》는 11월 8일 자 논설로 이에 대한 반박으로도 보이는 〈구사한인(驅使韓人)이 심어우마(甚於牛馬)〉를 실었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부려먹는 것이 마소를 부리는 것보다 심하다’는 뜻으로 일본인의 한국인 수탈과 능멸을 다루었다. 일본인들이 “철로 수축(修築)과 군수(軍需) 운송과 가옥 영조(營造) 등 여러 공역에 해당 도(道) 인민을 억지로 모집하여 사역하되, 소위 품삯은 하루에 주는 것이 25전에 지나지 않으니 식비에도 부족하고 각 촌(村), 각 리(里)에서 군인을 모집하여 발송하는 비용은 천냥, 백냥으로 셈하는지라”라며 이렇게 주장한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그 손발과 눈귀와 심지와 성정은 하나이거늘, 한국인은 어째서 능멸과 학대를 당하고 일본인은 어째서 압제를 행하는가 하면, 나라의 강약(强弱)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가 약해도 이러한 학대를 받고 있거늘, 만일 나라가 망하면 어떠한 학대를 받겠는가.
국가의 권리는, 즉 인민의 권리요, 국가의 명운은, 즉 인민의 명운이다. 고로 그 나라가 다른 나라와 동등하게 된 연후에야 그 인민이 다른 인민과 동등이 되는 것이니, 대한 인민이 이러한 참상을 면하고자 한다면 오직 국권을 유지하는 데 있다. 아무쪼록 애국 충성으로 한마음으로 분발하고 힘을 합쳐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 인민의 명운을 보전하기로 모두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2천만 동포가 모두 소나 말과 같이 부림을 당하고 도축을 당할 것이니, 현재 상황을 보지 못하는가. 아아! 잘 생각해 볼 것이며, 힘쓸 것이다.〉
일본을 찬양하고 협력이 필요하다는 일진회의 주장과 이미 수탈과 침략이 진행 중인 일본을 비판하는 논조가 대립하는 구도가 시작된 셈이다. 《대한매일신보》 11월 18일 자 〈보호제의〉라는 논설은 “한국의 어리석은 인민이 대체로 두려워하는 보호 의사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나, 한국인의 공포가 끝내 해결되지 않으면 배일(排日) 사상이 연이어 일어날 것”이라는 말로 일본의 보호 제의를 비판했다.
〈오건조약청체전말〉
이토의 분주한 움직임은 《황성신문》 11월 20일 자 〈오건조약청체전말〉에 잘 정리되어 있다. 논설 〈시일야방성대곡〉과 함께 실린 사실 보도를 현대문으로 바꾸면 아래와 같다.
〈이달 9일 하오 7시에 일본 대사 이토 히로부미 씨가 경부철도 열차로 탑승 입성하여 즉시 손탁양호텔에 투숙하였는데 이튿날 오전 12시에 황상 폐하를 폐견하고 일황 폐하의 친서를 봉정하였는데 그 친서의 대강은 아래와 같다.
“짐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야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一從(따라, 영어 호외는 Emperor of Korea would obey his directions로 번역)하여 조처(措處)하소서” 하고 또 왈 국방의 방어는 짐이 견고케 할지오 황실의 안녕도 짐이 보증한다는 의미로 하얏다더라.
14일에 이토가 인천항으로 내려갔다가 이튿날인 15일에 돌아와서 오후 3시에 주한 일본공사관 서기관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와 제실(帝室) 심사국장 박용화(朴鏞和)와 함께 폐현하고 이토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제출하여 상주(上奏) 요청함이 다음과 같았다.
1. 외부를 폐지하고 외교부를 일본 동경에 설치하고 일체 외교권을 일본에 위탁할 것.(을사조약에는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라고 되어 있음-편집자 주)
2. 서울에 파견 상주하는 공사를 통감이라 개칭할 것.
3. 서울과 각 항구의 영사를 이사(理事)로 개칭할 것.〉
이후에 벌어진 상황은 다들 아는 역사다. 다만 고종이 승낙하지 않으니 홀연 〈일병(日兵)이 다수 입궐하야 수옥헌(漱玉軒) 천폐(天陛) 지척에 중중 위립(圍立)함이 철통과 여(如)하고 총도(銃刀)가 삼열(森列)한데 내정부 급 궁중에 일병이 삼립(森立)하며 하세가와(長谷川) 대장과 이토 대사도〉 대신들을 협박하여 조약을 강제 체결했다는 것이다.(문장의 고딕체는 《황성신문》에 큰 글자로 조판된 부분)
장지연, 반일 여론에 불을 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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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인 배설(어니스트 베델). |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1일 자 1면 머리에 〈황성의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싣고 장지연의 용기를 극찬하였다. 장지연은 신문의 의무를 잃지 않았다고 말하며 “실로 대한 전국 사회 신민의 대표가 되어 광명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하리로다. 오호라 황성 기자의 붓은 가히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서로 다투리로다”라고 찬양했다. 이어서 “신조약(을사늑약) 청체 내용은 《황성신문》의 전말이 소상하기 때문에 전문을 전재(轉載)한다”면서 4회(11월 22~25일)에 걸쳐 《황성신문》의 〈오건조약청체전말〉을 전재했다.
영국인 배설(裴說·Ernest Thomas Bethell)은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 특별통신원으로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1904년 3월 한국에 왔다가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를 창간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에 반대하는 강력한 항일 논조를 펴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마음대로 탄압했지만, 서양인이 발행하는 신문에 대해서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대한매일신보》의 투쟁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1일 자에 〈사장피착〉이라는 기사를 실어 장지연의 구속과 《황성신문》의 정간 사실을 보도했다. 이어 23일에는 장지연이 경무청에 구속된 후 일인 경무(警務) 고문의 심문에 의연히 맞서서 항변했다고 전했다.
일본인 경무 고문이 “무슨 이유로 검열을 받지 않고 멋대로 신문을 배포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는가”라고 심문하자 장지연은 “이른바 치안 방해는 내가 알 바 아니다. 대저 나라가 있은 후에야 치안 여부가 있는 것인데, 지금 나라가 없으니 치안을 논할 수 있겠는가. 내가 붓을 잡은 지 7~8년에 세상의 공론을 주장하다가 오늘 국가가 없어지게 된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린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경무 고문은 할 말을 잃었다 한다.
《대한매일신보》 25일 자 논설 〈황성긍린〉은 정간당한 《황성신문》의 속간을 촉구하였다. 26일 자는 장지연은 무죄(無罪)인데도 법률을 어겨가며 구류 중이라고 경무청을 비난했다. 법률에 따르면 장지연을 24시간 이내에 평리원(平理院)이나 한성재판소로 이송해야 함에도 이처럼 여러 날 가두어두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었다. 《대한매일신보》의 반일 논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날카롭고 강도를 더해갔다.
11월 27일에는 영문과 한문 호외를 발행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였다. 호외 한쪽 면은 영문, 다른 한 면은 순한문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황제와 대신들을 회유 협박하거나 궁중에 군대를 진입시켜 물리적으로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전후의 상황을 보도한 〈오건조약청체전말〉과 〈시일야방성대곡〉을 전문 번역, 배포했다.
해외에서 생명력 얻은 영문 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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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조약 관련 《대한매일신보》의 영문 호외를 전재한 1905년 12월 21일 자 《재팬 크로니클》 |
1908년 2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해조신문(海朝新聞)》 창간호 제3면에도 〈별보 오됴약 맺기를 륵협하던 사실〉이 한 페이지 전면을 넘어 다음 페이지 일부까지 걸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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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의 비극》을 쓴 프레데릭 매켄지. |
매켄지의 책은 68년 뒤 일본에서도 출판되었다. 와타나베 마나부(渡部學)가 《조선의 비극(朝鮮の悲劇)》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한 책이 그것이다. 국내에서도 출판되었는데 김창수(金昌洙)가 와타나베의 일본어판을 중역(重譯)하여 《조선의 비극》(을유문화사, 서울, 1984, p.125)으로 출간했다.
장지연의 〈오건조약청체전말〉과 〈시일야방성대곡〉은 ① 《황성신문》(1905년 11월 20일) → ② 《코리아 데일리 뉴스》(11월 27일) → ③ 《재팬 크로니클》(12월 21일) → ④ 매킨지의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1908년),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1920년) → ⑤ 와타나베 마나부 《조선의 비극(朝鮮の悲劇)》(1976년)의 다섯 단계와 《해조신문》(1908년)에도 전재되면서 수십 년에 걸쳐서 한국, 일본, 러시아,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다. 일본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림으로써 독립정신을 고취, 무력투쟁 못지않은 장기적인 효과를 거둔 것이다.
이토 방한 때와 달라진 보도 태도
장지연의 논설과 보도 기사가 나간 후에 신문의 논조는 확연히 반일 논조로 바뀌었다. 1907년 10월 16일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嘉仁親王·후일 다이쇼(大正) 천황]이 인천에 도착하여 곧바로 서울로 들어왔다. 이때 폐위된 고종 황제는 순종과 함께 인천까지 가서 맞이하였다.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은 통감 관저에 체류하면서 한국 황실을 방문하고, 각 황족에게 훈장과 금품을 수여하고, 한국 대신들을 접견하고 일·한 문무관 및 외국 영사 등도 알현하고 같은 달 20일에 귀환 길에 올랐다. 한국 순종 황제는 남대문역까지 나와 배웅했고, 황태자와 황족들은 인천까지 가서 송별하였다. 1907년 10월 8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이렇게 지적했다.
〈… 대황제 폐하께서 인천까지 거동하사 영접하시기로 내각에서 결의하였다 하니 우리의 소견으로는 이것이 너무 과도히 하는 일이로다. 남문 밖 정거장까지만 동가하샤 영접하셔도 족할 것이오, 이같이 태과(太過)케 아니하셔도 태서 각국 임군의 체면에는 흠결이 되지 아니할지라. 한국 정부의 대신들이여 한국에 황제가 계신 것을 어찌 생각지 아니하느뇨. 내 나라의 임군은 낮게 하고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옴인가 아닌가.〉
《대한매일신보》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9월 21일 자에 〈의식(儀式)의 주인은 어디 있는가?(Where is the Master of Ceremonies?)〉를 실어 이렇게 보도했다.
〈오늘 아침 도쿄에서 전달받은 전보들에 의하면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가 10월 16일 서울에 사찰 목적으로 도착한다고 한다. 한국 황실은 어떻게 된 것인가? 황제는 한국 국민들이 몇 년간 그러했듯이 일본의 손아귀에 완전히 사로잡혀 고통받고 있다. 황제는 현재 감금 상태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