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120주년

강화도조약(1876)에서 을사조약까지 구한말 외교

“한국, 침략받을 때 한 방 먹이지도 못할 만큼 無力”(시어도어 루스벨트)

  • 글 : 김종학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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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격랑이 몰려오는 지금, 120년 전 치욕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왕실 외교와 정부 외교 엇박자… 왕실 외교는 왕실 권위·권력 유지에 주안
⊙ 영국과 러시아가 ‘그레이트 게임’ 벌이는 와중에 일본 견제하려 러시아 끌어들여
⊙ 결과로부터 소급해서 역사 해석하면 근대 시기 일본의 국가능력을 과대평가하게 돼
⊙ ‘한반도 문제’ 해법 놓고 ‘단독 보호, 공동 보호, 분할, 중립국화’ 등 다양한 논의
⊙ “열강이 그 독립 지켜 주어야 할 의무는 러일전쟁 발발 훨씬 전에 소멸”(시어도어 루스벨트)

金鍾學
1977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외교학 석·박사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국립외교원 조교수 겸 외교사연구센터 책임교수 역임. 現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 제43회 월봉저작상 수상, 저서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흥선대원군 평전》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역서)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2월 3일 자 영국의 시사 만화 잡지 《펀치(Punch)》에 실린 만평.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 죽을 지경에 처한 조선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2025년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된 지 120년이 되는 해다.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당시 이름 경운궁 수옥헌)에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간에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됐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국제사회에서 온전한 법인격을 인정받지 못하는 피보호국 또는 반(半)주권국으로 전락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를 ‘늑약(勒約)’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이 말은 당시 대한제국의 지식인과 언론인이 창안한 것이었다. ‘늑약’이라는 말에는 당시 한국인들이 느낀 여러 가지 감정–망국(亡國)의 슬픔과 멸종의 두려움, 매국노(賣國奴)에 대한 공분, 국제법과 강대국의 인도적 개입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 등–이 응축되어 있다. 그 안에는 일본의 ‘배신’에 대한 분노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일본은 강화도조약(1876년 2월 27일)에서 조선의 주권을 승인한 뒤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원칙을 천명하고, 심지어 러일전쟁 직후 체결한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에서도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을 약속했는데, 불과 1년여 만에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식언(食言)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조약은 조선 침략과 대륙 진출을 노린 일본제국의 교묘한 외교적 술책이었고, 을사조약은 그 필연적 귀결이자 궁극적 성취가 된다.
 
 
  강화도조약과 ‘自主’의 의미
 
강화도조약의 발단이 된 운요호사건(1875년 9월 20일)을 그린 일본의 그림.
  근대 한일관계를 이야기할 때 범하는 오류는 종종 목적론적 해석(teleological interpretation)에서 비롯된다. 이는 역사를 개별적 우연과 구조적 제약이 뒤얽힌 ‘경로 의존적 결과’로 이해하지 않는 사관(史觀)이다. 대신 미리 정해진 목적이나 궁극적 상태로 향하는 직선적 과정으로 역사를 본다. 이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그 시대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결과로부터 소급해서 해석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근대 한일관계의 경우, 그 결론은 을사조약 또는 1910년의 한일병합이 된다. 하지만 국제정치의 무대에서 특정한 정책 목표를 구상하는 것과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것은 전연 별개의 문제다. 따라서 이 같은 목적론적 해석은, 역설적으로 근대 시기 일본의 국가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한 가지 예는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한 강화도조약의 유명한 제1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원문은 “조선국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朝鮮國 自主之邦 與日本國 保有平等之權)”이다.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단지 “특별히 논할 것이 없다(別無可論)”라며 간단하게 동의해 주었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은 비록 청(淸)의 조공국(朝貢國)이었지만 그 관계는 오직 조공과 책봉(冊封) 등 의례적인 사안에 국한되었고, 모든 국내적 사안은 국왕이 외부 간섭 없이 다스려 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조항은 조선인에게 자명(自明)한 역사적 사실의 재확인에 불과했다.
 
  근대 이행기에 ‘자주’라는 한자어는 중국의 조공국이 누려 온 실질적인 국가 자주성의 의미로도, 또는 서양 국제법에서 말하는 주권적 독립의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 모호한 말이었다. 그것은 무력(武力)을 앞세운 일본 측의 위협, 근대 국제법에 대한 조선 측의 무지(無知)의 소치라기보다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천황이 직접 다스리는 ‘황국(皇國)’의 정체성(正體性)을 새로 확립한 일본과, 청의 조공국이자 ‘왕국(王國)’인 조선 간 국교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외교적 절충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사절단이 귀국하자마자 해당 문장을 “Chosen being an independent state enjoys the same sovereign rights as does Japan”이라고 번역해서 도쿄(東京) 주재 서양 공사들에게 회람시켰다. 이는 조선 측에서 보면 합의를 깨뜨린 일방적 재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로선 국가 체면상 조공국과 대등한 국교를 맺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조항이 조선 문제에 대한 청의 개입에 저항하는 효과적 수단이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졌다.
 
 
  강화도조약 이전에 ‘보호국’과 흡사한 논리 등장
 
  이 때문에 조선의 국제적 지위, 보다 구체적으로는 청나라가 조선을 ‘보호’할 정당한 권리를 갖는가의 문제가 이후 약 20년간 청일 간에 첨예한 외교적 사안이 된 것이다. 결국 이 대립은 청일전쟁(1894~95년)을 통해 해소되었는데, 당시 일본의 대표적 국제법학자 아리가 나가오(有賀長雄)는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똑같이 동아시아의 독립국인 일본제국과 지나(支那·중국)제국 간에 수십 년 동안 조선왕국의 독립에 관해 의지의 충돌이 있었다. 일본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이 되길 바라고, 지나는 이를 그 보호국으로 삼고자 했다. 이 의지의 충돌을 화해시키기 위해 종래 사용되어 온 모든 방편은 무효가 되었다. 지나도 독립국이므로 그 의지를 굽힐 수가 없었다.〉(《일청전역국제법(日淸戰役國際法)》, 1896년)
 
  강화도 협상 당시 일본의 수행원 중에 미야모토 오카즈(宮本小一)라는 외무성 관리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조약 문구를 마련하고 협상을 통해 수정하는 일은 전권대표가 아닌 실무자가 담당하기 마련이다. 미야모토는 조선 문제에 관한 한 외무성 내에서 손꼽히는 전문가 중 하나로, 강화도 협상에서도 이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7년 전 외무성에 제출한 〈조선론(朝鮮論)〉에서 조선 문제의 해법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조선이 반독립국(半獨立國)이 되는 이유를 깨우쳐 주고, 서양과 조약을 맺으려면 체재(體裁)가 적합지 않고 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취지로 논하되, 일본과 새로 맹약을 중수하여 형제의 나라가 되고, 합중연방(合衆聯邦)으로서 이미 일본이 체결한 조약을 원용하여 따로 조약을 맺지 않는다. 서양과 통신교제(通信交際·외교)를 개시할 것을 권유하여 그 사업을 달성하게 할 것.〉(〈조선론〉, 1869년)
 
  여기서 말하는 ‘합중연방’은 오늘날 미국이나 독일, 스위스처럼 구성국이 대등한 권리를 갖는 연방국(federal state)이 아니라, 일본제국이 조선국왕의 외교권을 대행하고, 또 그 감독을 위해 십여 년간 관리를 파견하는 관계를 뜻한다. 지금 보면 놀라울 만큼 을사조약의 취지와 유사하다.
 
  이를 두고 을사조약이 메이지유신 이래의 비원(悲願)을 달성한 것이었다고 간단히 말하긴 어렵다. 보호국 제도가 서구 국제법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890년대의 일로, 1905년까지도 그 의미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조선의 국격(國格)을 상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여기는 인식이 연면히 이어지는 가운데, 그것이 특정한 정치적 국면에서 보호국 제도라는 세련된 국제법 형식을 빌려 표출된 결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법적·형식적 대등성이 실질적 평등과 협력, 상호존중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내 사회에서 모든 시민이 법적으로는 같은 권리를 갖지만 실제로 그 이면엔 다양한 형태의 계급과 차별이 만연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외형적 대등성’과 ‘이면적 차별’ 간의 괴리야말로 을사조약 전후 한국의 독립 문제에 대한 일본의 ‘표변(豹變)’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한반도 문제’
 
이승만의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근대 한국외교사를 강대국의 눈으로 상상해 보자.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이 접하고, 또 청·일본·러시아의 세력이 맞부딪치는 지정학적 요충지(要衝地)에 자리하고 있다. 청나라에 한반도는 동 3성(東三省)의 울타리로서 베이징(北京)과 만주의 안위에 직결되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하지 못하면 자국의 세력이 4개의 섬 내부로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또한 크림 전쟁(1853~56년) 패배로 지중해로의 출구가 봉쇄당하고 발트해 및 중앙아시아로의 진출도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의 견제로 번번이 좌절된 상황에서, 해양으로 세력을 팽창하려면 반드시 한반도에서 양항(良港)을 획득해야 했다.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역외(域外)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청·일본·러시아 중 어떤 나라가 한반도를 차지하는가에 따라 동아시아의 권력 구도는 크게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조선-대한제국이 국내적 안정과 외부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수호할 능력이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었다. 이로 인해 동북아 정세는 영속적인 불안정 상태에 놓이게 되며, 한반도의 체제 보장 또는 ‘관리’의 문제가 국제적 관심사로 제기된다. 이와 같은 의미의 ‘한반도 문제(Korean Question)’의 의미에 관해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친우이자 정치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박사도 요령 있게 정의한 바 있다.
 
  〈아시아의 오랜 역사에서 한국이 핵심 지역이 되어 온 것은 확실하다. 그 주요한 역할은 완충(緩衝)국가였다. 한 번도 군사적으로 강력하여 팽창의 야심을 가져 본 일이 없는 한국은 그 자체로는 어떤 국가에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늘날 그 중요성은-과거와 마찬가지로-중국, 일본, 그리고 시베리안 러시아에 둘러싸인 북아시아의 전략적 중심지역을 차지한다는 사실에 있다. 한국이 진정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한, 이 열강들이 분리되고 아시아의 평화가 유지된다. 한국이 그중 한 국가의 지배를 받는 순간 나머지 두 국가는 위험에 빠진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진실이다.〉(〈Verdict In Korea〉, 1952년)
 
 
  단독 보호, 공동 보호, 분할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근대사를 돌이켜볼 때, 한반도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된 방안은 크게 4개였다.
 
  첫째는 특정 강대국에 의한 단독 보호이다. 사실 이는 ‘보호’라는 미명 아래 한반도가 특정 강대국의 세력권에 편입되는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의 체결로 일제(日帝)의 피보호국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1885년부터 1894년까지 약 10년간 청의 ‘느슨한 보호’ 아래 놓여 있었다. 이는 리훙장(李鴻章)이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일방적인 간섭정책의 결과라기보다는 영국·러시아·일본 등의 암묵적 합의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에 관해선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둘째는 두 강대국의 공동 보호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두 나라의 군대가 한반도에 동시에 주둔한 상황은 세 차례 있었다(청-일본 1882년 7월~1885년 7월, 청-일본 1894년 4~7월, 일본-러시아 1896년 5월~1904년 2월). 그리고 이는 어김없이 양국 군대의 국지적 교전(갑신정변 진압 과정에서의 충돌)이나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청일·러일전쟁)을 초래했다. 후의 한국전쟁의 비극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셋째는 한반도 분할이다. 한반도 분단 체제는 1945년에 만들어져 벌써 80년이나 이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구상은 이미 청일전쟁 직전에 영국 외무부에서도 제시한 바 있었다. 1894년 7월 16일, 청일 간의 전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영국 외무장관 킴벌리(Earl of Kimberley)는 양국 군대가 각각 한양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에 주둔하되 한양과 제물포는 점령하지 않는다는 타협안을 제출했다. 러일전쟁 직전에도 러시아는 일본에 북위 39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나눈 후, 이북은 양국의 중립지역으로 설정하는 안(案)을 제시했다. 말하자면 두 열강이 한반도를 두고 각축을 벌일 때 이를 분할하는 것은 가장 직관적이며 단순한 해법이다. 오늘날의 분단 체제 또한 유서 깊은 강대국 권력정치가 남긴 상흔(傷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반도 영세중립화 구상
 
‘조선 중립론’을 제창했던 이노우에 고와시.
  넷째는 열강의 공동 보장에 의한 한반도 영세중립화 구상이다. 이를 처음 구상한 것은 뜻밖에도 일본 참사원 의관(議官) 이노우에 고와시(井上毅)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임오군란(1882년 7월) 직후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이 커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청·일·미·영·독일 등 5개국에 의한 공동 보장을 고안한 것이다. 1885년 3월에는 경성 주재 독일 부영사 헤르만 부들러(Hermann Budler)가 청·일·러 3국의 공동 보장에 의한 조선 중립화 구상을 김윤식(金允植)과 리훙장에게 제출했다. 조선인 중에선 《서유견문(西遊見聞)》(1895년)의 저자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이 1885년에 집필한 《중립론(中立論)》에서 이러한 구상을 처음 피력했다.
 
  근대 시기에 걸쳐 한반도 중립화 안은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었으며, 특히 대한제국의 대표적인 외교 목표였다. 강대국의 보호는 국가 자주성의 훼손이 아니면 한반도에서의 전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한반도 분할은 우리 민족이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논외로 한다면, 중립화가 사실상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 중립화 안은 많은 경우 열세(劣勢)에 처한 열강이 그 세력을 일시적으로 만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거꾸로 말하면, 우세한 지위에 있는 열강은 그에 합의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주도할 국가도 부재했다. 영국의 경우 19세기 말 헤게모니의 쇠퇴와 함께 동아시아 문제에서 점차 발을 빼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 세력을 봉쇄하는 역할은, 청일전쟁으로 몰락한 청을 대신하여 일본에 맡겼다. 이러한 정책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 제1차 영일동맹 체결(1902년 1월 30일)이다.
 
 
  왕실 외교와 정부 외교 엇박자
 
  대한제국은 망국을 면치 못했다. 따라서 외교 또한 결국은 실패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주변 열강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는데, 다름 아닌 한반도가 그 링(ring)이 되어 애꿎은 백성이 어육(魚肉)이 되는 사태를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무참한 실패였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선 왕실 주도의 외교가 초래한 여러 폐해가 있었다. 흔히 조선왕조는 성리학의 통치이념에 충실하게 설계되어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이 적절하게 견제와 균형을 이룬 시스템이었다고 높이 평가된다. 이는 조선왕조가 50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국제정치적 격변기에는 오히려 통합된 국가적 목표를 수립하고 외교정책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데 질곡(桎梏)이 되었다. 지금의 관점에선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왕실의 외교와 정부의 외교가 따로 작동하여 엇박자를 내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더욱이 왕실 외교의 목표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는 것보다는, 초기에는 신권, 후기에는 민권(民權)의 도전에 맞서 왕실의 권위와 권력을 유지하는 데 주안이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망국의 원인을 다룬 민족사학의 명저 《한국통사(韓國痛史)》(1915년)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우리 민력(民力)을 두터이 해서 강해지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고, 한갓 경운궁이 각국 공사관 근처에 있는 것을 태평의 기초라고 믿어서, 우리 국재(國財)를 탕진하여 외국인을 유혹하여, 아침에는 진(秦)나라, 저녁에는 초(楚)나라로 강자를 골라서 외교를 한다. 호칭은 독립이라 하나 실제로는 의뢰하는 것이니 이것으로 구차히 안정하려고 한들 어찌 오래 지속될 수 있겠는가?〉
 
 
  ‘그레이트 게임’과 거문도사건
 
사실상 ‘조선 통감’으로 행세했던 위안스카이.
  다음으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환경 변화에 대한 인식 수준과 대응의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1880년대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분수령(分水嶺)의 시기였다.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즉 중앙아시아에서 전개된 해양 세력 국가인 영국과 대륙 세력을 대표하는 러시아의 충돌이 동아시아에까지 파급된 결과, 한반도가 지구정치의 중요 분쟁 지역 중 하나로 부상한 것이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영국 군함 3척이 거문도를 1885년부터 약 2년간 무단 점거한 거문도사건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 왕실은 청과 일본의 세력을 막기 위해 러시아 황실에 비밀리에 ‘보호’를 의뢰했다. 이른바 한러밀약 사건이다. 이 시도는 미수에 그쳤을 뿐 아니라, 조선을 청의 ‘속국(屬國)’으로 간주한 영국의 기정 방침을 더욱 정당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영국은 러시아 세력이 한반도로 팽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의 국제적 지위나 주권 따위의 복잡한 문제와 씨름하기보다는 청에 그 외교를 통제하게 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당시 러시아 정부는 한반도에 군사력과 재정을 투입할 여력도 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조건으로 한반도에서의 청의 우월한 지위를 사실상 승인했다.
 
  일본 또한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가 일본인의 집단심리를 다룬 명저 《국화와 칼》(1947년)에서 “일본의 동기는 항상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다(Japan’s motivations are situational)”라고 명료하게 정의한 것처럼, 적어도 1890년 이전까지는 대체로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추종했다. 1885년부터 1894년까지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외교와 통상을 총괄하는 주재관’이라는 의미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함으로 경성에 부임하여 전횡(專橫)을 휘두른 것 또한 이러한 한반도 정세 아래서 가능했다.
 
 
  ‘러시아 끌어들여 日 견제’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그의 아내.
  그로부터 10년 후, 조선 왕실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금 러시아의 세력에 기대고자 했다. 삼국간섭(1895년 4월 23일) 이후의 이른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이다. 하지만 이 또한 당시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 Weber)의 동정 어린 태도와 러시아 본국의 조선정책 방향을 혼동한 것이었다.
 
  다음은 거의 같은 시기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운영한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실린 〈일본 외교의 장래〉라는 제목의 논설 중 일부다. 한러밀약의 시도나 삼국간섭 이후 인아거일책과 비교해 보면, 지정학적 또는 전략적 사고에서 이미 큰 격차가 나타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대륙 국가들이 우리의 정당한 열망을 꺾기 위해 일본에 반대하여 동맹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면, 그때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금전을 투입하여 온 바를 완성하고 그 강국들의 악의(惡意)를 분쇄할 동맹 결성을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중략) 청국 내에 있는 모든 나라가 막판에 가서는 문제를 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의견의 합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으로 진전될 때 영국은 전략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지 못하다. 왜냐면 이 싸움은 바다에서가 아니라 육지에서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영국과 일본이 하나의 동맹을 형성한다면 극동의 여러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러시아는 육지로 청국을 강제할 수 있으며 영국은 이를 반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영국이 일본과 함께 자기의 운명을 건다면 영국은 어느 때보다도 더 극동에서 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일본 외교의 장래〉, 《시사신보》 1895년 6월 7일)
 
 
  루스벨트가 본 한국 병합
 
시어도어 루스벨트.
  하지만 근본적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대한제국이 국내 질서를 유지하고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주권과 영토를 보존할 수 있는 ‘실력’을 갖지 못한 데 있었다. 물론 그 원인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선 수세기에 걸친 국력의 점진적 약화, 정치의 문란과 사회적 분열, 결과적으로 성급했던 문호 개방의 충격, 외부 열강의 간섭과 경제적 착취 등 다양한 요인이 고려돼야 한다. 하지만 적자생존(適者生存)과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철칙이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장(場)에서 이러한 사정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다음은 을사조약 체결 당시의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한국 병합에 대해 쓴 글을 인용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쓰라 각서(Taft-Katsura Memorandum)’를 승인하고, 또 포츠머스에서 열린 러일전쟁의 강화회담을 일본 측에 유리하게 중재함으로써 이후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서, 비판자들은 그를 제국주의자이자 인종주의자, 심지어 성차별주의자로 간주한다. 여담이지만, 미국의 현 대통령이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높이 평가한다는 언론 보도가 종종 들릴 때마다 100여 년 전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변주(變奏)되며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아픈 역사’의 원인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본질적으로 데라우치 백작의 통치 아래서 한국에서 이뤄진 일은, 유사한 상황에서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의 주요 식민지 행정관들이 해온 일과 같다. 하나의 독립국으로서 한국은 국내의 질서를 유지하지 못했고,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을 때 자신을 위해 한 방 먹이지도 못할 만큼 무력(無力)했다. 한국은 러시아에 의해 지배를 받았으므로, 외국의 열강이 그 독립을 지켜 주어야 할 모든 의무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전에 이미 소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후 일본의 지배와 1910년의 한국 병합은 필연적이었다.〉(〈Fear God and Take Your Own Part〉,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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