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증언

1950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던 ‘그날’

“지옥도를 본 그날, 한강의 아침은 아름다웠다”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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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다리에 헤드라이트 켠 차들이 어느 지점에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 비 맞으며 밤새운 피란민들, 끊어진 다리 보고 아우성
⊙ “한강 하류에 지폐 뭉치와 보따리가 둥둥 떠다니는 사이를 시체들이 수없이 자맥질하더라”
2012년, 한국전 당시 미국 NBC방송의 종군기자로 3년간 활동했던 존 리치(John Rich)가 휴전 55주년에 즈음해 자신이 촬영한 동강 난 한강 인도교 모습을 공개했다. 1953년 1월 1일 촬영됐다.
기자는 한 달 전 서울 평창동 소재 영인문학관의 강인숙(姜仁淑·92) 관장을 만났다. 1945년 8월 15일 전후의 광복 체험을 듣기 위해서였다. 뜻하지 않게 6·25전쟁 당시의 비극적 피란 체험을 듣게 되었다.
 
  그만의 비극 서사는 아니었지만 누구나 겪는 일도 아니었다. 전시(戰時)에 사춘기를 맞은 병약하고 예민한 소녀의 기억이었지만 장대하고 깊이가 있으며 뜨거움이 배어 있었다. 내년 6·25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인터뷰를 가졌다.
 
  6·25 당시 열일곱 살 강인숙은 폭파된 한강 인도교 옆 백사장에서 밤새도록 자동차들이 한강으로 곤두박질치는 광경을 목격했다. 다리가 끊어진 뒤 작은 배로 서울을 탈출하는 드라마틱한 지옥도를 보았다.
 
  1·4후퇴 때는 걸어서 꽁꽁 언 한강을 건넜고, 소한(小寒)과 대한(大寒) 사이에 한뎃잠을 자면서 전북 군산까지 걸어갔다. 가족 이산(離散)을 겪었고 무정부상태도 체험했다. “무법천지의 전쟁통에서 살아난 것이 기적 같았다”고 회상한다.
 
 
  1950년 6월 28일 그날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사진=조선DB
  《월간조선》 2024년 7월호에는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가 쓴 〈북한군 사진과 기록으로 본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진실〉이 실렸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 폭파를 둘러싸고 좌파(左派)에서는 ‘민간인 수백 명이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사건’이라고 규정하는 반면 우파(右派)에서는 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한다. 적게는 500명, 많게는 수천 명, 심지어 구체적으로 4000명이 다리 위에서 ‘사지가 찢겨 강물로 떨어져’ 죽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런 검증하기 어려운 주장 앞에 강인숙 관장이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강 관장 가족은 6·25가 터지던 날 공교롭게도 이촌동으로 이사를 갔다. 며칠 뒤 한밤중, 정체 모를 폭발음을 아주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다.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상상을 초월한 굉음이었다. 그 소리에 놀라 잠자던 식구들이 소스라쳐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넘었다. 1950년 6월 28일이었다.
 
  “간단한 보따리만 들고 비몽사몽간에 밖으로 나왔어요. 무조건 한강다리 쪽을 향해 걸어갔어요. 당시 사람이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인도교밖에 없었으니까요.”
 
  사람들이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좀 있으니까 웬일인지 움직임이 정지되었다. 앞이 막혀서 한 시간이나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있었다고 한다. 한강 인도교가 이미 폭파되어 건널 수 없게 되자 피란민들은 누가 뭐랄 것 없이 강둑 아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강인숙 관장은
 
  문학평론가이자 국문학자. 1933년 10월 15일, 사업가의 1남 5녀 중 3녀로 함경북도 갑산에서 태어나 이원군에서 살다가 1945년 11월에 월남했다. 딸 많은 집 셋째로 태어나 호기심 많은 눈으로 일제 말기와 해방 직후의 풍물지를 익혔고 6·25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아버지는 일제의 요시찰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남편 대신 가족을 책임진 여자 가장의 삶이었다. 오빠는 학도병을 피하려다가 학도 징용으로 끌려갔고 큰언니는 정신대를 피해 고교 때 결혼하고 두 시간 만에 해방 소식을 들었다.
 
  서울에서 경기여중·고와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숙명여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데뷔했다. 1958년 대학 동기동창인 이어령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건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퇴임 후 2001년 영인문학관을 설립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꺼져 버리고, 또 꺼져 버리고…”
 
2024년 6월 촬영한 노들섬 부근 전경. 지금은 강이 됐지만 흙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폭파 사건 당시에는 땅이었다. 사진=조선DB
  무너진 한강 인도교 인근 모래사장에 가서 앉기라도 하자고 생각한 것일까.
 
  “삽시간에 모랫벌이 피란민으로 가득 찼어요. 그때만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어요. 깜깜한 밤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으니까요.”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해 했다. 강인숙 관장은 지도를 그리면서 기자에게 설명했다.
 
  “여기가 끊어진 다리면, 우리는 이쪽에 있었다고요. 근데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가다가 딱 어느 지점에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예요. 불빛이 다리 위를 가다가 사라지고 가다가 사라지고…. 그땐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그래, 밤새 비를 맞으면서 그렇게 모래사장에서 그 광경을 봤다고요.”
 

  이 대목에서 흥분을 가라앉힌 뒤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곤 이렇게 덧붙였다.
 
  “… 그랬는데 동이 터 올 무렵 누가 비명을 질러서 보니까 다리가 이렇게 이렇게 다 끊어져 있는 거야. 다리가 끊어졌고 자동차들이, 자동차들이…, 일반 자동차는 아니고 정부(군대) 자동차가 아니겠어요?”
 
  강 관장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뒤에도 많은 차량들이 남쪽으로 이동했다. 다리 폭파 사실을 알리거나 통제한 이들이 아무도 없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는 “군인들이 철수하는지 차량은 계속 밀려오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헤드라이트를 켠 차량들이 어느 한 지점에 다다르면 약속이나 한 듯이 꺼져 버리고 또 꺼져 버렸다. 반대편 한강 남쪽은 어둠만 가득했다.
 
  “다리를 반으로 나누어 보면, 오른쪽에서는 계속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몰려오고 있고, 불이 꺼지는 왼쪽은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있었죠.”
 
 
  “한강 하류엔 시체들이 자맥질을 하더라”
 
  밤 동안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조차 못 했지만 서서히 어둠이 걷히자 인도교가 두 군데나 끊어지고 교각만 휑하니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를 맞으며 밤을 새운 피란민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러 댔다. 끊어진 다리를 보고 아우성을 쳤다.
 
  “당시 피란민들 사이에선 ‘(지금의) 서강대(한강 하류) 근처에 가면 강에 빠진 자동차에서 나온 돈과 이런 것들이 둥둥 떠다닌다’고 그랬어요.”
 
  한강 하류에 지폐 뭉치와 보따리가 둥둥 떠다니는 사이를 시체들이 수없이 자맥질을 하더라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다리가 끊어졌으니 강을 건너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그래도 어떻게든 먹고는 살아야 했다. 날이 밝자 사람들은 심란한 몸짓으로 짐 속에서 냄비들을 꺼내 한강물로 밥을 짓기 시작했다. 그 무렵 국군 패잔병들이 참담한 몰골로 모래사장에 몰려들었다. 대포 소리는 점점 가까워 오고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포탄을 피하려 누군가는 모래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앉기 시작했다.
 
  “연장이 없으니 양은 대접을 꺼내서 파기도 하고 접시나 손으로 파기도 했어요. 기를 쓰며 모래를 파느라고 강변을 메운 사람들이 한동한 잠잠했죠.”
 
  강변을 메운 피란민들은 모두 하늘만 보고 있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물에 잠긴 모래 구덩이에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광경은 처절했다”고 했다.
 
  “오전 10시경에 남쪽에서 비행기가 나타나서 초고속으로 우리의 머리 위를 삽시간에 가로지르더니 곧장 북쪽으로 사라졌어요. 피란민들은 환호성을 올렸어요. 손을 들어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어요.”
 
  강 관장은 강변이야 난장판이었지만 아침의 한강은 아름다웠다고 회상한다. 강은 호수처럼 잔잔했고 강 저쪽엔 물안개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고 했다.
 
 
  생지옥 이야기
 
노들섬 백사장에서 뻗어나온 한강 인도교와 나룻배를 타고 노니는 남녀,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그려진 일제시대 그림엽서. 사진=김시덕
  어디선가 군인들이 보트를 몽땅 끌고와서 후퇴하지 못한 낙오병을 실어 날랐다. 군인들이 모두 떠나고 다음은 피란민 차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강 남쪽으로 떠난 보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피란민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목청이 떨어져 나갈 만큼 악을 쓰는 사람, 국군을 욕하는 사람, 인민군을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목 놓아 우는 사람도 있었다.
 
  “한강을 헤엄쳐 건넌 사람이 보트를 타고 다른 보트도 끌어왔어요. 2시간쯤 지나니 건너편 기슭에 있던 보트들이 모조리 이쪽으로 이동했죠. 피란민들이 환호성을 올렸어요.”
 
  삽시간에 수십 척의 보트가 확보되었지만 진짜 생지옥이 연출된 것은 보트가 온 후부터였다. 너도 나도 한꺼번에 보트에 달려든 것이다. 살기 위해.
 
  배가 뒤집히고 젖혀지고 하느라고 아무도 올라탈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등에 짐을 진 채 보트 밑에 깔리는 사람도 있고, 멱살잡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족이 흩어져서 울부짖는 사람, 북새통에 다친 사람도 있었다. 강인숙 관장은 이런 참담한 장면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거미줄〉(1918년 작)이라는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어느 날 지옥을 내려다본 부처님은 그곳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간다타라는 사람을 발견하고 자비심을 일으킨다. 그를 구해 주려고 부처님은 거미줄 하나를 아래로 내려보낸다. 그런데 거미줄을 보자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매달리려고 기를 써서 난리가 벌어진다. 간다타는 자기 혼자만 올라가고 싶었다. 그래서 뒤따라 올라오는 사람들을 발로 차느라 위로 올라가는 것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아귀다툼이 벌어졌다. 간다타뿐 아니라 따라 올라오려던 사람들까지 함께 몽땅 지옥으로 도로 떨어져 버렸다.
 
 
  거미줄과 파뿌리
 
  강 관장의 말을 듣자니 그의 남편인 이어령(李御寧) 선생이 생전 곧잘 들려준 ‘파뿌리’ 이야기가 떠올랐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년 작)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살면서 선행을 베푼 적 없는 인색한 노파가 지옥에 갔다. 지옥 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수호천사가 그 노인을 가엽게 보고 하느님께 간청한다. “생전에 저 노파가 거지에게 파 한 뿌리를 준 적이 있으니 선처해 달라”고. 하느님은 “평생 인색했지만 그래도 파 한 뿌리의 작은 선행이라도 했으니 그것을 기억한다”면서 노파가 파 한 뿌리를 붙잡고 천국으로 오는 것을 허락한다. 노파는 신이 나서 파뿌리를 붙잡고 지옥불을 빠져나오려는데, 그걸 본 사람들이 파뿌리에 우르르 아귀처럼 달라붙는다. 노파가 달라붙는 손길을 밀쳐내며 소리쳤다. “이거 내 파뿌리야!” 순간, 후드득 파뿌리는 끊어지고 모두 지옥불에 떨어졌다.
 

  강 관장은 “우리 가족은 미쳐 돌아가는 소용돌이를 넋을 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고 했다. 강물에는 주인을 잃은 짐 보따리와 신발짝, 옷가지 같은 것들이 난파선의 유품처럼 둥둥 떠있었다.
 
  오후 3시경이 되자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서 드리어 강 관장 가족이 배를 탈 차례가 왔다. 그들이 탄 배가 맞은편(동작동) 언덕에 닿기도 전에 강변에 인민군들이 나타났다. 따발총 소리가 사방에서 쉴새없이 진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온 가족이 무사히 강을 건너 가슴을 쓸어내렸다.
 
 
  “밤새도록 그 일이 되풀이되었다면…”
 
미군이 평양에서 노획한 한강 인도교 폭파 직후 북한군 촬영 사진. 파괴된 차량과 국군 시신들이 보인다. 북한군은 이 사진에 ‘서울 한강교에서의 적의 파괴 및 국방군의 참살 장면’이라고 설명을 붙여 놓았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강인숙 관장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날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군인과 경찰을 실은 차량들이 끊긴 한강 인도교를 건너다 추락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군·경이 차량의 다리 진입을 막지 않았던 것일까?
 
  막더라도 일부는 군 통제를 무시하고 차량을 몰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강 관장의 증언대로 ‘밤새도록 그 일이 되풀이되었다면’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한 사망자 수는 현재까지 알려진 정보보다 훨씬 늘어날 수도 있다.
 
  민간인 희생자는 많았을까? 군이나 경찰이 인도교 출입을 통제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통제하지 않았더라도 차량의 추락과 같은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걸어서 다리를 건너려다 끊어진 다리를 눈으로 확인한 피란민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을 것이고, 이를 뒤따라오는 다른 피란민들에게 ‘입’으로 알렸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일부가 인파에 떠밀려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그 수는 제한적이었으리라. 무정부상태였다고 해도 서로가 전쟁의 상흔(傷痕)을 온몸으로 견뎌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란민 모두가 ‘거미줄’과 ‘파뿌리 하나’에 매달려 무사히 강을 건넜으리라. 거의 마지막으로 건넜다는 강인숙 관장 가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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