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상륙작전·장진호 전투 등 참전… 참전자 642명 중 전사 52명, 행방불명 83명
⊙ 일본 정부의 귀환 거부로 242명 한국에 남아 가족과 생이별
⊙ 놀리는 미군에게 “우리 재패니즈 코리안은 침략자들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고 일갈
⊙ 일본계 미국인 지미 고자와 중위의 건의로 3·1독립대대 편성…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한 달도 못 돼 해산
⊙ 미군이 재일학도의용군 철수 결정하자 한국군으로 재입대… 장교·부사관으로 임용
⊙ “눈뜨고 나면 시체들이 얼린 명태처럼 쌓여”(장진호 전투 참전자 김재생)
李民晧
1972년생. 한림대학교 일본학과 졸업 / 《통일일보》 기자, 同 서울지사장 / 저서 《재일동포의 모국사랑》 《신한은행을 설립한 자이니치리더》 《민단70년사 한국어판》 《‘왔소’에 오이소》 《열도의 독립운동가 ‘의사 원심창’》 《재일동포의 100년 족적》 《재일동포의 민족교육과 생활사》 등
⊙ 일본 정부의 귀환 거부로 242명 한국에 남아 가족과 생이별
⊙ 놀리는 미군에게 “우리 재패니즈 코리안은 침략자들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고 일갈
⊙ 일본계 미국인 지미 고자와 중위의 건의로 3·1독립대대 편성…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한 달도 못 돼 해산
⊙ 미군이 재일학도의용군 철수 결정하자 한국군으로 재입대… 장교·부사관으로 임용
⊙ “눈뜨고 나면 시체들이 얼린 명태처럼 쌓여”(장진호 전투 참전자 김재생)
李民晧
1972년생. 한림대학교 일본학과 졸업 / 《통일일보》 기자, 同 서울지사장 / 저서 《재일동포의 모국사랑》 《신한은행을 설립한 자이니치리더》 《민단70년사 한국어판》 《‘왔소’에 오이소》 《열도의 독립운동가 ‘의사 원심창’》 《재일동포의 100년 족적》 《재일동포의 민족교육과 생활사》 등

- 1950년 9월 가나가와 민단본부에서 열린 재일동포 학도의용군 출정식. 사진=이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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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도의용군 강대윤에게 지인들이 무운장구를 비는 뜻을 담아 준 태극기. |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보(誤報)다. 이보다 무려 17년 앞서,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바다를 건넌 청년들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 국민, 재일(在日)학도의용군 642명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조국이 공산화될 위기에 처하자, 일본 땅에 살던 동포 청년들은 안락한 삶을 버리고 기꺼이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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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7일 도쿄 간다 스루가다이호텔 앞에서는 출정하는 재일동포 학도의용군 환송 행사가 열렸다. |
“무궁화 삼천리, 힘 있는 햇빛 아래 건국의 종소리는 우리들을 부른다…”
태극기를 휘감은 청년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합창하고 있었다. 그날의 풍경을 재일한국인 매체 《신세계신문》 기자 김성욱(金聖郁)은 이렇게 기록했다.
“한쪽에서는 친구끼리 삼삼오오 모여 서로 어깨를 다독이며 기합을 넣어주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가족이 모여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치마저고리 차림의 어머니는 아들의 두 뺨을 부둥켜 잡고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행진곡을 부르는 청년들의 목소리는 떨렸다. 가족과의 생이별, 출정(出征)의 두려움을 억누르면서, 그들은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목 놓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왜 목숨을 걸기로 한 것일까? 참전을 결의한 재일동포 청년 다수는 대학이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 신분이었다. 외국 땅인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역(兵役)의 의무는 유예된 상태였다. 안전지대인 일본을 떠나 사지(死地)로 향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한목소리로 밝힌 참전 이유는 바로 ‘망국(亡國)의 고통’을 다시 겪을 수 없다는 처절한 각오였다.
송동원(宋東源)은 “일본인들은 우리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다”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조국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몸서리치게 절감했다. 자칫 나라가 없어질 판국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있었겠느냐”고 증언했다. 유승호(柳升鎬) 역시 “당시 유학생 사이에서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데, 속 편하게 공부는 무슨 공부냐는 분위기가 압도했다”고 회고했다.
일제(日帝) 시대 나라 잃은 백성으로 살아야 했던 서러움과 고통이 그들을 자발적 ‘결사병(決死兵)’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숙질이 함께 참전… 3대 독자도
스루가다이호텔 앞에 모인 재일동포 청년 78명 가운데 대학생은 59명, 고등학생은 2명. 거리 곳곳에 ‘축 입영(祝 入營)’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가운데, 치마저고리 차림의 어머니들은 연신 태극기를 흔들면서 전쟁터로 가는 아들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세!”
“만세삼창을 마치자, 우리를 태운 미군 트럭 4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럭 대열은 사이타마현 아사카(埼玉縣 朝霞)에 있는 미군 제1기병사단 사령부 캠프드레이크를 향해 달려갔다.”(‘재일동포학도의용병 수기 이활남’ 중)
참전을 결심한 순간, 그들은 일본에서 누리던 모든 걸 내려놓아야 했다. 대학생은 캠퍼스 생활을, 직장인은 생업을 포기해야 했다. 고교 2학년으로 막 소년티를 벗은 18세 김교인, 메이지대 1학년 조승배(趙承培)도 있었고, 오사카에서 반공(反共) 활동을 하다가 자원한 조용갑(趙鏞甲)과 조카 조만철(趙滿鐵)도 있었다. 메이지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활남(李活男)은 가문의 3대 독자(獨子)로 정혼자(定婚者)까지 있었지만 입영 트럭 위에 올랐다.
당시 조국의 전황(戰況)은 그야말로 폭풍 앞의 등불이었다. 북한군의 파상공세에 떠밀려 국토의 대부분을 내주고, 낙동강을 경계로 일부만이 위태롭게 남아 있던 시기였다.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共産化)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 전세가 가장 불리한 형국에 일본에 있던 청년 학도들은 목숨을 걸고 대한해협을 건너기 시작했다. 바로 재일학도의용군이다. 이날 도쿄 거리에 모인 출정자들은 제1진이었다.

‘S.V.From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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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학도의용군들은 ‘S.V.FROM JAPAN’ 견장을 군복에 부착했다. |
여기서 제식(制式)훈련 등 기본 군사훈련을 소화한 제1진은 9월 12일 출동 명령을 받았다. 그러고 이튿날 요코하마(橫濱)항에서 미군 수송선 피닉스(LST Phoenix)호에 올랐다. 배에는 미 본토에서 태평양 바다를 건너온 미 제7사단 병력 10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승선 순간까지도 재일학도의용군들은 행선지에 대해서도 어떤 작전 설명도 듣지 못했다.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유일한 표식은 견장에 박힌 ‘S.V.From JAPAN’이란 문구 하나뿐. S.V.는 ‘Student Volunteer’의 약자로 학생자원자, 즉 일본에서 건너온 학도병이라는 뜻이었다.
미 제7사단 소속이지만 무적(無籍)의 자원병인 재일학도의용군. 남의 나라 배를 타고 향한 곳은 서해바다, 행선지조차 몰랐던 이들이 투입된 첫 전투는 바로 6·25 전쟁의 운명을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상륙에 성공한 제1진은 인천지방검찰청 건물에 주둔하면서 미군의 후방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일학도의용군 제2진과 제3진은 후발대였다. 오사카(大阪)가 있는 간사이(關西) 지방과 나고야(名古屋)가 있는 주부(中部) 지방 청년 266명으로 이뤄진 제2진도 제1진과 마찬가지로 출정에 앞서 아사카 기지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요코스카(横須賀)항에서 출항한 미군 전투부대와 함께 보급물자를 갖고 인천에 상륙했다. 이어 도쿄가 있는 간토(關東) 지방 지원자로 이뤄진 제3진 101명이 합류했다.
도호쿠대(東北大) 법과에 다니다 제2진으로 참전한 김병익(金炳翼)은 9월 24일 인천에 상륙하던 날을 필름처럼 기억했다. 2만5000t급 수송선에서 내려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잠든 다음 날 아침에 마주한 것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이었다. 난생처음 밟은 조국 한국 땅에서 본 첫 장면은 참혹 그 자체였다.
“어이, 주니어! 총은 쏠 줄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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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9월 민단 오사카본부에 마련된 학도의용군 모집창구. |
그러나 미군들 눈에 재일학도의용군은 군복만 걸쳤을 뿐, 군번조차 없는 ‘무명(無名)의 이방인’에 불과했다. 부평 탄약고에서 경계 임무를 맡았던 제1진 조승배는 미군들의 놀림감이었다.
“어이, 주니어! 총은 쏠 줄 아나?”
미군 병사들은 키 작은 조승배를 만날 때마다 깔깔거리며 조롱했다. 군복도 총도 처음이라 서툴기 짝이 없는 18세 청년이었지만, 조국을 지키겠다는 의지만큼은 누구보다 강했던 조승배. 어느 날 참다못해 단호하게 총구를 돌리며 미군들에게 맞섰더니, 이후부터 그를 무시하는 병사는 없었다.
김병익과 박운욱(朴運旭·1928년생으로 국내 유일의 생존 재일학도의용군) 역시 대학 때 익힌 영어 실력으로 깔보는 미군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 재패니즈 코리안은 침략자들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
재일학도의용군들에 대한 평가가 180도 달라진 건, 전투를 함께 하면서부터다. 동포 청년들이 무모할 정도로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에 미군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예된 병역 의무를 뒤로하고 펜 대신 총을 든 사연을 듣고선 깊은 경외심마저 표했다고 한다.
출정하면서 한국군 군번 받은 건 5진이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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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학도의용군은 모두 5차례에 걸쳐 출정했다. 1950년 9월 13일 민단 지바본부에서 열린 출정식. |
직후 투입된 작전이 북진(北進) 작전인 원산 이원상륙작전이었다. 이어 장진호(長津湖) 전투와 혜산진 탈환 작전까지 수행했다. 미 제10군단 예하 미 해병 제1사단과 함께한 처절한 전투, 하지만 중공군(中共軍)의 개입으로 진격은 멈춰 섰고 후방으로 철수해야 했다.
일본에서의 참전 행렬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제4진은 규슈(九州) 지방 출신 지원자 145명, 벳푸(別府)의 캠프모리에서 10월 15일 나가사키(長崎) 사세보(佐世保)항을 출항해 부산에 도착했다. 제4진은 1~3진까지의 선발대와 달리 한국군에 배속됐다. 육군 제2훈련소에서 50일간 훈련을 받은 다음, 국군 제9사단에 배속되어 백마고지 전투와 김화지구 전투 등 중부전선 고지전(高地戰)에 참전했다.
제5진 52명 역시 규슈 출신으로 캠프 모리에서 45일간 훈련을 받았다. 군번은 K-1138301부터 K-1138352까지. 일본에서 출정 시점에 군번을 받은 재일학도의용군은 이들 제5진이 유일했다. 이들은 1950년 11월 미 제3사단과 함께 38도선을 넘어 원산 진격 작전에 참전했다.
이처럼 재일학도의용군들은 한 번에 단일부대로 참전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 5차례에 걸쳐 일본 각 지역별로 출정했다. 이 때문에 출정 회차별로 맡은 임무도 달랐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제1, 2진은 미군 소속으로 병참기지 정비, 탄약 운반, 통역, 수복 지역 치안 유지 등 주로 후방 임무를 맡았다. 반면, 제3진과 제5진은 미군과 함께 장진호 전투 등 북진 작전을 벌였다. 제4진은 한국군에 편입돼 중부전선에서 적군과 대치했다. 6·25 전쟁 내내 대한해협을 건너온 학도의용군들은 저마다 전선에서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할 것이다.
‘유령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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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학도의용군 제1진 유재만, 미8군 견장이 달려 있다. |
1952년 9월 29일 미국 CBS방송 도쿄지국장 조지 하먼(George Herman)은 ‘한국 전쟁에 출현한 유령부대’라는 타이틀로 이렇게 보도했다. 국적도 소속도 불분명한 ‘유령’ 같았던 그들의 정체는 바로 재일학도의용군들이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뒤 부평의 미 제3병참기지에 배치된 재일의용군들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지 내 남서쪽 언덕의 막사에 머물던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외곽 경비와 순찰, 수송 같은 후방 지원이었다. 제대로 된 군인 취급을 못 받는다는 생각에 나날이 상실감은 커져만 갔다.
이때 “전선(戰線)에서 싸우고 싶다”는 이들 입장을 대변한 이가 나타났으니, 일본계 미국인 지미 고자와(Jimmy S. Gozawa) 중위였다. 고자와는 병참기지 사령관 조지 스튜어트(George C. Stewart) 장군에게 재일학도의용군의 적극적 활용을 건의했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색인종 독립부대를 운용한 전례가 있었고, 유럽전선에서 이들 유색인종 부대가 일반 부대보다 더 많은 전공을 세운 바 있었다.
“일본계 2세인 고자와 중위는 특별한 군인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색인종 부대에 배속되었던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설명이 스튜어트 사령관을 설득하는 힘이었을 겁니다.”(박종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박사)
‘3·1독립보병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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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보병대대 창설을 추진했던 일본계 미군장교 지미 고자와는 1977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의회가 이 대대의 활동을 칭찬하는 캘리포니아주의회 결의안을 이끌어냈다. |
미군은 이들을 10인 1분대, 4분대 1소대의 방식으로 재편성해 총 8개 소대를 구성했고, 이를 다시 A중대[161명·중대장 정완조(鄭完朝)]와 B중대[162명·중대장 공태용(孔泰瑢)]로 나눴다. 각 소대에는 미군 하사관 1명을 배치했다.
1950년 10월 30일, 부평 기지사령부 연병장에서 ‘3·1독립보병대대’가 공식 창설됐다. 3·1은 한민족이 일제에 항거해 독립만세운동을 펼친 기미년 3월 1일(1919년 3월 1일)에 착안한 이름이었다. 의용군 조승배는 똑똑히 기억했다.
“3·1독립대대의 훈련 교관은 한국군이 맡았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신(申)이란 성을 가진 소위였습니다. 우리는 신 소위의 지휘 아래 2주일간 훈련을 받았습니다. 고자와 중위는 한국말이 서툰 우리를 위해 일본어 군사 수첩까지 만들어주었습니다.”(2009년 10월 인터뷰)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戰勢)가 급변하자, 미군은 부대 창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그해 11월 27일 돌연 해산 명령을 내린다. 북진에서 철수로 바꾼 작전 구도상, 3·1대대는 필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눈물을 흘리며 저항했으나, 명령 제일인 군(軍)에서 이건 통하지 않았다. 편제표에도 등재되지 못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해산돼 버린 재일동포 부대 3·1대대. 이후 수많은 전쟁사에 부대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이렇게 재일학도의용군들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던 3·1대대의 존재가 세상 밖으로 표출된 건 1977년 미국에서다. 옛 전우 고자와 중위(미 육군 예비역 중령)가 캘리포니아주(州) 의회와 상원의원에게 편지를 보내, 재일학도의용군과 3·1대대에 감사장을 수여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해 5월 캘리포니아주 의회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3·1대대를 칭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한국에 있는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에 감사장을 전달했다. 국적과 인종을 떠나 피로 맺어진 전우애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방출 통보받자, 한국군에 再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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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미군에서 방출되자 한국군으로 재입대해서 전쟁을 계속했다. |
“퇴각하는 미군 부대 일부는 작전상 일본 귀환을 결정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귀환을 거부하는 재일동포의용군들이 속출했다. 부평에 있던 미 제3병참기지사령부도 일본 귀환 대상이었다. 의용군들은 강일룡(姜一龍), 곽도용(郭道容)을 대표로 뽑고 미군에 ‘한국군 편입’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수차례 접촉을 가진 뒤에야 비로소 우리의 국군 편입이 결정됐다. 의용군들은 1950년 11월 28일 저녁, 서울 남대문 근방에 있던 육군 제1보충대대(지금의 서울남산초등학교)로 이동했다.”(육군본부 ‘한국 전쟁 시 학도의용군’ 중)
육군본부는 국군에 편입한 재일학도의용군들에게 간부 후보생 선발시험에 응시할 것을 제안했다. 박병헌(朴炳憲·후일 민단중앙단장)은 “육본에서 우리의 학력을 높이 사서 이 같은 제안을 한 것 같다”면서 시험은 지원서에 인적 사항과 학력을 기재하는 정도로 약식으로 치러졌다고 말했다. 이때 선발된 30명은 부산 동래에 있는 육군종합학교에서 1951년 1월 18일부터 8주간 훈련을 받았다. 이 가운데 최종적으로 제22기 간부로 선발된 이는 24명, 소위로 임관했다.
한편, 1950년 12월 일부 재일학도의용군은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기타큐슈 모지항(北九州 門司港)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당도한 부대에서 바로 해산 통보를 받았다. 이에 58명이 항의, 민단과 주일한국대표부의 지원을 받아, 이듬해 2월 부산으로 귀환해 육군 제2훈련소에 입소했다. 전원 대한민국 육군 하사가 되어 전방에 배치됐다.

현리 전투·용문산 전투 등에서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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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도쿄 다이교우지(大行寺)에 있는 재일학도의용군 충혼비 앞에 모인 학도의용군 참전자들. |
이활남은 1951년 3월 10일 육군 소위로 임관해 육군 제3사단 제1중대에 배속되었다. 1중대는 대전차 공격부대였다. 지휘관 이활남은 강원도 팔왕산 전투와 한계령 현리 전투에서 북한군을 크게 무찌르는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의 활약상은 육군본부가 발간한 《학도의용군》에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이따금 북한군들이 피란민으로 위장하고 아군 진지에 나타났다. 모두가 망설이는 가운데 소대장 이활남 소위가 피란민들에게 접근하였다. 첫눈에 보아도 대부분이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피란민 가운데 한 노인이 이 소위 앞으로 다가왔다. 노인은 5리(=2km)쯤 되는 곳에 이삼백 명의 북한군이 아군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 소위는 노인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매복했던 진지로 돌아왔다.〉
이활남이 확보한 정보 덕분에 아군은 인명 피해 없이 수백 명의 적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 윤용근 소위는 제3사단 22연대 3대대에, 김성욱 소위는 같은 사단 18연대 1대대에 배속되어 각각 창촌리 전투, 가리봉 전투, 노인봉 전투에서 맹활약했다. 이들 역시 전장에서 두드러진 전공을 세웠다.
유승호(柳升鎬)와 조만철(趙滿鐵), 박병헌 소위도 빼놓을 수 없다. 유 소위는 제9사단 30연대 1대대 소속으로, 조 소위는 제1사단 9연대에서 복무하며 북중(北中) 공산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박 소위는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활약을 펼쳤다.
유승호 소위의 활약상도 육군본부 기록에 남아 있다. 유 소위는 강원도 홍천 매봉산 1103고지 전투에서 제3소대장을 맡아 대원들의 엄호사격 아래 적진을 향해 직접 돌진했다. 고지전은 결국 백병전(白兵戰)으로 이어졌고, 유 소위의 희생적 활약으로 아군은 고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642명 중 135명이 희생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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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서울 동작동 국군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에서는 51위의 6·25 재일학도의용군 전사자들의 안장식이 열렸다. |
한편 참전자 및 희생자 수에 대해선, 작년 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재일학도의용군 한국 전쟁 참전 진실규명 결정서》(2024)를 통해 명단의 중복과 누락 인원이 존재한다면서, 참전자 수는 기존보다 31명 많은 673명으로, 전사 및 행방불명자 수는 각각 48명과 77명으로 소폭 감소했다고 정정(訂正) 발표했다.
그러나 이 수치에 대해 진화위는 ‘추정’이라 밝히고 있어, 향후 참전자 개인 신상정보 카드화 및 국가보훈부 데이터, 재일민단 역사자료관의 참전자 신상정보 등과 교차 검증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본고에서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등이 작성한 선행 데이터(참전 642명, 전사 52명, 행방불명 83명)를 채용했다.
요세카키를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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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진으로 참전했던 박병헌 소위는 1951년 고향에서 어머니와 상봉했다. |
장진호 전투는 처참했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위를 흐르는 압록강 지류인 장진강을 막아 조성한 인공호수 장진호. 이 일대에서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혹한 속에서 중공군 제9병단의 포위망을 뚫는 데 성공했지만, 막심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당시 미 제3사단 의무대에 배속됐던 강대윤은 흥남비료공장에 주둔하면서 장진호 전투 부상병 치료에 매달리고 있었다.
“밤낮없이 후송돼 오는 부상병들을 치료하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절감했습니다.”(2008년 9월 인터뷰)
피가 솟구치는 야전 병원에서 부상병을 돌보면서, 짬 날 때면 가슴속에 품은 ‘요세카키(よせがき·롤링페이퍼)’를 어루만지곤 했다. 히노마루에 태극무늬를 그려 넣은 요세카키에는 행운을 비는 친구들의 글귀가 잔뜩 적혀 있었다. 그걸 품고서 사선(死線)을 넘나들었으니, 강대윤에게 요세카키는 일종의 부적이었다.
강대윤과 입대 동기로 미 제3사단 공병대 소속이던 김재생은 장진호의 참상을 현장에서 직접 겪었다. 주력 부대인 미 해병대를 따라갈 때만 해도 아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별다른 저항도 없이 북으로 북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이제 곧 전쟁은 끝나겠지’ 싶은 그때, 장진호가 진군을 막았다. 갑자기 중공군이 물밀듯이 내려왔고 아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 막혀 사방으로 포위되고 말았다.
“너무나도 많은 전우(戰友)가 전사(戰死)했습니다. 눈뜨고 나면 시체들이 얼린 명태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트럭 1대당 40명씩 싣더니, 나중에는 너무 많으니까 그냥 더미로 실어 보냈어요. 아무리 조국이라지만 우리에겐 생전 처음 밟은 조국 땅이 아닌가. 나 혼자 살아남아서….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은 동지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합니다.”(2008년 9월 인터뷰)
97세 재일학도의용군 노병의 마지막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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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운욱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회장. 유일한 국내 생존자다. |
“장진호에서 발굴한 전사자 유해 속에 틀림없이 당신 동료들도 있을 것이오.”
이날 밤 귀환한 한국군 일병 김석주, 정환주의 유해처럼 참전 동지 유족의 DNA를 감정하면, 장진호 일대에서 발굴한 유해 속에서 동지들과 일치하는 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이를 위해 박 회장은 일본에 있는 동지회와 민단 기관지를 통해 장진호 전투 전사자 유족 찾기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아직까지 성과는 보지 못하고 있다. 지난 6월 18일 인터뷰에 응한 박운욱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대학 시절 20대 젊은 나이에 공부를 내려놓고 참전한 건 ‘우리나라가 없어지면 나도 없다’라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눈감기 전에 장진호에서 희생당한 동지 단 한 명이라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97세 재일학도의용군 노병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죽어서라도 報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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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수봉공원에 있는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 |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며 주권(主權)을 회복한 일본은 재일학도의용군을 ‘무단출국자’로 규정했다. 조국을 위해 떠난 그 발걸음은 무시됐고, 일본 정부는 허가 없이 임의 출국한 자들로 간주해 버렸다.
한국에 남은 이들의 삶은 험난했다. 일본에서 쌓은 학력도, 경력도, 아무 소용없었다. 몇몇은 영어 실력을 살려 미군부대 군무원이 되었지만, 다수는 생계에 허덕였다. 무엇보다 제일 견디기 힘든 건 가족과의 단절이었다. 다시는 건널 수 없게 된 대한해협, 돌아갈 수 없는 일본. 조국을 택한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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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미나토구 민단중앙본부 앞에 있는 재일학도의용군 충혼비. |
그들은 징집된 바 없다. 병역의 의무도 없었다. 하지만 1950년 여름, 남침을 당한 조국이 위태로워지자 일본 각지에서 배를 타고 달려왔다.
그들의 이름은 많은 이에게 낯설지만, 그들이 남긴 역사는 선명하다. 대한민국 주권 수호에 기여한 역사를 썼다. 또한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1953년 10월 1일)되기 전에 한국과 미국의 청년들이 같은 부대원으로 함께 피를 흘린 역사를 썼다. 세계 최초의 재외국민 참전이란 역사도 결코 놓칠 수 없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이 조국에 던진 마지막 한마디.
“죽어서라도 보국(報國)하겠다.”
이 외침이 남겨진 채 75년이 흘렀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들의 희생에 제대로 보답하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