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열음, 조성진이 2, 3위 차지한 2011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
⊙ “청년기의 파릇파릇함에서 벗어나 원숙미를 더해가며 조금씩 전성기로 접어들고 있어”
⊙ 까다로운 곡도 정확하고 명료한 곡 해석… 널리 알려진 레퍼토리도 새로운 통찰력 보여
⊙ 곡 해석이 너무 독특하거나 작곡가의 의도와 거리가 멀다는 혹평도
⊙ “기교에 능한, 무서운 집중력을 가진 피아니스트… 이제 작곡가로 서서히 거장의 모습 닮아가고 있어”
⊙ “청년기의 파릇파릇함에서 벗어나 원숙미를 더해가며 조금씩 전성기로 접어들고 있어”
⊙ 까다로운 곡도 정확하고 명료한 곡 해석… 널리 알려진 레퍼토리도 새로운 통찰력 보여
⊙ 곡 해석이 너무 독특하거나 작곡가의 의도와 거리가 멀다는 혹평도
⊙ “기교에 능한, 무서운 집중력을 가진 피아니스트… 이제 작곡가로 서서히 거장의 모습 닮아가고 있어”

- 4월 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의 연주를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 모습이다. 그의 대형 사진 앞에선 관객들.
20~30대로 보이는 여성이 주를 이뤘고, 퇴근길에 찾은 듯 전문직으로 보이는 백팩을 멘 젊은 남성들 또한 눈에 띄었다. 기자의 외눈박이 시선으로는 대개 혼자 공연을 보러 온 이가 많아 보였다. 물론 콘서트의 풍성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얘기다.
트리포노프가 한국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아마도 2011년에 개최된 제14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이리라. 당시 피아노, 바이올린, 남녀 성악 부문에서 두 명의 1위를 포함해 무려 5명의 한국인 음악가가 입상했다. 피아노 부문에서 손열음, 조성진이 각각 2위와 3위에 올라 언론이 대서특필했고 이후 국민적 사랑을 받아왔다. 이 콩쿠르의 우승자가 당시 스무 살의 다닐 트리포노프다. 손열음은 스물다섯, 조성진은 열일곱이었다.
‘라이징 스타’에서 ‘뜬 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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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6월 30일 러시아에서 열린 제14회 차이콥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 입상자를 박삼구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이사장이 축하하는 모습이다. 왼쪽부터 당시 피아노 부문 2위 손열음(당시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 바이올린 부문 3위 이지혜, 박삼구 회장, 3위 조성진(당시 서울예고). 사진=연합뉴스 |
20~30대의 세계적인 젊은 피아니스트가 즐비한데도 우리나라에서 트리포노프가 특히 알려진 것은 아마도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손열음·조성진을 제쳐 클래식 마니아의 머릿속에 이름이 단단히 박혔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누구도 그가 우리나라에서만 유명한 뜨뜻미지근한 피아니스트라고 말하진 않는다. 올해 초 영국 런던 기반의 국제 온라인 음악잡지 바흐트랙(https://bachtrack.com)에 따르면 ‘2023 세계에서 가장 바쁜 피아니스트’로 러시아 출신 키릴 게르스타인(Kirill Gerstein), 트리포노프, 조성진 순(順)으로 꼽혔다.
1위를 기록한 게르스타인은 초인적(超人的)인 일정을 소화하는 피아니스트로 유명한데 국내에선 트리포노프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게르스타인은 2001년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클래식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아왔다. 트리포노프는 꼭 10년 뒤인 2011년 이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손열음은 2005년, 조성진은 2013년 이 대회에서 각각 3위를 차지했었다.)
트리포노프의 내한 공연은 2013년, 2014년, 2018년, 2023년에 이어 올해가 5번째였다. 작년 내한 공연은 티켓 오픈과 동시에 전석 매진을 기록했는데 올해는 기자가 둘러보니 더러 빈자리가 보였다.
이날 저녁 7시30분 공연 시작과 함께 무대 조명이 꺼졌다. 183cm의 트리포노프가 성큼성큼 무대에 올라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바로 피아노 의자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호흡을 가다듬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손가락 긴장을 푸는 제스처도 없이 바로 연주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멜로디 물살이 총알같이 튀어나가듯 객석으로, 무대 위로 아래로 흥건히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다닐 트리포노프는… 1991년 러시아 니즈니 노브고로드(Nizhny Novgorod)에서 태어나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모스크바 그신 음악학교(Gnessin School of Music)에서 타티아나 젤릭만(Tatiana Zelikman·85)을 사사한 후 미국 클리블랜드 음악원(Cleveland Institute of Music)에서 세르게이 바바얀(Sergei Babayan·62)에게 심화적인 피아노 학습을 이어갔다. 2010~2011년 시즌 동안 트리포노프는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에서 3위,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콩쿠르에서 1위, 그리고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1위의 영광을 안았다. 세계 3대 경연에서 메달을 차지해 ‘콩쿠르 사냥꾼’이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2013년 도이치 그라모폰과 독점 계약을 맺었는데 리스트 모음곡인 〈초절기교 연습곡〉 앨범이 2018년 그래미 어워즈 최고의 솔로 악기 앨범 부문을 수상했다. 앞서 2016년 그라모폰 ‘올해의 예술가’로 선정됐고 2021년에는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훈장 슈발리에(Chevalier de I’Ordre des Arts et des Lettres)를 수상했다. 1957년 프랑스 문화부가 제정한 문화예술공로훈장은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창작물과 해당 분야에 미친 영향력을 평가해 수여한다. |
詩的인 흐느적거리는 느낌으로 시작…
트리포노프는 첫 곡인 장-필리프 라모의 〈새로운 클라브생 모음곡집 가단조〉에서 약간 슬픔을 머금은 듯 시적(詩的)인 흐느적거림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왼손과 오른손으로 빠르게 주고받는 선율의 교체가 건반 위에서 춤추는 듯했다. 빠르면서도 무심한, 그러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단정한 변주(變奏)가 6번 이어지고 난 뒤 곡은 마무리되었다. 가슴에 번져오는 선율의 달콤함이 시간을 잊게 했다. 이후 모차르트와 멘델스존, 베토벤이 이어졌지만 이 첫 곡이, 사랑스러운 이 곡이 이날의 공연 전체를 지배하고 말았다. 그는 조용히 미끼를 던져 형형색색(形形色色)의 물고기 심장을 가로챌 줄 아는 비범한 피아노 사냥꾼임에 틀림없었다. 자연스러운 우아함과 날 선 기교를 갖춘 세련되고 도회적인 음악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허리를 곧추세우다가도 건반 위로 넘어질 듯, 흐느끼듯 어깨를 들썩였다.
거의 30분간을 쉬지 않고 연타(連打)한 후 잠깐 무대 뒤로 가더니 곧바로 나와, 물이라도 한 컵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아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2번 바장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오후 8시5분쯤이었다.
부드러운 왼손 반주 위를 나긋나긋하게 움직이는 오른손 선율이 이어진 뒤 분위기를 살짝 어둡게 누르더니 이내 2악장에 가서는 오페라 아리아가 연상될 만큼, 시종 부드럽게 봄바람이 살랑이듯, 건반을 눌렀다. 아니, 때렸다. 한 음을 손가락 하나가 누르기보다 손가락 두 개로 두세 음을 동시에 눌러 세련된 느낌, 생기 넘치는 서정(抒情)을 객석에 던져주었다.
피아노 선율이 무조건 밝지만은 않고 중간중간에 약간의 불안을 심어주어 미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우레처럼 쏟아내다가 살롱 연주자처럼 다소곳하게 연주하며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3악장에 가서는 땀에 젖은 듯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을 가렸는데 2악장보다 좀 더 강력하고 기운 넘치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의 기교는 어떤 곡이든 표현력을 풍성하게 하되 빠르게 연주하는 경과구(經過句·곡의 어떤 주제와 다음 주제 사이에 놓이는 일종의 ‘다리’ 역할)에 더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리포노프는 20분가량의 연주 후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무대 뒤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열정, 생각의 흐름, 비범한 연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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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10월 1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내한 공연을 가졌던 다닐 트리포노프 모습이다. 사진=마스트미디어 |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몸이 건반과 닿았다. 몸과 손이 앞뒤 좌우로 들썩일 때마다 서로 다른 17개의 변주가 진동(振動)해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데칼코마니처럼 왼손과 오른손이 계속 움직이는 변주, 찰랑거리는 듯한 화음(和音)이 연주되는 변주, 갑작스러운 셈여림의 대비와 도약이 심장을 뛰게 하는 변주, 또 다른 변주, 변주….
트리포노프가 여섯잇단음표로 묶이는 음들을 급격하게 몰아치더니 돌연 분위기를 바꿔 장엄한 화음과 함께 곡의 끝을 알렸다. 객석에서 환호성이 한꺼번에,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귀가 얼얼하고 이미 영혼은 빼앗겨 있었다.
그만의 열정, 생각의 흐름, 비범한 연주력 중 무엇이 더 훌륭했는지 구별하는 것은 자신이 없지만, 자유롭고 기운 넘치며 정확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짧은 휴식 후 2부 연주가 시작됐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9번 내림바장조〉, 일명 ‘함머클라비어(Hammerklavier)’였다. 이 작품은 베토벤이 작곡한 32곡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도 압도적인 규모, 그리고 그 크기에 걸맞은 도전적인 악상(樂想)으로 유명하다. 연주시간만 50분에 달하는데 자칫 무리하게 연주하다가 어깨를 다친 피아니스트도 적지 않다. 온갖 고난(苦難)을 이겨낼 만한 강인한 어깨와 테크닉, 마지막 4악장까지 끝장을 보겠다는 열망(熱望) 없이는 이 작품을 감히 도전하기 어렵다고들 말한다. 그만큼 난곡(難曲)이다. 베토벤 역시 이 곡을 작곡할 무렵 지독한 송사(訟事)문제로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곡이 더 어려운지 모르겠다.
트리포노프는 1악장 첫 음부터 강력하게, 세게, 파괴적으로 손가락을 들썩였다. 자연히 몸도 따라 요란하게 움직였다. 곡이 기본적으로 낮은 음계가 많아 강약(强弱)이 분명했다. 숨죽인 관객,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손목시계는 밤 9시45분이 넘어가는데 연주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 트리포노프도 서서히 지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잔물결이 이는 듯 낭만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다가도 들어보면 사색적으로 무겁게 느껴졌고 침잠(沈潛)이라고 하기엔 영적(靈的)으로 날이 서 있었다.
피아노와 接神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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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6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다닐 트리포노프가 땀을 연신 흘리며 연주하고 있다. 당시 그는 스무 살이었다. 사진=유튜브 캡처 |
손가락이 물방울이 튀듯 가볍고, 격렬한 화성에서는 마치 유령이 악보를 차르르 펼치듯, 저 심연(深淵)에서 길어온 우물물을 바닥에 쏟듯, 연주를 쉼 없이 펼쳤다. 손가락과 건반 사이에 계속 충돌이 일어났는데도 단 하나의 음도 잘못 눌렀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총알이 발사되고 난 후 방향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도 잘못된 음을 누르거나 악절을 뭉개는 일이 없이 일사천리로 콘서트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갔다.
아니, 설령 음이탈이 나고 엇박자를 쳤다 해도 그대로 그의 마력에 빠져 객석의 귀가 마비되어 못 느꼈을 것이다. 이게 트리포노프 연주력의 비밀이었다. 그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무슨 마법사처럼 느껴졌다. 마치 데생이나 회화를 바탕에 둔 연주처럼 머릿속에 어떤 영상이 그려졌다. 객석의 사람들이 더러 눈을 감고 듣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대단히 풍성한 소리의 색채(色彩)가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무엇보다 건장한 체격에서 쏟아내는 압도적인 힘과 테크닉이 음악의 뉘앙스를 더욱 깊고 넓게 우려내는 듯했다.
트리포노프는 이날(4월 2일) 장-필리프 라모와 모차르트, 멘델스존, 베토벤을 모두 연주하고도 앙코르 연주를 4곡이나 더 했을 만큼 객석의 환호에 친절히 반응했다.
연주가 끝나고 계속해서 박수 소리가 멈추지 않자 그 역시 계속 호응하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때마다 반응하며 앙코르 연주로 화답했다. 점점 지쳐가는 모습이 눈에 띌 정도였지만 무대 뒤로 도망치지 않았다.
서른세 살의 다닐 트리포노프는 덥수룩한 턱수염과 깊은 눈빛이 인상적인 스타 피아니스트로 어느덧 자리매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음악 칼럼니스트 조성우는 “어느새 청년기의 파릇파릇함에서 벗어나 원숙미를 더해가며 조금씩 전성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그를 묘사했다.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는 전 세계로 연주 여행을 다니는 와중에도 꾸준히 새로운 곡을 연습하며 레퍼토리 확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코스모폴리탄적 피아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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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닐 트리포노프 연주력의 비결은 아무래도 기술적인 탁월함에 있을 것이다. 그의 기술적 기량은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모르겠어요. 말을 하는 동안은 무슨 생각을 하나요? 집중이 덜 됐을 때는 두세 마디 정도 자동조정 모드로 흘러가기도 해요. 하지만 대체로 완전히 작품에 빠져 있죠.”
트리포노프 역시 완전히 심연의 구심으로 빠져들고선 몇 시간에 걸쳐 오랫동안 건반과 마주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마치 축제를 주관하는 제사장(祭司長)이나 굿을 하는 박수무당처럼 완전히 피아노와 접신(接神) 상태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아르헤리치가 트리포노프의 연주를 들은 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부드러움과 악마적인 요소까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그런 연주는 처음 들어봤다.” 아르헤리치가 말한 ‘악마적 요소(demonic element)’가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트리포노프 연주의 강렬함과 집요함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여겨진다. 틀림없이 그 의미일 것이다.
트리포노프 연주력의 비결은 아무래도 기술적인 탁월함에 있을 것이다. 그의 기술적 기량은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까다로운 곡조차 정확하고 명료하게 해석하며 널리 알려진 레퍼토리도 새로운 통찰력을 불어넣는다. 또 심오한 감정적 깊이도 그만의 강점이다. 그는 음악에 완전히 몰입해 깊은 감정적 수준에서 청중과 공명(共鳴)하는 해석을 꾸준히 전달해왔다.
자신만의 해석적 독창성과 창의성도 인상적이다. 때로 독특하고 파격적인 곡 해석으로 트리포노프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동료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신만의 손놀림으로 과감한 곡 해석을 ‘실험’하는데, 익숙한 작곡자의 의도를 뛰어넘어 개인적인 표현의 여지가 있음을 강조한다.
조성우 칼럼니스트는 트리포노프의 가장 큰 매력으로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을 꼽았다.
“그가 선보이는 폭넓은 레퍼토리는 피아니스트로서의 확실한 경쟁력이자 대중이 음악과 음악가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랜 선입견을 깨부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음악가는 드뷔시나 라벨에 대한 이해도가 깊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독일 음악가는 베토벤, 브람스 해석에 특별한 ‘정통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트리포노프는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이미지보다 21세기 한복판을 살아가는 젊은 음악가로서 세계시민적 면모, 코스모폴리탄적 피아니즘을 보여주죠. 그에게서 시대와 지역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음악을 발견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를 둘러싼 우려도 적지 않다. 트리포노프가 자신만의 해석적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가 강점이긴 해도 일부 평자와 청자는 곡 해석이 너무 독특하거나 작곡가의 의도와 거리가 멀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게다가 매우 감정적이고 육체적으로 힘든 연주 스타일로 곡의 난도(難度)와 연주 순간의 충동에 의해 연주 일관성이 결여되는 측면이 있음을 지적하는 이도 있다. 다시 말해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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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김설화씨 |
그는 솔리스트, 챔버와 성악 파트너, 오케스트라 협연자, 그리고 작곡가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이제 겨우 30대 초반이다. 거만한 쇼 비즈니스 세계의 스포트라이트 아래 벌어지는 의식적(儀式的) 들썩임에 만족할 순 없다. 음악을 통해 인생의 비극적인 요소까지 뿜어내기엔, 다시 말해 우리 삶을 둘러싼 죽음과 이별, 외로움, 기다림, 망가진 사랑, 사랑의 상처, 질병 따위를 돌파하는 ‘고난의 세월’이 그에게 필요해 보인다. 물론 비범한 천재에게 고난이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기자는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트리포노프의 연주력에 대해 물어보았다.
서울 선화예중·고와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피아니스트 김설화(31)씨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음대에서 석사 과정과 최고연주자 과정을 마쳤다. 이후 프랑스 파리 에콜 노르말(ENS) 최고연주자 과정을 수학한 후 최근 귀국했다. 그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아랍에미리트 등에서 열린 국제 콩쿠르에서 1~3위를 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의 말이다.
“바르게 펴지 않은 허리와 신기한 손 모양, 아무렇게나 자르고 그냥 늘어진 거 같으며 ‘떡지고’ 빗지 않은 것 같은 머리…. 보통은 무대에 설 때 평소보다 멋지고 깔끔하게 오르는 게 일반적이라면 그는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조차 음악 말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 광기의 음악은 그의 눈빛과 연주에서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 언제 처음 그의 연주를 들었나요.
“2014년 10월 내한 공연 당시 유독 감정선을 잘 표현하며 음악이 끝나가도 지치지 않는 그의 체력에 감탄한 적이 있어요. 화려하면서 실수 없이 폭발적으로 질주하는 손가락과 기교에 능한, 무서운 집중력을 가진 피아니스트라 느꼈지만 이제 작곡가로 서서히 거장(巨匠)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그는 피아노, 실내악 앙상블,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곡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초연했을 때 미국 오하이오주의 언론사인 《클리블랜드 플레인 딜러(the Cleveland Plain Dealer)》는 이렇게 썼다.
“이 곡은 믿기지 않을 정도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다닐 트리포노프의 예술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틀에 갇히지 않는 ‘천재 올라운더’”
김설화씨는 작곡 능력까지 갖춘 그에 대해 ‘천재 올라운더(Genius All-rounder)’라는 표현을 썼다.
“20세기 현대 곡에서 바흐 앨범까지 그의 연주 앨범을 들어보면 의심할 여지없이 10개의 손가락으로 하나의 세계를 연주하는, 틀에 갇히지 않는 ‘천재 올라운더’라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원로 피아니스트인 연세대 안희숙(安熙淑) 명예교수는 “연주회에 직접 간 적은 없고 유튜브 동영상으로 들어보니 현대 피아노의 발전된 연주법을 구사하고 있다고 느껴진다”고 했다.
“같은 곡을 똑같이 쳐도 각자 다른 음악이 표출되듯이 그는 남다른 예술적 감각과 음악적 철학을 토대로 깊이 있는 음악을 창조해내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섬세한 악곡 해석이라든가 건반에서 만들어 내는 손놀림, 페달의 해석 등 참 본받을 만한 바가 많아 보여요.
직접 눈으로 확인은 못 했지만 슈만의 〈판타지〉,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를 들어보니 그가 어떻게 쳤는지 짐작할 수 있었죠. 손가락만 잘 움직인다고 음악이 아니고, 요는 최고의 기술과 예술을 창조해내야 좋은 연주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해 보입니다.”
《거장들의 유럽 클래식 무대》의 저자인 음악평론가 김승열씨는 다닐 트리포노프의 실연(實演)을 두 번 봤다. 2014년 10월 내한 독주회와 2018년 11월 안토니오 파파노 지휘 로마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하는 무대에서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두 번의 무대 모두 광활하게 몰아치는 느낌이 강렬했습니다. 그러나 묵직한 맛은 덜했습니다. 피아노 역사에서 ‘러시아 스쿨’의 차별성은 냉랭하게 가라앉은 차디찬 묵직함의 기조입니다.”
“트리포노프보다는 유자왕”
트리포노프는 묵직함과는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20세기 최고의 거장 피아니스트라고 불린 러시아 출신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Svyatoslav Teofilovich Rikhter·1915~1997년)는 당대 클래식계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었으면서도 정체불명의 고립된 삶 뒤에 숨어버린 사내’로 통했다. 그래서 그의 묵직한 음악이 신화(神話)가 될 수 있었다.
“전설적인 레프 오보린(1907~ 1974년), 에밀 길렐스(1916~1985년), 타티아나 니콜라예바(1924~1993년)가 그랬고, 그리고리 소콜로프(1950~)가 또한 그러합니다.
소콜로프는 제가 프랑스에서 여섯 번의 독주회를 봤는데, 현존 최고의 러시아 피아니스트이자, 최근 마우리치오 폴리니(1942~2024년)가 타계한 마당에 현존 최고의 피아니스트입니다. 16세이던 1966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한 귀재인데, 단 한 차례도 아시아 연주여행을 갖지 않고 있는 은둔자(隱遁者)입니다.”
“21세기 피아니스트들은 날렵하기만 해”
― 트리포노프가 국내에서 인기가 높은 비결은 뭘까요?
“아마도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손열음과 조성진을 밀어내고 우승한 이력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피아니스트 두 명을 제친 피아니스트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목적으로 트리포노프의 무대에 모여드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1년 후 자국의 콩쿠르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안방효과를 봤다는 세간의 평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한 해 전인 2010년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에서 동향의 율리아나 아브제예바(1985~)에게 우승을 내주고 3위에 그친 이력이 있지요.”
― 30대의 피아니스트 중에 누구를 첫손에 꼽을 수 있을까요.
“저는 트리포노프보다는 중국의 유자왕(王羽佳·37)이라 여깁니다. 콩쿠르 입상 경력이 없음에도 옹골찬 심지와 완전무결의 비르투오시티(뛰어난 기교)를 겸비한 천재라고 생각됩니다.”
― 왜 그렇게 여기시는지요?
“20세기 초중반에 명멸했던 황금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정교함은 기본이고, 수톤은 나감직한 묵직한 베이스라인을 뿜어댈 줄 알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최근 21세기 피아니스트들은 날렵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표피적(表皮的)입니다.
피아노를 오케스트라로 격상시키는 거대함의 기조를 선보이는 피아니스트가 사라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트리포노프와 조성진, 손열음, 임윤찬은 보다 정진해야 할 듯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위대했던 과거의 환영(幻影)을 언뜻 언뜻 보여주는 피아니스트는 유자왕이 유일합니다. 디테일과 스케일을 겸비한 피아니스트 거장의 출현을 고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