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주희의 라운지

노래와 시로 禪을 알려온 도신스님

어머니를 원망했던 소년, 중광스님을 만나 박살이 나다

  •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 사춘기 시절 ‘걸레스님’ 중광스님 10년 모시며 박살 나고 다시 태어나
⊙ 감로암을 나와 법장스님의 ‘노래하는 제자’가 되다
⊙ 앨범 6장에 유튜브 조회수 수백만 회, ‘노래하는 스님’에서 ‘시인’으로

도신(道信)스님
속랍 60세. 1969년 수덕사 입산, 법장스님을 은사로 동진 출가, 1976년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2000년 송광사에서 범룡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 법주사승가대학 수학, 중앙대 대학원(문예창작학) 졸업 / 前 서광사 주지, 조계종 제16대 중앙종회의원, 現 덕숭총림 수덕사 주지, 조계종 초심호계원장, 수덕사 근역성보관장 / 1990년 국악가요 공연(세종문화회관), 1991년 국악가요 1집 발표, 1997년 춤극 공연(국립극장) / 2018년 계간 《서정시학》으로 등단 / 저서 《나의 스승 법장스님》, 시집 《웃는 연습》
도신스님.
“스님이 노래한다고 안 좋은 말을 듣진 않았나요?” 스님에게 물었다.
 
  “많이 들었죠. ‘선방(禪房)에 있지 왜 노래를 하냐’ 그런데 저는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포교의 방법이 시대에 맞게 다양해져야 된다고요. 노랫말에 감동을 받잖아요. 부처님 말씀을 노랫말에 싣자고 생각했어요.”
 
  얼마나 자주 들은 질문인지 대답하는 말투에 인이 박여 있었다. 지난 2월 24일 서울 조계사 경내 찻집에서 수덕사(修德寺) 신임 주지 도신(道信)스님을 만난 참이었다. 차를 가져온 찻집 직원이 스님을 보자 반색(斑色)을 했다. 팬이라며 연신 말을 걸었다. 스님은 6집 앨범까지 낸 ‘스님 가수’다. 1991년에 낸 1집 앨범은 30만 장 넘게 팔렸단다.
 
 
  유튜브 조회수 수백만 회 스님 가수
 
1991년에 발표한 도신스님의 데뷔앨범. 30만 장 이상 팔렸다.
  인터넷 세상으로 들어가면 스님의 인기는 더 대단하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유튜브에 올린 노래 영상들이 조회수 100만, 200만은 우스울 정도다. ‘님의 향기’를 부른 영상은 조회수가 400만을 훌쩍 넘어섰다. 스님의 말이 이어졌다.
 
  “선(禪)과 문화가 다른 거라 보기 힘들어요. 실체가 없는 게 선이고 실체가 있는 게 문화라면, 보이지 않는 선의 세계를 실체가 있는 걸로 보여줘야 되잖아요. 부처님 말씀을 전하려고 해도, 전달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되는데, 전달하는 매개체를 저는 문화라 보거든요.”
 
  ― 하긴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불경이면서, 문화재지요.
 
  “그러니 선은 마음이고 문화는 몸인 거죠. 사실은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경허스님, 만공스님 모두 원래는 예인(藝人)이었어요. 음악을 가까이하셨고, 글씨에 능하셨지요. 만공스님, 경허스님 글씨는 정말 최고예요. 한암스님도 마찬가지고요. 기가 막힙니다. 그런 면은 덜 알려져 있지요.”
 
  경허스님은 한국 선불교를 일으킨 당대 최고의 선승이다. 경허스님의 제자인 만공과 한암 역시 우열을 가를 수 없는 당대 최고의 선승들이다.
 
 
  여덟 살에 동진 출가
 
  도신스님은 8세 때 수덕사에 들어왔다. ‘동진(童眞) 출가’,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는 뜻이다. 법장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도신스님은 1976년 수덕사에서 원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2000년 송광사에서 범룡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대개 10세 이내 나이에 출가하는 걸 뜻하는 동진 출가는 요즘엔 찾아보기 힘들다. 조계종이 2021년 발표한 2020년 분한신고 통계를 보면, 조계종 전체 스님의 수는 비구·비구니를 합쳐 1만444명(비구 5544명, 비구니 4900명)이다. 이 중 50대 이상이 전체의 81%(8494명)다. 분한신고는 10년 단위로 승려 자격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다.
 

  ― 요즘은 출가자 자체가 줄고 있다지요?
 
  “많이 줄었어요. 가톨릭 쪽도 신부를 원하는 분이 줄고 있다 들었고요. 요즘엔 서른 살에 출가해도 동진 출가라고 합니다. 저의 제자도 저와 동갑이에요.”
 
  ―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왔는데 커가면서 답답하진 않았나요.
 
  “그런 건 잘 몰랐어요. 이 환경에 이미 적응이 돼서 그런지….”
 
 
  중광스님과의 만남
 
감로암의 한때. 왼쪽부터 중광스님,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구상 시인, 혜련스님.
  ― 절에서 자란 스님이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절에 사람들이 놀러오면, 그 부근에서 기타 치고 노래를 해요. 그걸 듣는데 기분이 좋았어요. 몰래몰래 돈을 모아서 시장 가서 기타를 사 왔어요. 은사 스님에게 들켜 기타도 여러 번 부서졌어요. 쫓겨날 뻔도 하고요.”
 
  독학으로 익힌 기타는 그를 생각지 못한 길로 인도했다. 1979년 어느 날이었다. 절집 행사에서 도신스님이 노래를 불렀다. 그때 중광스님이 그 노래를 들었다. ‘걸레스님’으로 불리기도 한 중광이다. 중광스님은 그 길로 ‘서울로 가자’고 제안했다. ‘노래 부르면서 포교하면 기가 막힐 것 같다’… 그 길로 중광스님을 따라 감로암으로 들어갔다.
 
  서울 종로 충신동에 있는 감로암은 당시 중광스님의 집이자 화실이었다. 그곳에서 중광은 혜련스님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혜련스님은 중광보다 22세가 많았다. 18세에 어머니를 잃은 중광은 혜련스님을 ‘어머니’라 부르며 법모(法母)로 모셨다. 그곳에 도신스님이 들어갔다. 중광이 생전 유일하게 둔 법제자다. 10년을 곁에 있었다.
 
  1979년 이미 중광은 세간의 관심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해 조계종 승적을 박탈당했고, 미국에서 그의 화집이 출간됐다. 캘리포니아주립대의 랭커스터 교수는 《The Mad Monk(미친 승려)》라는 책을 내면서 중광을 ‘한국의 피카소’라 소개했다. 해외 전시가 이어졌다. 1983년엔 뉴욕 록펠러재단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기도 했다.
 
 
  이남이, 신중현에게 음악 배워
 
〈도신이가 노래한대요〉 중광스님의 그림이다.
  ― 감로암에서 뭘 공부했나요.
 
  “음악이요. 동대문에 있던 세광음악학원에 다니면서 화성학도 배우고, 오르간, 기타도 배웠어요. 가수 이남이씨를 알게 돼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했어요. 이남이씨는 중광스님의 유발 상좌였어요. 신중현 선생한테 작곡도 배우고, 기타도 배우고, 노래도 배웠어요.”
 
  유발 상좌는 삭발 출가하지 않고 속세에 머물면서 스님의 제자가 되는 걸 뜻한다.
 
  ―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중광스님을 보면서 부럽지는 않았나요.
 
  “아니요. 그러기엔 스님이 너무 거지같이 하고 다녔어요. 저는 두려웠어요. 스님을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게 꽤 오래갔어요.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을 하셨으니까요.”
 
  중광은 넝마 같은 옷을 입고 다니며 술을 노상 마셨고, 각종 기행을 일삼았다. 자신은 이미 입적한 거나 마찬가지라며 스스로 자신의 제문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성기에 붓을 매달아 선화(禪畵)를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강연 도중 여학생에게 키스를 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생각나는 대로 읊자 스님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더한 일들이 많았으니까요.”
 
  ― 두려웠다면서 중광스님을 떠나지 않았네요.
 
  “스님에겐 묘한 매력이 있었어요. 그렇게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받아주고 정리해준 사람은 처음 만났으니까요. 술 드시고 곯아떨어지셨는데도 말씀을 다 들어주세요.”
 
  ― 무슨 얘기를 나눴나요.
 
  “어머니에 대한 얘기였어요. 저한테 어머니는 수수께끼였어요. 군대 갈 나이가 됐는데 저만 영장이 안 나오는 겁니다. 면사무소에 가보니 주민등록번호 자체가 없어요. 출생신고가 안 되어 있던 거예요.”
 
  ― 어떻게 그런 일이 있지요? 출생신고가 안 되어 있는데 학교는 어떻게 다녔나요.
 
  “어릴 때는 학교를 안 다녔어요. 은사 스님께서 학교 보낸다고 하면, 제가 그랬어요. 분신 자살하겠다고요.”
 
  ― 왜요.
 
  “모르겠어요. 그러니 은사 스님이 저를 학교에 못 보냈어요. 불교 경전 공부하라고 강원에 보내면 도망 나왔어요. 제가 운동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은사 스님께서 체육관을 찾아 입관시켰는데 또 도망 나오고…. 나중에 은사 스님께서 다 포기하더라고요.”
 
  ― 부모님은 왜 출생신고를 안 했을까요.
 
  “모르지요. 아버지는 미군부대 군무원이셨고 어머니는 미군부대 앞에서 장사를 하시다 두 분이 만났대요.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몰라요. 인천 공원묘지에 묻히신 건 아는데 위치를 몰라요.”
 
  ― 어머니에게 듣지 못했나요.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는걸요. 돌아가셨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보러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도 수수께끼예요.”
 
 
  ‘네 속을 다 내게 분출해라’
 
  ― 어린 시절 비어 있는 페이지가 너무 많네요.
 
  “하나하나 알아내려 들면 제 인생이 너무 복잡해질 것 같았어요. 그냥 한 페이지로 뭉뚱그려 생각하고 넘어가야지. 그런 상황에서 부모 없이 겪는 사춘기잖아요. 내면엔 반항심과 어느 순간 터져버릴 것 같은 폭탄을 품고 있었던 것 같아요.”
 
  ― 가슴에 분노도 있었겠네요.
 
  “분노뿐이 아니었죠. 그때는 사찰이라는 곳이, 산속에서 전기도 없이 나무를 해와 밥을 해 먹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분노에 차 있는 사춘기였는데 어느 순간 중광스님이 제게 위로가 됐어요.”
 
  ― 어떻게요.
 
  “중광스님은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했지만 그것에 항상 책임을 지셨어요. 말도 절제해서 내놓고요. 그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제게 그러셨어요. ‘네 속에 있는 걸 다 분출해라. 나한테 다 얘기해라. 그러면 거기에서 아닌 건 골라줄 테니 버릴 건 버려라.’”
 
  ― 무슨 얘길 했나요.
 
  “이런 얘길 했죠. ‘나는 엄마가 원망스럽다. 어렸을 때 나를 버렸다. 내 형제들을 버렸다. 그럼 원망스러운 엄마에게 내가 어떻게 복수를 해야 되나. 돌아가신 엄마에게 내가 복수하는 방법은 엄마가 지옥 가길 원하는 거다’… 이런 식으로 꼬리를 물고 계속 말해요. 스님은 이걸 다 들어주셨고요.”
 
  ― 그게 무슨 얘기냐며 혼나진 않았나요.
 
  “‘여기는 꼬리가 너무 길다. 정리하는 게 좋겠다’며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래, 네가 엄마를 미워하는 것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그렇게 꼬리에서 꼬리로 계속 연결되면 나중에 그 꼬리 끝에서 행동으로 나오게 된다. 행동으로 나오면, 그때는 너도 잘못되고 나도 잘못되는 거야. 네가 편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엄마를 용서하는 방법을 찾는 거다.’”
 
  ― 사춘기 소년이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셨네요.
 
  “‘엄마를 미워하는 것까지만 해라. 용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자’ 늘 이런 식으로 정리를 해주셨어요. 그러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因果)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셨지요.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이런 대화가 없었다면 견뎌내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 원망이 극복이 되던가요.
 
  “아뇨,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도 불쑥불쑥 마음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럴 때는 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었지요. ‘어떻게 하면 이 혼란한 마음을 재울 수 있습니까’… 그러면 스님은 이 말씀만 하세요. ‘오늘은 마음을 좀 쉬게 해라.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마음도 오늘은 쉬고, 미움도 마음 밖에 그냥 내버려 둬.’”
 
  ― 역시 중광스님은 권위적인 분이 아니었네요.
 
  “용서가 굉장히 어렵잖아요. 정말 많이 사랑해야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 너도 그럴 수 있고, 나도 그럴 수 있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훨씬 빠르게 용서로 가게 되더군요.”
 
 
  자상했던 중광스님
 
  ― 처음부터 용서하려 노력하면 더 용서하기 힘든 거군요.
 
  “저는 굉장히 소심하고 내성적이었어요. 무슨 말을 들으면, 남들에겐 별거 아닌 말인데도 툭 털어버리지 못하고 예민하게 제 안에서 키웠거든요. 지금 돌아보면 여기에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겹쳐져 있으니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어요. 사고 칠 수 있었던 거죠. 중광스님을 만나면서 이게 박살이 난 겁니다.”
 
  ― 박살이 났다고요?
 
  “기존의 저의 그릇으론 중광스님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박살이 났죠. 저로서는 그걸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모습은 그게 아니었으니까요. 스님을 만났으니 박살 났지, 다른 어떤 스님도 저를 박살 낼 수는 없었어요.”
 
  ― 왜요.
 
  “어릴 때부터 절에서 살았기 때문에 절에서 사는 스님은 저를 박살 내지 못했어요. 그 세계에서 살지 않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게 중광스님이었죠. 중광스님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제 성격이 원래 이렇지 않았어요. 항상 말이 없고 사람들을 늘 피해 다녔어요.”
 
  ― 중광스님은 참 자상한 분이었네요.
 
  “충신동 시장 골목에 가잖아요? 할머니들이나 아이들이 물건 내놓고 팔고 있으면, 스님은 가진 돈을 다 꺼내서 다 주고 왔어요. 눈물도 많이 보이셨고요. 인생에서 가장 민감한 시기에 스님 옆에 있으면서 어머니와 형제들, 제 삶도 통째로 이해하고 페이지를 넘긴 거죠. 스님은 돈 욕심도 없었어요.”
 
 
  감로암의 그림 도둑들
 
  ― 욕심이 없으니 그걸 노리고 접근하는 이들도 있었겠네요.
 
  “그림 훔쳐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스님은 그림을 여러 장 둘둘 말아서 다락에 넣어놓고 신경을 안 쓰셨어요. 노리고 오는 분들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중광스님 돌아가실 때까지 모실 것처럼 접근하고선 어느 날 말아놓은 그림들을 통째로….”
 
  ― CCTV가 흔했던 시절이 아니니까….
 
  “제가 24시간 스님 옆에 있을 수도 없으니까요. 그 사람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다시는 안 나타났어요. 중광스님도 나중에 없어진 걸 알았고…. 그럴 때마다 물어보세요 ‘누구누구 요즘에 안 오나’? ‘안 옵니다’ 그러면 딱 한마디 하세요. ‘먹고살 만할 거다’… 그런 사람이 여럿이었어요.”
 
  ― 중광스님은 뭘 추구하신 건가요. 명예욕이었을까요.
 
  “유명해지고 싶어 추한 모습을 보인 게 아니냐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추한 것도 어느 정도지요. 자신을 그 정도로 추하게 만들면서 명예를 찾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실제 스님 안에 들어가 보면 굉장히 고독하고, 순간순간을 힘들게 사셨어요. 재산을 모아야겠다는 욕심도, 그림으로 유명해지겠다는 욕심도 처음부터 끝까지 없었어요.”
 
 
  몸과 바깥의 경계 없애려
 
  ― 기행은 구도(求道)의 방편이었을까요.
 
  “스님은 철저히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를 갈망했어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그런 자유가 아니라 우주의 떠돌이처럼 어떤 곳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 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삶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여기셨어요. 그러니 몸과 바깥의 경계를 없애려 하신 거죠. 고민하는 내적인 풍경까지 사람들한테 보여주진 않으셨죠.”
 
  ― 궁극의 무애(无涯)는 죽어야 성취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불교 말씀으로 이해를 해보자면, 깨달음은 살아서 깨닫는 거지, 죽은 후에 깨닫는 게 아니거든요. ‘살아 있을 때 자유로워져야 된다. 장애가 있을 때 자유로워져야 된다’ 생각하신 거죠.”
 
  ― 중광스님의 기행이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이렇게 이해하기까지 제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들였겠어요.”
 
 
  기타를 부순 법장스님
 
수덕사 방장과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법장스님. 사진=조선DB
  ― 중광스님 같은 분이 또 나올까요.
 
  “글쎄요. 자기 자신을 그렇게 철저히 추하게 만드는 게 쉽지 않아요. 사실은 그게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었어요. 화가로서 잘 알려진 자신마저도 추하게 만들어버리고 가셨어요. 다 무너트린 겁니다. 우리는 많은 것에 구속돼서 살잖아요. 인간 세계에서 자유를 실천한다는 걸 인간 세계는 받아들이지 않지요.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 감로암은 왜 나왔나요.
 
  “길이 안 보였어요. 스님은 음악적으로 저를 키워주려 하셨는데, 음악을 하는 분이 아니시다 보니 길을 잘 열어주지 못하셨어요. 세월은 자꾸 흐르고 길은 안 보였어요.”
 
  ― 그림을 해볼 생각은 없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스님도 음악 쪽으로는 본인이 길을 잘 모르시니, 나중엔 그림을 가르쳐주려고 저를 인사동 화랑에 데리고 다니시기도 했어요. 서화를 하라면서 서예 하시는 분들에게 소개도 해주시고… 저는 안 맞더라고요. 스님이 그림 그리실 때 옆에서 시봉을 자주 했어요. 그러면서 눈으로 본 건 많죠.”
 

  그렇게 도신스님은 감로암을 나와 산문(山門) 안으로 돌아왔다. 법장스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집이었다. 법장스님은 ‘노래하는 제자는 둘 수 없다’며 제자가 애지중지하는 기타를 7대나 부쉈다. 1990년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앞뒀을 땐 도신스님에게 엄포를 놓았다. ‘무대에 올라가면 우리 인연은 끝이다’… 도신스님은 결국 무대에 올랐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수덕사로 내려가 용서를 구했다.
 
  법장스님의 반대가 이해가 되는 것이, 수덕사는 한국 불교의 선맥(禪脈)이 중흥한 선지종찰(禪之宗刹)이다. 일주문 편액에는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이라 적혀 있다. 경허·만공의 깨달음이 서려 있는 곳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 어린 도신을 키워낸 아버지이기도 했던 법장스님은 제자의 노래를 끝내 말리지 못했다.
 
  “법장스님은 가끔 제게 노래를 해보라고 하셨어요. 제가 노래를 부르면 스님께서는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머금으시며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들으셨지요. 노래가 끝나면 부러 얼굴을 찡그리시면서 못마땅한 척을 하셨어요.”
 
  심장 수술을 위해 입원하고 있던 법장스님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침대 모서리에 왼손을 올려놓으셨단다. ‘팔이 저리십니까?’ 제자가 여쭈었다. ‘아니, 내가 팔을 올려놓으면 네가 와서 주물러줄 것 같아서….’ 스승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다음 날 스님은 입적하셨다. 2005년의 일이다.
 
  “법장스님이 말씀하셨어요. ‘너는 누가 봐도 스님 될 팔자다. 절대 중으로서 중심을 잃지 마라. 중은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게 중의 길이다. 절대 잊지 말아라.’”
 
 
  만나지 못한 여동생 세 명
 
도신스님의 시집 《웃는 연습》
  법장스님이 떠나신 후 스님의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초중고 검정시험을 보고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가 시를 공부했다. 시인 등단 후 지난해엔 시집을 냈다. 《웃는 연습》이다. 지은이는 ‘박금성.’
 
  ― 시집을 왜 속명(俗名)으로 냈나요.
 
  “위로해줘야 하는 그 아이가 제 속에 아직 남아 있더군요. 성인이 된 도신이는 살아갈 만한데요, 그 아이는 아직도 끙끙대고 있는 것 같아요.”
 
  스님의 솔직한 답변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의 시엔 여동생들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판자촌 금자’ 같은 시다.
 
  ― 출가한 후 여동생들을 한 번도 못 만나셨나요.
 
  “여동생이 셋 있어요. 바로 아래 동생 금자는 1964년생, 둘째 동생 마리아는 1966년생, 막내 금순이는 1968년생이에요. 금자는 사찰에 맡겼고, 다른 동생은 해외로 입양됐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들었는데….”
 
  ― 비구니가 됐다면, 오빠인 도신스님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전혀 연락이 없었어요. 저와 헤어질 때 금자는 여섯 살이었어요. 헤어질 때도 연신 물었어요 ‘오빠 언제 돌아오냐’며. 외할머니가 달랬죠. 오빠는 며칠 있다가 올 거라고. 그게 기억나요.”
 
  스님이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무대에 선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어머님을 용서했나요.
 
  “이젠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아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이해하고 있어요. 만약 어머님을 만난다면 포옹하고, 위로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