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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재일동포 미술품 기부왕 하정웅

“在日한국인의 미술은 쓰레기 따위가 아닌 보물입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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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여 년간 모은 국내외 미술품 1만여 점 공공박물관에 기증
⊙ 우연히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고향 기요사토(淸里) 찾아가
⊙ 기요사토에서 ‘일본인을 사랑한’ 미국인 선교사 폴 러시 만나
⊙ 다쿠미·폴 러시 기리는 행사 18차례 가져…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통해 인류애 가르쳐
사진=조준우
  재일동포 하정웅(河正雄·83) 선생을 만났다. 지난 7월, 그가 묶던 서울 광화문의 한 호텔에서 마주 앉았다. 코로나19로 한국을 찾지 못하다가 3년 만에 귀국해 전남 영암·광주 등지를 찾았다가 상경했다고 말했다.
 
  첫인상은 지친 표정이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3시간 넘게 이야기를 쏟아내면서 증기를 내뿜는 라디에이터처럼 얼굴이 열기로 붉어졌다. 고생담을 꺼낼 때 분명 머릿속에 불꽃이 일었으리라. 기자 역시 금전등록기의 “땡!” 소리처럼 한동안 머리가 멍해졌다.
 
  기자는 유화(油畵)의 매력에 빠져본 일이 없지만 ‘그쪽’ 세계의 낙원(樂園)을 경험한 자만이 아는 어떤 열정, 컬렉터의 헌신이 느껴졌다. 자수성가한 이의 자부심, 세월 앞의 겸손도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디아스포라’라는 운명적 갈급을 깊이 체험한 인물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재일(在日)동포 화가들의 그림을 오래전부터 수집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들을 되팔지 않고 어머니의 나라[母國]에 모두 기증해왔다.
 
  지난 50여 년간 한두 점씩 모은 1만여 점의 미술품을 영암군(3690여 점), 광주시립미술관(2603점), 포항시립미술관(1680점) 등 공공미술관에 순차적으로 기증해왔다. 피카소·샤갈·달리 같은 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은 물론, 전화황·이우환·곽덕준·곽인식 같은 재일동포 작가들을 비롯해 박서보·김창열·오승윤 같은 국내 대표 작가들의 작품까지 총망라되어 있다.
 
  기증 컬렉션으로 2012년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이 개관되었다. 영암은 부모의 고향이니 그에게 제2의 고향. 영암 상대포공원에서 하정웅미술관까지 1km가 하정웅로(路)로 지정됐다. 지난 6월 28일에는 하정웅미술관 창작교육관이 문을 열었다.
 
  광주시립미술관 분관 상록미술관은 2017년 3월 명칭을 하정웅미술관으로 바꾸고 그를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에 임명했다.
 

  더 기증할 것이 남아 있을까. 선생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아내 윤창자(尹昌子·80) 여사에게 물었다.
 
  ― 집에 아직 그림이 남아 있지요?
 
  “아뇨. 전부…. 돈 되는 그림은 전혀 없어요.”
 
  ― 하하하. 그림은 있는데 돈 되는 그림은 없다?
 
  “집에 있는 그림은 제가 그린 그림이에요.”
 
  그 말을 듣고 할 말이 없었다. 고급이든 저급이든 그림이, 예술이 메마른 영혼에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라면 그는 수많은 예술품을 기증해 한국인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하정웅컬렉션의 온기는 식지 않을 것이다.
 
 
  왕인 박사의 고향, 이순신이 머물다
 
재일동포 2세 하정웅·윤창자 부부. 사진=조준우 기자.
  ― 코로나19 때문에 3년 만에 오셨는데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가슴을 치며) 병 때문에…. 이거(수술)한 지 5년 됐어요. 금년에 들어와가지고 몸이 갑자기 이렇게 되어가지고…. 힘이 없어지고 조금 고생하고 있어요. 작년에 신장 수술한 후 집에서 가만히 있어야 했어요. 전에는 자주 한국을 왔다 갔다 했는데 말이죠.”
 
  ― 고향인 전남 영암에 선생님 이름을 단 ‘창작교육관’이 개관했다고 하대요.
 
  “그 얘길 하면 사연이 좀 길어요. 영암군 구림리에서 통일신라 때의 도기 가마터가 발견됐는데, 그러니까 20년 전 당시 김일태 군수(金逸太·민선 4~5기)가 인근 중학교 부지에다 도기문화센터(2009년 영암도기박물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를 건립한다는 겁니다. 그곳에 내 컬렉션을 기증해달라는 말씀이 처음 나왔어요. 벌써 도기문화센터 설계가 거의 완성될 쯤인데 기증을 요청했던 거예요.”
 
  ― 기증의 첫 인연이 그렇게 맺어졌군요.
 
  “내게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300여 점이 있었거든요. 흔쾌히 수락했지요. 그래서 내 컬렉션을 받아 설계를 변경해 3층까지 (건물을) 올렸어요. 그게 스타트가 되어 기증을 시작했어요. 나는 내가 기증하고 싶어 기증한 곳은 한 군데도 없어요. 다 요청이 있으면 그거를 도와줘야겠다고 해서 한 거지요. 그러다 보니 전국에 기증을 하게 된 거예요.”
 
  ― 영암이 고향이세요?
 
  “부모(河憲植·金潤金)의 고향이니 제2의 고향이지요. 그런데 영암이 왕인(王仁) 박사의 고향입니다.”
 
  왕인은 백제 근초고왕(서기 346~ 375년) 시절에 태어났다. 일본 응신천황(應神天皇) 초빙으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옹기장이, 기와장이, 대장장이 등 많은 기술자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인물이다.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떠났다고 전해지는 포구인 상대포가 박물관 근처에 있어요. 또 국립공원 월출산이 감싸고 있는 구림리는 그림 같은 마을입니다.
 
  매년 벚꽃이 만발하는 4월이면 영암에선 왕인박사 춘향대제와 왕인문화축제가 열려요. 내가 청소년기를 보낸 일본 아키타현(秋田縣) 가쿠노다테(角館)의 수양벚나무를 가져와 왕인박사 유적지와 도갑사에 심었지요.”
 
 
  “사람들은 ‘기증한 그림이 얼마짜리냐’에만 관심 가져”
 
지난 6월 28일 열린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 창작교육관의 개관식 모습이다. 사업비 44억원을 투입해 2019년 12월 착공했다. 사진 속 전동평 당시 군수(가운데)와 하정웅·윤창자 내외가 보인다. 사진=영암군 제공
  잠시 숨을 돌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또 임진왜란 당시(1596년) 이순신 장군이 영암을 찾은 일도 있다고 해요. 김 기자, 영암에 가본 적 있어요?”
 
  ― 아뇨. 말씀 들어보니 가보고 싶어져요.
 
  “너무 아름다운 곳이에요. 이후 영암하정웅미술관이 세워졌지만,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어요. 앞으로 (구림리가) 예술마을·문화마을로 변신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관광객도 유치할 수 있고…. 지금도 중국·일본에서 관광객이 많이 다녀가요.”
 
  ― 교통은 어떤가요.
 
  “KTX를 타가지고 광주 거쳐 나주에서 내려서 올 수도 있고요, 교통은 좋다고 할 수 없어요. 나쁜 조건이지만 프로그램만 잘 만들면, 오히려 나쁜 정주(定住) 여건이 반대로 관광에 긍정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아요. 일본이 그렇고 외국의 주요 도시가 그래요.”
 
  ― 전시관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문화 마인드를 갖게 하고 창작할 수 있는 공간을 꿈꾸었군요.
 
  “사람들이 ‘기증한 그림이 얼마짜리냐’ ‘(기증) 숫자가 몇 개’ ‘유명한 분이 그렸냐’에만 관심을 가져요. 나는 보여주는 식의 기증은 안 원한다고 했어요. 또 기증해서 자랑하고, 뭔가 잘했다고 하는 그런 만족감은 없습니다.
 
  태어나 죽는 순간까지 미학(美學)을 배우고, 예술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그런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면 좋잖아요.
 
  그래서 내가 종이에다 그림을 그려가며 전동평 군수(田東平·민선 6~7기)에게 ‘(예술인) 창작교육관을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흔쾌히 ‘해보겠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되면 앞으로 내로라하는 예술가들도 영암을 찾지 않겠어요? 실제로 정착한 예술인이 10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 영암이 예술인의 고장이 되겠네요.
 
  “그렇지요. 전 군수가 자기 임기 중에 그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결국 이뤄냈어요. 임기 종료 이틀을 앞둔 6월 28일 창작교육관이 문을 연 것이죠. 개관 행사에 꼭 참석해달라는 부탁 말씀도 있고, 궁금하기도 하고, 안 갈 수가 있겠습니까?”
 
  44억원의 예산으로 건립된 창작교육관(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337)은 토지 2017㎡, 건축 면적은 지상 2층 건물로 합계 1434㎡ 규모다. 별도의 미술관과 전시장, 수장고, 창작스튜디오, 교육실 등을 갖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하정웅의 아버지는 1928년 1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머니는 1938년 18세 때 일본에 와서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는 1939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모두가 아는 대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강제 징병과 징용, 창씨개명을 강요당하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는 등 20세기 가장 큰 고통과 고난이 밀려들던 시대”였다. 전쟁의 광기가 소용돌이치던 당시 오사카에서 아키타로, 그리고 사이타마로 전전하는 유랑 생활이 그의 가족사 전반부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간으로서 옳은 일을 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길러야 한다고 다짐했어요. 내 가족이야말로 재일동포사, 재일한국인 삶의 전형이었어요. 한국과 일본, 두 개의 조국을 이고 살아야 했죠.”
 
  ―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문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아키타 현립 도서관에서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1883~1966년)가 쓴 책을 읽었어요. 경성제대 교수, 일본 문부대신도 역임한 너무나 유명한 분입니다. 그의 저서 《청구잡기(靑丘雜記)》(1932년) 속에 실린 ‘아사카와 다쿠미를 추모하며’를 읽었어요.
 
  책 속에 ‘다쿠미는 올곧고 의무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벼슬에도, 학력에도, 권세에도, 부귀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노당당(露堂堂·아무것도 숨길 것 없이 당당하다는 뜻)하게 살아갔다’는 표현이 있더군요. 큰 감명을 받았어요.”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 1931년)는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다. 아니, 한국이 사랑한 일본인이자 한국의 말을, 예술을, 삶을, 그리고 친구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형인 노리다카(淺川伯敎·1884~1974년)도 ‘조선 도자기의 신’으로 일컬어질 정도였다.
 
 
  露堂堂이란 말은…
 
하정웅의 부모인 재일동포 1세 하헌식·김윤금. 어머니는 일본에서도 항상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다고 한다. 사진=포항시립미술관
  계속된 하정웅의 말이다.
 
  “아베 요시시게는 책에서 ‘나는 진심으로 인간 아사카와 다쿠미 앞에 머리를 숙인다’고 썼어요. 그 시기에 다쿠미 같은 일본인은 많이 없어요. 나는 그런 분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죠.
 
  그리고 나와 입장이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으로 일본 사회에 기여하고 일본인을 도와야겠다고 느꼈어요. 또한 한국인이기 때문에 모국을 돕겠다고 결심했지요.”
 
  ― ‘노당당’이란 말에 울림이 있네요.
 
  “그런 말은 일반인은 안 써요. 불교 선(禪)에 관한 말인데 나도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책에 해설도 없고. 의미를 알기까지 10년이 걸렸다면 믿으시겠어요?”
 
  ― ‘아무것도 숨길 것 없이 당당하다’는 속뜻은 무언가요.
 
  “해설을 하자면, 뭔가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로 나타나고, 좋은 마음이나 좋은 행동, 좋은 생각으로 했던 일은 반드시 그대로 좋은 일로 나타난다는 뜻으로 알고 있어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나쁜 일을 했다면, 나쁜 생각이나 나쁜 행위를 하면 비록 얼마 동안은 감춰질 수 있어도 거짓이 드러나게 된다고요. 그런 식으로 의미를 소화했고,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재일동포지만도,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고, 여러 가지 일본 사회에서 뭔가… 조선인이라서 곤란한 환경이 있잖아요. 그런 걸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에서 뭔가 좋은 일을 하고 가면, 또 좋은 마음에서 교제(交際)도 하면, 결국 좋은 일로 나타난다고 믿었어요.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님도 그런 마음으로 한국에 가서 살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한국인이 아직도 그분을 추모하잖아요. 나도 일본에서 경외(敬畏)를 받고, 그런 인물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아사카와 선생에게 배워서….”
 
 
  〈빈센트 반 고흐〉展의 추억
 
  하정웅은 아키타(秋田)공업학교 광산과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일류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명문학교였단다. 등교를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첫차를 타고 마지막 열차로 밤 8시반에 귀가하는 일과를 3년간 반복했다. “우렁찬 기적소리와 함께 증기를 힘차게 내뿜으며 발진(發進)하는 기관차와 같은 청춘이었다”고 회고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수학여행에 갈 수 없었지만 1958년 10월 도쿄에서 열린 〈빈센트 반 고흐〉전(展)을 보기 위해 여름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한 기억도 잊을 수 없다. “우에노 국립박물관에 혼자 그림을 보러 갔을 때만큼 가슴이 뛰고 설레었던 적은 없었다”고 고백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예술가 고흐의 그림에는 거짓 없는 그의 삶이 숨 쉬고 있었어요. 당시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도 같았어요.”
 
  고교를 졸업한 후 원하던 일류회사에 취직할 수 없었다. 취직 차별을 받았다. 월급(月給)이 아닌 일급(日給)을 주는 작은 전기배선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요요기에 있는 디자인 스쿨에 다니며 상업 디자인을 공부했다.
 
  “영양실조와 과로 때문인지 갑자기 눈이 캄캄해진 겁니다. 3개월 동안 안 보이는 상태였어요. 치료비 10만 엔을 빌렸는데 지금 돈으로 1000만원에 가까운 돈이야. 일급이 260엔밖에 안 되는 이에게 10만 엔을 빌려주는 분이 계셨어요.
 
  제가 결혼 후 많은 돈을 벌었어요. 돈 갚으러 찾아가니 ‘그저 준 돈인데 뭐 때문에 갚으러 왔느냐’고, 그런 말씀을 하데요.”
 
  ― 세상에…. 그분은 일본인인가요?
 
  “아버지 쪽 친척분이셨어요. 아무리 그래도 누가 돈을 빌려줘요. 바로 옆에 살아도 남남보다 독한 친척이 많아요. 그거 알아야 돼요. 안 받는다기에 그랬죠. ‘갚는 것은 내 책임, 내 의무’라고요.”
 
  수술을 무사히 마쳤지만 긴 요양 기간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회사에서 쫓겨나고, 학교도 그만두고 말았다. 집에서 눈이 낫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태풍으로 집이 침수되고 말았어요. 먹을 수도, 누워 있을 수도 없는 상태였어요. 조총련 구조대가 배를 띄워 우리 집에 찾아왔어요. 그때 이런 말을 듣고 귀가 번쩍했어요.”
 
 
  운명의 만남, 기요사토(淸里) 기행
 
  ― 어떤 말을 들으셨는데요.
 
  “‘북한 가면 대학에 다닐 수도 있고 병원비는 공짜, 집도 거저 준다’는 겁니다. 그 무렵 재일동포 10만 명 가까이가 북으로 갔어요. 이북이 천국이라 해서…. 나도 고민하고 있었죠.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갈까 말까…. 마치 무연고 병자처럼….”
 
  그는 1960년 5월 5일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귀국선’을 탈까 말까,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 등산만 한 게 없었다. 무작정 신주쿠(新宿)역에서 중앙선을 탔다. 고부치사와(小淵)역에서 증기기관차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타고 싶어져 플랫폼을 내려왔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헐떡이듯 산기슭을 올랐어요. 미나미알프스(南アルプス)의 산봉우리들, 눈앞에 펼쳐진 야쓰가타케(八ヶ岳)의 3000m급 봉우리가 내 마음을 두드렸어요.
 
  ‘기요사토(淸里)’라고 적힌 역에 기차가 잠시 멈춰 섰어요. ‘청정한 마을’이라…. 얼마나 로맨틱한 역 이름인가! 서둘러 기차에서 내렸죠.”
 
  그런데 내린 순간 몸을 찔러오는 듯한 냉기에 몸을 떨었다. 그곳은 해발 1275m의 고원지대였던 것이다.
 
  “정처 없이 기요사토역에서 내리고 말았는데 소 외양간 같은 역사(驛舍)에 내린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어요.”
 
 
  아사카와 다쿠미, 폴 러시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27세 때 모습이다. 당시 조선총독부 삼림과 직원이었다. 사진=효형출판 제공
  역 근처 여관에서 묵은 다음 날 주변을 거닐었다. 그제야 이곳이 일본 중부 지방 내륙의 야마나시현(山梨縣) ‘기요사토 무라(淸里村)’라는 지역임을 알게 되었다. 목장지대로 유명해 예전부터 명마(名馬)의 산지로 이름이 높은 곳이었다. 이 지역을 거마군(巨摩郡)이라고 부르는데 옛 지명은 고마군(高麗郡)이었다. 주민들 사이에선 이 일대가 한반도 고구려에서 건너온 기마인(騎馬人)이 정착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주위를 거닐자니 ‘아사카와(淺川)’라고 적힌, 이상할 정도로 많은 간판과 표찰이 눈을 잡아끌었어요. 혹시 아베 요시시게가 《청구잡기》에서 언급한 조선을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여관 주인에게 놀러 가볼 만한 곳을 물어보니 세이센료(淸泉療)를 추천했다.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위대한 인물을 알게 되었다. 또다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미국인 폴 러시(Paul Rusch· 1897~1979년)는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파괴된 YMCA를 재건하기 위해 일본으로 온 인디애나주 태생의 선교사였다.
 
  “농촌 전도와 농촌 봉사라는 실천적인 기독교 사상으로 무장한 그는 1948년부터 기요사토의 교육실험 계획, 전후(戰後) 일본의 농촌·산촌 부흥 모델을 실현코자 이 산골에 찾아온 것이었어요.”
 
  기요사토를 민주주의에 기초한 일본 재건(再建)의 거점으로 삼아 병원, 농장, 농업학교, 보육원 등을 세우고 식량과 보건, 신앙, 청년의 미래를 새롭게 구상하고 있었다. 세이센료도 그가 건설했다.
 
  “우리말로 ‘청리’라 불리는 기요사토의 발전 토대를 구축한 이가 폴 러시였어요. 그의 프런티어 정신을 제외하고 오늘날 기요사토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몇 년이 지난 후 하정웅은 어떤 끌림에 의해 기요사토에 땅을 샀다. 연고도 없던 이곳에 산막을 짓고 ‘은하장(銀河莊)’이라 명명했다. 밤하늘 별이 은하수처럼 빛났기 때문이다.
 
  그러고 세월이 흘러 1973년의 일이다. 한 번은 혼자서 기요사토의 세이센료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마주한 인상적인 소[牛] 그림에 이끌려 어느 응접실에 들어갔다. 소파에 조그만 체구의 백인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바로 만나고 싶었던 폴 러시였다.
 
  “여기는 어쩐 일로, 어디서 오신 겁니까?”
 
  “저 그림에 이끌려서 들어왔어요.”
 
  “스다 히사시(須田壽·1906~ 2006년)의 〈소를 파는 사람〉이라는 그림이에요. 미국종(種) 젖소를 일본에 처음으로 가져와 이 기요사토에서 실험적으로 사육했던 소를 모티브로 그린 것입니다.”
 
  “저도 스다 히사시의 석류(石榴) 그림을 좋아해 화집도 있어요.”
 
  “그 화집을 보고 싶군요.”
 
  그림이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대화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그는 이런 속내를 비쳤다.
 
  “내 이상과 로망 사이의 간격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이 고장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해줘서 고민에 잠겨 있던 중이었어요.”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일본 농촌을 부흥시킨 미국인
 
전후(戰後) 일본의 농촌·산촌 부흥 모델을 실현코자 기요사토를 찾은 폴 러시의 동상.
  그 말을 듣고 하정웅도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아사카와 선생은 책을 통해 만났지만 폴 러시는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니 더욱 감동적이었어요. 사실, 타향에서 이방인으로서 봉사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그의 고독과 적적함이 재일한국인인 나에게 공감으로 다가왔어요.”
 
  그로부터 몇 년 후 폴 러시는 기요사토를 떠나 다신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하정웅은 화집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마음이 무척 아팠다. 그의 말이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삶과 폴 러시의 삶을 생각하게 됐어요. 식민지 조선을 생각할 때 지배자의 입장이던 일본인, 패망한 일본에 들어와 농촌을 부흥시키려던 미국인이었어요.
 
  적(敵)으로 만나 싸움을 하더라도 그 지역을 사랑하고 지역민을 위해 기여하는 일에 일생을 바쳐 살아가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진짜 감동을 받았습니다.”
 
  잠시 침묵 후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비록 시대와 환경은 달라도 두 분의 생애를 생각할 때 재일한국인이라는 이방인 입장에서 공감을 느꼈어요. 어쩌면 저의 기증도 두 분 삶에서 배우고 느꼈을지 몰라요.”
 
  ― 기차여행 중 예정 없이 내린 기요사토가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이고, 그곳에서 폴 러시를 만난 사실이 우연일까요, 운명일까요?
 
  “우연이든 필연이든 어느 쪽이 됐건, 깊은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내가 기요사토에 내린 것이 지복(至福)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확신은 했지만 처음부터 기요사토가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이란 사실을 확인할 순 없었다고 한다.
 
  “그곳 산소에 가보면 ‘아사카와’ 성(姓)을 가진 비석이 많았어요. 나는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곳 사람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모르더군요.”
 
18차례 진행된 청리은하숙 행사
 
  하정웅 선생은 지난 2006년부터 아사카와 다쿠미와 폴 러시 선생의 삶을 기리기 위해 ‘청리은하숙(淸里銀河塾)’ 행사를 기요사토에서 진행해왔다. 코로나19로 중단됐지만 지금까지 행사를 18차례 이어왔다고 한다.
 
  한국의 수림문화재단이 추진하는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도 지난 2015년 10월 개교했다. 지금은 운영이 멈춘 상태. 선생의 말이다.
 
  “청리은하숙 행사의 목적은 인간의 가치 발견에 있어요. 일제강점기 한국의 산과 예술을 사랑하고,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보호한 아사카와 다쿠미의 삶과 철학을 발견하는 자리예요.
 
  또한 미군 통역장교로 일본에 들어와 전후(戰後) 어려운 일본 농촌과 일본인을 위해 헌신한 폴 러시의 인류애를 배울 수 있어요.”
 
  덧붙여 아주 시적(詩的)인 이야기를 했다.
 
  “기요사토의 밤하늘에 빛나는 아름다운 ‘은하’야말로 세계시민학교가 지향하는 코스모폴리탄의 세계정신과 인류애의 상징 아니냐고.”
 
  〈미륵보살〉의 온화한 미소에 반하다
 

  하정웅은 북송선을 기웃거리다 스물네 살 때 전자대리점을 경영했다.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둘 즈음, 미술품 컬렉션도 시작했다.
 
  “1973년 도쿄 신주쿠의 갤러리에 꼭 갖고 싶었던 무카이 준키치(向井潤吉·1901~1995년)의 그림을 보러 갔어요. 그 그림 옆 전화황(全和凰·1909~1996년)의 〈미륵보살〉을 만나면서 재일한국인 작가들의 작품을 컬렉션하는 계기가 됐어요. 머리를 약간 숙인 미륵보살의 온화한 미소를 보고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화황의 그림을 만난 이후 재일동포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재일 작가들은 일본과 한국 미술계에서 그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 작품을 수집하는 것을 두고 “아무런 가치도 없고 돈도 되지 않으며 종당에는 쓰레기처럼 공해만 될 뿐”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재일한국인 작품들이 언젠가 우리 민족과 한일(韓日) 역사에 대한 기록과 증언, 소중한 자료가 되리란 신념으로 컬렉션을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재일동포의 작품군을 컬렉션하게 된 동기는 하나가 더 있다.
 
  “내가 자란 아키타의 다자와코(田澤湖) 주변엔 댐과 수력발전소가 있었어요. 부모님이 그 댐 공사장에서 일했기에 아키타에서 살게 된 것이죠.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황이 나빠진 일본은 조선 노동자를 강제 연행해 이곳 주변에만 2000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무리한 공사와 영양부족으로 희생자가 많았다고 해요.”
 
  하정웅은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령하는 5620㎡(1700평) 규모의 ‘기도(祈禱)의 미술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지자체와 협의하니 흔쾌히 돕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술관 현판은 조선왕조 마지막 인물인 이방자(李方子·1901~1989년) 여사, 전각은 중요무형문화재 오옥진(吳玉鎭·1934~2014년), 건물 설계는 건축가 유동룡(庾東龍·일본명 伊丹潤·1937~2011년)이 맡도록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한일 간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 계획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어요. 바로 그 무렵 1992년 광주시립미술관이 창립되었죠.”
 
 
  “역사유산이자 기록·기억유산”
 
월북작가 조양규의 그림 〈31번 창고〉. 무표정한 얼굴, 로봇을 연상시키는 형상, 공장의 부품처럼 변하고 개성이 사라진 인간의 비애를 그렸다. 전후(戰後) 일본 리얼리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듬해 광주시립미술관에 미술품 212점을 처음 기증했다. 이후 2018년 8차례에 걸쳐 총 2603점을 기증했다. 광주시립미술관 측은 “양적, 질적으로 수준 높은 소장품을 갖춘 국내 최고의 공립지방미술관의 명성을 얻게 했다”고 반겼다.
 
  ― 불행했던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미술에 관심을 쏟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재일한국인 작가 중에 월북작가도 있습니다. 이북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한 작가, 북한서 예술영웅이 된 작가도 있어요. 예를 들면 진주사범 출신의 조양규(曺良奎·1928~?)라는 분이 있어요. 이념갈등과 남북분단으로 잊힌 화가지만 일본서 두각을 나타낸 비운(悲運)의 화가였죠. 대표작으로 〈창고〉 〈맨홀〉 연작 등이 있는데 그의 작품을 구하려 무척 애를 썼어요.”
 
  하정웅은 조양규의 작품 중 〈31번 창고〉 〈목 잘린 닭〉, 수채화 〈창고지기〉 등을 발굴해 국내에 소개했다. 조양규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1960년 10월 7일 북으로 떠난 이후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지금까지 국내 미술계의 재일동포 화가들의 연구는 해방 이전 유학파들의 세련된 회화에만 그쳤다. 예술사조로 보면 아름다운 화풍의 모더니즘 작품이 많았다. 반면 재일한국인 작가들은 자신과 조국에 대한 절박한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리얼리즘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들 작품은 전후 일본의 리얼리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김선희 전 부산시립미술관장)
 
  ― 재일한국인의 그림이 한민족의 다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통한(痛恨)의 미학으로, 통일이 되면 민족의 보물이자 문화재가 될 것이라는 신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재일 미술에 대한 이해와 미술사적인 포용”(김선희 전 관장)이 과제로 남아 있다. 그의 말이다.
 
  “내 미술 컬렉션의 콘셉트는 ‘기도’입니다. 재일한국인 2세가 50여 년을 들여 미술을 사랑하고 미술에 전 인생의 목숨을 바친 컬렉션은 한국과 일본 국민, 아니 인류의 컬렉션으로서 결실을 거둘 것입니다. 쓰레기 따위가 아닌 역사유산이자 기록·기억유산, 세계적인 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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