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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일본 斷想

두 번 잃었다가 되찾은 지갑

글 : 이석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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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갑 되찾고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도덕 수준과 사회적 의무감(책임의식) 느껴
⊙ 20년에 한 번씩 이세신궁을 새로 짓는 式年遷宮을 위한 植木을 몇 년 전에 이미 끝내
⊙ 親日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일본과 우리 자신을 직시해야

李石淵
1954년생. 전북대 법학과 졸업, 同 대학원 법학석사, 서울대 대학원 법학박사 / 23회 행정고시(1979), 27회 사법고시(1985) 합격 / 前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법제처장(제28대), 경제정의실천연합 사무총장,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 공동대표, 21대 총선 미래통합당 공천관리위원회 부위원장 / 現 법무법인 ‘서울’ 대표 변호사, 헌법포럼 대표, 책 권하는 사회 운동본부 상임대표 / 저서 《책 인생을 사로잡다》 《사마천 한국견문록》 《헌법은 살아있다》 등
일본 이세신궁은 20년마다 신궁을 다시 짓는 식년천궁을 행한다.
  나는 크라운 마크가 새겨져 있는 검정 지갑을 1990년부터 30년간 소지하고 있다. 접이식이 아닌 일자형 지갑이다. 오랜 세월 매일 갖고 다니면서 사용하다 보니 지금은 지갑 가장자리 올이 빠지고 가죽이 삭아서 무척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지갑을 쓰리라고 다짐하곤 한다. 이 소중한 지갑을 두 차례 잃어버렸다가 찾은 적이 있다. 지갑 안에 현금 등 귀중품이 잔뜩 들어 있는 상태로. 그것도 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갑 되찾음 사건은 일본에 대한 소회와 더불어 항상 내 뇌리에 새겨져 있다. 이제 그 일화를 공개하고자 한다. 앞부분은 분실사건이 있은 5일 후에 쓴 글로서 그대로 옮긴 것이고, 뒷부분은 그날 메모해둔 여행수첩을 토대로 사실관계를 복원한 것이다. 일본 단상 부분은 그간 느꼈던 나의 일본론(日本論)의 일단을 피력했다.
 
 
  지갑 안의 내용물 그대로
 
일본에서 두 번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지갑.
  2003년 11월 8일 고베(神戶) 포토피아(Portopia) 호텔에서다. 나는 그날 한일변호사협의회 참석차 이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기억하기론 오후 1시경 호텔 로비 층에 있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중에 양복 상의에서 지갑을 꺼내어 명함과 전날 환전한 돈이 정확히 얼만지 확인한 바 있다.
 
  지갑에는 일본 엔화 12만6000엔(한화 127만원 정도)과 한국 돈 12만5000원(자기앞수표 10만원권 1매 포함), 여러 은행 신용카드와 신분증 그리고 내 사진 2매와 명함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날 오후 4시15분발(發) 도쿄행(行) 신칸센 티켓(전날 예매)이 같이 들어 있었다(그때 나는 게이오대 객원연구원으로 한국과 일본 도쿄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아마 화장실 문 뒤쪽에 걸어놓은 양복 상의에 지갑을 넣기 위해서는 용변 도중 일어나는 번거로움이 있으므로 용변 후에 넣으려고 지갑을 용변기 뒤에다 올려놓고서 그대로 나온 것 같다. 나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곧이어 오후 1시 반부터 시작된 한일·일한 변호사협의회(25회) 정기총회에 참석하고 이어 일본 측 회장(新堂行司 교수)의 특강을 들으면서 오후 세미나 일정을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3시경에 호텔을 나서 신(新)고베역으로 향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바빴다. 그런데 강의가 끝날 무렵 호텔 직원이 내 자리에 찾아와 메모지와 함께 내 지갑을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메모지에는 “李石淵 先生 LEE SEOG-YEON 1F トイレに忘れ物”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지갑을 잃어버린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가 지갑을 받아들고 비로소 상의 안쪽의 오른쪽 호주머니가 텅 비어 있는 현실을 인지하고 말문이 막혔다. 정확히 1시간 반 동안에 지갑이 주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분실되어 호텔 측의 노력에 의해서 나한테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다행히 지갑에 명함과 사진 등이 있고 그 호텔에서 한일변호사협의회가 개최되고 있은 덕에 주인을 찾기가 좀 용이했는지도 모른다. 지갑 안의 내용물은 그대로 있었다. 나는 지갑을 누가 습득해서 호텔 측에 주었으며, 나를 어떻게 찾아오게 되었는지 등의 과정은 묻지 않았다. 일단 호텔 프런트에 고맙다는 마음을 거듭 전했다.
 

  누가 주웠든 일본 돈 현금이 130만원 가까이 들어 있는 지갑을, 그것도 외국인의 것을, 쉽게 주인을 찾아달라고 호텔 측에 넘겨준(그가 비록 호텔 직원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그날은 토요일로 오후 무렵 호텔에 여러 행사가 있던 관계로 많은 사람으로 붐벼 호텔 종업원이 습득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사람의 마음가짐에 감탄과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도덕 수준과 사회적 의무감(책임의식)의 일단을 보는 것 같았다.
 
  오늘날 일본 경제가 좀 침체되고, 일본 정치인들의 잇단 한국 폄하 발언 등으로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이 악화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을 이룬 일본의 저력(底力)은 이와 같은 작은 일(나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에서부터 아직도 건재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지난 일에 연연하지 말자
 
  이번 ‘지갑 되찾음 사건’에서 나는 3가지를 깨닫고, 반성하면서 개선해야 할 사항으로 꼽았다.
 
  첫째, 건망증이 심각한 것이 아닌가이다. 이런 유사한 일이 종종 있었다. 그날 오전만 해도 로밍이 된 휴대전화를 한일 양국 이사회 회의실 자리에다 그대로 둔 채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이 사실 역시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20여 분 후 경수근 변호사가 식당에서 휴대전화 주인이 누구냐고 찾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두 번째, 그날 두 번의 분실 사건에서 보듯 작은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내 소심한 성격에서 분실 원인이 제공되었다고 생각하고 성격 개조 (내지 개선) 노력이 요구되었다. 내 결함 중 하나는 지난 일에 지나치게 연연해하거나 작은 일에 화내거나 신경 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재를 편안하게 즐기는 마음의 자세가 부족하여 스트레스가 쌓이고 건강이 퇴보되는 상황이 종종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세 번째, 크게 깨달은 것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닥친 어떤 사실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 즉 운명의 화살을 피하기 위한 노력 없이 운명이 나를 비껴가거나 나를 옹호해주는 행운을 얻게 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지갑을 잃어버린 사실을 알고 전전긍긍했다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정신건강 훼손은 물론 자태의 초조함을 드러냈겠는가. 오히려 그럴 경우 정작 지갑을 찾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 지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건망증에 유념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사소한 일에 신경 쓰면서 속으로 꿰맞추려는 초조함과 나약함을 드러내는 생활을 과감히 탈피하여야 한다.
 
  “지난 일에 연연하지 말고 특정인을 미워하지 말고, 작은 일에 화내지 말며 최선을 다하는 생활자세, 앞으로의 일은 신에게 맡기고 현재의 이 순간 오늘의 이 시간 자체를 즐기는 것이 행복한 삶을, 보람 있는 삶을, 건강한 삶을 사는 길이다.”(괴테)
 
 
  제주의 택시 기사
 
  그날 포토피아 호텔에서 지갑을 되찾은 사건을 접하면서 문득 떠오른 사건이 있었다. 2003년 5월 30일 제주 서귀포 KAL호텔에서 열렸던 역시 한일변호사협의회 판례발표회 때의 일이다. 행사가 모두 끝나고 저녁 식사 도중에 일본 측 하마다 히데토시(濱田英敏·일본 오이타현 소속) 변호사가 서귀포 시내에서 쇼핑을 하고 오는 길이라면서 내가 있는 테이블로 허겁지겁 합류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택시 기사라고 밝힌 한 분이 호텔 직원과 함께 우리 테이블로 와서 자기 택시에 떨어뜨리고 갔다면서 하마다 변호사의 지갑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지갑 안에는 많은 현금과 각종 신분증명서, 카드 등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운전기사의 높은 도덕심과 책임의식에 찬탄을 보냈으며 그 사실을 글로 써서 공표하려다 그만 게으른 탓에 그치고 만 적이 있었다. 하마다 변호사 역시 지갑을 분실한 사실을 찾을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점, 내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그날 신칸센을 타기 위해 급히 포토피아 호텔을 나오면서 마침 로비에서 바로 하마다 변호사와 조우(遭遇)하였다. 내가 규슈의 오이타에 가면 한번 연락하겠다고 하였더니 부디 그렇게 해달라면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물론 지갑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으며 그럴 시간도 없었다.(2003년 11월 13일 게이오대학 연구실에서)
 
 
  도바역에서
 
  2010년 10월 12일 나는 나고야에서 용무를 마치고 이세신궁(伊勢神宮)으로 가기 위해 도바(鳥羽)행 열차를 탔다. 늦은 시각 미에현(三重縣) 도바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1박 했다. 도바는 온천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미키모토 고키치(御木本幸吉)가 세계 최초로 진주 양식에 성공한 곳으로, 지금도 미키모토 진주는 세계적인 상품이다.
 
  다음 날 오전 9시 도바역 티켓 구매 창구에서 이세행 티켓(230엔)을 사려고 지갑에서 1000엔 지폐를 꺼내 티켓과 거스름돈 동전을 받아들고 지갑은 그대로 티켓 창구 위에 놓은 채 9시10분발 열차를 타려고 승차체크대를 지나 지하층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지갑을 놓고 온 줄 전혀 모르고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9시8분경 티켓 창구의 여직원이 황급히 계단을 내려와 나를 발견하고 지갑을 건네주고 총총히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고맙다는 말만 하고 경위를 물어볼 경황도 시간도 없었다. 이미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티켓을 구매할 때 영어로 말하고 특히 “nine ten(9시10분)”을 복창한 것을 여직원이 기억하고 있어서 열차 출발 전임을 알고 쏜살같이 플랫폼으로 달려온 것이리라. 아마 내 다음으로 온 승객이 티켓 창구 받침대에 있는 지갑을 발견하고 그 여직원에게 건네준 것으로 추정된다.
 

  지갑에는 엔화 9만 엔(110만원 정도)과 각종 신용카드, 신분증 등 귀중품이 들어 있었다. 그날 나는 이세역에 9시27분에 도착(17분 소요)하여 2시간 반에 걸쳐 이세신궁 내 외궁을 둘러보았으나 종일 도바역에서의 그 극적인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바역 근무 그 여직원의 투철한 직업윤리와 책임의식을 일본 언론에 기고하여 널리 알리고자 생각했다. 하나 차일피일 미루다 시기를 놓치고, 이제야 그 일화를 활자화한다. 당시 20대 초중반 정도의 그 직원이 지금도 그 역에 근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벌써 10년이 지났으니….
 
  나는 1996년 이후 일본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자주 가는 편이었다. 그 때문에 일본에 대한 호오(好惡)의 감정이 누구 못지않게 있을 수 있다. 특히 2003년 9월부터 2005년 3월까지 게이오대학 객원연구원(visiting scholar) 시절은 격주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머물렀다. 일본의 역사와 인문지리에 대해 꽤 연구하고 현지답사를 한 바도 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저력과 문제점 또한 누구 못지않게 깊이 인식하고 체험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감정적이고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인 성급한 평가를 자제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방자한 태도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에 입각한 의견 표출도 자제하고 있다. 다만 이곳에서는 내가 구상하고 있는 일본, 일본인론의 극히 일부를 생각나는 대로 간략히 적는다.
 
 
  ‘가깝고도 모르는 나라’ 일본
 
메이지시대에 340만 부가 팔려나간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
  우리는 일본을 흔히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가깝고도 모르는 나라’라고 말하고 싶다. 일본을 모르면 많은 것을 잃고 사는 것이 된다. 일본은 들여다보면 빠져들고 등을 돌리면 잊는 나라다.
 
  과거 일본이 우리로부터 많은 문물을 들여다가 오늘의 번영을 이루었다며 일본을 모방의 천재, 기술 복제의 도사라고 흔히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노벨상의 진수(眞髓)인 과학상 분야(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에서만 일본은 24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2020년 현재).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또 하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일본 저력의 이면, 즉 에도시대(도쿠가와 막부)부터 메이지(明治) 이전까지 일본 국민의 절반 정도가 글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에도시대 데라코야(寺子屋)라는 서민교육기관이 설치되어 평민들을 교육한 결과다. 19세기 중엽 세계적으로 식자율(識字率)이 50%에 달한 나라는 영국밖에 없었다.
 
  1862년에 출간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학문의 권장》이 340만 부 넘게 팔렸다고 한다. 당시 일본 인구가 3500만명인 것에 비할 때 그들의 독서열은 광기(狂氣)에 가까웠다. 이것이 바로 메이지유신과 군국주의(軍國主義), 나아가 오늘의 일본을 이룬 원동력이기도 하다. 반면 일본을 미개국(未開國)으로 여기던 우리는 20세기 초 문맹률이 90%가 넘었다. 우리는 일본의 저력을 제대로 알고 일본을 극복[克日]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가끔 열차를 타고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기찻길이 마을에 바짝 붙어 있다. 벌판이 푸름으로 가득하다. 어느 곳 하나 빈 곳이 없다. 모든 면에서 이제 일본은 서구 모방의 단계를 지나 자기화 내지 창조를 향한 자신감의 단계에 들어서 있음을 느끼게 된다.
 
  과거 우리를 통하여 문물을 받아들이고 국가 형성과 발전을 이룩하였던 일본인들이 근대에 눈이 먼저 뜨이자 그들은 그들의 발전시험장으로 한반도를 택했다는 불쾌한 현실 앞에 우리는 분개한다. 그러나 화려했던 과거를 매양 운위한다는 것은 그만큼 부족한 현실을 합리화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힘(정신력)을 지녀야 한다.
 
  그간 일본이 방자하고 무례할 때마다 우리는 흥분하고 개탄하지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격분과 망각을 되풀이했을 뿐 천편일률적인 반응만 되풀이해왔다. 종종 국내 정치적으로, 국민 단합용으로, 정략적으로 일본을 편리하게 이용하는 세력에게 박수를 쳐주기도 하면서.
 
 
  이세신궁에서
 
이세신궁 앞에 선 필자.
  일본의 철저한 준비성, 미래 대처 능력은 소름 끼칠 정도다. 내가 그날 도바에서 이세신궁에 갔을 때 안 사실이지만 20년에 한 번씩 신궁을 새로 짓는 식년천궁(式年遷宮)을 위한 식목(植木)을 몇 년 전에 이미 끝냈다고 한다. 20년 후의 일을 지금 해놓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로서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들은 이렇게 철저하다. 그들의 잣대로 우리를 볼 것은 아니어도 그들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일본의 신궁이나 신사(神社) 구역은 철저히 통제되고 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정도로만 공개된다. 밖에서의 촬영도 금지된다. 반면 바티칸성 베드로성당 내부와 기자의 피라미드 안에서까지 카메라를 들이대어 물의를 빚었던 그들이기도 하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주고 있는 JR패스 일등석을 휴대하고도 신칸센(도카이도, 산요, 규슈 신칸센) 중에서 가장 빠른(정차역이 적은) 노조미와 미즈호는 탈 수 없도록 하고 있는 그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본을 알아야 한다. 역사상 한 민족이 이웃 민족을 이렇게 2000년 동안 괴롭히기만(?) 한 예는 없었다. 역사를 제대로 알면 우리는 일본에 대해 너그러울 수가 없다. 물론 오늘의 일본인들이 과거 그들의 선조(先祖)들이 벌인 집단적 광기 형태의 침략의 잔인성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 그럼에도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적극적인 양심회복 운동을 기대해야 한다.
 
  일상적 삶에서는 앞서 분실 지갑 사건에서 보듯이 지구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선량하고 책임을 다하는 일본인들이다. 하지만 예의와 싹싹한 미소 뒤에 차가운 무표정을 숨긴 그들이기도 하다. 일본인의 생활문화에 접해보면 처음에는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에 감탄하다가 나중에는 그 천편일률적이고 철저한 구역주의(이른바 나와바리 정신)에 갑갑함을 느끼기도 한다.
 
  일본은 우리로부터 배워갔다. 지금도 우리보다 우리를 더 철저히 연구한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우지 못하였다. 배울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자가 더 가지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동안 일본의 무례와 방자에 대하여 격분하고 개탄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
 
  그간 한국 사회는 ‘친일(親日) 프레임’ 내지 ‘친일 트라우마’에 빠져 있었다. 한국 사람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친일파’라는 프레임이 덧씌워지는 것이다. 친일파라는 말을 과잉해석해서 일본에 당연하게 해줘야 하거나 당연한 평가를 해야 하는 상황까지도 끌어넣고 한일 간 여러 현안을 파행적으로 몰고 갔다. 특히 정치권이 이를 부추겼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왜냐, 우리가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일본을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런 바탕에서 양국은 상호보완적・협력적 관계로 나갈 수밖에 없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양국은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다고 하는 견해도 있겠지만 필자는 위 지적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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