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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책으로 세상 읽기

박종인의 《매국노 고종》

“高宗은 매국노, 萬惡의 근원, 기생충이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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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무개혁’ 추진한 ‘계몽전제군주’로 포장된 고종의 무능과 탐욕을 신랄하게 고발
⊙ 포퓰리즘, 책임 회피, 유체이탈 화법, 言行 불일치, 재정 파탄, 정권안보 집착, 편가르기, 비판 봉쇄 등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흡사
⊙ 고종, 한일의정서·을사조약 앞두고 일본으로부터 돈 받아
⊙ “황제는 이 나라에 끔찍한 해충이며 저주”(알렌 駐韓미국공사), “왕관을 쓴 자들 가운데 최악으로 비겁하고 최하급”(미국 기자 스트레이트)
⊙ “直視하는 사실의 역사만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
  거리를 걷다가 낯익은 간판을 발견한다. 뮤지컬 〈명성황후〉 공연 홍보물이다. 이 뮤지컬이 처음 상연된 것이 1995년으로, 기자는 20년 전쯤 이 뮤지컬을 관람했다. 극중에서 민비(閔妃)의 혼령과 등장인물들이 ‘조선이여, 일어나라’를 합창하는 대목은 사뭇 감동적이었지만, 주한외교사절의 부인이 민비에게 “세상에서는 전하를 ‘조선의 엘리자베스’라고 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쓴웃음이 나왔다.
 
  이 뮤지컬의 인기를 타고 공영방송 KBS에서도 2001년 5월부터 2002년 7월까지 TV드라마 〈명성황후〉를 방영했다. 당시 KBS는 “민족사관에 기초한 우리 역사의 바로 보기와 역사를 통한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되어 기획되었다”고 기획의도를 밝히면서 이 드라마를 “화려한 외교술과 뛰어난 지략, 조선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이끈 위대한 철의 여인 명성황후의 이야기”라고 요약·설명했다.
 

  헛웃음밖에 안 나오는 소리였다. 민비가 정말 유럽 서쪽 변방의 작은 왕국이던 영국이 세계 제국으로 올라서는 기틀을 마련했던 엘리자베스1세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었나? 100여 년 전 조선의 역사가 ‘승리의 역사’였고, 민비가 그 ‘승리의 역사’를 이끈 ‘위대한 철의 여인’이었나?
 
  뮤지컬이나 드라마는 ‘허구(虛構)’의 영역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원로(元老) 국사학자는 고종(高宗)을 ‘계몽군주’로 떠받들었다. 어느 정치학자는 고종을 ‘백성의 나라’를 꿈꾸었던 명군(明君)으로 추켜올리면서, 대한제국이 착실하게 근대화를 추진해나가던 당대(當代) 아시아 2위의 경제·군사 강국이었다고 주장한다.
 
  소위 ‘진보 정치인’들도 그러한 주장에 장단을 맞추었다.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은 취임 전인 2017년 정초에 “1897년 정유년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해였다”면서 “2017 정유년 대한민국은 이순신 장군의 비장한 재조산하(再造山河·나라를 다시 만든다) 정신, 고종의 이루지 못한 새로운 나라 꿈이 합쳐져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도전과 변혁이 시작되는 해로 기록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원순(朴元淳) 전 서울시장은 조선호텔 옆 환구단에서 덕수궁을 돌아 옛 러시아공사관에 이르는 길을 ‘대한제국의 길’로 선포했다.
 
  긴 소리 할 것 없이 고종이 그렇게 영명한 임금이고 대한제국이 경제·군사 강국이었다면, 대한제국은 왜 그렇게 맥없이 일제(日帝)의 식민지가 됐나?
 
  고종과 민비와 그 정권을 찬양하다 보면 결론은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고, 평화롭게 자주적 근대화를 향해 나가던 조선을 침탈한 일본 놈들만 나쁜 게 된다. 물론 이웃 나라를 침략한 일본 제국주의는 나쁘다. 하지만 일본만 나쁜 놈들이고, 당시 조선은 잘못한 게 없는가? 반성할 게 하나도 없는가?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이 ‘역사 바로 보기’고 ‘민족 자긍심을 회복시키는 일’인가?
 
 
  매국노, 萬惡의 근원, 기생충
 
박종인 《조선일보》 기자.
  《조선일보》에 ‘박종인의 땅의 역사’를 연재하고 있는 박종인(朴鍾仁) 기자의 최근작 《매국노 고종》(와이즈앱 펴냄)은 ‘고종 계몽군주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책이다.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이라는 잣대로 고종의 치세(治世) 43년을 들여다보는 저자는 ‘고종은 매국노(賣國奴)’라고 단언한다.
 
  “구한말에 근대화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고종 때문이었고, 그 근대화에 뒤처진 것도 고종 때문이다. 조선을 찾은 외국 사람들이 가난해서 불쌍하다고 혀를 찰 정도로 국가 경제가 파탄 난 것도 고종 때문이다. 고종은 만악의 근원이다.”
 
  저자는 고종을 ‘매국노’ ‘만악의 근원’이라고 지탄(指彈)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고종은 욕심에 굶주린 기생생물 같았다. 기생충은 숙주(宿主)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 숙주가 생명이 끊기는 순간 기생충 또한 생명이 끊긴다. 그래서 기생충은 숙주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장기(臟器)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데 고종은 ‘숙주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는 기생충의 기본 생존 원칙을 무시했다. 권력 유지라는 이기적인 탐욕이 모든 생존 원칙을 앞섰다.”
 
  이쯤 되면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사자(死者)명예훼손’으로 소송이라도 걸어오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두 눈 부릅뜨고 직시하는 고종 치세 43년의 역사는 초·중·고교 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한국인이라면 익숙한 역사다. 안동 김씨 세도, 고종의 즉위와 파락호 이하응(李昰應)의 극적인 집권, 대원군(大院君)과 민비의 권력 다툼,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동학봉기, 갑오경장(甲午更張), 을미사변(乙未事變), 아관파천(俄館播遷), 대한제국 선포, 러일전쟁, 을사조약(乙巳條約), 헤이그밀사 사건, 군대해산, 경술국치(庚戌國恥)…. 멀리는 김동인(金東仁)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부터 뮤지컬과 드라마로 만들어진 〈명성황후〉,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등을 통해 수없이 변주(變奏)되었던 속상하고 못난 역사다. 저자는 그 역사의 상처들을 하나하나 헤집는다. 그 일이 쓰리고 아프지 않을 리 없다. 저자는 “직시(直視)하는 사실의 역사만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며 이를 악문다.
 
 
  형식적으로는 신하들의 의견을 따르지만…
 
  저자를 따라서 대원군 집정(執政)에서 망국(亡國)에 이르는 역사를 연대기적(年代記的)으로 훑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얼굴이 있다.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지도자’라는 이 책의 부제(副題)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언급했고 지금은 문재인 정권의 실정(失政)에 대한 야유가 되어버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먼저 고종의 의사(意思)결정 과정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보자.
 
  “그는 자기 의견이 있더라도 이를 처음부터 제시하지 않고, 반드시 신하들 입에서 나온 의견을 좇는 형식으로 주장을 관철시켰다. 스스로 의견을 내기보다는 관료들의 의견을 마지못해 따르는 식으로 정책을 결정하고는 했다. 관료들에게 의견을 물을 때는 이미 뒤로 모든 계산을 마치고,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모든 결과를 다 예상하고, 그리고 그 결과물이 자기 권력 유지 및 강화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난 다음이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윤석열(尹錫悅) 검찰총장 찍어 내기 작전’이 벌어지는 내내 추미애(秋美愛) 법무부 장관 뒤에 숨어서 자기 의견을 내지 않았다. ‘2개월 정직(停職)’이라는 윤석열 총장 징계안이 올라가자마자 바로 재가(裁可)를 했다. 법원이 징계를 뒤집는 결정을 내리자 청와대는 마치 대통령에게는 윤 총장 징계에 대한 재량(裁量)의 여지가 없었다는 투로 대통령을 싸고 돌았다. 그러고는 버티는 추미애 장관의 등 뒤에 대고 “추 장관의 사의(辭意) 표명과 거취 표명을 높이 평가한다”면서 손절(損絶)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기준은 오로지 ‘자기 권력의 유지 및 강화’였다. 그가 ‘계산’하지 못한 것은 윤석열 총장이 그렇게 완강하게 저항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김명수(金命洙) 사법부’ 내에서 ‘법대로’ 판단하는 판사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黑字 재정 물려받아 赤字 전환
 
  뒷일은 생각지 않고 포퓰리즘 정책부터 덜컥 내놓는 점도 닮았다. 대원군을 몰아내고 친정(親政)을 선포한 직후 고종은 연강세(沿江稅)·문세(門稅) 등 대원군 시절에 만들었던 세금들을 전격 폐지했다. 서양 세력의 침공에 대비해 강화도 등지의 군비(軍備)를 강화하기 위해 신설한 일종의 방위세(防衛稅)였던 이 세금들을 폐지하면서 고종은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바가 적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은 “예부터 시행하던 세금 또한 지나치게 거두는 폐단이 없지 않다고 한다”고 아뢰었다. 하지만 고종은 “옛 세금과 새 세금은 당연히 구별해야 한다”고 일축했다. 진정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정책이 아니라 ‘대원군 적폐(積弊)’ 청산을 통해 백성들의 박수를 받기 위한 것이었음을 자인(自認)한 셈이다.
 
  압권은 청전(淸錢) 철폐였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重建)을 위해 당백전(當百錢)이라는 악화(惡貨)를 발행했다가 경제가 망가지자 1867년에 청나라 동전을 들여와 유통시켰다. 엄밀히 말하면 새로 청전을 들여왔다기보다는 기존에 민간에서 유통되던 청전을 양성화(陽性化)시킨 것이었다. 청전은 시일이 흐르면서 상평통보와 마찬가지로 통용됐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청전도 악화이기는 마찬가지여서 물가 앙등 등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고종은 친정 선언 직후인 1874년 1월 전격적으로 청전 폐지령을 내렸다. “백성들 상황을 생각하면 비단 옷과 쌀밥도 편안하지 않다”면서….
 

  악화이기는 해도 청전은 이미 7년 동안 유통되어온 화폐였다. 백성들은 청전으로 물건을 사고팔았고, 세금도 냈다. 하루아침에 청전이 폐지되면서 관아(官衙)에서 보유하고 있던 300만 냥이 졸지에 고철 덩어리가 돼버리고 말았다. 호조(戶曹)의 가용 재원은 단돈 800냥으로 줄어들어 버렸다. 자신의 실책(失策)으로 비어버린 국고(國庫)를 채우기 위해 고종은 흉년에 대비해 저축해놓은 사창(社倉)의 환곡(還穀)까지 돈(상평통보)으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여기서 우리는 전기요금 인상, 화력발전 증가로 인한 탄소 배출량 증가, 기업의 에너지 비용 증가 등 그 후과(後果)는 고려하지 않고 호기롭게 탈원전(脫原電)부터 덜컥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의 행태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기가 막힌 것은 고종이 이렇게 국가 재정을 순식간에 파탄 냈지만, 대원군 시절에는 사대문 안에 창고를 새로 지어야 할 정도로 재정이 넉넉했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李明博)·박근혜(朴槿惠) 정부 시절 통합재정수지가 거의 매년 흑자(黑字)를 기록해 10년 누적 흑자액이 115조원에 달했지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불과 2년 만에 91조원 적자(赤字)로 반전(反轉)한 것을 떠올리게 된다.
 
 
  유체이탈 화법
 
  흔히 문재인 대통령의 화법(話法)을 두고 ‘유체(幽體)이탈 화법’이라고 한다. 이 점에서도 고종은 문재인 대통령과 판박이다.
 
  1874년 6월 9일 영의정 이유원은 고종에게 “최근 신문고(申聞鼓)를 치는 사람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고 말했다. 고종의 실정(失政)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한 고종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대궐문을 엄중하게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875년 3월 25일 고종은 경복궁의 세 전각(殿閣) 수리 공사를 시작하게 했다고 신하들에게 알렸다. “현 재정 상태가 매우 궁핍하여 경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며 난색을 표하는 영의정 이유원에게 고종은 이렇게 말했다.
 
  “경비를 의정부에서 알아서 조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을 해나가겠는가?”
 
  ‘공사는 내가 명령했지만, 그 비용은 3정승이 알아서 조달하라’는 소리였다.
 
  1894년 5월 20일, 동학란을 진압할 원병(援兵)을 청(淸)나라에 요청하는 문제가 논의됐다. 영돈녕부사 김병시(金炳始)가 말했다.
 
  “지금 다른 나라 군사를 요청한 것은 우리나라 백성을 모두 죽이는 것이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관(史官)이 이를 기록해 후세가 보게 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고종이 대꾸했다.
 
  “참으로 그렇구려!”
 
 
  아름다운 말, 지키지 않은 약속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아름다운 약속’들을 많이 했다. 사진=조선DB
  유체이탈 화법과 동전의 앞뒤 면을 이루는 것이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인 말과 행동이다. 1882년 임오군란 후 고종은 〈죄기윤음(罪己綸音)〉이라는 ‘반성문’을 내놓았다.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고 백성들 재물을 억지로 긁어 곤궁하게 만들었으니 나의 죄이다.’
 
  ‘화폐를 고치고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인 것도 나의 죄이다.’
 
  ‘기호품을 구하고 상 내리기를 절도 없이 한 것도 나의 죄이다.’
 
  ‘종친(宗親)과 척신(戚臣)을 높인 것도 나의 죄이다.’
 
  ‘시장이 폐업한 것도 나의 죄이다.’…
 
  2년 후인 갑신정변 후에도 고종은 거의 흡사한 ‘반성문’을 썼다. 여기서 고종은 ‘이 서약의 말을 하노니, 말로 너희들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다짐까지 덧붙였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퇴위(退位)할 때까지 계속해서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고 백성들 재물을 억지로 긁어 곤궁하게 만들었다. 화폐를 고치고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기호품을 구하고 상 내리기를 절도 없이 하느라 재정을 파탄 냈다. 마지막까지도 민씨 척족(戚族)과 왕실붙이들을 끼고 돌았다. 그는 서약의 말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고, 말로 신하와 백성들을 속였다. 《매국노 고종》에는 그 구체적인 사례들이 지겹도록 이어진다.
 
  문득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가 생각난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분열과 갈등의 정치도 바꾸겠습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치지 않겠습니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습니다.”…
 
  아름답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은 공허해진 그 말과 다짐들…. 고종이 집권 기간 중 여러 차례 되풀이했던 다짐과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와 수많은 연설은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라는 점에서 판박이다.
 
 
  ‘국가안보’보다 ‘정권안보’ 우선
 
  고종의 관심은 오로지 ‘정권안보’였다. 이를 위해서라면 고종은 무엇이든 희생시켰다. ‘신문고를 치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에 ‘대궐문을 엄중하게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동문서답(東問西答)했던 고종은 ‘대궐문을 엄중하게 지키기 위해’ 파수(把守)부대를 증설했다. 그 부대가 바로 무위소(武衛所)였다.
 
  고종은 무위소를 증강하기 위한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수도권 방위의 최전선인 강화도를 지키는 진무영(鎭撫營)의 예산을 전용(轉用)했다. 최전방 부대 예산을 빼다가 경호처 예산으로 쓴 셈이다. 그 때문에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 사령관 어재연(魚在淵) 이하 전 장병이 옥쇄(玉碎)했던 강화도 수비군은 불과 5년 후 일본의 운요호(雲陽號)가 내침(來侵)했을 때에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주하는 약졸(弱卒)로 전락하고 말았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 것도 고종의 이런 파행적 국방정책 때문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2020년 4월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목적으로 12조2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됐다. 이 과정에서 9047억원의 국방비가 삭감됐다. F-35A 스텔스 전투기 사업비, 광개토Ⅲ 이지스함 건조비 등이 뭉텅이로 희생됐다. 말이 좋아서 ‘긴급재난지원금’이고 ‘코로나19 대책’이지, 실상은 4·15총선을 전후(前後)한 선심성 현금 살포였다. 정권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돈을 뿌리면서 이를 위해 국방예산을 갖다 쓴 셈이다. 정권안보용 친위부대를 기르기 위해 최전방 부대를 망가뜨렸던 고종과 흡사하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예산의 40~ 50%를 국방비에 투입했다. 고종은 그렇게 해서 양무호(揚武號)라는 군함(군함이라고 해봤자 고물 화물선에 함포를 장착한 것이었지만)을 구입하고, 개틀링 포와 서양식 소총, 야포들을 쇼핑했다. 하지만 이 역시 체계적인 전력(戰力)증강 사업이라기보다는 전시적(展示的) 사업이거나, 정권안보를 위한 것이었다. 장교단을 확충·육성하거나,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시스템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 군부(軍部) 상층부를 구성한 것은 무장(武將)들이 아니라 노론(老論)이나 민씨 척족들이었고, 그나마도 숨가쁠 정도로 자주 경질되었다.
 
  문재인 정권 들어 국방예산은 겉보기로는 계속 증가해왔다. 2021년에는 처음으로 국방예산이 50조원을 넘어선다. 하지만 그 가운데는 경항모(輕航母) 사업 등 과시성 사업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반면, 대북(對北) 타격 능력을 위해 필요한 F-35스텔스기 도입 사업 같은 것들은 계속 늦추어지고 있다. 장교·부사관 확충, 말단 부대의 전투력 향상을 위한 사업들도 지지부진하다. 그리고 군 상층부는 정권의 눈치만 살피는 ‘군복 입은 샐러리맨’들로 채워지고 있다. 국방정책에서도 고종과 문재인 대통령은 닮은꼴이다.
 
 
  편가르기
 
매천 황현.
  정권안보를 위해 고종에게는 친위(親衛)세력이 필요했다. 왕비 민비의 일가붙이들, 즉 여흥 민씨들이 그 친위세력이 되었다. 1880년대에 중앙과 지방 관직에 진출한 여흥 민씨는 26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6조(曹) 등 기존 부서보다는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설된 부서에 많이 진출했다. 돈과 권력이 있는 부서들을 차지한 것이다. 민영준(閔泳駿) 등 많은 민씨 일족이 부정부패로 악명(惡名)을 떨쳤다. 저자는 “고종이 끌어들인 민씨들은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온 백성을 숙주로 삼아 국부(國富)를 착취했다. 고종 본인도 그 숙주에 함께 기생했던 공생체에 불과했다”고 통탄한다.
 
  이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탈원전(脫原電)’을 맹목적으로 고집하는 문재인 정권 아래서 태양광 발전 등 신재생에너지 사업이 각광을 받자 과거 586운동권 핵심 인사가 거기에 기생해서 재미를 보다가 감옥으로 갔다. 일찌감치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모(某)씨를 비롯해 친정부 방송인·기자·문화예술인 등이 이런저런 공영방송에 똬리를 틀거나 강연을 하면서 단물을 빨아 먹고 있다. 그 밖에도 586운동권이나 그들에게 줄을 댄 인사들이 지방자치단체 문화센터,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혈세(血稅)로 운영되는 다양한 기관에 붙어서 먹고살고 있다. 그들이 조국(曺國) 지지 집회 등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다. 아직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옵티머스니 라임이니 하는 금융 스캔들에서 현 정권 관련 인사들의 이름이 계속 오르내리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다. 이 모두 국민을 숙주로 삼아 국부를 착취하는 작태들이라 할 것이다.
 
  매천 황현(梅泉 黃玹)은 고종의 당파적 편향성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고종은 노론으로 자처하면서 군신(君臣)들을 삼색(三色·당색)으로 구분하여 매우 박하게 대우하였다. 대과(大科) 급제자 알현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고종은 그 사람이 노론이면 ‘친구’라고 부르고, 소론(少論)일 때는 ‘저쪽(彼邊·피변)’이라 하였다. 또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이면 ‘그놈(厥漢·궐한)’이라고 하였다.〉
 
  문재인 정권 역시 보수세력의 정권 규탄 집회는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가로막으면서 그 집회 주최자들을 향해 온갖 위협과 ‘살인자’라는 막말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민노총 집회는 못 본 척하고 있다. ‘소주성(소득주도성장)’이 파탄 나도, 부동산 정책이 좌초해도, 그 실패한 정책의 입안자·실행자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자들을 찾아내 기를 쓰고 등용하고 있다. 신하들을 ‘친구’와 ‘저쪽’과 ‘그놈’으로 편가름하고, 노론과 민씨 척족 사람들로 ‘코드 인사’ ‘회전문 인사’를 거듭하던 고종과 흡사하다.
 
 
  상소를 거부하다
 
  고종과 문재인 정권의 비슷한 점은 또 있다. 비판 의견, 반대 의견에 귀를 막는 것이다. 갑오경장이 진행 중이던 1894년 12월 16일 고종은 조칙(詔勅)을 내렸다.
 
  “이제부터 만일 의견을 말한다는 핑계 아래 국시(國是)를 뒤흔들어 놓는 자가 있으면 원소(原疏)는 받아들이지 말고 상소를 올린 사람은 직접 법무아문(法務衙門)에서 잡아다가 엄하게 징계하게 하라.”
 
  한마디로 상소(上疏) 자체를 거부하고 상소를 올리는 자는 처벌하겠다는 소리였다. 걸핏하면 비판 언론의 지적을 ‘가짜 뉴스’라며 발끈하고, 5·18이나 세월호 사건 등에 대해 정권과 딴소리를 하면 감옥으로 보내겠다는 법을 만드는 문재인 정권의 모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1905년 3월 7일 고종을 알현한 원로 대신 조병세(趙秉世)가 “왜 하급 관리는 상소를 올리지 못하게 한 것인가?”라고 따지자, 고종은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찌하다 그리 되었다”고 둘러댔다. 자기가 입을 막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예의 유체이탈 화법이 다시 튀어나온 것이다.
 
  이런 고종을 두고 저자는 “고종은 무능력한 지도자가 아니라, 사익(私益)을 위해 국가를 희생시키는 사악한 지도자였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이런 평가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미 고종 당대에도 유사한 평가들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이 나라에 끔찍한 해충이며 저주”
 
호레이스 알렌 주한미국공사.
  1907년 8월22일자 미국 《인디펜던트》지에 실린 이위종(李瑋鍾)의 〈한국을 위한 호소문(A Plea for Korea)〉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잔인한 지난 정권의 학정(虐政)과 부패에 질려 있던 우리 한국인은 일본인을 희망과 공감으로 맞이했다. 우리는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만민에게 정의를 구현하며 정부에 솔직한 충고를 해 주리라고 믿었다. 우리는 일본이 그 기회를 활용해 한국인에게 필요한 개혁을 하리라고 믿었다.”
 
  이위종! 헤이그밀사 세 명 중 한 사람인 이위종이다. 고종의 밀명을 받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의 주권 보존을 호소하기 위해 파견됐던 밀사 중 한 명인 이위종이 일제의 침략보다 ‘잔인한 지난 정권의 학정과 부패’부터 고발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학정과 부패로 한국인들을 질리게 했던 ‘잔인한 지난 정권’의 수장(首長)은 누구일까? 부패한 관리들의 최정상에는 누가 있었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고종이었다.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왔다가 주한공사까지 지낸 호레이스 알렌은 이렇게 말했다.
 
  “황제는 이 나라에 끔찍한 해충이며 저주다. 그는 로마를 불태우며 놀아난 네로와 다를 바 없이 무희들과 놀면서 시간을 축낸 지도자다.”
 
 
  광무개혁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여 년 동안 고종을 ‘계몽전제군주’로 떠받들면서 그의 ‘근대화’ 노력을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상찬하는 국사학자들이 있었다.
 
  1898년 8월 17일 나온 대한제국의 헌법 격인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불변(萬世不變)할 전제정치다”(제2조) “대한국 황제는 무한(無限)한 군권(君權)을 지니고 있다”(제3조) 등 황제의 권리와 신민(臣民)의 의무만을 열거하고 있다. 도대체 거기에 무슨 ‘계몽’이 있고 ‘근대’가 있단 말인지….
 
  고종예찬론자들이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광무개혁, 즉 철도 건설, 도로·하수구 정비, 학교 설립, 근대적 공장·회사 설립 등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박하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사업들”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오히려 고종은 구(舊)체제 시절에 이루지 못한 만사의 독점을 완성하면서, 자기가 그 독재의 정점에 있음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이런 외형적인 개혁을 시도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황제독재를 위한 통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고종은 운산금광채굴권 등 이권(利權)을 열강에 헐값으로 넘겼으며, 벼슬을 팔았고, 돈이 될 만한 사업이나 세원(稅源)들은 모조리 내장원(內藏院)으로 귀속시켰다.
 
  그나마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外勢)들 간에 묘한 균형이 이루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때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였다. 하지만 고종은 이 시기를 허송했다. 그는 당시 세계 질서를 움직이고 있던 대영제국과 그와 궤를 같이하는 미국, 서구(西歐) 열강들이 공적(公敵)으로 여기고 있던 러시아에 의존하려 들었다. 사실 1880년대 중반 이래 계속되어온 친러정책은 당대 국제질서에 반하는 위험하고 철없는 정책이었다. 여기에 더해 고종은 아관파천을 감행했고, 미관(美館)파천, 영관(英館)파천, 불관(佛館)파천을 수시로 타진하는 추태까지 부렸다. 러일전쟁이 일어날 무렵에는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는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했다. 일본이 승리한 후에는 미국에 기대보겠다고 ‘앨리스 공주’(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에게 매달렸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종과 그 측근들은 조미(朝美)수호조약상의 거중조정(居中調整) 조항에 의거, 미국이 조선의 독립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실력은 없이 조약상의 아름다운 문구에 국가의 운명을 거는 모습 또한 판문점 선언이니 9·19합의니 하는 종이 쪼가리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문재인 정권의 행태와 닮았다.
 
 
  나라를 팔다
 
  저자가 고종을 두고 ‘매국노’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고종은 정말로 나라를 팔았다. 1904년 을사조약 당시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조약 체결 6일 전 기밀비 10만원을 집행했으며, 그중 2만원(오늘날 25억원 상당)을 고종에게 전달했다는 보고서를 본국 외무성에 보냈다.
 
  그보다 1년 전 주한영국공사는 “1904년 한일의정서 채택을 앞두고는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30만원을 받았다”는 민영환(閔泳煥)과의 대화 내용을 본국에 보고했다. 1904년 8월에는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가 고종을 알현, ‘궁중의 용돈 증가를 위해’ 150만 엔의 무이자 차관(借款) 제공을 약속했고, 고종은 이 제안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메가타는 한국의 재정권을 장악한 후 이 제안을 거두어 들였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고종은 을사조약에 강경하게 반대했지만, 이완용(李完用) 등 ‘을사5적(賊)’이 나라를 팔아넘긴 게 아니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사실상 일제에 매수된 고종이었다. 오죽했으면 을사5적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그날 밤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臣) 등 5인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항변했을까?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한 시기를 관찰했던 AP기자 윌라드 스트레이트는 이렇게 기록했다.
 
  “왕관을 쓴 자들 가운데 최악으로 비겁하고 최하급인 황제는 궁전 속에 움츠리고 자기가 저지른 잘못으로 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황제는 외부(外部)대신에게 조약에 서명하라고 지시하고서는 자기가 지시하지 않았다고 말하라고 또 지시했다. 그래서 외부대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다. (중략)
 
  제일 얼토당토 않는 일은, 저들은 무슨 일이 닥칠지 벌써 경고가 돼 있었고, 그래서 늦기 전에 이 사태가 오지 않도록 충고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저들은 마치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에 처박고 사태를 똑바로 보려 하지 않았다.”
 
  코로나19 백신, 이란에 의한 한국 선박 나포 등 일이 생길 때마다 아랫사람들을 질책하면서 잘못된 일은 아랫사람들이 모자라서이고, 자신은 그런 일들로부터 초연한 존재인 양 구는 문재인 대통령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고종의 아들 순종 때에 성사된 것이기는 하지만, 1910년의 한일합병조약 역시 ‘매국조약’이었다.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讓與)’한 대가(代價)로 이왕가(李王家)는 연간 150만 엔(후에 180만 엔으로 증액)의 세비(歲費)를 받으며 호의호식(好衣好食)했다. 대한제국은 망했지만 이씨 왕실의 사직(社稷)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 정점(頂點)에는 ‘도주쿠노미야(德壽宮) 이태왕(李太王) 전하’, 즉 고종이 있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인기 인터넷 역사 강사도 있고, 정치인들도 있다. 맞는 얘기다. 우리는 〈명성황후〉 같은 뮤지컬이나 드라마, 학문의 탈을 쓴 ‘고종계몽군주론’ 같은 사설(邪說)에 눈이 멀어 100여 년 전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나라가 망했는지, 이 나라의 위정자(爲政者)라는 자가 얼마나 수준 이하의 인간이었는지를 잊고 살았다. 자고 깨면 ‘식민사관(植民史觀) 극복’을 외쳤고, 남 탓만 하고 살았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고종과 흡사한 위정자를 갖게 되었고, 대한민국 70년의 성취는 무위(無爲)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고종과 문재인 대통령이 다른 점이 있다면, 고종은 ‘약하고 가난한 나라’를 물려받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선진국 문턱에까지 들어섰던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을 물려받았다는 점일 것이다.
 
  부끄러운 역사에는 한사코 고개를 돌리면서 남의 탓만 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제라도 ‘무능력과 오판(誤判)이 여러 겹 쌓여 있는 총체적인 금치산자(禁治産者)였고, 입으로는 언제나 반성이었고 도덕이었으되 몸과 행동은 부도덕했고 반성할 줄 몰랐던’ 고종이라는 인간을 들여다보는 것도 그래서이다. 저자의 호소처럼 직시하는 사실의 역사만이 미래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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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색시대    (2021-03-31) 찬성 : 1   반대 : 2
이 책을 읽으며 서너번 책을 내던졌다. 어째 저런 인간이 태어났을까.

20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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