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신년기획

著名人士 10인의 10년 전과 후 ‘나에게 보내는 문자메시지’

정리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영탁·박세리·김미경, 잘 살아준 과거의 나에게 고마워
⊙ 이시형·조은희, 10년 전 나에게 예언을 한다면?
⊙ 홍준표·정호승·이대영, 문자에 스민 후회 한 방울
⊙ 신영균·엄홍길, 100세 후에도, 頂上 찍고도 ‘도전’을 말하는 이들
  사람들은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지요. 시작은 이렇습니다.
 
  세밑, 방 모서리에 앉아 의미 없는 후회를 해봤습니다. 10년 전에 테슬라 주식 살걸. 점잔 빼는 자아(自我)가 ‘기껏 한다는 생각이’ 하며 제동을 걸었지만, 이미 망상(妄想)의 고삐를 놓친 후였어요. 그곳엔 2011년, 미래의 자신에게 받은 문자메시지를 보고 ‘이거다!’ 하는 내가 있었습니다. 이내 ‘마, 부질없다’ 하다가 문득 알고 싶었습니다. 가만, 다른 사람들은 10년 전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을까. 특히 저마다의 자리에서 ‘성공의 맛’을 본 이들은 과거를 어떤 표정으로 돌아볼지 궁금했어요. 내친김에 10년 후의 나에게 할 말도 들어본다면?
 

  비록 씨앗은 싱거웠지만, 그 열매는 달았습니다. ‘한 줄 요약’이 언감생심인 이들의 삶이, 문자메시지 하나에 밀도 있게 담겨 하나씩 배달됐습니다. 이런 제목을 붙이고 싶더군요. ‘돌아보라, 그리고 맞이하라, 이들처럼’. 지난해 속 시끄럽게 했던 뉴스들이 눈치도 없이 이월(移越)되는 바람에, 연초부터 피로한 말들이 떠다닙니다. 글을 보내온 이들에겐 고백과 약속의 지면이, 독자들에게는 휴식 같은 지면이 되기 바랍니다.
 

  영탁
  “끙끙대며 산 지난 날, 돌아보니 값진 시간”
 
영탁. 사진=뉴에라프로젝트 제공
  ▶ 10년 전 영탁에게
  “수많은 가수 선배님들의 가이드 보컬과 코러스 활동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비록 금전적으로 보상받지 못하고 끙끙대며 살았던 하루하루였지만 이제 와서 보니 황금보다 더욱 값어치 있는 시간이었노라.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긴 터널이었다. 무려 15년의 무명생활. 그 세월을 영탁(38)은 “황금보다 값어치 있는 시간”이라고 돌아봤다. 지난해 〈미스터트롯〉 선(善)에 당선된 영탁은 임영웅과 최종 2인에 오르면서부터 뜨거운 관심을 일으켰다. 경연에서 부른 ‘막걸리 한잔’ 영상은 지난 1월 10일 기준 공식 유튜브 조회 수 2300만 뷰에 육박한다. 찐찐찐찐, ‘찐이야’는 말할 것도 없다. 막걸리는 물론 아이스크림, 건강식품, 아파트, 음료, 화장품, 밀키트, 세제, 피자, 치킨, 게임 등 광고 섭외도 1순위다.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엔 묵묵히 쌓아온 수련(修鍊)의 나날이 있었다. 2005년 영화 OST로 데뷔 후 가이드보컬, 코러스, 녹음 디렉팅, 보컬 강사 등을 하며 생활고를 버텼다. 2016년 트로트 가수로 전향했고 2018년, 자작곡 ‘니가 왜 거기서 나와’를 만들었다. 돈이 없어 집 커튼을 이용해 앨범 재킷을 찍었다. 좌우명은 ‘무인불승(無忍不勝)’이다. 인내 없이는 이길 수 없다는 뜻. 인고의 시간 끝, 실력을 인정받은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훗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알게 모르게 기부도 많이 한다. ‘찐으로’ 좋은 사람이 되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 10년 후 영탁에게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몸담으면 어느 정도 전문가라 할 수 있겠다. 10년 후면 25년을 달려온 길이 될 터이니 이는 경지(境地)로 가기 위한 소중한 시간들이 되었으리라. 능력과 더불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도 중요하다. 부디 잘 살았길,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 있길 바라본다.”

 

  박세리
  10년 후에도 도전할 거라는 믿음
 
박세리. 사진=조선DB
  ▶ 10년 전 박세리에게
  “앞으로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그렇지만 지금처럼 긍정적이고 즐거운 마음이면 다 잘될 거야! 내 말을 믿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양말 벗고 연못에 들어가 샷을 하던 장면. 1998년이니, 20년도 훌쩍 넘은 일이다. 맨발투혼. US 여자오픈 연장전에서의 우승은 IMF 외환위기로 팍팍했던 국민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이후에도 박세리(44)는 골프채를 놓지 않았다. 2001년 브리티시여자오픈, 2002년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 2006년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 우승을 잇고, 마침내 2007년 LPGA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2016년 은퇴한 해에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골프 대표팀 감독을 맡아 박인비 선수의 금메달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여자골프의 전설’로 남는 줄 알았다. 몇 년 후, 그의 삶은 확 바뀌었다. 예능인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2019년에는 스포츠 기업 ‘바즈 인터내셔널’을 차려 대표로도 활동 중이다. 올해 도쿄올림픽이 열리면 국가대표 감독으로도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는 누누이 말한다. “꿈꿨던 걸 다 이룬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10년 후에도 박세리는 ‘도전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10년 후 박세리에게
  “그간 많은 것을 일구었지만, 여전히 멈추지 않고 더 큰 꿈과 목표를 향해 도전하고 있겠지? 그 모습을 아낌없이 칭찬해주고 싶구나!”

 

  신영균
  100세 이후에도 여전히 꿈을 꾸다
 
신영균. 사진=조선DB
  ▶ 10년 전 신영균에게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의 박수 소리를 들어가며 예술인재 육성을 위한 재산기부 결정을 하고 재단을 설립한 것은 백번 잘한 결정이었어. 그로부터 후회 없이 맞이하게 한 10년 세월이 고맙고 흐뭇하구나.”

 
  신영균(92) 신영균예술문화재단 명예 이사장은 영화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다. 2010년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규모의 사유재산을 쾌척해 2011년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을 세웠다. 딱 10년 전이다. 재단은 단편영화제 및 젊은 영화인 육성 지원, 장학사업 등 예술문화 분야와 예술인재 양성사업에 기여하고 있다. 매년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도 개최한다. 지금 생각해도 백번 잘한 일일 만하다.
 
  신 이사장은 1960년대 엘리트 배우로 주목받았다. 서울대 출신의 잘나가는 치과의사에서 배우로 인생 항로를 바꿨다. 1960년 영화 〈과부〉로 데뷔해 〈상록수〉 〈연산군〉 〈빨간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 번〉 등 19년 동안 무려 30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한국영화배우협회장·한국영화인협회장·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 등을 역임하며 충무로의 권익 향상에도 앞장섰다. 15·16대 국회의원(1996~2004년)을 지내면서 국내외 문화예술 진흥에도 힘썼다. 10년 후엔 102세가 된다. 그래도 여전히 ‘작품 출연의 꿈’을 꾼다.
 
  ▶ 10년 후 신영균에게
  “2020년 내 회고록에 밝힌 ‘후회 없이 살았다’가 백 살 넘어도 변함없어야 할 거야. 마지막 작품 출연의 꿈도 멋지게 성취하렴. 그리고 떠날 때 가져갈 물건은 내 손때 묻은 성경 한 권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엄홍길
  과거, 현재, 미래는 같다
 
엄홍길. 사진=조선DB
  ▶ 10년 전 엄홍길에게
  “도전! 인생 17좌! 엄홍길휴먼재단!”

 
  22년간 38번. 히말라야 8000m 이상 봉우리 16좌에 도전한 세월과 횟수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엄홍길(61) 대장은 ‘도전’의 상징이다. ‘인생 17좌’는 또 다른 도전을 의미한다. 그는 “그때 히말라야가 나를 잡지 않고 내려보낸 건 속세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 ‘새로운 도전’은 봉사다. 2008년 ‘엄홍길휴먼재단’을 만든 배경이다. 재단을 통해 네팔 어린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고 있다. 곧 17개가 된다. ‘봉사’라는 인생 17좌를 등반 중인 셈이다. 자서전 《꿈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라》의 일부다.
 
  “산은 정상(頂上)이라는 목표가 아니라 올라가는 동안의 과정이다. 숨이 차오르는 고통과 싸워 이겨내는 극복정신이 사물을 새로이 보게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정상이라는 먼 미래만 보고 산다면 지금이라는 과정은 늘 힘들기만 하다. 살아가며 도전은 늘 필요하다. 하지만 그 속에 겸허함과 진정한 이해와 경외감이 없다면, 도전의 대상인 정상은 오직 욕심과 욕망의 봉우리가 될 뿐이다.”
 
  도전의 연속,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 그것이 삶. 그래서 그의 과거, 현재, 미래는 똑같다.
 
  ▶ 10년 후 엄홍길에게
  “도전! 인생 17좌! 엄홍길휴먼재단!”

 

  김미경
  10년 전으로 돌아가겠냐고?
 
김미경. 사진=조선DB
  ▶ 10년 전 김미경에게
  “혹시 네가 10년 전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노’야. 왜냐하면 돌아가도 그때의 너처럼 열정적으로 살아낼 것 같지 않아서야. 돌아갈 이유가 없을 만큼 알차게 살아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국민 멘토’답다. 30년 경력의 대중 강사이자 10여 권의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이제는 114만명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브 크리에이터이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유튜브 대학 ‘MKYU대학’의 학장이 됐다. 김미경(58)의 이야기 상대는 주부, 청소년, 20대 여성 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주제는 대부분 ‘꿈’과 맞닿아 있다. 어느 강연의 일부다.
 

  “2030 청년들이 저한테 그래요. 지금 하는 일이 가슴을 뛰게 하질 않는대요. 이건 내 꿈이 아닌가 봐요, 그래요. 그래서 죽을 때까지 찾아봐라, 찾아지나! 그랬어요. 여러분, 절대 가슴 뛰는 일 같은 건 못 만납니다. 중요한 건 (저는) 강의라는 일을 만나서 내 가슴이 뛸 때까지 일한 거예요, 20년 동안. 여러분, 꿈은 그렇게 만들어가는 거예요.”
 
  한때 ‘독설 언니’로 불렸던 그는 10년 후 벌써 68세가 된다.
 
  ▶ 10년 후 김미경에게
  “내가 지금 뭐 하고 사는 줄 아니? 10년 후 너에게 줄 선물 같은 나를 준비하는 중이야. 68세의 김미경의 시간에 어울리는 아름답고 멋진 모습으로 날 데려갈게. 딱 기다려!”

 

  이시형
  앞으로 닥칠 ‘예방 시대’ 귀띔하고파
 
이시형. 사진=조선DB
  ▶ 10년 전 이시형에게
  “전 인류 건강복지를 위해 힐리언스 선마을의 기초를 닦고 어렵겠지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자. 앞으로는 치병의 시대보다 예방의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병원 없는 사회를 꿈꾸는 의사, 이시형(87) 박사는 실체가 없다고 여겨졌던 ‘화병(Hwa-byung)’을 세계 최초로 병명(病名)으로 등재한 정신의학 분야 권위자이자 뇌과학자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시절. 명의(名醫)로 소문나 쉴 새 없이 환자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과로(過勞)에 정신과 의사인 자신조차 스트레스를 받았고 해소한답시고 운동을 하다가 다친 후 ‘치료의학’에 한계를 느꼈다. 자연의학으로 눈을 돌린 배경이다.
 
  2007년 국내 최초의 웰니스마을 ‘힐리언스 선마을’을, 2009년에는 ‘세로토닌문화원’을 건립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면 이 두 사업이 막 시작했을 때다. 고민이 많았었나 보다. 과거 자신을 한 번 더 다잡는 모습이다. 대비한 대로 10년 후 예방의 시대가 왔다. 최근 출간한 저서 《면역혁명》에서는 “방역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면역”이라고 썼다. 그는 97세가 되더라도 ‘병원 없는 사회’를 위해 노력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
 
  ▶ 10년 후 이시형에게
  “10년 후라니 좀 아득하다. 내가 살아 있을지, 관에 들어간 나한테 이야기해야 하는 건지.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사람들이 병원으로 안 가도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굳건히 노력해주길 바란다.”

 

  조은희
  “10년 뒤 ‘더 큰 것’이 올 거야!”
 
조은희. 사진=조선DB
  ▶ 10년 전 조은희에게
  “안녕! 서울시 부시장 은희야. 지난겨울 신종플루 대처 실무책임을 맡아 고생 많았지? 10년 뒤에는 ‘더 큰 것’이 올 거야. 지금 경험이 훗날 많은 사람을 돕게 될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아무도 예상 못 했다. 10년은 고사하고, 발생 하루 전에도 코로나19라는 게 온 세상을 이렇게 괴롭힐 줄 몰랐다. 미리 알았다면? 조은희(60) 서초구청장은 10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 조은희’에게 이를 살짝 귀띔한다. 그는 구민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은 구청장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당적(黨籍)이나 이념과는 상관없이 일을 잘한다는 이유에서다.
 
  한때 기자로도 일했다.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영남일보》와 《경향신문》을 거친 뒤 1998년 정치에 발 디뎠다. 청와대 비서관, 서울시 여성가족정책관과 정무부시장을 지냈고 오는 4월,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10년 후 그는 어디에 있을까.
 
  ▶ 10년 후 조은희에게
  “기억하니 은희야? 눈물 한 방울을. 이어령 선생님이 말씀하셨지,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의 위대함을. 죽음 코앞까지 글을 쓰겠다고 하신 대학 시절 은사님의 그 눈물 한 방울, 너도 흘리고 있겠지?”

 

  정호승
  “더 이상 쓸 詩가 없다면 죽어도 괜찮다”
 
정호승. 사진=조선DB
  ▶ 10년 전 정호승에게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에 속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 않았나. 그런데 왜 그런 말에 속아 시간을 낭비했는가. 예순에서 일흔이 되는 시간이 일 년처럼 지나가는 줄 모른 너, 밀물처럼 늙음이 찾아오는 줄 모르고 젊음의 시간과 사랑과 인생을 낭비한 죄, 그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한다.”

 
  혹자는 말했다. 조용하고 겸손한 정호승(71)은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한 시인이라고. 여기에도 잘 드러난다. 남 들으라는 소리도 아닌데, 뜨끔할 정도다.
 
  반백 년 동안 시를 썼다. 1972년 등단해 20대에 시인이 됐다. 교사, 기자, 출판사 대표라는 직업을 갖기도 했지만, 일흔 넘은 지금까지 시인으로 산다. 시에는 어머니가 자주 등장한다. ‘잘 자라 우리 엄마’로 시작하는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의 본질을 ‘슬픔’이라고 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가계부로 쓰는 공책에 시를 쓰신 걸 봤는데, 그때 ‘시는 슬플 때 쓰는 것’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어떻게 시의 본질을 그리 꿰뚫고 계셨는지 놀랐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출판기념회에서는 “시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고, 가족, 특히 사랑의 으뜸인 어머니의 사랑에 의해 시인으로 살았다”고 했다. ‘시’와 ‘어머니’는 어쩌면, 마지막까지 남을 단어다.
 
  ▶ 10년 후 정호승에게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에 깊게 새기되, ‘지금은 많이 늦었다’고도 성찰하라. 정리해야 할 인생사(人生事)의 우선순위를 확정하고 후회가 없도록 반드시 실천하라. 그리하여 마침내 가슴 속에 시가 남아 있지 않도록 하라. 문득 죽음이 찾아와도 더 이상 써야 할 시가 없으므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라.”

 

  이대영
  “잿빛 시대… 자신도 돌아보며 살자”
 
이대영. 사진=조현호
  ▶ 10년 전 이대영에게
  “제2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그대는 집행위원장으로서 파리 유네스코본부와 전 세계를 돌며 서울선언을 이끌어냈어. 5000명 예술강사들 뒷바라지 공직도 잘 수행했고. 하지만 등신아, 벌써 등단 25주년이야. 희곡집이 한 권? 벌써 몇 권은 냈어야지. 아니다. 세상이란 무대에서 배우로 살았으니, 인생이 작품이지 뭐. 여튼 창작에 더 충실했으면 좋았을 것을.”

 
  등단한 이들은 본래 이렇게 자신에게 엄격한 걸까. 이대영(60) 중앙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대형 행사 기획 및 연출 전문가다.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건국 65주년 국군의 날 행사 총감독,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원장, 제2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집행위원장,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연예오락 특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제70주년 광복절 중앙경축식 행사감독 등 국가 행사를 연출하며, 뉴테크놀로지 공연 기법도 선보였다. 문학, 연극, 영화, 방송 및 게임 등 콘텐츠 분야에서 쌓은 다양한 경험을 발판으로 21세기 디지털 콘텐츠의 변화 양상 및 그 작법을 연구하고 있다.
 
  뮤지컬 〈프러포즈 못하는 남자〉 연출, 뮤지컬 〈배우수업〉, 연극 〈정명〉, TV 드라마 〈한 소년〉의 대본도 집필했다. 언급한 희곡집은 2006년 출간한 《이대영 희곡집》이다.
 
  ▶ 10년 후 이대영에게
  “어? 하니 고희네. 자식 손주들 건강하고 비트정치의 꿈도 이루고, 예술가로 교육자로 비트닉스로 살아보니 어때, 또 할 일이 산더미지? 만년 청춘이 아니다. 생존은 고난이고 미래는 어둠이며 시대는 잿빛이다. 자신도 돌보며 살자. 그러다 훅 간다. 청심의 계절은 시들지 않는다고? 그래 비트시대이니 비트라이프를 실컷 즐겨. 나도 그대를 못 말린다. 또 십 년 뒤를 설계해야지?”

 

  홍준표
  “화왕산 기슭에서 安貧樂道하는 삶 바라”
 
홍준표. 사진=조선DB
  ▶ 10년 전 홍준표에게
  “2011년이면 당대표 시절이겠군요. 그해 12월 5일 당대표를 사퇴하게 됩니다. 그때 바로 정계를 떠나 자연인으로 돌아갔으면 더 좋았을걸…. 10년 후 나는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서울 4선 국회의원, 재선 도지사, 원내대표 1회, 당대표 2회를 거쳐 대선 출마. 이후 21대 총선에서 국회 재입성. 5선 의원이자 국회 최고참. 누구보다 정치에 강한 뜻이 있어 보이는 이력(履歷). 그런 홍준표(67) 무소속 의원의 이 같은 말. 의외라고 해야 하나, 그럴 만하다고 해야 하나.
 
  지난해 4월 국회 재입성 당시 여지를 두긴 했다. 당선 직후 그는 “국회에 들어와 보니 어느덧 최고참이 됐다”면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의도 생활을 후회 없이 보냈으면 한다”고 했다. 과연 ‘마지막’은 언제가 될까. 그는 요즘 다시 대선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속마음이다.
 
  ▶ 10년 후 홍준표에게
  “2031년을 살고 있겠군요. 그때쯤이면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화왕산 기슭에서 안빈낙도하는 나머지 인생을 보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403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