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정율성의 ‘항일독립운동’의 근거
⊙ 광주시청 홈페이지, 광주 출신 ‘연평 포격전’ 전사자 ‘서정우’ 관련 문건은 ‘0건’
⊙ 광주시와 시의회, ‘정율성’ 관련 기록을 각각 123건, 124건 생산
⊙ 광주 사직공원 내 ‘호국무공 전공비’와 ‘충혼탑’ 주변 팻말 뽑히고, 현수막 버려진 채 방치
⊙ 현충탑 앞에서 ‘호국영령의 희생’ 강조한 역대 광주시장의 ‘언행 불일치’
⊙ 강기정 시장, “정율성 선생은 훌륭한 한·중 연결고리”
⊙ 광주시청 홈페이지, 광주 출신 ‘연평 포격전’ 전사자 ‘서정우’ 관련 문건은 ‘0건’
⊙ 광주시와 시의회, ‘정율성’ 관련 기록을 각각 123건, 124건 생산
⊙ 광주 사직공원 내 ‘호국무공 전공비’와 ‘충혼탑’ 주변 팻말 뽑히고, 현수막 버려진 채 방치
⊙ 현충탑 앞에서 ‘호국영령의 희생’ 강조한 역대 광주시장의 ‘언행 불일치’
⊙ 강기정 시장, “정율성 선생은 훌륭한 한·중 연결고리”
- 사진=월간조선
대한민국의 광역자치단체 중 한 곳인 광주광역시(이하 광주시)가 6·25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으로 번갈아가며 참전해 ‘선전선동꾼’ ‘나팔수’ 역할을 했던 정율성이란 중국인을 추앙한 행태가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광주시가 정율성의 생가터를 사들여 이른바 ‘정율성 역사공원’으로 조성한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월간조선》이 2012년부터 2022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보도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8월 22일 자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의 ‘정율성 사업’ 타당성 지적으로 촉발됐다. 이후 ‘정율성 논란’은 전국적인 화제가 됐다가 지금은 또 수그러든 상태다.
한창 논쟁이 진행될 당시 ‘사회 정의를 바라는 전국 교수 모임(정교모)’은 전국적 비판이 거센 상황에서도 소위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을 강행하겠다는 광주시의 행태를 비판했다. 정교모는 8월 29일, “정율성 기념공원, ‘광주’만의 역사 해석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살았고, 대한민국의 적으로 살았던 정율성을 기념하는 공원을 만드는 것은 지금까지 광주가 이야기하던 5·18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정율성과 5·18은 양립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끝내 강행된다면 광주는 더는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며, 5·18운동은 더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민주화운동으로 기억되기 힘들 것”이라고 밝혔다. 광주시가 ‘민주·평화·인권의 도시’를 자처하면서도 6·25 당시 중북(中北) 침략 세력에 가담해 전쟁범죄 행위를 선동한 ‘중국인 정율성’을 추앙하는 것은 ‘자기부정’이란 얘기다.
그런데 5·18 정신에 앞서 ‘정율성 기념’과 병존할 수 없는 ‘정신’이 있다. 6·25 당시 국가의 부름을 받고 목숨을 바치거나 피땀 흘려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킨, 광주 지역 용사들의 ‘애국 애향 정신’이다. 이에 《월간조선》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공훈을 알리는 광주 지역 ‘국가 수호 시설’들을 살피고, 중·북 공산 침략 세력의 ‘나팔수’ 정율성에 대한 광주시 ‘추앙’의 문제점을 돌아봤다.
왜 ‘대한민국 광주’가 ‘중국인 정율성’ 추앙하나?
정율성은 북한 노동당과 중국공산당에 가담해 소위 ‘혁명음악’을 만든 ‘한국계 중국인’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중국공산당을 위해 일했고, 해방 후엔 북한으로 넘어가 다수의 북한군가를 만들었다. 6·25 때는 북한군으로 참전했다. 민족반역자·전쟁범죄자 김일성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동족상잔을 격려하는 북한군가를 다수 작곡했다. 이후 중국으로 잠시 건너갔다가 중국공산당원 자격을 회복하고 다시 ‘중공군’으로 참전했다.
그 일생을 보면, 정율성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반국가단체’ 북한 정권 입장에서 대한민국에 대항한 ‘적(敵)’이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을 살상하고, 재산을 파괴한 ‘북한군’의 일원이었다. 우리의 자유통일을 저지하고, 민족적 비극인 ‘분단’을 고착화한 ‘중공군’ 소속이기도 했다.
이처럼 정율성이 대한민국에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는 그 누구든 단 몇 문장만 읽어도 금방 알 수 있다. 반면, 그가 예술적으로 그 무슨 추앙을 받을 만한 업적을 남겼는지는 불분명하다. 그 음악적 성취가 크다고 해도 대한민국이 기려야 할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는 자인데도, 광주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정율성’을 ‘선생’이라며 칭송한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실제 광주시 직원 업무 분담 내용을 보면 ‘정율성 선생’이란 표현들이 등장한다.
혹자는 “정율성이 항일운동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이다. 이는 정율성의 중국인 부인 ‘딩쉐쑹(丁雪松)’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지금까지 정율성의 ‘항일 행적’을 입증하는 근거는 단 하나도 없다. 광주시 동구 벤○○관광호텔 옆 ‘정율성 역사공원’ 예정지에 설치된 ‘정율성 시설물’에도 그런 내용이 없다. “정율성은 1933년 형들을 따라 혁명의 땅 중국으로 건너가 군사학교에서 항일 비밀 활동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면서 항일 전사로 거듭났다”는 식으로 돌림노래 같은 주장만 한다.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 ‘정율성 옹호론자’들은 뜬금없이 “정율성 친가와 외가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정율성 집안은 호남 최고의 독립운동 가문”이라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한다. 그 형제 또는 외가 친척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해서 정율성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논리가 과연 우리 국민에게 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공공기관이 이 같은 주장을 하면서 국민 세금을 계속 쓰겠다는 태도는 국민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
한편, 앞서 언급한 ‘정율성 시설물’엔 “항일의 깃발을 들고 동요, 민요, 군가, 뮤지컬, 오페라, 영화음악 등 360여 곡을 작곡한 정율성. 한국과 중국에 펼쳐진 그의 뜨거운 음악 여정이 광주,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선전문구가 있다.
정율성의 ‘항일’은 ‘대한독립’과는 무관한 ‘중국공산당의 항일’이다. 또한 그의 뜨거운 음악 여정은 한국에서 펼쳐진 일이 없다. 6·25 때 중·북 침략 세력의 ‘나팔수’로 활약한 일을 빼면 없다. 그런데도 이런 자의 ‘음악 여정’이 광주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내용을 담은 시설물이 광주 도심 속에 버젓이 서 있다.
전사 후 5년 만에 세운 ‘서정우 흉상’
9월 9일 오후, 광주시 남구 봉선동 소재 문성중학교를 찾았다. 이 학교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전사(戰死)한 고(故) 서정우(徐政佑) 하사의 흉상이 있다. 방문 당시, 서정우 하사 흉상은 광주 문성중 측에 의해 비교적 관리가 잘된 것으로 보였다. 높이 1.95m·둘레 0.8m×0.6m 규모의 황토색 흉상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흉상 기단 우측 면에는 서 하사 약력, 좌측 면에는 공적이 기술돼 있었다. 기단 정면에는 다음과 같은 ‘헌시’가 있다.
<조국 수호의 뜨거운 염원을 가슴에 품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젊은 영혼이여! 그대의 숭고한 희생으로 우리가 이곳에 편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조국과 문성중 학우들은 잊지 않을 것이니, 부디 저 하늘에서 평화의 수호신이 되어 우리를 굽어보며 편히 쉬소서.>
1989년생인 서 하사는 문성중 졸업 후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했다. 2009년 3월 해병대에 입대해 81mm 박격포 사수를 맡았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소위 ‘말년휴가’를 나가려고 연평도 부두에서 인천행 여객선을 기다리다가 서 병장은 북한군 포격 소리를 들었다. 그는 휴가를 포기하고, 부대로 복귀하다가 북한군 포탄 파편에 목숨을 잃었다. 당일 연평도 포병 사격훈련장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문광욱 이병도 북한군 포탄에 흉부 관통상을 입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인해 사망한 서 병장과 문 이병을 전사로 처리했다.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고, 1계급 추서를 했다. 이어서 이들을 국립대전현충원 ‘제2연평해전 전사자 합동묘역’에 안장했다. 또한 서 하사와 문 일병 부조(浮彫·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긴 것)를 연평도 평화공원에 마련해 그들을 추모했다. 해병대 역시 포항 해병대 교육훈련단 ‘해병의 집’에 이들의 흉상을 설치했다.
광주 문성중 소재 흉상은 서 하사 전사 후 5년이 지난, 2015년 10월에 설치됐다. 문성중이 부지를 제공하고, 광주지방보훈청과 광주시교육청이 흉상 제작비 일부를 부담했다. 동문도 모금 활동으로 비용을 보탰다. 이에 따라 뒤늦게 서 하사를 기리는 시설물을 세울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광주시의 기여도는 확인할 수 없다.
‘연평 포격전’ 전사자 성명은 ‘금기어’?
현재 남아 있는 공식 기록을 보면 광주시나 광주시의회가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 광주시 홈페이지에서 ‘서정우’란 이름으로 관련 기록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검색어 ‘서정우’에 대한 총 0건의 검색 결과를 찾았습니다. ‘서정우’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검색어가 올바른지 다시 한 번 확인해주세요”란 안내문이 떴다. 이는 2010년부터 지금까지 광주시 내부에서 ‘서정우’란 인물에 대해 그 어떤 논의도 한 일이 없다는 걸 방증한다.
광주시의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정우’란 이름이 한 번이라도 언급된 일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검색을 시도했지만, 화면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시스템 오류’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수차례 같은 작업을 반복한 끝에 ‘오류’가 아닌 걸 확인했다. 결국,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광주시의회 의원 68명(6대: 22명/7대: 23명/8대: 23명) 중 그 누구도 ‘서정우’란 이름을 단 한 번도 얘기하지 않은 셈이다.
이번에는 ‘연평도’란 단어로 검색을 시도했다. 광주시에서는 역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광주시의회에서는 단 2건을 확인했는데, 이는 옛 민주노동당 소속 시의원의 “정전 60주년을 맞았음에도 한반도는 연평도 포격 때보다 훨씬 위험한 무력충돌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란 발언과 이를 본회의에서 그대로 인용한 행정자치위원장의 ‘보고’ 내용에 불과했다.
2010년 당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1953년 정전 이후 북한이 처음으로 우리 영역에 무차별 포격을 가해 군(2명 전사·16명 부상)은 물론 민간인(2명 사망·3명 부상)이 피해를 본 사건이다. 가옥 22채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이 중 1채는 완전히 탔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광주시와 광주시의회 기록만 보면, 이처럼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간 북한의 만행에 대한 비판을 찾기 어렵다. 이 같은 북한의 만행이 아예 없었던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자기 고장 출신 전사 군인에 대한 추모 발언도 찾기 어렵다. 상기 검색 결과에 따르면 마치 ‘금기어’라도 된 듯이 그 누구도 얘기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중·북 침략 부역자’ 정율성과 관련해서는 기록이 많다. ‘서정우’란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와는 그 결과가 아주 다르다. 광주시 홈페이지에서 ‘정율성’으로 검색하면 총 123건에 달하는 결과물이 뜬다. 먼저 ‘정율성 선생(기자 주: 광주시 표현)’ 관련 업무를 맡은 광주시청 ‘주무관’이 3명이다. 이 밖에 정율성 관련 검색 결과물은 ▲웹페이지 1건 ▲시정소식 40건 ▲게시판(광주시정 홍보·각종 공고) 22건 ▲첨부문서 32건 ▲멀티미디어(카드뉴스 등) 25건 등이다. 광주시의회도 상황은 광주시와 비슷하다. ▲회의록 7건 ▲부록 124건 등의 검색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광주의 아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도 ‘중·북 침략 세력’의 부역자에 대해서는 단순히 ‘광주 출생’이란 이유만으로 과분한 관심과 공적 자원을 투입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방치된 듯한 ‘광주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문성중에서 광주시 남구 사동 사직공원으로 향했다. 사직공원에는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와 ‘충혼탑’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곳은 정율성이 나고 자랐다는 또 다른 고향인 ‘광주시 남구 양림동’ 근처다. 광주시가 정율성 등을 앞세워 관광지로 미는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정율성 옛집’ ‘정율성 음악 산책길’ ‘정율성로’ 등이 모두 사직공원 바로 밑에 있다.
먼저 사직공원 내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를 찾았다. 해가 질 무렵 사직공원 귀퉁이 그늘진 곳에 있는 전공비 앞에 도착했다. 이 시설은 6·25전쟁과 월남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광주 지역 무공수훈자들의 공을 영구히 보전하기 위해 2002년 11월에 건립한 비석이다.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광주시 지부에서 세웠다. 관리자는 광주시 푸른도시사업소다.
시설 안내판에는 “이곳을 찾아주신 분들께서는 호국보훈의 의미를 되새기고, 선진 시민의식으로 주변 청결에 협조하여주시기 바란다”는 당부가 기재돼 있었는데, 주변 풍경은 그 문구가 무색할 정도였다. 안내판 옆에는 ‘금연공원’이란 팻말이 뽑힌 채 나뒹굴었고, 정체불명 현수막이 구겨진 채 방치돼 있었다. 전공비로 올라가는 계단은 언제부터 쌓였는지 모를 흙먼지로 가득했다. ▲정율성 사진 ▲정율성 기념사업 내역 ▲중국 내 정율성 인지도 ▲정율성의 ‘옌안송’ 악보 동판 ▲정율성 기록물 ▲정율성 흉상이 233m에 걸쳐 전시된 ‘정율성로’와는 달리 초라했다.
전공비 탑신 정면에는 ‘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護國武功受勳者戰功碑)’란 문구가 음각돼 있었다. 후면에는 광주 지역 무공수훈자의 성명이 자음 순으로 기재돼 있었다. 전공비 기단에는 아래와 같은 설립 취지문이 있었다.
<(전략) 자유·평화와 민주의 시대인 새천년을 맞이하여 오늘 이 자리에 전공비를 세우는 것은 우리 광주 지역 무공수훈자들의 공훈을 영원히 보전함으로써 우리의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함이다. 서기 2002년 11월 5일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광주광역시지부>
한편, 무공수훈자회는 광주시의 ‘정율성 공원’ 조성 강행에 대해 “정율성은 중국을 위해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했고, 김일성과 북한 공산당을 위해 ‘조선인민군 행진가’를 작곡해 6·25전쟁을 부추기면서 대한민국과 동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역적”이라며 “중공군과 북한 김일성 앞잡이를 자처한 정율성을 위해 역사공원을 조성하려는 광주시장은 과연 대한민국 국민인가를 묻고 싶다”고 질타했다.
‘친일’은 단죄… ‘친중·친북’은 외면
사직공원의 또 다른 국가수호 시설인 ‘충혼(忠魂)탑’을 찾았다. 충혼탑은 1948년 10월 당시 군내 좌익 세력이 일으킨 여순반란사건과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광주·전남 지역 순국 경찰관 3196명의 위패가 봉안된 곳이다. 원래 1956년 과거 전남도청(현 아시아문화전당) 앞 상무관 정원에 건립됐으나, 붕괴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따라 1981년 10월, 현재 위치에 재조성됐다.
경찰충혼탑은 정율성이 대표 인물인 ‘양림역사문화마을’ 근처 양림파출소 뒷산에 있다. 80여 개쯤 되는 계단을 통해 언덕에 올랐다. 충혼탑 앞에는 양파정(楊波亭)이란 건물이 있다. 1914년에 광주 지역 부호인 정낙교가 광주천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지은 정자다. 정낙교의 외손 중 한 명이 월북 후 평양음악대학 교수를 하다가 ‘김일성 숭배’를 비판하고 소련으로 망명한 음악가 정추(1923~2013년)다.
양파정 앞에는 ‘일제 식민통치 협력자 정봉현, 여규형, 남기윤, 정윤수’란 제목의 안내문이 있다. 2020년 8월, 광주시장 명의로 설치된 것이다. 당시 광주시장은 노무현 정부 때 ▲국세청장 ▲행정자치부 장관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내고 광주시 광산구 을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2선을 기록한 이용섭 더불어민주당 조세재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이다.
이용섭 시장 당시 설치된 이 안내문은 “광주시가 이율배반적 행태를 보인다”는 비판을 자초할 가능성이 크다.
양파정 안내문은 “이 누정(양파정)에는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친일인사 4명이 쓴 현판(시문)이 있다”로 시작한다. 안내문은 전술한 4인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며 그들의 친일 행적을 고발한다.
이어서 광주시장 명의의 양파정 안내문에는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을 맞이하여,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제 식민통치 협력자 정봉현, 여규형, 남기윤, 정윤수의 ‘단죄문(斷罪文)’을 설치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당시 친일 행적이 있는 이들을 ‘단죄’한다는 안내문의 취지를 비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같은 광주시의 행태는 두 가지 비판을 자초할 수 있다.
첫째, 6·25전쟁 때 불법 남침 세력에 가담해 각종 군가를 짓고, 중국 귀화 후에는 ‘민족 분단의 원흉’이자 ‘전쟁범죄자’인 마오쩌둥(毛澤東)을 찬양하는 곡을 만든 정율성의 행적은 광주시 곳곳에 산재한 ‘정율성’ 관련 시설에서 왜 볼 수 없느냐는 점이다. 정자 현판을 쓴 이들의 잘못을 낱낱이 밝히는 식으로 ‘역사 정의 바로 세우기’를 강조하는 광주시는 왜 정율성을 알리는 그 숱한 선전물에 정율성의 ‘전쟁범죄 부역’ 행위에 대해 기술하지 않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정봉현 등 4인의 ‘친일 반민족’은 단죄해야 할 문제이지만, 정율성의 ‘친중·친북 반민족’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인가.
둘째, 강기정 광주시장은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정율성 역사공원’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두 가지 색깔, ‘적과 나’로만 보인다”며 “광주의 눈에 그는 뛰어난 음악가”라고 정율성을 옹호했다. 예술과 정치를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이다. 이는 ‘양파정 안내문’ 설립 취지와 배치된다. 시문(時文)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한 분야다. 강 시장 논리를 그대로 빌리면, 정봉현 등 4인의 시문은 ‘예술적 완성도’로 평가해야 한다. 그들의 친일 여부를 구태여 특기할 필요가 없다. 전임 시장이 위 4인의 과거사를 이유로 ‘단죄문’을 세웠다면, 후임인 강 시장이 철거했어야 한다. 그런데 왜 강 시장은 이를 그대로 놔두고 있는가.
모순적인 ‘호국영령 추모’와 ‘정율성 기념’
충혼탑을 본 뒤 광주시 남구 구동 광주공원에 있는 현충탑에 갔다. ‘정율성 논란’ 촉발 직후 고 서정우 하사 모친인 김오복 전 광주 대성여고 교장이 “현충탑 정비할 돈은 없다더니 정율성 공원에 48억원을 쓰느냐”며 광주시를 비판할 때 언급한 그 장소다. 당시 그는 “광주 현충탑에 가보면 담배꽁초가 널려 있고 우범 지역처럼 관리가 잘 안 돼 있다. 재정비 좀 해달라”고 호소했다.
광주시 현충탑은 6·25전쟁 당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한 광주·전남 지역 전몰 호국용사 1만5867명(군인 1만745명, 경찰 5122명)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방문 시점이 문제 제기(8월 24일) 후 2주가량 지난 다음이라서 그런지 광주시 현충탑에서 ‘부실 관리’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광주시 현충탑은 원래 1963년에 건립됐다. 당시 탑 명은 ‘우리 위한 영의 탑’인데, 2015년에 ‘영원의 빛’이란 이름으로 다시 세웠다. “우리는 호국용사들이 목숨과 바꾸어 지킨 이 땅에 살면서 지난 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자라나는 후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고취하여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고자, 이곳에 현충탑을 다시 세운다”는 게 재건립 취지다. 이 광주시 현충탑 뒤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6·25전쟁의 역사적 평가’가 음각돼 있다.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전쟁으로 국제전이면서 내전(內戰)과 같은 성격의 전쟁이었다. 6·25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대한민국이 유엔참전국과 함께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한 ‘세계자유수호전쟁’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전쟁’이었다.>
광주시는 매년 현충일에 이곳에서 ‘현충일 추념식’을 개최한다. 역대 광주시장들은 이 현충탑 앞에서 ‘호국영령(護國英靈)’의 희생을 강조했다.
<강운태 전 광주시장: 우리 대한민국은 선열들의 뜨거운 애국심이 있었기에 일제 식민통치와 6·25전쟁, 독재 정권의 숱한 시련을 극복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올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와 번영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만들어낸 소중한 결실이다.(2014년 6월 6일)
윤장현 전 광주시장: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그 큰 뜻을 본받아 지금보다 정의롭고, 더 평화롭고, 더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안으로는 공동체의 통합을 이루어내고, 밖으로는 남북통일의 시대를 여는데 시민의 힘과 역량을 모아나가야 한다.(2017년 6월 6일)
이용섭 전 광주시장: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와 번영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그리고 민주열사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이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앞에 부끄럽지 않은 후대가 되고 선열들의 뜻을 받들어 그 희생이 값지게 하는 길에 앞장서겠다.(2022년 6월 6일)
강기정 현 광주시장: 지금 우리는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조국에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서 있다. 헌신이 있었기에 나라를 되찾았고, 전쟁과 독재의 시련을 끝내고 인간 존중이 실현되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했다.>
상기한 것처럼 전·현 광주시장은 현충탑 앞에서 ‘순국선열·호국영령의 피·땀·눈물’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 ‘순국선열·호국영령의 희생을 값지게 하는 길’을 외쳤다. 그런데 이들은 그와 동시에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적’이었던, 정율성을 기념하는 사업에 지속적으로 세금을 투입했다. 이 역시 ‘이율배반적 행태’라는 비판을 피하기 쉽지 않다.
광주 출신 학도병 공훈 선양 위해 뭘 했나?
이튿날, 광주시 북구 운암동 소재 중외공원에 갔다. 중외공원은 광주시립미술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광주·전남 순국학생 위령탑이 있다. 광주·전남 순국학생 위령탑은 광주·전남 출신 6·25참전 학도병 122명의 우국충정과 애국정신을 후세에 남기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89년에 건립된 현충 시설이다. 매년 6월 광주·전남 호국학도병 동지회가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학도병(정식 명칭은 학도의용군)은 6·25 당시 징집 나이인 18세에 미치지 않는 14~17세의 중·고교생 신분으로 자진해 참전한 ‘의용병’을 말한다. 법적으로 이들은 “1950년 6월 29일 이후 육·해·공군 또는 유엔군에 예속되어 1951년 2월 28일 해산될 때까지 근무한 자로서 전투에 참가하고 그 증명이 있는 자”이다. 학도병은 6·25 발발 당시 미성년자였고, 군 복무 대상이 아니었는데도 ‘중·북’ 공산 침략 세력에 맞서 ‘자유 대한’을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12년에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호남 지역 학도의용군은 5491명이다.
광주·전남 순국학생 위령탑의 왼쪽에는 헌사(獻詞)를 새긴 비석이 있다.
<(전략) 1950년 6월 25일 통일의 염원은 사라지고 남과 북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후 북한은 이날을 기해 대한민국을 침공하였다. 잠시 평화를 얻어 투쟁을 멈추고 학업에 전념했던 우리 반공학생들은 펜을 버리고 그 손에 총을 들었다. 군번 없이 무명전사로 참전한 나이 어린 학생들은 오로지 조국과 민족자주와 독립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아무런 주저도 없이 피어보지 못한 꽃다운 젊음을 이름 모를 산야에서 산화하였다. 이제 그날의 포성은 아스라해졌고 국토에 전흔은 희미해졌다. 40년의 세월은 흘렀어도 외로운 싸움에 꽃다운 나이로 간 광주·전남의 젊은 영혼을 흠모하며 살아남은 우리가 1989년 이 탑에 새기니 그대들이여 부디 평안히 잠드시라.>
‘정율성 추앙’은 자해
광주·전남 순국학생 위령탑 오른쪽에는 ‘헌시(獻詩)’를 새긴 작은 비석이 있다.
<자유의 횃불 아래 이름 없이 죽은 동지여/이름 없이 죽은 학우여 죽어서 살아 있는 님이여 죽어서 살아 있는 혼이여/총도 없이 군번도 없이 싸우고 지킨 나라 죽어서 지킨 나라에 다시 살아나서 겨레의 힘이 되소서 나라의 빛이 되소서>
70여 년 전 어린 나이에 나라를 지키다가 전장에서 산화한 ‘광주·전남의 젊은 영혼’들을 위해 광주시는 그간 뭘 했을까. ‘침략 부역자’ 정율성을 기리는 ‘정율성 국제음악제’에 지난 5년 동안 지원한 12억원만큼이라도 썼을까. 그 1/10 만큼이라도 투자했을까. 《월간조선》이 입수한 광주시의 <2018~2022년 보훈 예산 집행 내역>에서는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에 따르면 광주시의 ‘정율성 사랑’은 ‘헌법’이 규정한 대한민국 정체성과 배치된다는 비판을 자초하는 일이다. 한반도에서 정통성과 합법성을 가진 유일한 국가인 ‘대한민국’의 영토를 참절하고, 정부를 참칭하고, 동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적화를 시도한 공산 세력에 부역한 정율성을 광주시가 기념하는 것은 ‘자해(自害)’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광주시의 ‘정율성 사랑’은 6·25 때 산화한 해당 지역 호국영령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는 지적을 피하기 쉽지 않다. 전·현 광주시장이 스스로 내뱉은 ‘호국영령의 희생과 헌신’ 같은 말의 ‘진의’도 의심받을 수 있다. 기대효과도 불분명하지만, 만일 중국 관광객을 끌어들일 요량으로 정율성을 기념한다면, 이는 돈 때문에 선열의 희생과 헌신을 배신했다는 비판을 자초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강기정 광주시장은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을 강행할 생각이다. 그는 9월 13일, “한국에서 교육받고 자라고, 중국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하고, 음악으로 중국 혁명에 이바지한 인물이 정율성 선생”이라며 “다시 시작된 한·중 문화 교류와 관광 교류에 훌륭한 연결고리인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늘 사람이 필요하고 국가 간 교류, 도시 간 교류, 민간 교류,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며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에 대한 기존 생각에 변화가 없음을 시사했다.⊙
한창 논쟁이 진행될 당시 ‘사회 정의를 바라는 전국 교수 모임(정교모)’은 전국적 비판이 거센 상황에서도 소위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을 강행하겠다는 광주시의 행태를 비판했다. 정교모는 8월 29일, “정율성 기념공원, ‘광주’만의 역사 해석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살았고, 대한민국의 적으로 살았던 정율성을 기념하는 공원을 만드는 것은 지금까지 광주가 이야기하던 5·18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정율성과 5·18은 양립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끝내 강행된다면 광주는 더는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며, 5·18운동은 더는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민주화운동으로 기억되기 힘들 것”이라고 밝혔다. 광주시가 ‘민주·평화·인권의 도시’를 자처하면서도 6·25 당시 중북(中北) 침략 세력에 가담해 전쟁범죄 행위를 선동한 ‘중국인 정율성’을 추앙하는 것은 ‘자기부정’이란 얘기다.
그런데 5·18 정신에 앞서 ‘정율성 기념’과 병존할 수 없는 ‘정신’이 있다. 6·25 당시 국가의 부름을 받고 목숨을 바치거나 피땀 흘려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킨, 광주 지역 용사들의 ‘애국 애향 정신’이다. 이에 《월간조선》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공훈을 알리는 광주 지역 ‘국가 수호 시설’들을 살피고, 중·북 공산 침략 세력의 ‘나팔수’ 정율성에 대한 광주시 ‘추앙’의 문제점을 돌아봤다.
왜 ‘대한민국 광주’가 ‘중국인 정율성’ 추앙하나?
정율성은 북한 노동당과 중국공산당에 가담해 소위 ‘혁명음악’을 만든 ‘한국계 중국인’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중국공산당을 위해 일했고, 해방 후엔 북한으로 넘어가 다수의 북한군가를 만들었다. 6·25 때는 북한군으로 참전했다. 민족반역자·전쟁범죄자 김일성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동족상잔을 격려하는 북한군가를 다수 작곡했다. 이후 중국으로 잠시 건너갔다가 중국공산당원 자격을 회복하고 다시 ‘중공군’으로 참전했다.
그 일생을 보면, 정율성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반국가단체’ 북한 정권 입장에서 대한민국에 대항한 ‘적(敵)’이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을 살상하고, 재산을 파괴한 ‘북한군’의 일원이었다. 우리의 자유통일을 저지하고, 민족적 비극인 ‘분단’을 고착화한 ‘중공군’ 소속이기도 했다.
이처럼 정율성이 대한민국에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는 그 누구든 단 몇 문장만 읽어도 금방 알 수 있다. 반면, 그가 예술적으로 그 무슨 추앙을 받을 만한 업적을 남겼는지는 불분명하다. 그 음악적 성취가 크다고 해도 대한민국이 기려야 할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는 자인데도, 광주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정율성’을 ‘선생’이라며 칭송한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실제 광주시 직원 업무 분담 내용을 보면 ‘정율성 선생’이란 표현들이 등장한다.
혹자는 “정율성이 항일운동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이다. 이는 정율성의 중국인 부인 ‘딩쉐쑹(丁雪松)’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지금까지 정율성의 ‘항일 행적’을 입증하는 근거는 단 하나도 없다. 광주시 동구 벤○○관광호텔 옆 ‘정율성 역사공원’ 예정지에 설치된 ‘정율성 시설물’에도 그런 내용이 없다. “정율성은 1933년 형들을 따라 혁명의 땅 중국으로 건너가 군사학교에서 항일 비밀 활동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면서 항일 전사로 거듭났다”는 식으로 돌림노래 같은 주장만 한다.
이런 문제를 지적하면, ‘정율성 옹호론자’들은 뜬금없이 “정율성 친가와 외가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정율성 집안은 호남 최고의 독립운동 가문”이라는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한다. 그 형제 또는 외가 친척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해서 정율성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논리가 과연 우리 국민에게 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공공기관이 이 같은 주장을 하면서 국민 세금을 계속 쓰겠다는 태도는 국민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
한편, 앞서 언급한 ‘정율성 시설물’엔 “항일의 깃발을 들고 동요, 민요, 군가, 뮤지컬, 오페라, 영화음악 등 360여 곡을 작곡한 정율성. 한국과 중국에 펼쳐진 그의 뜨거운 음악 여정이 광주,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선전문구가 있다.
정율성의 ‘항일’은 ‘대한독립’과는 무관한 ‘중국공산당의 항일’이다. 또한 그의 뜨거운 음악 여정은 한국에서 펼쳐진 일이 없다. 6·25 때 중·북 침략 세력의 ‘나팔수’로 활약한 일을 빼면 없다. 그런데도 이런 자의 ‘음악 여정’이 광주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내용을 담은 시설물이 광주 도심 속에 버젓이 서 있다.
전사 후 5년 만에 세운 ‘서정우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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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남구 봉선동 문성중 교내에는 광주 출신 ‘연평도 포격전’ 전사자인 고(故) 서정우 하사의 흉상이 있다. 사진=월간조선 |
<조국 수호의 뜨거운 염원을 가슴에 품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젊은 영혼이여! 그대의 숭고한 희생으로 우리가 이곳에 편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조국과 문성중 학우들은 잊지 않을 것이니, 부디 저 하늘에서 평화의 수호신이 되어 우리를 굽어보며 편히 쉬소서.>
1989년생인 서 하사는 문성중 졸업 후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했다. 2009년 3월 해병대에 입대해 81mm 박격포 사수를 맡았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소위 ‘말년휴가’를 나가려고 연평도 부두에서 인천행 여객선을 기다리다가 서 병장은 북한군 포격 소리를 들었다. 그는 휴가를 포기하고, 부대로 복귀하다가 북한군 포탄 파편에 목숨을 잃었다. 당일 연평도 포병 사격훈련장에서 임무 수행 중이던 문광욱 이병도 북한군 포탄에 흉부 관통상을 입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인해 사망한 서 병장과 문 이병을 전사로 처리했다.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고, 1계급 추서를 했다. 이어서 이들을 국립대전현충원 ‘제2연평해전 전사자 합동묘역’에 안장했다. 또한 서 하사와 문 일병 부조(浮彫·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긴 것)를 연평도 평화공원에 마련해 그들을 추모했다. 해병대 역시 포항 해병대 교육훈련단 ‘해병의 집’에 이들의 흉상을 설치했다.
광주 문성중 소재 흉상은 서 하사 전사 후 5년이 지난, 2015년 10월에 설치됐다. 문성중이 부지를 제공하고, 광주지방보훈청과 광주시교육청이 흉상 제작비 일부를 부담했다. 동문도 모금 활동으로 비용을 보탰다. 이에 따라 뒤늦게 서 하사를 기리는 시설물을 세울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광주시의 기여도는 확인할 수 없다.
‘연평 포격전’ 전사자 성명은 ‘금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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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기준, 광주시청 온라인 사이트에서 ‘서정우’란 이름으로 자료를 검색했지만, 그 결과는 ‘0건’이었다. 출처=광주광역시청 |
광주시의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정우’란 이름이 한 번이라도 언급된 일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검색을 시도했지만, 화면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시스템 오류’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수차례 같은 작업을 반복한 끝에 ‘오류’가 아닌 걸 확인했다. 결국,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광주시의회 의원 68명(6대: 22명/7대: 23명/8대: 23명) 중 그 누구도 ‘서정우’란 이름을 단 한 번도 얘기하지 않은 셈이다.
이번에는 ‘연평도’란 단어로 검색을 시도했다. 광주시에서는 역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광주시의회에서는 단 2건을 확인했는데, 이는 옛 민주노동당 소속 시의원의 “정전 60주년을 맞았음에도 한반도는 연평도 포격 때보다 훨씬 위험한 무력충돌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란 발언과 이를 본회의에서 그대로 인용한 행정자치위원장의 ‘보고’ 내용에 불과했다.
2010년 당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1953년 정전 이후 북한이 처음으로 우리 영역에 무차별 포격을 가해 군(2명 전사·16명 부상)은 물론 민간인(2명 사망·3명 부상)이 피해를 본 사건이다. 가옥 22채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이 중 1채는 완전히 탔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광주시와 광주시의회 기록만 보면, 이처럼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간 북한의 만행에 대한 비판을 찾기 어렵다. 이 같은 북한의 만행이 아예 없었던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자기 고장 출신 전사 군인에 대한 추모 발언도 찾기 어렵다. 상기 검색 결과에 따르면 마치 ‘금기어’라도 된 듯이 그 누구도 얘기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중·북 침략 부역자’ 정율성과 관련해서는 기록이 많다. ‘서정우’란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와는 그 결과가 아주 다르다. 광주시 홈페이지에서 ‘정율성’으로 검색하면 총 123건에 달하는 결과물이 뜬다. 먼저 ‘정율성 선생(기자 주: 광주시 표현)’ 관련 업무를 맡은 광주시청 ‘주무관’이 3명이다. 이 밖에 정율성 관련 검색 결과물은 ▲웹페이지 1건 ▲시정소식 40건 ▲게시판(광주시정 홍보·각종 공고) 22건 ▲첨부문서 32건 ▲멀티미디어(카드뉴스 등) 25건 등이다. 광주시의회도 상황은 광주시와 비슷하다. ▲회의록 7건 ▲부록 124건 등의 검색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광주의 아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도 ‘중·북 침략 세력’의 부역자에 대해서는 단순히 ‘광주 출생’이란 이유만으로 과분한 관심과 공적 자원을 투입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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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남구 사동 사직공원 소재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 기자가 방문 당시 그 일대에서는 관리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팻말은 뽑히고, 현수막은 구겨진 채 방치돼 있었다. 사진=월간조선 |
먼저 사직공원 내 ‘호국무공수훈자 전공비’를 찾았다. 해가 질 무렵 사직공원 귀퉁이 그늘진 곳에 있는 전공비 앞에 도착했다. 이 시설은 6·25전쟁과 월남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광주 지역 무공수훈자들의 공을 영구히 보전하기 위해 2002년 11월에 건립한 비석이다.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광주시 지부에서 세웠다. 관리자는 광주시 푸른도시사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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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남구 양림동에는 정율성 사진, 정율성 기념사업 내역, 정율성 노래 악보 동판, 정율성 흉상 등이 233m에 걸쳐 전시된 ‘정율성로’가 있다. 사진=월간조선 |
전공비 탑신 정면에는 ‘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護國武功受勳者戰功碑)’란 문구가 음각돼 있었다. 후면에는 광주 지역 무공수훈자의 성명이 자음 순으로 기재돼 있었다. 전공비 기단에는 아래와 같은 설립 취지문이 있었다.
<(전략) 자유·평화와 민주의 시대인 새천년을 맞이하여 오늘 이 자리에 전공비를 세우는 것은 우리 광주 지역 무공수훈자들의 공훈을 영원히 보전함으로써 우리의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 함이다. 서기 2002년 11월 5일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광주광역시지부>
한편, 무공수훈자회는 광주시의 ‘정율성 공원’ 조성 강행에 대해 “정율성은 중국을 위해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했고, 김일성과 북한 공산당을 위해 ‘조선인민군 행진가’를 작곡해 6·25전쟁을 부추기면서 대한민국과 동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역적”이라며 “중공군과 북한 김일성 앞잡이를 자처한 정율성을 위해 역사공원을 조성하려는 광주시장은 과연 대한민국 국민인가를 묻고 싶다”고 질타했다.
‘친일’은 단죄… ‘친중·친북’은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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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가 ‘정율성 역사공원’을 조성할 광주시 동구 불로동의 ‘정율성 옛집’이다. 광주시는 48억원을 들여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적’이었던, 정율성을 기념하는 공원을 만들려고 한다. 사진=월간조선 |
경찰충혼탑은 정율성이 대표 인물인 ‘양림역사문화마을’ 근처 양림파출소 뒷산에 있다. 80여 개쯤 되는 계단을 통해 언덕에 올랐다. 충혼탑 앞에는 양파정(楊波亭)이란 건물이 있다. 1914년에 광주 지역 부호인 정낙교가 광주천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지은 정자다. 정낙교의 외손 중 한 명이 월북 후 평양음악대학 교수를 하다가 ‘김일성 숭배’를 비판하고 소련으로 망명한 음악가 정추(1923~2013년)다.
양파정 앞에는 ‘일제 식민통치 협력자 정봉현, 여규형, 남기윤, 정윤수’란 제목의 안내문이 있다. 2020년 8월, 광주시장 명의로 설치된 것이다. 당시 광주시장은 노무현 정부 때 ▲국세청장 ▲행정자치부 장관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내고 광주시 광산구 을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2선을 기록한 이용섭 더불어민주당 조세재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이다.
이용섭 시장 당시 설치된 이 안내문은 “광주시가 이율배반적 행태를 보인다”는 비판을 자초할 가능성이 크다.
양파정 안내문은 “이 누정(양파정)에는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친일인사 4명이 쓴 현판(시문)이 있다”로 시작한다. 안내문은 전술한 4인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며 그들의 친일 행적을 고발한다.
이어서 광주시장 명의의 양파정 안내문에는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을 맞이하여,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제 식민통치 협력자 정봉현, 여규형, 남기윤, 정윤수의 ‘단죄문(斷罪文)’을 설치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당시 친일 행적이 있는 이들을 ‘단죄’한다는 안내문의 취지를 비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같은 광주시의 행태는 두 가지 비판을 자초할 수 있다.
첫째, 6·25전쟁 때 불법 남침 세력에 가담해 각종 군가를 짓고, 중국 귀화 후에는 ‘민족 분단의 원흉’이자 ‘전쟁범죄자’인 마오쩌둥(毛澤東)을 찬양하는 곡을 만든 정율성의 행적은 광주시 곳곳에 산재한 ‘정율성’ 관련 시설에서 왜 볼 수 없느냐는 점이다. 정자 현판을 쓴 이들의 잘못을 낱낱이 밝히는 식으로 ‘역사 정의 바로 세우기’를 강조하는 광주시는 왜 정율성을 알리는 그 숱한 선전물에 정율성의 ‘전쟁범죄 부역’ 행위에 대해 기술하지 않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정봉현 등 4인의 ‘친일 반민족’은 단죄해야 할 문제이지만, 정율성의 ‘친중·친북 반민족’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인가.
둘째, 강기정 광주시장은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정율성 역사공원’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두 가지 색깔, ‘적과 나’로만 보인다”며 “광주의 눈에 그는 뛰어난 음악가”라고 정율성을 옹호했다. 예술과 정치를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이다. 이는 ‘양파정 안내문’ 설립 취지와 배치된다. 시문(時文)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한 분야다. 강 시장 논리를 그대로 빌리면, 정봉현 등 4인의 시문은 ‘예술적 완성도’로 평가해야 한다. 그들의 친일 여부를 구태여 특기할 필요가 없다. 전임 시장이 위 4인의 과거사를 이유로 ‘단죄문’을 세웠다면, 후임인 강 시장이 철거했어야 한다. 그런데 왜 강 시장은 이를 그대로 놔두고 있는가.
모순적인 ‘호국영령 추모’와 ‘정율성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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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남구 구동의 현충탑은 6·25전쟁 당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한 광주·전남 지역 전몰 호국용사 1만5867명(군인 1만745명, 경찰 5122명)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사진=월간조선 |
광주시 현충탑은 6·25전쟁 당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한 광주·전남 지역 전몰 호국용사 1만5867명(군인 1만745명, 경찰 5122명)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방문 시점이 문제 제기(8월 24일) 후 2주가량 지난 다음이라서 그런지 광주시 현충탑에서 ‘부실 관리’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광주시 현충탑은 원래 1963년에 건립됐다. 당시 탑 명은 ‘우리 위한 영의 탑’인데, 2015년에 ‘영원의 빛’이란 이름으로 다시 세웠다. “우리는 호국용사들이 목숨과 바꾸어 지킨 이 땅에 살면서 지난 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자라나는 후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고취하여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고자, 이곳에 현충탑을 다시 세운다”는 게 재건립 취지다. 이 광주시 현충탑 뒤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6·25전쟁의 역사적 평가’가 음각돼 있다.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전쟁으로 국제전이면서 내전(內戰)과 같은 성격의 전쟁이었다. 6·25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대한민국이 유엔참전국과 함께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한 ‘세계자유수호전쟁’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전쟁’이었다.>
광주시는 매년 현충일에 이곳에서 ‘현충일 추념식’을 개최한다. 역대 광주시장들은 이 현충탑 앞에서 ‘호국영령(護國英靈)’의 희생을 강조했다.
<강운태 전 광주시장: 우리 대한민국은 선열들의 뜨거운 애국심이 있었기에 일제 식민통치와 6·25전쟁, 독재 정권의 숱한 시련을 극복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올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와 번영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만들어낸 소중한 결실이다.(2014년 6월 6일)
윤장현 전 광주시장: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그 큰 뜻을 본받아 지금보다 정의롭고, 더 평화롭고, 더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안으로는 공동체의 통합을 이루어내고, 밖으로는 남북통일의 시대를 여는데 시민의 힘과 역량을 모아나가야 한다.(2017년 6월 6일)
이용섭 전 광주시장: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와 번영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그리고 민주열사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이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앞에 부끄럽지 않은 후대가 되고 선열들의 뜻을 받들어 그 희생이 값지게 하는 길에 앞장서겠다.(2022년 6월 6일)
강기정 현 광주시장: 지금 우리는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조국에 바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서 있다. 헌신이 있었기에 나라를 되찾았고, 전쟁과 독재의 시련을 끝내고 인간 존중이 실현되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했다.>
상기한 것처럼 전·현 광주시장은 현충탑 앞에서 ‘순국선열·호국영령의 피·땀·눈물’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 ‘순국선열·호국영령의 희생을 값지게 하는 길’을 외쳤다. 그런데 이들은 그와 동시에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적’이었던, 정율성을 기념하는 사업에 지속적으로 세금을 투입했다. 이 역시 ‘이율배반적 행태’라는 비판을 피하기 쉽지 않다.
광주 출신 학도병 공훈 선양 위해 뭘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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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북구 운암동 소재 광주·전남 순국학생 위령탑이다.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해 순국한 광주·전남 출신 122명을 추모하는 시설이다. 그들이 ‘총도 없고, 군번도 없이, 싸우고 지킨 나라’에서 ‘중·북’ 침략 부역자를 기리는 일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다. 사진=월간조선 |
광주·전남 순국학생 위령탑의 왼쪽에는 헌사(獻詞)를 새긴 비석이 있다.
<(전략) 1950년 6월 25일 통일의 염원은 사라지고 남과 북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후 북한은 이날을 기해 대한민국을 침공하였다. 잠시 평화를 얻어 투쟁을 멈추고 학업에 전념했던 우리 반공학생들은 펜을 버리고 그 손에 총을 들었다. 군번 없이 무명전사로 참전한 나이 어린 학생들은 오로지 조국과 민족자주와 독립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아무런 주저도 없이 피어보지 못한 꽃다운 젊음을 이름 모를 산야에서 산화하였다. 이제 그날의 포성은 아스라해졌고 국토에 전흔은 희미해졌다. 40년의 세월은 흘렀어도 외로운 싸움에 꽃다운 나이로 간 광주·전남의 젊은 영혼을 흠모하며 살아남은 우리가 1989년 이 탑에 새기니 그대들이여 부디 평안히 잠드시라.>
‘정율성 추앙’은 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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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정 광주시장은 “정율성은 한·중 문화 교류와 관광 교류에 훌륭한 연결고리”라고 주장하면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을 강행하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사진=뉴시스 |
<자유의 횃불 아래 이름 없이 죽은 동지여/이름 없이 죽은 학우여 죽어서 살아 있는 님이여 죽어서 살아 있는 혼이여/총도 없이 군번도 없이 싸우고 지킨 나라 죽어서 지킨 나라에 다시 살아나서 겨레의 힘이 되소서 나라의 빛이 되소서>
70여 년 전 어린 나이에 나라를 지키다가 전장에서 산화한 ‘광주·전남의 젊은 영혼’들을 위해 광주시는 그간 뭘 했을까. ‘침략 부역자’ 정율성을 기리는 ‘정율성 국제음악제’에 지난 5년 동안 지원한 12억원만큼이라도 썼을까. 그 1/10 만큼이라도 투자했을까. 《월간조선》이 입수한 광주시의 <2018~2022년 보훈 예산 집행 내역>에서는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에 따르면 광주시의 ‘정율성 사랑’은 ‘헌법’이 규정한 대한민국 정체성과 배치된다는 비판을 자초하는 일이다. 한반도에서 정통성과 합법성을 가진 유일한 국가인 ‘대한민국’의 영토를 참절하고, 정부를 참칭하고, 동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적화를 시도한 공산 세력에 부역한 정율성을 광주시가 기념하는 것은 ‘자해(自害)’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광주시의 ‘정율성 사랑’은 6·25 때 산화한 해당 지역 호국영령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는 지적을 피하기 쉽지 않다. 전·현 광주시장이 스스로 내뱉은 ‘호국영령의 희생과 헌신’ 같은 말의 ‘진의’도 의심받을 수 있다. 기대효과도 불분명하지만, 만일 중국 관광객을 끌어들일 요량으로 정율성을 기념한다면, 이는 돈 때문에 선열의 희생과 헌신을 배신했다는 비판을 자초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강기정 광주시장은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을 강행할 생각이다. 그는 9월 13일, “한국에서 교육받고 자라고, 중국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하고, 음악으로 중국 혁명에 이바지한 인물이 정율성 선생”이라며 “다시 시작된 한·중 문화 교류와 관광 교류에 훌륭한 연결고리인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늘 사람이 필요하고 국가 간 교류, 도시 간 교류, 민간 교류,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며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에 대한 기존 생각에 변화가 없음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