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이 사람

‘빨간 마후라’ 부른 1세대 재즈 뮤지션 김준

“음악은 제 인생, 재즈는 제 맥박”

글 : 장원재  배나TV 대표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사전 약속 없이도 즉흥 연주 가능… 동료 연주자·객석과의 교감이 재즈의 매력”
⊙ 〈인어공주〉 ‘언더 더 시’(한국어판) 등 부른 1세대 재즈 뮤지션
⊙ 4중창단 쟈니 브라더스 만들어 워커힐호텔 등에서 공연
⊙ 장미화의 ‘내 마음은 풍선’, 패티 김의 ‘나 이제 여기에’ ‘당신이면 좋아요’ 등 작곡
⊙ “누군가를 위해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해야”
사진=조준우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재미작가 이미진의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정말 상관없을까? 궁금할 땐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야 한다. 1940년 신의주 태생, 1946년 인민군의 총격을 받으며 월남(越南). 서울을 거쳐 강원도 영월 주천초등학교 졸업. 6·25 때 부산 영도다리 밑에서 가마니 깔고 숙식. 목포를 거쳐 제주 남단에 정착한 이후 제주 대정중·고등학교 졸업.
 
  이만하면 인생 자체가 역사와 얽혀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준(金準·82)의 사연이다. 대한민국 재즈 1세대 원로이자 작곡가. 가수들이 듣는 가수. 대중적인 음악을 하면 인기와 돈을 얻을 수 있었지만, 숱한 권유를 마다하고 고집스레 자기 세계를 고수한 아티스트. 널리 알려진 인기 스타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중이 기억하는 그의 노래가 있다. 애니메이션 영화 〈인어공주〉(1989년) 한국어판에 나오는 ‘언더 더 시(Under the Sea)’와 ‘손님이 되어주세요(Be My Guest)’가 김준의 목소리다.
 
  ― 디즈니에서는 전 세계 ‘언더 더 시’ 중 김준의 작업이 최고였다는 평가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작업할 때 고생 많이 했어요. 미국에서 감독이 직접 와서 연출했죠.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홍콩, 대만, 일본을 다 둘러봤는데 당신의 노래가 원작과 제일 가깝다’라고 하더군요.”
 
  ― 한국어로 그 감정을 내기가 쉽지 않잖습니까.
 
  “쉽지 않았죠. 미국에서는 음악을 먼저 만들고 거기에 맞춰서 영상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화면을 보면서 거기에 맞춰야 했으니까 아주 힘들더라고요.”
 
  ‘김준의 노래는 칼립소도 아니고 재즈도 아니고 보사노바도 아닌데, 그 세 가지 느낌이 다 살아나서 독특했다.’ 영화 개봉 후 수입사를 통해 전해온 디즈니사의 평가다. 8일 동안 입술이 부르트도록 녹음한 보람이 있었다.
 
  “삼바 기분도 나고, 그다음에 패스트 스윙 기분도 나고, 그래서 그냥 리듬을 탔더니 그런 결과가 나오더군요.”
 
 
  ‘빨간 마후라’
 
영화 〈빨간마후라〉.
  김준의 레퍼토리 중에는 불멸의 국민가요도 있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로 시작하는 ‘빨간 마후라’다. 1964년에 나온 신영균 주연의 동명(同名) 영화 주제곡으로, 남성 4중창단 쟈니 브라더스가 불렀다.
 
  “‘빨간 마후라’ 탄생의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편집, 녹음도 끝내고 시사회 날짜를 잡았는데 주제곡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신상옥 감독님이 황문평 선생님한테 작곡 의뢰를 했던 모양이에요.”
 
  작곡가 황문평은 광화문에 있는 동아방송국(DBS 라디오)으로 달려왔다. 전영우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유쾌한 응접실〉이라는 프로그램 출연 대기 중이던 쟈니 브라더스를 보고 “아, 너희 잘 만났다! 이것 좀 빨리 녹음하자”라며 악보를 내밀었다. 동아방송국 스튜디오에서 피아노 반주로 녹음을 마치자마자, 황문평은 녹음테이프를 들고 부리나케 만리동 시사회장으로 이동했다. 관계자들의 평가는 영화도, 주제가도 호평 일색. 이후 영화 개봉 전 충무로의 모 스튜디오에서 황문평 오케스트라의 풀 멤버 반주로 정식 녹음해 음반으로 냈다. 곡 중간에 휘파람을 불고, 재즈를 연상시키는 즉흥 연주가 들어간 것은 김준의 제안을 황문평이 기꺼이 수용한 결과다.
 
  “‘빨간 마후라’는 리듬이 참 특이했어요. 쿵 짜자짜 쿵 짜자짜 쿵 짜자짜 쿵, 이런 리듬이었죠. 그 당시엔 트로트가 아주 유행했을 때인데, 그 리듬이 군가도 아니고 독특했죠. 아주 흥겨우면서도 비장하고,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는 어마어마한 흥행을 거뒀다. 2022년 현재의 기준으로도 〈빨간 마후라〉의 스토리나 영상미는 독보적이다. 공군을 소재로 한 또 다른 명작 할리우드 영화 〈탑 건〉에 견주어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 영화만 아니라, 노래도 훨훨 날았다. 대한민국 공군이 정식 군가로 지정했고, 타이완에서도 공군가로 쓰인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어린이들은 ‘노란 마후라는 통닭 집 사나이~’ ‘까만 마후라는 연탄 집 사나이~’ 등으로 다양하게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하자 그가 웃었다. 그래서 역사에 치인 그의 유년 시절을 묻기 편했다.
 
 
  신의주 만석꾼
 
  ― 태어난 데가 어디시죠.
 
  “평안북도 신의주입니다. 1940년 1월 14일생이죠.”
 
  ― 신의주에 대해서는 기억하시는 게 있습니까.
 
  “기억이 많아요. 우리 집이 신의주 벌판 근처에 있었거든요. 마전동이라고도 그러고 미륵동 뭐 이렇게도 부르고…. 제 발로 집 앞 유치원에 가서, ‘나 좀 다니게 해달라’고 한 적도 있어요. 그랬더니 유치원 선생님이 하얀 손수건을 가슴에 핀으로 달아주면서 ‘집에 가서 얘기를 하고 내일부터 나와라’ 이러시더라고요.”
 

  김준은 유치원에서 가르쳐준 5개국 동요를 지금도 기억한다. 당꼬바지와 소가죽 구두, 아버지가 사다 주신 나팔을 불며 놀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 유치원에 다녔을 정도면 좀 넉넉하게 살았나 보네요.
 
  “넉넉했죠. 아버지가 만석꾼이었으니까요.”
 
  김준의 부친 김득수(金得水·1901~ 1974년)는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사재(私財)를 털어 학교를 세울 정도였다. 김준은 등교하던 학생들이 학교 정문에 서 있던 공덕비에 인사하던 광경을 기억한다. 재산을 기부해 학교를 세우는 것이 가진 사람들의 의무처럼 생각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유감스럽게도, 학교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越南
 
김준은 “대중보다는 동료 음악인들한테 인정받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진=김준 제공
  1946년, 김준은 월남했다. 토지개혁이 시작되고, 지주들 땅을 몰수하자 아버지가 먼저 몸을 피했다.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이 집에 수시로 다녀가기를 한 달쯤, 어느 날 한밤중에 어머니가 김준을 깨웠다. 감시망을 피한 야반도주였다.
 
  “아버지가 혼자 먼저 월남하시면서 어머니하고 약속했던 것 같아요, 서울 어디서 만나자고. 엄마가 제 손을 붙들고서 신의주역에 가서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가 닿은 곳은 황해도 진남포. 거기서 통통배를 탔다. 미리 손을 써둔 밀항선(密航船)이었다. 통통배를 타고 출발하는데 총소리가 났다. 소련군인지 인민군인지 잘 모르겠지만, 군인들이 배를 향해 마구 총을 쐈다. 38선이 아주 막히지는 않았지만, 대놓고 넘을 수는 없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저를 기관실에다 피신시키고 엎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배는 흔들리고, 기름 냄새는 심하고…. 막 토하고 아주 심하게 뱃멀미를 했어요.”
 
  이튿날, 배가 닿은 곳은 인천이었다. 멀미한 몸으로 인천항에 내려 서울까지 걸었다. 아버지를 만난 곳은 명동 한미호텔이었다. 일제(日帝) 때 혼마치(本町)호텔로 불리던 곳이다. 전화도 없고 전보를 칠 수도 없으니, “한미호텔 로비에서 만나자”고 막연하게 약속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며칠을 두고 그곳을 매일 들렀다고 했다.
 
  “이북에 계실 때는 허리띠가 맞는 게 없어서 구둣방에서 허리띠를 맞출 정도로 몸이 있으셨거든요. 근데 굉장히 홀쭉하고 수염도 덥수룩해서 처음에는 아버지를 못 알아봤습니다.”
 
  서울의 첫 거주지는 뚝섬 경마장 근처 문간방이다. 거기서 남산국민학교까지 통학했다. 왕십리 시절, 아버지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등잔불 밑에서 밤새 뭔가를 적었다. 밀가루 포대를 엽서 크기로 잘라 만든 노트였다. 세 식구는 얼마 후 강원도 원주로 이사했다. 원주에서 봉산국민학교에 다니던 김준은 이듬해 부모님과 함께 영월군 주천면으로 이사한다. 그래서 주천국민학교가 그의 모교다.
 
  ― 영월까지 가게 된 이유는 있습니까.
 
  “주천에서 세 들어간 집이 네모난 기와집이었는데, 그 집이 도축 일 하던 분 집이었어요. 이사 후 바로 아버지가 장에 가서 드럼통 두 개를 구해오시더군요. 그 집 마당에서 소·돼지를 잡을 때 껍질을 벗겼는데, 껍질은 버렸거든요. 아버지는 그걸 드럼통에다 넣고 양잿물하고 같이 삶았습니다. 응고를 시켜서 비누를 만드셨어요.”
 
  아버지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왕십리에서 비누공장 수위로 취직한 뒤, 어깨너머로 제조 공정을 익힌 것이다. ‘밀가루 포대 노트’는 비누 제조법 기록지였다. 아버지는 응고된 비누를 두부모처럼 네모나게 자르고, 모서리를 칼로 다듬어 깨끗하게 만들었다. 그러곤 비누가 굳기 전에, 목각으로 새긴 ‘달별’이라는 글자와 달·별 모양을 망치로 쳐서 상품을 ‘완성’했다. 이후 아버지는 ‘달별’ 비누를, 김준은 양잿물을 짊어지고 강원도 곳곳의 장마당을 누볐다. ‘달별 비누’는 강원도 곳곳 널리 팔려나갔다. 나름대로 대량 생산(?)을 하고, 물건이 마차에 실려 나갈 정도였다. ‘이제 좀 터를 잡고 살 만하다’라고 생각했는데 세월은 김준 가족을 그냥 두지 않았다. 6·25가 터진 것이다.
 
 
  영도다리 밑에 가마니 깔고 살아
 
김준은 아직까지도 현역 음악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김준 제공
  “일요일인데, 아침에 밥을 먹는데 메가폰으로 반장이 ‘강 건너로 잠깐 피신했다가 다시 오라’고 그래요. 그냥 밥 먹다가 수저 놓고서 빈손으로 바로 출발했죠. 아버지하고 저하고 그 길로 부산까지 갔습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해 영월에 남으셨습니다.”
 
  부산까지는 주야장천 걸어갔다. 거의 매일 하루에 150리를 꼬박 걸었다.
 
  “가는 길에 배가 고프면, 피란 떠나고 빈집 아무 집이나 들어가 거기 있는 물, 쌀 가지고 그냥 밥해서 먹고, 닭 같은 거 잡아서 삶아 먹기도 하고, 김장독에 김치 있으면 그것도 꺼내 먹고 그랬습니다.”
 
  가는 길에 폭격도 받고 총격도 받았다. 피란민이 신작로를 빼곡하게 메웠는데, 총 맞아 죽고 허기져 죽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그렇지만 마냥 걷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부산에서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영도다리 밑에다 가마니 깔고 살았어요. 희한하더라고요. 다리가 열리고 닫히고…. 부산은 그때 피란민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하루 밤낮 사이 산 중턱에 판자촌 동네가 생길 정도였는데, 판자촌 사시는 분들만 해도 좀 안정이 된 상태였어요. 근데 우리는 그것도 차지하지 못해서 그냥 영도다리 밑에서 가마니 깔고…. 한 12가구 정도가 영도다리 밑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거기서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사과를 팔았습니다. 사과 상자를 엎어 놓고 사과를 밑에 세 개, 위에 하나를 얹어 좀 돋보이게 했어요.”
 
  먹고사는 일이 달린 일이니 사과를 먹을 수는 없었다. 매일매일 엄청난 유혹이 닥쳤고 금세 저항하는 방법도 찾았다. ‘사과 하나 깎아 도’라는 손님이 있으면 껍질을 좀 두툼하게 깎는 것이 그것이다. 손님이 가고 난 후 뒤돌아서서 먹었던 사과 껍질의 향기를 김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4후퇴 때에는 목포로
 
  국군이 북진(北進)하면서, 김준도 아버지와 부산을 떠났다. 영월의 살던 집에 당도해보니 폭격을 맞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비누 만드는 시설도, 집기도 모두 다 사라지고 없었다. 이듬해(1951년) 1월 1·4후퇴 때 온 가족이 다시 피란을 간 이유다.
 
  “전과 같이 신작로를 이용해 피란하는데, 그 옆 산기슭 눈 쌓인 곳에다 한 아기 엄마가 갓난아기를 포대기째로 놓고 그냥 가는 거예요, 살 가망이 없었는지. 누구 하나 서로를 신경 써줄 형편이 아니었죠. 제 또래의 아이들도 안심할 수 없었어요. 손 붙들고 가다가 놓치면 그냥 잃어버리는 겁니다. 찾으려야 찾을 길이 없는 거죠. 저희도 아버지가 맨 앞에 가시고 새끼줄로 묶어서 나를 가운데 놓고, 뒤에 또 어머니가 묶으시고, 밤새 걸어가면서 자는 거예요.”
 
  ― 어디로 갔습니까? 또 부산으로 갔나요.
 
  “아뇨. 그땐 목포로 갔습니다. 우리가 이북에서 월남한 터라 남쪽 어디에도 연고가 없었어요. 당시 목포항에, 왜정 시대 때 만들어진 창고가 있었는데, 피란민들이 전부 거기에서 기거했습니다.”
 
  남은 게 지붕밖에 없는 뻥 뚫린 건물이었지만, 그래도 견딜 만했다. 거기서도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워 죽어 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목포에서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학교를 찾았다. 학교 사정도 어려워 입학은 불발. 아들을 데리고 돌아 나오면서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본 순간이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보름 정도 지내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가자!’고 하시더니 목포항으로 갔습니다. 제주도 가는 배를 구걸해서 탔죠. 전쟁이 지겨우니까, 갈 수 있는 가장 남쪽으로 가자, 안전한 곳으로 가자라고 생각하신 거죠.”
 
 
  제주, 전쟁의 기억들
 
  항구 쪽에 머물면서 생선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려 했지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생선의 기름으로는 비누를 굳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조그만 잡화상이다.
 
  김준은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밑의 ‘토끼 부락’에 살면서 모슬포 대정중학교에 다녔다. 통학길, 모슬포 우체국 뒤로 ‘한국보육원’이 있었다. 미국의 헤스 대령(Dean E. Hess·1917~2015년)이 1·4후퇴 당시 군 수송기로 1000여 명의 전쟁고아를 피신시킨 곳이다. ‘유모차 공수작전’으로 불린 이 후송 작업은 이후 영화(〈전송가(Battle Hymn)〉, 1957년)로도 만들어졌다.
 
  “저랑 같은 책상을 쓰던 친구 중에도 보육원생이 있었어요. 그때 친구들 따라 한국보육원으로 놀러 가기도 하고, 거기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죠.”
 
  1956년 영화를 찍을 때 한국보육원 생도 20명 정도가 미국으로 직접 가서 헤스 대령과 몇 년 만에 감격의 해후를 하기도 했다. 친구로부터, “애들이 미국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한국보육원뿐 아니라, 모슬포 인근에는 시설이 많았다. 제1 훈련소가 있었고, 커다란 레이더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미군 통신대도 있었다. 또 포로수용소도 있었다.
 
  “철망을 치고 있었지만, 안이 다 보였어요. 포로들과 접촉도 있었죠. 학교 다니는 길에 포로들이 만든 수공품들을 받아다가 팔기도 하고, 물물 교환도 해줬습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직접 만난 기억도 있다. 중학교 1학년 때인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 포로수용소를 방문했다. 학생들이 도열해 대통령을 환영했는데, 우남(雩南)은 김준을 콕 집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최정민
 
  대통령만큼은 아니지만, 또 다른 유명인사와 만난 일도 있다. 1956년 아시안컵 우승 당시 주전 공격수로 활약한 센터 포워드, 훗날 국가대표팀 감독이자 ‘황금의 다리’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날린 최정민(崔貞敏·1930~1983년)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니까 누가 대학에 진학할 형편인지 조사했는데, 전교생 중 7명 빼고는 다 못 간다고 했죠. 그때부터 볼을 찼어요. 제가 운동을 좀 했으니까. 교내 이어달리기 선수도 했고, 100m 기록이 11초3이었거든요. 혹시 특기자로 대학에 가거나 진학을 못 하더라도 학창 시절의 추억이라도 만들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1957년이 아니라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준족(駿足)이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차범근의 선수 시절 100m 기록이 11초3이다. 포지션은 라이트 윙(right wing)이었다. 당시 현역 군인으로, 상사(부사관) 계급장을 달고 있던 최정민 코치를 기억한다. 기업이 몇 개 없어, 방첩대, 병참대, CIC, 헌병대 등 군부대마다 축구팀을 운영하던 시절이다. 마라토너, 복서 등이 입대, 아예 체육단을 운영하는 부대도 있었다. 아시아 최고의 축구 선수였지만, 그렇게 유명한 분인 줄은 몰랐다.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인 최정민은 김준을 무척 아꼈다.
 
  “체격도 좋고 키도 크고, 수염이 덥수룩하셨죠. 제가 이북 말을 쓰니까 ‘야 너 고향이 어디야?’ 물으시더군요. ‘저 신의주입니다’ 그랬더니 ‘야! 나도 평안도야’ 그러시더군요.”
 
  최정민은 김준에게 개인 코치를 해줬다. 파격이었다. ‘야! 산현아! 볼은 발로 차는 게 아니고 머리로 차는 거야!’라며, 눈앞의 볼만 보지 말고 경기장 전체를 읽고 판단을 하라고 했다. 김산현(金山鉉)은 김준의 본명이다. 예명은 쟈니 브라더스 해체 이후 1970년대부터 사용했다. 축구로 대학을 가려던 계획은 전국대회에서 성적을 내지 못해 무위로 돌아갔다. 그때 ‘음악’이 손을 내밀었다.
 
 
  국어 선생님이 열어준 음악의 길
 
젊은 시절의 김준. 사진=김준 제공
  “집에서 놀고 있었죠. 군(軍)에 입대하려니 3대 독자(獨子)라 안 된다는 겁니다. 7년 장기 복무를 신청했는데, 헌병대에서 가정 조회를 나와서 보더니 ‘독자면 가족 부양은 누가 하느냐’고 묻더군요. 그때는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가정 사정이 좋지 않았죠. 삶이 막연했는데, 어느 날 대정고등학교 사환(使喚)이 자전거를 타고 사계리 용머리 토끼굴로 절 찾아왔어요. 조재부 국어 선생님이 급하게 부르신다고.”
 
  조재부 선생님은 김준이 노래를 잘한다고, 같은 실향민이라고 각별하게 아꼈다. 모슬포 축강에 데리고 가서 ‘가고파’ 등 가곡을 청하기도 했다. 자전거 뒤에 타고 학교로 가니 교장실로 오라고 했다.
 
  “서울 경희대학교에서 콩쿠르 대회를 한다는 거예요. 1960년 3월에 신흥대학이 경희대학교로 교명을 바꿨는데, 그 기념인지 ‘전국 음악 콩쿠르 대회’를 한다고 공문이 왔다고 했습니다.”
 
  재학생 중에 갈 사람이 없으니 졸업은 했지만 나가보라는 얘기였다. “감히 제가 서울 중앙 무대에서 어떻게 노래 경연을 하나요? 못 갑니다”라고 하니 “아무 소리 말고 나가라. 체재비, 왕복 교통비도 학교에서 다 대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재학생만 참가 자격이 있다면서 학적부에 등록해주기까지 하셨다. 제자를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하는 스승들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에 학생증을 다시 만들고, 먼지 묻은 교복을 털어 입고, 길렀던 머리를 다시 깎았다.
 
  ― 노래는 언제부터 한 겁니까.
 
  “음악은 제가 성인이 되어서 알았지만,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노래를 한 기억이 있어요. 유치원 학예회 할 때 중국 옷, 소련 군복 입고 노래하고 방송에도 나갔죠. 목포에서는 청강생으로 받아달라며 ‘야가 노래를 잘한다’고,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 앞에서 노래하라고 시킨 일도 있고요. 모슬포 군인교회 중등부 성가대에서 활동하기도 했죠. 하지만 노래가 나의 직업, 소명, 이런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북제주군 항구까지 가서 밤새 배를 타고 목포에 도착, 목포에서 새벽 삼등 입석 열차를 타고 서울까지 달렸다. 짐도 빼곡, 사람도 빼곡, 화물도 빼곡…. 그래도 피곤하지 않았다.
 
  “서울역에 내려서 대정고 동창인 장철우라는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 친구도 이북 피란민이었죠. 장로 아들이었는데, 서대문 감리교 신학대학에 다니고 있었어요. 철우가 기숙사에서 자기가 먹는 밥 나누어 먹고 방도 같이 쓰자고 하더군요.”
 
  규정 위반이었지만, 감신대에서 편의를 봐줬다. 감신대 이동일 음악 목사님도 족집게 과외 레슨을 해주었다.
 
  “지정곡 중에 ‘가고파’ ‘고향 그리워’ 등 우리 가곡과 ‘An die musik’이라고, 독일 리트(Lied·가곡)가 있었습니다. 독일 리트를 제가 들어보기를 했나, 불러보기를 했나 참 막막했는데, 이동일 선생님이 오리지널 LP를 틀어주면서 ‘듣고 그대로 흉내를 내라’ ‘한글로 가사 적어서 그대로 외우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3일 동안 밤낮으로 외웠습니다. 감신대 교회에 피아노가 있었는데, 거기서 밤늦도록 가르쳐주기도 했어요.”
 
  사흘이 지나자, 이동일 선생님이 “그만하면 됐다. 한번 붙어볼 만하다”고 했다. 총참가자는 85명 정도. 예선에서 15명을 뽑고, 본선에서 3명을 추렸다. 예선 전날 출연 순서를 추첨하고, 다음 날 경희대 강당으로 갔다.
 
 
  “내가 평생 노래할 수 있겠구나”
 
  “경연 당일 또 문제가 생겼어요. ‘반주자 없는 사람 손들어’ 그랬는데 저만 손을 들었습니다. 저는 반주를 학교에서 해주는 줄 알았죠.”
 
  알았다고 해도 반주자를 동행할 형편이 아니었으니 상황은 불변이었다. 그때 저 멀리 구석에서 어떤 여학생이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으째 쓰까잉” 그러더니 “어메, 내가 해주꾸마 반주!”라고 자청했다. 나중에 경희대 음대 학장을 역임하는, 신흥대학 졸업반이던 음대생 황선이었다. 덕분에 예선 통과.
 
  그전까지는 참가에 의의가 있었고, 예선 통과는 감히 생각도 못 했는데 15명 안에 뽑히니 자신감이 생겼다. 본선은 바로 다음 날. 장철우는 “야 너 될 것 같다. 입상할 것 같다”라며 격려를 해줬다. “야, 음악 콩쿠르 대회 떨어지면 체육 대학 축구부로 가”라는 말도 했다. 본선 1등은 보성여고, 2등은 진명여고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은 자리는 하나.
 
  “1, 2등이 여학생이고 3등도 여학생인데, 제가 동점으로 3등이었어요. 학교의 배려로 3명이 아니라 4명을 장학생으로 받아주신 겁니다.”
 

  긴장이 풀려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심사평이 들려왔다. “다른 참가자는 다 차려 자세, 부동자세로 노래를 하는데 학생은 어떻게 팔을 벌리면서 노래를 하나?”라고 했다. 여유 있는 동작이 돋보였다는 뜻이었다.
 
  “입상 발표가 있고 ‘이야, 내가 평생 노래할 수도 있겠구나, 내가 성악가를 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처음 들었습니다.”
 
  응원차 방청석에 앉아 있던 이동일 목사와 친구 장철우가 만세를 불렀다. 반주자 황선도 소리를 질렀다. 2022년 현재 이동일 목사님은 돌아가셨고, 장철우는 뉴욕 컬럼비아대학 건너편 한인교회에서 봉직하다 은퇴했다. 한때 이승만 대통령이 다녔던 바로 그 교회다.
 
  “기숙사 규정을 더 위반하면 안 되고 해서 이튿날 바로 제주도로 내려갔어요. 그러고 바로 학교로 가서 상장과 상품을 드렸습니다. 전교생 딱 모아놓고 조회도 했죠. 교장 선생님이 ‘콩쿠르 대회에서 입상하고 장학생으로 학교 다니게 되었다’고 훈화도 하셨어요. 전교생 앞에서 노래도 했습니다. 제 첫 공연이었죠.”
 
 
  재즈와의 만남
 
제2회 MBC 톱씽거 경연대회(1962)에 출전한 쟈니 브라더스. 이들의 데뷔 무대다. 사진=김준 제공
  등록금은 면제였지만 생활비가 문제였다. 도저히 해결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다음 해 해군사관학교 시험을 볼 계획을 세웠다. 사정을 들은 장철우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일단 올라오라”고 했다. 장철우는 기숙사를 나와 독립문 영천시장 근처에서 하숙하겠다고 했다. 같이 지내자는 뜻이었다. 남영동 미군 통신대 군인교회 시온성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던 이동일 목사님도 아르바이트를 주선해주는 등 힘을 보탰다. 국내 각지에 주둔해 있는 미군 교회를 순방하면서 성가와 특송을 하는 일이었다.
 
  1961년 성탄절 공연 때 김준의 독창을 듣고 크게 환호한 사람이 있다. 사회를 보고, 성경을 낭독한 강창순 아나운서다. 유치원생이던 그의 딸이 옆에서 함께 손뼉을 쳤다.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다. 수년 전, ‘61년 공연의 당사자’가 김준임을 우연히 알게 된 강 장관이 만남을 청해 담소를 나눈 추억도 있다.
 
  “그때부터 제가 악보를 읽기 시작했어요. 그전까지는 악보를 볼 줄 몰라 그냥 순전히 외워서 노래했었죠. 악보 관리하고, 성가대 연습 전에 일찍 가서 청소하고, 예배드릴 때 솔리스트도 했습니다.”
 
  ― 성악이 전공이었는데 어쩌다가 재즈 쪽으로 방향을 튼 겁니까.
 
  “제가 고2 때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로 일했습니다. 그때 채플린 게일이라는 흑인 목사님이 계셨어요. 예배 끝나고 사무실에서 음반을 틀어놓고 집무했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루이 암스트롱, 엘비스 프레슬리, 마할리아 잭슨의 노래였어요. 그런데 그 음악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는 겁니다. 특히 루이 암스트롱 노래는 ‘이게 무슨 노래야? 이런 목소리로도 노래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탁성이고, 음정이 정확한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도 참 이렇게 노래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트럼펫 소리도 바로 옆에서 연주하는 것 같았고….”
 
 
  예그린 악단
 
쟈니 브라더스는 1960년대의 ‘아이돌 스타’였다. 사진=김준 제공
  재즈로의 전환은 생계와도 관련이 있다. 1961년 김종필(金鍾泌·JP)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주도, 예그린 악단을 창단했다. 합창단, 연극단, 가무단, 오케스트라, 무용단을 모두 뽑은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예그린 악단은 한국 예술의 기업화, 국악의 현대화, 세계화를 목표로 창단한 단체여서, 급여 수준이 상당히 높았어요. 전국에서 교수, 교사들이 직장 다 그만두고 입단 오디션을 봤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죠. 재학 중에 붙었고, 합격 후에 덕성여대 바로 뒤에 하숙집을 얻었습니다. 장철우한테 신세 안 지고, 처음으로 하루 세 끼를 먹던 시절입니다.”
 
  운현궁에 있던 예그린 악단까지 걸어서 출근했다. 합창단 입단 동기가 나중에 국립합창단 지휘자를 역임하는 서울대학교 성악과 졸업생 나영수다. 나 선배는 옆에서 악보 보는 방법, 발성법 등을 개인지도하듯 알려줬다. 안타깝게도 JP가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나면서 예그린 악단은 1년 후에 해체됐다. 예그린 악단이 존속했더라면, 한국 문화의 지형도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믿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예그린 악단 해체의 결과물이 쟈니 브라더스의 탄생이다. 합창단원 중 제일 젊은 친구 4명이 쉬는 시간에 피아노 주위에 모여 서로 장단 맞추며 노래하던 게 시초다.
 
  “제가 제의했죠. ‘4중창 한번 해보는 게 어떠냐’고. 그때 MBC 라디오가 인사동 사거리 가구점 2층에 있었어요. 그 당시 이종환씨가 DJ 하던 시절인데, MBC 라디오에 주말, 월말, 연말 노래자랑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거기 나가서 ‘He’s Got the Whole World’ ‘홍하의 골짜기’ ‘냉면 국물 더 주시오 아이고나 맛 좋다’를 불렀습니다. 주말, 월말 대회 우승하고 연말 대회 특등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죠.”
 
 
  정상에서 해체한 쟈니 브라더스
 
1982년 패티 김 음반 사진. 전곡을 김준이 만들었다. 사진=김준 제공
  쟈니 브라더스는 불후의 명곡들을 많이 남겼지만 6년간의 활동 후 인기 절정에서 해체한다. 1968년의 일이다.
 
  “맞아요. MBC에서도 우승하고 동아방송 연말 콩쿠르 대회에서도 우승하니까 워커힐 연회부에서 우리를 픽업했습니다. 워커힐 무대는 국내 정상급 아티스트들만 설 수 있는 꿈의 무대였어요. 그 무렵에는 내국인들은 출입을 못 하고, 외국 사람들만 출입이 가능했죠. 그곳 연회 부장님이 오셔서 스카우트 제의를 했고, 쟈니 브라더스는 워커힐 전속 사중창단이 되었습니다.”
 
  동양 최고의 무대 워커힐에 출연하면서 방송 활동도 병행했다. 수많은 작곡가로부터 곡을 받았다. 특히 거장(巨匠) 박춘석은 ‘방앗간 집 둘째 딸’ ‘네가 잘나 일색이냐’ ‘마포 사는 황부자’ 등 풍자적인 노래를 만들어 줬다. 방송 주제곡, 라디오 방송 주제곡도 숱하게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해체라니?
 
  “최정상에 오르니 스케줄이 밀리더라고요. 남성 사중창단이라면 4중 화음이 정석이고 특기인데, 바빠지니까 연습을 태만하게 하고 자꾸 편안하게 가는 겁니다. 2부 합창으로 줄인다거나 단음으로 간다든가…. 그래서 이제 한계가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새로 베이스가 들어올 때까지 하고 나는 그만두겠다’라고 했더니 ‘그럴 수는 없다. 깔끔하게 정상에서 해체하고 각자의 길을 가자’라고 의견이 모였어요.”
 
  생활고(生活苦)도 해체 이유 가운데 하나다. 방송 출연료는 많지 않았고, 솔리스트 1명 출연료를 4명이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단체라고 출연료를 더 주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8군에서 오디션을 보고 직장을 옮겼다.
 
  미8군 부대는 다른 의미에서 꿈의 무대였다. 일단 급여 수준이 국내 무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두 번째는 음향 장비 등 기자재가 월등했고, 미국 현지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음원이나 악보를 바로 받아 볼 수 있었던 정보의 최전선이었다. 그래서 음악적으로 상당한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신중현(Hicky Shin), 키 보이즈(Key Boys), 유주용, 윤복희, 최희준, 패티 김, 위키리, 서수남, 하청일, 윤시내, 그리고 김수희 등 쟁쟁한 가수들이 모두 미8군 무대 출신 아티스트다.
 
  김준은 작곡가로도 활동하며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내 님은 어디에~’로 시작하는 장미화의 경쾌한 히트곡 ‘내 마음은 풍선’, 패티 김의 ‘나 이제 여기에’ ‘당신이면 좋아요’ 등도 세상에 내놨다. 하지만 그는 대중적인 가수는 아니었다. 자기의 음악 세계를 고수했고, 능력이나 음악적인 가능성에 비해 대중적 명성이 미치지 않았다. 재즈라는 마니아의 세계로 들어가 면벽(面壁) 수도하듯 음악을 했다. 후회라든가 불안감은 혹시 없었을까?
 
 
  지금도 재즈클럽 ‘천년동안도’에서 공연
 
김준은 “재즈는 저의 맥박”이라고 말한다. 사진=김준 제공
  “후회는 없어요. 제가 누구랑 겨루는 음악 생활은 안 했으니까요. 음악적으로는 친구들과 깊이 교류하지 않았습니다. 추구하는 음악이 다르니까요. 저는 대중한테 인정받는 가수보다는 음악인들에게, 동료들한테 인정받는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겁니다.”
 
  ― 재즈의 매력은 무엇입니까.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가면, 사전 약속 없이도 즉흥 연주가 가능합니다. 키(코드)하고 템포만 약속하고 ‘원! 투! 원 투 스리 포!’ 하고 나가는 건데, 내가 원하는 걸 다른 연주자가 따라오면 그때는 국적, 인종, 종교 이런 걸 다 초월해 연주자들이 하나가 됩니다. 객석과의 교감도 짜릿한 느낌을 주죠. 재즈 음악에는 그런 장점이 있고 매력이 있습니다.”
 
  ― 어디 가면 선생님 공연을 볼 수 있습니까.
 
  “동숭동에 있다가 낙원상가로 옮긴 ‘천년동안도’라는 재즈클럽으로 오시면 됩니다. 매월 마지막 일요일 6시에 공연합니다. 매주 일요일 12시, 3시에는 용인 더 원 클래식이라는 카페에서도 무대에 섭니다. 얼마 전에 부산 공연도 했고, 대구에서도 공연 예정입니다. 연세대학교 송도캠퍼스, 고려대학교, K 호텔 등 초청공연도 다녀왔어요.”
 
  ― 선생님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무엇입니까.
 
  “음악은 제 인생이죠. 제 전부입니다.”
 
  ― 재즈란 무엇입니까.
 
  “재즈는 제 맥박인 거 같아요. 비트!”
 
  ― 아티스트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이 말만큼은 꼭 해주고 싶으시다면요.
 
  “누군가를 위해서 노래하거나 연주를 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럴 때 정말 좋은 음악이 나온다고 봅니다. 진정한 음악인이라면 타협하면 안 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인터뷰를 마치려는데, 노(老) 아티스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필자를 불렀다.
 
  “어머니(崔昌善)가 제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간호하던 통장 부인을 통해 저에게 유언을 전하셨어요. 피란민이셔서 제가 ‘이모’라고 부르던 분이었죠. 어머니 말씀이 ‘산현이는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다. 이건 꼭 알려줘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답니다. 어머니는 가냘픈 미인이셨는데, 늘 아프셔서 제가 포근하게 안겨본 기억이 없어요. 병약하셔서, 아마 아이를 갖지 못하셨던 건 아닐까 짐작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생모(生母)가 늘 그리웠어요. 신의주 시절, 소안동 소작인 집에 3일에 한 번 들러 ‘젖엄마’를 만나곤 했는데, 어쩌면 그분이 낳아준 분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월남하신 원로분과 말씀을 나누다가 누구 아들이라고 했더니, 그분이 혼잣말로 ‘김득수한테는 아이가 없는데…’라고 하시더군요. 어쩌면 아버님도 제 생부(生父)가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껏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어쩌면 이 인터뷰가 제 생애를 정리하는 마지막 인터뷰가 될 수도 있으니까 털어놓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은 없습니다. 두 분 모두 저를 정성스럽게 키워주셨으니까,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왜 그가 수도자(修道者)처럼 살았는지 어렴풋이 느낌이 왔다. 그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역사가 나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라고 조용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 같았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405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