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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반대했던 싱글러브 장군 타계

“내 별 몇 개와 수백만 명의 목숨을 바꾼 것은 보람 있는 일”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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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5월 美 하원 군사小위원회에 출석했을 때의 싱글러브 장군. 사진=美 하원 군사소위
  지미 카터 전(前)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군(撤軍) 정책에 반대하다가 전역(轉役)당했던 존 싱글러브 전 유엔군사령부 참모장(예비역 육군소장)이 1월 29일 미국 테네시주(州)에 있는 자택에서 타계(他界)했다. 향년(享年) 100세.
 
  고인(故人)은 CIA 창립 요원 중 한 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 CIA의 전신인 OSS(전략활동국) 요원으로 독일군 후방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들과 함께 활동했다. 1945년 이후에는 만주, 라오스, 베트남 등지에서 특수공작요원으로 활약했다. 6·25 때는 대대장으로 김화지구전투에 참전했다.
 
  고인이 한국인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1977년 5월 29일 자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 때문이다. 이 인터뷰에서 존 사르 기자는 고인에게 “귀하는 카터 대통령의 철군 계획이 전쟁을 부를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고인은 “만약 (카터의) 철군 계획대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면, 그다음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일개 육군 소장이 대통령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反旗)를 든 것이다.
 

  후일 고인은 자신이 그렇게 대답한 이유로 북한군의 전력(戰力) 증강에 대한 최신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고 술회했다. 즉 북한군은 1970년대 전반기에 대포와 전투기는 두 배, 장갑차는 세 배, 수륙양용차와 수송기는 네 배로 늘렸으며 휴전선 가까이에 공군 기지를 만들고 병력을 공격대형으로 전진 배치시켰는데, 미국은 1976년에 이르러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고인은 이런 상황을 모르는 카터가 1975년부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된 후에 군부(軍部)로부터 적절한 보고를 받으면 이를 취소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사실 이 인터뷰 당시 고인은 “나는 철군에 반대하지만 만약 대통령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우리는 직업의식과 열성을 다해 이를 수행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존 사르 기자는 이 대목은 보도하지 않았다.
 
 
  “기자는 제 발언을 정확히 보도”
 
  신문 기사를 본 카터는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고인을 불러 직접 자신에게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함께 백악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브라운 장관은 고인에게 “대통령을 만나면 모든 책임을 기자에게 전가(轉嫁)하라.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고, 나는 철군을 지지한다’고 말하라”고 권했다. 고인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관께선 잘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 기자는 제 발언을 정확히 보도했습니다. 저는 제 생각을 모든 사람이 이해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고인과 카터와의 만남은 1시간30분이나 계속되었다. 발언 경위를 묻는 카터에게 고인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발언을 한 시기는 한미 간의 철군 협의가 있기 전이었으므로 각하께서 정책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철군 결정이 내려지면 이를 열심히 수행할 것이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런 결정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군인은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를 보면 고인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항명(抗命)하려 한 것이 아니라, 직업군인으로서의 전문성과 양심에 바탕을 두고 대통령에게 올바른 보고를 하려는 충정에서 그런 발언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카터는 고인에게 군부에 대한 문민(文民) 통제의 전통에 대해 강의하듯 길게 이야기했는데, 고인은 훗날 “그런 것들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므로 필요 없는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카터는 고인을 처벌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고인을 다른 부대로 전출(轉出)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는 사이에 하원 군사위원회 소(小)위원회는 고인을 불러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었다. 이 자리에서도 고인은 주한미군 철수 불가(不可)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 소위원회는 나중에 한국을 방문해 현황을 살펴본 후 결국 주한미군 철수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고인의 인터뷰 파문은 점점 더 커져갔다. 브라운 국방장관은 고인에게 한국으로 귀임(歸任)하지 말고 바로 조지아주 육군사령부로 부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베시 장군이 반발했다. 결국 브라운 장관은 고인에 대한 성대한 환송 파티나 훈장 수여, 이임(離任)인사를 위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예방(禮訪) 등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고인이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음 임지로 가는 것을 허용했다.
 

  때문에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박 대통령은 사람을 보내 고인에게 위로와 감사의 뜻을 전했다. 고인은 이임을 앞두고 휴가를 얻어 일주일간 한국을 여행했는데, 가는 곳마다 그를 알아본 한국인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식당에 들어가면 일어나서 박수를 치곤 했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한국을 떠난 후 조지아주 육군사령부 참모장으로 전속(轉屬)되어 근무하다가 1978년 4월 다시 카터의 중성자탄 제조 연기, B-1 폭격기 생산계획 취소를 비판, 결국 전역당했다. 예편 후에는 서방목표재단(Western Goals Foundation)을 설립, 전 세계적 차원에서의 반공(反共)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이란-콘트라게이트에 연루되기도 했다. 말년에는 공산주의희생자기념재단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누군가는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
 
  주월미군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고인을 “진정한 군사 전문가이자 정직하고 애국적인 신념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했고, 헨리 하이드 전 미 하원의원은 “용감한 사람, 철저한 애국자, 예리한 관찰자”라고 했다.
 
  고인은 후일 전인범 전 육군특수전사령관과 만난 자리에서 “유엔사령부 소속으로 한국 방어를 책임지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면서 “카터 대통령이 그런 결정을 했다면 누군가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 고인은 “그 바람에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하고 별 둘로 예편된 데 대해 아쉬움은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내 별 몇 개와 수백만 명의 목숨을 바꾼 것은 보람 있는 일입니다.”
 
  한국인들은 고인에게 큰 빚을 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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