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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영면에 들다

해외 396곳에 대우 로고를 휘날렸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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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12월 9일 작고한 고(故) 김우중(金宇中) 전(前) 대우그룹 회장은 우리나라 재계에서 명암(明暗)이 가장 뚜렷한 인물로 꼽힌다.
 
  김 회장은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 ‘샐러리맨의 신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알 수 있듯, 들불처럼 사업을 일으키며 대우그룹을 재계 서열 2위 그룹으로 일궈냈다. 재계의 대표 격인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회장도 두 번이나 지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를 내고 분식회계, 사기 대출 혐의로 추징금 17조원대를 선고받은 ‘실패한 경영인’이기도 하다.
 
  김우중 회장이 만들고 이끌던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에서 ‘대우’의 흔적은 여전하다. 대우건설, 대우조선해양, 미래에셋대우(대우증권) 등은 여전히 사명(社名)에 대우 이름을 쓰고 있다.
 
  경기고·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 부장 시절인 1967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평범한 직장 생활 6년 차에 한 결정이었다. 대우실업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미국에 섬유 원단을 팔아 사업을 이어갔다. 대우실업의 수출 실적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의 사업무대는 애초부터 한국이 아니라 세계였던 셈이다.
 
  그의 영욕의 삶 마지막 부분은 베트남에서 국내 청년 사업가들에게 멘토링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 씨앗은 사업 초기부터 있었다. 김 회장은 대우실업이 승승장구하자 불과 2년 만인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 지사를 세우고, 1975년 종합상사 시대를 준비했다. 1970~80년대는 한국의 고도 성장기로, 그는 이 시류를 정확히 읽어낸 것이다.
 
  김 회장은 부실기업이던 한국기계(1976년 인수·대우중공업), 새한자동차(1978년 인수·대우자동차), 대우조선공사(1978년 인수·대우조선해양) 등을 인수해 짧은 시간 내에 이 회사들의 경영을 정상화시켰다. 그는 회사의 오너보다는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싶어했다. 김 회장은 1977년 동아방송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소유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가가 되기보다 성취형 전문경영자가 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대외적인 활동도 활발해져서 이즈음 그는 전경련 부회장,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등을 맡았다. 그는 1982년 건설과 무역 부문을 합친 ㈜대우를 만들며 회사를 본격적인 그룹 반열에 올려놓았다.
 
 
  국내 기업 중 최초로 북한에 공장 만들어
 
  한국 경제의 창업 세대로 꼽히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정주영 현대그룹 선대회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내 대표 경영인이 됐다. 그의 얘기가 실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1989년 출간)는 6개월 만에 100만 부가 팔리며, 그의 ‘세계 경영’을 천명하는 계기가 됐다. 1990년대 동유럽이 몰락한 것을 계기로 김 회장은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등에서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면서 세계 경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대우그룹 비서실 출신 심준형 김앤장 고문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 회장은 한 세대가 희생해야 다음 세대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김 회장의 해외 출장 거리는 총 954만km, 지구를 240바퀴쯤 돈 거리라고 한다. 그는 1985년 《월간조선》과 만나 “창업 이후 지금까지 하루도 쉰 적이 없다. 신혼여행도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오후에 올라왔다”고 말한 바 있다.
 
  대우그룹은 우리나라 기업 중 최초로 북한에 진출한 기업이다. 김우중 회장은 1992년 계열사 사장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해 당시 주석인 김일성과 회담을 가졌고, 북한과 합작 공단을 조성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이렇게 대우와 북한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남포 경공업 공단은 1996년에 가동을 시작했지만,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가 북한에 진출한 것에 대해 주위 사람들은 “김우중 회장이 세계 경영을 선포한 이후 동남아와 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등에 잇따라 진출하면서 김 회장에게 남은 시장은 북한뿐이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남북 경협 사업은 끝이 났지만, 대우그룹의 사세(社勢)는 날이 갈수록 확대됐다. 김 회장이 ‘세계 경영’을 선포한 후에 대우는 신흥국에 잇따라 진출하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계열사 41곳, 해외법인 396곳, 임직원 35만명을 거느린 국내 2위의 재벌그룹(자산 기준)이 됐다. 당시 미국 《포천》지는 대우그룹을 세계 18위 기업으로 선정했다. 김우중 회장은 이즈음 전경련 회장이 됐고, 명실공히 ‘샐러리맨의 신화’ 주인공이 됐다.
 
 
  말년에 청년 사업가 키우기에 열 올려
 
  그는 경영인으로서 전반 20년이 화려했다면, 후반 20년은 초라했다. 1997년 11월에 닥친 외환위기는 김우중 회장의 발목을 잡았다. 대우그룹은 사세가 커지는 만큼 부채의 규모도 커져가고 있었다. 그룹 해체 직전인 1998년에는 부채 규모가 89조원으로 자산 총액을 넘어섰다. 특히 그는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 마찰이 잦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재벌그룹을 지목했고, 김우중 회장은 ‘수출’을 통해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여전히 갖고 있던 터였다. 금융기관은 대우그룹의 기업어음 발행을 허가하지 않았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대우그룹은 1999년 8월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대우그룹이 내놓은 자구책은 정부에 먹혀들지 않았고, 결국 대우그룹은 1999년 공중 분해됐다.
 
  김우중 회장은 1999년 10월 중국으로 출국했다가 이후 5년8개월 동안 해외에서 생활했다. 해외를 떠돌던 김 회장은 2005년 6월 국내에 들어왔다. 김 회장은 입국장에서 “실패한 기업인으로서 과거의 문제를 정리하고자 돌아오게 됐다”고 했다. 김 회장은 대우그룹의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8년 1월에 특별사면됐다. 김 회장은 스스로를 ‘실패한 기업인’이라고 칭했지만, ‘세계’와 ‘젊은이’에 대한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그는 인생 말년에 베트남에 주로 머물면서 젊은 청년 사업가 양성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 프로그램에 주력했다. 김 회장은 별도의 유언은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우리 국민의 20%가 해외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국민이 산다”는 말을 되뇌었다고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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