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온 대선(大選)

안희정 傳奇 - 53장면으로 본 그의 삶 53년 (3/3)

16세 때 사회주의 혁명 꿈꿨던 소년, 대권(大權) 두 발자국 앞까지 왔다

  •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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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스스로를 정치인이라고 칭한 것은 1994년 노무현과 일하면서부터
⊙ 박정희 대통령 존경한 아버지, 이름을 정희와 똑같은 희정으로 짓고 육사(陸士) 진학 권해
⊙ 중3 때 박정희 죽음으로 환상에서 깨어나
⊙ 고1 때 혁명가 꿈꾸다 제적당해… 검정고시 거쳐 ‘운동권’ 되려 고려대 입학
⊙ 전대협의 대부… 1986년 건국대 사태와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두 차례 수감,
    고려대 제적당해
⊙ 안기부 지하실에서 수사관들에게 고문받으며 받은 질문에 허물어져 내려
⊙ 1989년 김덕룡 의원 보좌관으로 정계 입문… 3당 합당에 실망해 출판사 영업부장으로 변신
⊙ 1994년 노무현 의원의 제안으로 정계 복귀
⊙ 장수천-나라종금 사건으로 수감
⊙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은 단물만 빼먹고 노무현의 젊은 동업자 안희정은 뒤치다꺼리만 했다
⊙ 나는 김대중과 노무현의 뒤를 잇는 장자(長子)
⊙ 북한과 교류하되 한미 동맹 더 굳건해져야… 자주국방도 강조
안희정 지사는 “노무현, 그는 정말 나랑 피 맛도 똑같은 것 같다”고 말한다.
41. 안희정이 말하는 ‘노무현과 나’ 그리고 대연정(大聯政)
 
  “‘노무현, 그는 정말 나랑 피 맛도 똑같은 것 같다. 정말 좋다.’ 좌절과 고민, 도전을 거듭하던 그의 곁에서 나는 어느 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지낸 물리적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내 삶에서 노무현을 지우면 여백만 가득한 도화지가 될 것이다.”
 
  “만일 노무현이 없었더라면 나는 역사와 이데올로기 논리를 동원해 줏대 없고 무원칙한 정파의 이익만 대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1989년 김덕룡 의원 비서관으로 처음 제도권 정치를 시작했을 때 의원실에는 지지자나 친구들이 항상 찾아왔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보좌진에게 밥도 사주고 용돈도 쥐여주곤 했다. 김덕룡 의원이 서울대를 나와서인지 아니면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비서실장을 지내서인지 지인들이 그렇게 찾아왔고 보좌관에겐 어떤 달엔 거의 월급에 육박하는 부수입이 생겼다.
 
  1990년 3당 합당 뒤에는 이철 꼬마민주당 사무총장을 모시게 되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김덕룡 의원실만큼은 아니지만 항상 누군가 와서 밥을 사주고 용돈을 줬다. 이철 사무총장은 무소속이었지만 서울대 출신이라는 게 작용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1994년부터 함께한 노무현 전 의원에게는 이렇게 찾아오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부자 친구가 없어서인지 상고(商高)를 나와서인지 혹은 본인이 이런 ‘호의’를 거부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보 진영에도 재야에도 기득권은 존재한다. 우리 때는 소위 스카이(서울대, 연대, 고대) 중심의 운동권 질서가 있었다. 이들 학교에서 NL(민족해방) 그룹이 만들어지면 지방의 학교들에도 NL 그룹이 쫙 형성되었다. 서울에 CA(제헌의회)가 생기면 또 지방으로 CA가 확산됐다. 스카이가 NL에서 손을 떼고 소위 비명문대라 불리는 학교가 이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한 때부터 학생운동은 급격히 쇠퇴했다. 재야에도 이런 분위기는 분명히 존재했다. 명문대 중심의 질서에 짓밟힌 노무현의 현실을 비서인 나도 똑같이 느꼈다. 유시민 전 장관이 어느 인터뷰에서 노무현의 이런 현실을 두고 한 말이 기억난다.
 
  ‘재야 출신 선배들이 노무현을 우습게 아는 게 나는 우스웠다. 노무현을 평가해 주지 않는 게 너무 서운하다. 솔직히 대학 안 나왔다고 차별한 것이라고 본다. 이른바 서울대 출신 중에서 나도 좀 잘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이런 내가 노무현 밑에 들어가 그 사람을 위해 일할 의사가 있다. 노무현은 그럴 만한 자질과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동교동계도 아니고 상도동계도 아니다. 운동권인 것도 아니고 운동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인텔리인 것도 아니고 인텔리가 아닌 것도 아니다. 출세한 것도 아니고 출세를 안 한 것도 아니다. 노무현은 언제나 경계에 서 있었다.”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바로 다음날 출근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사면(四面)이 구가(舊歌)다.’ 새로운 정치를 얘기하고 후보가 됐지만 새로운 정치를 이끌어야 될 정치인으로서 딛고 서 있는 현실은 온통 옛날 노래뿐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대통령 당선자 신분일 때 한 사우나에서 우연히 만났다. 목욕을 마친 뒤 노 대통령에게 나는 취임식에 못 갈 것 같다고 했다. 나라종금 사건으로 화살을 맞은 내가 대통령의 첫걸음에 함께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려. 사람들이 나 축하해 준다고 호남선 타고 경부선 타고 올라오겠지. 호남선에서는 ‘저거 영남 사람 아닌가’ 그러고, 경부선에서는 ‘저놈, 호남으로 양자 간 사람 아니냐’ 이러면 나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그런 현실은 이어졌다. 새롭게 시작해야 될 모든 살림살이가 다 헌 그릇이니 얼마나 난감했을까. 사람들은 그가 너무 앞서간다는 말을 많이 했지만 그는 늘 시대와 국민에게 등 떠밀려 가고 있다고 했다.”
 
  “그의 죽음이 슬펐던 이유는 그와 나의 육신이 영영 이별한 데에 그치지 않는다. 특권과 반칙을 특권과 반칙이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연고주의 질서, 실력에 기초한 공정한 기회와 도전을 어렵게 하는 기득권 질서에 도전했던 노무현이다. 그도 출세한 사람이었지만 이 질서에 도전했다. 한 사회의 기득권 질서를 바꾸고 변화를 꾀한다는 것은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저항이 크다. 노무현 대통령의 도전과 죽음은 이 변화를 위한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절실함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도전의 역사가 중단될까 두렵고 슬프다. 이대로 가다간 조선왕조가 무너지듯이 대한민국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때때로 엄습한다. 최근의 ‘국정농단’ 사태를 보며 그것이 더욱 현실화되고 있는 것 같아 절망스럽다.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또다시 여성과 아이들을 비롯한 약자, 그리고 평범한 서민들인데…”
 
  안희정 지사는 연정 제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의 연정 제안은 박근혜·최순실과 새누리당을 용서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연정은 어떠한 선거공학적 접근도 고려하지 않은 분명한 자신의 소신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지금의 정쟁구도에서 벗어나) 촛불광장의 민심이 요구하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놓고 의회와 협력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협치 형태가 대연정이 될지 소연정이 될지는 국가개혁과제를 놓고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연정에 대한 비판은 앞으로 있을 많은 토론을 통해 해결하면 된다.”
 
 
  42. 안희정이 말하는 ‘민주 양아치’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시절에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오셔서 우리 연구원들에게 밥을 사주신 적이 있다. 그때 김 의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즘 재야 학생운동 하던 친구들이 정치권에 많이 들어와. 여기 정치권에서는 줏대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을 ‘정치권 양아치’라고 불렀는데 가만 보니까 이 정치권 양아치보다 한 수 위가 있어. 그게 ‘민주 양아치’라고 하더군. 민주주의 운동의 논리로 정치판 양아치 짓을 하니 ‘배운 도둑질이 더 심하다’고. 옛날 정치판 양아치는 양아치라고 낙인이라도 찍을 수 있었는데 민주 양아치들은 배운 게 있어서 논리로 잘 포장을 하니 양아치라고 찍히지는 않지만 사실 행태는 양아치나 마찬가지야.’
 
  엄청나게 부끄러웠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나의 논리가 정의’라는 폭력적 태도가 아직 내게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43. 안희정이 청춘들에게
 
2017년 2월 6일 안희정 지사가 충남도청에서 아르바이트 대학생들과 간담회를 가진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른으로 대접받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누군가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도, 내 인격과 권리를 무시하는 것도 싫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내 권리를 침범하는 간섭을 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5, 6학년 때는 가출을 하는 것이 소원인 때도 있었다.
 
  작은아들도 나를 꼭 닮아서인지 어려서부터 ‘저항정신’이 충만했다. 둘째가 중학생이 되고 어느 날이었다. 혼낼 일이 생겨서 앉혀놓고 말하는데 꼬박꼬박 말대꾸다. 말대꾸하지 말라고 언성을 높였더니 조목조목 따지고 든다.
 
  ‘아버지, 뭐가 말대꾸고 뭐가 대화예요? 이야기하자고 해놓고 제가 말하면 말대꾸라고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시만 해도 나는 엄격하기만 한 아버지였다. 더군다나 사내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나는 아이들이 버릇없게 군다 싶으면 손을 대기도 했다. 아이들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서로 부딪칠 때면 육탄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거나 객기를 부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 이야기가 3분을 넘어가면 나는 안 들려요. 그래서 다른 짓을 하면 아버지는 화를 내고 나는 거기에 반항하게 되고 아버지는 더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3분 안에만 끝내주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을게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한참 방황을 하고 그 후에는 게임이며 드럼에 빠져 걱정만 시키던 놈이 어느새 이만큼이나 컸나 싶었다. 별수 있나, ‘오냐’ 하고 말았다.
 
  아들이 나에게 맞서는 것이 왜 당황스럽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나는 고뇌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개겨라. 위험을 감수하고 개겨야 한다.’
 
  부모 세대의 권위에 도전하고 넘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주길 기다리며 눈치 보는 한 영원한 소년일 뿐 미래를 향한 지평선을 넘을 수 없다.
 
  N포세대란 말을 거침없이 입에 올리지만 세상에 자기 인생을 쉽게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N포세대와 같은 말은 나와 같은 아버지 세대들이 자식들에게 붙여준 명찰일 뿐이다. ‘혁명세대’ ‘저항세대’라고 표현하지는 못할망정 ‘헬조선’이란 이름까지 붙여 포기와 좌절을 당연시하게 한다. 왜 이런 이름으로 우리 자식 세대들이 규정되어야 하는가.”
 
 
  44. 안희정의 복지론
 
  “‘복지는 늘리되 증세는 절대 안 된다’라고 배수의 진을 쳐 버리면 논의가 오도 가도 못 하게 된다. 결국 사회가 풀어내야 할 숙제는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고 만다. 스펙을 열심히 쌓아서 열심히 살거나 눈높이를 낮춰서 취업하라는 충고가 그런 것들이다. 각자도생만이 정답인가?
 
  지금 벌어지는 모든 복지논쟁은 가난한 사람에게 뭔가 시혜적으로 더 나누어줄 거냐 말 거냐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다. 복지비 조금 더 준다고 기초생활수급자의 삶의 질이 크게 나아지는 게 아니다. 쌓아둔 기업보유금이 더 많은 투자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자꾸 포퓰리즘이냐 아니냐, 선별적이냐 보편적이냐 하는 수준의 입씨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선거와 표를 의식해서 됫박질하듯이 그때그때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정책 논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수준을 뛰어넘는 비전을 제시하고 싶다.
 
  복지는 반찬 가짓수만 많고 먹을 것 별로 없는 밥상 대신 찌개와 한두 가지 반찬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식사가 가능한 밥상을 만드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지금처럼 찔끔찔끔 푼돈 나눠주는 것으로는 인간적인 삶을 유지한다는 목적이 효과적으로 달성될 수 없다. 시민들의 근면 성실함을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서 분배가 이뤄지도록 정책의 구조를 잘 짜는 것 또한 국가가 고려해야 할 기술이다. 기회의 공평함이 시민 책임의 방기로 이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45. 안희정이 보는 한국사
 
  “머슴한테 두들겨 맞아온 역사.”
 
  “효종과 정조 때 허망했던 노론 중심의 북벌론을 떠올린다. 원수 갚자며 입으로는 북벌론을 주장하면서도 국방을 위한 각종 개혁에는 단 한 숟가락도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던 조선의 지배세력들이다.”
 
  “소설 《토지》의 앞부분은 동학농민운동을 바라보는 양반 계급들의 태도를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무지렁이 백성들이 그렇게 설쳐봤자 되겠느냐. 역시 이 나라와 역사는 똑똑한 사람이 끌고 가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정 말을 안 들으면 무지렁이 백성들 중 앞에 선 몇 놈만 두들겨 패면 다 끝난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이 땅의 보수 기득권 세력들은 120년 전 양반들이 백성들을 무지렁이로 보고 대했던 그 태도를 못 벗었다.”
 
  “지난 백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민(民)이 관(官)과 국가를 넘어서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망이 망소이의 난, 동학농민운동, 3·1운동, 4·19, 6월 항쟁…. 돌이켜보면 우리 역사에 변곡점을 만들어 낸 것은 백성의 반란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갑남을녀들이 국가와 왕이 휘두른 폭력에 스러져갔다.”
 
  “시민의 기본권보다 대통령이 통치권을 앞세운 유신헌법, 휴전 중이라는 이유로 국민의 기본권을 억누르는 무소불위의 국가보안법, 경찰의 과잉 시위 진압, 민주화운동 인사들에게 가해진 고문과 사법살인, 땅과 물길을 헤집어 놓은 4대강 사업, 전쟁 시보다 많은 군인 사망자 수, 자본의 편에 선 판례와 언론보도들, 효순이 미선이, 쌍용차, 강정마을, 용산 철거민, 세 모녀, 구의역 김군, 그리고 세월호.”
 
  “우리는 더 이상 임금의 나라를 지키는 관군이 되어선 안 된다. 역사의 동력은 이름 없고 평범한 백성이다. 국가와 시대발전의 동력 역시 백성이다. 시대역량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46. 안희정이 말하는 ‘제2의 새마을운동’
 
  “나는 요즘 ‘제2의 새마을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40년 전 우리 아버지, 어머니, 새마을 지도자분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과제를 풀기 위해 같이 뛰어넘어 보자고. 그러면 누군가는 ‘새마을운동은 저쪽 편 것 아닌가’라고 지적하지만 마을 단체활동을 정당과 정파의 지지 문제로 바라보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국민들의 나라가 아닌가. 대통령 혼자 이 나라를 끌어가기 어려운 세상이다. 우리가 더 많이 참여하고 관여해야 한다. 임금의 나라로부터 국민의 나라, 시민의 나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통령’이라 쓰고 ‘임금님’이라 읽고 있는 것이다.”
 
 
  47. 안희정과 나라종금 사건
 
2003년 5월 22일 ‘나라종금 로비 의혹’과 관련해 검찰에 출두하는 안희정 당시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이 사건에 대해서는 2003년 《월간조선》 5월호의 보도 내용을 인용한다.
 
[추적] ‘나라종금 의혹 사건’의 핵심적 사실관계 - 안희정·염동연에게
 
  나라종금 측이 건넨 2억5000만원의 최종 귀착지는 어딘가?
 
  ① 생수업체에 대한 투자인가, 로비자금인가?
  ② 노무현 의원(당시)은 보고받았나?
  ③ 생수업체는 노 대통령 소유인가?
 
  ● 생수업체 임원 대부분은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측근: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은 ‘오아시스 워터’ 대표이사, 노 대통령의 후원회 사무국장 홍경태와 전(前) 운전기사 선봉술은 ‘장수천’의 대표이사, 최도술(崔道述)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장수천’ 이사
 
  ● ‘장수천’의 리스자금 대출 시 노무현 대통령과 노 대통령의 형 건평(健平)씨, 이기명(李基明) 후원회장 등이 리스회사에 연대보증
 
  ● 노 대통령 부인 권양숙(權良淑)씨는 자신 명의의 부동산을 안희정씨가 대표이사였던 ‘오아시스 워터’에 은행담보로 제공
 
  ● 안희정 부소장의 말: “나라종금으로부터 어떠한 돈도 받은 적이 없다”→ “받기는 했지만, 대가성은 없었다”
 
  ● 한나라당 측: “노 대통령과 연관, 특검제 도입해야 한다”, 강금실(康錦實) 법무장관: “미리 대통령을 연결시켜 특검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라종금 의혹 사건’이란 2조원대의 공적자금 투입을 유발하고 퇴출된 나라종금의 대주주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이 이 회사의 퇴출을 막으려고 정치권에 거액의 로비자금을 뿌린 의혹을 받고 있는 사건이다. 특히 이 사건은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 측이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당시 38세)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에게 퇴출 전인 1999년 6월 2억원을 제공했고, 염동연(당시 57세) 민주당 인사위원(노무현 후보 시절 정무특보로 호남 조직 총괄)에게도 같은 해 8월께 5000만원을 전달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대검 공적자금비리합동단속반이 2002년 6월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의 자금관리인이자 보성그룹 계열사인 L사의 이사였던 최모씨에게서 받은 진술로부터 비롯됐다. 최 전 이사는 당시 검찰 조사과정에서 “1999년 6월 안희정씨에게 서울 노보텔 앰배서더 호텔에서 2억원을 줬고 얼마 후인 8월 염동연씨에게도 5000만원을 줬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당시 최 전 이사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에서 생수회사 사장 직함이 적힌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의 명함도 압수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은 안희정씨와 염동연씨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진술에 대해 더 이상 수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2년 12월 13일 자 《조선일보》 보도에 의해 이 같은 사실이 처음 알려졌고, 당시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 측과 관련된 사건이란 점에서 상당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김 전 회장이 23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해 노무현 대통령 측근뿐 아니라 민주당 H, P의원 등 정치권에 전방위 로비를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이 사건과 관련, 투표 4일 전인 2002년 12월 15일 “대선 투표일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진상을 밝힐 수도, 검찰이 수사할 수도 없는 사안을 허위날조해 보도되도록 한 것은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했었다.
 
 
  경실련 : “(검찰은) 원칙에 따라 수사에 임해야 한다”
 
  ‘나라종금 의혹 사건’이 다시 불거진 것은 노무현 후보의 당선자 시절인 2003년 2월께였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정무팀장이었던 안희정씨는 “나라종금으로부터 어떠한 돈도 받은 적이 없다”던 그동안의 주장을 바꿔 “돈을 받기는 했으나 대가성은 없다”며 자금수수 사실을 시인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4월 2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검찰이 노무현 대통령 측근의 로비의혹 수사에 대해 미온적 태도로 일관, 국민적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며 “정치권의 영향에 상관없이 원칙에 따라 수사에 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경실련은 성명서에서 “검찰은 이미 나라종금을 인수한 보성그룹 김호준 회장이 퇴출저지 로비 명목으로 노 대통령 측근 안모, 염모씨에게 2억5000여만원을 전달했다는 진술을 확보했음에도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고 있다”며 “이는 정치권의 눈치를 보며 ‘시녀’ 역할을 자임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반복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나라종금 로비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대검 중수부(부장 안대희)는 4월 6일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과 염동연 민주당 인사위원을 출국 금지했다.
 
  한나라당은 이 사건에 관해 ‘대북(對北) 뒷거래 의혹 사건’과 마찬가지로 특별검사제를 도입, 그 진상을 철저히 밝힐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한나라당 남경필(경기 수원 팔달지역구 위원장) 의원은 2003년 4월 7일 정치 분야 대(對)정부 질문에서 나라종금 사건과 노무현 대통령의 연루 가능성을 제기하며 특검제 도입을 주장했다.
 
  다음은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과 강금실 법무장관 간 일문일답 내용이다.
 
  ▲ 남경필 의원: 대통령이 연루됐다면 검찰이 정당한 수사를 못 한다. 특검제를 도입해야 한다.
 
  ▲ 강금실 법무장관: 사건은 어디까지나 당사자를 상대로 해야 한다. 미리 대통령을 연결시켜 특검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 남경필 의원: (생수회사 장수천) 간부들이 대부분 노 대통령의 측근이고, 권양숙 여사 명의의 집을 장수천에 담보로 제공했다는 설(說)도 있다. 실소유자가 노 대통령이었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 당시 노 의원에게 돈이 전달되지 않았나 하는 것은 당연한 의혹이다. 노 대통령의 의혹에 대한 수사 의지가 있나?
 
  ▲ 강금실 법무장관: 있는 그대로 수사할 것으로 믿는다. 정치적 예단은 위험하다. 여론에 의해 예단이 제기되는 것도 수사기관에는 부담이다. 어느 쪽 눈치도 보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
 
  ▲ 남경필 의원: 대통령이 연루됐다면 검찰이 조사할 수 있나?
 
  ▲ 강금실 장관: 기대한다. 그러나 섣부른 가정은 위험하다.
 
  안희정 현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은 이광재 청와대 국정상황실장과 함께 ‘좌희정, 우광재’라 불릴 정도로 노무현 대통령의 386참모 중 핵심이다. 안희정씨는 1990년대 초반부터 노 대통령 보좌진에 합류한 이후 이른바 ‘노무현 사단’을 이끌어 온 참모진의 리더였다.
 
  안희정씨는 노무현 대통령이 설립한 자치경영연구원(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사무국장을 맡아 연구원 운영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 비서실 정무팀장으로 일했다. 인수위(委) 출범 초기에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민주당에 잔류했고, 2004년 4월 실시되는 제17대 총선에 고향인 충남 논산에서 이인제 자민련 총재대행과 맞승부를 벌이겠다는 정치적 포부도 밝혔다. 대선(大選)이 끝난 뒤 집을 경기도 부천에서 일산으로 옮기고, 친구들로부터 중형차를 선물 받은 사실이 알려져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안희정 : “(돈 받은 사실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하지도 않았다”
 
  안희정씨는 자신이 보광그룹 김호준 전 회장 측으로부터 받은 2억원에 대해 “내가 운영하던 회사(주식회사 오아시스 워터)에 전액 쓰였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이 회사와 전혀 관련이 없어 (돈 받은 사실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하지도 않았다”고 해명하고 있다.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노무현 대통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대선 과정 등을 통해 샘물 회사와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안희정·염동연씨가 보성그룹으로부터 받은 2억5000만원과도 연관이 없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안희정씨와 염동연씨가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 측으로부터 받은 2억5000만원은 노 대통령과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가? 이 부분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안희정씨가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 측으로부터 받은 2억원의 사용처라고 밝힌 (주)오아시스 워터 등 샘물 관련 업체들과 노무현 대통령 부부와의 관계를 파악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995년 10월 17일 충북 옥천군 청성면 장수리 656번지에 샘물 제조·판매업체인 (주)장수천이 설립됐다. 이 회사의 초기 자본금은 5000만원이고, 이 회사에서 생산되는 생수의 제품명(상표)은 ‘오아시스’였다. 회사 재산은 공장 부지 및 건물 8억5000만원(감정가 기준) 정도였다.
 
 
  노 대통령 측근들, 생수회사 임원으로 대거 등재
 
  설립 초기 이 회사의 임원은 대부분 노무현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대표이사 홍경태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후배이며, 노 대통령의 후원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홍경태씨에 이어 대표이사를 맡은 선봉술씨 역시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경남 김해시) 출신으로 노 대통령의 운전기사였다. 이사인 최도술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후배이며, 노 대통령이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변호 업무를 할 때 사무장을 맡았다. 최도술씨는 현재 청와대 총무비서관으로 일하고 있다.
 
  (주)장수천 측은 1999년 3월 19일 한국리스여신(주)으로부터 시설리스 자금 24억원을 대출받았다. 한국리스여신(주)과 (주)장수천 간 시설리스 계약서에 따르면 채무자는 (주)장수천이다.
 
  한국리스여신(주)과 (주)장수천 간 리스계약 과정에서 5명이 보증을 섰다. 보증인은 노무현 대통령과 노 대통령 친형 건평씨, 그리고 이기명, 선봉술, 오철주씨 등이다. 이기명씨는 노 대통령의 후원회장이며, 선봉술씨는 노 대통령의 동향 출신이자 노 대통령의 운전기사였다. 오철주씨 역시 노 대통령과 같은 고향 출신이다.
 
  한국리스여신(주)과 리스계약을 맺을 당시 (주)장수천 측은, 노건평씨와 오철주, 선봉술씨 등 3명의 공동명의로 된 경남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700의 166 소재 대지 및 건물과 공장 부지 등을 담보로 제공했다.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소재 대지 및 건물은 노건평씨가 40%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는 오철주씨(33%)와 선봉술씨(27%)가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한국리스여신(주)은 (주)장수천 측이 리스료를 제대로 납부하지 않자 2000년 7월 24일 자로 리스계약 해지 통보를 한 뒤 이해 8월 창원지방법원에 담보물건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소재 대지 및 건물(감정가 21억8600만원)의 경매신청을 했다. 이 물건은 4회 유찰된 뒤 2001년 4월 23일 민상철씨에게 12억100만원에 낙찰됐다. 민상철씨는 노건평씨의 부인 민미영씨의 친동생이다.
 
  민상철씨와 노건평씨는 직접 부동산 거래를 하기도 했다. 노건평씨는 자신의 소유인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 일대 별장을 포함한 건물과 토지 1300여 평을 2000년 5월 3일 처남인 민상철씨에게 넘겼으며, 민상철씨는 이를 2002년 4월 10일(등기일 기준) 경남 김해시 안동 소재 신발제조업체인 태광실업 대표이사 박연차씨에게 다시 넘겼다.
 
  한국리스여신(주)은 이와는 별도로 2000년 8월 10일 서울지방법원에 노건평씨 명의의 부동산(경남 거제시 사등면 성포리 317 일대 677평과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 710 소재 211평 등 토지 888평)과 자동차에 대한 가압류를 신청하기도 했다.
 
  한편 1999년 7월 6일 샘물 제조업체인 (주)장수천의 제품 ‘오아시스’를 판매하는 회사인 (주)오아시스 워터가 설립된다. 이 회사의 초기 자본금은 5000만원이었고, 2000년 9월 8일 2억4000만원으로 늘어났다.
 
  (주)오아시스 워터의 대표는 당시 자치경영연구원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던 안희정 현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이 맡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후배이며, 후원회 사무국장을 맡았던 홍경태씨가 이사로 등재됐다. (주)오아시스 워터는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 명의의 부동산을 담보로 국민은행에서 1억원을 대출받기도 했다.
 
  오아시스 워터의 대표이사 안희정씨는 2000년 10월 27일 (주)오아시스 워터와 오아시스 상표권을 신설 (주)오아시스 측에 넘긴 뒤 이해 11월 노무현 캠프로 복귀했다. 이 회사의 자본금은 1억원이었으며, 대표이사는 김근보씨가 맡았다.
 
  이후 2001년 8월 23일 (주)오아시스는 경매를 통해 신남철씨에게 넘어갔다. 낙찰가액은 1억9500만원(최저입찰가 기준)이었다. 회사 이름도 다시 (주)워터 코리아로 변경됐고, 상표도 ‘카리스’로 바뀌었다.
 
 
  ‘워터 코리아’ 대표이사는 신남철 전 민주당 대전 동구청장 후보
 
  (주)워터 코리아의 대표이사 신남철씨는 2002년 6·13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전 동구청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주)장수천의 대표이사였고, 노무현 대통령의 운전기사였던 선봉술씨가 이 회사의 이사로 등재됐다.
 
  (주)장수천의 회사 경영권과 상표권자가 이처럼 수차례 바뀌면서도 이들 회사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이 줄곧 회사 경영에 관여해 왔다는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샘물회사 간 연관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안희정씨는 이 같은 의혹에 대해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이 부산상고 동문인 선모씨가 대표를 맡고 있던 생수회사 ‘장수천’에 10억원, 나중에 부인 권양숙씨가 은행돈 1억원을 추가로 투자했다가 경영난을 겪자 1997년 10월 나에게 경영을 맡겼다. 나중에 생수 판매를 전담할 회사가 필요해 1999년 ‘오아시스 워터’를 설립했다”고 밝혔다.
 
  안희정씨는 또 “이 회사(오아시스 워터)는 노 대통령과 아무 관련이 없고, 따라서 이 회사 투자금으로 유치한 2억원에 대해 보고하거나 상의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안씨는 보성그룹으로부터 받은 돈 2억원의 사용처에 대해서도 “전액 회사(생수)에 썼다. 여름 성수기를 앞둔 때라 주문이 몰리고 있어서 생수통을 현금으로 주고 사와야 했다. (그 회사들과는) 당시에 부가세를 끊지 않고 무자료 거래를 했는데, 그 돈의 용도가 적힌 부외장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투자한 장수천과 여기서 분리된 오아시스 워터의 대표가 안씨였던 만큼, 두 회사는 실질적으로 노 대통령 소유”(한나라당 주장)
 
  안희정씨의 이 같은 해명에 대해 한나라당은 대변인 성명 등을 통해 “노 대통령이 투자한 장수천과 여기서 분리된 오아시스 워터의 대표가 안씨였던 만큼, 두 회사는 실질적으로 노 대통령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라종금 의혹 사건이 계속 증폭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의 해명성 발언내용이 날짜별로 서로 다르고, 다른 관련자의 진술과도 일치하지 않는 점 때문이다. 안희정씨는 나라종금 의혹 사건과 관련, 2003년 1월 13일 오마이뉴스, 4월 1일 YTN, 6일 《한겨레신문》(8일 자 보도), 7일 연합뉴스 기자와 각각 인터뷰를 가졌다.
 
  2002년 대선 직전인 12월 13일 《조선일보》가 “나라종금 최모 이사가 검찰에서 ‘1999년 안씨에게 2억원을 전달했다’고 진술했다”고 보도하자 안희정씨는 “최씨를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다”며 돈을 받은 사실 자체를 전면 부인했다.
 
  안희정씨는 그러나 2003년 1월 13일 오마이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는 “2억원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진실의 힘은 세지만, 진실의 힘이 매번 이기는 것은 아니다.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며 정확한 답변을 피했다. 안씨는 4월 1일 YTN과 가진 인터뷰에서도 “구체적 혐의가 있다면 검찰이 조사를 하지 않겠느냐”며 즉답을 피했다.
 
  안희정씨는 2003년 4월에 들어와서야 보성그룹 측으로부터 돈 2억원을 받았다고 금품수수 사실을 인정했다. 안씨는 4월 6일 《한겨레》, 7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2억원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안씨는 이들 언론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나라종금 대주주인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의 동생 효근씨가 대학 선배라서 당시 내가 운영하고 있던 생수 판매회사에 대한 투자로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안씨는 “투자에 대한 서면 계약서는 없었다”면서 “성공하면 지분 20~30%를 넘겨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고 밝혔다.
 
 
  안희정씨가 현금으로 받은 2억원
 
  안희정씨는 보성그룹 측으로부터 2억원을 받을 때 현금으로 받은 부분에 대해서는 엇갈린 발언을 했다. 안희정씨의 말대로 생수회사에 대한 투자명목으로 돈을 받았다면, 수표나 계좌이체를 통해 전달받는 것이 상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씨는 2억원을 현금으로 받았다. 그 이유에 대해 4월 6일 국내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 생수회사에 생수통과 받침대를 공급하던 회사가 현금결제가 아니면 물건을 대주지 않는 상황이어서 내가 먼저 현금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안희정씨는 그러나 다음날인 4월 7일 다른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는 “솔직히 투자받는 입장에서 그쪽이 현찰로 주든 수표로 주든, 은행을 통해 주든 따져 물을 처지가 아니었다”면서 “한 푼이 아쉬운 판인데 누군가 투자해 준다는데 그걸 꼬치꼬치 캐물을 수 있겠나”라며 말을 바꿨다. 이 같은 안희정의 주장에 대해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은 “안희정씨와 염동연씨가 ‘투자했다, 용돈이다’라고 주장하는 데 납득할 수 없다. 정상적인 투자라면 왜 2억원이란 큰돈을 현금다발로 줬으며, 정식 영수증은 왜 없나? 용돈으로 (염씨에게) 5000만원을 주었다니 누가 믿겠는가”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보성그룹 측으로부터 2억원을 전달받은 장소에 대해서도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 보성그룹 김호준 전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아 안희정씨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한 이 그룹 최모 전 이사는 2002년 검찰조사 과정에서 “강남 N호텔 지하주차장에서 안씨를 만나 승용차 트렁크에 돈을 실어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희정씨는 4월 6일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N호텔 지하주차장이 아니라 1층 로비 라운지였다”며 “최씨가 다른 사람 만난 것과 착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4월 6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2억5000만원이 지하주차장 혹은 커피숍 등에서 현금으로 전달됐다는 것은, 이 돈이 안씨가 명목상 대표였던 생수회사(오아시스 워터)에 대한 투자금이 아니라 퇴출 저지를 위한 뇌물의 성격임이 분명하다”며 “이들이 1999년 당시 노무현 의원의 최측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노 대통령에게 전달됐을 개연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안희정·김효근(보성그룹 김호준 전 회장 동생)·이재화 변호사의 관계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은 고려대 83학번이며,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의 동생 효근씨는 고려대 82학번으로, 둘은 선후배 관계다. 안 부소장은 재학 당시 고려대 애국학생회 사건과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두 차례 구속된 학생 운동권 출신이며, 김효근씨 역시 같은 운동권 출신으로 두 사람은 최근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게 이들 주변 사람들의 얘기다.
 
  김호준 보성그룹 전 회장의 변호인인 이재화 변호사 역시 고려대 법대 82학번이다. 이 변호사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안희정 부소장, 김효근씨 등과는 가까운 운동권 출신”이라면서 “1980년대 삼민투 사건으로 수감된 적이 있다”고 말했다.
 
 
  48. 안희정의 노동관
 

  “나는 고용과 해고, 투자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 고용을 해서 회사가 망할 때까지 붙들고 있으라고 하면 그 회사는 산업의 변동에 대응할 수 없다. 그러니 투자가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삐삐에서 휴대전화로 옮겨가던 시절에 삐삐 만들던 회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로운 상품들로 전환을 해야 하니 노동력도 보조를 맞춰 바뀌어야 한다. 문제는 노동이 재편성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임금 생활기반이 약해지거나 파괴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국가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질서를 운영하는 정부로서 노사 양측 모두에게 신뢰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공정성을 의심받지 않는다. 모순적이지만 그래야 현재 기업과 기업인들이 만들고 있는 시장경제에 대한 방해요소를 제거할 힘이 생긴다. 이른바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같은 불공정 관행, 기업회계의 불투명성, 소유와 경영의 건강한 긴장관계 미형성 등은 꼭 풀어야 할 숙제다.”
 
 
  49. 안희정의 중국관
 
  “우리는 지난 5천 년 역사에서 중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온갖 침략에 노출되었다. 정권 교체기마다 우리 땅은 전쟁터가 되었고 수많은 이가 죽거나 끌려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명청 교체기 때 명나라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든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면 그들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든지 하는 생각이 득세하기도 했다. 침략을 무시로 당해온 이 땅의 기득권 세력은 그 땅의 주인인 백성의 삶보다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골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50. 안희정의 자주국방론
 
  “국민은 땀 흘려 번 돈을 나라에 바치고 있다. 이들의 귀한 자식들은 청춘이 무르익을 때를 국방의 의무를 다하며 보낸다. 그렇다면 나라의 살림을 맡은 위정자들이라면 이렇게 약속해야 한다. ‘북한의 어떠한 위협과 침략행위가 있더라도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겠다.’ 그러자면 군 스스로가 작전권을 행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미국에 기대야 북한의 도발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하려거든 그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든 나라를 이끄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우리를 침략해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위해를 가하는 자가 있다면 그 침략자들도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수 있음을 입증하는 방법은 자주국방이다. 자주국방에 기초해 북한과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
 
 
  51. 안희정의 대북관
 
  “상대를 ‘악마화’함으로써 서로가 얻은 게 무엇인지 되돌아봐야 한다. 북핵 위협의 강도는 더 높아졌고 그만큼 국민의 불안도 깊어졌다. 남북경제교류가 중단된 자리를 중국 상인들이 차지하며 우리 경제인들에게는 기회의 창이 닫혔다.”
 
  “공동의 이익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교류는 교류대로 진행해야 한다.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하는 것이다. 북한과의 대화 채널을 유지해야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발언력, 조정력도 확대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는 20세기적 낡은 대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까지 낡은 대결구도에 빠져 허우적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동아시아 다자 안보체제를 이끌어내는 리더십에 숟가락을 얹어야 한다. 감축된 국방예산 때문에 골치를 썩는 미국에도, 경제가 경착륙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중국에도 합당한 일이다.”
 
 
  52. 안희정의 대미관
 
  “한미 동맹은 지속적으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 미·중 간 낡은 대결구도에 끼어들지 않는 일과 한미 동맹을 발전시키는 일이 이율배반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로부터 현재까지 미국이 세계질서를 주도하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에 기반해 미국이 세계평화와 공동의 번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힘써야 한다. 평화와 교류, 번영의 체제를 만드는 일은 북한을 상대하는 우리에게 특히 더 중요하다.”
 
 
  53. 안희정의 행복론
 
  그는 하루종일 가장 행복할 때가 ‘저녁에 잘 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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