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민-최우석의 유쾌한 직설 ④ 金甲洙 문화평론가

“나이가 들며 祖國·民族 많이 생각”

  • 글 : 임재민 방송인  
  •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woosuk@chosun.com
  • 사진 : 서경리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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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夫婦라고 해서 매일 바퀴벌레처럼 붙어 있을 필요 없다는 생각”
⊙ “LP 판 사기 위해 종편TV 출연”
⊙ “北이 도발한다면 報復 공격해야”
⊙ “盧武鉉, 훨씬 나쁜 분이라 하더라도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金甲洙
⊙ 56세. 성균관대 국문학과 졸업. 《실천문학》 통해 시인 데뷔.
⊙ 現 《국제신문》 칼럼니스트, TV 조선 〈강적들〉 〈대찬인생〉,
    MBN 〈아궁이〉 〈황금알〉 출연 중.
⊙ 저서: 《세월의 거지》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김갑수의 세상읽기》 등.

임재민
⊙ 40세. 이화여대 교육학과 졸업.
⊙ MBC 공채MC 출신으로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출연 중.
종편(종합편성채널)TV를 종횡무진 누비는 김갑수(金甲洙) 문화평론가를 바라보는 보수(保守) 성향 시청자의 시선은 대체로 차갑다. “통진당 스스로 북한을 추종한다고 말한 적 없기 때문에 종북이 아니다” “인터넷 공간이 우파, 극우의 목소리로 뒤덮여 있다” 등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을 할 때가 있는 탓이다. 실제 김 평론가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시청자 게시판이나 보수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그를 비판하는 글이 많다. 방송에서 통합진보당을 옹호하는 듯한 이야기를 했을 때에는 그의 ‘프로그램 하차’를 요구하는 댓글이 빗발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주야장천(晝夜長川) 망언(妄言)을 늘어놓는 인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발언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인터뷰를 요청하니, 마포 자신의 작업실인 ‘줄라이 홀’로 오라고 했다. 2월 3일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그의 작업실 ‘줄라이 홀’에서 그를 만났다. ‘줄라이 홀’에는 3만여 장의 LP와 CD, 20여 개의 진공관 오디오 기기가 오래된 식구처럼 자리해 있었다.
 
  그는 커피를 한잔하자며 직접 생두를 로스팅하고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를 내왔다. 적절한 산미(酸味)와 묵직한 초콜릿 향이 느껴졌다.
 
 
  선택적 별거
 
  —커피 맛이 좋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글을 쓰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동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동작을 하기 위해 가장 좋은 게 커피 같더라고요. 난 카페인이 굉장히 좋은 중독 물질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와인이 종류마다 다른 맛을 내는 것처럼 커피도 품종마다 다 다른 향과 맛을 내요. 그 커피를 어떻게 볶았느냐, 어떻게 내렸느냐, 어떻게 끓였느냐에 따라서 또 다른 맛을 내는데 그게 재미죠.”
 
  —작업실 이름을 왜 ‘줄라이 홀’로 지었습니까.
 
  “작업실을 처음 만들고 친구들을 초대했는데 그때 오셨던 분 중에 줄라이라는 이름을 가진 미모의 외국회사 임원이 있었어요. 그래서 줄라이가 왔으니 ‘줄라이 홀’이라고 부르자 뭐 이렇게 된 거죠. 록 음악의 원조격인 초 거물급 밴드 중에 R.E.M이라는 그룹이 있는데 이들이 밴드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 아십니까. 사전을 획 펼쳐 가장 먼저 짚인 글자(Rapid Eye Movement·급속안구운동)로 지었습니다. 저도 대망의 작업실 이름을 이렇게 짓고 싶었습니다. 예전에는 의미를 부여해서 이름을 짓곤 했는데, 이젠 지겹더라고요.”
 
  —주말 빼고 작업실에서 생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혹시 부인과 사이가 안 좋은가요.
 
  “하하하. 처(妻)와는 사이가 좋습니다. 매일 전화하고 주말에는 꼭 만나서 외식합니다. 제가 고교시절부터 클래식 음악을 공부해 왔습니다. 지금도 클래식 음악 감상은 제 생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결혼하고 3년쯤 별도 공간 없이 가정(家庭)에서 음악을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이건, 피차간에, 그러니까, 고문이었습니다. 처는 구경시켜 주고 싶을 만큼 전투적으로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이니까요. 타협책은 집 밖에 결혼 전과 비슷한 공간을 따로 장만하는 거였습니다. 서로 그리워하는 부부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선택적 별거지요.”
 
  —부부 관계에 나름의 철학이 있나요.
 
  “부부라고 해서 매일 바퀴벌레처럼 붙어 있을 필요 없다, 일정한 거리에 살면서 자주 만나는 것도 부부생활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사 부인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제가 약혼까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아주 잘나가는 교수인데…. 어쨌든 그 약혼자와 헤어지고 정말 심한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체중이 47kg까지 빠졌지요. 머리도 빡빡 깎고 유령처럼 살고 있는데 친구가 ‘너 이러다가 정말 죽는다. 내 지인의 동생이 의사인데 그 사람한테 진료를 받아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진료받으러 갔다가 인연이 닿았습니다. 주치의와 환자 관계에서 친구가 됐고, 부부의 연(緣)까지 맺게 된 것이지요.”
 
  —누가 먼저 좋다고 했습니까.
 
  “제 시집(詩集)이 나와서 선물로 줬어요. 그런데 그런 걸 좋아했나 봅니다. 어느 날인가 저한테 술 한잔하자고 하더군요. 저는 술 잘 못하는데 제 처는 앉으면 소주 두 병을 먹는 여자였습니다. 하여튼 난 실패한 사랑을 하소연하고 처는 들어주는 관계였는데 어느 날 보니까 이 여자가 저를 좋아하고 있더군요.”
 
  러브스토리를 듣는 와중에 그의 아들이 작업실을 찾았다. 곧 발간할 소설의 마지막 교정을 부친(父親)에게 부탁하려 들른 것이었다.
 
  —아들이 글을 쓰는 데 소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대학교 2학년에 불과한데 작년 말에 갑자기 소설을 썼습니다. 원고지 1600매를 썼는데 읽어보니까 진짜 소설답게 썼더라고요. 손석희씨가 추천사를 써줬어요. 곧 소설이 나옵니다.”
 
  —아들이 명문대에 다니는 것으로 아는데요.
 
  “연세대 국제학부에 다니는데요. 아들이 양아치 서클 출신이었지만 학교 전교회장을 하는 등 공부는 좀 했습니다. 애 엄마가 국내 대학을 안 보내려고 민사고(민족사관고등학교)에 진학시키려 했어요. 그런데 민사고 입학시험에서 떨어져 일반고에 갔습니다. 일반고에서 흔히 말하는 번듯한 대학을 들어가려면 전교 10등 안에 들어야 했는데 3~4등 정도는 꾸준히 유지했습니다.”
 
  —김 평론가 스타일을 보면 자녀를 방목(放牧)할 것 같은데 교육열이 상당하네요.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선행학습을 시킨 적이 없고 학원에 가라고 강요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유치원 때 한글을 모르는 유일한 아이였고, 초등학교 때도 알파벳을 모르는 유일한 아이였습니다. 다만 부모가 끊임없이 지적(知的)인 대화를 하면 아이가 스스로 깨우치고 지적인 호기심을 키우더군요. 애 엄마가 의사여서 자기 분야의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문화적 인문학적으로 아주 지적인 소양은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정의감이 있는 사람인지라 자연스레 우리 부부는 집에서 정치, 문화, 사회 이슈에 대한 서로 생각을 자주 나눴어요. 그 과정에서 아이를 대화에 동참시켰고요. 아이한테 공부하라고 압박하는 것보다 정신을 일깨우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종편 출연
 
TV 조선 〈강적들〉에 출연하고 있는 김갑수씨.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종편 출연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10여 년 전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출연 섭외가 왔을 때 어이없다는 듯이 거절했다. 이른바 ‘교양’이라는 깨끗한 물이 따로 있다고 믿고 고집스럽게 책, 음악, 시사 프로그램 등에서만 활동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현재는 종편의 단골 출연자가 됐다. 고정(固定)으로 출연하는 프로그램만 TV 조선의 〈대찬인생〉 〈강적들〉, MBN의 〈아궁이〉 〈황금알〉 등 4개다. 수입도 상당한 수준이다. 종편 도입을 강력히 반대해 온 인물이 종편의 최대 수혜자가 된 셈이다.
 
  —종편 도입을 반대했던 것으로 압니다.
 
  “종편 비판 시위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런 종편에 왜 출연하는 겁니까.
 
  “비겁한 변명을 해볼게요. 서울시 교육감이었던 곽노현씨나 현 서울시 교육감인 조희연씨의 자식들이 외고(外高)를 다닙니다. 그 양반들은 외고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입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풀까요. 사회운동가나 진보적 성향을 가지면 지사(志士)라고 생각하는데 현실적 조건에서 내 삶을 취하는 생존의 룰과 내 이념, 가치 사이에 불가항력적으로 격차(gap)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격차를 비난하면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꽤 많은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던데요. 수입이 꽤 되겠습니다.
 
  “그렇지요. 사실 〈황금알〉 〈강적들〉 등의 프로그램에서 꼭 하고 싶은 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하는 발언도 많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는 명확합니다. (LP 판 판매가게가 있는) 회현동에 가거나 이베이(온라인 경매 사이트) 경매에 참여하기 위한 자금 마련 책입니다. 메뚜기도 한철인데 벌 때 벌어야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 할 때 기분은 어떻습니까.
 
  “속된 말로 쪽팔리지요(낯깎이다의 낮은말). 특히 연예인 뒷얘기 할 때는 미칠 것 같습니다. 제가 TV 없이 산 지 20년이 넘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본 프로가 〈서울의 달〉이에요. 이런 제가 연예인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방송 보니까 연예 전문가처럼 말씀 잘하던데요.
 
  “자료 보고 거짓말하는 것이지요. 잘 아는 것처럼.”
 
  —TV 없이 산다고 했는데 그럼 본인이 출연하는 방송 모니터링도 전혀 안 하나요?
 
  “꼭 필요한 건 컴퓨터로 다운받아서 봅니다. 근데 TV로는 보게 되지 않더군요. TV가 유치해서 피하는 게 아닙니다. 재미있어서 피하는 거거든요. 아무리 막장드라마라도 보면 계속 보게 될 것 같아서요.”
 
TV 조선 〈대찬인생〉에 출연 중인 김갑수씨.
  종편과 관련한 이야기 중 그는 “종편에 출연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었다”고 했다.
 
  —그 친구가 누굽니까.
 
  “김정운 교수요. 걔가 형이 종편 나가는 게 정말 싫다. 거기 나가서 이상한 소리 하는 게 정말 창피하다고 했어요. 그렇게 사이가 멀어졌는데 제가 노무현 추모 문집에 김 교수에 대한 욕을 썼어요. 이름은 안 밝혔지만, 누가 봐도 김 교수인 줄 알 겁니다. 그 이후로 서로 이야기 안 합니다.”
 
  김정운 교수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베를린 자유대학교 심리학 박사다.
 
  —대표 출연 프로인 〈강적들〉을 보면 이봉규 평론가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보이던데요. 실제 사이는 어떤가요.
 
  “친해졌어요. 전에 KBS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서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맞상대로요. 그때만 해도 ‘무슨 저런 게 있나’라고 생각했는데 〈강적들〉 하면서 가까워졌습니다. 저랑 나이가 같아서인지 친구도 몇 명 겹치더군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그러시죠.
 
  “한번은 jtbc에서 전화가 왔어요. 〈썰전〉이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출연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콘셉트를 물었더니 강용석씨와 대담하는 거래요. 제가 그때만 하더라도 강용석씨를 벌레라고 생각해서 ‘강용석과 이야기하기 싫다’고 거절했어요. 계속 출연 요청이 왔는데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저 대신 이철희씨가 투입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막급이죠(웃음).”
 
  그는 〈강적들〉 캐스팅 비화도 털어놨다.
 
  “〈강적들〉 은경표 PD가 출연진을 조합하면서 나꼼수의 정봉주씨와 저를 두고 고민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최종 캐스팅된 이유는 정봉주씨가 언변(言辯)은 좋은데 비호감이 있어서였다고 들었습니다.”
 
 
  北을 바라보는 김갑수의 시각
 
  앞서 언급했듯 김 평론가는 지나치게 진보(進步), 좌파(左派) 세력의 시각을 대변(代辯)해 시청자들의 비판을 자초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종편 좌파 논객의 수장’이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스스로 평가하기에 이념적 성향이 어떻습니까.
 
  “저한테 좌파 논객이라고 하는데, 저에게 좌파 정체성이 있는지 헷갈리기는 하지만 분명히 우파는 아닙니다. 지금 시스템대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으니까요. 대학 시절에 야학했습니다. 징역을 살지는 않았지만 저와 어울리던 사람들은 한 번씩 다 갔다왔지요. 그 친구들은 결혼도 공장 다니는 여성들과 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다 보니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을 좋아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저희 같은 성향의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조국, 민족 이런 것들이요. 그런데 나이가 많아지니까 이런 것들에 대해 굉장히 많이 생각하게 되더군요.”
 
  —혹시 ‘종편 좌파 논객의 수장’이라는 별명 있는 거 아세요.
 
  “한번은 강용석씨와 술을 한잔하는데 그가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저를 포함해 대표적인 좌파 논객이 4명 있는데 제가 총리급이라고요.”
 
  —나머지 3명은 누구입니까.
 
  “이철희, 진중권, 허지웅씨라고 하던데요.”
 
  —과거 방송에서 통진당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 하셨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정희씨를 굉장히 옹호하고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게 있습니다. 과거 한국 정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의 태도가 북한에 충성맹세 하는 것이었는데요. 그게 ‘꽝’이라는 게 밝혀져도 몸이 빨리 안 움직여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결국 종북(從北) 아닙니까.
 
  “종북이 뭡니까. 저도 종북이라는 소리를 매일 듣는데.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가 전(全) 사회에 있다고 보는데, 이에 대해 의견을 내면 자동으로 종북이 되더군요. 보통 좌파, 종북 하면 상당히 운동권적 시각으로 보지 않습니까. 제 작업실 보세요.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로 가득 차 있는 이 방과 좌파, 종북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해산된 통진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바보짓을 했다고 봐요. 노동자 정당을 지향했어야 했는데 지지율이 한때 10%까지 올라가니까 민노총을 우습게 여기고 대중정당으로 성급하게 나가다가 박살난 거죠.”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對北) 포용정책인 햇볕정책과 동북아평화번영 정책의 당위성을 피력하던데요. 좌파 정부의 ‘퍼주기’식 대북정책은 결과적으로 ‘북핵(北核) 위협’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죠. 퍼줬지만 달라진 게 없지 않습니까.
 
  “우선 준 게 많지 않습니다.”
 
  —대북 지원금이 3조 가까이 되는데 많지 않다니요.
 
  “우리가 북한을 사는 값으로는 부족한 액수죠. 독일의 경우 서독이 동독을 산 것입니다. 몇조를 주고 많다고 그러면…, 예를 들어 봅시다.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어요. 둘이 계급장 떼고 싸우면 누가 손해일까요. 결과가 어떻게 나든 무조건 부자가 손해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부자는 돈을 써서 이겨야 합니다. 전쟁을 치르지 않기 위해서는 부자가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의 대북지원금은 2조8440억원이다.
 
  —인도적(人道的) 차원의 대북지원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전에 천안함 폭침 사과와 재발방지가 선행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북한이 버블제트를 일으킬 만한 신형 어뢰를 개발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까.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하면 끝이 없으니까 그만 합시다. 저는 우리 정부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탈북자들이 만날 종편에 나와서 하는 이야기를 보면 북한에 총알이 없어서 목총으로 훈련한다고 하던데, 그런 나라에서 세계 최첨단의 어뢰 개발 기술과 해킹 능력을 가졌다는 이 모순은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북한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제 말은 이겁니다. 북한이 과학기술 개발 능력이나 경제력과 무관하게 엄청난 군사력을 가졌다는 이야기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는 북한 편 들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만약 북한이 도발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포격을 한다?’ 이것은 전쟁 도발이에요. 보복 공격해야지요.”
 
  —김정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좀 웃기죠.”
 
  —웃기다니요.
 
  “독재자라고 하는데 독재할 능력이나 있는지 모르겠고, 필요에 의한 대역이라고 봅니다.”
 
  북한과 관련한 질문을 계속하자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종북과 선을 그으려는 시도로 느껴졌다.
 
  “제 아버지가 평안남도 강서 사람인데 6·25 때 인민군으로 내려왔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CID라고 국군 방첩(防諜)부대에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일베와 오유는 다르다”
 
  김 평론가는 2014년 4월 15일 채널A 〈쾌도난마〉에 출연한 자리에서 이같이 이야기했다. “인터넷 공간 우파, 극우의 목소리로 뒤덮여 있다.” SNS는 늘 진보 진영의 독무대 내지 우위를 점하는 무대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그는 어떤 이유로 이런 발언을 했을까.
 
  —아직도 “인터넷 공간 우파, 극우의 목소리로 뒤덮여 있다”고 생각합니까.
 
  “네. 일베가 지금 얌전해서 그렇지 이게 커지면, 백색테러라든지 폭동으로 갈 것입니다.”
 
  —진보 진영 쪽 ‘오늘의 유머(오유)’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요.
 
  “오늘의 유머 같은 사이트는 《한겨레》를 좋아하는 수준의 사람들 토론 공간입니다. 그런데 일베는 ‘네오나치(신 나치)의 맹아적(萌芽的) 형태’라고 봅니다.”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 ‘홍어들(전라도 사람을 비하하는 말)’ ‘명불허전 7시 지역(7시 방향에 있는 전라도 비하)’ 등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글이 올라오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유에서도 ‘과메기 냄새(경상도 비하)’ ‘고담 대구(영화 〈배트맨〉에 등장하는 사고 잦은 도시를 대구에 비유)’ 등의 경상도 비하 게시글과 악성댓글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둘 다 똑같은 거 아닌가요.
 
  “…”
 
  앞선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지 않은 김 평론가는 “보수의 오랜 통치기법이 내부분열”이라며 일베가 내부분열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영화 〈국제시장〉과 〈변호인〉의 차이점
 
김 평론가는 “〈국제시장〉이 집단 영웅주의 영화라면 〈변호인〉은 비극적 영웅론”이라고 했다.
  그는 시인, 문화평론가, DJ, 칼럼니스트, 방송인 등, 타이틀이 많은 사람으로 산다. 그에게 어떻게 불리는 것이 가장 좋은지 물었다.
 
  그의 이야기다.
 
  “제 이름에는 대략 다섯 개의 타이틀이 붙어다닙니다. 시인, 문화평론가, 출판평론가, 방송인, 음악칼럼니스트. 이렇게 여러 개의 타이틀을 가졌다는 건 어느 하나 뚜렷한 타이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평을 쓰면 ‘출판평론가’, 음악 원고를 쓰면 ‘음악칼럼니스트’, 장르가 애매하면 ‘문화평론가’ 하는 식입니다. 원고를 쓰거나 방송에 출연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받곤 합니다. ‘직함을 뭐로 달까요?’ 민망한 일입니다. 제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아무거나 편한 대로 쓰세요.’”
 
  —문화평론가 직책을 많이 쓰던데요. 문화평론가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문화평론가라는 타이틀에는 약간의 역사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1980년대 초 신군부의 ‘언론대학살’ 이후 자유기고가라 불리는 일군의 필자가 등장했습니다. 신문사에서 쫓겨난 기자들이 생계수단으로 각종 지면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들을 일컫는 칭호가 자유기고가였던 것입니다. 당시 자유기고가들은 그것이 ‘백수’를 뜻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1990년대 접어들어 백수 자유기고가를 약간 격상시켜 표현한 것이 바로 문화평론가입니다. 여기엔 ‘교수는 아니지만, 지식사회의 일원’이란 함의(含意)도 들어 있습니다. 박사(博士) 실업자가 양산된 이후의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문화평론가로서 영화 〈국제시장〉의 이념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국제시장〉이란 영화는 6·25를 겪은 세대의 노고에 대한 감사를 신파적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이런 영화에 ‘왜 민주화운동을 안 담았느냐’고 지적하는 것은 웃기는 얘기입니다. 고생의 정도로 부모세대와 자식세대가 싸우면 자식세대가 이길 수가 없습니다. 게임이 안 됩니다. 다만 당시에는 취업 걱정이 없었습니다. 소위 뭘 해도 잘되는 성공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젊은이들은 앞날이 막막합니다. 세대별 고민이 다 있는데 마치 어른세대만 고민과 노고가 있던 것처럼 말하면 안 됩니다. ‘지금 너희는 배부른 거다. 우리한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변론을 맡았던 1981년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인 〈변호인〉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국제시장〉이 집단 영웅주의 영화라면 〈변호인〉은 비극적 영웅론이죠. 〈변호인〉을 봤을 때는 한 편의 영화를 봤다기보다는 노무현 다큐멘터리를 본 것 같았습니다. 영화가 사실에 부합했으니까요.”
 
 
  “朴正熙 시대 망하지 않았다”
 
  그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눈시울을 붉혔다. 김 평론가는 노 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다.
 
  —노 전 대통령이 왜 좋습니까.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과실을 이야기하자면 뼈 아픈 게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열린우리당 창당이지요. 집권하자마자 호남을 버리려 했다니. ‘이런 짓을 왜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나름의 뜻은 있었겠지만요. 그럼에도 노 전 대통령을 좋아하는 이유는 기득권하고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타협하지 않았다고요? 노 전 대통령은 재벌개혁을 제대로 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지만, 재벌의 힘이 가장 커진 때가 그때입니다. 모 재벌기업 산하 경제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재벌정책으로 삼았다는 얘기까지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참여정부의 정책 때문이지, 사적으로 대기업과 가깝게 엮여서가 아닙니다. 저는 왕성한 주류가 시퍼렇게 눈 뜨고 있는데 그 질서와 타협하지 않은 노 전 대통령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이 훨씬 나쁜 분이라고 하더라도 죽지 않았으면 하는 겁니다.”
 
  —노 전 대통령 다음으로 좋아하는 전직 대통령은 누구입니까.
 
  “DJ(김대중 전 대통령)죠. 저와 정말 친한 분이 《동아일보》에 수석으로 들어갔는데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5시간을 인터뷰했는데 그 녹음 테이프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국가를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듣고 탄복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 다음으로는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용적인 관점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군이 실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민간에게 권력을 이양할 때 내전이 안 일어난 사례가 없습니다. 군은 총이 있으면 장렬하게 쏩니다. 군사권력이 민간권력으로 순조롭게 이양할 수 있었던 것은 노태우라는 특이한 사람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봅니다. 노태우 정권 때는 노동자 실질임금이 3배 상승했습니다. 업적으로 볼 수 있지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5·16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부분의 식민지가 해방됐습니다. 당시 해방된 국가를 행정 할 수 있는 집단은 군인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수의 제3세계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납니다. 5·16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못할 짓을 한 게 아니라 당시 제3세계에서 일어난 쿠데타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시대에 야당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망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안 망했지 않습니까.”
 
 
  “달변이 아니라 수다스러운 것”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말을 잘하긴 어렵다고 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김 평론가가 그런 경우다. TV에서보다 더 달변인 듯했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해서 그럴 것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글쟁이가 달변이 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제가 말을 아주 잘했더라면 대중강연 강사로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을 겁니다. 제 경우는 말을 잘한다기보다는 수다스럽다는 게 맞을 겁니다. 집중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말을 잘 못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말과 글이 어째서 분리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어떤 원고를 쓰든 내 뇌에 있는 생각을 가지고 막 이야기를 합니다. 그게 문어체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글 쓰는 행위가 말하는 행위와 결합할 수 없다는 게 이해는 안 가는데, 현실에는 많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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