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정의로운 통합정부, 유연한 실용정부 될 것” 선언
⊙ ‘체제 변혁’ 외치던 브라질의 룰라, 市場과 손잡고 3선(選)… ‘성공한 좌파 정부’ 달성
⊙ 무장투쟁으로 27년간 수감 생활한 만델라, ‘가장 위험한 흑인’에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 ‘체제 변혁’ 외치던 브라질의 룰라, 市場과 손잡고 3선(選)… ‘성공한 좌파 정부’ 달성
⊙ 무장투쟁으로 27년간 수감 생활한 만델라, ‘가장 위험한 흑인’에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위험한 이재명’은 ‘모두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
![]() |
| 이재명 대통령은 6월 4일 취임사를 통해 “분열의 정치를 끝낸 대통령, 모든 국민을 섬기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사진=뉴시스 |
문제는 ‘이재명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선거 이후에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적지 않은 유권자들이 여전히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향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이런 인식이 이어질 경우 이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도 적지 않은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재명 정부가 표방한 통합적 국정 운영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제 그 우려를 불식하는 일은 이 대통령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다. “분열의 정치를 끝낸 대통령이 되겠다” “국민 통합을 동력으로 삼아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밝힌 취임사 내용대로 이 대통령이 통합과 책임의 리더십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정의로운 통합정부, 유연한 실용정부가 될 것”이라는 취임 당시 다짐이 허언(虛言)이 되지 않으려면, 기존의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온건하고 실용적인 정책 기조를 보일 필요가 있다.
급진적 성향을 보였던 인물이 집권 후 정책 기조를 전환해 긍정적 평가를 받은 사례는 적지 않다. 이 대통령이 강조한 ‘통합과 책임’의 리더십을 실현하려면 이런 사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누구를 지지했든 크게 통합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받들어, 모든 국민을 아우르고 섬기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취임사 약속과도 맞닿아 있다.
2003년 1월 1일 브라질 대통령에 취임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는 노동운동가 출신의 대표적인 좌파 정치인이다. 집권 전까지는 짙은 사회주의적 색채와 급진적인 발언 때문에 ‘위험한 대중영합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 룰라는 노동운동 세력과 해방신학에 기반을 둔 가톨릭 진영, 좌파 지식인 집단과 힘을 모아 노동자당을 창당했다. 룰라의 노동자당은 급진적인 강령과 정치 노선을 표방한 좌파정당이었다. 창당 당시 채택된 당 강령은 “브라질 사회를 민주적·참여적 방식으로 사회주의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 싸운다”였다. 또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 구조를 비판하며, 생산 수단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주장했다. 토지의 공정한 분배와 금융·자원의 공공적 운용을 핵심 실천 과제로 내세웠다. 룰라의 노동자당은 훗날 한국에서 권영길·심상정·노회찬 등이 창당한 민주노동당의 ‘모델’이기도 하다.
룰라는 집권 전 ‘체제 변혁’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그해 노동자당 창당 직후 금속노조 지도자로서 노동 현장을 누비던 룰라는 대중 연설에서 “자본주의는 소수만을 위한 제도”라는 말을 반복하며 브라질의 기존 정치·경제 구조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당시 그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통해 지지층을 규합했다.
룰라의 급진적 성향은 1989년 처음으로 브라질 대선에 출마했을 때 선명하게 드러났다. 당시 그는 “우리는 점진적 개혁이 아니라 체제 변화를 원한다”고 강조하며, 단순한 개혁이 아닌 브라질 사회 구조의 ‘해체’를 주장했다. 주류 언론과 경제계는 룰라가 집권할 경우 브라질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남미 여러 국가가 1980~90년대 반(反)시장적 대중영합주의와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던 만큼, 룰라가 집권한다면 브라질 역시 비슷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세 차례 패배 끝에 ‘현실’ 자각
룰라는 1989, 1994, 1998년 세 차례 브라질 대선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대선 때마다 그는 ‘노동자의 후보’라는 상징성과 대중적 호소력을 앞세워 돌풍을 일으켰지만, 매번 2위였다.
첫 번째 도전은 1989년, 군부 독재 이후 치러진 브라질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다. 룰라는 토지개혁과 외채 상환 중단 등 급진적인 사회경제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고 결선 투표까지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지만, 중도우파 성향 페르난두 콜로르 국가재건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1994년 대선에서 여전히 사회주의적 메시지를 주장한 룰라는 안정과 실용을 상징한 페르난두 카르도주 사회민주당 후보에게 1차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패했다. 1998년 대선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강경한 노동자 중심 노선을 고수하던 룰라는 다시 카르도주와 맞붙었지만, 또 1차 투표에서 낙선했다.
세 차례에 걸쳐 연속으로 패배한 룰라는 급진적인 좌파 담론이 중산층 유권자에게는 체제 불안정으로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2년, 네 번째 대선 도전에서 룰라는 실용 노선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대선 4개월 전 ‘브라질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시장과 국제자본에 협조적인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룰라는 편지를 통해 “브라질은 국제적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이라며 해외 투자자와 금융시장에 “디폴트(채무불이행)는 없다”고 약속했다. 시장경제를 수용하는 입장도 공식화했다. 계급투쟁적 언어는 배제했다. 과거 좌파 진영이 늘 제기하던 사법 제도 불신이나 언론 통제 방안도 언급하지 않았다. 법치주의와 헌정 질서에 대한 존중 의사도 분명히 밝혔다.
시장과 손잡고 성장 이끈 대전환
이 편지를 계기로 브라질 보수층과 중도층은 룰라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정치적 외연(外延)을 확대하는 데 성공한 룰라는 ‘대권 도전’ 4수(修) 끝에 2002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룰라 집권 이전인 1990년대 브라질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1990년대 평균 경제성장률은 약 1.7%에 그쳤고 1998년 기준 절대빈곤율은 32%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3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룰라는 나라 안팎의 예상과 우려를 뒤엎고 시장 친화적 정책을 추진했다. 복지 확대를 통한 사회 통합이라는 좌파적 목표는 유지하면서도 ▲공공재정 건전성 유지 ▲중앙은행 독립성 보장 ▲외국인 투자 유치 ▲국제 채권자들과의 신뢰 회복 등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는 실용 노선을 견지했다.
룰라 집권기 브라질 경제는 꾸준히 상승세를 탔다. 1기 평균 성장률은 3.5%, 2기엔 4.65%로 더 올랐다. 그 결과 2003년 당시 5582억 달러였던 브라질 GDP는 룰라 집권 마지막 해인 2010년에 4배 가까운 2조 2088억 달러가 됐다. 환율 강세와 물가 상승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실질과는 거리가 있는 수치이긴 하지만, 경제 성장에 대한 외부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룰라 집권 기간 브라질 무역수지도 개선됐다. 1999년부터 4년 내내 적자를 기록하던 무역수지는 룰라 집권 첫해인 2003년부터 흑자로 전환됐다. 집권 1기의 마지막 해인 2006년에는 무역 흑자가 420억 달러에 달했다. 무역 흑자 덕분에 외환 보유액도 빠르게 증가했다. 2003년 170억 달러 수준이던 브라질의 외환 보유액은 2006년 858억 달러, 2010년에는 2885억 달러로 수직상승했다.
정부 부채와 그에 따른 이자 지출도 대폭 줄었다. 룰라 집권 첫해인 2003년 브라질의 정부 부채는 GDP 대비 76%에 달했고, 이자 비용만으로도 정부 재정의 9%를 지출해야 했다. 이에 따라 룰라는 1기 내내 재정 건전성 확보에 집중했다. 공공 지출을 억제하고, 세입 확대와 지출 구조조정을 병행해 매년 3%대 재정 흑자를 유지했다. 2기에는 국제 원자재 호황과 내수 중심 경제 성장이 더해지면서 재정 여건이 개선됐고, 2010년 기준 정부 부채는 GDP 대비 62% 수준으로 낮아졌다. 이 같은 성과는 외부 투자자와 국제 신용평가사들로부터도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고금리와 고물가에 시달리던 브라질은 짧은 시간에 재정 흑자 유지, 경제 성장, 이자율 안정화를 달성해 신흥국 재정 관리의 대표 사례로 주목받았다.
‘존경받는 국가 지도자’로 3選 성공
![]() |
| 정계 입문 당시 ‘위험한 포퓰리스트’란 평가를 받았던 룰라는 과거 집권 당시 성과를 바탕으로 3선에 성공해 현재 브라질 정부를 이끌고 있다. 사진=뉴시스 |
룰라 정부는 이 제도를 통해 ‘브라질 경제 성장의 열매를 최하층까지 나누겠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분명히 밝혔다. 실제로 수천만 명의 빈곤층이 정기적인 현금 지원을 통해 생계 불안을 줄일 수 있었다. 여러 국제기구도 볼사 파밀리아를 효율적이고 저비용의 복지 모델로 평가하며 주목했다. 2010년 기준 볼사 파밀리아 수혜 가구는 1270만 가구로 약 5000만 명이 혜택을 봤다. 정책 도입 이후 브라질의 절대빈곤율이 급격히 하락했다. 룰라 집권 이전 약 40%에 달했던 절대빈곤율은 2006년 기준 18.6%까지 하락했다. 저소득층 아동의 초등교육 진학률과 보건 서비스 이용률도 유의미하게 개선됐다. 이 같은 변화는 룰라 정부가 단지 경제 성장만이 아닌 ‘재분배와 복지 강화’라는 진보 정치의 원칙을 실천에 옮겼다는 평가를 가능케 한다.
이런 성과를 거둔 까닭에 룰라는 집권 이후 ‘급진 좌파’라는 기존 이미지를 벗고, 복지 확대와 경제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실용주의자로 평가받았다. 그의 정치적 전환은 국내외의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졌다. 2006년 대선에서는 재선에 성공했다. 퇴임 직전 지지율이 83.4%에 달할 정도로 공고한 지지세를 유지했다.
룰라는 퇴임 후에도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비록 뇌물 수수 혐의로 갇히는 시련을 겪었지만 2021년 브라질 대법원이 유죄 판결을 무효로 하면서 복권됐고, 2022년 대선에 다시 출마해 당선됐다. 현재 브라질을 이끄는 룰라는 브라질 역사상 최초의 3선 대통령이란 기록을 세웠다.
남아공 ‘무장폭동’ 주도한 만델라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투쟁의 상징이었다.
‘분리·구별’이란 뜻의 아파르트헤이트는 1948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공식적으로 시행된, 인류 역사상 가장 체계화된 인종 분리 정책이다. 이 제도는 백인 소수 정권이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흑인 다수 인구를 체계적으로 차별하고 배제하기 위해 법으로 만든 지배구조였다.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 남아공 국민은 ▲백인 ▲흑인 ▲유색인 ▲아시아인 등으로 분류됐고, 모든 생활 영역에서 철저히 분리됐다. 거주지는 인종에 따라 강제로 구획되었고, 특히 흑인은 통행증을 소지해야만 백인 거주 지역에 출입할 수 있었다. 정치 참여 역시 철저히 제한됐다. 흑인은 투표권이 없었다. 국회 등 주요 정치 기구에는 백인만 입성할 수 있었다. 교육과 보건 역시 인종에 따라 수준과 접근성이 극명하게 갈렸다. 흑인 아동은 열악한 학교에서 제한된 교육만 받을 수 있었고, 병원 등 공공 서비스도 인종별로 차별화돼 있었다. 백인과 다른 인종 간의 결혼과 성관계는 법으로 금지됐다.
만델라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라는 조직을 주도하며 인종 차별 정책에 저항했다. 처음에는 평화적 시위와 법적 투쟁을 이어 갔으나, 1960년 ‘샤프빌 학살’ 이후 평화 노선으로는 인종 차별 체제를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에 따라 무장투쟁 조직 ‘음콘토 웨 시즈웨(민족의 창·MK)’를 창설하고 초대 사령관을 맡았다. MK는 1961년 12월 16일, 전국 주요 정부 시설과 송전(送電) 시설에 대한 폭파작전을 감행했다. MK의 무장 폭동은 전국 50여 곳에서 이뤄졌다.
“흑인만의 지배는 또 다른 억압”
![]() |
| 1990년 2월 11일, 27년 동안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교도소를 나온 만델라가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만델라의 무장 노선과 실제 활동 경력은 그가 서방 국가들로부터도 과격한 인물로 분류되는 배경이 됐다. 미국은 남아공 대통령을 지냈고 노벨평화상(1993년)까지 받은 만델라를 2008년까지 자국의 테러리스트 감시 명단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그가 소속된 무장 조직 MK를 테러 단체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델라는 인종 차별에 맞선 저항의 상징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 세계에서조차 오랫동안 ‘위험인물’로 분류된 논쟁적 존재였다.
만델라가 여전히 ‘위험한 급진주의자’로 간주되던 시기, 남아공 내부에서는 역설적으로 그가 바랐던 변화의 흐름이 서서히 현실이 되고 있었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제 제재와 외교적 고립, 그리고 국내의 극심한 경기 침체와 실업 문제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점차 균열을 드러냈다. 인종 차별에 기반을 둔 기존 체제로는 더 이상 국가의 존속이나 경제적 생존이 어렵다는 현실 인식이 퍼지고 점진적인 체제 전환을 위한 대화와 상징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 같은 변화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특히 1985년 이후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1993년 만델라와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 정부는 수감 중이던 만델라와 비공식 접촉을 하면서 체제 전환 논의를 했다. 장기 수감 중 “백인을 몰아낸다 해도 흑인만의 지배는 또 다른 억압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한 만델라는 ‘다(多)인종 공존의 민주주의’야말로 지속 가능한 체제라는 결론을 내리고, 비폭력과 협상의 가능성을 꾸준히 시사했다. 데 클레르크는 체제 전환을 선언하고 그 상징적 조치로 급진 과격파에서 ‘통합의 리더’로 전환한 만델라를 석방했다. 이에 따라 만델라는 27년 동안의 장기 수감 생활을 끝내고 다인종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이끄는 주역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과거의 억압 심판 대신 미래의 공존”
![]() |
| 1995년 럭비 월드컵 결승 당시, 만델라 대통령이 남아공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우승한 자국팀 백인 주장에게 우승컵을 전달하는 장면은 남아공 인종 간 ‘통합과 화해’를 상징한다. 사진=뉴시스 |
시간이 흐르면서 ‘테러리스트’ 만델라에 대한 백인들의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남아공 백인들에게 ‘가장 위험한 흑인’이었던 만델라가 그들의 신뢰를 얻은 것이다. 만델라와 체제 전환 협상을 했던 당시 남아공 대통령 데 클레르크는 그를 “상상 이상의 협상가이며, 강경함과 절제를 동시에 가진 인물”이라고 평했다. 백인 보수 언론들도 “남아공을 내전(內戰) 없이 구한 인물”이라며 만델라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만델라는 1994년에 집권했다.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그해 대선에서 ANC가 62.6%를 득표해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당수 만델라는 남아공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당시에는 각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국회 의석이 배분되고 제1당 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간선제였다. 이후 1996년 새 헌법이 제정되면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다.
집권 이후 만델라는 ‘화해와 통합’을 국정의 핵심 기조로 삼았다. 그는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주축이던 국민당(NP)과도 연정을 구성했다. 전 대통령 데 클레르크가 부통령으로 정권에 참여했다. 대표적인 제도적 조치로는 1995년 설치된 ‘진실과화해위원회’가 있다. 이 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인권 유린의 진상을 조사하되, 책임자에게는 처벌 대신 진실 고백을 유도하고 피해자에게는 치유와 용서를 촉구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만델라의 ‘보복 없는 전환’은 남아공은 물론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통합과 화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면으로는 1995년 남아공 럭비 월드컵 결승에서 우승한 자국 대표팀의 백인 주장에게 당시 대통령 만델라가 우승컵을 전달한 순간이 꼽힌다. 이 장면은 인종 간 화해를 상징하는 역사적 장면으로 세계인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됐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1위
경제 분야에서 만델라는 실용주의 노선을 취했다. 만델라 정부는 ▲저소득층 주택 공급 ▲교육·보건 서비스 개선 ▲전기·수도 등 인프라 확대 등 사회 기반 확충에 집중했다. 만델라 집권기의 실질적 성과는 지표로 확인할 수 있다. 초등학교 순(純)취학률은 1995년 77%에서 1999년 91%로 증가했다. 흑인 아동 사망률은 1000명당 60명에서 45명으로 감소했다. 공공보건 예산은 GDP 대비 2.4%에서 3.6%로 확대됐다.
만델라는 이와 동시에 외국인 투자 유치와 재정 건전성 유지를 목표로 한 성장정책을 시행했다. 1980년대 남아공은 평균 경제성장률 1.2%, 물가상승률 15%를 기록하며 침체와 고물가에 시달렸고, 외환보유고는 사실상 고갈 상태였다. 이에 만델라 정부는 균형재정을 유지하고 산업 다변화와 재정 투명성 제고를 통해 회복의 기반을 마련했다. 남아공 경제는 1998년 경제성장률 3.3%, 인플레이션 8.5%를 기록하며 안정세를 보였다.
만델라 정부는 경제적 정의 실현과 국민 통합을 위해 흑인 고용 우대 정책을 도입했다. 기업에 일정 비율 이상의 ▲흑인 고용 ▲흑인 경영진 등재 ▲흑인 주주 참여를 유도하는 정책이다. 이에 따라 1999년까지 대기업의 약 60%가 해당 정책 기준치를 충족했다. 기업 내 흑인 고위직 비율도 1994년 8%에서 1999년 25%로 증가했다.
만델라는 공공 부문 개혁도 병행했다. 군·경찰·법원 등 백인 중심의 국가 기구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다인종 체제로 재편됐다. 공공 부문 고위직 내 흑인 비율은 1994년 13%에서 1999년 45%로 증가했다.
만델라 집권기 중반인 1996년 남아공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새 헌법에는 인종·성별·종교에 상관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내용이 명문(明文)으로 담겼다. 권력 분립과 법치주의를 뒷받침할 제도적 기반도 포함됐다.
국제 여론조사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1위
만델라는 재선을 포기하고 1999년 퇴임했다. 당시 만델라에 대한 남아공 국민의 신뢰도는 70% 내외로 집계됐다. 그럼에도 “국민은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만, 그 지도자에게 국민이 필요하게 되는 순간 독재가 시작된다”고 말하며 권좌에서 내려왔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민주적 권력 이양의 본보기가 됐다. 1999년 퇴임 당시 만델라는 남아공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의 박수를 받았다. 전 세계는 그를 내전 없이 민주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이끈 통합의 리더, 급진적 투쟁가에서 실용주의적 통합의 상징으로 전환한 모범 사례로 평가했다. 미국 갤럽이 같은 해 실시한 국제 여론조사에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퇴임 후 만델라는 국제 평화 활동과 에이즈 예방운동에 헌신하는 한편 분쟁 지역들의 중재자로 활동했다. 2013년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산은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 담론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