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가 김정현의 ‘저 높은 중국, 낮은 중국’ ⑥

중국 하류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다

  • 글 : 김정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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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대가 끊길 지경이면 나라를 뒤엎는다는 중국의 평민층 ‘라오바이싱(老百姓)’
⊙ 한국산 홍초 수입해 돈버는 베이징의 건달 조직

金正賢
⊙ 55세. 서울경찰청 경위 퇴직.
⊙ 주요 작품으로 《아버지》 《어머니》 《맏이》 《누이》 등 가족 연작.
⊙ 2002년부터 중국 베이징에 체류하며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 준비 중.
중국 베이징의 서민들이 가는 시장.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 부근이라 한국어도 보인다.
중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라오바이싱(老百姓)은 여럿인 자식을 하나씩 팔아 부모를 봉양하며 연명하다가도 마지막 남은 자식까지 팔아야 할 처지가 되면 마침내 봉기해 세상을 무너뜨린다는 말이다. 마지막 한 명의 자식이라도 지켜 집안의 뿌리를 이을 수 있다면 어떤 착취와 고난에도 묵묵히 견디지만, 집안의 뿌리를 잘라야 할 지경이 되면 목숨마저 내놓는다는 뜻이다.
 
 
  왕조 교체 막을 열어 온 중국의 평민층
 
  4000년 이상을 이어 온 중국 역사에서 대부분의 왕조는 200~300년을 넘기지 못하고 교체되었다. 때로는 이민족이, 때로는 생각지도 않았던 인물이 새 왕조의 주인이 되었지만 그 시작은 농민반란이 대부분이었다. 피지배층인 평민층이 세상을 바꾼 셈이다. 이 평민을 일러 ‘라오바이싱’이라고 하는데 ‘라오(老)’에는 ‘늙다’는 의미 외에 ‘친근하다’는 의미도 있다. 우리말로는 평범한 이웃인 장삼이사(張三李四) 격의 단어로 봐도 무방할 터이다.
 
  아직도 농업이 사회 전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하기는 하지만 상당한 산업다각화가 이뤄진 현대에도, 매년 ‘춘제(春節·중국의 설)’가 되면 귀향을 위한 13억 인구의 대이동은 어김없다. 농, 공, 상 직업의 구분을 떠나 대다수 중국 라오바이싱의 뿌리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 라오바이싱이야말로 드러나지 않는,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라는 사실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생활이 일상이 되면서 많은 이가 타자의 문화를 연구하고 생각한다. 먼저는 겉핥기나마 타자의 역사 이해일 것이고, 나아가 마주치는 현상에 대한 문화적 분석으로 이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마주치는 많은 현상 중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눈에 띄는, 나무로 치자면 가지나 꽃, 열매 등이기 십상이니 뿌리에 대해서는 제대로 돌아보지 않거나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과 같은 경제의 용광로에서는 더구나. 하지만 화려한 꽃이나 열매도 결국은 뿌리에서 빚어지는 것이니 뭔가 삐거덕거리는 불안과 불협화음의 근원은 뿌리에 대한 무지일 것이다. 그래서 수박 겉핥기나마 뿌리인 라오바이싱의 속살을 들춰보고 싶었다.
 
 
  상점 얻으려면 돈보다 ‘관시’가 우선
 
샤오구이링 부부가 자신들의 가게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베이징(北京)에서 코리안 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왕징(望京)의 작은 야채시장에 서른 초반쯤의 젊은 아낙이 새로 점포를 열었다. 생김새도 곱상한데다 싹싹하기까지 하니 금세 손님들의 발길이 몰리는 듯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낙은 ‘상추’ ‘미나리’ ‘쑥갓’ 따위의 간단한 한국말도 하게 되고, 안면 익은 사람에게는 “이거 서비스” 하며 시금치 한 단이라도 더 집어 넣어 주는 인심을 보이니 더욱 복작복작. 어느 날, 한 손님이 꽤 많은 양의 야채를 구매하고 배달을 원하자 주소를 묻고는 갑자기 뭐라고 고함치는데 배달할 남편의 이름인 듯싶었다. 그런데 이 남편,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답이 없자 곧바로 양쪽 눈초리가 이마를 향하며 쇳소리를 내는데, 완전 두 얼굴이다. 지켜보는 한국인 고객들은 민망한데 시장 안 상인들은 박장대소하고, 뒤늦게 나타난 남편은 아낙의 사나운 질책에 안절부절 ….
 
  그녀 샤오구이링(肖桂玲)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을 안은 채 인터뷰를 요청하니 쾌히 응했다.
 
  1981년생으로 올해 32살인 그녀는 랴오닝(遙寧)성 단둥(丹東)시 출신의 한족(漢族)이다. 부모는 농민이었는데 산이 많고 농토가 좁은 단둥에서 농사래야 기껏 마을 뒷산에 심은 밤나무가 대부분이었으니 사는 형편은 팍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행히 우애 깊은 외가 형제가 기왕 농사를 짓는 거니 땅이라도 넓은 곳으로 가자며 이끌어 함께 헤이룽장(黑龍江)성 자무쓰(佳木斯)로 갔다. 그녀의 나이 두 살 때의 일로 자무쓰에서는 12년을 살았다. 그녀로서는 소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고향인 단둥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남편 류셴천(劉賢臣)은 그녀와 동갑내기 한족으로 역시 단둥 출신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불도저와 같은 중장비 운전 기술을 익혔다.
 
  —결혼은 언제 했나요.
 
  “사귄 지 2년 만에 했는데 그때가 정부가 허가하는 결혼 적령인 22살 때였어요.”
 
  —결혼 예물은 뭘 받았나요.
 
  “중국 전통을 따르면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예물은 물론이고 가재도구 등도 모두 장만해야 하는데 그걸 일일이 구입하기 번거로우니 일정액의 돈을 줘요. 저도 얼마간의 돈을 받아 생활에 필요한 용품들을 샀는데 특별히 예물을 장만하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때 산 가재도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고, 그것들이 모두 저에게는 소중한 예물인 셈이에요.”
 
  —함께하는 건 행복했겠지만 사는 건 어땠나요.
 
  “수산물공장에서 받던 급여가 저는 600위안, 남편은 800~1000위안 정도였는데 아무래도 씀씀이가 늘어나니 월급을 더 받는 철광석 제련공장으로 직장을 옮겼어요.”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겠군요.
 
  “예. 그런데 3년 좀 더 지나자 일거리가 없어져 월급을 못 주더니, 4년째는 아예 공장 문을 닫고 말았어요.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았지만 남편은 그나마 기술이 있어 일을 할 수 있는데 저는 배운 것도 없고 하니 도무지 할 일이 없었어요. 남편 혼자 벌어서 살아간다는 건 입에 풀칠이나 하는 거지 앞날을 기약할 수 없고, 그래서 베이징으로 오게 된 거예요.”
 
  —단둥에서 베이징으로 생활터전을 옮긴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이죠. 다행히 베이징에서 야채가게를 하고 있던 시누이가 도와주겠다고 해서 5살 난 아들을 두고 저만 먼저 와 사정을 살펴보고, 한 달 뒤에 남편도 왔어요.”
 
  —아들은 어떻게 하고요.
 
  “우선은 부모님께 맡겼는데 사내아이가 되다 보니 개구쟁이라서 부모님이 힘에 부쳐 소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기숙사에 넣었어요.”
 
시장에서는 실파 한 주먹도 저울로 거래한다.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벌써 그녀의 눈자위가 붉어져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곳 시장에 가게를 잡으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가게 월세도 생각보다 훨씬 저렴하고요. 다만 기존 상인들과 특별한 관시(關係·관계)가 있어야 되는데, 다행히 단둥 출신인 저는 동북사람들과 그게 연결되어 들어올 수 있었어요.”
 
  놀랍다. 작은 시장에 자리를 잡는 데도 돈보다는 관시라니. 사실 그녀가 장사하고 있는 시장은 왕징에서도 고급 아파트가 밀집한, 한국인도 많은 목 좋은 곳이다. 같은 야채라도 싱싱하게 다듬고 정갈하게 포장하면 일반 시장의 그것보다는 훨씬 높은 값을 받을 수 있고 수요도 많은 곳이니.
 
  —수입은 얼마나 되나요.
 
  “손님이 적을 때는 1000위안(약 18만원) 정도의 매출이고 많은 때는 2000위안 정도 돼요. 수입은 매출의 3분의 1정도 되고요.”
 
  —힘은 많이 들죠?
 
  “남편이 하절기에는 오전 2시, 동절기에는 4시쯤에 큰시장으로 가 물건을 떼어 오고, 저는 오전 8시경부터 시장에 나가 오후 7시가 넘어 가게 문을 닫아요. 집에 돌아와 간단하게 저녁을 해 먹고도 다음 날 팔 야채를 다듬고 해야 하니 고단한 건 말할 것도 없죠. 그래도 희망이 있으니 괜찮아요.”
 
  —희망은 뭔가요.
 
  “30만 위안(약 5500만원)쯤이면 고향 단둥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으니 그게 가능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거요. 그때도 작은 야채가게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들도 직접 돌보고요.”
 
  다시 부모님과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또 금세 눈자위가 붉어지더니 이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배달할 남편을 부르던 그 높은 목소리와는 완전 딴판이다.
 
 
  생활력 강한 만큼 삶의 무게 짊어진 중국 여성
 
잔돈을 비닐봉지에 담는 여인. 중국 여인들은 생활력이 강하다.
  얼핏 보면 여인천국으로 보이는 나라가 중국이다. 길거리고 어디서고, 남자와 여자의 다툼이 있으면 목소리 큰 건 대부분 여자이고 더 나가면 따귀를 올려붙이는 것도 다반사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개는 생활의 전면에 여자가 나서고 남자는 뒤에서 보조하는 정도이니 큰 목소리 이면은 고달픔의 무게가 클 것 같다. 어쨌거나 중국여인들의 생활력은 특별히 강하다. 자식을 고향의 부모에게 맡겨 두고 남편과 같이 도회로 나와 저마다의 일자리에서 노동의 품을 팔며 미래를 가꾸는, 심하면 남편과도 아주 멀리 떨어져 제각각 일을 하며 1년에 한 번 춘제나 되어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오직 생활의 고단함만으로 상대의 가슴을 할퀴고 그의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최소한 오늘날 한국의 사정에 비하면 말이다.
 
  그녀는 아들과 날마다 한 번씩 전화통화를 하는 편이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가슴에 품는 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가 전부이다. 그때도 장사에 바빠 따로 시간을 내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기는 어려우니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게다가 아들은 요즘 백전풍이라는 피부병을 앓고 있어 더욱 안타깝다.
 
  —고향엔 언제 가나요.
 
  “베이징에 온 뒤로 사는 게 바빠 한 번도 못 갔어요. 춘제 때는 방학이라 와 있던 아들과 함께 지내는 게 고작이고, 개학을 앞두고 데려다주는 건 위안샤오제(原宵節·정월 보름)에 남편이 가고요. 아, 한 번 친정아버지 66세 생일을 차려 드리러 혼자서 다녀왔어요. 남편도 가고 싶어했지만 가게 문을 닫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중국에서는 회갑보다 66회 생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때는 자식 중에 딸이 있으면 반드시 66량(厘·1량은 50g)의 밀가루와 66개의 만두소로 66개의 자오쯔(餃子)를 빚어 드리는데,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효심이 깊네요.
 
  “저보다는 남편이 훨씬 더 효자예요. 그리고 대부분 중국인들에게 효는 무엇보다 우선이에요. 부모님은 생명을 주신 분들이잖아요. 요즘 들어 이기적으로 자신의 행복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 이혼율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그건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죠. 가족과 가정 안에 내가 있는 건데 가족구성원을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면 무슨 행복이 있겠어요. 지금 한 분 있는 언니가 친정 부모님을 곁에서 보살펴 드리고 있어 제가 마음은 놓는데 그 언니가 이혼하고 혼자 사는 처지라 마음이 쓰여요. 뭔가 보탬이 되어야 할 텐데 ….”
 
  역시 농부로 가난했던 언니 부부는 이혼할 때 아이를 언니가 기르는 조건으로 월 80위안(약1 만4000원)의 양육비 지급 판결을 받았다. 우리로서는 어이없는 금액이지만 그게 일반 중국농민 수입의 현실이다.
 
  —도시에서 장사를 하다 보면 큰돈을 벌어 잘살아 보겠다는 생각도 들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우선 베이징의 공기가 너무 나빠 아주 고통스러워요. 또 장사를 하다 보면 돈 많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데 의외로 우리처럼 가지지 못한 사람보다 더 깍쟁이 짓을 해서 가졌다는 것이 별반 부럽지 않게 되고, 가끔 돈 많은 중국 사람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멸시하며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면 역겹기까지 해 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만 들어요.”
 
  —베이징의 살림집은 어디 있어요.
 
  “처음에는 시장 근처 아파트 지하에서 살았는데 너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어서 다른 곳으로 옮겼어요. 반지하에 침대 하나, 텔레비전 1대, 조리기구 몇 개가 들어가면 곽 차는 집인데도 월세가 700위안(약 12만원)이나 돼요. 베이징의 집세는 정말 살인적이에요.”
 
 
  삼성휴대폰과 현대자동차를 갖는 게 꿈인 중국 평민
 
건물 처마에 지붕을 이어 만든 가옥. 저 초라한 집안에서도 희망은 숨쉰다.
  —한 달에 생활비는 얼마나 들어요.
 
  “기본적으로 아침은 콩국물에 간단한 빙(餠·기름에 부친 전이나 떡류) 종류를 사서 때우고, 점심은 시장에서 제일 값싼 도시락을 사서 먹어요. 저녁도 늦어서야 들어가니 간단하게 만들어 먹고, 옷 같은 건 거의 사지 않는 데다 화장품도 기본적인 스킨과 로션만 쓰니 생활비래야 집세가 제일 크죠. 아, 작년 생일 때 남편이 삼성핸드폰을 사 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지금도 잘 쓰고 있어요.”
 
  —지금 당장 소원이 있다면.
 
  “목표한 2,3년 내로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 아들과 같이 사는 거죠. 형편이 된다면 남편이 자동차를 좋아하는데 그걸 사 주고 싶어요. 잠자리에 들 때마다 아들 생각에 눈물이 쏟아지는데 어서 ….”
 
  가게를 지키고 있던 남편이 다가왔다. 질문을 던졌다.
 
  —도시에서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생각은 안 드나요.
 
  “저는 항상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명심하고 살아요.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 같은 건 없고요. 살아가는 지혜는 학교에서만 배우는 것도 아니니 마음먹기 나름 아닌가요. 도회에 나와 장사를 하다가 보니 고객이 왕이라는 말을 항상 염두에 두지만 왕도 왕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돈에 노예가 된 고객들을 볼 때면 결코 돈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기에 한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잊은 적이 없어요. 특히 베이징은 날씨에 적응하기 어렵고 스트레스도 너무 받고요.”
 
  —부인의 말로는 차를 좋아한다던데.
 
  “지금 차는 장사를 위해 중고를 구입한 2000년 형 작은 봉고인데 그것도 나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형편이 되면 가족들을 태우고 다니기에 넉넉하고 단단한, 현대차나 상하이 폭스바겐 정도를 구입하고 싶다는 거지 대단한 건 아니에요.”
 
  —가족과 조상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 중국의 장례나 제사 제도는 어떤가요.
 
  “베이징과 같은 큰 도회는 물론이고 지방에서도 도심에서는 별로 볼 수 없지만 저희 고향 같은 농촌에서는 장례와 제사 전통이 여전히 잘 지켜지고 있어요. 상례(喪禮)를 바이스(白事)라고도 하는데 상복이 흰색이기 때문이죠. 일반적으로 자정을 기점으로 그 전에 돌아가시면 대이천(大二天), 이후에 돌아가시면 소삼천(小三天)이라고 하여 각각 2일장과 3일장을 지내요. 상례는 대부분 집안이나 이웃의 어른이 와서 가르쳐 주고, 저희는 그렇게 배워 자식에게 가르쳐 주게 되겠죠. 또 도회와 달리 지방은 화장을 하지 않고 묘를 쓰는데 지관이 좋은 자리를 물색해 줘요. 돈이 많은 이들은 비석을 세우기도 하는데 묘 주위에는 반드시 상록수를 심어요. 제사는 3년 동안 집에서 지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기일과 설날 등에 묘를 찾아 향을 피우고, 청명절에는 봉분에 꼭 흙을 덧씌워요.”
 
  —3년이 지난 뒤에는 제사를 어떻게 하나요.
 
  “그저 기일과 명절에 묘를 찾아 향을 피워요.”
 
  —고향에 돌아가면 뭘 할 거고, 다른 어려움은 없을까요.
 
  “뭐 농사를 짓게 되면 짓는 거고, 장사를 할 만하면 또 그렇게 하는 거죠. 다만 처음에는 고향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다 왔으니 오염되었을 거다 하는 선입견으로 경계하는 부분이 있겠죠. 그렇지만 저희만 겸손하게 살면 그런 건 금방 사라지고 옛날처럼 지낼 수 있을 거예요. 또 제가 벌어 온 돈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고요.”
 
  인터뷰 후 속깊은 이 부부를 바라보니, 어쩐지 많이 닮아 있었다. 어쩌면 ‘보통’으로 불리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소박하고 성실한, 대단한 욕망보다는 가족을 지키며 평온하게 살아가고 싶은.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소외되고 곤란을 겪고 박해를 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작은 소망마저 기어이 깨뜨려지려 할 땐 분연히 일어나 세상을 뒤집기도 하니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세상의 주인인 것이다. 중국뿐 아니라 모든 치자(治者)는 언제나 그런 주인을 조심스럽게 여기지 않아서는 온전하지 못하리라.
 
 
  한국산 홍초 수입해 돈 버는 중국 건달
 
흑사회를 주제로 한 영화 <무간도>의 포스터. 중국 조직폭력배의 세계를 다뤘다.
  중국에는 이런 말도 있다. ‘친구의 복수를 10년 내에 하면 부끄럽지 않다’. 또 어떤 이는 누군가에게 수모를 당했지만 힘에 부쳐 당장 어찌할 수 없자 겨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정말 견디기 힘든 강추위의 밤이 찾아오자 그의 집을 찾아가 멀리서 돌을 던져 창문을 깨트렸다. 한밤중에 깨진 유리창이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밤새 추위에 떨게 될 것이고, 수모를 당했던 이는 그로써 복수를 한 것이니 속이 후련했다나. 우스개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다르지 않은 라오바이싱인 그들의 속내는 어떤 것일까.
 
  밝힐 수 있는 건 왕(王)이라는 성씨와 53살의 나이밖에 없다. 대대로 베이징에서 태어나고 산 베이징런(北京人)이기는 한데 살아온 삶이 남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반도체 공장을 다닐 때까지는 평범한 삶이었는데 개혁개방으로 세상이 바뀌자 그의 삶도 달라졌다.
 
  짧게 깎은 머리, 단단한 근육. 한눈에 주먹 혹은 건달의 포스가 느껴진다.
 
  —건강해 보이네요.
 
  “웬걸요, 당뇨가 있어요.”
 
  —그래도 아직 주먹은 쓸 수 있죠.
 
  “꼭 써야 할 일이라면.”
 
  —학교 때도 주먹을 썼을 것 같은데.
 
  “지기 싫으니 휘둘렀지만 약자를 괴롭히는 짓은 안 했고, 남에게 별로 져본 적도 없어요.”
 
  —개혁개방 이후 무슨 일을 했나요.
 
  “다거(大哥·큰형님)를 만나 그분과 함께 30년 가까이 살아 왔지요. 그렇다고 다거에게 정기적인 급여를 받는 건 아니고, 그저 모시고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돈도 벌고 했죠.”
 
  —돈은 어떻게 벌었나요.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서 그때그때 수입이 좋은 사업을 하는 거지요. 최근의 예를 들자면 한국산 홍초가 인기를 끌면 그 물량 중 일부를 확보해 수입을 올리는 것 같은 거죠.”
 
  —위력으로?
 
  “이쯤 살아 온 세월이면 위력이 아니라 서로의 안면, 즉 관시로 되는 거죠, 하하.”
 
  —돈은 많이 벌었나요.
 
  “아무리 베이징의 집값이 비싸다고 해도 기껏 40평방미터 아파트 두세 채 있는 정도니 별건 아니죠. 그래도 부모님 봉양하며 마누라 잘 건사하고 자식 공부 가르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요즘도 어려운 친구의 사정을 들으면 차용증은커녕 아무런 조건 없이 얼마간 보내기도 하고요. 돌려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우선 보내주고 봐야죠, 하하.”
 
  그러면서 핸드폰을 꺼내 보여주는데 인터뷰하는 날 아침, 친구에게 30만 위안(약 5400만원)이 송금되었다는 은행으로부터의 확인문자였다.
 
  —부인도 아는 일인가요.
 
  “카드로 보냈으니 당연히 알지만 내게 뭐라 그럴 순 없죠. 아내에게 특별히 잘못한 일 없고, 밥 굶기는 일 없이 도리를 다했으니까요.”
 
  우리네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노릇이다.
 
  —꽤 거칠었던 시절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그런 일로 가족이 피해를 본 적은 없나요.
 
  “남자가 최소한 가족은 지켜야죠. 아주 가까운 몇 사람 외에는 누구도 내 가족이 사는 곳을 모르게 했어요. 그러니 위험할 까닭이 없죠.”
 
  —다거와는 어떤 인연이었나요.
 
  “뭐, 그냥 배짱이 맞고 의리를 지켜야 할 사람이니 인연을 맺은 거죠. 물론 그만한 능력도 있는 분이고요.”
 
  —그런 일로 감옥에 간 적은 있었나요.
 
  “경찰에 잡혀 구류를 당한 적은 있었지만 감옥에 간 적은 없어요. 거긴 못난 놈들이나 가는 거죠, 하하.”
 
  —관(官)과 가까워서?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치료비든 뭐든 뒷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일을 안 벌이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흑사회라는 검은 조직에 배후가 되는 권력이 있던데?
 
  “그건 영화죠. 홍콩이라면 모를까 최소한 대륙에서는 헤이서후이(黑社會)라는 조직이 있을 수 없어요. 동네의 작은 무리인 헤이서리(黑社里) 정도라면 모를까.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는 그런 범죄조직을 단속하고 척결하기에 다른 체제보다 훨씬 유리해요.”
 
  —그럼 당신이 해 온 것과 살아 온 의미는 뭔가요.
 
  “의리죠.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가끔은 주먹을 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공권력을 피해야 할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현실에는 마약이나 청부살인 등이 횡행하잖아요.
 
  “그건 우리같이 의리를 지키는 사람들과 다른 종자들의 짓이에요. 우린 그들과 달라요.”
 
  자신들은 우리말로 건달이라는 뜻이리라.
 
  —이제 나이도 적지 않은데 후회가 들지는 않나요.
 
  “의리를 지킨 건 조금도 후회하지 않지만 좀 더 약게 돈을 많이 벌 것을 하는 후회는 들어요.”
 
  —가족과 의리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을 만들면 안 되는 거죠, 하하.”
 
  사실 왕은 조직사회를 들여다보고 싶어 수소문하던 과정에서 알게 된 이다. 극도로 말을 조심하는데도 그 또한 라오바이싱이라는 생각에 일단 인터뷰를 한 것이다.
 
  세상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중국인의 삶의 코드는 가족과 의리인 듯싶다. 모두가 소중한 덕목이지만 어느 한쪽은 더욱 조심스러운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인생에서 끝내 후회가 든다면 그건 아무래도 안타까운 노릇 아닌가. 점점 잊혀가 아쉬운 덕목이 ‘의리’이지만 그걸 지켜 가기 위해서는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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