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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山南路 기행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잠자는 천년 보물을 만나다

글 : 허우범  인하대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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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연휴 이용해 1주일 동안 천산남로의 사막길 7000㎞ 여행
⊙ 누란국의 도읍 미란 등 漢~唐시대 西域을 지배했던 群小왕국의 유적들, 흔적만 남아
⊙ 위구르인들, “석유·가스·석탄은 동쪽으로 주고, 우리는 公害만 가졌다”

許又範
⊙ 1962년생. 인하大 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석사.
⊙ 인하大 홍보팀장, 인하大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역임.
⊙ 저서 : <삼국지기행> <역사의 향기는 바람처럼 날리고>.
실크로드 중계무역의 요충지였던 미란고성의 모습.
  직장생활을 하면서 원하는 여행을 하기란 쉽지 않다. 휴가철이 아니면 명절연휴를 이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가위 명절연휴를 이용해서 그동안 미뤄 왔던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기로 했다. 지난 여름 시리아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여 만에 다시 떠나는 여행이라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하다. 비행기에 오르려는데 휴대폰으로 아내에게서 문자가 온다.
 
  “잘 다녀오고, 담부턴 추석 명절 때 가지마셩!”
 
  문자를 보고 있노라니 다시금 미안함과 함께 아내의 배려가 고맙기만 하다.
 
  흐렸던 날씨가 베이징에 도착하자 비로 변한다. 새벽이 되니 빗줄기가 더욱 굵어진다. 공항은 토요일이어선지 새벽인데도 사람들로 붐빈다. 잠깐 잠을 청했는가 싶었는데 비행기는 어느덧 돈황공항에 도착한다. 후배가 반갑게 맞이하며 기사를 소개한다. 탤런트 같은 인상을 풍기는 기사는 촬영 팀만을 전문적으로 안내한다는데 도요타에서 만든 랜드 크루저를 가지고 나왔다. 사막을 여행하기에 아주 제격인 자동차다.
 
  일정을 맞추기 위해 잿빛 하늘과 거센 바람을 헤치고 곧장 출발했다. 밍사산(鳴沙山)을 지나자 얼마 가지 않아 고비사막이 장대하게 펼쳐진다.
 
  “일정 중에 러우란(樓欄), 미란(米蘭), 니야(尼雅) 유적은 볼 수 없어요. 해당 지역 문물관리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공개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비용이 엄청납니다.”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실크로드의 보고(寶庫)다. 특히,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에는 고대 실크로드의 유적들이 산재(散在)해 있다. 그러나 사막 속에서 이미 폐허가 된 유적을 찾아나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적을 보기 이전에 찾아가는 것부터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이러한 유적들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몇 곳만 보고 몇 곳만 찾을 수 있다면 성공한 것이다. 쉽지 않은 곳을 찾아보는 것이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빚은 예술품 아단
 
  고비사막의 해발고도가 점점 높아진다. 2000m가 훌쩍 넘었는데도 평지를 달려온 듯하다. 천산남로(天山南路)를 가기 위해선 5800m의 아얼진산(阿爾金山)을 넘어가야 한다.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가는 입구인 셈이다. 도로는 평탄하지만 길은 구불구불하다. 해발고도 3900m의 길을 넘어서니 장대하게 펼쳐진 산맥과 고비사막이 하늘과 맞닿아 있다. 그 접점(接點)에 광대한 호수와 섬이 신기루(蜃氣樓)가 되어 나타난다. 온 천지가 고요함과 적막뿐 바람조차 숨을 죽인다. 시간도 멎은 듯한 이곳, 끝없는 고비사막을 뚫고 지나간 일직선의 도로만 제외한다면 태곳적(太古-) 세상 그대로이리라. 순간, 정신이 오싹해진다. 고요한 천지(天地)는 외경심(畏敬心)을 넘어 공포감으로 다가오고 그 어떤 소리도 없음에 오히려 귀가 아프다.
 
  자연이 빚은 예술은 대지의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 해발 3000m의 고비사막 한가운데에 강(江)인 듯 파란 호수를 만들어 놓고, 흙을 깎아 온갖 군상(群像)을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이를 아단(雅丹)이라고 한다. 아단은 위구르 말을 음차(音差)한 것으로 원래 발음은 ‘야단’이다. 가파른 산이나 험준한 계곡을 이르는 말인데, 차창 밖으로 보아도 그야말로 아득한 절벽(茫崖)이다. 긴장도 풀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사막을 달린다. 여기저기 원유(原油)를 시추하기 위한 장비들이 널려 있다.
 
  “조금 더 가면 조그만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서부실크로드의 홍콩입니다.”
 
  석유가 나오는 까닭에 마을이 생기고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씀씀이 크게 생활을 하니 붙인 이름이다. 아얼진산을 넘어 긴장이 풀린 탓인가. 갑자기 허기가 몰려온다. 날도 저물어 저녁도 먹고 휴식도 취할 겸 마을을 찾았다.
 
 
  서부실크로드의 홍콩 망야촌
 
  그런데 마을이름이 망야촌(茫崖村)이다. 아득한 절벽을 뚫고 길을 만들었으니 마을이름을 그렇게 정한 모양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작은 마을임에도 불빛이 찬란하다. 그리고 아직도 여기저기 공사 중인 건물이 많다. 누가 봐도 부유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니 식사시간이 지나선지 한적하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에 간단하게 먹기 위해 빤미엔(拌麵)을 주문했다. 빤미엔은 위구르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면과 양념이 따로 나오는데 함께 비벼서 먹는다. 금방 삶아낸 쫄깃한 면과 양고기, 토마토, 피망, 양파, 고추 등이 주재료인데 간단한 한 끼 식사로는 영양 만점이다.
 
  식사 중에 서너 명의 남자가 들어와 주인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 내용이 여자이야기다. 토요일이어서 방도 구할 수 없고 여자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는데 어떤 것인지 아세요?”
 
  “글쎄요.”
 
  “‘색시는 얻어다가 남에게 주고, 나는 이곳에서 돈을 주고 색시를 산다’는 말입니다.”
 
  망야촌은 중국 각지에서 돈을 벌기 위해 가족들을 두고 혼자 온 남자들이 많다. 돈은 매달 부쳐 주지만 집에 다녀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별도로 하룻밤 여자를 사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젊고 예쁜 여자들이 통화를 하며 종종걸음으로 길을 가로지른다.
 
  어둠뿐인 사막은 불빛조차 빨아들인다. 곧게 뻗어 있기에 조심하며 달릴 뿐이다. 암흑천지에 빨간 점 하나가 어둠을 뚫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일인가. 시계는 어느덧 새벽 1시를 넘어서고 지친 몸은 천근 눈꺼풀을 세울 수가 없다.
 
  36병단(兵團) 숙소에서 쉬기로 하고 허름한 방을 구해 씻지도 못하고 누웠다. 병단이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까닭에 물도 제한적으로 주기 때문이다. 아침 7시가 되어서야 세면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컵으로 받아서 써야만 했다. 그야말로 고양이 세수를 하게 되었으니 물의 귀중함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에는 많은 병단이 있다. ‘생산건설병단’을 줄인 말이다. 초기에는 군인들이 황무지를 개간, 자급형 생산을 위한 방편으로 시작된 것인데 후에는 그 가족과 일반인들이 늘어나면서 농업과 공업 등 국가경제를 부흥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미란古城
 
미란고성에서 발굴된 날개 달린 천사상.
  미란고성(米蘭古城)은 36병단에서 동쪽으로 8㎞정도 떨어져 있다. 미란고성은 한(漢)나라 시기의 서역이었던 러우란국(樓蘭國)의 도성(都城)이었다. 세면을 하고 곧장 짐을 챙겨 미란고성을 향했다.
 
  미란고성 입구에 도착하니 차량출입을 하지 못하게 막아 놓았다. 기사가 관리인에게 꼭 보아야만 하는 사정을 이야기하자 생각했던 대로 거절한다. 문물관리국의 허가를 받아 오라는 것이다.
 
  일정의 촉박함, 꼭 보아야만 하는 이유를 들어 설득하길 20여 분. 기사가 자동차 시동을 걸며 얼른 타라고 한다. 이야기가 잘되어서 10분 동안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너무도 감사함에 얼른 자동차에 올랐다. 고비사막의 자갈모래가 빼곡히 들어찬 미란고성은 성벽과 사찰터, 그리고 불탑(佛塔)만 겨우 남겨 놓은 채 그 옛날의 영화는 폐허 속에 잠겨 있다. 이곳의 사찰에서 출토된 벽화 중 대표적인 것이 ‘날개 달린 천사상(有翼天使像)’이다. 이 벽화는 헬레니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를 통해 미란이 동서양을 오가는 실크로드 거점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남아 있는 토성의 흔적마저도 거센 바람에 깊게 패어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주고 있다. 입구의 표지석을 촬영하고 차에 오르는데 너무도 마음이 행복하다. 그도 그럴 것이 포기해야 할 뻔했던 미란고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초반부터 좋은 일이 생겼으니 이번 여행도 즐거운 일이 많으리라.
 
 
  폐허가 된 당나라 고성
 
러우란왕국의 경제중심지였던 와스샤고성.
  사막길은 언제나 주말과 같다. 도로는 직선으로 뻗어 있고 차량은 만나기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속(過速)을 한다. 주변의 지형도 사막인지라 시속 140㎞를 달려도 속도감을 느낄 수 없다. 직선도로는 또한 졸음운전 하기에 좋다. 이러한 까닭에 사막길을 혼자 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여러 명이 타고 가도 잠시 말이 없으면 곧장 눈꺼풀이 천지를 가린다. 항상 긴장감을 유지하지 않으면 사막이 뿜어내는 기운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따금 길 옆 표지판에는 운전을 조심하라는 문구가 보인다.
 
  ‘10번의 교통사고 중 9번이 과속입니다(十次事故 九次快).’
 
  기사도 졸린지 음악을 튼다. 위구르 전통음악이다. 한참을 음악에 취해 있는데, 후배가 이 지역 사람들의 불만 한 가지를 전해 준다.
 
  “석유와 가스, 석탄은 동쪽으로 주고, 서쪽의 우리는 공해(公害)만 가졌다.”
 
  뤄창현(若羌縣)에 도착하여 당(唐)나라 때의 고성(古城)을 찾았다.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도 아는 사람이 없다. 박물관도 마찬가지다. 국장과 통화를 하고서야 그곳이 관람불가(不可) 지역임을 알게 됐다.
 
  한참을 설득하여 안내자를 대동하고 국장이 알려준 장소로 갔다. 시내에서 동쪽으로 6㎞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는데 온통 강자갈만 들판을 메우고 있다. 자세히 둘러보니 성벽 터인 듯한 토성(土城) 한 곳이 자갈에 휩싸여 가고 있다.
 
  이토록 황폐화한 까닭이 궁금했다. 주변을 흐르는 강의 범람이 원인이다. 중요한 문화재라 해도 아무런 관리도 하지 않고 방치해 두었으니 이는 필연인 것이다.
 
  뤄창현에서 서남쪽으로 90㎞ 떨어진 곳에 러우란왕국의 경제중심지였던 와스샤고성(瓦石峽古城)터가 있다.
 
  정치중심지였던 러우란고성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지만, 경제중심지는 실크로드에서 매우 중요하였기에 꼭 찾아보아야만 한다. 315번 사막길을 또다시 한 시간을 달린다. 비가 오려는 듯 온통 회색이다. 새도 짐승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간간이 지나치는 자동차가 있을 뿐이다.
 
  마을에 도착하여 고성 터를 물어보니 역시 아무도 모른다. 코흘리개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가 방향을 알려준다. 그러나 망망대해(茫茫大海)와도 같은 흙더미 속에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할아버지에게 부탁하여 안내를 받았다.
 
 
  보물 찾자 아내도 버리고 도망친 도굴꾼
 
  커다란 흙더미들이 늘어선 사이를 헤집고 한참을 나아가자 옛 성벽의 흔적이 보인다. 아스라한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 주듯 성터 곳곳은 흙더미와 나무들로 무성하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다.
 
  이곳은 철이 많이 나는 곳이다. 러우란왕국 당시 이 성은 철을 제련하여 각종 무기와 농기구 등을 생산하고 이를 실크로드 대상(隊商)들에게 판매했던 곳이다. 당시 수많은 사람이 거주했을 집터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 주변에는 철을 제련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각종 철기구를 만들던 공방들이 있었던 곳이리라. 한참 당시의 모습을 그려 보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급히 손짓을 한다. 백골(白骨)이 나뒹군 채 도굴당한 집터를 찾은 것이다.
 
  “마을 사람 한 명이 이곳을 도굴했는데 보물이 많이 나왔는지, 아내도 버리고 도망을 갔다오.”
 
  “할아버지는 아무 것도 찾지 못했나요?”
 
  “힘도 없는 내가 무엇을 해. 천막까지 쳐 놓고 밤마다 몰래 파헤치는데.”
 
  “지금도 몰래 파헤치는 사람들이 있겠네요?”
 
  “지금은 못하지. 감시가 엄중하거든.”
 
  어떤 보물이 나왔기에 가정도 팽개치고 도시로 줄행랑을 친 것일까. 아직도 발굴할 유물이 많은 중국에선 오늘도 도굴꾼들이 한몫 챙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천산남로에 비가 내리다
 
춘추시대 가족묘인 짜군루커 1호 묘지.
  잔뜩 흐렸던 하늘이 비를 뿌린다. 사막에서 비를 만나니 그야말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하다. 체모(且末)로 향하는 사막길 좌우로 갈대밭이 무성하다. ‘사막길에 웬 갈대밭?’ 의아해하며 살펴보는데 그 범위가 실로 초원에 버금간다. 도로 주변의 사막화를 방지하기 위해 수초를 심어 놓은 곳도 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죽음의 땅으로 불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입구에 이토록 넓은 초원이 있었다니.
 
  또한 한참을 달리다 보니 커다란 다리가 보인다. 쿠얼첸(車爾臣)하천인데 그 폭이 실로 몇십 미터는 됨직하다.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없는 커다란 하천이 사막을 헤치며 흐르고 있다. 9월 하순, 비 내리는 천산남로는 새로운 인상(印象)을 심어 주기에 족하다.
 
  체모에 도착하니 비가 거세진다. 올해 들어 최고의 강우량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사막에서의 폭우다.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가족묘인 짜군루커 1호 묘지(札滾魯克1號墓地)를 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동행한 관리인이 굳게 잠긴 자물쇠를 열자 수천 년을 잠들어 있는 모습 그대로의 가족묘가 오롯하다. 14구의 미라가 금방이라도 살아날 것만 같다. 미라들은 하나만 제외하고 모두 다리가 구부러져 있다. 내가 궁금해하자 당시의 장례풍습이라고 일러준다. 나머지 미라는 군인으로 외부에서 죽어서 이곳에 안장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다른 미라에 비해 기골이 장대하다.
 
  오늘의 숙박지는 민펑(民豊)이다. 일정을 마치기 위해 빗속을 달린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15시간 이상을 달렸다.
 
  여행 3일차인 9월 20일(월). 우리나라는 월요일이면 박물관이 휴관이다. 이곳은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 9시30분에 시작하는 니야박물관을 보기 위해서 아침 일찍 식사를 했다. 아침저녁은 쌀쌀한 날씨이기에 뜨끈한 국물이 있는 우육면(牛肉麵)을 먹었다. 생마늘 서너 쪽이 반찬인데 궁합이 맞는다. 한 그릇을 후다닥 배부르게 먹어 치웠다.
 
  니야 유적은 한나라 때 서역 36국 중 정절국(精絶國)으로 알려진 곳으로 실크로드 서역남도의 중계역할을 한 곳이다. 영국의 스타인이 세 차례에 걸쳐 탐방하고 많은 유물을 가져갔는데, 지금은 모래 언덕에 수십 가구의 주택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한다.
 
  니야 유적 역시 미공개 지역이기 때문에 니야박물관을 보는 것으로 부족함을 채워야 한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분묘(墳墓)에서 발굴된 미라가 눈에 띈다. 이를 중심으로 각종 석기와 목기, 도기와 청동기, 농기구 등이 진열되어 있다.
 
  많은 유물 중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오성출동방이중국(五星出東方利中國)’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비단이다. 우주만물의 근원인 오행(五行·木火土金水)이 일어나 동방의 중원지국(中原之國)인 중국을 이롭게 한다는 내용인데, 그 뜻이 이미 주(周)나라 천자(天子)의 뜻을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인가. ‘국보(國寶) 중의 국보’로 지정된 이 비단은 외국 전시가 불가능하다.
 
  이 밖에도 로마시대의 각인(刻印)과 그리스의 신상(神像)들이 발견되어 동서문화 교류를 촉진한 실크로드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눈이 즐거우면 마음도 즐거운 법인가. 니야 유적지 현장 사진과 발굴 유물을 실컷 보았으니 상당한 위안이 된다. 위톈(于田)에 들러 카오빠오즈(包子)로 요기를 하고 다시 사막 길을 출발했다. 카오빠오즈는 다진 양고기에 양파 후추 등 양념을 함께 넣어 구운 빵으로 신장성의 위구르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일종의 만두 빵이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든든한 것이 여행길의 식량으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아싸古城
 
  비가 그친 사막에 다시 모래 산이 연이어 나타난다. 비온 뒤의 사막은 온통 거북등 모양을 하고 있다. 가뭄이 극심하면 거북등처럼 갈라지건만 물기가 마르는 것도 마치 거북등처럼 마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물기가 남은 곳에는 질긴 풀들이 자라니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에는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하늘은 흐리고 사막은 고요하다. 이런 날은 자칫하면 졸음운전을 하기 쉽다. 깜박 졸았다 눈을 뜨니 기사가 졸음을 참는 듯 왼손은 천장의 손잡이가 빠질 정도로 힘주어 잡고 있다. 순간, 졸음은 만 리 밖으로 달아나고 후배를 깨워 열심히 떠들어댄다. 음악도 틀고 볼륨도 높인다. 그렇게 달리기를 세 시간. 처러(策勒)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한나라 때의 군사기지였던 아싸고성(阿薩古城)터가 있다. 사람이 많은 번화가에서 수소문을 했지만 역시 아는 사람이 없다. 공안(경찰)에게 물으니 대략 방향만 알려준다. 길 찾기에 능숙한 기사가 다시 한 시간을 달린다.
 
  날은 흐려 방위조차 분간하기 어려운데 너른 벌판에서 갈림길을 만났다. 지형지물조차 파악할 수 없으니 어느 쪽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갈림길을 자세히 살펴봐도 똑같은 크기에 똑같이 자동차가 지나간 흔적이 있다. 실로 난감한 와중에 한 곳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즈음 오토바이를 탄 할아버지가 온다. 아! 오아시스와도 같은 구세주(救世主)를 만난 것이다.
 
  오토바이가 온 길을 따라 들판 몇 개를 넘으니 그림인 듯 강 건너 마을 뒤로 성터가 보인다. 감격한 나머지 연달아 셔터를 누른다. 비온 뒤여서인지 황토빛 강물은 요란한 고함을 치며 흘러간다. 그 위로 사람만이 다닐 수 있는 다리가 놓여 있다.
 
  마을에 도착하여 성터를 오르려는데 도무지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 마을 사람에게 물었으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다. 위구르인들만 사는 마을이기에 중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분명 중국이되 중국이 아닌 외국에 온 것이다.
 
  순간 성터 이름은 위구르말일 것이라고 생각되어 얼른 말했다. “아싸, 아싸?” 그러자 금방 대답이 온다. “아싸!” 내가 성터를 가리키며 다시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편 마을 어귀를 돌아서 올라가라고 손짓으로 알려준다.
 
  온통 붉은색 황토와 자갈이 널린 절벽을 오르니 끈질기게 버텨 온 성터가 거센 바람 속에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군사기지로서 위세가 당당했던 시절은 범람한 강물이 휩쓸어 가 버린 듯 성터 꼭대기까지 자갈더미가 수북하다. 인간이 만든 역사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결국 자연을 넘어설 수 없음을 아싸고성은 알려주고 싶은 것일까.
 
 
  표지석만 남은 요트간 고성
 
요트간 고성 표지석.
  허톈(和田)에 도착하니 어느덧 저녁 6시. 서둘러야만 해지기 전에 일정을 소화할 수 있다. 먼저 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에도 니야의 유적이 전시되어 있는데 간다라미술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이 눈에 띈다.
 
  날은 어두워지고 유적지 찾기는 쉽지 않아 박물관 공무원에게 요트간(約特干) 유적지 안내를 부탁했다. 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 둘러보지 못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포도 넝쿨이 온 하늘을 천장처럼 감싼 마을을 들어가니 호두나무가 빼곡하다. 이 지방의 특산물이 포도와 호두임을 금방 알 수 있겠다. 요트간 고성 유적은 마을의 중앙에 있는데 성의 흔적은 간 곳 없고 표지석만 남아 있다.
 
  옛날에 가이드를 했었다는 공무원은 이곳을 안내할 때마다 사전에 설명을 해도 외국관광객들은 짜증을 낸다고 한다. 고생해서 왔는데 표지석만 덩그러니 있고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인도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이었다. 마을이 건설될 때만 해도 주민들이 많은 유물을 캐어 내곤 했지만 지금은 토층(土層)이 두꺼워져서 어렵다고 한다. 요트간은 ‘이불’을 의미하는데 이는 흙과 모래가 이불처럼 성터를 덮었다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玉의 고향 허톈
 
  허톈은 옥(玉)의 고향이다. 쿤룬산맥(崑崙山脈)에서 내려오는 바이위허(白玉河)와 헤이위허(黑玉河)가 도시의 동(東)과 서(西)로 흐르는데 항상 옥을 캐는 사람들로 번잡하다. 옥은 가격이 비싸다. 좋은 옥을 캐면 평생 팔자를 고칠 수 있으니 오늘도 사람들은 횡재를 꿈꾸며 강으로 모인다.
 
  이들이 최고로 치는 옥은 양지옥(羊脂玉)이다. 우윳빛처럼 보이고 양의 기름을 바른 것처럼 매끈한 옥을 말한다. 이런 옥은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하니 옥의 가치를 모르는 나그네들은 엄청 비싼 돌이 이상하기만 할 것이다.
 
  옛날 실크로드를 오간 대상들은 이곳에서 옥을 수집하여 돈황의 옥문관(玉門關)을 통해 장안(長安)으로 실어 날랐다. 이 길을 가리켜 옥의 길(玉石之路)이라고 한다. 옥문관은 장안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옥의 고향을 찾아가는 출발점이었다.
 
  다음날 아침 8시. 호텔을 나서는데 밤인 듯 컴컴하다. 호텔 로비의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다. 내가 시계를 잘못 본 것일까. 아니다. 중국은 베이징(北京)시간을 표준시각으로 정한다. 베이징에서 서쪽으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신장위구르자치구에 베이징과 같이 해가 뜰 수는 없다. 베이징과의 시차가 2시간 늦기 때문에 위구르인들은 6시로 표기하고 이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하루 일정을 시작한다. 가스충전소 앞에 차량이 즐비하다. 어제 잠깐 보았을 때에도 수 킬로미터나 줄지어 있었는데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1㎞가 넘게 이어져 있다. 알고 보니 가스충전소가 오직 이곳뿐이라고 한다. 가스와 석유가 많이 나는 곳에 충전소는 한 곳밖에 없으니 얼마나 부아가 치밀겠는가. 그러고 보니 아까 식당에서 약간 짜증스러운 언동을 하던 위구르 택시기사가 이해가 된다.
 
 
  사막 밑의 바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사막중로(沙漠中路)를 달린다. 쿠처(庫車)까지 600㎞가 넘는 사막길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사막을 횡단해야 한다. 생수도 다시 보충하고 피자빵의 원조 격인 난 빵도 샀다.
 
  사막중로를 들어선지 10분. 지난번 여행 때 보지 못했던 유적지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어제 포기한 러와커불사(熱瓦克佛寺)이다. 너무 기쁜 나머지 저절로 목청이 높아진다. 러와커 사원을 들어가는 길은 1차선이지만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있어 편리하다. 아마도 개인이 관광 사업을 목적으로 이곳 유적지를 일정기간 불하(拂下)받아 개발한 듯하다.
 
  러와커 사원 유적은 고대 우전국(于(國)의 역사와 불교연구에 중요한 유적지인데 사막 속의 폐허가 된 불탑 주위로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관람로(觀覽路)를 만들어 놓았다. 이곳 역시 영국의 스타인 등 유럽의 탐험가들이 많은 유물을 강탈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화와 불상, 채색도기와 동전 등이 발굴되어 현재는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사막에서의 운전은 지루하다. 햇빛이 강렬해도 문제지만 날씨가 흐려도 시야가 모호하다. 하늘과 사막이 온통 같은 색이기 때문이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휴게소에 들렀다. 운전자들을 생각하여 잠시 쉬어 갈 수 있도록 만든 곳인데, 간이식당과 공중화장실이 있다. 그런데 공중화장실에 물이 콸콸 넘쳐난다. 사막 한가운데 어디에 이토록 많은 물이 있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사막으로 흘러든 물이 지하수로 고여 있기 때문이다.
 
  “사막 밑에 바다가 있는 것이지요.”
 
  타클라마칸 사막은 37만㎢로 한반도의 1.6배 크기다. 이러한 사막 밑에 지하수가 있다면 그야말로 바다인 것이다. 죽음의 땅 밑에 생명의 바다가 있다니 정녕 타클라마칸 사막이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인가. 사막에도 호양(胡楊)이라는 나무가 산다. 척박한 사막에서 살려면 얼마나 깊숙이 뿌리를 내려야 할까. 인고(忍苦)의 시간을 버텨낸 듯 나무들의 모양이 하나같이 예술적이다. 호양은 모두 3000년을 산다고 한다. 푸르게 1000년, 고사목(枯死木)으로 1000년, 그리고 썩는 데에도 1000년이 걸린다고 한다.
 
 
  쿠처와 고선지
 
실크로드의 주식인 난 빵을 굽는 사람.
  10시간을 달려 드디어 쿠처(庫車)에 도착했다. 쿠처는 고대 불교 왕국으로 유명했던 구자국(龜玆國)이 있었던 도시다. 당나라 때에는 이곳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하고 서역(西域)경영에 힘썼는데, 고구려 유민(遺民)의 후손인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이곳에 절도사로 부임하여 실크로드를 개척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년 전, 베이징올림픽이 한창이던 때 고선지 장군의 흔적을 살펴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위구르인들의 테러사태가 발생했다. 유적지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길이 봉쇄되어 아무런 소득 없이 쫓기듯 쿠처를 빠져나갔었다. 이제 다시 찾아오니 감회가 새롭다.
 
  시내 입구를 들어서니 쿠처왕부(庫車王府)가 보인다. 최근 무너진 도성터에 새롭게 지은 것인데 구자국왕들의 역사와 마지막 왕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나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왕부 내에 있는 박물관이었다. 구자왕국 시대의 유물들과 이 지역 최대의 사원이었던 쑤바스 사원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는데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귀중한 유물을 본다는 행복감에 한동안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로 들어오는데 휘영청 닭이 밝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한가위 명절이다. 달 속에 보고 싶은 가족들의 얼굴이 있다. 나를 믿는 식구들의 환한 웃음이 있다. 애잔한 마음을 추스르며 새우잠을 청한다.
 
  다음날 추석 아침. 이른 식사를 끝내고 아내에게 전화를 한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내의 다정한 목소리가 무척이나 반갑고 고맙다. 지하철도 불통될 정도의 폭우는 멎었지만 한가위 보름달을 보기는 어렵다는 말에 타클라마칸의 보름달을 보내 주기로 약속했다. 하루 일정을 시작하려는데 기사가 추석 명절 선물로 월병(月餠)을 건네 준다.
 
  “월병은 한가위 보름달을 보면서 먹어야만 소원성취를 할 수 있답니다.”
 
  그리하여 추석날 밤에 먹을 간식이 생긴 것이다.
 
 
  구자고성에서 쿠처가무를 보다
 
고선지가 활약한 구자고성터.
  고선지 장군의 혼이 서린 구자고성을 찾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절인 추석날에 이곳을 찾으니 더욱 감회가 깊다. 구자고성은 신구 시가지의 접경지역에 있는데 도로를 내느라고 성벽이 끊어져 있다. 동쪽은 일반 가옥의 앞마당에 있고 길 건너 서쪽은 성터만 조금 남아 있다.
 
  한나라 이후 당나라 때까지 심혈을 기울여 개척한 실크로드의 전진기지가 바로 이곳인데 어찌 이렇게 무너진 성터만 허접하게 관리하고 있을까. 개혁개방에 성공한 중국이 그 옛날 실크로드의 영화(榮華)를 오늘에 되살리기 위하여 사막에 길을 뚫는 서부대개발이 한창인데, 정작 역사적인 배경이 되는 곳은 어찌 이토록 방관(傍觀)할 수 있을까. 역사를 모르는 그들이 아니며, 역사를 추켜세우는 방법을 잘 아는 그들인데 말이다.
 
  쑤바스사원(蘇巴什佛寺)은 쿠처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23㎞ 떨어진 퀘얼타거산(確爾塔格山)에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드넓은 언덕에 세워진 사원은 각종 건물의 흔적들로 빼곡한데 대전(大殿)의 크기만 해도 대략 100m에 이르니 사원 전체의 크기는 실로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이곳 사원에서도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구자왕국의 문자가 적힌 목간(木簡)이 발견되었다. 이 목간은 구자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사원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일군(一群)의 촬영팀이 들어온다. 신장위구르자치구의 홍보물을 만드는 사람들인데 사원을 배경으로 쿠처가무(庫車歌舞)를 촬영한다고 한다. 가무는 동서문명 교류의 중요한 산물인데 천산북로(天山北路)의 중심지였던 쿠처의 가무는 특히 유명하다. 쿠처가무를 볼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포기했는데 이곳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가무단의 현장감 넘치는 공연을 보게 될 줄이야. 정말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시내로 돌아와 바자(시장)에 들렀다. 추석 대목을 노린 월병가게가 장사진을 이루고 월병을 사려는 사람들로 도로가 꽉 찼다. 회족(回族)식당에 들러 만두로 점심을 먹고 얼른 쿠처를 벗어났다.
 
쿠처가무단의 현장공연.
 
  트랙터 타고 가야 하는 서역도호부 유적지
 
  다음 목적지 룬타이(輪台)는 고대 서역 36국의 하나로 한나라 때에는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가 있었던 곳이다. 룬타이와 쿠처의 거리는 약 115㎞이지만 이는 중국이 한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 쉬지 않고 실크로드를 개척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두어 시간을 달려 룬타이에 접어들었다. 새 도로를 만드느라고 건설장비들이 길을 막고 섰다. 룬타이 고성을 찾기 위해 나섰지만 역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방법은 하나. 문화국장이나 향정부(鄕政府)의 서기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배운 것인데, 찾기 힘든 유적지는 반드시 이들에게 물어봐야만 알 수 있다. 어렵사리 국장과 통화가 되고 이 지역을 잘 아는 택시기사를 선두에 세워 고성을 찾아 나섰다. 사막공로를 한참 달리니 차오후신(草湖新)이란 작은 마을이 나온다. 마을 밖은 끝없는 평원이 펼쳐진 곡창지대다. 도성이 들어서기 좋은 곳이다.
 
  고성의 위치를 잘 아는 위구르인이 있어서 그의 안내를 받기로 했다. 황폐한 평원에 거친 풀과 나무들이 무성하다. 걸어서 4㎞를 가니 평원에 성의 흔적이 보인다. 크기가 약 1㎞에 달하는 정방형(正方形)의 성터가 오롯하게 남아 있다. 참으로 어렵게 찾아온 유적지가 이렇듯 자취를 간직하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크로드 여행에서 서역도호부 유적지는 나의 중요 관심거리다. 이번에는 친절한 서기를 만나 위치를 알 수 있었는데 길이 몹시 나빠서 지프차로도 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도 보고 싶다”고 했더니 “트랙터로 이동해야 한다”며 지리를 잘 아는 농민을 소개한다. 한참을 기다려 농민을 만났다.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시간이 문제가 되었다. 유적지를 다녀오는데 하루가 꼬박 걸린다는 것이다. 20㎞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없는 길을 느린 트랙터를 타고 지그재그로 가야 하기 때문이란다. 한나절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보아야 할 일정도 만만치 않게 중요한 곳들인데 이곳에서 하루를 보낼 수가 없다. 아쉬움을 안은 채 다음 기회로 미루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철문관
 
  내일 일정을 편하게 시작하기 위해 쿠얼러(庫爾勒)로 향한다. 쿠얼러는 원유가 생산되는 까닭에 매우 부유한 도시다. 그래서인지 왕복 2차선 도로에는 많은 차량이 오간다. 날은 이미 깜깜하고 차량마다 전조등(前照燈)을 켜고 달리는데 반대편에서 오는 차들이 하나같이 상향등(上向燈)을 켜고 온다. 아무리 신호를 해도 열에 아홉은 대꾸도 없다. 사막길이어서 어둡다고는 하지만 상대방의 운전을 방해하면서까지 달리는 것은 너무하다. 게다가 대형 트럭들은 6개의 라이트를 켜고 내달리니 천산북로의 사막길을 밤에 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어느덧 한가위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아내에게 보내줄 보름달을 찍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11시. 허기를 때울 겸, 아침에 받아 두었던 월병도 먹는다. 가족 모두의 건강과 소원성취를 기원하면서.
 
  쿠얼러의 아침은 여느 도시와는 다르게 도로와 건물, 차량과 사람들이 모두 깨끗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사막 속의 부자 도시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식사가 끝나자 곧바로 철문관(鐵門關)으로 향했다.
 
  철문관은 고대 실크로드의 중도(中道)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인데 높다란 바위산 사이의 협곡을 막아 관문을 만들었다. 당시 천산북로를 통해 서역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 가야만 했는데 당나라의 고승(高僧) 현장(玄)과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가 이 길을 통해 불경(佛經)을 구해 왔다. 공작하(孔雀河)를 품고 있는 철문관은 군사적 요충지여서 예로부터 병가필쟁지지(兵家必爭之地)였다.
 
 
  서구에 약탈당한 흔적만 남은 千佛洞
 
칠개성 마을의 천불동.
  서구의 탐험가들은 일찍부터 실크로드 유적을 약탈했다. 스웨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이 실크로드 유적 약탈의 선봉에 선 나라들이다. 지금 찾아가는 옌치현(焉耆縣) 칠개성향(七個星鄕)의 천불동과 대사원도 독일의 르콕이 약탈해 간 곳이다.
 
  톈산산맥 끝자락 호라산 구릉에 웅대(雄大)하게 자리 잡았던 대사원은 당대(唐代)에 세워졌던 것인데 90여 개의 크고 작은 건물이 들어섰던 흔적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옆의 절벽에 만들어진 천불동은 훼손이 심각하다. 그중에서 한두 곳의 동굴에는 약탈하다 남은 벽화의 흔적이 있다. 어렴풋이 남아 있는 벽화의 흔적을 꿰맞추고 있노라니 인간의 욕심이 실로 엄청난 파괴를 가져옴에 마음이 착잡하다.
 
  동굴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천불동 주위에 들어선 벽돌공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몇 년 후 이곳에 다시 온다면 천불동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붉은 벽돌로 다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까. 돌아서는 나그네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저기 길 양쪽으로 벌겋게 널어 놓은 것이 무엇이지?”
 
  “이곳에서 많이 생산되는 고추입니다.”
 
룬타이에서 만난 고추말리는 농부들.
  고추가 도로 양쪽 주변에 산더미처럼 널려 있다. 어느 정도 마른 고추더미 옆에는 갓 따온 고추가 트럭째 쏟아진다.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쇠스랑과 삽을 들고 고추를 말리고 있다. 그야말로 고추 말리는 것이 또 다른 농사인 셈이다. 이러한 고추 말리기가 50㎞에 걸쳐 있다. 실로 산을 이루고도 남을 양이다. 이렇게 많은 고추를 중국인이 다 먹을 수 있을까. 아마도 많은 양을 우리나라에 수출할 것이다. 그런데 벌판에 가득 쌓인 고추는 햇빛에 말리기만 할 뿐, 먼지나 공해물질이 들어가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 아니 위생을 고려할 상황이 못 된다. 중국산 고춧가루가 이런 비위생적인 과정을 거쳐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것을 안다면 군인과 학생들 외에는 아무도 먹지 않으리라.
 
  허쉬(和碩)에 있는 곡혜고성(曲惠古城) 역시 한나라 때 서역 36국의 하나인 위수국(危須國)의 옛터다. 취후이향(曲惠鄕)에 도착하여 향 서기와 통화하니 위치를 알려준다. 하지만 지금은 농촌마을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도 장소를 확인하고 싶었다.
 
  막상 가서 보니 쿠처의 요트간 유적지처럼 성터의 흔적은 간곳없고 커다란 마을이 들어서 있다. 40년 전부터 이곳의 성곽을 허물어 집과 밭을 만들었다니 어디에 흔적이 있겠는가. 구청촌(古城村)이란 마을이름만 옛날에 성터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찾아보고 있는데 쓰레기더미 위에 토성의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작은 시멘트 표지가 널브러져 있는데 이곳이 곡혜고성 터임을 알려준다. 누군가 성벽의 일부를 남겨 놓고 이곳에 팻말을 새겨 놓았으리라. 그 사람의 애틋한 마음이 내게 와 닿는 것만 같다.
 
 
  1주일 동안 7000㎞의 사막길을 달리다
 
쓰레기더미 속에 방치된 곡혜고성의 성벽.
  9월 24일(금). 여행도 막바지로 접어들어 오늘로 모든 일정을 마감하고 우루무치에 도착해야 한다. 우루무치를 가기 위해선 톈산산맥을 넘어야 한다. 심심찮게 도로를 막아서는 양떼와 염소떼를 피해 가며 산을 오르니 어느덧 평탄한 산록이 펼쳐지고 여기저기 말과 양들이 평화롭게 먹이를 찾고 있다. 그 너머로 멀리 만년설산(萬年雪山)이 보이고 그 위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구불구불 길고 긴 216번 국도의 산길을 오른다. 어느덧 만년설산이 코앞에 다가오고 지나온 길은 강물처럼 보인다. 4280m 정상에서 아래를 조망하기 위해 잠깐 내렸다. 머리가 아프고 움직임도 거북하다. 고산(高山)증세가 나타나는 것이다.
 
  내려가는 길은 더없이 위험하다. 바위산을 깎아 만든 절벽 길은 자갈이 굴러내려 매우 험난하다. 게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자동차를 만나면 비켜 설 곳이 마땅치 않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해서 운전해야만 내려올 수 있는 길이다. 또한 곳곳에서 각종 석재와 광물을 채굴하고 도로공사가 함께 진행되어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1주일 동안 7000㎞의 사막길을 함께 달린 기사와 같이 선 필자(오른쪽).
  긴장이 풀어질 즈음인 해발 2000m 도로를 지나는데, 얼마 전에 운전부주의로 절벽 밑으로 추락해 박살난 트럭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소름이 돋고 다시 정신이 든다.
 
  오후 6시. 먼지가 뽀얀 자동차를 끌고 우루무치 시내에 도착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그리고 무사히 톈산산맥을 넘어온 것에 감사한다. 기사가 웃으며 자동차 계기판을 가리킨다. 7000㎞. 하루에 1000㎞의 사막 길을 달린 셈이다. 무엇보다도 안전하게 운전해 준 기사에게 감사의 포옹을 했다. 기사가 자신과 여행한 증표라며 옥팔찌를 건네 준다.
 
  “톈산산맥을 한 번 더 넘어야지요?”
 
  “그럼요, 아직도 사막 속의 왕국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걸요.”
 
  지난 일주일간 함께했던 뜨거운 정이 굳게 잡은 손길을 타고 다음번 여행을 향해 강렬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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