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세대-기아 농구단 출신 故 박승일 코치, 루게릭병 발병 후 23년간 투병하며 전문병원 건립 추진
⊙ “한국, 의료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돌봄 시스템은 선진국 중 꼴찌에 가까워”(강성웅 병원장)
⊙ 네오플·현대차그룹·넥슨코리아·에이스침대, 가수 션·지드래곤·아이유 등 참여
⊙ “힘듦 생각하면 시작조차 못 했을 것… 누군가 완성할 거라 믿어”(박승일 코치 누나 박성자 이사)
⊙ “한국, 의료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돌봄 시스템은 선진국 중 꼴찌에 가까워”(강성웅 병원장)
⊙ 네오플·현대차그룹·넥슨코리아·에이스침대, 가수 션·지드래곤·아이유 등 참여
⊙ “힘듦 생각하면 시작조차 못 했을 것… 누군가 완성할 거라 믿어”(박승일 코치 누나 박성자 이사)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있는 승일희망요양병원. 이하 사진=고기정
“승일이가 ‘내가 시작하면 누군가 이 일을 완성할 거야’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말이 결국 이뤄지더라고요.”
박성자(朴成子·58) 승일희망재단 상임이사는 동생 고(故) 박승일(朴勝一·1971~2024년) 씨가 생전에 남긴 말을 떠올리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동생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그의 마지막 바람을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집념이 묻어났다.
근위축성측삭경화증(筋萎縮性側索硬化症·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흔히 루게릭병이라고 알려진 이 병은 대뇌와 척수의 운동신경원이 선택적으로 사멸(死滅)해 온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는 퇴행성(退行性) 질환이다. 아직 완치할 방법이 밝혀지지 않은 난치병(難治病)으로 분류된다.
박승일 전 농구 코치는 루게릭병 투병 중에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루게릭병 환자를 위한 전문 요양병원 설립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2011년, 환자와 가족들의 일상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취지로 가수 션과 함께 승일희망재단을 설립했고, 마침내 그 뜻은 현실이 되었다. 박 전 코치 생전인 2023년 12월 18일 첫 삽을 뜬 지 1년 3개월여 만인 2025년 3월 31일, 박 전 코치는 가고 없지만 그의 이름을 딴 ‘승일희망요양병원’이라는 루게릭병 전문 요양병원이 경기도 용인시에 마침내 문을 열었다.
고인의 오랜 꿈이 녹아 있는 병원. 과연 무엇이 한 명의 루게릭병 환자를 병원 건립이라는 일로 이끌었을까? 승일희망요양병원을 찾아 그 열정의 자취를 더듬어 봤다.
“가족도 못 하는 의사소통, 여기선 가능”
비영리재단법인 승일희망재단이 설립한 승일희망요양병원은 국내 최초의 루게릭병 등 중증 근육성 희귀질환자를 위한 전문 요양병원이다. 35만 명의 시민이 십시일반 정성으로 118억 8000만원을 모으고, 여기에 의료기자재비 포함 국비(國費) 120억 원이 더해져 마침내 병원이 완공됐다. 병원은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로, 연면적 약 5000㎡에 76개 병상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인 병원 로비는 새하얀 색으로 눈이 부실 지경인데, 승일희망요양병원은 따스한 햇살 같은 베이지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박성자 상임이사가 “로비는 일부러 따뜻하게 꾸몄다. 환자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편안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로비 벽면에는 수많은 기부자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네오플, 현대자동차그룹, 넥슨코리아, 에이스침대 등 기업들의 참여는 물론, 재단 설립자 박승일, 가수 션과 지드래곤, 아이유 등 연예인들도 병원 건립에 마음을 보탰다.
평일 오후임에도 병원은 조용했다. 매주 2~3명씩 신중하게 입원 절차를 진행하고 있으며, 병동은 안정화를 최우선으로 서두르지 않고 순차적으로 오픈할 예정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3층 병동에서는 한 환자가 처치를 받고 있었다. 말로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 없는 환자는 미세한 눈 깜빡임으로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었고, 의료진은 조용하고 침착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보호자는 끝내 눈물을 훔치며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기자는 그 뒤를 따랐다.
― 많이 힘드시죠?
“괴롭죠. 보는 가족이 더 괴로워요.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으니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불편한지조차 알 수 없어요. 고쳐 주고 싶고 시원하게 해결해 주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너무 애가 타죠.”
― 병원이 생기기 전에는 어떻게 돌봤나요?
“집에서 돌봤어요. 요양병원에 가도 루게릭 환자는 병원에서 해줄 것도 없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다들 돌보기를 꺼렸거든요. 상태가 나빠지면 병원에 갔다가 다시 집에 오기를 반복했어요.”
― 전문 요양병원이 생기고 나서 좀 나아졌나요?
“네. 루게릭병을 이해하고 계신 의사와 간호사 선생님들이 환자의 의견을 하나하나 묻고 돌봐 주시고, 전문성이 있으셔서 믿고 맡길 수 있어요. 정말 다행이죠.”
치료뿐 아니라 ‘생활’하는 곳으로 설계
간호사 스테이션 앞에는 환자들의 맥박, 심박수, 산소포화도 등의 바이털 사인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대형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의료진들은 수시로 이를 확인하며 환자 곁에서 긴장감을 놓지 않고 세심하게 진료를 이어 갔다.
병원 곳곳에 루게릭병 환자들을 위한 섬세한 배려가 배어 있었다. 병상에 누운 채로 산과 하늘,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병실 창문은 낮고 넓게 설계했고 모기 등 벌레를 막는 방충 시설도 촘촘히 마련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와 병실은 침상형 휠체어와 이동형 병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널찍하게 만들었으며, 병실마다 딸린 목욕실도 환자가 침대째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입구와 내부 공간을 크게 했다. 병원 내 강당에서는 영화 상영 등 문화 활동도 진행될 예정이다. 옥상에는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쉼터가 마련돼 환자와 보호자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다.
4인 1실로 구성된 병실에는 생활 편의와 안전을 위한 각종 최첨단 의료 장비가 갖춰져 있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단순히 치료의 장소가 아니라 ‘생활하는 곳’이라는 점을 고려해 설계한 흔적들이 묻어났다.
이러한 ‘희망의 공간’도, 개원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지금,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고 있다. 연세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 교수로 있다가 승일희망요양병원을 맡은 강성웅(姜聖雄·65） 병원장은 현 의료돌봄 시스템의 한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루게릭병을 비롯해 희귀질환을 치료하는 의료 기술은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하지만 돌봄 시스템만큼은 선진국 중 꼴찌에 가깝죠.”
“일본은 희귀질환 전문병원 27곳”
― 왜 의료돌봄이 선진국 중 꼴찌인 건가요?
“희귀질환에 정부의 관심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죠. 일본에는 희귀질환을 전문적으로 돌보는 병원이 27곳이나 있습니다. 단순 인구비(比)만 따져도 우리나라에는 10곳 이상 있어야 하는데, 이제 발걸음만 겨우 뗀 거죠. 그리고 루게릭병 같은 희귀질환은 가족 중 한 명만 걸려도 다른 가족들의 경제활동이 사실상 멈춘다고 보면 됩니다. 처음엔 어찌어찌 버틴다 해도 몇 년 지나면 경제적으로 바닥을 치게 돼요. 한 가정이 감당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일본은 요양병원 입원 시 쓸 수 있도록 정부가 환자에게 270만엔(약 2530만원)을 간병비로 지원한다. 우리나라는 반대로, 요양병원에 입원하면 간병인을 쓸 수 있는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마저 끊긴다. 환자들이 간병비 부담 때문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정부는 어떤 지원을 해야 합니까?
“돌봄 부분을 강화해야죠. 노인돌봄처럼 희귀질환도 정부가 지원해 줘야 해요. 이건 국가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당장 바꿀 수 있는 문제예요. 수가(酬價) 체계 같은 건 손질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이건 아닙니다.”
― 입원 비용이 많이 비싼가요?
“입원비 자체는 산정 특례(희귀질환 자 환자의 급여 진료비와 의약품비 본인부담률을 10%로 줄이는 제도) 지원으로 환자 부담이 크지 않습니다. 간병비가 가장 큰 숙제지요. 장기 입원을 할 경우 사설 간병인을 쓸 수밖에 없는데, 월 400만~500만원이 듭니다. 정부에서는 중증환자 1200명에 한해 요양병원 입원 시 간병비를 최대 77만원 지원해 주는 제도를 시범 운영 중이지만, 환자 간병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재단에서 입원 환자들에게 일부를 지원하고 있긴 하지만, 제도 개편이 절실합니다.”
― 환자들과 가족들의 병원 만족도는 어떤가요?
“대체로 만족도는 높습니다. 하지만 간병인 문제는 여전히 복잡합니다. 간병인 고용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와 있지 않은 간병업체와 환자 간 사적 계약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교육과 관리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루게릭병 환자는 일반 환자 간병과 다른 접근이 필요한데, 그걸 이해시키고 학습시키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 루게릭병 환자에게 재활치료는 어떤 의미인가요?
“희귀질환은 대부분 약이 없어요. 수술도 완치도 어렵죠. 그런데 재활치료를 열심히 하면 합병증이 줄어듭니다. 관절 구축 같은 근골격계 문제는 물론이고, 호흡재활을 잘하면 폐렴 같은 합병증도 줄어들거든요. 결과적으로 환자의 고통이 줄고 의료비도 절감되죠. 그 자체로도 재활은 굉장히 중요한 치료입니다.”
“인공호흡기 없이는 생존 어려워”
진료 최전선에서 환자들을 만나는 장찬웅(張讚雄·36） 진료과장의 이야기도 들어 봤다.
― 대학병원 조교수로 일하다가 승일희망요양병원으로 오셨군요.
“호흡재활을 전공하다 보니 병원이 세워진다는 얘기는 예전부터 듣고 있었어요. 재활의학과 의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제안이 왔죠. 대학병원에 남기보다 이곳에서 희귀질환 환자들을 진료하고 연구하는 것이 더 의미 있겠다 싶어 결정했습니다.”
―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들의 상태는 대체로 어떤가요?
“대부분 24시간 인공호흡기에 의존합니다. 기관 절개를 통해 인공호흡기를 쓰고, 식사도 위루관이나 비위관을 이용한 유동식이 전부입니다. 인공호흡기 없이는 생존이 어렵습니다.”
― 루게릭병 환자들에게는 어떤 재활이 효과적인가요?
“병의 진행을 되돌릴 순 없지만, 대부분 재활치료를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치료 자체가 큰 도움이 됩니다. 저희는 합병증을 막는 재활, 그리고 호흡재활에 집중하고 있어요. 또 의사소통이 어려운 분들을 위한 ‘대체 의사소통’ 교육도 중요합니다.”
― 대체 의사소통이란 무엇인가요?
“터치패드나 손가락 글씨부터 시작해, 눈의 움직임이나 깜빡임으로 소통하는 글자판을 쓰죠. 일부는 안구 마우스를 사용해 눈동자로 글자를 입력하기도 합니다.”
― 환자들의 만족도는 어떤가요?
“시설이 좋고, 재활치료 자체가 처음인 분들이 많다 보니 전반적으로 만족도가 높습니다. 심리적인 위안도 크고요. 다만 환자분들이 손이 많이 가는 편이라서, 2대1 간병인데도 요구에 즉시 대응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런 점이 아쉽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 전에 루게릭 요양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적이 있나요?
“전공의 4년차 때 호흡재활센터에서 루게릭병 환자를 치료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폐렴 치료를 마치고 퇴원시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응급실로 다시 연락이 왔어요.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직접 그 환자의 집을 찾았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산 언덕 위 다세대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인공호흡기를 단 환자가 그런 환경에서 지낸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보호자는 ‘몸 상태가 조금만 이상해도 환자가 불안해 한다’며 병원에 있고 싶어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분들을 위한 전문병원이 꼭 필요하구나’ 하고 절실히 느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희망의 시작’ 동생 꿈 대신 이룬 누나
박승일 씨의 꿈은 병원이라는 건물이 완성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누나 박성자 상임이사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고 있었다. 박 이사는 병원 설립 과정과 지난 시간들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설명했다.
“동생은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늘 글자판을 이용해 ‘재단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어요. 모금액이 얼마나 모였는지, 어떤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주면 정말 좋아했죠. 병원 건물이 올라가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 주면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요.”
― 동생의 꿈을 대신 이뤘네요.
“동생은 병원 준공을 6개월 앞두고 하나님 곁으로 떠났어요. 하지만 착공식에 참석할 수 있었고 병원이 실제로 지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은 덜했을 거예요. 지금도 하늘에서 이 병원이 잘되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 설립까지 과정이 쉽지만 않았을 텐데요.
“맞아요. 힘든 걸 생각하면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거예요. 그런데 원장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너무 힘든 일이란 걸 알면서도 계속 간절한 마음으로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사실 처음에는 저도 동생이 병원을 짓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어요. 그런데 동생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누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아. 내가 시작하면 누군가는 이 일을 완성할 거야.’ 그 말이 정말 맞았어요. 병원이 이렇게 시작이 됐고, 언젠가는 누군가가 이 일을 완성할 거라 믿어요.”
―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처음엔 루게릭병 환자들만 생각하면서 병원을 지었는데, 막상 운영을 하다 보니 환자분들이 필요로 하는 게 정말 많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병원에 계신 분들뿐 아니라 집에 계신 환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향이 뭘지 고민하고 있어요. 원격으로 진료하거나 상담을 제공해서, 병원에 직접 오지 않아도 의료 서비스와 사회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고요. 이런 시스템이 잘 자리 잡으면 제2, 제3, 제4의 병원으로 확장해서 루게릭병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하지만 분명히 도움이 필요한 다른 질병을 가진 분들에게도 희망이 되는 병원을 만들고 싶어요. 지금은 그게 저희의 새로운 꿈이 됐습니다.”⊙
박성자(朴成子·58) 승일희망재단 상임이사는 동생 고(故) 박승일(朴勝一·1971~2024년) 씨가 생전에 남긴 말을 떠올리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동생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그의 마지막 바람을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집념이 묻어났다.
근위축성측삭경화증(筋萎縮性側索硬化症·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흔히 루게릭병이라고 알려진 이 병은 대뇌와 척수의 운동신경원이 선택적으로 사멸(死滅)해 온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는 퇴행성(退行性) 질환이다. 아직 완치할 방법이 밝혀지지 않은 난치병(難治病)으로 분류된다.
박승일 전 농구 코치는 루게릭병 투병 중에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루게릭병 환자를 위한 전문 요양병원 설립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2011년, 환자와 가족들의 일상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취지로 가수 션과 함께 승일희망재단을 설립했고, 마침내 그 뜻은 현실이 되었다. 박 전 코치 생전인 2023년 12월 18일 첫 삽을 뜬 지 1년 3개월여 만인 2025년 3월 31일, 박 전 코치는 가고 없지만 그의 이름을 딴 ‘승일희망요양병원’이라는 루게릭병 전문 요양병원이 경기도 용인시에 마침내 문을 열었다.
고인의 오랜 꿈이 녹아 있는 병원. 과연 무엇이 한 명의 루게릭병 환자를 병원 건립이라는 일로 이끌었을까? 승일희망요양병원을 찾아 그 열정의 자취를 더듬어 봤다.
“가족도 못 하는 의사소통, 여기선 가능”
 |
| 승일희망요양병원 병실. 한 병실당 4개의 베드가 놓여 있다. |
일반적인 병원 로비는 새하얀 색으로 눈이 부실 지경인데, 승일희망요양병원은 따스한 햇살 같은 베이지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박성자 상임이사가 “로비는 일부러 따뜻하게 꾸몄다. 환자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편안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로비 벽면에는 수많은 기부자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네오플, 현대자동차그룹, 넥슨코리아, 에이스침대 등 기업들의 참여는 물론, 재단 설립자 박승일, 가수 션과 지드래곤, 아이유 등 연예인들도 병원 건립에 마음을 보탰다.
평일 오후임에도 병원은 조용했다. 매주 2~3명씩 신중하게 입원 절차를 진행하고 있으며, 병동은 안정화를 최우선으로 서두르지 않고 순차적으로 오픈할 예정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3층 병동에서는 한 환자가 처치를 받고 있었다. 말로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 없는 환자는 미세한 눈 깜빡임으로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었고, 의료진은 조용하고 침착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보호자는 끝내 눈물을 훔치며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기자는 그 뒤를 따랐다.
― 많이 힘드시죠?
“괴롭죠. 보는 가족이 더 괴로워요.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으니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불편한지조차 알 수 없어요. 고쳐 주고 싶고 시원하게 해결해 주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너무 애가 타죠.”
― 병원이 생기기 전에는 어떻게 돌봤나요?
“집에서 돌봤어요. 요양병원에 가도 루게릭 환자는 병원에서 해줄 것도 없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다들 돌보기를 꺼렸거든요. 상태가 나빠지면 병원에 갔다가 다시 집에 오기를 반복했어요.”
― 전문 요양병원이 생기고 나서 좀 나아졌나요?
“네. 루게릭병을 이해하고 계신 의사와 간호사 선생님들이 환자의 의견을 하나하나 묻고 돌봐 주시고, 전문성이 있으셔서 믿고 맡길 수 있어요. 정말 다행이죠.”
한국에 루게릭병 알린 故 박승일씨
루게릭병 발병 이후 박 씨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병 자체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외로움과 사회의 무관심이었다. 박 씨는 직접 모금 활동에 나섰다. 2002~03 시즌에는 자신이 몸담았던 현대모비스 팀과 함께, 3점슛과 리바운드 하나당 1만원, 팀이 승리할 때마다 10만원을 루게릭병 환자들에게 기부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하지만 병세는 빠르게 악화됐다. 발병 11개월 만에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고, 20개월 후부터는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됐다. 2004년에는 호흡 근육까지 마비돼 기도절개술을 받고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게 되었다. 목소리를 잃게 되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눈으로 쓴’ 책 《눈으로 희망을 쓰다》(2009년)를 출간하고, 루게릭병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011년에는 가수 션과 함께 비영리재단법인 ‘승일희망재단’을 설립했고, 2014년에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한 아이스버킷 챌린지 캠페인을 통해 국내에 루게릭병이라는 질환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바람은 루게릭병 환자를 위한 전문 요양병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생전 마지막 공식적 나들이이기도 했던 2023년 12월 13일, 그는 휠체어에 의지해 승일희망요양병원 착공식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박 씨는 한마디를 남겼다. “이제 해방이네요.” 2024년 9월 25일 박승일 씨는 분당서울대학교병원에서 영면(永眠)했다. 그 후 6개월 만인 2025년 3월 31일, 그가 생전에 그토록 바라던 병원이 문을 열었다. 발병 직후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의미하게 보내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위해 살고 싶다. 그 누군가는 바로 루게릭병 환자다”라고 한 말 그대로 그는 이 땅의 수많은 루게릭병 환자에게 ‘희망의 시작’을 남기고 떠났다. |
치료뿐 아니라 ‘생활’하는 곳으로 설계
 |
| 승일희망요양병원의 목욕실. 큰 침대가 들어갈 정도로 넓은 목욕실에서 환우들을 위한 배려가 느껴졌다. |
병원 곳곳에 루게릭병 환자들을 위한 섬세한 배려가 배어 있었다. 병상에 누운 채로 산과 하늘,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병실 창문은 낮고 넓게 설계했고 모기 등 벌레를 막는 방충 시설도 촘촘히 마련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와 병실은 침상형 휠체어와 이동형 병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널찍하게 만들었으며, 병실마다 딸린 목욕실도 환자가 침대째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입구와 내부 공간을 크게 했다. 병원 내 강당에서는 영화 상영 등 문화 활동도 진행될 예정이다. 옥상에는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쉼터가 마련돼 환자와 보호자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다.
4인 1실로 구성된 병실에는 생활 편의와 안전을 위한 각종 최첨단 의료 장비가 갖춰져 있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단순히 치료의 장소가 아니라 ‘생활하는 곳’이라는 점을 고려해 설계한 흔적들이 묻어났다.
이러한 ‘희망의 공간’도, 개원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지금,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고 있다. 연세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 교수로 있다가 승일희망요양병원을 맡은 강성웅(姜聖雄·65） 병원장은 현 의료돌봄 시스템의 한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루게릭병을 비롯해 희귀질환을 치료하는 의료 기술은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하지만 돌봄 시스템만큼은 선진국 중 꼴찌에 가깝죠.”
“일본은 희귀질환 전문병원 27곳”
 |
| 강성웅 승일희망요양병원 병원장. |
“희귀질환에 정부의 관심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죠. 일본에는 희귀질환을 전문적으로 돌보는 병원이 27곳이나 있습니다. 단순 인구비(比)만 따져도 우리나라에는 10곳 이상 있어야 하는데, 이제 발걸음만 겨우 뗀 거죠. 그리고 루게릭병 같은 희귀질환은 가족 중 한 명만 걸려도 다른 가족들의 경제활동이 사실상 멈춘다고 보면 됩니다. 처음엔 어찌어찌 버틴다 해도 몇 년 지나면 경제적으로 바닥을 치게 돼요. 한 가정이 감당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일본은 요양병원 입원 시 쓸 수 있도록 정부가 환자에게 270만엔(약 2530만원)을 간병비로 지원한다. 우리나라는 반대로, 요양병원에 입원하면 간병인을 쓸 수 있는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마저 끊긴다. 환자들이 간병비 부담 때문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정부는 어떤 지원을 해야 합니까?
“돌봄 부분을 강화해야죠. 노인돌봄처럼 희귀질환도 정부가 지원해 줘야 해요. 이건 국가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당장 바꿀 수 있는 문제예요. 수가(酬價) 체계 같은 건 손질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이건 아닙니다.”
― 입원 비용이 많이 비싼가요?
“입원비 자체는 산정 특례(희귀질환 자 환자의 급여 진료비와 의약품비 본인부담률을 10%로 줄이는 제도) 지원으로 환자 부담이 크지 않습니다. 간병비가 가장 큰 숙제지요. 장기 입원을 할 경우 사설 간병인을 쓸 수밖에 없는데, 월 400만~500만원이 듭니다. 정부에서는 중증환자 1200명에 한해 요양병원 입원 시 간병비를 최대 77만원 지원해 주는 제도를 시범 운영 중이지만, 환자 간병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재단에서 입원 환자들에게 일부를 지원하고 있긴 하지만, 제도 개편이 절실합니다.”
― 환자들과 가족들의 병원 만족도는 어떤가요?
“대체로 만족도는 높습니다. 하지만 간병인 문제는 여전히 복잡합니다. 간병인 고용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와 있지 않은 간병업체와 환자 간 사적 계약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교육과 관리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루게릭병 환자는 일반 환자 간병과 다른 접근이 필요한데, 그걸 이해시키고 학습시키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 루게릭병 환자에게 재활치료는 어떤 의미인가요?
“희귀질환은 대부분 약이 없어요. 수술도 완치도 어렵죠. 그런데 재활치료를 열심히 하면 합병증이 줄어듭니다. 관절 구축 같은 근골격계 문제는 물론이고, 호흡재활을 잘하면 폐렴 같은 합병증도 줄어들거든요. 결과적으로 환자의 고통이 줄고 의료비도 절감되죠. 그 자체로도 재활은 굉장히 중요한 치료입니다.”
“인공호흡기 없이는 생존 어려워”
 |
| 장찬웅 승일희망요양병원 진료과장. 사진=승일희망요양병원 |
― 대학병원 조교수로 일하다가 승일희망요양병원으로 오셨군요.
“호흡재활을 전공하다 보니 병원이 세워진다는 얘기는 예전부터 듣고 있었어요. 재활의학과 의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제안이 왔죠. 대학병원에 남기보다 이곳에서 희귀질환 환자들을 진료하고 연구하는 것이 더 의미 있겠다 싶어 결정했습니다.”
―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들의 상태는 대체로 어떤가요?
“대부분 24시간 인공호흡기에 의존합니다. 기관 절개를 통해 인공호흡기를 쓰고, 식사도 위루관이나 비위관을 이용한 유동식이 전부입니다. 인공호흡기 없이는 생존이 어렵습니다.”
― 루게릭병 환자들에게는 어떤 재활이 효과적인가요?
“병의 진행을 되돌릴 순 없지만, 대부분 재활치료를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치료 자체가 큰 도움이 됩니다. 저희는 합병증을 막는 재활, 그리고 호흡재활에 집중하고 있어요. 또 의사소통이 어려운 분들을 위한 ‘대체 의사소통’ 교육도 중요합니다.”
― 대체 의사소통이란 무엇인가요?
“터치패드나 손가락 글씨부터 시작해, 눈의 움직임이나 깜빡임으로 소통하는 글자판을 쓰죠. 일부는 안구 마우스를 사용해 눈동자로 글자를 입력하기도 합니다.”
― 환자들의 만족도는 어떤가요?
“시설이 좋고, 재활치료 자체가 처음인 분들이 많다 보니 전반적으로 만족도가 높습니다. 심리적인 위안도 크고요. 다만 환자분들이 손이 많이 가는 편이라서, 2대1 간병인데도 요구에 즉시 대응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런 점이 아쉽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 전에 루게릭 요양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적이 있나요?
“전공의 4년차 때 호흡재활센터에서 루게릭병 환자를 치료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폐렴 치료를 마치고 퇴원시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응급실로 다시 연락이 왔어요.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직접 그 환자의 집을 찾았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산 언덕 위 다세대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인공호흡기를 단 환자가 그런 환경에서 지낸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보호자는 ‘몸 상태가 조금만 이상해도 환자가 불안해 한다’며 병원에 있고 싶어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분들을 위한 전문병원이 꼭 필요하구나’ 하고 절실히 느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희망의 시작’ 동생 꿈 대신 이룬 누나
 |
| 박성자 승일희망요양병원 상임이사. 故 박승일 전 코치의 누나다. |
“동생은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늘 글자판을 이용해 ‘재단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어요. 모금액이 얼마나 모였는지, 어떤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주면 정말 좋아했죠. 병원 건물이 올라가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 주면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요.”
― 동생의 꿈을 대신 이뤘네요.
“동생은 병원 준공을 6개월 앞두고 하나님 곁으로 떠났어요. 하지만 착공식에 참석할 수 있었고 병원이 실제로 지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은 덜했을 거예요. 지금도 하늘에서 이 병원이 잘되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 설립까지 과정이 쉽지만 않았을 텐데요.
“맞아요. 힘든 걸 생각하면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거예요. 그런데 원장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너무 힘든 일이란 걸 알면서도 계속 간절한 마음으로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사실 처음에는 저도 동생이 병원을 짓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어요. 그런데 동생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누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아. 내가 시작하면 누군가는 이 일을 완성할 거야.’ 그 말이 정말 맞았어요. 병원이 이렇게 시작이 됐고, 언젠가는 누군가가 이 일을 완성할 거라 믿어요.”
―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처음엔 루게릭병 환자들만 생각하면서 병원을 지었는데, 막상 운영을 하다 보니 환자분들이 필요로 하는 게 정말 많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병원에 계신 분들뿐 아니라 집에 계신 환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향이 뭘지 고민하고 있어요. 원격으로 진료하거나 상담을 제공해서, 병원에 직접 오지 않아도 의료 서비스와 사회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고요. 이런 시스템이 잘 자리 잡으면 제2, 제3, 제4의 병원으로 확장해서 루게릭병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하지만 분명히 도움이 필요한 다른 질병을 가진 분들에게도 희망이 되는 병원을 만들고 싶어요. 지금은 그게 저희의 새로운 꿈이 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