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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기억전쟁

영화 〈암살〉 흥행 후 밀양에 들어선 김원봉 관련 시설들

김원봉 생가터에 의열기념관(12억원)·의열체험관(92억원) 조성한 밀양시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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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율성 논란’으로 수세 몰리자 ‘김원봉·윤이상’ 끌어들인 강기정
⊙ 김원봉은 북한 괴뢰 정권 초대 내각 참여한 ‘반국가단체’ 수뇌부… 내각 서열 7위
⊙ 6·25 때 ▲국가검열상 ▲노동상 활약… 전쟁 공훈으로 훈장도 받아
⊙ 빨치산과 남파공작원 통해 남한 경제 파괴·사회 교란·선거 방해 시도
⊙ 영화 〈암살〉이 1270만 명 관객 동원한 후 휘몰아친 ‘김원봉 광풍’
⊙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선택한 대한독립의 영웅!”
⊙ 명목상으로는 ‘의열 기념’이지만, 전시물은 ‘김원봉’ 위주
⊙ 김원봉의 ‘반민족’ ‘대한민국 적대’ 행위 기술·평가는 찾기 어려워
밀양시는 2022년, 92억원을 들여 의열기념관 옆에 지하 1층·지상 3층 규모의 ‘의열체험관’도 개관했다. 사진=월간조선
  강기정 광주시장은 경남 통영시의 ‘윤이상 기념사업’과 경남 밀양시의 ‘의열단’을 앞세운 ‘김원봉 추앙’을 끌어들여 광주시의 ‘정율성 기념’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한다.
 
  강 시장은 “광주의 눈에 정율성은 뛰어난 음악가이고, 그의 삶은 시대적 아픔”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아픔을 감싸고 극복해야 광주건, 대한민국이건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다”며 “이는 150억원을 투자한 밀양의 김원봉 의열 기념공원, 123억원을 투자한 통영의 윤이상 기념공원 등과 결을 같이한다”고 내세운다.
 
  강 시장의 언급은 그의 의도와 달리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가 ‘반국가적 인사’를 추앙하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린 측면이 크다. 강 시장은 ▲해방 후 월북해 북한 정권의 국가검열상·노동상 등 요직을 지낸 북한 정권 거물 ▲6·25 때는 불법 남침한 북한군에 대한 후방 보급을 담당한 ‘공로’ 덕분에 김일성에게 훈장을 받은 적군 수뇌부 ▲전쟁 때는 물론 정전 후에도 간첩을 남파해 남한 선거 방해와 경제 혼란을 조장하려 한 대남공작 지휘자였던 김원봉을 기념하는 시설이 경남 밀양시에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강기정의 ‘물귀신 작전’
 
밀양시는 2016년, 김원봉 생가터에 총 12억원을 들여 지상 2층 규모의 의열기념관을 조성했다. 사진=월간조선
  또한 줄기차게 북한을 드나들었고, 독일 귀화 이후 공공연하게 ‘친북(親北)’ 활동을 지속하며 후일 ‘이적(利敵)단체’로 규정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해외본부 의장으로 활동했던 윤이상(尹伊桑)을 경남 통영시가 ‘국민 세금’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자칭 ‘민주·평화·인권의 도시’를 자처하는 광주시가 중북(中北) 침략 세력의 ‘나팔수’ 노릇을 한 정율성을 기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지자체인 경남 밀양시가 대한민국에 항적한 김원봉(金元鳳)을 추앙하거나, 김일성을 향해 ‘수령님!’ ‘우리 역사상 최고 영도자’라고 외친 친북 인사를 기념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에 《월간조선》은 먼저 밀양시의 ‘김원봉 추모’ 실태를 살폈다.
 
  밀양시는 2016년 시내 중심가인 내이동 해천변 일대에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를 조성했다. 밀양 출신 의열단원들의 생가가 있던 구역이다. 거리 조성 이후 밀양시는 이에 관한 보도자료(2016년 11월 24일 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된 무(無)정부주의 성격의 항일무장 독립운동단체 의열단(義烈團)은 단원 중 11명이 밀양 출신으로 그 중심에는 영화 〈암살〉의 주인공인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의사가 있다.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 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 의거를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폭탄 의거,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의거 등 모두 23회에 걸쳐 조선 청년들의 의열 투쟁을 이끌었던 김원봉 의사는 일제엔 무시무시한 무장 투쟁의 선봉장이었다. 이처럼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한 밀양시에 ‘독립운동 테마 거리’도 조성됐다. 최근 생태하천으로 복원된 해천을 따라 만들어진 ‘독립운동 테마 거리’는 영남권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인 ‘3·13밀양만세운동’을 벽화와 조형물들로 꾸며 놓았으며, 해천 주변으로 김원봉 의열단장, 윤세주 열사, 황상규 선생, 을강 전홍표 선생, 이장수 선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생가지가 자리 잡고 있어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현재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에는 의열기념관, 의열체험관 등이 있다. 의열기념관은 밀양시가 김원봉 생가터에 조성한 시설이다. 밀양시 의열기념관의 ‘시설 소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18년 3월 7일 약산 김원봉 장군의 생가터에 문을 연 ‘의열기념관’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충의(忠義)에 앞장선 사람’을 뜻하는 ‘의열’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독립운동의 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 최초로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의열의 정신으로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독립투사들의 꿈과 희망을 찾아가는 소중한 공간으로 남을 수 있도록 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열기념관은 표면적으로 밀양 출신 의열단원 또는 의열단의 항일 활동을 추념하는 공간이다. 이름만 놓고 봤을 때는 ‘정율성 역사공원’과 달리 ‘반국가적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별문제가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김원봉’ 위주의 전시 내용을 보면 평가가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김원봉의 독립운동 행적
 
  1898년, 지금의 경남 밀양시에서 출생한 김원봉은 1919년부터 의열단 단장으로 활동했다. 의열단은 1920년대 초중반, 국내외에서 폭탄 투척·요인 저격 활동을 주로 했지만, 대개 실패했다. 이를 주도한 이가 김원봉이다. 1920년대 중반, 소련과 중국의 자금 지원이 끊기자 의열단은 사실상 와해됐다. 김원봉과 의열단원 일부는 1926년, 중국 국민당 정권의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들어갔다. 이때 황포군관학교 교장이던 장제스(蔣介石), 정치부주임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비롯한 중국 인맥을 얻었다. 그해 10월, 김원봉은 중국 국부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듬해에는 중국국민당의 소위 ‘북벌(北伐)’에 참여했다. 그런데 같은 해 8월, 중국국민당 정권의 ‘반공(反共)’ 정책에 반발한 저우언라이 등이 중국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서 폭동을 일으켰을 때는 중국공산당에 가담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 의열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던 중국공산당 군대는 대패했다. 마오쩌둥은 패잔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장시성 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갔다. 이 폭동 과정에서 단원 대다수를 잃은 의열단은 사실상 와해됐다.
 
  이후 김원봉은 ‘조선공산당 재건동맹’ 창설, ‘레닌주의정치학교’ 운영 등에 관여하다가 만주사변(1931년) 직후 장제스에게 ‘한중 협력 반일(反日)’을 제안했다. 중국국민당 정권은 이를 수락하고,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 덕분에 김원봉은 난징(南京)에서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1932~1935년)’ 교장으로 일했다. 1935년에는 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의 전신)을 만들어 ‘임시정부 폐지론’을 주장했다. 중일전쟁(1937년) 발발 후엔 중국국민당 정권이 1938년에 주도해 만든 정치선전대인 조선의용대(부대 규모는 300여 명)의 대장으로 활동했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봄, 병력 대다수가 중국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화베이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빈 껍데기만 남았다. 당시 중국국민당 정권을 따라 중국 충칭(重慶)에 머물던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본대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들어갔다. 그 누구보다 ‘임정 무용·폐지론’을 앞장서서 주장했던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을 맡았다.
 
 
  남한 좌익 붕괴하자 월북
 
  김원봉의 임정 합류는 자금 지원과 임정 승인을 조건으로 내건 중국국민당 정권의 요구를 임정이 수용한 결과였다. 김원봉은 임정 참여 후 주류였던 김구(金九) 세력과 대립하며 ‘노선 투쟁’ ‘주도권 다툼’을 지속했다. 1944년에는 자신이 임정 군무부장직을 맡았다. 그런데도 임정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저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임정 주도권을 갖지 못한 데 따른 불만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1945년에는 ‘임정 해체론’을 주장했다.
 
  해방 후 김원봉은 남한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좌익 활동을 주도하다가 1948년 4월에 월북했다. 일각에서는 김원봉의 월북 배경으로 ‘친일경찰의 모욕’ 등을 꼽는다. 1947년 3월, 좌익 세력의 전국 총파업과 폭동의 배후로 지목돼 체포된 김원봉이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를 고문 치사한 전력이 있는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모욕을 당하고, 뺨을 맞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원봉은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토로했다고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근거 없는 ‘전언’일 뿐이다.
 
  그보다는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1947년 10월)’ 이후 미군정(美軍政)이 공산당 불법 활동에 강하게 대처해 좌익 조직이 와해되고, 우익 세력들에 의해 각종 교란·파괴 공작이 무산되자 월북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월북 이후 김원봉은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하며, 북한 정권의 초대 내각에 참여했다. 괴뢰 정권의 초대 국가검열상을 맡았다. 대남공작도 자행했다. 독자적으로 인민공화당 조직을 통해 ‘반(反)대한민국 빨치산’을 키우고, 지휘했다.
 
 
  ‘대한민국의 敵’ 김원봉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김원봉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구성한 ‘공화국 남반부 해방 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 중앙선거지도부’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한반도 안에서 유일 합법성을 가진 대한민국 정부를 없애고 북한 정권으로 흡수하려 한 데 관여한 셈이다. 김원봉은 또 전쟁 당시 소위 ‘공화국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를 맡아 북한군 후방 보급을 지원했다. 1952년에는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미제의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다”며 훈장을 받았다. 같은 해, 노동상으로 자리를 옮겨 전시 노동력 동원 등을 책임졌다. 정전 후에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란 이유로 1958년에 숙청됐다. 그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요약하면, 김원봉은 ‘대한민국’을 반대했다. 월북해서 김일성 정권에 가담했다. 북한의 초대 내각에 참여해 ‘반국가단체’인 북한 정권 수립을 주도했다. 우리나라 북반부 영토를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정부를 참칭한 반국가단체의 지도부였다는 얘기다. 북한 초대 내각 발표 당시 언급된 순서를 보면, 김원봉은 총 17명 중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 ▲부수상 홍명희 ▲부수상 김책 ▲국가기획위원장 정준택 ▲민족보위상 최용건 등에 이어서 거명된다. 그만큼 요직을 맡은 셈이다.
 
  그토록 ‘민족’을 강조했던, 김원봉은 6·25 당시 김일성의 ‘반(反)민족 전쟁범죄’에 부역했다. 김일성이 남북한 통틀어 약 300만 명이 죽는 비극을 자행하는 동안 그는 후방에서 북한군 보급을 담당했다. 전시물자와 노동력을 동원해 대한민국에 대항했다. 전쟁 전후 빨치산과 남파간첩을 통해 남한 사회·경제를 교란하고, 선거를 방해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김원봉은 대한민국의 ‘적(敵)’이었다. 그의 ‘반국가’ 행적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국민이 세금으로 그를 기려야 할까.
 
 
  ‘김원봉 기념관’ 오해 자초하는 전시물
 
의열기념관 정문 옆에는 김원봉이 주인공인 모바일 게임의 홍보물이 부착돼 있다. 사진=월간조선
  9월 2일 오후 1시쯤, 경남 밀양시에 도착했다. 시내인 내이동으로 들어갔다. ‘약산로’란 도로명이 눈에 띄었다. ‘약산(若山)’은 김원봉의 호다. 밀양고등학교에서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 인근의 도로명을 ‘약산로’라고 명명했다. 해당 도로 연장은 약 570m다. 밀양시 관내 도로명 중 인명이 반영된 경우는 약산을 포함해 백민(白民, 김원봉의 고모부이자 의열단원이었던 황상규의 호)·사명(泗溟, 사명대사 법명)·석정(石正, 의열단원 윤세주의 호)·점필재(佔畢齋, 조선 중기 유학자 김종직의 호) 등 총 5개 도로다.
 
  밀양시는 2016년 11월, 김원봉 생가터를 매입해 총 12억원을 들여 지상 2층 규모의 의열기념관을 조성했다. 2018년에 개관한 기념관의 전시공간 면적은 약 304㎡다. 2022년에는 기념관 옆에 지하 1층·지상 3층 규모의 ‘의열체험관(건물 면적 1189㎡)’도 개관했다. 체험관 관련 사업비는 92억원이다. 2022년, 밀양시는 의열기념관과 의열체험관 등으로 구성된 ‘의열기념공원’ 관리에 약 3억원을 썼다.
 
  방문 당시 의열기념관의 우측 벽면에는 “기억은 산 자의 의무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선택한 대한독립의 영웅!”이란 문구와 함께 김원봉과 안중근·윤봉길·이봉창 의사 등의 사진이 있는 대형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기념관 정면에도 다수 김원봉 사진이 있었다. 정문 좌측에는 ‘약산 김원봉’이란 제목하에 “1919년 11월 10일 의열단을 창립하고 단장이 됨. 1926년 사이에 23차례의 크고 작은 대일 거사를 의열단이 기획하고 벌여나간 과정을 총지휘하였다”란 소개글이 있는 표지판이 있었다. 그 위에는 ‘XR(확장 현실) 체험형 모바일 게임’인 ‘기억의 사진관’ 홍보물이 게시돼 있었다. 이 게임의 주요 인물 역시 김원봉이다. 그 왼쪽으로는 역시 김원봉의 성명과 함께 그의 얼굴 모자이크, 김원봉의 과거 활동 당시 사진들이 건물 외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김원봉 북한 관련 행적은 전혀 없어
 
  의열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의 주요 전시물은 ‘의열정신의 본향, 밀양’이란 제목 아래 상영되는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 김원봉의 연설 영상이었다. 그 옆에는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 의열단 공약 10조’ ‘의열단 최고이상 4개 항목’ ‘의열단 강령 20개조’ 등 의열단 관련 전시물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 벽면에는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이란 글과 함께 조선의용대 시절 김원봉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기념관 2층은 의열단원 소개물이 대다수였는데, 이 역시 ‘김원봉’이 주를 이뤘다. 김원봉 사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그 많은 전시물 중 김원봉의 ▲반(反)대한민국 활동상 ▲동족상잔 전쟁에 가담한 일을 자세히 언급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2019년 3월, 밀양시가 낸 보도자료에 따르면 의열기념관 개관 후 1년 동안 이곳을 방문한 이는 총 1만2237명이다. 매주 월요일에 휴관하는 점을 고려하면, 1일 평균 39명이 다녀간 셈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있었던 까닭에 2020~2022년 방문객 수는 이를 웃돌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관 후 5년 동안 방문객은 넉넉히 잡아도 채 10만 명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많지 않은 인원이라고 해도 이들이 김원봉이란 인물의 ▲양면성 ▲독립운동 관련 공과 ▲북한 시절 행적 등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 의열기념관 전시물을 관람했다면, 김원봉을 그저 애국혼에 불타던 독립투사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영화 흥행에 기댄 ‘김원봉 장사’?
 
밀양시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에 김원봉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박차정의 벽화가 있다. 그 위에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을 연기한 조승우의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란 대사가 적혀 있다. 사진=월간조선
  그리 넓지 않고, 전시물도 많지 않은 의열기념관 내부를 1시간 이상 관람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의열기념관 정문에서 해천 건너 맞은편을 보니 김원봉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박차정(북한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의 조카)을 그린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을 연기한 조승우의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란 대사가 있었다.
 
  ‘항일독립운동 테마 거리’ 조성 시기, 당시의 밀양시 보도자료 내용(의열단은 단원 중 11명이 밀양 출신으로 그 중심에는 영화 〈암살〉의 주인공인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의사가 있다) 등을 고려하면, 〈암살〉(2015년), 〈밀정〉(2016년)이란 영화에서 각각 조승우, 이병헌이 연기한 ‘김원봉’이 화제가 된 이후 밀양시가 이를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조성한 게 아닌가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암살〉과 〈밀정〉의 관객 수는 각각 1270만 명, 750만 명이다.
 
  그 전까지 김원봉이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사, 해방 전후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김원봉’은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사실과 거리가 먼 가상의 얘기를 다룬, 말 그대로 ‘각색’된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등장하고, 해당 영화들이 흥행하면서 김원봉은 폭발적인 관심을 받게 됐다.
 
  이는 문재인(文在寅) 전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인 2015년 7월, 뜬금없이 영화 〈암살〉을 보고 나서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고 운운한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 전 대통령 관련 기사를 검색하면, 그 전까지 ‘문재인’이란 인물이 김원봉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일이 없다. 영화 관람 후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원봉’을 얘기했다. 문 전 대통령이 만일 영화 관람 이전부터 김원봉을 존경했다면, 그 숱한 인터뷰·공개발언 또는 사회적 관계망 글을 통해 그 생각을 밝혔을 테지만, 그런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또한 문 전 대통령에게 김원봉에 관한 기초 지식이 있었다면, 〈암살〉이란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후기를 내놓거나 2019년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김원봉과 조선의용대가 국군의 뿌리”란 식의 터무니없는 궤변을 늘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약산 김원봉 잊지 않겠습니다”
 
밀양독립운동박물관 외곽에는 정부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35명 그리고 훈장을 받지 못한 김원봉의 흉상이 함께 있다. 사진=월간조선
  경남 밀양시 내이동 소재 의열기념관 맞은편 김원봉·박차정 벽화가 있는 벽면은 다양한 사람들의 글이 있는 타일들로 장식돼 있었다. “김원봉 만세” “김원봉 아리랑” “김원봉 감사해요♡” “약산 김원봉 잊지 않겠습니다” 등의 ‘김원봉 추앙’ 글이 적지 않았다.
 
밀양독립운동박물관에도 의열단, 조선의용대와 관련해서 김원봉이 언급된 전시물이 다수다. 사진=월간조선
  의열기념관에서 나와 밀양시 교동에 있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 갔다. 의열기념관에서 2km가량 떨어진 곳이다. 밀양시립박물관과 함께 있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2008년에 개관했다. 사업비는 64억5200만원이다. 이곳 역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강조하는 만큼 곳곳에 ‘의열단장’ 또는 ‘조선의용대장’ 김원봉 관련 전시물이 많다. “부하를 위해 재산을 능히 바치고도 아까와하지 않고, 때로 부하의 궁핍을 들으면 자기가 입은 옷을 전당 잡히는~”이란 식으로 김원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글도 있다.
 
  밀양독립운동관 외곽에는 촛불을 형상화한 듯한, ‘선열의 불꽃(2007년~)’이란 조형물이 있다. 밀양시는 ‘조국해방에 대한 선열들의 염원’을 담아 해당 조형물을 조성했다고 한다. ‘선열의 불꽃’ 주위에는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36명의 흉상이 있다. 이 중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이는 35명이다. 유일하게 서훈되지 않았는데도 흉상이 설치된 이가 바로 김원봉이다. 이 흉상 기단의 ‘인물 소개’에도 김원봉의 월북 이후 반국가 행위에 대한 기술·평가는 없다. 결국, 밀양시가 만든 각종 시설의 전시물만 보면 김원봉은 그 누구보다 위대한 독립운동가, 후손이 길이 떠받들어야 할 ‘애국지사’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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