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 답사한 전 대공수사관, “‘현장’ 부근 비트 설치하기 알맞은 곳… 간첩이 신고 두려워 살해했을 것”
⊙ 민간인 5명 살해한 1978년 충남 무장간첩 사건과 유사?
⊙ 경찰과 일부 대구 기자 “범인 없는, 저체온으로 인한 사고사”
⊙ 와룡산 비극적 ‘현장’ 주변은 어린이 놀이터로 변해
⊙ 시신 발굴된 ‘현장’… 아무런 표식도 없고 추모 현수막도 버려져
⊙ 민간인 5명 살해한 1978년 충남 무장간첩 사건과 유사?
⊙ 경찰과 일부 대구 기자 “범인 없는, 저체온으로 인한 사고사”
⊙ 와룡산 비극적 ‘현장’ 주변은 어린이 놀이터로 변해
⊙ 시신 발굴된 ‘현장’… 아무런 표식도 없고 추모 현수막도 버려져
- 대구 와룡산 산자락에 세워진 ‘개구리 소년 추모 및 어린이 안전 기원비’.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 일어난 지 31년이 지났다. 1991년 3월 26일 대구 성서초교 학생 다섯 명이 도롱뇽 알을 줍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사라진 사건을 말한다. 온 국민의 걱정과 관심 속에 수사가 진행됐지만 소문만 무성할 뿐 밝혀진 게 없었다.
11년 6개월 만인 2002년 9월 26일 마을 인근 와룡산(299.6m)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러고 다시 20년이 흘렀다. 지금껏 사건의 실체에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했다.
지난 3월 “아이들이 살해됐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저(低)체온으로 인한 사고사가 확실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개구리 소년 변사 사건 30년 추적기’라는 부제를 단 《아이들은 왜 산에 갔을까》(국민일보 간)가 논란의 불씨가 됐다.
이 책을 펴낸 《국민일보》 대구경북본부장인 김재산 기자는 이런 주장을 폈다.
〈… 유골 발견 이후 20년 가까이 계속된 수사에서 밝혀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 아이들을 살해했다면 적어도 범행 동기나 도구 정도는 드러나야 하는데 말이다. 평생 가슴에 ‘한(恨)’을 품고 살아야 할 유족들이지만 ‘저체온사’ 등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귀를 열었으면 좋겠다.…〉(298쪽)
책에는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을 취재한 대구 지역 기자들의 주장도 담겨 있다. “이 사건은 범인이 없는, 저체온으로 인한 사고사가 확실하다. 경북대 법의학팀의 타살 발표는 당시 우리나라 국민 정서를 의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기자의 ‘저체온사’ 주장은 그렇게 탄력을 받진 못했다.
그 무렵,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익명의 작성자가 “사건 피해자 두개골의 손상 흔적을 보면 범행도구가 ‘버니어 캘리퍼스’임을 알 수 있다”고 기재해 화제가 되었다. 경기대 이수정 범죄심리학과 교수 또한 “두개골의 함몰된 부위가 다 콕콕 찍혀 있는 게 버니어 캘리퍼스의 날카로운 끝과 부합하는 것 아닌가”라며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개구리 소년 추모 및 어린이 안전 기원비’
그러고 몇 달이 흐른 지난 10월 베테랑 대공(對共) 수사관을 지낸 김학구(金鶴九) 전 경감에게서 전화가 왔다. 현역 시절 서울경찰청 보안수사대에서 근무하며 다수의 간첩을 검거했던 경찰관이다. 35년의 재직 기간 동안 50여 차례 표창을 받았다. 과장을 보태 표창 한 개에 외부에 공개 안 된 간첩 사건 하나가 엮여 있다고 보면 된다.
“김 기자! 나랑 대구 와룡산에 다녀옵시다. 예전부터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현직에 있을 때 수사하고 싶었는데 당시 북한 공작 지도부가 유력 야당 인사 주변인물을 포섭하라는 지령을 내려 이를 뒤쫓느라 수사를 포기했었어요. 최근 언론에 가여운 소년들 이야기가 나와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 자꾸 마음에 걸리나요.
“직업병이지요. 현장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이리 하여 1박 2일로 대구 와룡산을 찾아갔다.
와룡산 인근 선원공원에 도착하니 ‘개구리 소년 추모 및 어린이 안전 기원비’가 세워져 있었다. 가로 3.5m, 세로 1.3m, 높이 2m의 비교적 아담한 조형물이었다. 크고 작은 다섯 꽃송이 모양의 화강석이 보이고 그 아래 두 개의 둥근 돌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안식-품. 다섯 소년들이 엄마 품처럼 안전한 곳에서 포근히 안식하기를 염원하며, 재잘거리는 새소리와 여린 꽃의 앳된 미소를 닮은 어린 소년들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하다’
아담하고 소박하게 꾸몄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밋밋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기원비 뒷면에는 실종 당시 아이들의 나이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금껏 생존했다면 우철원은 44세(당시 13세), 조호연은 43세(당시 12세), 김영규는 42세(당시 11세), 박찬인은 41세(당시 10세), 김종식은 40세(당시 9세)의 중년이 되었으리라. 잠시 묵념을 하고서 조심스레 다가가 조형물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전국 郡 단위 지역은 모두 찾아가
지난 3월 28일에도 31주기 추모식이 이곳에서 열렸다. 대구 지역 일간지 《매일신문》에 관련 기사와 함께 우철원군의 아버지 우종우(74)씨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한창 꽃처럼 펴야 할 철원이가 부모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됐는데, 누구로부터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합니다. 이유라도 알고 싶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버지의 심장은 계속 타들어가고 있었다. 다섯 소년의 행방을 찾아 유족들은 트럭을 타고 전국을 헤맸었다. 전국 군(郡) 단위 이상의 지역은 모두 가봤다고 한다.
그런데 꼭 20년 전인 2002년 9월 26일 뜻밖의 장소에서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불미골’에서 동쪽으로 1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저체온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뒀지만 경북대 법의학팀은 아이들의 두개골에 난 흔적 등을 근거로 타살이라 결론 내렸다.
기자는 김 전 경감과 함께 실종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곳을 더듬어 찾아갔다. 매미 소리가 계속 들리고 간혹 비둘기 소리도 났다. 참나무, 밤나무, 아카시아가 제법 잘 자라 있었다.
지난해 3월 조성된 ‘와룡 숲속 놀이터’가 보였다. 7~12세 전용의 자연친화적인 놀이기구가 많았다. 평일 오후여서인지 아이들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땀을 연신 닦으며 중년 성인 몇몇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햇살이 뜨거웠다. 개구리 소년도 이 참나무 숲을 이렇게 거닐었을까. 그때는 지금보다 녹음이 옅었을까.
‘직원이 꿈자리가 어수선해 그만뒀다’
등산객들에게 ‘현장’ 위치를 물었으나 누구도 아는 이가 없었다. 숲속 놀이터를 청소하는 직원 역시 “저쪽 어디라고 들었다”고만 말했다. 비극적인 장소를 모든 이가 알 필요는 없으리라. 직원이 덧붙여서 이런 말을 전했다.
“이전에 여기서 근무하던 직원이 꿈자리가 어수선해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예.”
다섯 소년이 출렁다리, 구름다리, 스카이 스테이션을 뛰어다녔으면 얼마나 즐거웠을까. 굳이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가지 않았을 텐데…. 이 비극적 현장 주변에 놀이터를 만든 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추모 공간보다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공간으로 지극한 슬픔을 극복하려는 의도를 담았을까.
그런데 어린 아이들이 이곳까지 올라오려면 제법 땀을 흘릴 것 같았다. 산이 어느 정도 가파르고 등산길을 300m나 올라야 한다.
‘현장’에서 듣는 학교 종소리
밧줄로 이어진 등산로에서 벗어나 숲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갈잎이 숲에 가득하다. 바닥이 미끄러웠다. 자그마한 크기의 도토리가 뒹굴고 있었다. 도토리 한 알을 주웠다. 그러곤 호주머니 안에 넣었다.
계곡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움푹 팬 곳에 이르렀다. 제법 큰 바윗돌이 보였다. 과거 기사에 실린 ‘현장’ 사진과 대조하며 주변을 더듬었다. 아이들 시신이 여기 어디쯤 묻혔을 것 같은데 정확한 장소를 특정하긴 어려웠다.
‘현장’ 아래 학교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었다. 시신이 발견됐을 당시(2002년)엔 신축공사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현장’은 학교에서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개구리 소년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성서초등)와는 3.5km가량 떨어져 있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다.
실종 당일인 1991년 3월 26일 밤의 대구 지역 최저 기온은 섭씨 3.3도였고 빗발이 5.8~8.2mm가량 뿌리는 상황이었다. 바람도 다소 많이 불었다고 한다. 산속인 점을 고려하면 체감온도는 영하에 가까웠으리라. 당시 경찰은 ‘산에서 길을 잃은 소년들이 움푹 팬 곳을 피신처 삼아 들어가 서로 부둥켜안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대구 기상관측소의 사건 당시 기상
-1991년 3월 26일 평균기온: 8.2℃, 최고기온: 12.3℃, 최저기온: 3.3℃, 평균운량: 7.5, 일강수량: 5.8mm
-3월 27일 평균기온: 6.0℃, 최고기온: 7.8℃, 최저기온: 4.6℃, 평균운량: 10.0, 일강수량: 2.4mm〉
산을 타고 조금만 더 내려가면 마을이 나오는데 굳이 산 중턱에서 동사했을 리 없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와룡산이 높은 것도, 골짜기가 깊은 곳도 아닌데 숲이 무성하지 않은 3월에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에서 아이들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도 석연찮다. 타살 가능성과 함께 시신이 옮겨졌을 것으로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어느 것도 31년째 납득할 만한 단서가 드러나지 않았다.
‘현장’ 주변, 은폐하기 좋은 곳
김학구 전 경감이 소년들의 시신이 발견된 ‘현장’ 주변을 둘러보더니 “‘촉’이 온다”고 했다.
땅과 돌, 나뭇잎 등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등산용 삽으로 직접 주변 일대를 파보았다. 그러곤 주저앉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연인원 30여만 명의 경찰 인력을 동원해도 찾지 못했던 곳입니다. 은폐하기 좋은 곳이라는 말이지요. 보통 ‘비합법 숙영(宿營)’을 위해 비트(비밀 아지트)를 팔 때 은밀하게 팝니다.”
그는 “‘현장’ 부근이 비트를 설치하기 알맞은 곳”으로 추정했다. ‘현장’은 비나 장마가 쏟아지면 꽤 많은 물이 흘러갈 만큼 땅이 움푹 패 있었다. 과거엔 계곡물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엔 군부대(사격장)가 있었다는데 이곳에다 굳이 비트를 쳤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가가 산 아래 있고, 군부대가 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절한 곳은 아니라는 얘기죠.”
― 만약 간첩이 와룡산 자락에 비트를 쳤다면 그 이유는 뭘까요.
“간첩이 부여받는 임무는 대개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작원을 접선해 대동 복귀하는 것이죠. 혹은 누군가를 포섭하기 위해 접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구리 소년이 실종될 무렵 이 부근에 공작원들이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을지 모르죠.”
1990년대 北 영감조·모자조 간첩 남파
― 사건 발생 시점이 1970년대가 아니잖아요. 1990년대라는 점에서 굳이 간첩을 보냈을 개연성은 떨어지지 않나요.
이 질문은 잘못된 물음이다. 남파간첩 김동식(1962~)은 1990년 5월 제주도 서귀포 해안을 통해 한국에 침투한 후 1980년부터 서울에 잠입해 활약하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이선실(본명 이선화, 권력서열 19위)을 접선한 일이 있다. 김동식은 이선실과 함께 그해 10월 북한으로 귀환했다. 1995년 9월 제주도 해안을 통해 2차 침투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의 행적은 《월간조선》 2012년 4월호와 2013년 7월호, 김동식이 쓴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기파랑)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는 더 있다. 2010년 4월 북한 노동당 비서인 황장엽을 살해하라는 지령을 받고 내려온 남파간첩 2명이 구속된 사례가 있다. 앞서 2006년 태국, 필리핀 등을 거쳐 잠입한 ‘직파간첩’ 정경학이 구속된 일도 있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북한과 화해모드를 이어가던 노무현 정부에서 처음 검거한 직파간첩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북한은 대남 공작 업무를 총괄 지휘하는 정찰총국에서 간첩을 파견한다.
정찰총국은 대남·해외공작 활동을 총괄하는데 공작원 양성이나 침투는 물론 정보수집, 요인암살, 납치, 테러 등 임무를 수행한다.
김 전 경감의 말이다.
“1980년대 북한 공작부서는 청년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주요 인사들을 포섭, 지하당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당시 386세대들에게 접근한 것도 이런 이유였죠.
1990년대에도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만 남파한 사례가 있습니다. 검거된 간첩 증언에 따르면, 북한은 ‘영감조’와 ‘모자(母子)조’를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영감조는 부자(父子)로 위장한 공작조인데 나이가 많은 월북자에다 젊은 ‘안내원’을 붙여 남파해 서울서 활동했다고 해요. 또 모자 공작원이 경기도에서 활동한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왜 혼자 보내지 않느냐? 나이가 많은데다 변절할 수가 있어서 안내원과 동행시킨다는 겁니다.”
“간첩, 최소 2명 이상이었을 것”
그에 따르면 안내원은 북한 노동당 대외연락부 산하 작전부에서 선발되었다고 한다. 이들을 ‘독고다이’라는 은어로 불렀다.
북한 공산 지도부는 1960년대에 이르러 남조선 해방이라는 미명하에 월북자 출신 중에서 일부를 선발해 ‘금성군사 정치대학(695부대)’에 입교시킨 후 ①사상교육(김일성 혁명·역사·주체·철학·자본주의 비판 등) ②실무교육(남한 정세·지하당 조직 건설 등) ③훈련(사격훈련·수영·비트 건설·통신) 등의 교육을 2년여에 걸쳐 시켰다.
“하지만 월북 또는 자진 월북자들의 고령화로 남파 공작원이 고갈 상태에 이르자 활동 중인 공작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하에 1970년대부터 노동당 대남사업총국 산하에 ‘작전부(124부대, 283부대)’를 증설, 젊은 엘리트들을 선발했어요.
이들이 바로 ‘안내원’이죠. 남파 공작원의 신변 안전(남파 후 공작원의 변절 방지)을 위해 2인 1조로 내려보냈을 겁니다. 개구리 소년들이 간첩의 손에 살해되었다면 간첩은 1명이 아니라 최소 2명 이상이었을 거예요.”
대남공작원들은 주로 해안(제주와 서해안)으로 침투한 뒤 현지에서 약 1개월간 적응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흔히 일본, 싱가포르, 홍콩 등지에서 구입한 등산장비를 지급받는다. 가방 밑창에는 통신기기 등을 숨겨두는데 물이 스며들지 않게 비닐로 포장한다. 가방 옆에는 비트용(등산용) 삽, 또는 갈고리, 지팡이 등을 매달아 등산객으로 완벽하게 위장한다. 물론 허리춤에 권총을 은익한 채로.
“삽의 뾰족한 부분으로 급소 가격했을 것”
김 전 경감의 계속된 말이다.
“아마도 2인 1조 공작조가 와룡산 기슭 비트에 숨어 있다가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왔던 아이들과 마주치지 않았을까요? 신고가 두려워 현장에서 위협, 아이들을 비트 속으로 몰아넣고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살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어요.
등산용 삽을 살인도구로 이용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처음에는 삽날이나 곡괭이 앞날로 내려쳤으나 바로 실신하지 않자 삽의 뾰족한 부분으로 급소를 가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따르면 공작원들은 남파되기 전에 함북 청진과 나남, 평남 평성 등지에서 비합법 훈련과 반합법 훈련, 야간 100리 강행군, 사격, 장애물 극복, 태권도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보통 야간 100리 강행군 후에 야간사격을 하고 비트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잠을 잔다. 그러고 이튿날 오전 비트에서 나와 격술(擊術)과 장애물 극복 훈련 등을 받는 강행군을 거치며 전사로 변모한다.
― 와룡산 아래에 남파 공작원이 접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었다는 건가요.
“김대중 정권 당시 소각 처분토록 지시한 6·25 중 월북자 명단을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 그 말씀은 월북자 가정을 잠재적인 북한 동조자로 취급할 우려가 있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내부적으로 수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명단이 지금도 존재하는지는 의문입니다만….”
잠시 후 이렇게 속내를 털어놨다.
“개구리 소년이 실종되고 오랫동안 사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 대남공작원 소행으로 보고 수사해보려 했지만 다른 급한 ‘역용(逆用·간첩을 포섭해 이중간첩으로 활용하는 공작)공작’ 수사에 참여하느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30년이 지나 이 사건을 밝히려는 것은 피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소년들의 원혼을 달래려 함입니다. 북한 공작지도부의 이 악랄한 수법을 세상에 알리고자 깊이 숙고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버려진 현수막
‘현장’ 주변을 거닐어보았다. 표석이라도 세워야 옳을까. 그냥 가슴에 묻어야 옳을까.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산비탈 한쪽에서 버려진 검은색 현수막을 찾을 수 있었다. 28주기(2019년 3월 26일) 추모식 때 사용한 것이었다. 왜 현수막을 되가져 가지 않고 현장 부근에 버려둔 것일까. 빛바랜 조화도 여기저기 있었다. 죽은 나무들, 목책이 쓰러져 있고 콘크리트로 된 배수로도 보였다. ‘현장’ 바로 아래 학교를 내려다보았다. 학생들은 이 산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두려움을 느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까. 한때 온 국민이 안타까운 소년의 죽음 앞에 함께 울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학교 선생님은 이 비극을 지금도 가르치고 있을까. 무엇보다 2인 1조 간첩의 소행이 맞을까.
황의호 원장의 경험과 개구리 소년 사건
충남 보령의 보령문화원 황의호(黃義虎) 원장은 대구 개구리 소년 사건을 간첩 소행이라 믿고 있다. “생뚱맞게 간첩 사건을 들먹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1978년 충남 일대에서 직접 경험한 일련의 간첩 행적과 비교해 모종의 관련성이 있고, “석연찮은 것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그는 공주사대를 졸업한 뒤 중·고교 교사를 거쳐 대천여고 교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쳤다. 향토 문화재 보존 발굴에 이바지한 공로로 문화재청이 수여하는 ‘대한민국 문화유산상’을 수상한 일도 있다.
황의호 원장에 따르면 보령에서는 6·25 이후 수십 차례의 간첩 침투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1977년 8월 22일 발생한 사건이 그의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서해안 안면도를 마주한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가숭구지 해안’으로 간첩이 침투해 공작 임무를 수행하고 복귀한 일이 있다.
이듬해 보령 천북면 학성리 해안으로 침투(추정)해 은신하다가 홍성군 광천읍에 출몰해 많은 민간인을 살해하고 북으로 돌아간 일도 있다. 또 1980년 6월 20일에는 김광현 외 9명의 간첩이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해안으로 침투하다가 발각되어, 김광현은 체포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되었다.
황 원장은 “이 중 1977년과 1978년 일어난 간첩 사건은 제가 비교적 젊은 시절, 충남의 향토사단인 32사단 포병단에 근무할 때 겪은 사건이라 비교적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8년에 일어난 사건은 간첩들이 북으로 복귀할 때 그간 행적을 기록한 수첩을 떨어뜨려 활동 상황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어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장을 찾아 주민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기록도 하였습니다.
우연히 대구 개구리 소년이 발견된 현장에서 추모식을 거행한다는 기사를 접하게 됐지요. 78년 충남 일대에서 일어난 간첩 사건과 비추어볼 때, 침투한 북한 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게 됐어요. 김 기자! 제가 보고서 한 편을 썼는데 읽어보시겠어요?”
홍성 광천 말봉산 사건
그 기록물이 〈1978년 충남 광천 침투 간첩 사건으로 본 대구 개구리 소년 사건〉이다. 오랫동안 발로 뛰고 눈으로 쓴 보고서였다. 기자는 흥미롭게 읽어보았다.
황 원장은 “개구리 소년 사건을 들먹이는 것이 시대에 역행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더라도 역사는 기록해야 되겠기에 글을 썼다”고 했다.
황 원장에 따르면 1978년 11월 4일 저녁 7시경 3명의 무장간첩이 보령시 천북면 학성리 해안으로(추정) 침투해 봉화산(해발 203m)에 머물렀다. 부근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황 원장이 무장간첩들의 행적을 시간대별로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간첩들이 작성한 일지(日誌·황 원장의 표현대로라면 수첩) 덕분이다. 남파간첩들은 미군 레이더 기지를 정찰하러 왔다가 충남 홍성 광천, 공주, 평택, 오산 등지에서 민간인 5명을 살해하고 북한과 무려 30회 이상 교신한 후 홀연히 북으로 돌아갔다.
의도인지 실수인지 모르나 그간 행적을 소상히 적은 ‘일지’를 떨어뜨렸다. 이로 인해 “각 지역 경비 책임자들 사이에서 곡소리가 났다”고 한다.
다시 78년 11월로 돌아가 보자. 간첩들은 홍성군 광천읍 소암리 말봉산 아래 소암마을로 이동해 2박 3일가량 머물렀다. 황 원장은 “간첩이 머문 말봉산은 산은 낮지만 미군 통신기지가 한눈에 보이고 사진 찍기에 알맞은 곳”이라 했다.
중학생들과 어울린 간첩들
황 원장은 최근 몇 년 사이 이 지역을 찾아가 꼼꼼히 주민들의 증언을 채록했다. 이들에 의하면 간첩들은 말봉산 동쪽, 광천읍 소암리 ‘윗소롱굴 골짜기’(경사가 급하고, 골이 깊게 팸)에 은거하면서 대담하게도 인근 마을의 중학생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당시 중학교 2학년 학생(1963년생) 5~6명은 공부도 싫고 학교도 싫어 집에서는 학교 간다고 하고 산에 올라가 화투놀이 등을 하고 놀았는데 한번은 간첩들과 어울려 같이 놀았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 간첩들이 정보기관 요원인 줄 알고 따랐으며 술이나 라면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하고 같이 화투도 쳤다고 한다. 간첩들은 화투도 아주 잘 쳤다고 증언했다. 황 원장의 말이다.
“간첩과 어울렸던 당시 학생 김영호(가명)의 증언에 의하면, 간첩은 자신을 ‘광천상고를 나와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도청(盜聽)하러 내려왔다’면서 무전기를 꺼내 ‘이렇게 하면 전화하는 내용을 다 들을 수 있다’고 자랑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보니 간첩은 한 사람이 아니고 3명이었다고 해요.”
11월 7일 간첩들이 나무하러 온 마을사람 3명에게 노출되었다. 간첩들은 나무하러 오지 말라고 경고했고 마을사람들은 “당신들은 산주(山主)도 아니고, 아래에 있는 인삼밭 주인도 아닌데 왜 오지 말라고 하느냐”고 따졌다고 한다. 이들은 오후에 다시 나무하러 갔고 그만 변을 당했다.
숨진 2명은 간첩들의 은신처 부근에서 나무를 하였고, 나머지 1명은 이들과 떨어져 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비명 소리가 나기에 산림 감시원한테 들켜 혼나는 줄 알고 집으로 다급히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나무하러 간 2명이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자 방위병인 아들을 통해 경찰에 신고했다.
흉부와 복부 대검으로 난자하고…
그날 밤 10시쯤 시신 2구를 경찰이 찾았다. 옷이 벗겨진 채로 흉부와 복부가 대검으로 잔인하게 난자당했고 얼굴엔 둔기로 맞은 듯한 상처가 있는 등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되었다. 시신은 땅을 살짝 파고 소나무 가지를 꺾어 위장해놓았다.
황 원장은 “경찰이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하였으나, 급소만 예리한 흉기로 찌른 것이 수상하여 군부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군인들이 간첩이 은신했던 골짜기에서 대검집, 의복, 압축식량, 카메라, 망원렌즈 등 58점의 간첩 유류품을 발견해 간첩의 소행으로 확정하고 추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유류품들은 흙과 낙엽으로 위장해 은밀히 묻혀 있었다고 한다. 11월 8일, 충남 일대에 실제 상황인 진돗개 비상이 발령되었다.
그 무렵, ‘젊은’ 황 원장도 32사단 수색중대에 배속되어 헌병대와 함께 매일 수색 활동을 했다. 낮에는 수색하고, 밤에는 연대 밖에 있는 헬리콥터 경비를 섰다. 당시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행정병으로 이루어진 5분 대기조 또한 사단 수색중대에 배속되었다. 심지어 신병교육대의 교육생도 방어선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한편, 4년 뒤인 1982년 2월 어느 날, 봉화산에 묻어놓은 유류품이 당시 칡뿌리를 캐던 마을 소년에 의해 발견되었다.
산 정상의 평평한 봉화대지(大地) 동쪽 4~5m 지점이었다. 정상부와 달리 경사지인데 칡뿌리 아래에 운동화, 오리발, 비닐에 싸인 쌀 등을 묻어두었다. 황 원장은 “아마도 복귀할 때 이용하려고 묻어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했다.
청양 후덕리 사건과 공주 신영리 사건
청양군 운곡면 후덕리 사건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그해 11월 11일 오후 5시쯤 후덕리 절굴에 살던 주민 명제춘(82)씨가 솔잎과 솔가지를 주우려 산에 갔다가 가파른 언덕에서 간첩 3명과 마주쳤다. 간첩은 지게 진 명씨의 멱살을 잡고 산으로 끌고 갔다. 명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언덕을 넘으면 으슥하고 골짜기가 많아 죽을 것을 직감하였다”고 황 원장에게 털어놨다.
그는 앞으로 걷고 간첩은 뒷걸음질 치는 자세가 되어 걸어가는데 멱살 잡은 손이 느슨해졌을 때 손을 비틀어 뿌리치고 지게를 벗어던져 산 아래로 달아났다.
마을에 도착해 청양경찰서에 신고했지만 “보상금을 타려 거짓말을 한다”며 사람들이 믿지 않더란다. 훗날 간첩들이 작성한 ‘수첩’이 발견되고 나서 명씨의 주장을 믿게 되었다. 경찰은 그에게 표창장과 부상으로 식기(食器)를 주었다고 한다.
나흘 뒤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에서 민방위 대원 한 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신이 발견된 날은 11월 16일이었다.
신영2리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날 15일 오전 6시25분쯤 이지화(가명·당시 39세)씨는 원래 민방위 대원이라 예비군 초소에서 근무할 의무는 없지만 마을 청년들을 도와주려 집을 나섰다고 한다. 양초를 사러 가던 예비군과 만난 후 행방불명되었는데 이튿날 인근 산골짜기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현장서 100m 떨어진 논바닥에 혈흔이 낭자한 것으로 보아 간첩들이 살해 후 시신을 옮긴 것으로 추정되었다. 황 원장에 따르면 간첩들의 ‘일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적혀 있었다.
〈11월 15~16일 : 초저녁에 대도로를 횡단하려다가 잠복하러 나가는 자와 조우, 대화하다가 감쪽같이 단도로 처단한 후 매몰하고 흔적 처리. 북쪽 능선을 따라 계속 행동함.〉
황 원장은 “시신을 유기한 곳은 산기슭의 골짜기로, 깊게 팬 골짜기에 시신을 놓고 돌과 흙, 낙엽으로 위장하였다. 이때 흙은 골짜기 옆 낭떠러지의 흙을 담아다가 덮어 흔적을 없앴다”고 했다. 홍성군 광천읍 말봉산에서 주민 2명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매장한 방식과 유사했다고 한다.
경기도 평택 사건과 오산 사건
평택 사건은 간첩들이 남긴 ‘수첩’에만 존재하는 사건이다. 살해된 민간인이 발견되지 않았고 간첩신고도 없었다.
1978년 11월 22일 오후 7시쯤 간첩들은 민간인 2명을 만나 1명은 살해하고 1명은 놓쳤다. 황 원장은 “가게에서 빵까지 구입하며 민간인 여러 명을 만났다. 민간인을 살해한 이유는 신분이 노출됐기 때문이다”고 했다.
간첩은 이튿날인 11월 23일 오후 6시쯤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양산리(현 오산시 양산동) 야산에서 송중섭(당시 20세·가명)씨를 살해한 후 매장했다.
황 원장이 만난 송씨의 형과 마을주민에 따르면 송씨는 논에서 살해되어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가시덤불 속에 시신이 들어갈 만큼 땅을 파내고, 시신을 넣은 후 낙엽으로 덮어놓았다고 한다.
이때 파낸 흙은 다른 곳에 버려 감쪽같이 숨겼다. 수색하던 사람도 가시덤불을 쳐다만 보았기에 찾기 어려웠다. 황 원장은 “시신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취사 흔적이 발견되었다. 배추 속을 파내고 쌀을 넣어 밥을 해 먹었다.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가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당시 간첩들이 남긴 일지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23~24일 : 초저녁 숙영지에서 내려오다 사민과 조우되어 처단하고 매몰함.〉
황 원장의 말이다.
“이런 식으로 양민 5명을 살해한 간첩들은 1978년 12월 4일 저녁, 경기 김포에서 북한에서 보낸 2명의 안내원과 만나 함께 북으로 복귀하였어요. 이때 잠수복으로 갈아입다가 남한에 침투하여 행동한 내용을 적은 수첩을 떨어뜨려 그들의 행적이 자세히 밝혀지게 되었어요.
1978년 11월 4일 충남 보령 천북면으로 침투하여 광천에서 노출된 간첩들의 행동을 보면, 신분이 노출되면 반드시 살해합니다. 얼마 후에 밝혀지더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살해하는 것이고, 살해하면 반드시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시신을 숨겨요.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개구리 소년 사건과 유사성
황의호 원장은 대구 개구리 소년 사건을 1978년 11월 무장간첩 사건과 비교해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아래의 주장은 기자의 생각을 보태지 않은 황 원장의 견해임을 미리 밝혀둔다.
〈1991년 3월 26일 오전 대구 와룡산으로 침투한 3명의 무장간첩은 노출을 피해 숙영을 하는 등 비합법 행동 중이었다. 이때 우연히 도롱뇽 알을 주우러 온 어린이 5명과 만나게 되어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산을 돌아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1978년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에서 숙영한 무장간첩도 미군 통신부대 맞은쪽에 있는 홍성군 광천읍 말봉산에서, 공부하기 싫어 산에 올라온 광흥중 2학년 학생들과 놀았다. 화투도 치고, 라면·술 심부름도 시켰다. 학생들을 해치지 않은 이유는 학생들이 간첩인 줄 모르고, 중정 요원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개구리 소년들이 중학생들과 달리 살아남지 못한 이유는, 무장간첩 신분이 노출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떤 어린이가 간첩 아니냐고 물었거나, 간첩인 것 같다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이 노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초등생들이면 교육을 철저히 받아, 간첩을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자기들의 생각을 말해버렸을 수도 있다.
광천에 침투한 간첩도 학생들은 죽이지 않았지만, 오후에 나무하러 온 주민 2명은 살해했다. 무장간첩의 경우 비합법 행동을 할 때 노출되면 지체 없이 살해하고 시신을 감쪽같이 처리한다. 공주 신영리, 오산 양산동에서도 신분이 노출되어 살해한 것이다.
남파간첩이었다가 자수한 박원남씨의 수기(《동아일보》 1972년 6월 30일 자)에 의하면 ‘비합법 구간에 나타나는 자는 어린이나 노인이나 용서 없이 처단하고 흔적을 감추어야 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살해하는 데 총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총소리가 나면 바로 노출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1978년 무장간첩도 5명이나 민간인을 죽였지만 총기를 쓰지 않았다. 아마도 칼로 찌르거나 야전삽으로 가격하고 목을 졸랐을 것으로 보인다.
개구리 소년을 살해한 후, 시신을 감쪽같이 유기할 장소를 물색했을 것이다. 흙을 파기 쉽고 묻은 뒤에 흙을 뿌려 놓으면 위장하기도 쉬운 침식된 골짜기를 찾은 것이다. 광천에 침투한 간첩들도 주민 2명을 살해한 후 솔가지 등으로 은닉, 도주하면서 58점의 물건을 대구 개구리 소년들이 발견된 장소와 비슷한 곳에 묻었다.
공주 신영리에서 살해한 사람도 국도변 개활지, 초소 부근에서 살해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시신을 100m가량 옮겨 침식된 골짜기에 묻었다. 오산 양산동에서 살해한 사람도 시신을 옮겨 의외의 장소에 매장했다.
무장간첩들은 살해 방법이나 시신의 처리 등을 전문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찾아내기가 정말 어렵다. 항상 상상을 초월한 곳에 시신을 매장한다. 대구 소년들의 시신 매장이 그렇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수색을 했어도 찾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어린이들을 살해하고 매장한 날, 비까지 적당히 내려 완벽한 위장을 도와주었다.〉
대구 ‘현장’ 상황은…
남파간첩 김동식이 쓴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를 보면, 비합법 숙영을 위해 비트를 팠던 이야기가 나온다. 훈련 중 김동식이 일부러 가시가 많이 돋아 있는 찔레꽃 넝쿨 속을 헤집고 들어가 비트를 팠더니, 비트를 수색·검열하는 북한 지도원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작원들은 놀라운 솜씨로 감쪽같이 은신처를 만든다. 경찰이 와룡산 일대를 그렇게 뒤졌지만 11년 6개월 뒤에야 시신이 발견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서울로 돌아온 얼마 후 김학구 전 경감에게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연필로 쓴 원고 뭉치를 기자에게 건넸다. 당시의 ‘현장’ 상황에 대해 쓴 글이었다. 일부를 소개한다.
〈… 그날 낮, 남파 공작원들은 주변 야산에 들어가 비트를 설치하고 휴식을 취했다. 목적지는 대구시 달서구 재남(在南)가족이 거주하는 와룡산.
해가 저물자 하산해 대로는 피하고 소로 또는 오솔길을 선택해 와룡산에 도착했다. 골짜기 개울 옆 후미진 곳을 찾아 비트를 설치하고 다가오는 밤을 기다리며 ‘대상 가옥 침투 및 대상 접촉 시 대화 구상’ 등을 논의 중 수일간 보행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때 어린 소년 5명이 와룡산 개울을 따라 도롱뇽 알을 채취하면서 산속으로 올라가던 중 이들이 자고 있는 비트까지 접근했다. 당황한 나머지 신고가 두려워 현장에서 위협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들이 입고 있던 윗옷을 벗게 하고 벗은 옷의 단추 혹은 자크를 채워 거꾸로 머리에 쓰게 한 다음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등을 대게 했다. 양 소매는 목 뒤로 넘겨 목을 감싸서 묶으면서 서로 행동을 볼 수 없게 한 다음 죽인 것으로 추정한다. …〉
양심의 소리
‘1991년 3월 26일’ 이후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한 대구 개구리 소년 사건을 지금 꺼내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건을 잊지 않고 있고 의문을 던지며 참혹한 죽음 앞에 말을 건다. “최첨단 수사기법을 동원한 경찰의 재수사”가 가능할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김학구 전 경감과 황의호 원장의 주장은 남들이 모두 아니라고 해도 양심에 따라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입을 닫고 눈을 감아버리면 되지만, 양심이 내는 소리에 반응할 뿐이다
이 사건에 30년을 매달려온 경찰이 보기에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내는 양심의 소리, 상식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길 권한다.⊙
11년 6개월 만인 2002년 9월 26일 마을 인근 와룡산(299.6m)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러고 다시 20년이 흘렀다. 지금껏 사건의 실체에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했다.
지난 3월 “아이들이 살해됐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저(低)체온으로 인한 사고사가 확실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개구리 소년 변사 사건 30년 추적기’라는 부제를 단 《아이들은 왜 산에 갔을까》(국민일보 간)가 논란의 불씨가 됐다.
이 책을 펴낸 《국민일보》 대구경북본부장인 김재산 기자는 이런 주장을 폈다.
〈… 유골 발견 이후 20년 가까이 계속된 수사에서 밝혀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 아이들을 살해했다면 적어도 범행 동기나 도구 정도는 드러나야 하는데 말이다. 평생 가슴에 ‘한(恨)’을 품고 살아야 할 유족들이지만 ‘저체온사’ 등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귀를 열었으면 좋겠다.…〉(298쪽)
책에는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을 취재한 대구 지역 기자들의 주장도 담겨 있다. “이 사건은 범인이 없는, 저체온으로 인한 사고사가 확실하다. 경북대 법의학팀의 타살 발표는 당시 우리나라 국민 정서를 의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기자의 ‘저체온사’ 주장은 그렇게 탄력을 받진 못했다.
그 무렵,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익명의 작성자가 “사건 피해자 두개골의 손상 흔적을 보면 범행도구가 ‘버니어 캘리퍼스’임을 알 수 있다”고 기재해 화제가 되었다. 경기대 이수정 범죄심리학과 교수 또한 “두개골의 함몰된 부위가 다 콕콕 찍혀 있는 게 버니어 캘리퍼스의 날카로운 끝과 부합하는 것 아닌가”라며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개구리 소년 추모 및 어린이 안전 기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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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26일 오전 대구 경북대병원에서 개구리 소년들의 부모들이 합동장례식에서 영정을 들고나오고 있다. 실종 13년 만에 장례식을 치렀다. 사진=조선DB |
“김 기자! 나랑 대구 와룡산에 다녀옵시다. 예전부터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현직에 있을 때 수사하고 싶었는데 당시 북한 공작 지도부가 유력 야당 인사 주변인물을 포섭하라는 지령을 내려 이를 뒤쫓느라 수사를 포기했었어요. 최근 언론에 가여운 소년들 이야기가 나와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 자꾸 마음에 걸리나요.
“직업병이지요. 현장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이리 하여 1박 2일로 대구 와룡산을 찾아갔다.
와룡산 인근 선원공원에 도착하니 ‘개구리 소년 추모 및 어린이 안전 기원비’가 세워져 있었다. 가로 3.5m, 세로 1.3m, 높이 2m의 비교적 아담한 조형물이었다. 크고 작은 다섯 꽃송이 모양의 화강석이 보이고 그 아래 두 개의 둥근 돌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안식-품. 다섯 소년들이 엄마 품처럼 안전한 곳에서 포근히 안식하기를 염원하며, 재잘거리는 새소리와 여린 꽃의 앳된 미소를 닮은 어린 소년들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하다’
아담하고 소박하게 꾸몄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밋밋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기원비 뒷면에는 실종 당시 아이들의 나이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금껏 생존했다면 우철원은 44세(당시 13세), 조호연은 43세(당시 12세), 김영규는 42세(당시 11세), 박찬인은 41세(당시 10세), 김종식은 40세(당시 9세)의 중년이 되었으리라. 잠시 묵념을 하고서 조심스레 다가가 조형물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전국 郡 단위 지역은 모두 찾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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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와룡산 개구리 소년들의 시신이 발견된 산기슭 주변의 모습이다. 나뭇잎이 가득 쌓여 있다. |
“한창 꽃처럼 펴야 할 철원이가 부모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됐는데, 누구로부터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합니다. 이유라도 알고 싶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버지의 심장은 계속 타들어가고 있었다. 다섯 소년의 행방을 찾아 유족들은 트럭을 타고 전국을 헤맸었다. 전국 군(郡) 단위 이상의 지역은 모두 가봤다고 한다.
그런데 꼭 20년 전인 2002년 9월 26일 뜻밖의 장소에서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불미골’에서 동쪽으로 1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저체온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뒀지만 경북대 법의학팀은 아이들의 두개골에 난 흔적 등을 근거로 타살이라 결론 내렸다.
기자는 김 전 경감과 함께 실종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곳을 더듬어 찾아갔다. 매미 소리가 계속 들리고 간혹 비둘기 소리도 났다. 참나무, 밤나무, 아카시아가 제법 잘 자라 있었다.
지난해 3월 조성된 ‘와룡 숲속 놀이터’가 보였다. 7~12세 전용의 자연친화적인 놀이기구가 많았다. 평일 오후여서인지 아이들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땀을 연신 닦으며 중년 성인 몇몇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햇살이 뜨거웠다. 개구리 소년도 이 참나무 숲을 이렇게 거닐었을까. 그때는 지금보다 녹음이 옅었을까.
‘직원이 꿈자리가 어수선해 그만뒀다’
등산객들에게 ‘현장’ 위치를 물었으나 누구도 아는 이가 없었다. 숲속 놀이터를 청소하는 직원 역시 “저쪽 어디라고 들었다”고만 말했다. 비극적인 장소를 모든 이가 알 필요는 없으리라. 직원이 덧붙여서 이런 말을 전했다.
“이전에 여기서 근무하던 직원이 꿈자리가 어수선해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예.”
다섯 소년이 출렁다리, 구름다리, 스카이 스테이션을 뛰어다녔으면 얼마나 즐거웠을까. 굳이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가지 않았을 텐데…. 이 비극적 현장 주변에 놀이터를 만든 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추모 공간보다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공간으로 지극한 슬픔을 극복하려는 의도를 담았을까.
그런데 어린 아이들이 이곳까지 올라오려면 제법 땀을 흘릴 것 같았다. 산이 어느 정도 가파르고 등산길을 300m나 올라야 한다.
개구리 소년 변사 사건 일지 ▲1991년 3월 26일=소년 5명 “도롱뇽 알을 주으러 간다”며 오전 8시에 나간 뒤 행방불명. 경찰, 와룡산 일대 수색 후 “집단 가출 가능성 있다”고 밝혀 ▲1991년 5월=노태우 당시 대통령 ‘어린이날’ 맞아 “모든 수사력 동원해 실종 어린이 찾아내라” 치안본부장에게 특별지시. 교육부, 각 시·도교육청에 개구리 소년 관련 신고 접수창구 개설 ▲1991년 10월=노태우 대통령 지시로 대구지방경찰청 차원의 수사본부 구성 ▲1992년 8월=경찰에 “실종 소년들 나환자 정착촌에 암매장” 제보 접수. 현장조사 결과 허위로 판명. 1996년 1월, 실종 소년의 부모 중 한 명이 살해, 자신의 집에 암매장했다는 주장 제기돼 마당과 화장실 등 발굴 소동. 해프닝으로 종결. 1997년 8월, 40대 여성 “내가 유인, 암매장했다” 법정 진술. 허위로 판명 ▲1992년 11월=개구리 소년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조금환 감독) 개봉 ▲1993년 1월=실종자 부모들,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 ▲1993년 11월=경찰 “사건 원점부터 다시 재분석하겠다”며 수사연구팀 구성. 1995년 8월, 중·고생 됐을 개구리 소년 가상 얼굴 컴퓨터로 제작, 전국에 전단 4만여 장 배포. 1996년 5월, 대구지방경찰청 수사본부 해체. 대구 달서경찰서에 사건 인계 ▲2002년 9월 26일=대구 와룡산 중턱에서 유골 발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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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91년 10월 19일 자 사회면 “대구 실종 개구리소년 우리가 찾자. 부산 1백만 학생 결의 확산” 기사다. 당시 전 국민이 소년들의 무사 귀환을 소망했다. |
계곡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움푹 팬 곳에 이르렀다. 제법 큰 바윗돌이 보였다. 과거 기사에 실린 ‘현장’ 사진과 대조하며 주변을 더듬었다. 아이들 시신이 여기 어디쯤 묻혔을 것 같은데 정확한 장소를 특정하긴 어려웠다.
‘현장’ 아래 학교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었다. 시신이 발견됐을 당시(2002년)엔 신축공사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현장’은 학교에서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개구리 소년들이 다니던 초등학교(성서초등)와는 3.5km가량 떨어져 있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다.
실종 당일인 1991년 3월 26일 밤의 대구 지역 최저 기온은 섭씨 3.3도였고 빗발이 5.8~8.2mm가량 뿌리는 상황이었다. 바람도 다소 많이 불었다고 한다. 산속인 점을 고려하면 체감온도는 영하에 가까웠으리라. 당시 경찰은 ‘산에서 길을 잃은 소년들이 움푹 팬 곳을 피신처 삼아 들어가 서로 부둥켜안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대구 기상관측소의 사건 당시 기상
-1991년 3월 26일 평균기온: 8.2℃, 최고기온: 12.3℃, 최저기온: 3.3℃, 평균운량: 7.5, 일강수량: 5.8mm
-3월 27일 평균기온: 6.0℃, 최고기온: 7.8℃, 최저기온: 4.6℃, 평균운량: 10.0, 일강수량: 2.4mm〉
산을 타고 조금만 더 내려가면 마을이 나오는데 굳이 산 중턱에서 동사했을 리 없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와룡산이 높은 것도, 골짜기가 깊은 곳도 아닌데 숲이 무성하지 않은 3월에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에서 아이들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도 석연찮다. 타살 가능성과 함께 시신이 옮겨졌을 것으로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어느 것도 31년째 납득할 만한 단서가 드러나지 않았다.
‘현장’ 주변, 은폐하기 좋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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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구 전 경감은 “2인 1조 공작조가 와룡산 기슭 비트에 숨어 있다가 도롱뇽 알을 찾으러 온 개구리 소년을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
땅과 돌, 나뭇잎 등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등산용 삽으로 직접 주변 일대를 파보았다. 그러곤 주저앉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연인원 30여만 명의 경찰 인력을 동원해도 찾지 못했던 곳입니다. 은폐하기 좋은 곳이라는 말이지요. 보통 ‘비합법 숙영(宿營)’을 위해 비트(비밀 아지트)를 팔 때 은밀하게 팝니다.”
그는 “‘현장’ 부근이 비트를 설치하기 알맞은 곳”으로 추정했다. ‘현장’은 비나 장마가 쏟아지면 꽤 많은 물이 흘러갈 만큼 땅이 움푹 패 있었다. 과거엔 계곡물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엔 군부대(사격장)가 있었다는데 이곳에다 굳이 비트를 쳤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가가 산 아래 있고, 군부대가 위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절한 곳은 아니라는 얘기죠.”
― 만약 간첩이 와룡산 자락에 비트를 쳤다면 그 이유는 뭘까요.
“간첩이 부여받는 임무는 대개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작원을 접선해 대동 복귀하는 것이죠. 혹은 누군가를 포섭하기 위해 접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구리 소년이 실종될 무렵 이 부근에 공작원들이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을지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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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구 전 경감이 남파간첩이 비트를 팔 때 주로 이용하는 등산용 야전삽을 들고 있다. |
이 질문은 잘못된 물음이다. 남파간첩 김동식(1962~)은 1990년 5월 제주도 서귀포 해안을 통해 한국에 침투한 후 1980년부터 서울에 잠입해 활약하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이선실(본명 이선화, 권력서열 19위)을 접선한 일이 있다. 김동식은 이선실과 함께 그해 10월 북한으로 귀환했다. 1995년 9월 제주도 해안을 통해 2차 침투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의 행적은 《월간조선》 2012년 4월호와 2013년 7월호, 김동식이 쓴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기파랑)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는 더 있다. 2010년 4월 북한 노동당 비서인 황장엽을 살해하라는 지령을 받고 내려온 남파간첩 2명이 구속된 사례가 있다. 앞서 2006년 태국, 필리핀 등을 거쳐 잠입한 ‘직파간첩’ 정경학이 구속된 일도 있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북한과 화해모드를 이어가던 노무현 정부에서 처음 검거한 직파간첩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북한은 대남 공작 업무를 총괄 지휘하는 정찰총국에서 간첩을 파견한다.
정찰총국은 대남·해외공작 활동을 총괄하는데 공작원 양성이나 침투는 물론 정보수집, 요인암살, 납치, 테러 등 임무를 수행한다.
김 전 경감의 말이다.
“1980년대 북한 공작부서는 청년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주요 인사들을 포섭, 지하당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당시 386세대들에게 접근한 것도 이런 이유였죠.
1990년대에도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만 남파한 사례가 있습니다. 검거된 간첩 증언에 따르면, 북한은 ‘영감조’와 ‘모자(母子)조’를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영감조는 부자(父子)로 위장한 공작조인데 나이가 많은 월북자에다 젊은 ‘안내원’을 붙여 남파해 서울서 활동했다고 해요. 또 모자 공작원이 경기도에서 활동한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왜 혼자 보내지 않느냐? 나이가 많은데다 변절할 수가 있어서 안내원과 동행시킨다는 겁니다.”
“간첩, 최소 2명 이상이었을 것”
그에 따르면 안내원은 북한 노동당 대외연락부 산하 작전부에서 선발되었다고 한다. 이들을 ‘독고다이’라는 은어로 불렀다.
북한 공산 지도부는 1960년대에 이르러 남조선 해방이라는 미명하에 월북자 출신 중에서 일부를 선발해 ‘금성군사 정치대학(695부대)’에 입교시킨 후 ①사상교육(김일성 혁명·역사·주체·철학·자본주의 비판 등) ②실무교육(남한 정세·지하당 조직 건설 등) ③훈련(사격훈련·수영·비트 건설·통신) 등의 교육을 2년여에 걸쳐 시켰다.
“하지만 월북 또는 자진 월북자들의 고령화로 남파 공작원이 고갈 상태에 이르자 활동 중인 공작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하에 1970년대부터 노동당 대남사업총국 산하에 ‘작전부(124부대, 283부대)’를 증설, 젊은 엘리트들을 선발했어요.
이들이 바로 ‘안내원’이죠. 남파 공작원의 신변 안전(남파 후 공작원의 변절 방지)을 위해 2인 1조로 내려보냈을 겁니다. 개구리 소년들이 간첩의 손에 살해되었다면 간첩은 1명이 아니라 최소 2명 이상이었을 거예요.”
대남공작원들은 주로 해안(제주와 서해안)으로 침투한 뒤 현지에서 약 1개월간 적응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흔히 일본, 싱가포르, 홍콩 등지에서 구입한 등산장비를 지급받는다. 가방 밑창에는 통신기기 등을 숨겨두는데 물이 스며들지 않게 비닐로 포장한다. 가방 옆에는 비트용(등산용) 삽, 또는 갈고리, 지팡이 등을 매달아 등산객으로 완벽하게 위장한다. 물론 허리춤에 권총을 은익한 채로.
“삽의 뾰족한 부분으로 급소 가격했을 것”
김 전 경감의 계속된 말이다.
“아마도 2인 1조 공작조가 와룡산 기슭 비트에 숨어 있다가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왔던 아이들과 마주치지 않았을까요? 신고가 두려워 현장에서 위협, 아이들을 비트 속으로 몰아넣고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살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어요.
등산용 삽을 살인도구로 이용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처음에는 삽날이나 곡괭이 앞날로 내려쳤으나 바로 실신하지 않자 삽의 뾰족한 부분으로 급소를 가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따르면 공작원들은 남파되기 전에 함북 청진과 나남, 평남 평성 등지에서 비합법 훈련과 반합법 훈련, 야간 100리 강행군, 사격, 장애물 극복, 태권도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보통 야간 100리 강행군 후에 야간사격을 하고 비트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잠을 잔다. 그러고 이튿날 오전 비트에서 나와 격술(擊術)과 장애물 극복 훈련 등을 받는 강행군을 거치며 전사로 변모한다.
― 와룡산 아래에 남파 공작원이 접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었다는 건가요.
“김대중 정권 당시 소각 처분토록 지시한 6·25 중 월북자 명단을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 그 말씀은 월북자 가정을 잠재적인 북한 동조자로 취급할 우려가 있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내부적으로 수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명단이 지금도 존재하는지는 의문입니다만….”
잠시 후 이렇게 속내를 털어놨다.
“개구리 소년이 실종되고 오랫동안 사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 대남공작원 소행으로 보고 수사해보려 했지만 다른 급한 ‘역용(逆用·간첩을 포섭해 이중간첩으로 활용하는 공작)공작’ 수사에 참여하느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30년이 지나 이 사건을 밝히려는 것은 피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소년들의 원혼을 달래려 함입니다. 북한 공작지도부의 이 악랄한 수법을 세상에 알리고자 깊이 숙고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남파간첩 소행? 북한 납치설?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이후 남파간첩의 소행이라는 주장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와룡산 근처에 안기부가 있었고, 사건이 난 곳이 군부대 바로 근처라 군대 동태를 살피러 온 남파간첩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물적 증거나 증언이 나오지 않았다. 당시 수사 경찰들은 제기된 간첩설을 일축했었다. 수사 방향도 앵벌이 조직에 의한 유괴라는 관점에서 수사가 진행되었고 실제 개구리 소년들이 앵벌이 하는 것을 봤다는 제보도 잇따랐었다. 《주간조선》은 1992년 5월 17일 자에 〈대구 개구리 소년들 실종 400일, “북한에 끌려갔을 가능성 있다”〉는 기고문을 실었다. 글쓴이는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이기봉 수석연구원. 그는 “아이들의 부모는 생업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지만 실낱만 한 단서 하나 찾지 못했다”며 “여기서 우리는 한번 ‘북쪽’으로 눈길을 돌려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고 썼다. 이 수석이 “다섯 개구리 소년들에 대한 납북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지만 반향(反響)은 없었다. 과거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특별수사팀을 만들어 2년 동안 이들의 납북 가능성과 관련한 수사를 했었지만 근거가 될 만한 단서를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재산 기자는 《아이들은 왜 산에 갔을까?》에서 ‘납북설’ 주장을 일축하며 ‘아이들의 실종 사건을 철저히 안보상업주의에 이용했다는 거센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고 썼다. |
버려진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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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산 주변에서 발견한 버려진 개구리 소년 추모 현수막. |
산비탈 한쪽에서 버려진 검은색 현수막을 찾을 수 있었다. 28주기(2019년 3월 26일) 추모식 때 사용한 것이었다. 왜 현수막을 되가져 가지 않고 현장 부근에 버려둔 것일까. 빛바랜 조화도 여기저기 있었다. 죽은 나무들, 목책이 쓰러져 있고 콘크리트로 된 배수로도 보였다. ‘현장’ 바로 아래 학교를 내려다보았다. 학생들은 이 산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두려움을 느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까. 한때 온 국민이 안타까운 소년의 죽음 앞에 함께 울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학교 선생님은 이 비극을 지금도 가르치고 있을까. 무엇보다 2인 1조 간첩의 소행이 맞을까.
황의호 원장의 경험과 개구리 소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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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호 보령문화원 원장. |
그는 공주사대를 졸업한 뒤 중·고교 교사를 거쳐 대천여고 교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쳤다. 향토 문화재 보존 발굴에 이바지한 공로로 문화재청이 수여하는 ‘대한민국 문화유산상’을 수상한 일도 있다.
황의호 원장에 따르면 보령에서는 6·25 이후 수십 차례의 간첩 침투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1977년 8월 22일 발생한 사건이 그의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서해안 안면도를 마주한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가숭구지 해안’으로 간첩이 침투해 공작 임무를 수행하고 복귀한 일이 있다.
이듬해 보령 천북면 학성리 해안으로 침투(추정)해 은신하다가 홍성군 광천읍에 출몰해 많은 민간인을 살해하고 북으로 돌아간 일도 있다. 또 1980년 6월 20일에는 김광현 외 9명의 간첩이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해안으로 침투하다가 발각되어, 김광현은 체포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되었다.
황 원장은 “이 중 1977년과 1978년 일어난 간첩 사건은 제가 비교적 젊은 시절, 충남의 향토사단인 32사단 포병단에 근무할 때 겪은 사건이라 비교적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8년에 일어난 사건은 간첩들이 북으로 복귀할 때 그간 행적을 기록한 수첩을 떨어뜨려 활동 상황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어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장을 찾아 주민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기록도 하였습니다.
우연히 대구 개구리 소년이 발견된 현장에서 추모식을 거행한다는 기사를 접하게 됐지요. 78년 충남 일대에서 일어난 간첩 사건과 비추어볼 때, 침투한 북한 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게 됐어요. 김 기자! 제가 보고서 한 편을 썼는데 읽어보시겠어요?”
홍성 광천 말봉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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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78년 11월 28일 자 1면에 실린 “3인조 살인 무장간첩 출몰” 기사다. 당시 큰 충격을 주었다. |
황 원장은 “개구리 소년 사건을 들먹이는 것이 시대에 역행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더라도 역사는 기록해야 되겠기에 글을 썼다”고 했다.
황 원장에 따르면 1978년 11월 4일 저녁 7시경 3명의 무장간첩이 보령시 천북면 학성리 해안으로(추정) 침투해 봉화산(해발 203m)에 머물렀다. 부근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황 원장이 무장간첩들의 행적을 시간대별로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간첩들이 작성한 일지(日誌·황 원장의 표현대로라면 수첩) 덕분이다. 남파간첩들은 미군 레이더 기지를 정찰하러 왔다가 충남 홍성 광천, 공주, 평택, 오산 등지에서 민간인 5명을 살해하고 북한과 무려 30회 이상 교신한 후 홀연히 북으로 돌아갔다.
의도인지 실수인지 모르나 그간 행적을 소상히 적은 ‘일지’를 떨어뜨렸다. 이로 인해 “각 지역 경비 책임자들 사이에서 곡소리가 났다”고 한다.
다시 78년 11월로 돌아가 보자. 간첩들은 홍성군 광천읍 소암리 말봉산 아래 소암마을로 이동해 2박 3일가량 머물렀다. 황 원장은 “간첩이 머문 말봉산은 산은 낮지만 미군 통신기지가 한눈에 보이고 사진 찍기에 알맞은 곳”이라 했다.
중학생들과 어울린 간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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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홍성군 광천읍 소암리 말봉산에서 무장간첩들이 밥을 해먹고 장비를 매장한 골짜기다. 2019년 1월 황의호 원장이 촬영했다. |
당시 중학교 2학년 학생(1963년생) 5~6명은 공부도 싫고 학교도 싫어 집에서는 학교 간다고 하고 산에 올라가 화투놀이 등을 하고 놀았는데 한번은 간첩들과 어울려 같이 놀았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 간첩들이 정보기관 요원인 줄 알고 따랐으며 술이나 라면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하고 같이 화투도 쳤다고 한다. 간첩들은 화투도 아주 잘 쳤다고 증언했다. 황 원장의 말이다.
“간첩과 어울렸던 당시 학생 김영호(가명)의 증언에 의하면, 간첩은 자신을 ‘광천상고를 나와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도청(盜聽)하러 내려왔다’면서 무전기를 꺼내 ‘이렇게 하면 전화하는 내용을 다 들을 수 있다’고 자랑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보니 간첩은 한 사람이 아니고 3명이었다고 해요.”
11월 7일 간첩들이 나무하러 온 마을사람 3명에게 노출되었다. 간첩들은 나무하러 오지 말라고 경고했고 마을사람들은 “당신들은 산주(山主)도 아니고, 아래에 있는 인삼밭 주인도 아닌데 왜 오지 말라고 하느냐”고 따졌다고 한다. 이들은 오후에 다시 나무하러 갔고 그만 변을 당했다.
숨진 2명은 간첩들의 은신처 부근에서 나무를 하였고, 나머지 1명은 이들과 떨어져 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비명 소리가 나기에 산림 감시원한테 들켜 혼나는 줄 알고 집으로 다급히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나무하러 간 2명이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자 방위병인 아들을 통해 경찰에 신고했다.
흉부와 복부 대검으로 난자하고…
그날 밤 10시쯤 시신 2구를 경찰이 찾았다. 옷이 벗겨진 채로 흉부와 복부가 대검으로 잔인하게 난자당했고 얼굴엔 둔기로 맞은 듯한 상처가 있는 등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되었다. 시신은 땅을 살짝 파고 소나무 가지를 꺾어 위장해놓았다.
황 원장은 “경찰이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하였으나, 급소만 예리한 흉기로 찌른 것이 수상하여 군부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군인들이 간첩이 은신했던 골짜기에서 대검집, 의복, 압축식량, 카메라, 망원렌즈 등 58점의 간첩 유류품을 발견해 간첩의 소행으로 확정하고 추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유류품들은 흙과 낙엽으로 위장해 은밀히 묻혀 있었다고 한다. 11월 8일, 충남 일대에 실제 상황인 진돗개 비상이 발령되었다.
그 무렵, ‘젊은’ 황 원장도 32사단 수색중대에 배속되어 헌병대와 함께 매일 수색 활동을 했다. 낮에는 수색하고, 밤에는 연대 밖에 있는 헬리콥터 경비를 섰다. 당시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행정병으로 이루어진 5분 대기조 또한 사단 수색중대에 배속되었다. 심지어 신병교육대의 교육생도 방어선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한편, 4년 뒤인 1982년 2월 어느 날, 봉화산에 묻어놓은 유류품이 당시 칡뿌리를 캐던 마을 소년에 의해 발견되었다.
산 정상의 평평한 봉화대지(大地) 동쪽 4~5m 지점이었다. 정상부와 달리 경사지인데 칡뿌리 아래에 운동화, 오리발, 비닐에 싸인 쌀 등을 묻어두었다. 황 원장은 “아마도 복귀할 때 이용하려고 묻어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했다.
청양 후덕리 사건과 공주 신영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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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후덕리 사건에 대해 명제춘씨가 설명하고 있다. 명씨가 사건 현장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
그는 앞으로 걷고 간첩은 뒷걸음질 치는 자세가 되어 걸어가는데 멱살 잡은 손이 느슨해졌을 때 손을 비틀어 뿌리치고 지게를 벗어던져 산 아래로 달아났다.
마을에 도착해 청양경찰서에 신고했지만 “보상금을 타려 거짓말을 한다”며 사람들이 믿지 않더란다. 훗날 간첩들이 작성한 ‘수첩’이 발견되고 나서 명씨의 주장을 믿게 되었다. 경찰은 그에게 표창장과 부상으로 식기(食器)를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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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신영리 사건 당시 현장 그림이다. 1978년 11월 16일 민방위 대원인 마을주민이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되었다. |
신영2리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날 15일 오전 6시25분쯤 이지화(가명·당시 39세)씨는 원래 민방위 대원이라 예비군 초소에서 근무할 의무는 없지만 마을 청년들을 도와주려 집을 나섰다고 한다. 양초를 사러 가던 예비군과 만난 후 행방불명되었는데 이튿날 인근 산골짜기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현장서 100m 떨어진 논바닥에 혈흔이 낭자한 것으로 보아 간첩들이 살해 후 시신을 옮긴 것으로 추정되었다. 황 원장에 따르면 간첩들의 ‘일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적혀 있었다.
〈11월 15~16일 : 초저녁에 대도로를 횡단하려다가 잠복하러 나가는 자와 조우, 대화하다가 감쪽같이 단도로 처단한 후 매몰하고 흔적 처리. 북쪽 능선을 따라 계속 행동함.〉
황 원장은 “시신을 유기한 곳은 산기슭의 골짜기로, 깊게 팬 골짜기에 시신을 놓고 돌과 흙, 낙엽으로 위장하였다. 이때 흙은 골짜기 옆 낭떠러지의 흙을 담아다가 덮어 흔적을 없앴다”고 했다. 홍성군 광천읍 말봉산에서 주민 2명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매장한 방식과 유사했다고 한다.
경기도 평택 사건과 오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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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양산동 사건 당시 현장 그림이다. 1978년 11월 23일 무장간첩이 마을주민을 살해하고 감쪽같이 시신을 매장했다. |
1978년 11월 22일 오후 7시쯤 간첩들은 민간인 2명을 만나 1명은 살해하고 1명은 놓쳤다. 황 원장은 “가게에서 빵까지 구입하며 민간인 여러 명을 만났다. 민간인을 살해한 이유는 신분이 노출됐기 때문이다”고 했다.
간첩은 이튿날인 11월 23일 오후 6시쯤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양산리(현 오산시 양산동) 야산에서 송중섭(당시 20세·가명)씨를 살해한 후 매장했다.
황 원장이 만난 송씨의 형과 마을주민에 따르면 송씨는 논에서 살해되어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가시덤불 속에 시신이 들어갈 만큼 땅을 파내고, 시신을 넣은 후 낙엽으로 덮어놓았다고 한다.
이때 파낸 흙은 다른 곳에 버려 감쪽같이 숨겼다. 수색하던 사람도 가시덤불을 쳐다만 보았기에 찾기 어려웠다. 황 원장은 “시신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취사 흔적이 발견되었다. 배추 속을 파내고 쌀을 넣어 밥을 해 먹었다.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가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당시 간첩들이 남긴 일지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23~24일 : 초저녁 숙영지에서 내려오다 사민과 조우되어 처단하고 매몰함.〉
황 원장의 말이다.
“이런 식으로 양민 5명을 살해한 간첩들은 1978년 12월 4일 저녁, 경기 김포에서 북한에서 보낸 2명의 안내원과 만나 함께 북으로 복귀하였어요. 이때 잠수복으로 갈아입다가 남한에 침투하여 행동한 내용을 적은 수첩을 떨어뜨려 그들의 행적이 자세히 밝혀지게 되었어요.
1978년 11월 4일 충남 보령 천북면으로 침투하여 광천에서 노출된 간첩들의 행동을 보면, 신분이 노출되면 반드시 살해합니다. 얼마 후에 밝혀지더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살해하는 것이고, 살해하면 반드시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시신을 숨겨요.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개구리 소년 사건과 유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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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78년 11월 28일 자 1면에 실린 “3인조 무장간첩 출현” 기사다. |
〈1991년 3월 26일 오전 대구 와룡산으로 침투한 3명의 무장간첩은 노출을 피해 숙영을 하는 등 비합법 행동 중이었다. 이때 우연히 도롱뇽 알을 주우러 온 어린이 5명과 만나게 되어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산을 돌아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1978년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에서 숙영한 무장간첩도 미군 통신부대 맞은쪽에 있는 홍성군 광천읍 말봉산에서, 공부하기 싫어 산에 올라온 광흥중 2학년 학생들과 놀았다. 화투도 치고, 라면·술 심부름도 시켰다. 학생들을 해치지 않은 이유는 학생들이 간첩인 줄 모르고, 중정 요원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개구리 소년들이 중학생들과 달리 살아남지 못한 이유는, 무장간첩 신분이 노출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떤 어린이가 간첩 아니냐고 물었거나, 간첩인 것 같다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이 노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초등생들이면 교육을 철저히 받아, 간첩을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자기들의 생각을 말해버렸을 수도 있다.
광천에 침투한 간첩도 학생들은 죽이지 않았지만, 오후에 나무하러 온 주민 2명은 살해했다. 무장간첩의 경우 비합법 행동을 할 때 노출되면 지체 없이 살해하고 시신을 감쪽같이 처리한다. 공주 신영리, 오산 양산동에서도 신분이 노출되어 살해한 것이다.
남파간첩이었다가 자수한 박원남씨의 수기(《동아일보》 1972년 6월 30일 자)에 의하면 ‘비합법 구간에 나타나는 자는 어린이나 노인이나 용서 없이 처단하고 흔적을 감추어야 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살해하는 데 총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총소리가 나면 바로 노출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1978년 무장간첩도 5명이나 민간인을 죽였지만 총기를 쓰지 않았다. 아마도 칼로 찌르거나 야전삽으로 가격하고 목을 졸랐을 것으로 보인다.
개구리 소년을 살해한 후, 시신을 감쪽같이 유기할 장소를 물색했을 것이다. 흙을 파기 쉽고 묻은 뒤에 흙을 뿌려 놓으면 위장하기도 쉬운 침식된 골짜기를 찾은 것이다. 광천에 침투한 간첩들도 주민 2명을 살해한 후 솔가지 등으로 은닉, 도주하면서 58점의 물건을 대구 개구리 소년들이 발견된 장소와 비슷한 곳에 묻었다.
공주 신영리에서 살해한 사람도 국도변 개활지, 초소 부근에서 살해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시신을 100m가량 옮겨 침식된 골짜기에 묻었다. 오산 양산동에서 살해한 사람도 시신을 옮겨 의외의 장소에 매장했다.
무장간첩들은 살해 방법이나 시신의 처리 등을 전문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찾아내기가 정말 어렵다. 항상 상상을 초월한 곳에 시신을 매장한다. 대구 소년들의 시신 매장이 그렇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수색을 했어도 찾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어린이들을 살해하고 매장한 날, 비까지 적당히 내려 완벽한 위장을 도와주었다.〉
대구 ‘현장’ 상황은…
남파간첩 김동식이 쓴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를 보면, 비합법 숙영을 위해 비트를 팠던 이야기가 나온다. 훈련 중 김동식이 일부러 가시가 많이 돋아 있는 찔레꽃 넝쿨 속을 헤집고 들어가 비트를 팠더니, 비트를 수색·검열하는 북한 지도원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작원들은 놀라운 솜씨로 감쪽같이 은신처를 만든다. 경찰이 와룡산 일대를 그렇게 뒤졌지만 11년 6개월 뒤에야 시신이 발견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서울로 돌아온 얼마 후 김학구 전 경감에게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연필로 쓴 원고 뭉치를 기자에게 건넸다. 당시의 ‘현장’ 상황에 대해 쓴 글이었다. 일부를 소개한다.
〈… 그날 낮, 남파 공작원들은 주변 야산에 들어가 비트를 설치하고 휴식을 취했다. 목적지는 대구시 달서구 재남(在南)가족이 거주하는 와룡산.
해가 저물자 하산해 대로는 피하고 소로 또는 오솔길을 선택해 와룡산에 도착했다. 골짜기 개울 옆 후미진 곳을 찾아 비트를 설치하고 다가오는 밤을 기다리며 ‘대상 가옥 침투 및 대상 접촉 시 대화 구상’ 등을 논의 중 수일간 보행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때 어린 소년 5명이 와룡산 개울을 따라 도롱뇽 알을 채취하면서 산속으로 올라가던 중 이들이 자고 있는 비트까지 접근했다. 당황한 나머지 신고가 두려워 현장에서 위협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들이 입고 있던 윗옷을 벗게 하고 벗은 옷의 단추 혹은 자크를 채워 거꾸로 머리에 쓰게 한 다음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등을 대게 했다. 양 소매는 목 뒤로 넘겨 목을 감싸서 묶으면서 서로 행동을 볼 수 없게 한 다음 죽인 것으로 추정한다. …〉
양심의 소리
‘1991년 3월 26일’ 이후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한 대구 개구리 소년 사건을 지금 꺼내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건을 잊지 않고 있고 의문을 던지며 참혹한 죽음 앞에 말을 건다. “최첨단 수사기법을 동원한 경찰의 재수사”가 가능할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김학구 전 경감과 황의호 원장의 주장은 남들이 모두 아니라고 해도 양심에 따라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입을 닫고 눈을 감아버리면 되지만, 양심이 내는 소리에 반응할 뿐이다
이 사건에 30년을 매달려온 경찰이 보기에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내는 양심의 소리, 상식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