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런던에서 읽는 생성형 AI시대의 경제 | AI 토큰 경제와 새로운 국제질서

AI 인프라가 무기화되는 시대, 한국의 선택은?

  • 글 : 유영진 런던정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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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격한 기술 변화와 급격한 국제정치 환경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어
⊙ 세계화 시대의 ‘일자리 수출’에서 ‘토큰 수출’로
⊙ 반도체·조선·자동차 등 한국 산업에 최적화된 AI 모델, K-콘텐츠와 결합된 생성형 서비스 등 틈새 전략 추구해야
⊙ 토큰 경제의 기반인 AI 인프라의 초크포인트는 모두 미국과 그 동맹국에 집중
⊙ 한국, 공급망의 핵심 노드이지만 초크포인트를 통제하지는 못해
⊙ 자본주의, ‘플랫폼과 알고리즘 경영’(2000년대 이후) ‘토큰 경제와 지능의 수출’(2020년대 이후)로 전환
⊙ 트럼프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단순한 기술 투자가 아니라 새로운 수출 산업의 인프라 구축

유영진
1966년생. 서울대 경영학 학사 및 석사, 미국 메릴랜드대 경영정보학 박사 / 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 교수, 템플대 교수, 클리블랜드 유니버시티 호스피털(University Hospitals) 최고혁신설계책임자(Chief Innovation Architect) 역임. 現 런던정경대(LSE) 경영학과 교수, LSE 평생교육 디지털 프로그램 학술책임자, 굿이어타이어(Goodyear Tire)·펜스키(Penske)·셔윈윌리엄스(Sherwin Williams)·프로그레시브 보험(Progressive Insurance)·키뱅크(Key Bank) 등 미국 기업 디지털 전략 자문,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삼성경제연구소 자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5년 1월 21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배석한 가운데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선언했다. 사진=AFP/뉴스1
[연재를 시작하며]
 
  필자는 30년 넘게 하나의 질문을 붙들어 왔다. 디지털 기술은 기업을, 산업을,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지난해 여름 런던정경대(LSE)로부터 정보시스템 분야의 정교수로 초빙을 받고, 오랜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LSE는 독특한 학교다. 하이에크와 칼 포퍼가 사유했고, 앤서니 기든스가 ‘제3의 길’을 구상한 곳이다. 현대 기업이론의 출발점을 놓은 로널드 코즈와 올리버 하트가 있었고, 지난 2년 연속 기술 혁신을 주제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정치경제학의 본산이자, 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깊이 탐구해 온 전통이 뿌리 깊은 학교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도시에서, 이제 생성형 AI라는 또 하나의 혁명을 읽고 싶었다.
 
  1990년대 미국에서 연구를 시작했을 때 ‘디지털 혁신’이라는 말조차 낯설었다. 이론이 없어서 만들어야 했다. 2010년 발표한 논문이 이 분야의 핵심 이론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론만으로는 부족했다. 경영학은 현실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미국 러스트벨트에서 100년이 넘은 전통 제조업체들과 함께 디지털 전환을 고민했고, 클리블랜드 대학병원에서는 의료 디지털화를 주도했다. 삼성의 디자인 혁명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썼고, 다른 한국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들에게 연구 결과를 전수했다.
 
  이 연재는 그 경험과 사유를 한국 독자들과 나누려는 시도다. 기술은 이제 국가전략의 핵심이 되었다. 30년간 붙들어 온 질문을 이제 《월간조선》을 통해 함께 풀어 가고자 한다. 한국이 가진 잠재력을 펼치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국제경제의 쌍발 혁명
 
  생성형 기계(generative machine)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챗GPT와 같은 대형 언어 모델(LLM)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생성하는 새로운 종류의 기계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산업혁명 이후 가장 근본적인 기술 전환일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러나 이 변화를 단순히 기술의 측면에서만 봐서는 안 된다.
 
  생성형 AI는 물론 디지털 인프라의 일부다. 그러나 이전 세대의 디지털 기술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1990년대 인터넷이 확산되고 2000년대 스마트폰이 보급되던 시기, 세계는 하나로 통합되어 가고 있었다. 기술은 국경을 허물고, 세계화를 가속하며, 모든 국가를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하는 도구였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생성형 기계는 전혀 다른 세계 속으로 태어났다. 미중(美中) 기술 패권(覇權) 경쟁이 격화되고, 반도체 수출이 통제되며, 디지털 인프라가 지정학적(地政學的) 무기로 전환되는 시대에 등장했다. 급격한 기술 변화와 급격한 국제정치 환경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국제경제의 쌍발(雙發) 혁명이다.
 
  따라서 생성형 기계 시대를 이해하려면 기술만이 아니라 그 기술이 작동하는 지정학적 맥락을 함께 읽어야 한다. AI 칩 하나, 클라우드 서버 하나가 국가 간 협상의 대상이 되는 시대다. 오픈AI의 API 호출이 국제무역 통계에 잡히고, 데이터센터의 위치가 외교적 결정이 되는 시대다.
 
  이번 호에서는 이 지정학적 맥락을 살펴본다. 지난 80년간 세계 경제를 지배해 온 글로벌 통합의 질서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왜 지금 무너지고 있으며, 생성형 기계 시대에 어떤 새로운 구조가 등장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세계의 평탄화
 
토머스 프리드먼. 사진=조선DB

  1944년 브레턴우즈에서 하나의 거대한 약속이 시작되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혹한 폐허를 목격한 인류는 국가 간 투쟁의 바탕에 경제적 갈등이 있다는 인식 아래, 모든 국가를 하나의 경제 공동체로 묶어 또 다른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자유무역과 자본 이동이 모든 국가를 함께 번영하게 만든다는 글로벌 통합의 약속이 브레턴우즈 체제의 핵심이었다.
 
  이 약속은 반세기 넘게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 질서를 지탱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구(舊)소련의 몰락을 가져오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終焉)’을 선언했다. 서구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 선언이었고, 이 승리를 완성한 것은 기술이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글로벌 통합의 엔진 역할을 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2005년 베스트셀러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이를 ‘세계의 평탄화’라고 불렀다. 인도 방갈로르의 콜센터 직원이 미국 고객의 불만을 처리하고, 필리핀의 회계사가 미국 기업의 세금신고서를 작성하며, 중국 선전(深圳)의 공장이 캘리포니아에서 설계된 아이폰을 조립하는 세계였다.
 
  1990년에서 2010년 사이 세계 무역량은 세 배로 늘었고, 프리드먼은 “델(Dell)의 공급망에 속한 나라들은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상호 의존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논리였다.
 
  실리콘밸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1996년 존 페리 발로는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에서 “산업 세계의 정부들이여, 우리가 모이는 곳에 당신들의 주권(主權)은 없다”고 선언했다. 구글은 “전 세계의 정보를 정리하여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한다”, 페이스북은 “세계를 더 열리고 연결되게 만든다”, 트위터(현 X)는 “모든 사람에게 생각을 즉시, 장벽 없이 공유할 자유를 준다”를 내세웠다. 기술이 국경을 초월하고 민주주의를 확산시킨다는 믿음이었다.
 
  2010년 12월, 튀니지의 청년 노점상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경찰의 모욕에 항의해 분신자살했다. 그의 사촌 알리 부아지지가 시위 장면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이 영상은 알자지라를 타고 아랍 세계 전체로 퍼졌다. 아랍의 봄이 시작된 것이다. 트위터는 “트윗은 흘러야 한다”고 선언했고, 서방 언론은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며 흥분했다.
 
 
  일자리의 수출, 그 대가
 
  그러나 글로벌화의 승자가 있었다면 패자(敗者)도 있었다. 그리고 그 패자는 선진국 내부에 있었다.
 
  미국의 제조업 일자리는 2000년 1730만 개에서 2010년 1150만 개로 줄어 580만 개가 사라졌다. 펜실베이니아의 모네센은 1990년대 제철소가 문을 닫은 후 인구의 3분의 2를 잃었고, 아홉 개였던 초등학교가 하나로 줄었다. 오하이오, 미시간, 위스콘신의 공장 도시들이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것은 단순한 산업 구조조정이 아니라 일자리의 수출이었다. 미국 기업들은 중국과 멕시코로 생산을 옮겼고, 그곳의 노동자들이 미국 노동자의 10분의 1 임금으로 같은 일을 했다. 기업 이윤은 늘고 주가(株價)는 올랐지만 디트로이트와 플린트, 영스타운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경제학자들은 자유무역이 전체적으로 이익이며 패자에게는 보상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상은 오지 않았고, 대신 오피오이드(아편 유사 마약류) 위기가 왔다. 2017년 상반기에 오하이오주에서만 2700명 넘는 주민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1970년대 미국 제조업 노동자의 26%가 노조에 가입해 있었지만 2000년에는 13%로 줄었다. 노조와 함께 협상력이 사라졌고 임금 상승이 멈췄다. 생산성은 올랐지만 임금은 제자리였으며, 그 차이는 모두 자본가와 경영진에게 돌아갔다. 선진국의 중산층(中産層)이 붕괴했다.
 
  중산층의 몰락은 정치적 결과로 이어졌다. 2008년 오바마의 등장은 기존 정치 세력에 신물이 난 미국인들이 던진 승부수였다. 2009년 티파티 운동이 터져 나왔고, 2011년에는 “우리는 99%다”를 외치는 월가 점령 시위가 벌어졌다. 2016년 6월 영국은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EU 탈퇴를 선택했고, 그해 11월 도널드 트럼프가 “이 글로벌화의 물결이 우리 중산층을 완전히 쓸어 버렸습니다”라고 외치며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글로벌화의 패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프리드먼의 ‘평평한 세계’는 과연 누구에게 평평했는가? 실리콘밸리의 기술 유토피아는 누구를 위한 유토피아였는가?
 
 
  자본주의의 네 번의 전환
 
  데이비드 스타크 컬럼비아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와 이바타 파이스 밀라노 가톨릭대학교 경제사회학 교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자본주의가 세 번의 근본적인 전환을 겪었다고 분석한다. 나는 생성 기계의 등장으로 네 번째 전환이 진행 중이라고 본다.
 
 
  첫 번째 전환: 과학적 관리와 사회적 계약(20세기 초중반)
 
  20세기 초중반 서구 자본주의는 GM, GE, 포드 같은 산업 대기업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가 새로운 관리자 계급의 성장을 정당화했고, 거대한 공장에서 수만 명의 노동자가 위계적 명령 체계 아래 일했다. 노동자들은 노조를 통해 협상력을 가졌고, 경영진과 노동자, 지역사회 사이에는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 존재했다.
 
  이 시기의 자본시장은 전통적 투자은행 중심이었다. JP모건, 골드만삭스 같은 투자은행들은 기업과 장기적 관계를 맺고 인내심 있는 자본을 공급했다. 분기 실적보다 10년, 20년 후의 성장이 중요했다. 정치적 연합은 경영자와 노동자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노동자로 대표되는 노동자층은 중산층이 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전환: 재무화와 글로벌 공급망(1980년대 이후)
 
  1980년대부터 자본시장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했다. 뮤추얼펀드, 연기금 같은 기관투자자가 주식시장의 주요 행위자로 부상(浮上)했고, 헤지펀드가 등장해 단기 수익을 공격적으로 추구했다. 찰스 슈왑 같은 할인중개업체가 개인 투자자들에게 주식시장의 문을 열었고, 인터넷 거래 플랫폼이 이 흐름을 가속화했다. 자본시장의 ‘소매화(小賣化)’가 진행된 것이다.
 
  이 변화가 기업 경영을 바꾸었다. 분기 실적과 주가가 핵심 지표가 되었고, 기업들은 ‘재무화(財務化)’되었다. 실물(實物) 생산보다 재무지표 관리가 경영의 중심이 되었다. 동시에 인터넷이 글로벌 공급망 관리를 가능하게 했다. 나이키는 공장을 소유하지 않고 전 세계에 생산을 아웃소싱했고, 델은 부품을 조달해 조립만 했으며, 시스코는 라우터 생산 대부분을 외주(外注)로 돌렸다. 기업들은 ‘계약의 네트워크’로 재조직되었고, 생산은 임금이 가장 낮은 곳으로 이동했다.
 
  이것이 프리드먼이 찬양한 ‘평평한 세계’의 실체였다. 자본시장의 단기화, 기업의 재무화, 공급망의 세계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20세기 중반의 사회적 계약은 해체되었다. 정치적 연합도 바뀌었다. 경영자와 투자자의 동맹이 형성되었고, 노동은 이 연합에서 배제되었다. 중산층은 점차 소멸해 갔지만, 소비자들은 저렴한 상품의 혜택을 입었기에 정치적 저항은 지연되었다.
 
 
  세 번째 전환: 플랫폼과 알고리즘 경영(2000년대 이후)
 
  2000년대 후반, 새로운 형태의 기업이 등장했다. 우버, 에어비앤비, 아마존, 구글 같은 디지털 네이티브 기업들이다. 학자들은 이들을 플랫폼 기업이라 부른다.
 
  플랫폼 기업의 핵심은 강력한 디지털 인프라와 데이터 자산이다. 이들은 먼저 사용자의 관심을 독점하고, 축적되는 데이터를 통해 충족되지 않은 필요를 발견한다. 결정적 혁신은 이 필요를 직접 충족시키는 대신, 외부 제삼자의 자산과 서비스를 플랫폼 안으로 포섭해서 만족시킨다는 점이다. 이 모든 과정을 알고리즘이 조율한다.
 
  시장의 행위자들은 계약하고, 위계는 명령하고, 네트워크는 협력한다. 반면 플랫폼은 기업 밖에 있는 자산과 활동을 포섭한다. 우버는 차량을 소유하지 않고, 에어비앤비는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으며, 아마존은 재고의 상당 부분을 직접 보유하지 않는다.
 
  플랫폼 경제에서 노동자는 ‘독립계약자’가 되었다. 고용관계가 아니므로 최저임금, 의료보험, 퇴직연금의 의무가 없다. 알고리즘이 관리자를 대체했고, 평점과 랭킹이 승진과 해고를 결정한다. 스타크와 파이스는 이를 ‘알고리즘 경영’이라 부른다. 규칙은 있지만 관료제가 아니고, 랭킹은 있지만 직급이 아니며, 모니터링은 있지만 규율이 아니다.
 
  정치적 연합은 다시 재편되었다. 플랫폼 소유자, 투자자, 그리고 소비자의 동맹이 형성되었다. 소비자는 저렴한 우버 요금과 편리한 아마존 배송의 혜택을 누린다. 플랫폼 기업들은 규제 당국과의 싸움에서 자신들의 ‘사용자 기반을 무기화(武器化)’할 수 있었다.
 
 
  네 번째 전환: 토큰 경제와 지능의 수출(2020년대 이후)
 
샘 올트먼 오픈AI 대표. 사진=연합뉴스

  생성형 AI가 경제활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전환의 조짐이 보인다.
 
  20세기 말 아웃소싱은 선진국의 일자리를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했다. 인도의 콜센터, 필리핀의 회계사, 중국의 조립공장이 미국과 유럽 기업들의 ‘백오피스’가 되었다. 달러가 이들 국가로 흘러들어 갔고, 이것이 글로벌 중산층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생성형 AI는 이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있다. 오픈AI의 GPT, 구글의 제미니, 앤트로픽의 클로드는 콜센터 상담, 기초적 프로그래밍, 문서 작성, 데이터 분석 같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이것은 정확히 저임금 국가로 아웃소싱되던 업무들이다.
 
  AI 서비스는 ‘토큰’ 단위로 거래된다. 토큰은 AI 모델이 처리하는 텍스트의 기본 단위로, 대략 단어 하나가 1~2개의 토큰에 해당한다. 2024년 기준 오픈AI는 분당 약 60억 개의 토큰을 처리하는데, 이는 2년 전의 20배에 달한다. 구글은 월 1300조 개, 마이크로소프트는 2025년 한 해 500조 개의 토큰을 처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돈의 흐름을 생각해 보자. 과거에는 미국 기업이 인도 IT 회사에 서비스를 의뢰하면, 인포시스나 위프로의 엔지니어들이 임금을 받았다. 이 돈이 인도 경제로 흘러들어 갔다. 그러나 같은 업무를 AI가 수행하면 어떻게 되는가? 전 세계 기업들이 오픈AI의 API를 호출하고 토큰 비용을 지불한다. 돈은 개발도상국 노동자가 아니라 실리콘밸리의 AI 기업 계좌로 직행한다.
 
  이것은 국제무역 구조의 재편이다. 과거의 글로벌화가 ‘일자리의 수출’이었다면, AI 시대의 글로벌화는 ‘지능의 수출’이 될 수 있다. 인도 IT산업의 연간 수출액은 2000억 달러를 넘고, 필리핀 BPO산업은 150만 명을 고용한다. 많은 분석가들은 이 일자리의 상당 부분이 AI로 대체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뿐이 아니다. 개발도상국 내수(內需)시장에서 현지 지식노동자들이 수행하던 업무가 선진국 기반의 AI로 대체되면, 현지 임금으로 지불되던 돈이 토큰 비용으로 선진국으로 흘러가게 된다. 기존 소프트웨어에 AI 기능이 덧붙여지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 토큰 경제’가 형성되고 있다. 이것이 부(富)의 흐름을 더 크게 바꿔 놓을 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와 함께 오픈AI가 발표한 수천억 달러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는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투자가 아니라 새로운 수출산업의 인프라 구축이다. 미국 러스트벨트의 제조업 일자리는 1990~2000년대에 사라졌다. 그러나 AI 토큰 경제는 새로운 형태의 부가 미국으로 흘러들어 오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정치적 연합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플랫폼 시대의 연합을 더욱 강화한다. AI 서비스의 소비자-전 세계 기업과 개인-는 저렴하고 편리한 AI의 혜택을 누린다. 플랫폼 소유자와 투자자는 막대한 수익을 거둔다. 피해는 개발도상국의 노동자들이 입지만, 이들은 미국의 정치적 연합에서 아무런 발언권이 없다. 미국의 러스트벨트가 1990~2000년대에 형성되었다면, 인도와 필리핀의 러스트벨트는 2030년대에 형성될 수 있다.
 
 
  세 조각 난 세계: 지정학적 맥락
 
 
패트릭 드닌 교수. 사진=노트르담대
국제관계 이론은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렌즈를 제공한다. ‘자유주의’는 국가들이 협력할 수 있고, 제도와 규칙이 갈등을 예방하며, 경제적 상호의존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브레턴우즈 체제, WTO, 인터넷의 글로벌 거버넌스는 모두 이 자유주의적 세계관의 산물이었다. 반면 ‘현실주의’는 국제 체제가 본질적으로 무정부 상태이며, 국가들은 생존과 권력을 추구한다고 본다. 협력은 일시적이고 갈등은 불가피하며, 기술은 궁극적으로 힘의 도구다.
 
  정치학자 패트릭 드닌은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에서 흥미로운 지적을 한다. 20세기의 세 이데올로기-파시즘, 공산주의, 자유주의-중 자유주의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조차 잊고 인류 진화의 자연스러운 종착점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평등한 권리를 선전하면서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불평등을 낳았고, ‘작은 정부’를 외치면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국가기구를 만들어 냈다. 자유주의의 승리가 자유주의의 위기를 낳은 것이다.
 
  경제적 차원에서도 두 세계관이 대립한다. ‘통합’은 자유무역과 자본 이동, 공급망의 글로벌화를 추구한다. 효율성이 핵심 가치다. 반면 ‘분리’는 경제적 자립과 전략산업 보호를 우선시한다. 핵심 기술과 필수 물자를 외국에 의존하는 것은 안보 위험이라는 논리다. 효율성보다 회복탄력성이 중요하다.
 
 
  네 개의 공간
 
  정치적 차원(자유주의/현실주의)과 경제적 차원(통합/분리)을 교차시키면 네 개의 공간이 나타난다.
 
  첫째, 자유주의-통합. 국제규칙과 제도를 통해 협력하고,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과 글로벌 공급망을 추구한다. 전후(戰後) 75년간 지배적 패러다임이었다.
 
  둘째, 현실주의–통합. 국가이익과 힘의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동맹국과는 경제적 통합을 유지한다. 열린 세계가 아니라 ‘우리 편끼리의 통합’이다.
 
  셋째, 현실주의-분리. 국가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며, 경제적으로도 자립과 병행생태계(竝行生態系) 구축을 추구한다.
 
  넷째, 자유주의-분리. 가치와 규칙을 중시하지만, 경제적 자립이나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한다. 가장 불안정한 위치다.
 
  미국은 첫 번째 공간에서 두 번째 공간으로 이동 중이다. 2018년 화웨이 제재, 2022년 반도체 수출 통제, 2024년 AI 칩 수출 규정은 ‘자유무역’이 ‘국가안보’에 밀리는 과정이었다. 칩(Chip)4 동맹,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구성된 정보동맹-편집자 주)+AI’ 생태계가 그것이다. 동맹국에게는 열려 있지만 중국에는 닫혀 있다.
 
  중국은 세 번째 공간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2001년 WTO 가입으로 글로벌 경제에 통합되었지만, 미국의 봉쇄 이후 병행생태계 구축을 가속화하고 있다. 화웨이의 어센드 칩, 딥시크의 AI 모델, 일대일로(一帶一路)를 통한 기술표준 확산이 그 전략이다.
 
  EU는 네 번째 공간에서 고통 받고 있다. GDPR과 AI액트로 가치 기반 규칙을 만들지만, 엔비디아도 오픈AI도 화웨이도 유럽엔 없다. 규제주권(主權)은 있지만 기술주권은 없다.
 
 
  무기화된 인프라
 
  이 지정학적 재편에서 핵심은 인프라의 무기화다. 헨리 패럴과 에이브러햄 뉴먼은 ‘무기화된 상호의존’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글로벌 네트워크의 허브를 장악한 자가 그 허브를 강압의 도구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AI 인프라의 초크포인트는 극도로 집중되어 있다. 엔비디아는 AI 칩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ASML은 EUV 장비의 유일한 공급자이며, TSMC는 세계 첨단 칩의 90%를 생산한다. AWS, 애저, GCP가 글로벌 클라우드 시장의 65%를 차지한다. 이 모든 초크포인트가 미국과 그 동맹국에 있으며, 미국은 이를 지정학적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토큰 경제는 이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 전 세계가 오픈AI의 API를 호출할 때, 그 토큰은 미국이 통제하는 클라우드에서 처리되고, 미국이 통제하는 칩 위에서 연산(演算)된다. 토큰 경제의 부가 실리콘밸리로 흐르는 것은 기술적 우위만의 결과가 아니라, 이 초크포인트 통제의 결과이기도 하다.
 
  세계는 더 이상 하나의 공간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이 생성형 기계 시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지정학적 맥락이다.
 
 
  한국, 토큰 경제의 소비자인가 생산자인가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위치를 읽으면 복잡한 그림이 드러난다.
 
  한국은 현재 미국 주도 통합 체제의 일원이다. 안보는 한미동맹에 기반하고, 반도체 공급망에서는 칩4 동맹의 핵심 구성원이며, 디지털 인프라는 대부분 미국 기업들의 기술에 의존한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글로벌 메모리 시장을 지배하지만, AI 칩(GPU)은 엔비디아가 장악하고 있고, 첨단 파운드리 공정은 TSMC가 앞서 있다. 한국은 공급망의 핵심 노드이지만 초크포인트를 통제하지는 못하는 위치에 있다.
 
  동시에 한국경제는 중국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수출의 약 25%가 중국으로 향하고, 삼성과 SK는 중국에 대규모 생산 시설을 운영한다. 미중 디커플링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이 양면적 위치는 점점 더 불편해지고 있다.
 
  EU의 경험은 한국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EU는 GDPR로 데이터 보호의 글로벌 표준을 만들었고, AI액트로 규제 선도국의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규제주권만으로는 기술 종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규제할 수는 있지만 만들 수는 없는 상황에서 전략적 자율성은 수사(修辭)에 그칠 수밖에 없다.
 
 
  100조원의 선택
 
이재명 대통령은 2025년 9월 8일 ‘열린 대한민국, AI로 날다–국가인공지능(AI) 전략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했다. 사진=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뉴시스

  정부가 발표한 ‘100조원 AI 투자’의 향방이 한국의 미래 위치를 결정할 것이다. 만약 이 돈이 주로 미국 AI 기업들의 서비스를 구매하고 인프라를 임차하는 데 쓰인다면, 한국은 AI 토큰 경제의 ‘소비자’로 남게 된다. 토큰 비용으로 달러가 빠져나가는 구조가 고착화된다. 편리하지만 종속적인 위치다. 반면 이 투자가 반도체 첨단 공정, 데이터센터 인프라, 에너지 시스템에 집중된다면 다른 그림이 가능하다. 삼성 파운드리가 TSMC의 실질적 대안(代案)으로 부상한다면, 한국은 미국에 대해서도 중국에 대해서도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AI 시대의 초크포인트 중 하나를 확보하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EU에 없는 것이 있다. 제조 역량이다. 삼성의 파운드리, SK의 메모리, LG의 배터리와 디스플레이, 현대의 로봇공학은 AI 시대에도 여전히 핵심 자산이다. 데이터센터는 칩과 메모리, 냉각 시스템과 전력 인프라가 필요하고, AI 모델은 결국 물리적 하드웨어 위에서 돌아간다.
 
  문제는 이 제조 역량을 어떻게 협상력으로 전환하느냐에 있다. 물리적 인공지능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는 제조공장에서 출발하게 된다. 중국 외의 민주주의 진영에서 한국은 대만과 더불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미국과 중국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 자생적 디지털 플랫폼들이 있고, 여기서 파생되는 충분한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영역에서 규모의 경제로 오픈AI나 구글을 이기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한국어에 특화된 LLM, 반도체·조선··자동차 등 한국 산업에 최적화된 AI 모델, K-콘텐츠와 결합된 생성형 서비스는 틈새 전략이 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지는 못하더라도, 특정 영역에서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토큰을 사는 나라가 될 것인가, 토큰을 파는 나라가 될 것인가. 100조원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기술 유토피아의 종언
 
  브레턴우즈 이후 80년간 지속된 글로벌 통합의 꿈은 이제 세 조각으로 나뉘고 있다. 미국은 이상주의에서 현실주의로 이동했다. 더 이상 ‘규칙 기반 질서’가 아니라 ‘미국 조건의 통합’을 추구하며, 기술을 힘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은 분리를 택하고 병행생태계를 구축하면서 일대일로를 통해 이를 확장한다. EU는 이상주의적 가치를 외치지만 기술주권이 없어 갈 곳을 잃었다.
 
  그러나 지정학적 재편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 중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자본주의는 대량생산 시대의 경영자-노동자 연합에서 아웃소싱 시대의 경영자-투자자 연합으로, 다시 플랫폼 시대의 소유자-투자자-소비자 연합으로 전환해 왔다. AI 토큰 경제는 이 전환을 국제적 차원으로 확장하고 있다. 일자리 수출에서 지능 수출로의 전환은 단순한 기술 변화가 아니라 국제무역 구조의 재편이다.
 
  프리드먼의 ‘평평한 세계’는 누구에게 평평했는가? 미국 러스트벨트의 노동자들에게는 아니었다. 그리고 AI 시대에 인도와 필리핀의 IT 노동자들에게도 아닐 수 있다. 존 페리 발로의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은 결국 틀렸다. 사이버스페이스는 독립적이지 않으며, 물리적 인프라 위에서 돌아가고, 그 인프라는 국가와 기업이 통제한다.
 
  기술 유토피아의 꿈은 끝났다. 이제 현실을 직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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