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발굴] ‘한미동맹의 산파역’ 월터 S. 로버트슨 ② : 월간조선

1953년 1월 “한국 전쟁을 조속히 끝내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였다. 아이젠하워는 하루라도 빨리 한국 전쟁을 끝내야 할 급박한 상황이었고 의회 상하 양원도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어서 대통령의 공약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한국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었다. 이 대통령은 남북 분단 상황에서의 종전(終戰)을 반대하면서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休戰)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또 다른 침략의 구실을 준다고 주장했다. 1951년부터 시작된 공산 측과의 휴전 협상이 진전을 보이지 못한 것도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우려와 신념 때문이었다. 미국 군부(軍部)와 정보기관에서 이승만 제거 계획이 은밀하게 수립된 것도 신임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공약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극동 담당 차관보 취임

1953년 2월 초 저녁 시간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금융인으로 28년째 스콧 앤 스트링펠로 공동대표로 일해온 월터 로버트슨은 자택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 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취임한 존 포스터 덜레스(1888~1959년)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덜레스 장관은 극동 지역 정세를 논의하기 위해 편한 시간에 워싱턴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로버트슨은 국무부 장관실에서 한 시간 정도 극동 정세 전반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8년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덜레스 장관과는 중국 주재 미국대사관 공사로 부임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연합 국제기구 회의 호주대표단과의 오찬에서 만났던 구면이었다. 또한 중국에서 귀임(歸任)한 후 국무부 자문위원회 직책을 맡아 간혹 워싱턴에서 회의를 한 적이 있었다. 때문에 로버트슨은 덜레스 장관의 “도와달라”는 요청을 이 같은 자문 역할 정도로 이해하고 새로운 직책을 제의하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내 능력의 한도 내에서 기꺼이 돕겠다”고 답했다.

일주일 후 워싱턴에서 다시 만난 덜레스 장관은 로버트슨에게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직책을 맡아달라고 제의했다. 로버트슨은 단호하게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서도 공직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으며, 만약 정부 직책을 맡고 싶었다면 1946년도에 중국에서 사임하고 급거 귀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서 자신의 가족과 평생의 전문직, 그리고 개인적 연고 등이 있는 리치먼드를 떠나서 또다시 공직을 맡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덜레스 장관 역시 철저하고 집요했다. 그는 왜 이 시점에서 미국 정부가 로버트슨 같은 진정한 애국심으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고 현실 파악과 분석이 탁월한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지 역설했다.

반전(反轉)은 이 시점에서 일어났던 것 같다. “아내와 우선 상의해 보겠다”는 로버트슨의 다분히 유보적인 대답을 듣고 덜레스 장관은 “방금 부인과 우선 상의해 보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더는 당신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웃으면서 화답했다.

로버트슨 등장은 ‘신의 한 수’

덜레스 국무장관(오른쪽)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 7년간 국무장관을 지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워싱턴에서 두 번째로 덜레스 장관을 만나고 귀가한 후부터 여러 계층의 친지로부터 정부의 제의를 받아들이라는 설득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로버트슨이 극동 담당 차관보 직책을 맡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기까지는 한 달 이상이 걸렸다. 로버트슨은 퇴임 후 “1943년부터 호주와 중국에서 근무하면서 그 지역의 정세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들을 스스로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포함되는 극동 담당 차관보 직책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 결정은 이승만 대통령과 분단된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신(神)의 한 수’였다. 로버트슨 같은 인물이 미국 정부의 극동 정책을 담당하지 않았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에버레디(Ever Ready) 작전으로 제거될 수도 있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또한 체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덜레스 장관에게 로버트슨을 천거했던 인사는 당시 하원에서 중국을 위시하여 동아시아 지역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월터 주드(1898~1994년) 의원이었다. 로버트슨이 주드 의원을 처음 만난 것은 중국에서 귀국한 직후인 1947년 1월 리치먼드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였다. 로버트슨은 이후 중국 내전(內戰)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대안(代案)을 제시하는 주드 의원과 지속적인 교류를 유지해 왔다. 다른 인사들도 덜레스 장관에게 로버트슨을 천거했다. 마셜 장군 역시 명확하고 단호하게 극동 담당 차관보로 월터 로버트슨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천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월터 로버트슨이 결단을 내리게 된 이유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장관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한국 전선에서는 7년 전 자신이 중국에서 협상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공군이 미국 병사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버트슨은 퇴임 후 한국 전선에서 공산군을 저지하지 못하면 동남아시아까지도 위험하다는 판단으로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를 맡았다고 술회했다.

덜레스 장관을 존경한 로버트슨

미국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는 중국, 일본, 한국 등 극동 3국을 포함하여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 지역 12개국 등 도합 15개국을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이다. 이때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이 한반도를 위시하여 인도차이나반도와 인도네시아에서 공산 세력을 앞장 세워 공산혁명을 획책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로서는 한국 전쟁의 휴전이 당면 과제였다.

월터 로버트슨을 발탁한 덜레스 장관은 어떤 인물인가? 1888년 워싱턴 DC에서 태어난 덜레스는 프린스턴과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고 미국의 대형 법률회사에서 일하면서 주로 국제법에 관심이 많았다. 1944년과 1948년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토머스 듀이의 외교 정책 수석 고문을 지냈다. 그의 조부와 삼촌이 국무장관을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덜레스 자신도 국무장관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트루먼 대통령의 특별고문으로 유엔 창설에 앞장서서 미국 주도로 국제연합을 뉴욕에 자리 잡게 했다.

1952년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 장군은 덜레스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아이젠하워가 1956년 재선된 후에도 계속 국무장관을 맡고 있다가 1959년 지병(持病)으로 퇴임 직후 별세했다. 국무장관이 같은 대통령 아래서 7년간 계속해서 재임하고, 극동 담당 차관보도 장관과 끝까지 함께 일한 경우는 미국 역사상 흔치 않은 경우다.

로버트슨은 1965년 7월 덜레스 장관의 모교 프린스턴대의 필립 크로월 군사역사 교수와 대담을 가졌는데 이때 6년 전 작고한 덜레스에 대한 헌사(獻辭)와도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국무부에서 업무를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선량한 성품과 객관적 업무 태도, 그리고 백과사전 같은 놀랄 만한 지식과 과거와 현재 주요 사안에 대한 인식에 감복했습니다. 그는 또한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깊은 배려를 베푸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예민한 사안에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는 주변 동료들을 감동케 했습니다.

그는 ‘예스 맨(yes man)’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안에 견해를 물었을 때 솔직하고 거리낌 없이 확신을 가지고 대답하지 않으면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국무부에서 다루는 사안들은 대부분 흑백 논리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그는 항상 많은 정보를 취합해 다각적인 면에서 검토해야 하는 현안들을 정책 입안자들과 함께 슬기롭게 처리했습니다.”

이승만 제거 작전 협의회의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가 취임한 지 두 달째 되던 날인 1953년 5월 29일 워싱턴에서는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 연석회의가 소집되었다. 백악관과 국방부 및 중앙정보국(CIA) 등 5개 부처의 고위급 19명이 참석한 민감하고 중요한 사안을 다루기 위한 회의였다.

새 행정부가 조속한 휴전을 요구하자 미국 군부에서는 1952년 7월 부산 정치 파동 때 이승만 제거 작전으로 마련했다가 폐기한 ‘에버레디’ 작전 계획을 보완해 이 대통령을 구금하고 백선엽(白善燁) 장군을 내세우는 새로운 작전을 수립했다. 회의가 시작되자 J. 로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이승만을 감금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극단적인 비상조치 계획을 마련했고 우리와 협력할 수 있는 백선엽 한국 육군참모총장이 지금 워싱턴에 와 있다”고 보고했다. 이어 위클리어 클라이트 에들먼 육군본부 기획국장이 에버레디 작전의 세부사항을 설명하면서 유엔군이 취해야 할 주요 조치들을 열거했다. 핵심 조치는 이 대통령을 구금하고 계엄을 선포한 뒤, 한국 육군이 계엄을 실행하고 이에 반대하는 민간 지도자들과 군(軍)지휘관들을 미국 8군 사령관에게 충성하는 세력이 구금(拘禁)해 유엔군 사령부 휘하의 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에들먼 육군본부 기획국장의 발언이 끝난 후 국무부의 극동 담당 존슨 부차관보와 매튜스 국무부 부차관보가 발언했다. 이후 월터 로버트슨 극동 담당 차관보가 발언을 시작했다.

‘극비문서’에서 해제된 후 공개된 당시 회의 기록을 읽어보면 로버트슨의 발언은 일종의 폭탄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이날 회의에 앞서 에버레디 작전에 관한 자료를 국무부에서 사전에 받아 봤었는지 아니면 현장에서 처음접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여하튼 공산군과 휴전 협정을 진행하고 있는 기라성 같은 군 장성들 앞에서 그들이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려는 작전 계획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버트슨의 발언은 폭탄선언과 같은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이었음에도 참석자들이 그의 발언을 경청하고 수긍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항구적인 세계 평화를 위해 다각적으로 진력하고 있던 미국의 기본 가치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한국 정부를 접수합니까. 이런다면 우리 자신이 침략자와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나는 순전히 군사적인 관점에서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일련의 행동을 고려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승만에게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충분한 기간 동안에는 어떤 행동을 유보하는 조건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에버레디 작전의 실행을 전제로 세부사항을 논의하려던 연석회의 분위기는 로버트슨의 이 발언으로 반전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클라크 사령관이 계엄을 발동, 이승만을 감금하고 군사정부 수립을 선포할 권한이 있는가, 이승만에게 상호방위조약을 약속하는 것이 합당한가의 문제”라고 핵심을 짚었다. 국무부의 존슨 부차관보는 “우리가 이승만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든 그것은 한국 국민들 손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해군참모차장 던캔 제독은 “이승만이 정상 위치에 남을 수 있게 안보조약을 체결, 이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고 언급했다.

연석회의는 로버트슨의 발언으로 방위조약 문제가 긍정적으로 비치면서 에버레디 작전의 실행과 방위조약 제의 두 가지 안(案)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올리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날 연석회의에서 에버레디 작전 실행으로 결론이 내려져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채택되었다면 대한민국은 물론 공산군과 대치하며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던 전선에도 극심한 혼란과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방어하는 유엔군의 명분도 퇴색되는 상황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아이젠하워, 방위조약 건의 수용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건의를 하기 위한 회의가 다음 날인 5월 30일 오전 11시 국무부 장관실에서 열렸다. 국무부와 국방부 장관, 합참을 대표한 육군참모총장, 그리고 국무차관, 국방부 국제 안보 담당 차관보,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육군본부 G-3(작전) 담당 참모차장, 국무부 존슨 부차관보, 국방부 해외 군사국 북동아시아 과장 등 9명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한국 정부가 휴전 협정 체결과 시행에 동의하면 한국군을 유엔군 사령관 지휘하에 존치, 미국-필리핀 방위조약, 미국-호주-뉴질랜드 방위조약과 같은 수준의 안보조약 체결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참석자들은 백악관으로 가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났다.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미방위조약 체결을 건의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1953년 6월 6일자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방안을 재가(裁可)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親書)를 통해 방위조약 체결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휴전 협정 체결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미국이 휴전을 전제로 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증강, 그리고 경제 원조를 약속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송환 문제와 인도 등 중립국 감시단의 입국 불허(不許)를 주장하면서 미국을 계속 난처하게 만들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친서에 회신을 보내는 과정에서도 이 대통령은 한반도의 일본 식민지화와 그 후 남북 분단, 그리고 한국 전쟁 발발은 미국의 실책(失策)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휴전을 서두르는 미국을 비판하기도 했다.

반공포로 석방

그러자 미국 국방부는 또다시 폐기했던 ‘에버레디’ 작전 계획을 수정하여 비상대책을 마련했다. 국무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공식 방문을 제의했다. 이 대통령은 전쟁 중이라 자신의 미국 공식 방문은 불가능하다면서 대신 덜레스 장관의 방한(訪韓)을 요청했다. 덜레스 장관은 대통령과 협의 끝에 자신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신임하는 로버트슨 극동 차관보가 방한할 것이라 통보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로버트슨 차관보를 특사(特使)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이를 미국 측에 통보한 다음 날인 1953년 6월 18일 새벽 5시 이승만 대통령은 논산·부산·마산·광주의 4개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2만7000명의 반공포로들을 기습적으로 석방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에게 사전에 통보하지 않은 이유와 반공포로 석방의 불가피성을 해명했지만 미국의 조야(朝野)와 자유세계는 물론 공산국가조차도 경악했다. 워싱턴에서 개최된 국가안보회의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 같은 행동을 계속한다면 미국은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처칠 영국 총리는 한국 정부에 공문을 보내 비판했다. 하지만 국제정세에 누구보다도 밝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닌가. 이런 상황이 발생할 줄 모르고 반공포로 석방을 강행한 것이 아니었다. 국제법을 무시하더라도 반공포로는 끝까지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뒤에는 앞으로 긴박하게 전개될 미국과의 또 다른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에도 불구하고 월터 로버트슨 특사는 6월 23일 전쟁 중인 대한민국 수도 서울로 향했다. 로버트슨 특사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휴전 협정 및 상호방위조약 등을 협의하는 데 있어 이승만 대통령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승만의 분노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하는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맨 왼쪽). 그는 휴전 협상 내내 이승만 대통령의 비난에 시달렸다.

일본 도쿄에서 관계자들과 전략회담을 가진 후 로버트슨 특사 일행은 한국 전쟁이 시작된 지 꼭 3년 만인 6월 25일 서울에 도착했다. 로버트슨 특사는 공항에서 “미국과 한국 두 나라의 목적은 동일하며 이를 성취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이고 영속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조정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도착 성명을 발표했다.

로버트슨 특사와 일행은 6월 26일 오전 9시25분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에 도착해 한국군 군악대의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을 위시한 한국 정부 수뇌부의 환영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 특사의 1차 회담은 확대회담이 끝난 후 단독회담으로 계속되었지만 앞으로의 전망이 밝지 않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로버트슨이 1차 회담이 끝난 후 국무부에 올린 보고서와 퇴임 후의 구술 자료를 보면, 첫 만남 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클라크 사령관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고 미국이 자신을 무시하고 휴전에만 관심이 있다며 비판하는 것을 보면서 확대회담으로는 협상을 진행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이 대통령과의 단독회담을 제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음 날 6월 27일 2차 회담을 위해 로버트슨 특사는 또다시 경무대로 향했다. 그는 “압록강까지 진군하자” “공산주의자들과 휴전은 없다”는 시민들의 시위가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6월 28일에 있었던 3차 회담에서도 로버트슨 특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말을 진중하게 들으며 중요한 대목은 메모를 하기도 했다. 물론 양국 정부가 주고받은 비망록 내용에 대해 실무적인 토론은 있었지만, 로버트슨은 2차 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이 대통령의 말을 듣는 데 집중했다.

6월 29일에 열린 4차 회담은 확대회담 형식이었다. 두 나라 정부 간에 주고받은 비망록상의 포로송환 문제와 방위조약 내용 등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과 로버트슨 특사가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5차 회담은 6월 30일 경무대에서 단독회담으로 진행되었다. 휴전 성립 후 개최 예정인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정치회담이 결렬될 경우 전투 재개를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에 미국이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회담은 위기에 처했다.

“이승만, 지략 있지만 광신자”

로버트슨 특사는 앞의 세 차례에 걸친 단독회담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을 주로 듣기만 했다. 이런 과정 속에 그는 ‘인간 이승만’과 ‘대통령 이승만’, 그리고 ‘독립운동가 이승만’에 대해 모르던 사실을 새로 알고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특출한 인물에 대한 그의 존경심과 그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평소 자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로버트슨이 5차 단독회담 후 국무부에 ‘개인적인 의견과 관찰’이라는 전제로 보낸 보고서를 보면, 그가 노련한 동양의 정치인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 비판적인 면도 있지만 대체로는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단시일에 이 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로버트슨이라는 인물이 한층 돋보이기도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승만 대통령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지략(智略)이 있지만 자신의 나라를 자살로 몰고 갈 수 있는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논리적인 광신자(狂信者)다.

둘째, 그는 휴전 협정안을 두고 공산주의자들이 군사행동으로 성취하려다가 실패한 것을 협상으로 쟁취하려는 능숙한 계책이라는 굳은 확신을 갖고 있다.

셋째, 그는 자신이 미국과 동맹국들의 계속적인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고 미국과 세계 각국에서 비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넷째, 그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이 그가 일생을 바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야 한다.

다섯째, 그의 협력은 아직 가능하지만 그를 돕는 동시에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여섯째, 이승만은 그의 나라를 미국을 포함한 여타 국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공산주의와 싸울 의지를 지니도록 각성시켜 놓았다. 이 같은 정신과 용기는 보존되어야 하지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

로버트슨 특사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의 핵심은 여섯 번째 항목이다. 이 같은 평가는 과거 중국 대륙이 미국의 연속적인 실책으로 공산화되었다고 확신하며 아직도 미국의 각계각층에는 공산주의의 세계 정복 야욕을 실감하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동조하는 세력이 있다고 보는 로버트슨이라는 인물만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로버트슨 특사의 이 같은 평가에 대해 덜레스 국무장관은 워싱턴 국무부 본부에서도 동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버트슨, “나는 듣기만 했다”

6차 단독회담은 7월 2일 한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전투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로버트슨은 “휴전 후 정치회담이 결렬되더라도 전투를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고 맞섰다. 결론 없이 같은 말만 반복되는 회담에 지쳐 로버트슨이 서울에서 시간 낭비 않고 떠나겠다고 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귀국을 만류했다.

공직에서 퇴임 후 작성된 구술록에서 로버트슨 특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단독회담 초기에 듣는 위주의 만남을 계속했던 자신의 전략을 회고했다.

“나는 매일 아침 그와의 협의를 위해 경무대를 찾았는데 그는 말하고 나는 듣기만 했습니다. (중략) 그가 나에게 논쟁을 유도하려 했을 때도 듣기만 했습니다. (중략) 그는 분노할 이유가 많았고 말을 끝까지 듣고 나면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를 알게 되고 일부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공감도 했지요. 한국의 진정한 독립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광적(狂的)인 그의 헌신에 대해 경외감(敬畏感)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일본과 싸웠고 공산주의자들과 싸웠는데, 이제는 미국이 한국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기려 한다며 미국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중략) 그가 할 말을 다 하고 기력이 다하면 내가 할 말을 했고 그는 이해한다고는 했지만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버지니아 출신 신사이며, 투자은행 대표로 잔뼈가 굵은 리치먼드 금융인이며, 2차 세계대전의 격동기에 호주와 중국에서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절감한 미국의 고위 외교관의 인품과 미덕, 그리고 인내심이 읽힌다. 만약 첫날 만남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클라크 사령관을 폭발적으로 비난하고 미국의 거듭된 실책을 거론할 때, 로버트슨이 반론(反論)을 했다면 6차 회담까지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미 국무부, 귀국 지시

1953년 8월 8일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변영태 외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假)조인했다.

로버트슨 특사의 이 같은 회담 초기 전략에도 휴전 협정 체결에 대한 진전이 없자 로버트슨 특사의 소환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국무부는 로버트슨에게 협상이 진전이 없다면 회담을 중단하고 귀국해도 좋다는 강경한 훈령(訓令)을 보냈다.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을 시작한 지 단 8일 만에 보낸 귀국 훈령이었다. 만약 로버트슨이 귀국했다면 한미 양국은 물론 공산권까지 포함하는 전 세계가 놀랐을 것이다.

또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공식 방문 대신 덜레스 국무장관을 서울로 파견해 달라던 요청이 실현되었을 경우, 과연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울에서 8일이나 머물면서 이승만 대통령과 연속해서 회담을 진행했을까? 로버트슨의 특사 선임은 한미 관계의 파탄을 우려한 하늘이 내린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7월 3일 로버트슨은 브릭스 주한 미국대사, 머피 유엔사 휴전 담당 고문과 함께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7차 회담을 이어나갔다. 이 대통령은 또다시 휴전 후 정치회담에 실패하면 한국은 통일을 위해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 했고, 로버트슨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또 다른 전쟁에는 참전할 수 없다는 원칙론을 되풀이했다.

7월 4일 열린 8차 회담은 백두진(白斗鎭) 총리와 변영태(卞榮泰) 외무장관도 참석한 확대회의로 진행됐다. 로버트슨 특사는 국무부 본부로부터 진전이 없으면 귀국하라는 훈령을 받았지만, 이를 묵살하고 회담에 임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국이 손을 떼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전제하면서 “그간 진행된 논의를 통해 합의에 도달한 것으로 발표를 하자”고 독촉했다. 이 같은 로버트슨의 설득에 이승만 대통령은 마지못해 감사를 표하면서 “그동안 로버트슨의 노력이 한국의 우려와 의문을 씻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치하했다.

‘호소하고’ ‘소리 지르고’ ‘기도했다’

이런 상황에 이승만 대통령도 타협의 묘수를 찾아야만 했다. 7월 6일 9차 회담은 단독회담으로 진행되었다. 로버트슨은 회담이 끝난 후 기자들에게 우호적인 만남이었다고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호소하고’ ‘소리 지르고’ ‘기도했다’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긴박한 분위기의 회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머피 유엔사 휴전 담당 고문이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국무부에 보내고 국무부에서도 로버트슨 특사의 귀국을 종용하는 훈령을 보내는 등 워싱턴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비현실적인 요청을 계속하는 고집쟁이 늙은이’로 또다시 인식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로버트슨은 7월 6일 국무부에 보낸 별도의 보고서를 통해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의 한국에 대한 선의(善意)에 의문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미국의 역사와 정치 제도, 의회의 역할을 잘 알고 있어 상원이 상호방위조약에 동의할지에 의문을 갖고 있을 뿐이다”라고 알렸다.

지난 5월 29일 워싱턴 연석회의에서 에버레디 작전을 취하시킨 것을 비롯, 두 번째로 이승만 대통령을 구출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덜레스, “이 시점에서 최선의 결과”

1953년 8월 한국을 다시 찾은 로버트슨 차관보(오른쪽)는 이승만 대통령의 안내로 덜레스 국무장관과 함께 경복궁 등을 돌아보았다. 사진=대통령기록관

10차 회담은 7월 8일 열렸다. 두 나라는 방위조약과 관련해 미군 주둔지를 한국과 주변 지역으로 하자는 데 합의했다. 로버트슨은 ‘상원에서는 방위조약이 연내(年內)에 통과되기는 힘들겠지만 반대하는 의원들이 없어 다음 해 초에는 확실히 비준된다’는 의견도 이승만 대통령에게 통보했다.

7월 9일 열린 11차 회담은 두 사람 간의 단독회담으로 진행되었다. 8개 조항으로 구성된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草案)이 검토되었다. 로버트슨 특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이해했다는 결론을 전제로 그동안 이승만의 양보를 7가지로 정리해 국무부에 보고했다. 덜레스 장관은 로버트슨 특사의 보고를 받고 “이승만의 초안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나 이 시점에서 합의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라고 로버트슨의 노고를 치하했다.

드디어 1953년 7월 11일에 열린 12차 이승만-로버트슨 단독회담에서는 그동안 이견(異見)을 보였던 정치회담, 포로 문제, 상호방위조약 조속 체결 등에 합의해 12차례 총 955분(16시간)에 걸친 회담을 마무리했다. 로버트슨이 이승만의 애국심과 철저한 반공정신을 이해하고 존중하지 않았다면 합의를 도출하기 힘든 협상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휴전선 양방에서의 총성이 3년여 만에 멎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그해 8월 3일 덜레스 국무장관과 함께 한국을 다시 찾았다. 이승만 대통령과 12차례의 긴박했던 협상을 타결한 후 귀국한 지 22일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로버트슨은 6일간 서울에 머물면서 4차례에 걸쳐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을 검토·협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안내로 경복궁 등 고궁(古宮)과 유적을 둘러보는 등 여유 있는 일정 속에서 8월 8일에는 한미조약 가(假)조인식에 참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 해인 1954년 7월 미국을 국빈(國賓) 자격으로 공식 방문했다. 이때는 로버트슨 차관보가 입원 중이어서 유감스럽게도 공식 석상에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상면할 기회가 없었다.

동지적 관계로 승화

1956년 12월 로버트슨 차관보는 부인과 함께 동북아시아 지역을 순방하면서 서울을 방문, 이승만 대통령 부부를 만났다. 로버트슨 차관보가 귀국 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를 읽어보면 서울에서 12차의 긴박했던 협상 과정 이후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며 협력하는 동지적 관계로 발전·승화하면서 이제는 배우자들도 이 같은 관계를 숙지하며 공감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대통령 각하.

지난번 장기간 힘든 여행 도중에 각하와 영부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보람 있는 기회였습니다. 본인은 특히 귀하와 한미 두 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공동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던 것을 매우 뜻있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각하의 견해는 미국의 신뢰하는 동맹국이며 자유를 위한 용맹한 투쟁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본인과 저의 배우자는 우리의 소중한 우정을 상기하면서 각하의 우아한 영접과 아름다운 선물에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부부는 각하 내외분께 깊은 감사와 함께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1956년 12월 29일 월터 S. 로버트슨〉

1957년 6월 로버트슨 차관보는 부인과 함께 또다시 한국을 찾았다. 1953년 6월 25일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담판을 짓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 후 네 번째로 서울을 방문한 것이며 그의 마지막 방한이었다. 로버트슨 부부가 서울을 떠난 후 이승만 대통령이 그에게 보낸 친서를 읽어보면 국무부 극동 차관보의 직책으로 휴전 후 한국군의 증강과 경제 원조에 깊이 적극적으로 계속 협력하고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버트슨 귀하.

미국이 한국에 현대식 무기 제공을 결정하는 데는 귀하의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우선적으로 상기했습니다. (중략) 이 기회에 귀하의 현 상태에 대한 우려와 함께 지속적인 지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 국민은 미국의 경제 원조 없이도 생존할 수 있겠지만 미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자유국가 국민으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자유를 위해서 귀하의 우정과 협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의 배우자와 함께 귀하의 배우자를 동반한 방문을 즐겁고 기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가까운 장래에 다시 방문해 주시기를 소망하면서 제 배우자도 로버트슨 여사께 따듯한 인사를 보냅니다.

1957년 6월 28일 이승만〉

‘우리 시대 최고의 자유 투사 중 한 명’

이승만 정부 시절 공보처에서 발행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안내서.

월터 로버트슨 차관보는 덜레스 국무장관이 1959년 5월 22일 별세하자, 같은 해 6월 30일 6년 동안 봉직했던 극동 담당 차관보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임기가 1년여 남은 상황에서 공산 세력의 팽창을 일선에서 저지하고 있는 한국과 반공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을 깊이 이해하고 있던 덜레스-로버트슨 콤비가 동시에 국무부를 떠난 것이다. 이 대통령이 느꼈을 애통함과 상실감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승만 대통령이 다음 해 1960년 3월 26일 로버트슨에게 대한민국 국가 훈장을 수여하면서 직접 쓴 훈장 수여 사유서를 보면, 로버트슨에 대한 우정과 신뢰, 그리고 동지적 유대 관계를 실감할 수 있다.

〈그의 탁월한 지도력과 우리나라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본인은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위임된 권한에 따라 존경하는 월터 S. 로버트슨에게 대한민국 훈장을 수여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로버트슨 씨는 미국 정부 국무부 극동 차관보로 재임하는 동안 자유세계의 안보에 위대하고 지속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공산주의의 사악하고 공격적인 의도를 알고 있던 그는 개인적으로나 공식적으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웠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독려했습니다. 그는 중국 본토의 공산주의 정권 불인정과 유엔 가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공인된 지도자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미국 외교 정책의 핵심으로 삼는 데 기여함으로써 그는 모든 자유 아시아 국가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민주주의 생존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로버트슨 씨는 국무부에서 오랜 기간 재직하는 동안 대한민국의 입장과 문제에 대해 항상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의 한국에 대한 우정은 결코 약화된 적이 없으며 그는 자신의 영향력과 학문을 활용하여 자유세계의 방위 태세에 대한 한국의 기여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습니다. 또한 그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힘을 끊임없이 옹호해 왔으며 공동의 대의(大義)에 기여하는 국가들에 최대한의 미국의 지원을 촉구해 왔습니다. 은퇴 후에도 로버트슨 씨는 진실과 자유를 수호하고 이를 통해 조국의 이상을 영속시키기 위해 계속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미국인일 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위대하고 충성스러운 시민입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자유 투사 중 한 명으로서 그는 자신과 미국에 헤아릴 수 없는 영예를 안겨주었습니다. 저는 한국의 진정한 친구이자 미국 민주주의 지도력의 모든 장점을 상징하는 이 정당한 훈장을 수여하게 되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1960년 3월 26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나는 그분에게 매료당했다’

이 훈장이 수여된 지 24일 만에 4·19 학생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하와이에서 말년 생활을 보내다가 1965년 7월 19일 영면(永眠)했다.

로버트슨은 이승만 대통령의 인물됨과 그의 퇴진에 대해 1967년 4월 컬럼비아대와 《뉴욕타임스》가 마련한 역사 구술 녹취(대담 에드윈 교수)에서 이렇게 말했다.

“덜레스 장관은 물론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이승만을 열정적인 애국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 생애를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중략) 나는 나이 많은 그분에게 매료당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협상을 위한 만남이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과격한 감정을 표출하지 않을 때에는 완벽하고 매혹적인 성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북한이 1950년 기습 공격을 가했을 때 이승만의 불굴의 정신이 없었다면 한국인들이 단결해서 침략군들을 퇴각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략) 그는 독재자였고 결점도 있었습니다. 협의할 사람이 없을 때는 홀로 결정하고 침략군에 밀리고 있을 때는 국회에서 토론할 수도 없었기에 독재적인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결점이 더욱 심화되었고 부도덕한 정치인들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중략) 이는 역사의 비극이었으며 그가 미리 은퇴했어야 했기에 수년 전부터 미국은 이 같은 징조를 감지하고 자신의 조국과 자유세계에 최상의 기여를 한 연로한 지도자에게 정권을 포기하고 은퇴할 것을 소망했습니다.”

동지적 관계로 승화했던 이승만-로버트슨 관계는 그가 학생 혁명으로 물러나기 24일 전 로버트슨에게 훈장 수여로, 그리고 로버트슨이 은퇴한 지 8년 후에 이 박사에게 바친 헌사와 아쉬움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