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 대선의 이념논쟁과 시대적 과제

보수·진보가 아니라 비전이 문제다!

  • 글 : 임양택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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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진보가 공존하려면 正體性 경쟁이 아니라 정책 경쟁 벌여야
⊙ 이념적 잣대가 아닌 우선순위에 따른 전략적 선택이 필수

林陽澤
⊙64세.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美 조지아주립대 경제학 박사.
⊙한양대 경제금융대 학장,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재정경제부 금융발전심의위원 역임.
    現 한양대 경제금융대 교수, 민주평통 상임위원.
⊙저서: 《쿼바디스 도미네 : 성장· 복지· 통일을 위한 청사진》《한국형 복지사회를 위한 청사진》 등.
2012년은 민족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3월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취임했으며, 10월에 중국에서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후임자인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이 등장한다. 11월엔 미국의 대선, 12월 19일엔 한국의 대선이 예정돼 있다. 금년 1월 타이완 총통 선거에다 일본의 불안한 정치상황까지 고려하면 한반도 안팎의 권력 공백 내지는 회오리 상황이 끊이질 않고 있다. 북한의 불안정한 3대 세습은 한반도의 안정을 해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일·중·러로 둘러싸인 한반도는 과거는 물론 현재나 미래에서도 강대국의 ‘거대 게임’(The Great Game) 무대일 수밖에 없다. 임진왜란(1592~98), 청일전쟁(1894~95), 러일전쟁(1904~05)에다 국토분단(1945년)만 봐도 이런 가설은 그대로 입증된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상반기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핵무장, 북한 나진항의 중국군 주둔 등 중국의 동진(東進), 일본의 탈미입아(脫美入亞)로 인한 미일 조약의 잠재적 동요, 2012년 APEC 정상회담을 디딤돌로 아시아 진출을 노리는 러시아의 남진(南進) 등이 활발하다. 아시아에서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미국과 중국, 이른바 G2의 경쟁도 한반도엔 위험요소일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는, 한미상호방위조약(1953), 미일방위조약(1978 및 1979), 미국의 타이완관계법(1979)과 중북우호조약(1961), 북러우호조약(2000)이 ‘절묘한’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태풍의 눈’으로 하는 동북아의 ‘회오리 바람’은 남방 3각관계와 북방 3각관계의 세력균형을 균열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한국사회는 우파와 좌파 사이 첨예한 이념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12·19 대선은 이 갈등의 증폭기 역할을 할 것이다. 결국 2012 대한민국 국민의 선택이 미래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 명백하다. 그 운명이란 한국이 선진복지사회로 진입할 것인지, 아니면 최근 남(南)유럽처럼 재정파탄과 국가부도의 위기상황으로 곤두박질칠 것인지이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
 
  세계가 당면한 글로벌 경제위기의 극복 방안으로서 신(新)자유주의(New Liberalism)인가 혹은 케인지언(Keynesian)인가를 두고 경제사상적 논쟁을 벌이고 있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고상한’ 경제철학적 논쟁은 차치하고 보수(우익)와 진보(좌파)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심화, 확산되고 있다.
 
  보수와 진보는 ‘자유’와 ‘평등’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인류의 정치적·경제적 발전은 한마디로 자유의 확대와 함께 이루어져 왔다. 자유는 시민을 압제의 사슬에서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기업가 정신을 진작시켜 창업과 고용을 창출했다.
 
  그러나 자유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 그것은 소득분배구조의 악화와 사회 양극화 현상이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말하는 ‘자연상태’ 혹은 존 롤스(John Rawls)가 일컫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 다르고 능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불평등을 개선하자는 것이 진보다.
 
  이젠, 때늦은 국력소모적인 이념 간 논쟁을 끝내고 선진복지사회의 구축을 위한 모든 지혜를 모아야 한다.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좌파는 공존의 대상이요 경쟁의 대상으로 끌어안고, 대한민국에 적대적인 폭력 공산혁명세력은 지각 있는 유권자의 표로써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선진국의 문턱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진보와 보수가 공존하려면 나라의 근본에 대한 경쟁, 국가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경쟁보다 정책에 대한 경쟁, 정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해야 한다. 보수든 진보든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이념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 논쟁의 핵심은 성장 동력을 확충하는 걸 우선해야 할지, 사회적 양극화를 막는 데 먼저 힘을 쏟아야 할지, 아니면 이 둘이 함께 갈 방법은 없는지이다. 물론, 이런 주제들에 대한 비전 제시와 정책 개발은 어느 한 집단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토론에 기반한 국민적 공론에 의해 결정될 문제다.
 
 
  민주당, 從北과 확실히 단절해야
 
  민주당은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큰 복지’란 깃발과 ‘남북(南北), 이대로 갈 수는 없다’라는 구호를 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그 슬로건보다 더 시급한 당면과제는 종북좌파(從北左派)와의 관계를 확실히 단절하고 ‘애국좌파’(愛國左派)로서 합리적이고 건강한 진보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당이 친북좌파와 함께 정권을 잡으면 대한민국은 다시 표류하게 될 것이다.
 
  종북좌파들은 북녘 동포들을 기아선상으로 몰아내며 인권탄압과 핵개발에 질주하는 북한정권을 옹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들은 수령 독재에 신음하는 동포의 인권문제를 애써 외면하며 북한인권법 제정에 극구 반대한다.
 
  진보의 가장 고귀한 상대적 가치는 도덕성이다. 최근 통합진보당은 국회의원 비례대표 경선 선거부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나아가 선거 부정행위 자체를 부인하는 금번 행태는 반민주적인 동시에 반진보적이고 반도덕적이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이들과의 연대를 고집하고 있다.
 
  모름지기, 민주당은 유럽(특히 프랑스와 영국) 반공좌파(反共左派)의 슬기로운 처신을 배워 실천해야 한다.
 
  서유럽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이 확실하게 선(線)을 긋게 된 것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의 교시 때문이었다. 1917년 2월 차르 체제를 무너뜨린 케렌스키 혁명정부를 전복하고 집권했던 레닌은 1919년 공산주의국제연대(코민테른)를 만들고, 세계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공산주의자가 되라고 명령했다.
 
  1920년 프랑스 투르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부르고자 하는 다수파는 프랑스공산당(PCF)이 됐고, 사회주의라는 명칭을 고수한 소수파는 프랑스사회당이 되었다. 또한 영국노동당도 공산주의를 배격했다. 이 결과, 유럽에서는 반공좌파가 집권까지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유럽 유권자들은 반공좌파와 공산좌파를 식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Francois Hollande·58) 대통령의 첫날 연설과 행보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강조했던 빈부격차 해소 같은 좌파적 가치보다는 프랑스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 프랑스의 저력을 일깨우는 실용적 메시지로 채워졌다. 그는 또 “과학기술 발전과 노동생산성, 기업 활력 증대를 최우선적으로 추진하겠다”며 “(재정투입을 통한) 성장 등 유럽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덴마크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대의 경기 침체를 겪고 있다. 덴마크 총선(2011.09.15)에서 사회민주당의 헬레 토르닝-슈미트(Helle Thorning-Schmidt·45)가 이끈 좌파 진영이 10년 만에 우파에서 좌파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라스무센(Poul Nyrup Rasmussen)의 우파는 재정긴축을 주장했다. 즉 국내총생산(GDP)의 4.6%까지 치솟은 재정적자율을 낮추자고 주장했으며 복지예산을 감축하고 퇴직연금 수령 시작을 67세로 2년 늦추는 방안도 제시했다.
 
  토르닝-슈미트의 좌파는 반대로 공공지출을 늘려 경기부양을 도모하자고 했다. 교육과 의료 분야에 대한 정부의 집중 지원도 약속했다. 추가로 필요한 예산은 은행과 부유층에게서 세금을 더 걷어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그는 ‘매일 12분 더 일하기’ 운동을 제안했다. ‘12분 더 일하기’는 헬레 토르닝-슈미트 덴마크 총리가 주장한 덴마크 판(版)의 ‘경제 살리기 운동’이다. 하루에 12분씩 자발적으로 일을 더 해 일주일당 한 시간의 추가 근로 효과를 내자는 것이다.
 
 
  어설프게 야당 흉내내는 새누리당
 
  새누리당이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기본조건은 이명박 정부와 분명히 단절하고 이에 대한 합리적 정당성을 국민에게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다. 단순히 당명(黨名)을 변경한다고 해서 과거와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고(故) 김일영 전 성균관대 교수는 “이제 보수는 ‘프로콘’, 즉 프로그램을 가진 전문적 보수로 가야 살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출산율과 고령화 속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 비정규직 비중, 자영업 폐업, 천문학적 숫자의 가계부채와 국가부채, 근로소득·금융자산 소득·부동산 자산 소득의 극심한 불평등 등을 보며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바르게 대변해 줄 기구와 조직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보수의 이념을 포기함에 따라 한나라당(현재 새누리당)도 같이 표변해 버렸다는 점이다. 이젠 한국의 정치적 물결은 표 모으기를 위한 목적으로 진보 일변도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보수 단체들은 야당의 뒤를 쫓아가며 어설픈 흉내나 내는 새누리당의 집권도 도울 수 없다 말한다.
 
  좌파진영이 정부의 시장 개입 정당성을 설명하고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반대 근거로 사용해 왔던 것이 ‘헌법 119조 2항’(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이다.
 
  이 헌법 조항은, 이젠 보수 정당인 새누리당에서도 지도부의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는 “헌법 119조 2항에 적시된 대로 잘못된 상황을 규제해 경제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2010. 08.05). 즉 서민경제 활성화 등을 위해 최근 정부가 대기업들의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또한 홍준표 당시 서민정책특위 위원장은 특위 출범식(2010.09.30)에서 “일부에선 반시장적 포퓰리즘이라고 하지만 헌법 119조 2항에서 대한민국의 시장구조는 ‘사회적 시장경제구조’로 천명이 돼 있다”며 “자유주의적 시장구조만 하면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만 이득을 볼 수 있어 국가가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저 시류(時流)에 따라 이리저리 몰려가는 모습만 눈에 띌 뿐이다.
 
  집권 세력인 한나라당이 2011년 7월 10일 최고위원·정책위 연석회의에서 대학 등록금 완화 및 대기업 규제 강화, 법인세 추가 감세 철회를 거의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이명박 대통령 경제정책(MB노믹스)의 핵심에 해당하는 내용(법인세 감세와 기업규제 완화)이 바로 여당 지도부에 의하여 파기된 것이다.
 
 
  MB정부, 이념 아닌 이익을 保守
 
  집권당의 이런 행태는 현직 대통령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대부분의 한나라당 의원이 2008년 2월 총선 당시 530만 표의 차이로 압승하였던 이명박 대통령의 인기 물결 속에 당선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한 셈이다.
 
  이회창 후보에게로 간 350만 표를 제외하고도 530만 표 이상의 큰 차이로 출범했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폭락한 주된 원인은 ‘이념을 보수(保守)’하는 정부가 아니라 ‘이익을 보수’하는 정부로 비쳤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탈(脫)이념적인 ‘중도 실용’을 내세웠지만, 정치에서는 탈이념을 표방하는 것도 이념이다.
 
  여기서 특히 유념해야 할 점은 새누리당의 60쪽 분량 총선 공약집이나 민주당의 400쪽짜리 두꺼운 총선 공약집이나 외교·안보 분야는 맨 찬밥 신세라는 점이다. 헌법에서 대통령의 사명을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保衛)하며…’라고 했듯이 정권을 잡겠다는 것은 다른 무슨 일보다 나라를 지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뜻이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정권을 쥐고 있는 세력도 정권을 다시 잡겠다는 세력도 북의 미사일에 대해선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모름지기, ‘보수주의’(Conservatism)는 민족과 국가·종교·전통문화의 가치관을 유지 및 복원하고자 하는 이념이다. 그런데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전통과 민족주의에 대한 담론은 진보진영의 전유물이 돼 버렸다. 이 결과, 한국의 보수주의에 남은 것은 오직 시장밖에 없게 되었다.
 
  시장의 기능은 최근 신자유주의의 실패로 세계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MB노믹스)은 감세·규제완화·민영화라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그간 사람들을 약육강식의 경쟁 상황으로 내모는 비인간적 사회를 만들어 인간을 소외시키고 경제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파이낸셜 타임스》는 “신자본주의 실험은 실패했다”고 보도하였고,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지금의 금융위기는 시장만능주의가 부른 재앙으로 앞으로는 정부의 규제가 강화된 자본주의가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따라서 한국의 보수주의가 되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전통적 윤리와 도덕을 지키고 전통문화와 애국심, 민족주의에 호소함으로써 국민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우선순위에 따른 전략적 선택 있어야
 
  현재 우리는 탈이념적 민주주의 시대가 전개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이미 그 경제체제의 구조적 실패로 인하여 몰락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않고 있다. 권위주의적 다원주의는 경제정책의 성공을 통하여 민주주의에로의 길을 걷고 있다.
 
  이제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식과 더불어, 정치는 더 이상 ‘일반의지’(volonte generale)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생사를 걸고 투쟁하는 낭만적 행위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획득하는가’ 하는 문제를 결정하는 과정인 것이다.
 
  보수와 진보 혹은 우익과 좌익의 부질없는 논쟁 속에서 일반 대중은 분노를 넘어 허탈해 있다. 그들의 죄(罪)라고는 오직 이 시대에, 이 땅에 태어난 것 외에는 없다. 그러한 가운데, 국가와 민족의 에너지는 고갈되고 있다. 그러나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하듯이, 역사는 계속 발전할 것이다. 그러한 하늘의 소명(召命)을 실천할 메시아(messiah)를 기다린다.
 
  필자는 졸저 《한국의 비전과 국가경영전략》(2007년), 《쿼바디스 도미네: 성장·복지·통일》(2011년)에서 ‘국가적 목표’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민주사회’로 규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국가 과제로서 다음과 같이 3가지를 설정했다.
 
  ① 대내적 국가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Human Capitalism) 사회의 건설이다.
 
  ② 대외적 국가목표로서 동(東)시베리아 및 극동 러시아 지역의 에너지·자원 공동개발과 ‘동아시아 경제공동체’(EAEC·East Asian Economic Community)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③ 민족적 국가목표로서 한반도의 통일과 한민족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 국가과제에 대한 각각의 해결방향을 요약하면 [그림]과 같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선순위에 따른 전략적 선택이다. 대외적 국가과제와 민족적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내적으로 국민의 화합과 단결이 요구되는데, 때늦은 이념 간 갈등으로 인하여 당면한 대내적 국가과제마저도 제대로 실천할 수가 없는 질곡(桎梏)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지적한 10대 사회경제적 당면과제는 세 가지 즉 ① 지속가능한 경제성장 ② 고용·환율·경상수지의 안정 ③ 분배구조의 개선 및 복지재정의 확보와 관련한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勝者 獨食 구조 해소해야
 
  성장·안정·분배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각각 독립적인 가치가 아니라 상호 관련되어 있다. 특히 성장과 분배의 사회경제적 갈등은 자유와 평등의 정치철학적 갈등 혹은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기본 입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장과 분배, 자유와 평등, 보수와 진보라는 갈등구조는 인기영합적 사회보장 급여의 확대가 아니라, 완전고용(Full Employment)으로써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즉 시장경제체제는 본질적으로 경쟁을 통하여 소득불평등을 야기하기 마련인데, 처음에는 빈곤을 해결하기 위하여 복지가 요구되지만 나중에는 복지가 오히려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빈곤의 함정’(Trap of Poverty)에서 자족하게 만듦으로써 소득불균등의 사회구조를 고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득 양극화 및 소득 불균등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경제성장, 즉 ‘고용창출형 성장’(Job-creating Growth)이 필수적인 것이다.
 
  둘째, ‘소득 양극화’의 산업구조적 요인으로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저성장 기조하에서 수출과 내수의 연결고리가 약해지면서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그동안 유지되었던 ‘수출 증대→투자·고용 증대→내수(소비) 증가’로 이어지는 경제의 선(善)순환관계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약화된 것이다.
 
  성장·고용·분배의 선순환구조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총요소 생산성 향상에 의한 ‘내생적 경제성장 모형’(Endogeneous Growth Model)으로써, 실업증대는 인적자본(Human Capital) 확충에 의한 ‘고용창출형 경제성장’으로써, 소득분배의 불균등은 고용증대에 의한 사전적 소득분배구조 개선으로써, 소득 양극화는 중산층의 확대로써 각각 실현가능할 수 있다.
 
  셋째, 보수와 진보의 입장을 떠나, 승자독식(勝者獨食)의 사회구조는 해소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구조에서는 보수 진영이든 혹은 진보 진영이든 모두 공멸뿐이기 때문이다.
 
  소득분배의 불균등보다 사회적 해악이 큰 것은 소득 양극화이며, 이것을 야기하는 근본요인은 불공정한 경제구조에서 오직 승리한 사람만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사회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시스템에서, 부모는 자녀교육에 모든 것을 바칠 수밖에 없다. 이른바 6세(유치원 졸업), 13세(초등학교 졸업), 16세(중학교 졸업), 26세(대학교 졸업)에서 인생이 판가름나기 때문에 자녀들을 ‘중심부’로 보내기 위한 부모는 필사적 노력을 경주할 수밖에 없다. 그 대열에 끼어들지 못하면 사실상 ‘박탈의 악순환’과 ‘빈곤의 덫’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 ‘소득의 양극화’는 ‘교육의 양극화’를, 이것은 다시 ‘기회의 양극화’를 각각 불러온다.
 
 
  보수와 진보는 動態的으로 상호보완해야
 
  넷째, 필자는 대학생들에게 경제성장론을 강의할 때, 모든 생물체의 ‘신비’는 구조적·기능적 균형(balance)을 갖도록 창조되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하면서 ‘균형성장 및 발전’(balanced gro wth/development)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 창조의 ‘신비’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예를 들면 ‘두 팔’은 균형 속에서 ‘몸통’을 유지하는 도구이다. 오른팔과 왼팔은 각기 다른 기능을 갖고 있지만 한 몸을 위하여 모두 동시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어느 팔의 손이든지 간에, 손은 반드시 깨끗해야 몸통의 건강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좌우익의 사상적 대립은 역사관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지만, 좌우익의 ‘몸통’인 사회공동체, 즉 국가는 존립되어야 하고 발전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인격체와 조직이 청결해야 몸통, 즉 국민과 사회가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우파와 좌파는 항상 공존하는 것이며 보수와 진보는 ‘동태적으로’ 상호보완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위기는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사상적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내면의 본질을 보면 정권의 유지 혹은 쟁취를 위한 단견적 목표의식과 그들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 및 부재로 비롯된 것이다.
 
  사실, ‘보수’와 ‘진보’가 생산적으로 논쟁하고 투쟁해야 할 대상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에 국가적 정체성을 두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사회정의’(Social Justice)를 구현하는 범위와 속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모름지기, ‘보수’는 어떠한 가치를 어떻게 지키고 발전시키겠다는 비전과 전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진보’라면 역사 발전을 저해하는 제반 요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모두 그러한 양심적인 노력은 하지 않고 ‘말장난’만 일삼는 것 같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정치지도자들에게서 쉽게 발견된다.
 
  필자가 더욱 개탄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소위 지식인들이 무엇이 보수(우파)이며 무엇이 진보(좌파)인지에 대하여 명확한 개념 및 정의(定義)도 하지 않은 채, 또한 정치·경제·사회 현상에 대한 구체적 대안도 없이, 마치 ‘3류 단편 소설가’ 혹은 ‘길거리에서의 3류 가수’처럼 마구 무책임하게 지껄인다는 점이다. 모두 ‘회칠한’ 사람들이다.
 
 
  新실용주의
 
  다섯째, 필자는 신고전학파나 신케인지언도 아닌 슘페테리안(Schumpeterian)과 롤지언(Rawlsian)이다.
 
  왜냐하면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은 완전고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고용 증대는 장기적으로 보면 산업발전과 함께 ‘신기술 → 신산업 → 신시장’이라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에 의하여 ‘양호한 직장’(decent job)이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고용은 단기적으로 재정지출(케인지언)이나 통화량(화폐론자)의 증대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은 결코 ‘돼지’가 아니기 때문에 ‘소득’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동물’(단순히 ‘경제적 동물’이 아니라)로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회연대를 갈구한다.
 
  이것은 인류사회의 역사적 발전과정(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전쟁 등)에서 보듯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저자는 ‘롤지언’이다. 그리고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처럼 정의(正義)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자유(효율)와 평등(정의)과 안정을 포함한 신(新)실용주의(New Pragmatism)를 제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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