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특집

대선 1년전 지지율 1위의 실체와 허상 (1/2)

1997년 1월 여론조사 - 1위 박찬종의 울분 토로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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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경선에서 끝내 중도하차해 버린 박찬종, 9룡 가운데 결국 신한국당에서 누구도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歷史, 대선 후보와 대통령이라는 자리! 그것이 역사와 국민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요?”

“여론조사 1위의 맹점은 유권자들이 쉽게 식상한다는 점입니다. 대중에 영합하는 좀 더 참신한 후보에, 혹은 말실수와 같은 소소한 돌발변수에, 계보 내부의 권력투쟁에 여론이란 동물은 금방 돌아앉아 버린단 얘기죠.”


⊙ 지지율 1위 되고 나니 신한국당 다른 후보들과 청와대 수석들 싸늘… “어째, 신문마다 1등입니까?”
⊙ 후보 경선 사퇴하고 만난 哲雄 스님 曰 “니 안될 줄 알았다”
⊙ “지금이라도 97년 대선 후보 경선을 ‘원인무효 소송’이라도 해서 돌려놓고 싶다”
⊙ 2007년 박근혜는 이명박을 시종 공격하며 黨心에 파고들었으나 들쑥날쑥한 여론 못 얻어
⊙ “한국판 ‘재스민 혁명’이 2012 대선에서 폭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가 장담하겠는가”
대선(大選)을 1년 정도 앞둔 1997년 1월 박찬종(朴燦鍾·72·이하 존칭 생략) 전 의원은 여론조사 1위였다. 1위라는 민심(民心)을 등에 업고 여당이던 신한국당에 입당할 때, 그는 이른바 9룡(九龍·대선 후보감 9명을 지칭) 중에서 가장 대통령에 근접한 인물이었다. 그즈음, 사람들은 그에게 따라다니던 별칭(‘無卒之將’, ‘정계의 감초’)을 더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의 나이 쉰여덟이었다.
 
  ‘여론조사 1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당내 기반이 약했던 그는 나머지 후보들과의 당내(黨內) 전투에서 침몰, 무장해제당한다. 운명이란 고약한 것이다. 박찬종은 ‘정치적 미아(迷兒)’가 되어 이인제(李仁濟) 의원이 탈당해 만든 ‘국민신당’, 허주(虛舟·金潤煥·1932~2003)가 탈당해서 만든 ‘민주국민당’으로 옮겨갔다. 국민여론조사 1위의 몰락 치고는 비참했다.
 
  박근혜(朴槿惠) 한나라당 전 대표는 올해 쉰아홉이다. 박찬종의 ‘여론조사 1위’ 시절과 비슷한 나이다. 현재 요지부동 대선 후보 1위다. 박찬종과 달라 보인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여론조사 1위였던 박찬종의 악몽, 보다 더 확실한 후보였던 1위 이회창(李會昌)의 몰락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여론조사 1위를 ‘무덤’에 비유하기도 한다. 원하지 않아도 점점 늪 속에 빠져드는 권력의 ‘독배’와 닮았다는 것이다. 늪과도 같은 여론조사 1위. 박근혜 전 대표는 이 진창 속에서 악어 밥이 될지, 악어 등을 타고 뭍에 올라설지 주시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까. 기자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다.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떠들지만, 그걸 누가 알랴. 2002년 대선이 끝난 뒤 이회창 후보가 떨어지니 “그럴 줄 알았다”는 사람이 생겨났지만, 그런데 대선 전에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을 눈 씻고 찾으려도 찾아보지 못했다.
 
  한때나마 대선 후보 지지율 1위였던 박찬종을 찾은 건 그래서였다. ‘영원한 독불장군’ 박찬종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분을 삭이지 못했다.
 
 
  “어째, 신문마다 1등입니까?”
 
박찬종 전 의원. 1997년 대선 당시 ‘국민여론조사 부동의 1위’였으나 당내 경선에서 밀려 좌초했다.
  1997년 1월 1일 오전 8시 박찬종은 다른 후보들과 함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그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이날 아침 중앙일간지 신년호는 잇달아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부동의 1위였다. 신한국당 이회창 고문보다 최소 3.6%포인트에서 12.8%포인트까지 높았다. 그는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총재와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재의 이른바 ‘DJP’와의 가상대결에서도 가장 경쟁력이 높았다. 그는 1월 3일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여론조사 1위가 매우 부담스럽다”고 했다.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여론조사 1위에도 불구, 조순 후보에게 진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재구성(再構成)했다.
 
  “그해 1월 1일 국립묘지를 다른 후보들과 함께 참배했지요. 신문마다 제가 대통령이 된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국립묘지에서 만난 후보들의 싸늘한 시선이 정말 두려웠습니다. 자격지심인지 모르지만 9룡에 속한 사람들은 물론, 각료들이나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의 눈빛도 달라 보였어요. 경선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제게 축하 일색의 말을 건넸지만 후보들은 뭔가 언짢고 떨떠름한 표정이었어요.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것은 이원종(李源宗) 정무수석의 말이었습니다. 저와 악수를 하면서 씩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어요. ‘어째, 신문마다 1등입니까?’ 그 말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덕담이었을까요?”
 
  두려움도 있었지만 분명히 그는 들떠 있었다. 9룡 중에서 자택을 개방해 신년 하례객을 받은 이는 그와 이한동(李漢東) 전 총리밖에 없었다. 1월 1일과 2일 이틀 동안 800명 이상의 하객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당시 신문을 들춰 보니 그의 집에 ‘박주천(朴柱千) 전용원(田溶元) 이사철(李思哲) 황규선(黃圭宣) 김기재(金杞載) 정영훈(鄭泳薰) 의원과 손학규(孫鶴圭) 보건복지부 장관, 이인제 경기지사의 모습이 보였다’(《문화일보》 1월 3일자)고 쓰고 있다. 이회창씨는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으로 내려갔다가 3일 귀경했다.
 
  “여론조사 1등은 어느 순간의 조사일 뿐입니다. 항상 유지되는 것도 아닌 일종의 환상입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오퍼가 없었다면 계속 무소속을 했을 겁니다. 무소속 시절, 사람들은 ‘홀로 서 있는 네 모습이 아름답다’고 했어요. 서민(庶民)이 찾는 재래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구름과 같이 몰렸고 여름 휴가철, 백사장에서 시국강연회를 열면 모금함이 꽉꽉 찼습니다. 유세장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제 호주머니에 돈을 찔러 주었어요. 5000원에서 만원까지, 어떤 이는 봉투에다 20만~30만원을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무소속 돌풍을 얘기하던 그 시절,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찡해 옵니다.
 
  그러나 대선 후보 경선에서 끝내 중도하차해 버린 저, 9룡 가운데 결국 신한국당에서 누구도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역사(歷史), 대선 후보와 대통령이라는 자리! 그것이 역사와 국민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요? 자만심에 가득 찬 허영 덩어리였던 박찬종, 역사와 국민을 배반하고 저를 타살시킨 정치 현실이 안타깝도다! 분하도다! 통분하도다!”
 
 
  YS, 7룡 불러 “과열하지 말며…” 메모지 읽어
 
  여론조사 1위 박찬종은 어떻게 해서 주저앉았을까.
 
  그것은 오직 당심(黨心)으로만 대선 후보를 뽑는 당시 신한국당 경선규정 때문이었다. 전국 253개 지구당에서 지구당별로 40명 내외, 통틀어 대의원 1만3000명을 선출해 그들의 투표로만 대선 후보를 뽑았다. ‘여론조사 1등’의 민심은 당심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사실상 지구당위원장의 입맛에 따라 후보가 결정됐다.
 
  1997년 5월로 돌아가 보자. 신한국당은 후보 경선 룰을 정한다는 명분으로 그해 5월 30일 신한국당 전국위원회 소집을 예고했다. 소집일을 하루 앞둔 29일, 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은 이홍구(李洪九) 최형우(崔炯佑)씨를 제외한 ‘7룡’을 청와대로 불렀다.
 
  YS를 중심으로 오른편으로 이회창 이수성(李壽成) 이한동 최병렬(崔秉烈) 김덕룡(金德龍) 이인제, 왼편으로 김윤환 박찬종 김용태(金瑢泰·대통령비서실장) 강인섭(姜仁燮·정무수석) 윤여준(尹汝雋·공보수석) 등이 원탁에 둘러앉았다. 박찬종의 말이다.
 
  “꼬리곰탕으로 식사를 끝내니 YS가 돋보기를 끼고 테이블에 놓인 작은 메모지를 읽어 내려갔어요. ‘파인 플레이를 하고, 과열하지 말며, 원칙과 순리를 따르고, 결과에 승복하라’는 것이었어요. 모두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10여 초의 침묵이 1시간처럼 길게 느껴졌어요. YS는 만사가 귀찮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심정이었던 같아요. 당시 아들 현철씨가 구속되는 등 반(反) YS 정서가 들끓던 시절이었지요.”
 
 
  이회창, “대표 내놓고 공정경선하자”는 내 요구에 “밀면 안 물러간다”고 응수
 
1997년 5월 29일 신한국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이 당 경선원칙을 확정하는 전국위원회 소집을 앞두고 여권 대선예비주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박찬종은 이회창 대표를 향해 대표직 사퇴를 요구했다.
  ―당시 당 대표가 누구였나요.
 
  “이회창씨였어요. 그 사람이 자기 입으로 ‘후보 경선에 나갈 사람이 당 대표가 돼선 안 된다’고 했는데 대표가 된 것이었어요. 제가 그 자리에서 ‘후보 경선을 앞두고 중립 인사가 대표가 돼야 한다’고 했어요. 이한동씨는 전날 성명까지 내고 ‘총재는 대표를 교체하고, 이회창씨는 양두구육(羊頭狗肉)적 행동을 하지 마라’고 했는데, 이날 입도 뻥긋 안 하는 겁니다. 제가 이한동씨만 볼 수 있게 오른손을 식탁 위로 살짝 올려놓고 톡톡 움직이며 ‘사인’을 보냈는데 못 본 체 앉아 있었어요. 성질 급한 사람이 술값 낸다고 제가 먼저 나서야 할 판이었습니다.”
 
  ―뭐라고 했나요. YS와 이회창의 반응은요.
 
  “‘이(회창) 선배가 용단을 내려 대표를 사퇴하라’고 했지요. ‘중립인사에게 대표를 맡겨 공정 경선을 하도록 하자’고 했는데 YS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이회창씨는 꼼짝도 안 했습니다. 그러더니 이회창씨가 ‘대통령이 바로 옆에 계시는데 그 문제는 제 신상의 문제이고 저는 밀면 안 물러갑니다!’라고 하는 게 아닙니까. 속에서 울컥해지더군요. ‘밀면 안 물러간다’니…. 인사권을 쥔 대통령에 대한 압박이자 준(準)협박이었어요.”
 
  박찬종은 손으로 책상을 치면서 “제가 좀 더 말씀드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YS의 얼굴이 더욱 시뻘게지면서 완전히 찌그러졌다. 싸움판 직전이었다. 급기야 이수성씨 등이 “오늘 더는 얘기하지 맙시다”고 만류하고 나섰고 다른 참석자 역시 모두 말렸다고 한다. 아무도 그의 편을 들지 않자, ‘OK 목장의 혈투’는 중과부적으로 끝이 났다.
 
  “지금 지내 놓고 생각하니, 그때 제가 ‘이건 엉터리’ 하면서 그 자리에서 경선을 보이콧해야 했었는데…. 후회가 막급합니다.”
 
 
  이회창 5년 하고 다음에 박찬종 하라
 
  며칠이 지나고 허주(김윤환)에게서 전화가 왔다. 허주는 그를 보자마자 대뜸 “어차피 이렇게 됐다”며 “우리 둘이 이회창을 밀면 반드시 대통령이 된다. 5년 뒤에 박(찬종) 고문을 자금과 조직 모두 동원해서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게! 우리 한번 힘을 합치자”고 말했다고 한다. 박찬종의 말이다.
 
  “허주 입장에서야 좋지요. 두 사람 사이에서 10년 계속해 먹으니까. 저는 속으로 ‘난 당신 오야붕(전두환)하고 싸운 사람이고, 당신은 오야붕 똥 빨아먹던 사람 아닌가. 그런 내가 너와 합작해?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허주 역시 제 성질을 몰랐겠어요? 이회창씨 5년 하고 제가 5년 하자는 말은 제 속을 그냥 떠본 말에 불과합니다.”
 
  ―나중에라도 허주의 제안을 못 받아들인 걸 후회하지 않았나요.
 
  “제 성격이 원래 그래요. 감정을 못 숨겨요. 싫으면 싫다고 하지 싹 감추고 그러질 못합니다. 사람들이 제게 조직 부적응자라고 하는데 썩고 부패한 조직에 적응하란 말입니까, 독불장군으로 살아 온 것, 하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됐다면, 제 나이 밑으로 싹둑 잘라버렸을 겁니다. 5공에 있던 사람들, 용서했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저를 그럴 위인으로 으레 생각했지요. 제가 신한국당에 입당해서 여론조사 1등을 했을 때, 겉으론 문안드린다고 찾아왔지만, 전부 뒤돌아서는 허주를 중심으로 ‘자르자’고 모의했을 겁니다. 그래서 허주가 절 떠본 것이지요. 세월이 흘러 2000년 무렵, 허주가 이회창씨에게 쫓겨나 민국당을 창당했을 때입니다. 어찌어찌해서 저 역시 그 당에 들어갔는데, 허주의 고향(경북 구미)에 지원유세를 갔더니 저를 앉혀 두고 이런 말을 했어요.”
 
  ―무슨 말을 하던가요. 또 대통령 만들겠다고 하던가요.
 
  “허주 말이 ‘박찬종 동지에게 못할 짓을 했다. 1997년에 사람을 잘못 봐서 터무니없는 자(이회창)를 밀었다. 박 동지를 밀었어야 하는데, 그럼 지금 박 동지는 청와대 계실 텐데’라는 거였어요. 그 얘기를 들으니 전신이 찌르르해지더군요. 그래서 허주에게 가졌던 섭섭한 감정 다 잊었습니다.”
 
 
  짬짬이 받은 돈이 5000만원 넘어 꼼짝달싹 못한다
 
1997년 7월 19일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신한국당 서울지역 합동연설회에서 박찬종씨가 침통한 표정으로 후보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전당대회 일자가 공고되고 1997년 7월 4일부터 전국 시도별로 합동유세가 시작됐다. 수원 문예진흥회관에서 경기도 지역 대의원 합동연설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몇몇 후보들이 동원한 수백 명의 박수부대가 꽹과리를 치고 만세를 부르며 그야말로 분위기는 장터와 같았다. 박찬종은 혼자 지프를 타고 그곳에 갔다.
 
  이튿날 《중앙일보》에서 대의원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누가 연설을 제일 잘했는가’라는 항목에서 박찬종이 32%로 1위였다. 그런데 그다음 문항, ‘누구를 지지하는가’에서 박찬종의 지지비율은 고작 1.4%였다. 전체 응답자 중 3명만이 그를 지지했다.
 
  “당심은 그랬지만, 여전히 국민여론조사 1위는 저였어요. 대의원들도 제 연설이 제일 낫다고 했지만 ‘누구를 지지하겠느냐’는 질문에서는 저를 외면했어요. 전부 줄을 섰던 것이지요. 저는 속으로 ‘낭패다, 엉터리다, 가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10회 이상 연설회를 계속했지만 가는 데마다 수원의 재판이자 확대판이었습니다.”
 
  그해 7월 11일 그의 고향이자 정치적 출발점인 부산에서 합동연설회가 열렸다. 고향임에도 불구, 대의원 지지도는 2~3위밖에 되지 않았다. 연설회가 끝난 다음날, 자영업을 하는 그의 후원자가 찾아왔다.
 
  “그분이 찾아와 분개하는 겁니다. ‘민심과 당심이 이렇게 불일치하고 민주 경선이라면서 금품이 판을 치고 줄 서기를 강요하니 이게 무슨 정치 쇼냐’는 거였어요. 그분이 어느 원외위원장에게 ‘민심 지지도 1등이 후보가 돼야 한다’고 했더니 이러더라는 겁니다.”
 
  ―이미 줄을 섰다는 말이었겠지요.
 
  “그래요. 원외위원장 말이 ‘자신과 그 인접구 지구당위원장들은 이미 여러 차례 불려 가 짬짬이 돈을 받았는데 받은 돈이 5000만원이 넘어서 인간적으로 꼼짝달싹 못하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잠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1997년 7월 18일 열린 신한국당 경남 진주 합동연설회에 앞서 선전을 다짐하는 신한국당 대선 경선 후보들. 좌측부터 이회창, 이인제, 최병렬, 박찬종, 김덕룡, 이수성, 이한동. 이미 대의원들이 유력주자에게 줄을 서 박찬종씨는 민심 1위, 당심 꼴찌를 차지했다.
 
  지구당위원장들, 전부 양다리 걸쳐
 
  “지금도 그렇지만 순수한 의미의 당원, 대의원이라는 게 우리 정치사에 존재합니까? 국회의원이라는 자가 밥 얻어먹고 매수당해서 누구를 찍겠다고 결정해 놓고서도, 자기 밑의 대의원조차 못 믿어 방어선 치고 시·도책까지 두는 식 아닙니까. 너무 순진하게 그런 거대 피라미드 조직을 여론조사 1등만 믿고 맞섰으니, ‘돈키호테 수수깡’이란 말을 들을 수밖에 없지요. 기가 막힙니다.”
 
  당시 1개 지구당에서 약 40명의 대의원이 선출되는데 그 명단은 지구당위원장이 써 내게 돼 있었다. 대의원 선출은 지구당위원장에게 전적으로 위임돼 있었다. 위원장 말 잘 듣는 이가 하루아침에 대의원이 되는 구조였다.
 
  ―밀어 주겠다는 사람이 다 등을 돌렸나요.
 
  “지금 생각해 보니 양다리를 걸쳤습니다. 그 무렵, 제 측근이 노골적으로 ‘어디 가서 300억원 만들어 (대의원을) 매수하자’고 하더군요. ‘저것들이 저렇게 하는데 우리도 몇억 원씩 안기면 될 것 아닌가’고요. 저는 ‘돈도 마련할 수 없을뿐더러 그런 식으로 대통령 돼 뭐하느냐’고 했습니다.”
 
  ―여론조사 1등인데 당시 300억 정도는 당길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다 때려치우고 도둑질 기술이나 배우고 가라
 
젊은 시절, 박찬종씨는 시국사건 무료변론을 자청하며 ‘약방의 감초’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진은 1985년 9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의 변론을 맡은 그가 조승형 변호사와 공판정에 들어서고 있다.
  “…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겠지요.”
 
  박찬종은 합동연설회 도중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후보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풍토를 바로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틀을 기다렸지만, 대통령과의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들을 불러 “대통령이 정식으로 수사를 해 달라”는 수사 촉구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해 7월 19일 합동연설회 마지막 날인 서울지역 대의원 합동연설회에서 그는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사퇴의 변은 이랬다.
 
  “우리는 국민에게 약속했습니다. 민주·공정·자유 경선을 약속했습니다. 줄 세우기가 뭡니까. 줄 세우고, 줄 지키고, 빼내 오고, 향응 베풀고, 박수부대 동원하고 있습니다. 12대 대선에서 당선이 되면 뭣합니까. 저는 이 역리적·병리적 현상을 온 국민과 역사 앞에 증언해 두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경선 후보직을 사퇴하려고 합니다.”
 
  연설회장 여기저기서 “안 돼!”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경선을 사퇴하고 대구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 성전암을 찾았다. 중학교(경남중) 선배인 철웅(哲雄·1934~2011)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철웅 스님의 첫마디는 “니 아직 안 죽었나!”였다.
 
  “스님 말씀이 ‘안될 줄 알았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도둑질을 할 줄 아나, 돈을 만들 줄 아나. 그래, 다 때리(때려) 치아뿌라(치워라), 때려치우고 여기 몇 년이고 있으면서 도둑질 기술을 배우다가 자신이 있으면 그때 내려가고 안 그러면 나랑 여기 있자’는 것이었어요.”
 
  ―여론조사 1위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군요.
 
  “1997년 신한국당 후보 경선은 국민사기극입니다. 땅을 샀다가 사기를 당하면 훗날에도 땅주인에게 원인무효 소송을 해서 물리잖아요. 지금처럼 여론조사 비율을 50% 반영했다면 제가 대통령이 됐을 겁니다. 여론조사 1위를 한 사람이 당내 경쟁자들에게 타살당한 겁니다. 지금이라도 무효소송을 할 수 있다면 해서라도 되찾고 싶고, 국민이 되찾아 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제가 대통령이 못된 것은, 아마 대통령이 된다 해도 실패한 대통령이 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하늘이 그렇게 했다고 자위(自慰)합니다. 민심 1위라는 분위기에 붕 떠서 주변관리를 못해 부패에 휘말렸을지 모릅니다. 하늘이 제가 ‘오점 투성이’ 대통령이 되는 걸 원치 않았던 겁니다.”
 
 
  박근혜의 경선 패배, 콘텐츠가 약했다
 
  그렇다면 지금 지지율 부동의 1위 박근혜 전 대표는 민심을 넘어 당심까지 얻을 수 있을까.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룰은 대의원 20%, 당원 30%, 국민선거인단 30%, 여론조사 20%였다. 그러나 여전히 당협위원장들이 대의원 추천권을 갖고 있다. 위원장 몇 명의 지지를 받느냐가 대선 후보의 절대적 변수다. 줄 세우기는 불 보듯 뻔하다.
 
  지난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선거인단(당원+대의원+국민) 투표에서 득표율 49.4%(6만4648표)로 이명박(李明博) 후보(49.06%·6만4216표)를 432표 앞섰다. 선거인단 직접 투표에서 예상을 깨고 역전한 것이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 42.73% 대 51.55%로 2884표 뒤져 이 후보에게 밀렸다.
 
  박 전 대표가 당심에서 이기고 여론에서 진 것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박찬종의 경우와 겉으로 보기엔 뒤바뀐 셈이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경제 대통령론’을 내건 이명박 후보보다 콘텐츠에서 뒤졌다. 이명박 후보는 대기업 CEO·서울시장 시절 실적을 남겼다. 박근혜 전 대표는 그러나 대세인 ‘경제대통령론’에 비해 여론 호소력이 약했고, 대표 공약인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도 개념만 있을 뿐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경선 당시 박 전 대표는 “공천 협박을 받고, 줄 세우기에 시달리고, 금품이 오가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며 이 후보를 시종 공격했었다. 줄 세우기에 당한다고 생각해 당심을 파고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콘텐츠 부족으로 민심의 확산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박찬종의 관전평이다.
 
  2012년 전망에 대해 박찬종은 “부동의 1위라지만 여론의 향방은 알 수가 없다. 다만 현 구도처럼 당심·민심을 각각 50%씩 반영하는 룰이라면 당내 대항마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그는 “본선에선 반드시 ‘복병(伏兵)’을 만난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계속된 그의 전망이다.
 
  “대통령 선거는 천지개벽(天地開闢)할 상황이 도래하지 않는 한 투표율 50%대에서 결정됩니다. 투표율은 이미 대세론을 타는 박근혜씨가 후보가 될 경우 더 악화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곧 복병의 영향을 더 쉽게 받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죠.”
 
 
  썩은 여의도 풍조, 계승해서는 미래가 없다
 
여론조사 1위의 박근혜는 ‘대세론’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1위에서 몰락한 박찬종의 뒤를 따를 것인가. 2007년 8월 2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후보가 연설을 하고 있다.
  ―복병이란 게 구체적으론 무엇인가요.
 
  “부패한 기성 정치권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우리 사회를 쇄신시킬 수 있다고 보시나요? 똑같은 정당조직·다중(多衆)동원식, 똑같은 선거방식, 대선을 앞두고 폴리페서(polifessor·선거캠프에 참여하는 정치색 띤 교수들)들이 떼 지어 줄을 서는 여의도식(式) 썩은 풍조를 고스란히 계승하는데, 우리 정치가 뭐가 달라지겠어요.
 
  사람들은 박근혜씨의 지지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돼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는 아직 답을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합니다. 낡고 썩은 들러리 조직으로 기성 정치와 똑같이 선거를 한다면, 한국판 ‘재스민 혁명(Jasmine Revolution)’이 대선에서 폭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박찬종의 여론조사 1등과 이회창·박근혜의 1등은 어떻게 다른가요.
 
  “저는 당 지지와 상관없이 무소속 시절부터 여론조사 1등이었지요. 정당 프리미엄을 얹으면 기본 30%는 나옵니다. 박근혜씨도 한나라당 프리미엄이 일정 부분 있다고 봅니다. 그럼 본선 경쟁할 때, 콘텐츠가 변수가 됩니다. 이회창씨는 프리미엄만 믿고 나왔다가 콘텐츠 경쟁에서 졌다고 봐야 합니다. 또 이회창씨는 신언서판(身言書判)에도 문제가 있었어요. DJ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보다 인간적 훈기(薰氣)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니 정당 프리미엄으로 올라간 여론조사 1등은 별 의미가 없지요. 박근혜씨 역시 정당 프리미엄을 뛰어넘으려면 자신만의 콘텐츠를 갖춰야 합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국민에게 존경받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다른 대통령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장기집권이나 인권탄압은 절대 용납할 수 없잖아요. 링컨이나 존 F. 케네디처럼 절대적인 점수를 못 줍니다. 박근혜씨는 실질적 민주화를 이루고 국민에게 나라를 변화시킬 실천적 의지를 보여야 성공할 수 있어요.”
 
 
  앞으론 혁명을 안 하면 대통령 될 수 없어
 
  ―박근혜 전 대표에게 정치권 물갈이를 주문하는 뜻으로 들립니다.
 
  “기성 정치인을 품에 안고, 기성 조직을 그대로 대선에 동원해 싸우겠다? 안됩니다.”
 
  그는 “친박의 계보수장으로 후보가 된들, 여의도 정치행태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여론조사 1등? 어느 순간의 조사일 뿐입니다. 1등에 안주하거나 만족해선 안 돼요. 1등이 위기일 수도 있어요. 항상 표적이 되니까요. 특히 여론조사 1위의 맹점은 유권자들이 쉽게 식상한다는 점입니다. 대중에 영합하는 좀 더 참신한 후보에, 혹은 말실수와 같은 소소한 돌발변수에, 계보 내부의 권력투쟁에 여론이란 동물은 금방 돌아앉아 버린단 얘기죠.”
 
  박근혜 전 대표의 주변에는 그를 타깃으로 한 엄청난 지뢰가 숨어 있다. 이재오(李在五) 특임장관 등 친이계 주류세력의 공세(攻勢)에다 미래 권력을 위해 달려드는 ‘부나방들’이 외우(外憂)라면 박 전 대표의 융통성 없는 세계관, 취약한 참모조직, 세력 합류를 막고 ‘이대로’에 안주하려는 조직 분위기 등은 내환(內患)이다.
 
  박찬종은 “짧은 외마디 소리를 질러 신비주의로 대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느냐”며 “4대강이나 동남권 신공항, 과학 비즈니스 벨트 등에 대해 손에 흙을 묻혀 가며 시비를 따지고, 명쾌하고 당당하게 자기 입장을 얘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 땅의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대통령을 뽑아야 할 때가 됐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한국판 ‘재스민 혁명’이 나올 때가 됐어요. 과거처럼 장기집권 독재자를 내쫓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혁명으로 실제적 민주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지금도 국민이 지탄하는 ‘정치자금법 개정안’을 두고 여야가 후안무치하게 타협합니다. 여기 보세요. 공천을 돈으로 하는 행태가 우리 정치권에서 사라졌나요? 민주주의의 내실화, 살아있는 법치주의, 제대로 된 사법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혁명 수준으로 정치 제도와 법을 고쳐야 합니다. 그저 평상(平常)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정치개혁을 할 수 없어요. 예를 들어 현재 299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100명을 줄이는 공약을 걸어야 합니다. 박근혜씨가 ‘지방의원 정당 무공천, 월급 0원 무보수 명예직’으로 하는 지방자치제 개혁안을 공약으로 내걸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을 해야 합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서 이렇게 덧붙였다.
 
  “쉽지 않지요. 그런데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대통령 선거입니다. 개혁적인 공약을 내걸고 당선되면 그 여세로 취임 직후 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던집니다. 자기들 목 자르는 일이지만 국민압력으로 이뤄낼 수 있어요. 그런 것을 박근혜씨가 할 수 있을까요? 그걸 해야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국민은 인기와 콘텐츠를 함께 본다
 
  박 전 대표가 여의도 정치를 ‘객토(客土)’할지는 미지수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지난 1월 5일 전북 정읍을 방문한 자리에서 그를 향해 “시대정신에 맞지 않다”고 평가절하하며 “야권 단일후보와 1대 1 대결을 하면 우리가 이긴다”고 했다. 과연 시대정신은 손학규와 민주당 편일까. 시대정신이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누구든 국민들의 외침을 귀담아들으면 되는 일이다.
 
  정치권은 곧잘 ‘대선을 1~2년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1위를 한 정치인이 실제 대통령이 된 경우는 없다’는 예를 든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 때의 2007년은 예외였다. 이 말은 그만큼 지지율이란 허망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한나라당 친이계 고위 관계자는 “당내 친이계 후보군이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지지율 30~40%가 모두 박 전 대표의 고정 지지층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수도권과 30, 40대에서 상대적으로 지지도가 떨어져 대선의 각종 변수에 지지율은 뒤바뀔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박찬종은 “국민은 박근혜씨의 인기만 보는 게 아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근혜씨의 콘텐츠에 사람들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정치에 실망한 국민의 마음을, 여의도 정치에 파묻혀서 어떻게 달래 줄 수 있을까요? 지난 18대 국회의원 공천파동을 겪으며 ‘나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는데,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국민이 더는 안 속도록 근원을 없애야 합니다. 썩은 공천제도와 정당운영 방식을 개혁해야 합니다. 그게 1997년의 나와 같은 운명을 맞지 않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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