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 이탈리아 ⑩ <끝> 아리베데르치 이탈리아 ((arrivederci·다시 보자))

  • 글 : 김영석 前 주 이탈리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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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피네(fine)’는 여성으로는 종말, 남성으로는 목표를 의미
⊙ 경기침체, 지역불균형, 자본유출, 이민, 조직범죄 등 ‘영혼 탐색기’를 거쳐 이탈리아는
    거듭 세계의 수도가 될 수 있을까

金榮錫
⊙ 61세.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 외교부 구주국장, 駐 노르웨이 대사·駐 이탈리아 대사 역임.
⊙ 現 페레로 한국 고문.
로마의 중심 베네치아 광장의 통일기념관(비토리아노). 한가운데가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다.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 1861년 일단 통일을 달성했지만, 일부 영토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이탈리아로 편입됐다.
이탈리아를 떠날 시간이다. 못 다한 일 접어 두고 안 가 본 곳 남겨 두고 떠나야 한다. 이룬 일과 남은 한이 다 추억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시작하면 끝이 있다는 것은 인간사의 정해진 틀이다. 모든 시작에 끝이 내포되어 있고 끝은 다시 새 시작을 기약한다.
 
  ‘끝’을 뜻하는 이탈리아 말 ‘피네(fine)’는 드물게도 양성(兩性)명사다. 여성(la fine)으로 쓰일 경우 ‘종말’의 뜻이지만 남성(il fine)으로 쓰이면 ‘목표’를 의미한다. 윤회(輪廻)일 수도 있고 ‘영원히 도는 존재의 수레바퀴’일 수도 있다. 다만 그렇게 다시 이어져 간다는 걸 우리는 직관으로, 또 역사를 읽어 안다. 그래서 내건 작별의 소제목이 “잘 있거라(addio)” 대신 “‘다시 보자(arrivederci)’ 이탈리아”다.
 
  작별의 시간에는 나무보다 숲이 보이기 마련이다. 오늘은 우리 이탈리아 역사기행의 초점을 ‘기행(紀行)’보다 ‘역사’에 맞추어 보자.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나라로서의 이탈리아는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자산을 누리며 무슨 고민이 있는지 잠시 짚어 보는 시간이다.
 
 
  국민국가의 지각생
 
  이탈리아는 국민국가(nation-state)로서의 출발이 늦었던 나라다. 일찌감치 전 지중해와 서유럽에 걸친 제국을 형성해 고대 천년의 중심에 섰던 것은 먼 과거의 일이다. 서로마가 멸망한 후 이탈리아 반도는 번갈아 침입해 온 ‘야만’ 외족(外族)들의 차지였고 이런 상황을 정리해 ‘안정’을 회복해 준 것도 프랑크와 게르만 등 외족들이었다. 외견상 안정 속에 이탈리아는 11~12세기 중세성기(中世盛期)를 맞으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토스카나 이북 지역에 기라성 같은 자치도시들이 백화제방(百花齊放)으로 일어서고, 로마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역에서는 기독교의 세속권(世俗權) 주장이 교황령(Stato Papale)으로 현실화된다. 시칠리아를 포함한 반도의 남부 지역은 교황의 영향권 아래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으나, 11세기 노르만의 영군(英君) 루제로(Ruggero)가 개창한 시칠리아 왕국으로 중흥기를 맞는다. 독일 호엔슈타우펜 가의 프리드리히(이탈리아 명 페데리코) 2세가 이를 계승해 북부 지역과 구분되는 남부 특유의 문화에 항구적인 기초를 놓는 것이다.
 
  이 삼분(三分) 구도가 대개 이탈리아의 통일까지 이어진다. 페데리코 2세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후 600년이 지나도록 이탈리아를 통일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중세가 다 가도록 북부의 자치도시들이 크게 세 그룹(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토스카나 공국)으로 재편되었을 뿐이고, 중부의 교황령과 남부의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포함)은 시대의 변화에 무심한 중세의 외딴 섬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100년 전쟁의 소모를 끝내고 중앙집권의 민족국가로 발돋움하고 스페인도 레콘퀴스타(Reconquista)를 완성하고 통일왕국으로 새 출발 하던 르네상스 시절에도 이탈리아는 도시국가 차원의 번영에 취하고 도시국가 간의 경쟁에 몰두한 상태 그대로였다.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 (연도는 이탈리아에 편입된 해)
 
  帝國의 遺産
 
  앞선 문화의 화려한 외관만으로 힘센 군대의 우세한 물리력을 당해 낼 수 없고, 수천 명 수준의 계약 용병을 가지고 수만 명 규모의 동원 병력을 대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대가 달라졌다. 스포르차, 곤차가, 메디치 등 유력 가문의 시대가 거(去)하고 프랑스와 1세, 카를로 5세, 헨리 8세 등 막강 왕가의 시대가 내(來)한 것이다.
 
  16세기 초·중반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 지역은 대개 외세의 영향 아래 공국(公國)으로 혹은 총독령으로 잔명(殘命)을 유지하는 신세가 된다. 교황령은 아예 민족개념과 무관한 지역이었다. 나폴리 이남의 왕국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북쪽은 교황령의 드높은 장벽으로 가로막힌 유럽 신사조의 무풍지대였다. 이러한 상황이 나폴레옹 전쟁을 지나고 19세기 중반의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이탈리아의 통일운동)에 이르도록 지속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탈리아는 태생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민족주의나 국민국가와는 인연이 적은 나라다. 제국(고대 로마)의 경험이나 자치도시의 뿌리(중세)나 교황의 존재(고대, 중세, 근대) 들은 모두 이탈리아의 역사를 다채롭게 만들어 주고 오늘날 우리에게 풍성한 문화유산을 남겨 준 원천이지만, 한편 생각하면 모두 민족국가 형성에는 오히려 장애였다. 제국이란 본래 민족적 배타성보다는 문명적 포괄성에 입각한다.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까지만 해도 지도적 인물들은 대개 로마와 인근 라치오(Lazio=Latium) 지방 출신이었다. 카이사르(Caesar)는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죽은 로마 토박이였고 키케로도 라치오 주(州)의 아르피노(Arpino) 태생이다. 이러던 로마가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가 제위에 오른 뒤 빠른 속도로 제국의 면모를 갖추어 간다. 각계의 인물들이 각지에서 제국의 수도 로마로 몰려들었다. 《에네아드》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롬바르디아에서, 《로마사》의 역사가 리비우스가 파도바에서, 《자연사》의 박물학자 플리니오 부자가 코모에서 올라왔다.
 
  사실 기원 3세기가 되면 로마에는 그 황제들까지 로마는 고사하고 이탈리아 출신이 하나도 없이 된다.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이미 기원 193년에 제위에 올랐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달마티아에서 태어나 주로 스플릿(Split)에서 살았고 콘스탄틴 대제도 오늘의 세르비아 땅 니시(Nis)에서 태어나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만들어 천도해 갔던 것이다.
 
  오늘날 이탈리아에는 8000개가 넘는 코무네(comune, 기초지자체)가 있다. 이들 도시와 마을들은 가족사랑, 마을사랑, 뿌리사랑의 역사적 본능이 대단하다. 배타(排他) 이전에 추상적, 인위적 냄새가 나는 정치 개념을 내세운 광대역(廣大域) 연대를 낯설어한다.
 
  고대의 제국적 배경과 중세의 지방분권적 뿌리가 두루 민족의식의 생장을 늦추어 운명적으로 다채로운 문화국가의 길이 예정된 셈이었다. 이래저래 통일은 뒤늦게, 그것도 어렵사리 찾아왔다.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문화가 먼저 있은 다음 국가가 만들어진 희귀한 경우라는 얘기, 또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의식)이 생겨나기도 전에 이탈리아 국가가 먼저 태어났다는 얘기 등이 흥미롭게 회자되는 배경이다.
 
 
  통일 150주년 기념 행사와 라카르도 무티
 
이탈리아 통일 150주년 기념 포스터.
  2010년 이탈리아에 부임해 보니 온 나라가 큰 행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이듬해가 이탈리아 통일(1861) 150주년이었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기념 로고가 눈에 띄고 각종 행사 안내와 초청장들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하나가 되기를 염원했고 하나가 되어 행복했다’는 온전한 축하 분위기와는 거리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일부 주(regione)들은 통일 이탈리아에 합류한 연도의 계산에 차이가 있고, 아예 통일에 동의한 적이 없다고 새삼 밝히고 나온 도(provincia)까지 있었다.
 
  사실 베네치아를 포함한 오늘의 베네토(Veneto)주 일대는 1861년 통일 이후에도 오스트리아의 치하에 남아 있다가 1866년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이탈리아로 넘어왔다. 이탈리아 반도의 중원인 로마(바티칸 제외)를 포함한 라치오 일대도 뒤늦게 합류했다. 1870년 교황령의 후견역(後見役)을 자처하던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패퇴하고서야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알토 아디제(Alto Adige, 오스트리아는 ‘남·南 티롤’이라 부름) 특별도와 트리에스테를 포함한 프리울리(Friuli)주의 상당 부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넘어왔다. 과연 길고도 다기(多岐)한 통일과정이었던 셈이다.
 
  경축 분위기가 생각만 못했던 데는 당시의 경제위기도 한몫했다. 그리스와 포르투갈의 정부부채 과다에서 시작된 유로화(貨)의 불안정은 비슷한 사정을 안고 있던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번지면서 유로권(Eurozone)의 존립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탈리아 정부의 예산 긴축은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그 여파로 ‘불요불급’한 문화행사, 특히 공연예술에 대한 지원 삭감으로 논란이 분분했다.
 
주세페 베르디. 통일 전야에 이탈리아인들에게 음악을 통해 ‘이탈리아’라는 관념을 심어준 국민음악가이다.
  통일 기념일인 3월 17일 경축오페라 공연이 로마 오페라극장(Teatro dell’Opera di Roma)에서 있었다. 리소르지멘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탈리아 국민 작곡가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나부코도노소르>(Nabucodonosor, 약칭 나부코)였다. 극중에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바 펜시에로>(Va Pensiero)는 이탈리아의 비공식 국가(國歌) 대접을 받던 노래다.
 
  이래저래 분위기가 묵직해진 가운데 공연이 끝나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예술감독 무티(Riccardo Muti)가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하며 일조 화두를 던졌다. 나폴리타노 대통령과 베를루스코니 당시 총리를 비롯한 정치지도자들과 이탈리아 주재 대사들도 참석한 자리였다.
 
  “이탈리아는 베르디, 푸치니, 티치아노, 안토넬로 다메시나의 나라입니다. 정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정치는 모르지만 티치아노가 북쪽 사람이고 다메시나가 남부 태생이란 점에 개의치 않습니다. 나에게는 둘 다 이탈리아 사람일 뿐입니다”
 
  이어 나폴리 출신의 성격파 마에스트로는 “이탈리아가 세계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그 문화에 있고 세계에 대한 이탈리아의 기여도 예술이 위주였다”며, “오늘 이 아름다운 봄날이 우리 문화예술에 새봄이 오는 첫날이 되도록 기원하자”고 예의 엄숙한 표정으로 마쳤다. 모두 큰 박수로 호응했고 기념일의 의미를 곱씹는 표정들이었다.
 
 
  베르디와 마치니
 
주세페 마치니. 민족주의자이자 철저한 공화주의자로 그의 사상적 영향은 유럽 전역에 미쳤다.
  <나부코>는 베르디가 작곡한 일련의 ‘리소르지멘토 오페라’들 중 첫 번째 작품이다. 민족주의 사조와 그 배경이 되었던 낭만주의가 유럽을 휩쓸던 1842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나부코>는 선풍적 인기를 모으며 단숨에 베르디를 ‘아직은 존재하지 않던 이탈리아’의 국민 작곡가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온 우주를 다 가져도 좋다. 나에게는 다만 이탈리아를 다오!”
 
  베르디가 했다는 말이다. 이 말은 그가 지은 또 하나의 리소르지멘토 오페라 <아틸라(Attila)>에서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 내뱉는 로마 장군의 대사(臺詞)가 되어 온 이탈리아에 퍼져 나갔다. ‘이탈리아’가 그야말로 지리적 개념에 불과하던 시절 ‘이탈리아 국가’를 현실적 가능성으로 가슴에 그리는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이 생겨났다. ‘로마 사람’이 아니고 ‘피렌체 사람’이 아니고 ‘밀라노 사람’이 아닌 바로 ‘이탈리아 사람’들이 도처에 양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베르디가 사람들의 가슴에 이탈리아를 심어 주었다면 사람들의 머리에 이탈리아를 새겨 준 이는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1872)였다. 그는 ‘하나된 자유 이탈리아의 완전 독립’을 정치적 목표로 내걸고 일관되게 그 목표에 복무한 사상가요, 혁명가요, 저술가였다. 그가 만든 정치 행동조직인 ‘청년 이탈리아당(조비네 이탈리아, Giovine Italia)’은 독일, 스위스, 폴란드 등지의 유사 조직에 모범이 되었다. 후에 개혁적 청년장교들의 대명사처럼 된 오토만 제국의 ‘청년 터키당(Young Turks)’에도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중에도 치명적인 조직은 청년 보스니아당(Mlada Bosna)이었다. 이탈리아가 하나 되어 독립한 지 50여 년, 아직 합스부르크 치하였던 아드리아 바다 건너 보스니아의 청년 당원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는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 중이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처를 백주 대로에 근거리 저격으로 살해한다. 일파만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올해가 꼭 100주년이다.
 
 
  민중적 영웅 가리발디
 
주세페 가리발디. 마치니의 친구이자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민중 영웅이었다.
  이탈리아의 통일을 얘기하며 절대 빠트릴 수 없는 또 한 사람의 주세페가 있다.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1807~1882). 이탈리아가 하나 되는데 가장 부지런히 현장에서 공헌한 사병친화적 지휘관이요 민중친화형 혁명가였다. 통일 작업을 실질적(‘군사적’으로 읽으면 됨)으로 주도한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수상 카부르(Cavour)도 주저하던 수구(守舊)의 아성 양(兩) 시칠리아 왕국(Regno delle Due Sicilie, 이탈리아 반도 이남 + 시칠리아)에 대한 진격을 단 천 명의 자원봉사 민병(‘붉은 셔츠 천인대’)을 이끌고 감행해 큰 피해 없이 성공시켰다. 손자(孫子)의 가르침에 접할 기회는 없었지만 미리 이겨 놓고 싸우는 타고난 전략가였다. 싸워 이긴 대가를 구하지 않았고 자신의 민중적 인기를 정치적 이익으로 연결시키려 하지 않았다.
 
  1848년의 로마, 1860년의 시칠리아는 물론 1871년의 파리코뮌까지 국적 상관 없이 눌린 자, 없는 자가 저항 무력을 필요로 하는 곳마다 즐겨 현장을 찾아 함께한 전설적 무골(武骨)이다.
 
  덜 알려진 일화가 하나 있다. 이탈리아 통일작업이 일단락된 1861년 미국에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가리발디는 링컨 대통령에게 중대 제안을 담은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노예제도의 완전 철폐를 조건으로 북군 편에서 참전하겠다는 것이었다. 노예 해방에는 링컨도 이의가 없었으나 부수적인 조건이 안 맞았다. 북군(北軍) 총사령관직을 기대하던 가리발디에게 미국이 소장(少將) 계급을 제안해 오자 없던 얘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그란트(Ulysses S. Grant) 장군의 입공(立功) 기회가 원천 박탈되어 모를 이가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이 될 뻔한 에피소드다.
 
  이탈리아의 통일 영웅들에 대한 소개는 우리나라에도 진작에 있었다. 청말(淸末) 양계초(梁啓超)가 일본 망명 중에 지은 것을 한말(韓末)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자서(自序)를 붙여 번역한 《이태리 건국 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이다. 없던 나라를 만들어 낸 인물들의 나라사랑을 본받아 있는 나라를 지키는 데 신명을 다하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삼걸에는 마치니, 가리발디와 함께 카부르가 뽑혔다. 일본 제국주의의 우세한 군사력 앞에 풍전등화의 신세이던 동양의 두 나라 지사(志士)의 눈에 알프스 기슭 크지 않은 나라를 이끌어 프랑스, 영국과 대등하게 외교하며 공룡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무력으로 맞서 새 나라를 세우는 카부르의 모습은 한없이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1848년
 
  사실 카부르의 존재와 활약은 봄날의 구름 같던 이탈리아의 통일 전망을 실제로 비가 되어 내리게 만든 역할이었다.
 
  당시의 사정을 잠시 보자. 1848년은 유럽사에 큰 고비였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 유럽 각지에 확산된 민족주의, 특히 합스부르크 제국 치하 소수민족들의 민족의식은 이제 눌러서 가능한 한계점을 지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래의 민권확대 요구에 계급투쟁의 새로운 목소리까지 얹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 제작한 팸플릿 <공산당 선언>이 발간된 것도 이해였다. 프랑스에 2월혁명이 일어났고 유럽 도처에 자치와 헌법과 독립을 요구하는 봉기와 폭동이 다발했다.
 
  이해에는 이탈리아도 모처럼 정치적 긴 잠에서 깨어나 신년 벽두부터 시칠리아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즉각 오스트리아 치하의 베네치아, 밀라노, 파르마, 모데나로 불길이 옮아갔다. 은인자중하던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고 나왔다. 로마에서는 한때 마치니와 가리발디가 이끄는 공화정부가 서고 그 감동의 와중에 베르디의 ‘애국’ 오페라 <레냐노 전투>(La Battaglia di Legnano)의 초연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던가 보다. 구세력이 막판 힘을 기울여 유럽의 판세는 다시 한 번 뒤집힌다. 1848년은 가고 혁명의 추억만 남았다. 군사력의 뒷받침 없는 열정만으로는 얻을 것이 많지 않다는 해묵은 교훈도 동시에 남겨 주었다.
 
 
  賢相 카부르
 
카밀로 카부르. 유럽 변방의 사르데냐 왕국을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으로 이끌었다.
  이 ‘무력적자’(武力赤字)를 메우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탈리아 땅에 태어난 이가 카부르 백작 카밀로 벤초(Camillo Benzo di Cavour, 1810~1861・통칭 카부르)다.
 
  1852년 그가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수상에 취임함으로써 이탈리아 건국 3걸이 모두 전면에 등장한다. 카부르 수상은 외교, 군사, 재무장관직까지 겸임하며 이탈리아 사(史)의 뒷전에 머물던 사보이 가(Casa di Savois)의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을 리소르지멘토의 실질적 주역으로 이끈 인물이다.
 
  피에몬테(Piemonte)는 주도(州都)가 2006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우리에게도 친근한 토리노(Torino)다. 이름 그대로 ‘산기슭’(pie’ dei monte, 영어로 foot of the mountain)이다. 반도의 서북쪽 프랑스, 스위스와 경계가 맞닿는 알프스 산맥에서도 최고봉들이 운집한 심심산골 중소 왕국의 수상으로서 유럽 열강의 교차하는 이해관계를 헤쳐 가며 영국의 호의를 확보하고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마침내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통일의 역사적 과업을 이룬 것이다. 유럽외교사에 큼직한 페이지다.
 
  카부르 자신은 이탈리아의 통일이 내외에 선포되고 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대관(戴冠)한 지 얼마 안 되어 극적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사기(史記)》의 옛말에 ‘고조진 양궁장(高鳥盡. 良弓藏)’이라. 새로 선 왕국에서 할 일이 없어진 공화주의자 개국공신 마치니와 가리발디도 번갈아 무대 뒤로 사라져 갔다. 건국 3걸이 모두 퇴장한 무대의 영광은 또 다른 ‘베르디’에게 돌아갔다. 작곡가 베르디(Verdi)가 아니라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의 두문자 베르디(VERDI, Vittorio Emmanuelle Re d’Italia)였다.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는 오늘날 로마의 중심 베네치아 광장에 자신의 이름이자 ‘승리’를 뜻하는 비토리아노(Vittoriano, 통일기념관) 건물의 정면을 위풍 있는 기마상의 모습으로 지키고 서 있다.
 
 
  라틴어, 기독교, 로마법, 로마 月曆…
 
아우구스투스. 악티움 해전으로 로마 내전을 종결짓고 로마제국 시대를 열었다. 금년이 2000周忌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는 유럽에, 나아가 세계에 많은 것을 준 나라다. 문화 이전에 유럽 문명의 핵심을 이루는 많은 것들이 오늘의 이탈리아 땅에서 비롯되었다. 라틴어의 발원지였고 기독교의 총본산이었다.
 
  문명 발달의 중요한 터전이 되는 도시(都市)도 고대 로마를 모델로 하여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 로마가 들어오기 전까지 영국에는 도시가 없었다고 한다.
 
  로마법(法)도 그렇고 로마 월력(月曆)도 마찬가지다. 고대 월력(율리우스력, Julian Calendar)이나 그 개정력인 그레고리우스력(Gregorian Calendar)이 모두 이탈리아 작품이다.
 
  이것저것 장황하게 예를 들 것도 없다. 유럽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고대 로마가 만들어 내어 지키려 했고 실제 지켜 냈던 그 무엇, 지중해 남안(南岸)인 북아프리카와 동안(東岸)인 레반테 지역과 구분되는 그 무엇, 심지어 알렉산더 대제(大帝) 시절의 헬레니즘과도 차이나는 그 무엇을 유럽의, 조금 더 좁혀 서유럽의 적통 유산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에서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과 악티움 해전(기원전 31)은 서양 고대사에서 의미가 특별하다.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에 의해 야기된 서유럽의 정체성 위기를 막아 낸 역사적 승전이었던 것이다. 이 ‘위기’에서 로마를 건진 스키피오(Publius Scipio Africanus)와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서유럽 문명의 원류를 지켜 낸 위업의 아우라가 함께한다.
 
  그 다음 얘기들은 우리에게 많이 익숙하다. 고대 로마가 남긴 무한한 유산에 더해 초기 기독교 유적들, 중세 기독교회와 자치도시들이 남긴 풍성한 문화유산은 이탈리아를 유럽 국가들 중 독보적인 역사기행지로 만들어 준다.
 
  르네상스에 이르면 더 이를 말이 없다. 르네상스에 관한 책들, 특히 미술연구 서적들을 보면 내용의 3분의 2 이상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이고 나머지가 여타 나라 얘기들이다.
 
  르네상스는 여러 면에서 과거와의 획기적 차이로 부각되지만 실은 직전 과거(중세)와 잠시 결별해 더 먼 과거(고대)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고대(古代)를 되살려 당대(當代)의 거듭남을 기약한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리나시타(rinascita, 다시 태어남)’였다.
 
  종교개혁의 경우도 비슷하다. 세속과 뒤얽혀 이미 어지러워진 가까운 기독교와 헤어져 초기 기독교의 단순한 ‘말씀’으로 돌아가 거듭 태어나자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결국 거듭 태어나기 위해 지양되어야 할 현상과 다시 태어남에 지침으로 삼아야 할 준거(準據)가 모두 이탈리아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노력들이 합쳐져 서유럽의 근대를 열었다.
 
  이탈리아 문화 체험은 결국 장구한 역사 속에 성·속(聖·俗)의 문화가 교차하며 엮어 낸 특유의 이야기와 아름다움을 섭렵하는 일이다. 이 이야기와 아름다움이 고대 로마가 다져 놓은 단단한 밑그림 위에서 펼쳐지니 더욱 남달라 보이는 것이리라. 이 고전의 가치에 대한 앞선 인식을 갖고 괴테는 2년 가까운 귀한 시간을 할애해 이탈리아 전역을 나귀 타고 둘러보았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고민과 강점
 
구주연합(EU) 집행위원장을 역임한 로마노 프로디 전 총리의 방문을 받고 같이 사진촬영을 했다. 왼쪽이 필자.
  그 이탈리아의 마음이 요즘 편치가 않다. 경제침체가 장기화하고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자 기왕에도 있었으나 즐겁게 잊혔던 사회·문화적 문제들까지 새삼 논란이다. 청년이민(두뇌유출) 문제, 남북부 지역간 불균형, 소위 메초조르노 문제(Problema di Mezzogiorno), 자본유출 문제, 이민 문제 등에 해묵은 조직범죄 문제까지 이탈리아는 현재 심각한 국가 차원의 ‘영혼탐색(soul-searching)’기를 거치는 모습이다.
 
  사실 이탈리아는 단일 국가로 출범한 이래 ‘정치 덕분에’라기보다는 ‘정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위상에 이른 측면이 없지 않다. 국민 개개인의 자질이나 개별기업들의 수준의 합(合)이 그대로 혹은 그 이상의 ‘국력’으로 치환되지 못하는 구조를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깊숙한 강바닥에 높직한 강둑을 따라 삼천 년을 흘러 온 강은 몇 달 장마나 몇 년 가뭄으로 넘거나 마르지 않는다.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이 시작되고 제도로서의 자본주의가 태어난 나라의 정치·경제적 복원력을 가볍게 볼 수 없다.
 
  먼 과거의 환난까지 갈 것 없이 2차 대전이 끝난 후 왕국을 청산하고 공화국으로 새 출발하는 역사적 고비를 문제 없이 넘겼다. 뒤이어 라인강의 기적에 버금가는 고속 경제성장으로 유럽 최고 수준의 산업생산력을 일구어 1980년대 중반 영국을 제치고 세계 5위의 경제대국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1990년대에 역시 경제 수치가 쉽지 않은 가운데 유로화 출범의 순간을 맞아 대단한 재정긴축을 실행한 일도 있다.
 
  사회적으로도 조금 작지만 가까운 사례가 있다. 수삼 년 전 공공장소 금연 정책을 시행할 때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이탈리아에서 그게 되겠나”들 했는데 일치된 국민적 호응으로 성공적 정착을 이루어 냈다.
 
  요즘 그 가치가 새삼 회자되는 문화적 측면, 즉 소프트 파워 면에서는 아마 세계 최강일 것이다. 부연이 불필요하다. 매사 끝없이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해 다시 창출(리인벤트)할 수 있는 재간과 소재와 근거가 그 국민과 문화와 역사 속에 무진(無盡)한 나라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을 떠나며…
 
  이 특별한 나라에 살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곳을 돌아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 만난 사람을 오랜 친구 대하듯 하고, 손님으로 왔던 사람이 시간 되어 돌아가는 것을 드러나게 아쉬워하고, 조그만 선물 하나를 보물 다루듯 감격해하는 참 다감한 사람들이다.
 
  이들과 주고받은 무수한 ‘그라치에 밀레(Grazie mile)’, ‘프레고(Prego)’, ‘피아체레(Piacere)’를 뒤로하고 이제 이탈리아를 떠나려 공항 마을 퓨미치노로 향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이다.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 공항, 피렌체의 아메리고 베스푸치 공항, 피사의 갈릴레오 갈릴레이 공항 들이 모두 그 이름을 자랑스러운 고향 출신 중에 골랐는데 로마는 그 많은 로마 사람들을 비켜 두고 토스카나의 산골마을 빈치 사람을 골랐다. 이탈리아의 수도(首都)답다. 또 존 에프 케네디 공항이나 샤를 드골 공항같이 정치지도자들의 이름이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 르네상스 보편인(uomo universale)의 이름을 골랐다. ‘세계의 수도(Caput Mundi)’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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