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해군성이 휴전회담 악영향 우려, 소련 잠수함 격침 사실 극비에 부쳐』(매켈플레시 氏 증언)
● 美 구축함 렌쇼號의 폭뢰공격으로 怪잠수함 격침. 주변 해역에서 잠수함용 디젤유 기름띠 발견
● 美 해군, 『잠수함 격침에 대해 말하지 말고, 기록으로 남기지 말라』며 극비에 부쳐
● 렌셔號 승조원 매켈플레시氏, 잠수함 격침 작전일지 40년간 숨겨
● 국방과학연구소, 문제의 추정물체는 소련의 MV급 잠수함으로 판단
● 한국 해군, 극비리에 인양계획 추진…기술부족, 국제법 때문에 인양 포기
● 잠수함 인양되면 6·25전쟁史 다시 써야
● 美 구축함 렌쇼號의 폭뢰공격으로 怪잠수함 격침. 주변 해역에서 잠수함용 디젤유 기름띠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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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렌셔號 승조원 매켈플레시氏, 잠수함 격침 작전일지 40년간 숨겨
● 국방과학연구소, 문제의 추정물체는 소련의 MV급 잠수함으로 판단
● 한국 해군, 극비리에 인양계획 추진…기술부족, 국제법 때문에 인양 포기
● 잠수함 인양되면 6·25전쟁史 다시 써야
6척의 美 구축함이 29시간 동안 추격
- 美 구축함 렌쇼호에 승조하여 1951년 7월 한반도 서해에서 잠수함을 격침시켰던 노병들이 1992년 재회했을 때의 사진.
1951년 7월28일 오후 7시13분.
美 항공모함 「시실리」號와 영국 항공모함 「글로리」號를 주축으로 하는 항공모함 전단이 백령도 서쪽 해상을 지나칠 무렵. 선단 앞쪽에서 항공모함 두 대를 호위하던 6척의 구축함 중 좌측을 경계하고 있던 구축함 「렌쇼」號가 731m 떨어진 바닷속에서 이상물체를 발견했다.
나란히 항해하던 구축함 「렌쇼」號와 「무어」號는 항공모함 선단에서 빠져나와 이상물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금속성 음이 명쾌하게 감지됐고, 모니터에는 뾰족뾰족한 반사음 궤적이 드러났다. 이상물체는 엔진 출력을 낮춘 채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1.5~2노트의 속도였다. 구축함의 지휘부인 전투상황실에서는 『잠수함이다!』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렌쇼號가 한국 전장에 파견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잠수함과의 조우는 처음이었다. 렌쇼號의 승무원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 전역을 누비며 일본 잠수함을 격침시킨 베테랑들이었다. 승무원들의 표정에는 흥분과 긴장이 교차했다.
보고를 받은 旗艦(기함) 시실리號의 존 새치 함장은 단호한 명령을 내렸다.
『격침시켜!』
새치 함장은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했고, 일본 가미가제 전폭기의 자살충돌을 막는 방안을 고안해 낸 용장이었다.
일본 해군은 75척의 잠수함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전쟁기간 중 190척의 잠수함을 건조했다. 1945년 8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을 때 미국에 투항한 일본 잠수함은 55척. 210여 척의 일본 잠수함이 미군 구축함과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것이다.
미국의 잠수함들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해군 전투 함정 201척을 격침시켰다. 항공모함 9척, 전함 1척, 순양함 15척, 잠수함 22척, 구축함 46척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함대의 25%가 미군 잠수함 공격에 의해 무력화된 셈이다.
열아홉 살의 수병 도널드 매켈플레시는 구축함 렌쇼號의 對잠수함 무기 射手(사수)였다. 1949년 2월 고등학교 졸업 후 해군에 자원한 매켈플레시氏는 1950년 봄 구축함 렌쇼號의 승무원으로 배치됐다. 렌쇼號는 컴퓨터와 최첨단 무기를 장착한 당시 최신예 구축함이었다.
구축함 렌쇼와 무어는 7월28일 오후 7시13분부터 오후 10시55분까지 공격을 계속했다. 음파탐지기로 괴물체를 추적하고, 그 위를 지나면서 폭뢰를 투하하는 방식이었다.
月刊朝鮮은 7년 전부터 익명의 제보자를 통해 6·25 당시 서해상에서 격침된 잠수함의 존재를 알게 됐고, 추적 끝에 美 텍사스 댈러스에서 살고 있는 도널드 매켈플레시氏와 접촉을 시작했다. 그는 그날의 전투상황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의 戰況(전황)은 그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했다.
『렌쇼號가 세 번째 공격을 마친 직후 항모 시실리號에서 이륙한 헬리콥터가 해수면으로 떠오른 기름띠를 발견했습니다. 몇 번째 타격에서 치명상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괴물체의 이동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습니다. 수심 100피트(약 30m) 깊이에서 이동하던 괴물체는 수심 260피트(약 80m) 바닥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우리는 그걸 소나 탐지기로 확인했습니다. 괴물체는 구축함의 공격이 계속됐지만 20시간 이상 그 지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잠수함에서 나온 기름띠가 발견됐지만 어둠 때문에 더 이상 관측은 어려웠다. 기름이 뜬 바닷물을 채취하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밤 10시55분부터 구축함 「카유가號」와 「휴런號」가 임무를 교대했다.
매켈플레시氏가 승선하고 있던 구축함 렌쇼號는 다음날인 7월29일 오전 6시 교전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승무원들은 기름 냄새가 확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밤새 바다 위에 폭 500m, 길이 7~8km의 거대한 기름띠가 펼쳐져 있었다. 렌쇼號는 바다 위의 기름을 한 양동이 걷어서 항모 시실리號에 가져갔다.
분석 결과 디젤유였다. 침몰된 잠수함에서 새나온 연료임이 확실했다. 잠수함이 침몰된 지점은 대청도 서남방 26마일(약 42km) 지점으로 관측됐다. 매켈플레시氏는 자신의 교전일지에 이 지점의 위도와 경도를 기록했다.

美 해군, 怪잠수함 격침 전과 은폐
美 해군은 렌쇼號 승무원들의 「미확인 잠수함」 격침을 인정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잠수함 격침사실은 1급 비밀에 부쳐졌다. 승무원들은 「잠수함 격침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기록으로 남기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도널드 매켈플레시氏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잠수함 격침이 보안에 부쳐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이건 전적으로 내 개인 견해』라고 강조했다.
『1951년 6월 초 중국 조종사를 태운 소련의 미그 15기가 격추돼 압록강 어구에 추락했습니다. 1951년 7월19일부터 7월21일까지 미군과 영국군, 한국군 해병대가 추락한 미그 15기 기체를 수거하는 작전을 벌였는데 우리 항모전단이 화력 지원을 했습니다. 그때 잠수함 경보가 한번 울렸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미그 15기 수거 작전은 성공했고, 비행기는 인천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 항모전단에 다가왔던 그 잠수함이 바로 우리가 서해에서 조우했던 그 잠수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잠수함은 승무원 18명 정도를 태우는 소련의 「M」형 잠수함으로 추정됩니다.
이 잠수함은 수면 위로 부상하지 않고는 25시간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 잠수함에 타고 있었을 소련군과 중국군 혹은 북한군은 불과 며칠 전에 시작한 유엔과 북한군 사이의 평화협정을 망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소련 잠수함이 유엔군의 전투지역에 침투한 사실이 알려졌다면,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도 있었을 겁니다』
『잠수함 격침 작전일지 40년간 숨겼다』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과 북한 사이의 휴전협상은 1951년 7월11일 개성에서 시작됐다. 이보다 앞선 이해 6월23일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미국에 휴전협상을 제안했다.
1952년 1월 렌쇼號 승무원들은 서해에서의 경비작전 임무를 마치고 하와이의 진주만으로 귀항했다.
매켈플레시氏는 「손으로 기록한 구축함 무기 사용 기록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怪잠수함 공격기록 부분을 찢어 내고 나머지 기록을 제출했다.
『「이건 역사다.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찢어 낸 노트를 가지고 와서 내 스크랩북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그후 40년 동안 이 기록은 누구에게도 노출되지 않고, 스크랩북 속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1942년 건조된 렌쇼號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전쟁에서 맹활약했다. 1945년 필리핀 민다나오 인근 해상에서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19명의 승무원이 사망했고, 선체는 크게 파손됐다. 임시 수리를 거쳐 1945년 10월 전면적인 수리가 끝났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10월27일 렌쇼號에 올라 美 해군 사상 최대규모로 벌어진 태평양전쟁 승전 퍼레이드를 참관했다. 1950년 6월 렌쇼號는 성능 개선 작업을 거쳐 최첨단 잠수함 추적·격침 기능을 갖춘 구축함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전쟁 동안 렌쇼號는 두 번에 걸쳐 전장에 투입됐다. 1951년 5월부터 11월까지, 1952년 11월부터 1953년 6월까지. 각각 6개월씩의 참전이었다.
매켈플레시氏는 『렌쇼號와 함께 한국전쟁에 두 차례 참전했지만, 잠수함과 접촉해 격침시킨 것은 1951년 7월 딱 한 차례밖에 없었다』며 『그날 서해에서의 교전은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벌인 유일한 對잠수함 작전으로 기록돼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한국의 공식 韓國戰史(한국전사)에는 對잠수함 작전이 기록돼 있지 않다.
1992년 동료들과 진실 규명 뜻 모아
1953년 4년간의 복무를 마친 매켈플레시氏는 일리노이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고, 건축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59년부터 줄곧 건축 분야에서 엔지니어로 일해왔다. 델타 항공사 스튜어디스 출신인 부인과 결혼해 세 자녀와 네 명의 손자손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 해저에 가라앉은 난파 선박을 찾는 일을 취미로 해왔다.
1992년 9월, 잠수함 격침 당시 구축함 「렌쇼號」에 승선했던 참전용사 7명이 40년 만에 재회했다.
40년 만의 렌쇼號 승무원 再會(재회) 자리에 매켈플레시氏는 자신이 작성한 「잠수함 격침 작전지도」를 가져갔다. 40년 전 손으로 기록했던 전투일지와 공학 지식을 총동원해 「怪잠수함」 침몰지점을 찾아 냈다. 매켈플레시氏는 美 해군본부에 렌쇼號의 당시 작전일지를 요청했다.
비밀이 해제된 작전일지를 넘겨받았으나 예상대로 잠수함 격침 상황은 빠져 있었다.
―40년이 지나서 렌쇼號의 잠수함 격침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나선 이유는 무엇입니까.
『1952년 1월 진주만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잠수함 교전 기록을 불태워버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손으로 쓴 전투일지를 불태우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美 해군의 공식 전투일지에 우리의 그날 교전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手記(수기) 교전일지가 1951년 7월28일과 7월29일 대청도 인근 공해상에서 벌어진 美 구축함과 소련 잠수함의 전투를 담은 유일한 증거였습니다.
미국 쪽의 한국전쟁사에는 「미국 구축함과 소련 잠수함의 교전은 한 건도 없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저는 시간적·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동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나섰죠. 교전 때의 내 무기발사 상관이었던 앨리슨 마치氏가 함께 조사에 나섰습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잠수함을 인양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앨리슨 마치는 마침 美 해군연구소에서 34년간의 복무를 끝내고 은퇴한 상태였습니다.
교전 당시 항모 시실리號의 조사담당 장교였던 글로브氏도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글로브氏는 당시 바다 위에 떠 있던 기름을 수거해서 디젤유라고 판정한 사람입니다』
1997년 러시아 방문
―두 분은 지금까지 함께 작업을 하고 있습니까.
『앨리슨 마치氏는 2004년 봄에, 글로브氏는 2003년 11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렌쇼號의 승무원 가운데 이제 나 혼자 남은 셈입니다』
매켈플레시氏는 현지답사와 자료수집을 위해 1993년 한국을 방문했다.
―1993년 한국을 방문해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월미도에 있는 한국 해군 제2함대의 장교들을 만났습니다. 내가 만든 해전 상황지도와 정보들을 제공했습니다. 정보를 입수한 한국 해군은 해당 수역에 함정을 파견해 음파탐지를 했다고 합니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내가 지적해 준 경도와 위도에서는 난파한 배가 없고, 세 개의 「이상 징후」(바위 무더기)만 발견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1951년 7월28일 서해안에서 침몰한 것이 소련 잠수함이라면 소련 쪽에 기록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1994년부터 러시아語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 있는 舊 소련 문서보관소를 찾아갔다.
―러시아 전사자료에서 뭔가를 찾아냈습니까.
『러시아語를 배울 때는 美蘇관계가 아주 좋았었는데, 제가 러시아에 갔을 때는 사이가 아주 험악했습니다.(웃음) 기대를 하고 갔는데 문서보관소에서 자료를 열람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요』
소련군, 여순항에서 잠수함 12척 운영
―격침된 잠수함이 소련군이 운용하던 것이라는 단서는 얻었나요.
『한국의 서해안에서 운용된 잠수함들이 소련의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소련은 한국전쟁 때 모두 12척의 잠수함을 여순항을 母기지로 하여 운용했습니다. 「M형」이 6척, 「C형」이 2척, 「P형」이 2척 등이었습니다.
소련군 잠수함 정비를 담당했던 소련군 퇴역 장교를 만나서, 소련이 한국전쟁 당시 「포트 아서」(여순항)에서 운영했던 잠수함 3종의 특성과 제원을 확보했습니다. 여순항 인근에 주둔했던 소련 KGB 요원의 부인을 만나 한국전쟁 당시 소련군 참전 상황을 인터뷰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해군 측에 문의한 결과 『6·25 당시 중공과 북한은 잠수함은커녕 잠수정조차 보유하지 못했다』는 회신이 왔다.
소련의 잠수함 기지로 활용된 여순항은 1898년 러시아의 조차지가 됐다. 러시아는 철로로 여순항을 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연결했고, 거기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어지게 했다. 러시아는 러·일 전쟁 직전 일본 해군에 맞서기 위해 철로로 수송할 수 있는 잠수함을 개발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 생산한 잠수함을 먼바다를 거치지 않고, 육로를 이용해 여순항까지 실어나르겠다는 계획이었다.
일본군은 1904년 2월 선전포고 없이 여순항을 포격해 제국 러시아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러시아 잠수함의 위협을 감지한 일본 해군은 1904년 7척의 잠수함 건조를 발주했다. 일본 최초의 잠수함은 요코스카항의 고카스카 조선소에서 1905년 중반 완성됐으나 러·일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전장에 투입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흑해의 러시아 잠수함을 모두 파괴하자, 소련은 철로를 이용해 10척의 잠수함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흑해의 「포티」까지 이동시켰다.
―1951년 7월 당시 중공군이 우리 서해안에서 잠수함을 운용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소련군은 일본이 패망한 1945년 여순항을 접수했고, 1955년에야 중공에 기지를 돌려주었습니다. 나는 1997년 러시아 방문 때 KGB 요원의 부인으로부터 기지 반환식에 참석한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과 저우언라이(朱恩來)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건네받았습니다.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기지를 방문한 사진도 가지고 있습니다. 1955년까지 여순항은 소련의 군항이었습니다』
―중공군이 소련군의 지휘하에 잠수함에 승선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스탈린과 毛澤東은 1949년 중공군 잠수함 요원을 여순항에서 훈련시키는 데 합의했습니다. 毛澤東이 장개석 군대를 본토에서 몰아낸 직후였습니다.
1950년 비공식적인 훈련이 시작됐고, 1951년 봄에는 200명 이상의 잠수함 수병들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공식자료는 1955년 기지반환 때 어느 정도의 잠수함이 중공군에 건네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한국 해군의 비밀 탐사
한국 해군은 1993년 매켈플레시氏가 제공한 정보에 따라 세 곳의 유망지점에 대한 해저 탐사를 실시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해군은 1995년 5월 탐사 업무를 해군사관학교의 「해전유물발굴단」으로 넘겼다. 탐사작업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매켈플레시氏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해전유물발굴단장인 황동환 대령(海士 22기 출신)은 매켈플레시氏가 제공한 미 해군 구축함 렌쇼號의 작전일지, 해군 2함대의 1993년 탐사기록을 토대로 탐사를 준비했다. 탐사작업은 1995년 5월15일부터 6월3일까지, 6월8일부터 6월17일까지 모두 30일간 실시됐다.
매켈플레시氏는 침몰 지점을 「북위 37도 25.5, 동경 124도 25.3」으로 지목했다. 해군 2함대는 1994년 11월 작성한 「서해 미식별 수중 접촉물 확인 보고」를 황단장 팀에게 인계했다.
진해에서 탐사선을 끌고 서해안으로 올라온 황대령은 네 지점에 대한 탐사를 우선적으로 실시했다. 결과는 허탕이었다.
황대령은 軍에서 은퇴해 현재 경기도 파주군 교하 신도시에서 살고 있다. 어렵게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걸었더니 『그 일이라면 할 말이 많다』고 반가워했다. 황대령을 지난 4월10일 파주 심학산 아래의 한 장어집에서 만났다.
구축함 부산함장, 55전대장을 지낸 황대령은 1989년부터 1996년까지 해전유물발굴단장을 지냈다. 55전대장 시절 예하에 「해난구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인연으로, 8년간 바닷속의 해전 유물을 찾아내는 일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만들어 사용했던 거북선의 흔적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황대령은 『美 구축함이 격침시킨 소련 잠수함을 찾아낸 것은 최첨단 장비가 아니라 어부들을 탐문한 끝에 얻은 「정보」였다』고 털어놓았다.
―구축함 렌쇼號가 작전 일지에 자신들이 침몰시킨 「괴물체」의 정확한 좌표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도 그걸 찾아내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겁니까.
『바다가 넓기 때문이죠(웃음)』
황대령의 설명에 따르면, 「북위 37.5도 25.5」가 「북위 37.5도 24.5」로 잘못 측정됐을 때 거리의 오차는 1.85km나 발생한다. 황대령의 탐사선은 당시 반경 1km의 면적을 탐사하는 데 1주일이 걸렸다. 반경 1.85km의 오차라면 4주 이상 탐사선을 가동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어부들의 결정적 제보
―매켈플레시氏의 좌표가 정확하지 않았던 겁니까.
『당시에는 GPS(위성위치관측장치)가 없었지 않습니까? 눈과 탐측 장비로 위치를 확인했지만, 정확하지 않았던 거죠. 렌쇼號가 지적한 좌표에서 3 해상마일(5.4km) 떨어진 수중에서 잠수함을 찾았습니다』
―매켈플레시氏가 지적한 좌표 인근에서는 침몰된 선박이 없었습니까.
『너무 많아서 문제였죠. 탐사장비가 예민해서 「해저 미식별 물체」를 10여 개나 찾아 냈습니다.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격침시켰던 일본 잠수함, 화물선 등이 있었습니다. 하나씩 확인해 나갔지만 렌쇼號가 침몰시킨 잠수함은 찾지 못했습니다』
―잠수함이 침몰된 지점은 어떻게 찾았습니까.
『첫 번째 탐사에서 허탕을 쳤고, 두 번째 탐사에서 뚜렷한 잠수함 징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죠. 제가 고무보트를 타고 해상에서 조업 중인 우리 어선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탐문 수사」를 한 거죠.
어청도 소속의 한 어선에 올라탔더니 「이 근처에서 조업하다가 그물이 자꾸 걸려 고생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그곳으로 가보자」고 했습니다. 어선의 어군탐기로 탐지했더니 수심 80m쯤 아래서 「미식별 물체」가 확인됐습니다』
황대령은 곧바로 다른 지역에서 작업 중이던 해군 탐사선을 끌고가 이 물체에 대한 탐사작업을 벌였다.
탐사선이 보유하고 있던 「측면주사 탐사기」(Side Scan Sonar: 카메라가 물체의 측면을 지나가면서 형상을 파악하는 기계), 「해저 지층 물체 형상 확인기」(Sub Bottom Profiler: 해저에 묻힌 물체를 위에서 찍어 형상을 확인하는 기계)를 투입했다.
탐사선의 모니터에 길이 50m, 높이 12~13m 정도의 길쭉한 원형 물체가 감지됐다. 황대령은 즉각 「ROV(수중 비디오 촬영기)」를 바닷속으로 들여보냈다.
수중비디오 촬영기는 해저 밑바닥을 시속 4노트(7.2km) 정도로 움직이며 영상을 찍는다. 당시 서해 바닷속의 해류는 6~7노트의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비디오 촬영기가 원형 물체에 다가가려다 해류에 계속 떠밀려 내려갔다. 응급조치로 탐사선에서 무거운 추를 내리고 그 추에 ROV를 선으로 연결시켰다.
국방과학연구소의 결론은 「소련 잠수함」
첫날 작업에서 ROV로 선체 후미의 모습을 사진찍는 데 성공했다. 원형의 선체에는 수많은 漁網(어망)이 뒤엉켜 있었다. 다음날 다시 ROV를 내려 보내서 더 선명한 선체 사진을 찍으려다가 ROV가 선체의 어망에 엉켜 버렸다. ROV를 잃어버린 채 30일간의 탐사작업은 끝이 났다.
황대령은 탐사작업에서 얻은 모든 정보를 「국방과학연구소」에 보냈다.
황대령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국방과학연구소의 분석결과를 月刊朝鮮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자료를 이렇게 분석했다.
<1. 물체의 제원
ㆍ길이 50~60m
ㆍ높이 5~9m
ㆍ폭 5m 내외
ㆍ중앙 돌출부 높이 11~12m
2. 특징
ㆍ선수미로 추정되는 부분이 뭉툭함.
ㆍ갑판상 구조물이 거의 없음.
ㆍ중앙 부분이 돌출되어 있고, 앞뒤로 직선형임.
ㆍ선체 상하부가 곡면 상태임.
ㆍ유선형 선체로 시야 내에 외부 돌출물이 없음.
ㆍ두꺼운 금속체이며 녹슨 부분이 적음(특수 도색 추정)>
국방과학연구소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기록지 및 촬영사진 분석결과 선체의 제원 및 외형이 일반 선박 또는 전함과는 상이함. 美 측에서 제공된 자료가 정확하다면 접촉 선체는 MVI-BIS보다 큰 소련제 MV급 잠수함인 것으로 판단됨>
소련이 보유했던 MVI-BIS 잠수함은 길이가 37.8m, 무게가 161톤(잠수하지 않았을 때)이다. MV 잠수함은 길이가 50.9m 무게가 350톤 규모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이 잠수함이 소련이 만든 「MV급」으로 추정한 것이다.
해군의 조사결과는 당시 국방부와 국가안전기획부에 보고됐지만, 서해 바닷속에 잠들어 있는 소련 잠수함 인양은 이뤄지지 않았다.
파주에서 만난 황대령은 『소련 잠수함 인양에 따르는 외교 군사적 부담 때문에 해군 수뇌부와 金泳三 정부에서 이 사실을 덮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소련 잠수함이 침몰한 지점은 대청도 서남방 26마일 지점으로 공해상입니다. 우리 해군 작전구역이지만, 대규모 인양작업을 하면 북한을 자극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잠수함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소련군 잠수함이든, 북한군이 운용한 소련제 잠수함이든 발굴 결과에 따라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불가피할 겁니다. 또한 건져 낸 잠수함의 소유권 문제가 발생할 수 있구요』
왜 해군은 미군이 격침시킨 소련 잠수함의 잔해를 인양하지 않았던 것일까? 月刊朝鮮은 해군본부가 탐사작업 완료 직후에 작성한 「서해 미식별 수중 접촉물 탐사 결과 및 인양 관련 검토 보고서」를 최근 입수했다. 비밀문서로 분류됐던 이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해군본부는 「한국 해군이 자체 능력으로 잠수함을 인양할 수 있는 1998년 이후 인양을 추진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해군, 기술상의 한계로 인양 미뤄
해군본부는 「황대령팀이 찾아낸 잠수함의 침몰 위치가 美 해군 측이 제공한 자료와 거의 일치하나 물체의 크기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며 「수중 물체가 1934년 소련에서 건조한 M형(VI-BIS급) 잠수함인지에 대해서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해군본부는 다음과 같이 「인양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수중 물체가 6·25 전쟁 당시 美 구축함이 격침시킨 M형 잠수함으로 확인되면 한국전쟁에 참여한 전쟁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1950년대 초기 잠수함 건조 및 운용에 대한 기술자료 획득이 가능하다〉
1996년 「즉각 인양」이 불가능했던 것은 기술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해군본부 자료의 관련 부분이다.
<한국 해군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잠수 능력은 최대 190피트(57.9m)다. 현장의 수심은 262피트(79.8m)다. 1996년 건조 중인 포화잠수기법 장비를 전력화할 경우 1000피트(304m) 잠수가 가능해진다. 美 해군은 현재 1000피트 잠수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 해군 단독으로는 1998년 인양이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해군본부는 미국 해군의 지원을 받아 1996년 혹은 1997년에 인양하는 방법과 한국해군 단독으로 1998년 이후 단독 인양하는 방안을 검토했고, 「1998년 이후 단독 인양」으로 기울었다. 해군본부는 「미국이 참전·격침·인양국으로서 소유권을 주장할 가능성이 있고, 언론보도 통제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美 해군과의 조기 공동인양을 포기했다.
해군은 당시 인양 후 잠수함 소유권 분쟁을 심각하게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본부 보고서의 분석이다.
<서해 수중물체는 침몰 전 나포되지 않았으므로 인양 후 소유권은 침몰 전 旗國(기국)에 있다. 만약 침몰 전 소유국에서 소유권을 주장해 올 경우에는 인양에 소요된 비용에 대해서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1981년 소련은 소련 잠수함이 스웨덴 근해에서 좌초했을 때 구조비용을 지불했다. 수중물체의 침몰 전 기국이 러시아 또는 북한이라면 소유권 분쟁의 가능성이 있다. 美 해군의 지원을 받아 인양할 경우, 소유권에 대해서 협정서 체결 등을 통해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매켈플레시와 황동환 대령의 만남
황동환 대령은 2001년 10월 도널드 매켈플레시氏에게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도널드 매켈플레시」라는 이름은 낯이 익었다. 그가 제공한 정보를 근거로 1995년 대청도 인근에서 해저 탐사작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매켈플레시氏는 이 편지에서 한국 해군이 벌인 1995년 해저탐사 정보를 요청했다.
〈나는 1951년 7월28일 서해상에서 벌어진 對잠수함 작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구축함 USS 렌쇼號가 그 공격을 시작했고, 5대의 구축함이 28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습니다. 나는 렌쇼號에서 對잠수함 어뢰를 쏘는 사수였습니다. 우리 동료들이 잠수함을 격침시켰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1993년 한국을, 1997년에는 러시아를 방문했습니다.
1995년 수중 탐사에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침몰 지점은 우리가 작성한 위도·경도와 일치했습니까? 그것은 잠수함이었습니까? 당시 소련은 포트 아서(여순항)에서 세 종류의 잠수함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발견한 잠수함은 「C」, 「M」, 「P」형 중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는 그 잠수함을 수심 240피트에서 남겨두었습니다. (수중 이상물체를) 발견한 장소의 수심은 얼마였습니까〉
파주에서 만난 황대령은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다 퇴역한 미군 영관급 장교가 우리 해군의 소련 잠수함 탐사 정보를 매켈플레시氏에게 흘려줬고, 내 주소까지 알려준 것으로 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이메일과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고, 2002년 5월 한국에서 對面(대면)하기에 이르렀다. 매켈플레시氏는 황대령의 용인 집에서 1주일을 함께 머물렀다. 황대령은 그때까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탐사 관련 자료를 매켈플레시氏에게 전해 주었다.
한국의 反美 분위기에 놀란 매켈플레시
매켈플레시氏는 황대령과 함께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과 충남 삽교에 있는 「함상공원」을 찾았다. 매켈플레시氏는 전쟁기념관의 한 벽에 세워진 미군 전사자 기념비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의 이름을 발견했다.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1953년 전쟁이 끝날 무렵 격추돼 사망한 「제임스 반 빈」이었다.
두 사람은 기념비 앞에서 한참 동안 고개를 숙였다.
매켈플레시氏는 삽교 함상공원 전시관의 연평해전 안내 자료를 보면서 황대령으로부터 『한국 해군이 도발하는 북한 전투함을 향해 정당한 대응 사격을 못 해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매켈플레시氏는 한국 사회에서 끓어오르던 反美(반미)감정에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황대령은 『구축함에서 함께 싸웠던 동료들의 명예를 위해 50년이 지난 한국전쟁의 진실을 찾아나선 매켈플레시氏에게 한국의 反美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정밀 再탐사가 우선돼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탐사를 통해 소련 잠수함인 것이 확인되면 인양해서 전쟁박물관이나 삽교의 함상공원에 갖다두면 되지 않겠느냐」고 의견 일치를 봤다. 매켈플레시氏의 回顧(회고)다.
『침몰 지점의 수심이 깊지만 물이 맑아서 침몰 물체의 완전한 그림을 확보할 수 있을 걸로 생각했습니다. 잠수함의 확정적인 그림이 잡혀야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인양이 가능한지 검토해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인양자금 확보입니다. 자금조달은 한국전 참전 미군들을 통해서 충분히 모금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지만 시대상황이 최악이었다. 황동환 대령의 얘기다.
『우리가 잠수함에 대한 정밀탐사를 시작하려면 金大中 정부의 인가가 필요했습니다. 2000년 서해교전에서 우리 장병들이 북한 전투함에 대응 사격을 제대로 못 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인 金大中 정부가 북한의 한국전쟁 도발 증거를 찾아 내는 작업을 허용해 줄 리 있겠습니까. 지난 10년간 「침몰된 잠수함을 인양하자」고 말을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황대령은 『이제 침몰된 잠수함 인양작업에 착수해야 할 시점』이라며 『우리 해군과 해양연구소에 인양에 필요한 탐사선과 인력이 모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잠수함 인양이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얘기했다.
한국전쟁의 역사적 인물
『수심 80m에 침몰한 잠수함에서 단 한 명의 승조원도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그 안에 탄 군인들이 소련군이든 북한군이든 한국전쟁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잠수함 안에는 중요 작전문서가 남아 있을 겁니다. 최근 들어 「한국전쟁은 남북한 사이의 內戰(내전)이었다」는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듯 인정되고 있습니다.
문제의 잠수함 인양은 한국전쟁이 미·소 양대 진영에 의해 치러진 전면적인 국제전쟁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증거가 될 겁니다. 소련 공군뿐 아니라 해군과 잠수함 부대까지 참전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한국전쟁사」를 새로 써야죠』
매켈플레시氏에게 「인양작업을 계속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두 조력자가 죽었고, 나는 이제 76세입니다. 1951년 7월28일 작전에 대해 더 깊이 있는 조사를 계속하는 일은 이제 역사에 맡겨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해군본부는 1995년 6월 「1998년 이후 잠수함 인양」을 결정했다. 이때 추정한 인양비용은 「부가가치세를 포함 6억 8530만원」이었다. 해상 크레인과 양묘선, 바지 예인선 3척을 동원해 이틀 작업을 하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휴전협정의 신속한 진전을 위해 소련의 것으로 추정되는 잠수함 격침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격침에 참여했던 미군 장병들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한국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과 러시아를 뛰어다니고 있다. 진실을 밝히려고 했던 참전용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매켈플레시氏는 이제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해군본부는 「(서해 침몰 잠수함은) 한국전쟁에 참가한 전쟁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소련의 한국전 참전을 입증하는 역사적 증거를 확보하는 데 「6억8530만원」을 투자하지 못할 만큼 대한민국은 인색한 나라인가? 취재를 끝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美 항공모함 「시실리」號와 영국 항공모함 「글로리」號를 주축으로 하는 항공모함 전단이 백령도 서쪽 해상을 지나칠 무렵. 선단 앞쪽에서 항공모함 두 대를 호위하던 6척의 구축함 중 좌측을 경계하고 있던 구축함 「렌쇼」號가 731m 떨어진 바닷속에서 이상물체를 발견했다.
나란히 항해하던 구축함 「렌쇼」號와 「무어」號는 항공모함 선단에서 빠져나와 이상물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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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전해 서해상에서 잠수함을 격침시킨 美 구축함 렌쇼호(DD-499). |
렌쇼號가 한국 전장에 파견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잠수함과의 조우는 처음이었다. 렌쇼號의 승무원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 전역을 누비며 일본 잠수함을 격침시킨 베테랑들이었다. 승무원들의 표정에는 흥분과 긴장이 교차했다.
보고를 받은 旗艦(기함) 시실리號의 존 새치 함장은 단호한 명령을 내렸다.
『격침시켜!』
새치 함장은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했고, 일본 가미가제 전폭기의 자살충돌을 막는 방안을 고안해 낸 용장이었다.
일본 해군은 75척의 잠수함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전쟁기간 중 190척의 잠수함을 건조했다. 1945년 8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을 때 미국에 투항한 일본 잠수함은 55척. 210여 척의 일본 잠수함이 미군 구축함과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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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여한 구축함 렌쇼호에 탑승한 매켈플레시氏(왼쪽 첫 번째)와 동료들. |
열아홉 살의 수병 도널드 매켈플레시는 구축함 렌쇼號의 對잠수함 무기 射手(사수)였다. 1949년 2월 고등학교 졸업 후 해군에 자원한 매켈플레시氏는 1950년 봄 구축함 렌쇼號의 승무원으로 배치됐다. 렌쇼號는 컴퓨터와 최첨단 무기를 장착한 당시 최신예 구축함이었다.
구축함 렌쇼와 무어는 7월28일 오후 7시13분부터 오후 10시55분까지 공격을 계속했다. 음파탐지기로 괴물체를 추적하고, 그 위를 지나면서 폭뢰를 투하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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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모함 시실리號의 함장 존 새치. |
『렌쇼號가 세 번째 공격을 마친 직후 항모 시실리號에서 이륙한 헬리콥터가 해수면으로 떠오른 기름띠를 발견했습니다. 몇 번째 타격에서 치명상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괴물체의 이동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습니다. 수심 100피트(약 30m) 깊이에서 이동하던 괴물체는 수심 260피트(약 80m) 바닥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우리는 그걸 소나 탐지기로 확인했습니다. 괴물체는 구축함의 공격이 계속됐지만 20시간 이상 그 지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잠수함에서 나온 기름띠가 발견됐지만 어둠 때문에 더 이상 관측은 어려웠다. 기름이 뜬 바닷물을 채취하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밤 10시55분부터 구축함 「카유가號」와 「휴런號」가 임무를 교대했다.
매켈플레시氏가 승선하고 있던 구축함 렌쇼號는 다음날인 7월29일 오전 6시 교전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승무원들은 기름 냄새가 확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밤새 바다 위에 폭 500m, 길이 7~8km의 거대한 기름띠가 펼쳐져 있었다. 렌쇼號는 바다 위의 기름을 한 양동이 걷어서 항모 시실리號에 가져갔다.
분석 결과 디젤유였다. 침몰된 잠수함에서 새나온 연료임이 확실했다. 잠수함이 침몰된 지점은 대청도 서남방 26마일(약 42km) 지점으로 관측됐다. 매켈플레시氏는 자신의 교전일지에 이 지점의 위도와 경도를 기록했다.

美 해군, 怪잠수함 격침 전과 은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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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켈플레시氏가 자필로 쓴 잠수함 격침 당시의 교전 기록. |
도널드 매켈플레시氏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잠수함 격침이 보안에 부쳐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이건 전적으로 내 개인 견해』라고 강조했다.
『1951년 6월 초 중국 조종사를 태운 소련의 미그 15기가 격추돼 압록강 어구에 추락했습니다. 1951년 7월19일부터 7월21일까지 미군과 영국군, 한국군 해병대가 추락한 미그 15기 기체를 수거하는 작전을 벌였는데 우리 항모전단이 화력 지원을 했습니다. 그때 잠수함 경보가 한번 울렸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미그 15기 수거 작전은 성공했고, 비행기는 인천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 항모전단에 다가왔던 그 잠수함이 바로 우리가 서해에서 조우했던 그 잠수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잠수함은 승무원 18명 정도를 태우는 소련의 「M」형 잠수함으로 추정됩니다.
이 잠수함은 수면 위로 부상하지 않고는 25시간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 잠수함에 타고 있었을 소련군과 중국군 혹은 북한군은 불과 며칠 전에 시작한 유엔과 북한군 사이의 평화협정을 망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소련 잠수함이 유엔군의 전투지역에 침투한 사실이 알려졌다면,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도 있었을 겁니다』
『잠수함 격침 작전일지 40년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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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쇼호에 탑승하고 있을 당시의 매켈플레시氏. |
1952년 1월 렌쇼號 승무원들은 서해에서의 경비작전 임무를 마치고 하와이의 진주만으로 귀항했다.
매켈플레시氏는 「손으로 기록한 구축함 무기 사용 기록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怪잠수함 공격기록 부분을 찢어 내고 나머지 기록을 제출했다.
『「이건 역사다. 숨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찢어 낸 노트를 가지고 와서 내 스크랩북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그후 40년 동안 이 기록은 누구에게도 노출되지 않고, 스크랩북 속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1942년 건조된 렌쇼號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전쟁에서 맹활약했다. 1945년 필리핀 민다나오 인근 해상에서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19명의 승무원이 사망했고, 선체는 크게 파손됐다. 임시 수리를 거쳐 1945년 10월 전면적인 수리가 끝났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10월27일 렌쇼號에 올라 美 해군 사상 최대규모로 벌어진 태평양전쟁 승전 퍼레이드를 참관했다. 1950년 6월 렌쇼號는 성능 개선 작업을 거쳐 최첨단 잠수함 추적·격침 기능을 갖춘 구축함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전쟁 동안 렌쇼號는 두 번에 걸쳐 전장에 투입됐다. 1951년 5월부터 11월까지, 1952년 11월부터 1953년 6월까지. 각각 6개월씩의 참전이었다.
매켈플레시氏는 『렌쇼號와 함께 한국전쟁에 두 차례 참전했지만, 잠수함과 접촉해 격침시킨 것은 1951년 7월 딱 한 차례밖에 없었다』며 『그날 서해에서의 교전은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벌인 유일한 對잠수함 작전으로 기록돼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한국의 공식 韓國戰史(한국전사)에는 對잠수함 작전이 기록돼 있지 않다.
1992년 동료들과 진실 규명 뜻 모아
1953년 4년간의 복무를 마친 매켈플레시氏는 일리노이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고, 건축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59년부터 줄곧 건축 분야에서 엔지니어로 일해왔다. 델타 항공사 스튜어디스 출신인 부인과 결혼해 세 자녀와 네 명의 손자손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 해저에 가라앉은 난파 선박을 찾는 일을 취미로 해왔다.
1992년 9월, 잠수함 격침 당시 구축함 「렌쇼號」에 승선했던 참전용사 7명이 40년 만에 재회했다.
40년 만의 렌쇼號 승무원 再會(재회) 자리에 매켈플레시氏는 자신이 작성한 「잠수함 격침 작전지도」를 가져갔다. 40년 전 손으로 기록했던 전투일지와 공학 지식을 총동원해 「怪잠수함」 침몰지점을 찾아 냈다. 매켈플레시氏는 美 해군본부에 렌쇼號의 당시 작전일지를 요청했다.
비밀이 해제된 작전일지를 넘겨받았으나 예상대로 잠수함 격침 상황은 빠져 있었다.
―40년이 지나서 렌쇼號의 잠수함 격침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나선 이유는 무엇입니까.
『1952년 1월 진주만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잠수함 교전 기록을 불태워버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손으로 쓴 전투일지를 불태우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美 해군의 공식 전투일지에 우리의 그날 교전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手記(수기) 교전일지가 1951년 7월28일과 7월29일 대청도 인근 공해상에서 벌어진 美 구축함과 소련 잠수함의 전투를 담은 유일한 증거였습니다.
미국 쪽의 한국전쟁사에는 「미국 구축함과 소련 잠수함의 교전은 한 건도 없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저는 시간적·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동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나섰죠. 교전 때의 내 무기발사 상관이었던 앨리슨 마치氏가 함께 조사에 나섰습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잠수함을 인양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앨리슨 마치는 마침 美 해군연구소에서 34년간의 복무를 끝내고 은퇴한 상태였습니다.
교전 당시 항모 시실리號의 조사담당 장교였던 글로브氏도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글로브氏는 당시 바다 위에 떠 있던 기름을 수거해서 디젤유라고 판정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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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소련이 여순항을 중공에 인계할 당시의 사진. 삽질을 하고 있는 여성이 모택동의 부인 강청이다(사진 제공·매켈플레시). |
『앨리슨 마치氏는 2004년 봄에, 글로브氏는 2003년 11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렌쇼號의 승무원 가운데 이제 나 혼자 남은 셈입니다』
매켈플레시氏는 현지답사와 자료수집을 위해 1993년 한국을 방문했다.
―1993년 한국을 방문해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월미도에 있는 한국 해군 제2함대의 장교들을 만났습니다. 내가 만든 해전 상황지도와 정보들을 제공했습니다. 정보를 입수한 한국 해군은 해당 수역에 함정을 파견해 음파탐지를 했다고 합니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내가 지적해 준 경도와 위도에서는 난파한 배가 없고, 세 개의 「이상 징후」(바위 무더기)만 발견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1951년 7월28일 서해안에서 침몰한 것이 소련 잠수함이라면 소련 쪽에 기록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1994년부터 러시아語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 있는 舊 소련 문서보관소를 찾아갔다.
―러시아 전사자료에서 뭔가를 찾아냈습니까.
『러시아語를 배울 때는 美蘇관계가 아주 좋았었는데, 제가 러시아에 갔을 때는 사이가 아주 험악했습니다.(웃음) 기대를 하고 갔는데 문서보관소에서 자료를 열람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요』
소련군, 여순항에서 잠수함 12척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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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운영하고 있던 여순항을 방문한 彭德懷. 1955년 이전의 사진으로 추정된다(사진 제공·매켈플레시). |
『한국의 서해안에서 운용된 잠수함들이 소련의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소련은 한국전쟁 때 모두 12척의 잠수함을 여순항을 母기지로 하여 운용했습니다. 「M형」이 6척, 「C형」이 2척, 「P형」이 2척 등이었습니다.
소련군 잠수함 정비를 담당했던 소련군 퇴역 장교를 만나서, 소련이 한국전쟁 당시 「포트 아서」(여순항)에서 운영했던 잠수함 3종의 특성과 제원을 확보했습니다. 여순항 인근에 주둔했던 소련 KGB 요원의 부인을 만나 한국전쟁 당시 소련군 참전 상황을 인터뷰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해군 측에 문의한 결과 『6·25 당시 중공과 북한은 잠수함은커녕 잠수정조차 보유하지 못했다』는 회신이 왔다.
소련의 잠수함 기지로 활용된 여순항은 1898년 러시아의 조차지가 됐다. 러시아는 철로로 여순항을 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연결했고, 거기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어지게 했다. 러시아는 러·일 전쟁 직전 일본 해군에 맞서기 위해 철로로 수송할 수 있는 잠수함을 개발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 생산한 잠수함을 먼바다를 거치지 않고, 육로를 이용해 여순항까지 실어나르겠다는 계획이었다.
일본군은 1904년 2월 선전포고 없이 여순항을 포격해 제국 러시아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러시아 잠수함의 위협을 감지한 일본 해군은 1904년 7척의 잠수함 건조를 발주했다. 일본 최초의 잠수함은 요코스카항의 고카스카 조선소에서 1905년 중반 완성됐으나 러·일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전장에 투입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흑해의 러시아 잠수함을 모두 파괴하자, 소련은 철로를 이용해 10척의 잠수함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흑해의 「포티」까지 이동시켰다.
―1951년 7월 당시 중공군이 우리 서해안에서 잠수함을 운용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소련군은 일본이 패망한 1945년 여순항을 접수했고, 1955년에야 중공에 기지를 돌려주었습니다. 나는 1997년 러시아 방문 때 KGB 요원의 부인으로부터 기지 반환식에 참석한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과 저우언라이(朱恩來)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건네받았습니다.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기지를 방문한 사진도 가지고 있습니다. 1955년까지 여순항은 소련의 군항이었습니다』
―중공군이 소련군의 지휘하에 잠수함에 승선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스탈린과 毛澤東은 1949년 중공군 잠수함 요원을 여순항에서 훈련시키는 데 합의했습니다. 毛澤東이 장개석 군대를 본토에서 몰아낸 직후였습니다.
1950년 비공식적인 훈련이 시작됐고, 1951년 봄에는 200명 이상의 잠수함 수병들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공식자료는 1955년 기지반환 때 어느 정도의 잠수함이 중공군에 건네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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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잠수함 기지로 사용했던 여순항을 방문한 소련 공산당 제1서기 흐루시초프(사진 맨 왼쪽). 1955년 중공으로 여순항을 반환하기 직전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매켈플레시氏가 1997년 러시아를 방문해 KGB 요원의 부인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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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수색작업을 담당했던 황동환 예비역 대령. |
해전유물발굴단장인 황동환 대령(海士 22기 출신)은 매켈플레시氏가 제공한 미 해군 구축함 렌쇼號의 작전일지, 해군 2함대의 1993년 탐사기록을 토대로 탐사를 준비했다. 탐사작업은 1995년 5월15일부터 6월3일까지, 6월8일부터 6월17일까지 모두 30일간 실시됐다.
매켈플레시氏는 침몰 지점을 「북위 37도 25.5, 동경 124도 25.3」으로 지목했다. 해군 2함대는 1994년 11월 작성한 「서해 미식별 수중 접촉물 확인 보고」를 황단장 팀에게 인계했다.
진해에서 탐사선을 끌고 서해안으로 올라온 황대령은 네 지점에 대한 탐사를 우선적으로 실시했다. 결과는 허탕이었다.
황대령은 軍에서 은퇴해 현재 경기도 파주군 교하 신도시에서 살고 있다. 어렵게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걸었더니 『그 일이라면 할 말이 많다』고 반가워했다. 황대령을 지난 4월10일 파주 심학산 아래의 한 장어집에서 만났다.
구축함 부산함장, 55전대장을 지낸 황대령은 1989년부터 1996년까지 해전유물발굴단장을 지냈다. 55전대장 시절 예하에 「해난구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인연으로, 8년간 바닷속의 해전 유물을 찾아내는 일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만들어 사용했던 거북선의 흔적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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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켈플레시氏가 그린 1951년 7월28일 잠수함 격전 현장 지도. 매켈플레시氏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투일지와 사고 당시의 상황을 종합해서 잠수함 침몰 지점을 찾아냈다. 그는 이 지도를 한국 해군에게 전달했고, 한국 해군은 이 지도를 토대로 비밀리에 잠수함 수색작업을 벌였다. |
―구축함 렌쇼號가 작전 일지에 자신들이 침몰시킨 「괴물체」의 정확한 좌표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도 그걸 찾아내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겁니까.
『바다가 넓기 때문이죠(웃음)』
황대령의 설명에 따르면, 「북위 37.5도 25.5」가 「북위 37.5도 24.5」로 잘못 측정됐을 때 거리의 오차는 1.85km나 발생한다. 황대령의 탐사선은 당시 반경 1km의 면적을 탐사하는 데 1주일이 걸렸다. 반경 1.85km의 오차라면 4주 이상 탐사선을 가동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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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과학연구소가 탐사자료를 분석한 결과. 해저에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물질이 좌초돼 있음을 보여 준다. |
어부들의 결정적 제보
―매켈플레시氏의 좌표가 정확하지 않았던 겁니까.
『당시에는 GPS(위성위치관측장치)가 없었지 않습니까? 눈과 탐측 장비로 위치를 확인했지만, 정확하지 않았던 거죠. 렌쇼號가 지적한 좌표에서 3 해상마일(5.4km) 떨어진 수중에서 잠수함을 찾았습니다』
―매켈플레시氏가 지적한 좌표 인근에서는 침몰된 선박이 없었습니까.
『너무 많아서 문제였죠. 탐사장비가 예민해서 「해저 미식별 물체」를 10여 개나 찾아 냈습니다.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격침시켰던 일본 잠수함, 화물선 등이 있었습니다. 하나씩 확인해 나갔지만 렌쇼號가 침몰시킨 잠수함은 찾지 못했습니다』
―잠수함이 침몰된 지점은 어떻게 찾았습니까.
『첫 번째 탐사에서 허탕을 쳤고, 두 번째 탐사에서 뚜렷한 잠수함 징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죠. 제가 고무보트를 타고 해상에서 조업 중인 우리 어선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탐문 수사」를 한 거죠.
어청도 소속의 한 어선에 올라탔더니 「이 근처에서 조업하다가 그물이 자꾸 걸려 고생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그곳으로 가보자」고 했습니다. 어선의 어군탐기로 탐지했더니 수심 80m쯤 아래서 「미식별 물체」가 확인됐습니다』
황대령은 곧바로 다른 지역에서 작업 중이던 해군 탐사선을 끌고가 이 물체에 대한 탐사작업을 벌였다.
탐사선이 보유하고 있던 「측면주사 탐사기」(Side Scan Sonar: 카메라가 물체의 측면을 지나가면서 형상을 파악하는 기계), 「해저 지층 물체 형상 확인기」(Sub Bottom Profiler: 해저에 묻힌 물체를 위에서 찍어 형상을 확인하는 기계)를 투입했다.
탐사선의 모니터에 길이 50m, 높이 12~13m 정도의 길쭉한 원형 물체가 감지됐다. 황대령은 즉각 「ROV(수중 비디오 촬영기)」를 바닷속으로 들여보냈다.
수중비디오 촬영기는 해저 밑바닥을 시속 4노트(7.2km) 정도로 움직이며 영상을 찍는다. 당시 서해 바닷속의 해류는 6~7노트의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비디오 촬영기가 원형 물체에 다가가려다 해류에 계속 떠밀려 내려갔다. 응급조치로 탐사선에서 무거운 추를 내리고 그 추에 ROV를 선으로 연결시켰다.
국방과학연구소의 결론은 「소련 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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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사관학교「해전유물탐사단」이 촬영한 침몰 잠수함의 후미 사진. 어망이 잔뜩 걸려 있는 게 보인다. |
황대령은 탐사작업에서 얻은 모든 정보를 「국방과학연구소」에 보냈다.
황대령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국방과학연구소의 분석결과를 月刊朝鮮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자료를 이렇게 분석했다.
<1. 물체의 제원
ㆍ길이 50~60m
ㆍ높이 5~9m
ㆍ폭 5m 내외
ㆍ중앙 돌출부 높이 11~12m
2. 특징
ㆍ선수미로 추정되는 부분이 뭉툭함.
ㆍ갑판상 구조물이 거의 없음.
ㆍ중앙 부분이 돌출되어 있고, 앞뒤로 직선형임.
ㆍ선체 상하부가 곡면 상태임.
ㆍ유선형 선체로 시야 내에 외부 돌출물이 없음.
ㆍ두꺼운 금속체이며 녹슨 부분이 적음(특수 도색 추정)>
국방과학연구소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기록지 및 촬영사진 분석결과 선체의 제원 및 외형이 일반 선박 또는 전함과는 상이함. 美 측에서 제공된 자료가 정확하다면 접촉 선체는 MVI-BIS보다 큰 소련제 MV급 잠수함인 것으로 판단됨>
소련이 보유했던 MVI-BIS 잠수함은 길이가 37.8m, 무게가 161톤(잠수하지 않았을 때)이다. MV 잠수함은 길이가 50.9m 무게가 350톤 규모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이 잠수함이 소련이 만든 「MV급」으로 추정한 것이다.
해군의 조사결과는 당시 국방부와 국가안전기획부에 보고됐지만, 서해 바닷속에 잠들어 있는 소련 잠수함 인양은 이뤄지지 않았다.
파주에서 만난 황대령은 『소련 잠수함 인양에 따르는 외교 군사적 부담 때문에 해군 수뇌부와 金泳三 정부에서 이 사실을 덮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소련 잠수함이 침몰한 지점은 대청도 서남방 26마일 지점으로 공해상입니다. 우리 해군 작전구역이지만, 대규모 인양작업을 하면 북한을 자극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 잠수함이 한국전쟁에 참여한 소련군 잠수함이든, 북한군이 운용한 소련제 잠수함이든 발굴 결과에 따라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불가피할 겁니다. 또한 건져 낸 잠수함의 소유권 문제가 발생할 수 있구요』
왜 해군은 미군이 격침시킨 소련 잠수함의 잔해를 인양하지 않았던 것일까? 月刊朝鮮은 해군본부가 탐사작업 완료 직후에 작성한 「서해 미식별 수중 접촉물 탐사 결과 및 인양 관련 검토 보고서」를 최근 입수했다. 비밀문서로 분류됐던 이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해군본부는 「한국 해군이 자체 능력으로 잠수함을 인양할 수 있는 1998년 이후 인양을 추진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해군, 기술상의 한계로 인양 미뤄
해군본부는 「황대령팀이 찾아낸 잠수함의 침몰 위치가 美 해군 측이 제공한 자료와 거의 일치하나 물체의 크기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며 「수중 물체가 1934년 소련에서 건조한 M형(VI-BIS급) 잠수함인지에 대해서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해군본부는 다음과 같이 「인양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수중 물체가 6·25 전쟁 당시 美 구축함이 격침시킨 M형 잠수함으로 확인되면 한국전쟁에 참여한 전쟁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1950년대 초기 잠수함 건조 및 운용에 대한 기술자료 획득이 가능하다〉
1996년 「즉각 인양」이 불가능했던 것은 기술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해군본부 자료의 관련 부분이다.
<한국 해군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잠수 능력은 최대 190피트(57.9m)다. 현장의 수심은 262피트(79.8m)다. 1996년 건조 중인 포화잠수기법 장비를 전력화할 경우 1000피트(304m) 잠수가 가능해진다. 美 해군은 현재 1000피트 잠수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 해군 단독으로는 1998년 인양이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해군본부는 미국 해군의 지원을 받아 1996년 혹은 1997년에 인양하는 방법과 한국해군 단독으로 1998년 이후 단독 인양하는 방안을 검토했고, 「1998년 이후 단독 인양」으로 기울었다. 해군본부는 「미국이 참전·격침·인양국으로서 소유권을 주장할 가능성이 있고, 언론보도 통제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美 해군과의 조기 공동인양을 포기했다.
해군은 당시 인양 후 잠수함 소유권 분쟁을 심각하게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본부 보고서의 분석이다.
<서해 수중물체는 침몰 전 나포되지 않았으므로 인양 후 소유권은 침몰 전 旗國(기국)에 있다. 만약 침몰 전 소유국에서 소유권을 주장해 올 경우에는 인양에 소요된 비용에 대해서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1981년 소련은 소련 잠수함이 스웨덴 근해에서 좌초했을 때 구조비용을 지불했다. 수중물체의 침몰 전 기국이 러시아 또는 북한이라면 소유권 분쟁의 가능성이 있다. 美 해군의 지원을 받아 인양할 경우, 소유권에 대해서 협정서 체결 등을 통해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매켈플레시와 황동환 대령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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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5월에 한국에서 만나 충남 삽교의「함상공원」을 찾은 매켈플레시氏와 황동환 예비역 대령. |
〈나는 1951년 7월28일 서해상에서 벌어진 對잠수함 작전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구축함 USS 렌쇼號가 그 공격을 시작했고, 5대의 구축함이 28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습니다. 나는 렌쇼號에서 對잠수함 어뢰를 쏘는 사수였습니다. 우리 동료들이 잠수함을 격침시켰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1993년 한국을, 1997년에는 러시아를 방문했습니다.
1995년 수중 탐사에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침몰 지점은 우리가 작성한 위도·경도와 일치했습니까? 그것은 잠수함이었습니까? 당시 소련은 포트 아서(여순항)에서 세 종류의 잠수함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발견한 잠수함은 「C」, 「M」, 「P」형 중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는 그 잠수함을 수심 240피트에서 남겨두었습니다. (수중 이상물체를) 발견한 장소의 수심은 얼마였습니까〉
파주에서 만난 황대령은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다 퇴역한 미군 영관급 장교가 우리 해군의 소련 잠수함 탐사 정보를 매켈플레시氏에게 흘려줬고, 내 주소까지 알려준 것으로 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이메일과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고, 2002년 5월 한국에서 對面(대면)하기에 이르렀다. 매켈플레시氏는 황대령의 용인 집에서 1주일을 함께 머물렀다. 황대령은 그때까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탐사 관련 자료를 매켈플레시氏에게 전해 주었다.
한국의 反美 분위기에 놀란 매켈플레시
매켈플레시氏는 황대령과 함께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과 충남 삽교에 있는 「함상공원」을 찾았다. 매켈플레시氏는 전쟁기념관의 한 벽에 세워진 미군 전사자 기념비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의 이름을 발견했다.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1953년 전쟁이 끝날 무렵 격추돼 사망한 「제임스 반 빈」이었다.
두 사람은 기념비 앞에서 한참 동안 고개를 숙였다.
매켈플레시氏는 삽교 함상공원 전시관의 연평해전 안내 자료를 보면서 황대령으로부터 『한국 해군이 도발하는 북한 전투함을 향해 정당한 대응 사격을 못 해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매켈플레시氏는 한국 사회에서 끓어오르던 反美(반미)감정에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황대령은 『구축함에서 함께 싸웠던 동료들의 명예를 위해 50년이 지난 한국전쟁의 진실을 찾아나선 매켈플레시氏에게 한국의 反美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정밀 再탐사가 우선돼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탐사를 통해 소련 잠수함인 것이 확인되면 인양해서 전쟁박물관이나 삽교의 함상공원에 갖다두면 되지 않겠느냐」고 의견 일치를 봤다. 매켈플레시氏의 回顧(회고)다.
『침몰 지점의 수심이 깊지만 물이 맑아서 침몰 물체의 완전한 그림을 확보할 수 있을 걸로 생각했습니다. 잠수함의 확정적인 그림이 잡혀야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인양이 가능한지 검토해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인양자금 확보입니다. 자금조달은 한국전 참전 미군들을 통해서 충분히 모금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지만 시대상황이 최악이었다. 황동환 대령의 얘기다.
『우리가 잠수함에 대한 정밀탐사를 시작하려면 金大中 정부의 인가가 필요했습니다. 2000년 서해교전에서 우리 장병들이 북한 전투함에 대응 사격을 제대로 못 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인 金大中 정부가 북한의 한국전쟁 도발 증거를 찾아 내는 작업을 허용해 줄 리 있겠습니까. 지난 10년간 「침몰된 잠수함을 인양하자」고 말을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황대령은 『이제 침몰된 잠수함 인양작업에 착수해야 할 시점』이라며 『우리 해군과 해양연구소에 인양에 필요한 탐사선과 인력이 모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잠수함 인양이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얘기했다.
한국전쟁의 역사적 인물
『수심 80m에 침몰한 잠수함에서 단 한 명의 승조원도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그 안에 탄 군인들이 소련군이든 북한군이든 한국전쟁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잠수함 안에는 중요 작전문서가 남아 있을 겁니다. 최근 들어 「한국전쟁은 남북한 사이의 內戰(내전)이었다」는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듯 인정되고 있습니다.
문제의 잠수함 인양은 한국전쟁이 미·소 양대 진영에 의해 치러진 전면적인 국제전쟁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증거가 될 겁니다. 소련 공군뿐 아니라 해군과 잠수함 부대까지 참전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한국전쟁사」를 새로 써야죠』
매켈플레시氏에게 「인양작업을 계속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두 조력자가 죽었고, 나는 이제 76세입니다. 1951년 7월28일 작전에 대해 더 깊이 있는 조사를 계속하는 일은 이제 역사에 맡겨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해군본부는 1995년 6월 「1998년 이후 잠수함 인양」을 결정했다. 이때 추정한 인양비용은 「부가가치세를 포함 6억 8530만원」이었다. 해상 크레인과 양묘선, 바지 예인선 3척을 동원해 이틀 작업을 하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휴전협정의 신속한 진전을 위해 소련의 것으로 추정되는 잠수함 격침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격침에 참여했던 미군 장병들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한국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과 러시아를 뛰어다니고 있다. 진실을 밝히려고 했던 참전용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매켈플레시氏는 이제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해군본부는 「(서해 침몰 잠수함은) 한국전쟁에 참가한 전쟁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소련의 한국전 참전을 입증하는 역사적 증거를 확보하는 데 「6억8530만원」을 투자하지 못할 만큼 대한민국은 인색한 나라인가? 취재를 끝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