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천, 인물에 대한 평가 담은 ‘사평’ 만들어내
⊙ 패망한 항우를 〈본기〉, 학자였던 공자를 〈세가〉에 포함
⊙ 항우·상앙·한신 등 ‘문제적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를 냉철하게 평가
⊙ 패망한 항우를 〈본기〉, 학자였던 공자를 〈세가〉에 포함
⊙ 항우·상앙·한신 등 ‘문제적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를 냉철하게 평가

- 사마천
아마도 그 원조는 거슬러 올라가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으로 소급될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편년체(編年體)이기 때문에 단편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군자가 말했다(君子曰)’라는 식으로만 이따금 등장할 뿐이다. 주로 사리에 맞으면 예(禮)라고 하였고 사리에 맞지 않으면 비례(非禮)라고 평하는 정도였다.
반면에 자신을 전면에 내세워 〈본기(本紀)〉나 〈열전(列傳)〉의 한 인물에 대한 서술이 끝나면 맨 마지막에 ‘태사공이 말한다(太史公曰)’는 형식의 사평을 붙인 것은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최초다. 이후 반고(班固)는 《한서(漢書)》에서 ‘찬하여 말하다(贊曰)’라고 하여 사마천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어 범엽(范曄)은 《후한서(後漢書)》에서 ‘논하여 말하다(論曰)’라고 하였고 진수(陳壽)는 《삼국지(三國志)》에서 ‘평하여 말하다(評曰)’라고 하였다. 이후 중국 역사서의 사평은 대개 이것들 사이를 오갔다. 이것들을 뒤에는 모두 ‘찬(贊)’이라고 불렀다.
‘찬(贊=讚)’은 칭찬(稱讚)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남의 좋은 점을 칭송할 때 사용한다. 찬은 그래서 송(頌)과 성격이 같다. 사마천이 《사기》를 짓고 반고가 《한서》를 지을 때 편말에 붙인 찬은 운문(韻文)이 아니라 산문(散文)이었다. 이러던 것이 송나라의 범엽이 《후한서》의 찬을 운문으로 지으면서 찬은 운문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인물평 외에 서화에 대한 찬사도 찬이라고 불렸다. 그래서 자화자찬(自畵自讚)이란 말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좋지 않은 인물들에 대해서도 찬을 쓴 것으로 보아 중립적으로 평(評)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찬(贊)은 의(議)가 아니다
찬(贊)은 ‘의(議)’가 아니라 ‘논(論)’이다. ‘의’는 ‘미래에 대한 의견’을 담은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의 이해(利害)와 득실(得失)을 미리 짚어서 말하는 것은 ‘의’라고 한다. 반면에 ‘지나간 일의 시비(是非)’를 평가하는 것은 ‘논’이다. 역사는 전형적으로 ‘논’이다. 따라서 ‘태사공이 말한다(太史公曰)’를 비롯한 모든 사평은 ‘논’이지 ‘의’가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다시 말해 ‘태사공이 말한다(太史公曰)’가 사사로운 의견이 아니라 인물과 시대를 종합하는 논리적인 논평임을 알아야 한다.
사마천은 누구보다 이 사평을 잘 활용한 양사(良史)였다. 고대 중국에서는 최고의 사관을 이처럼 양사라고 불렀다.
양사 사마천은 전(傳)과 찬을 철저하게 상호보완적으로 활용하였다. 즉 ‘태사공이 말한다(太史公曰)’는 앞에 나온 전을 그저 요약하는 글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태사공이 말한다(太史公曰)’를 통해 사마천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항우를 〈본기〉에 포함시킨 사마천
항우그러나 〈항우 본기〉는 내용상으로 엄밀하게 보면 〈본기〉보다는 〈열전〉에 가깝다. 〈본기〉는 무엇보다 편년을 중심으로 사건을 서술하는 데 반하여 〈항우 본기〉는 몇몇 대표적인 사건을 골라서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본기〉와는 거리가 멀다. 항우는 스스로 말하기를 70여 차례 전투를 치러 진(秦)나라를 멸망시키고 한(漢)나라 유방(劉邦)과 싸웠다고 하였다. 그러나 〈항우 본기〉에서는 거록의 전투, 홍문연(鴻門宴), 그리고 해하(垓下)의 전투만을 중심으로 항우의 면모를 그려낸다.
거록의 전투에서 항우는 솥을 깨트리고 배를 가라앉혀[파부침주·破斧沈舟] 진나라에 대승을 거두었다. 항우의 영웅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났고 사마천도 이를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홍문연에서는 교만한 항우와 겸손한 유방이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유방은 교활하였고 항우는 순진하였다.
해하의 전투에서 패한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서 우희(虞姬)와 애틋한 이별을 하고 단기필마(單騎匹馬)로 마지막까지 용맹을 보여주고서 스스로 목을 쳐서 생을 마감한다. 이런 항우에 대해 ‘태사공이 말한다(太史公曰)’.
내가 듣건대 주생(周生)이 말하기를 ‘순(舜)(임금)의 눈은 아마도 두 겹 눈동자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또 듣건대 항우도 두 겹 눈동자라고 한다. (그러나) 우(羽)가 어찌 그의 먼 후예이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그가 흥기한 것이 갑작스럽겠는가? 무릇 진(秦)나라가 그 정사를 잘못하자 진섭(陳涉)이 처음에 난을 일으켰고 (뒤이어) 호걸들이 봉기하여 서로 다투었으니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우는 조금의 세력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진나라 말기의) 대세에 올라탔고 민간에서 일어난 지 3년 만에 마침내 다섯 제후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고 나서) 천하를 나누고 찢어 왕과 후를 봉하니 정사는 항우에게서 나왔고 스스로를 패왕(覇王)이라 불렀다.
그 왕위가 비록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이는 가까운 옛날에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우가 관중(關中·함곡관)을 버리고 초나라를 그리워하였으며 의제(義帝)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어 왕과 후(侯)들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원망하기에 이르자 사정은 어렵게 되었다.
(항우는) 스스로 공을 자랑하고 자기 개인의 지혜만을 앞세워 옛것을 스승으로 삼지 않으며 패왕의 공업이라고 부르면서 힘으로 천하를 정복하고 경영하려 하다가 5년 만에 결국 나라를 망치고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를 꾸짖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이다. 그리고 끝내 억지를 부리기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군대를 잘못 다룬 죄는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좋은 형세를 만났으나 스스로의 무모함으로 인하여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항우 스스로의 잘못을 통렬하게 꾸짖고 있다.
〈상앙 열전〉
상앙법령이 백성들 사이에 시행된 지 1년이 지나자 진나라 백성들 중에서 도읍에까지 와서 초령(初令)의 불편함을 말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이때 태자가 법을 어겼다. 위앙[衛鞅-상앙이 위(衛)나라 출신이어서 위앙이라고도 함-편집자 주]이 말했다.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어기기 때문이다.”
장차 태자를 법대로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군주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형벌을 시행할 수 없어 태자의 사부 공자(公子) 건(虔)에게 형벌을 가하고 태자의 또 다른 사부 공손고(公孫賈)에게는 경형(黥刑·얼굴에 문신을 파는 형벌)을 가하였다. 다음 날부터 진나라 백성들은 모두 법령을 따랐다.
법령이 시행되고 10년이 지나자 진나라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며 길 위의 (남의) 물건을 줍지 않았고 산에는 도적이 없어졌으며 집집마다 사람들이 풍족해졌다. 백성들은 나라의 전쟁에는 용감하였지만 사사로운 싸움에는 겁을 내니 농촌과 도읍 할 것 없이 크게 다스려졌다. 진나라 백성들 중에 애초에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한 사람들 중에서 뒤에 와서는 법령이 편리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위앙은 “이 자들은 모두 교화를 어지럽히는 백성들이다”라며 모두 변방의 성으로 옮겨버렸다. 그 뒤로 백성들 중에 법령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자는 없었다.
“상앙은 가혹하고 다움이 엷은 사람”
이때 사마천은 조량(趙良)이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상앙에게 권력 남용에 대한 경고를 한다. 개혁의 성공과는 별개였던 것이다.
“지금 당신은 예전에 총애받던 신하인 경감(景監·환관이다)을 통해 진나라 임금을 만났으니 이는 명성이 될 수 없습니다. 재상이 돼서는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큰일로 삼지 않고 큰 대궐이나 세웠으니 이는 공적이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태자의 사부들을 죽이거나 묵형(墨刑·黥)을 가하고 가혹한 형벌로 백성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들에게) 원한을 사고 재앙을 쌓는 것입니다.”
결국 상앙은 혜왕(惠王) 때 반역죄로 몰려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상앙에 대해 ‘태사공이 말한다(太史公曰)’.
상군(상앙의 별칭-편집자 주)은 그 타고난 자질이 가혹하고 다움[德]이 엷은 사람이었다. 그가 효공에게 행하려 하였던 제왕술을 보면 허황한 말에 불과하고 실질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폐신(嬖臣·아첨하는 신하)을 매개로 나아가 쓰이게 되자 공자 건(虔)에게 형벌을 가하고 위(魏)나라 장군 앙(卬)을 속이고 조량(趙良)의 말을 받들지 않은 것은 실로 상군의 조금도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인색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내가 일찍이 상군의 (《상군서(商君書)》에서) 〈개색(開塞)〉 〈경전(耕戰)〉이란 글을 읽었는데 그 사람이 행한 일과 비슷하였다. 결국 진나라에서 더러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때문이리라!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앙은 가혹하고 다움이 엷어 파멸을 자초했다는 평가다.
배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한신
한신내가 회음(淮陰)에 갔을 때 회음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말이 한신은 평민일 때도 그 뜻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하였다. 그 어머니가 죽었을 때 가난해서 장례도 치를 수 없었지만 그러나 마침내 높고 넓은 땅에 무덤을 만들어 그 주위에 집이 1만 호나 들어설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내가 그 어머니의 무덤에 가 보았더니 정말로 그러하였다.
만약에 한신이 도리를 배워 겸손하고 사양할 줄 알아서 자신의 공로를 뽐내지 않고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거의 한나라에 대한 그의 공훈은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망(太公望) 등에 비할 수가 있었고 후세에도 후손들의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가 이미 안정된 뒤에 마침내 반역을 꾀하였으니 온 집안이 멸족을 당한 것은 참으로 마땅하지 않겠는가?
사마천은 가의(賈誼)를 전국(戰國) 시대 굴원(屈原)과 함께 〈열전〉에 넣었다. 그래서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이라고 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자기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지 못한 불우(不遇)함을 겪은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내가 (굴원의 작품인) 이소(離騷), 천문(天問), 초혼(招魂), 애영(哀郢)을 읽어보니 그 속뜻이 슬펐다. 장사(長沙)에 가서 굴원이 빠져 죽은 연못을 바라보고 일찍이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람됨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생(가의를 말함-편집자 주)이 굴원을 조문한 글을 읽어보니 기이하게도 굴원이 가생만 한 재능을 갖고서 다른 제후들에게 유세하였더라면 어느 나라인들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스스로 이렇게 생을 마쳐버렸다. (그런데) 복조부(服鳥賦)를 읽어보면 그는 죽음과 삶을 한 가지로 보고서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가벼이 여겼으니 다시 마음이 맑아지기는 하였지만 나는 그러나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도다!
가의(賈誼)에 대한 사마천과 반고의 서로 다른 사평
가의유향(劉向)은 칭송하기를 ‘가의는 삼대(三代)와 진나라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에 담긴 뜻을 말하였는데 그가 논한 바는 지극히 뛰어나고 나라의 큰 골격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옛날의 이윤(伊尹)이나 관중(管仲)이라 할지라도 그를 뛰어넘을 수 없다. 만약에 때를 얻어 중용되었다면 그의 공로와 교화는 반드시 성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용렬한 신하들에게 모해를 당하였으니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프다’라고 하였다.
효문제(孝文帝)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서 몸소 실천을 통하여 풍속을 바꾼 것을 되살펴보니 그것은 의(誼)가 제안했던 것들이 시행된 결과였다. (예를 들면) 제도를 고쳐 바로잡으려 하였기에 한(漢)나라는 토(土)를 황제의 다움으로 삼았고 색은 황색을 숭상하였으며 수는 오(五)를 썼다. 그러나 속국 관원으로 하여금 흉노를 관리하려 한 것과 오이삼표(五餌三表·다섯 가지 미끼와 세 가지 준칙)를 시행해서 선우(單于)를 붙잡아 두려 한 꾀는 원래 그가 올린 소(疎)에 담겨 있었다. (註-사고(師古)가 말했다. “가의는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재주를 좋아하는 것은 어진 도리이며 믿음을 큰 신조로 삼는 것은 제왕의 의리입니다. 사랑하고 좋아함에 실질적인 내용이 있고 이미 응낙하신 일을 약속대로 지키신다면 열은 죽고 하나만 살게 된다고 해도 그들은 반드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를 삼표(三表)라고 합니다.’
또 이렇게 썼다.
‘성대한 옷과 화려한 수레를 하사하여 그들의 눈을 사로잡는 것, 산해진미를 하사하여 그들의 입을 사로잡는 것, 음악과 여인을 하사하여 그들의 귀를 사로잡는 것, 높은 집과 넓은 뜰, 창고와 노비를 하사하여 그들의 배를 사로잡는 것, 와서 항복한 자를 상(上)께서 친히 불러 함께 즐기고 몸소 술을 따라주시고 손수 음식을 먹여주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이를 오이(五餌)라고 합니다.’”)
의는 또한 타고난 수명으로 인하여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비록 공경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불우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저술한 것은 모두 58편인데 세상사(世事)에 절실한 것들을 가려 모아 전(傳)에 기록하여 두었다.
즉 반고는 가의가 오래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경(公卿)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지우(知遇)를 얻지 못한 때문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공자에 대한 사마천의 각별한 존중
공자《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라고 하였다. (나는) 비록 그런 경지에 이를 수는 없더라도 마음은 그곳을 향하고 있다. 내가 공씨(孔氏·공자)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사람됨을 생각하였다. 노나라에 가서 중니(仲尼·공자)의 사당에서 수레, 의복, 예기(禮器)를 보았고 유생들이 때마다 그 집에서 예를 익히는 것도 보았는데 내가 공경심에서 그곳을 배회하며 떠날 수가 없었다. 천하에는 군왕에서 뛰어난 이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모두 그 당시에는 영화를 누리다가도 죽으면 그만이었다.
공자는 포의(布衣)였지만 10여 대가 지나도록 배우는 자들이 떠받들고 있다. 천자 왕후는 물론 중국에서 육례(六禮)를 말하는 자들은 모두 공자에게서 그 척도를 찾고 있으니 공자는 지극히 빼어난 이[至聖]라고 할 만하도다!
중국의 학자 장다커(張大可)는 《사마천 평전》(연암서가)에서 “수평적 평가”라고 말하고 오히려 공자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태사공 자서〉에 실려 있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주(周)나라 왕실이 이미 쇠퇴하자 제후들은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중니는 예가 폐기되고 악(樂)이 무너진 것을 마음 아파하여 경술(經術)을 연마하고 닦아 왕도(王道)를 밝혀 난세를 바로잡고 정도(正道)로 되돌리려 하여 이를 글로 드러내고 천하를 위한 의법(儀法·모범)을 만들었으며 육예(六藝)의 계통을 후세에 드리웠다.
효경제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
송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는 100여 개의 ‘태사공이 말한다(太史公曰)’ 중에서 한나라 효경제(孝景帝)에 대한 사마천의 사평을 최고로 꼽았다. 경제는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황제다. 조조(鼂錯)라는 신하가 급진적으로 제후 왕들의 봉토(封土)를 깎아내려 하다가 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태사공이 말한다(太史公曰).’
한나라가 일어나고 효문(孝文) 황제가 큰 다움[德]을 베풀자 천하는 임금의 다움을 흠모하여 안정되었고 효경(孝景)에 이르러 더 이상 성이 다른 제후들(의 반란)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왕조가 바뀔 우려가 없어졌다는 말-필자 주) 그런데 조조가 제후들(의 봉토)을 각박하게 깎아내자 드디어 일곱 나라가 함께 일어나 합종(合從)하여 서쪽으로 쳐들어와 제후들이 크게 왕성하였는데 이는 조(錯)가 점진적 계책으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 무제가) 주보언(主父偃·?~기원전 126년)의 말을 따르게 되자 제후들은 약해지고 결국 (한나라는) 안정을 되찾았다.
안정과 위태로움의 기틀[安危之機]이 어찌 이 계책에 달려 있지 않았겠는가?
이에 대한 진덕수의 평이다.
일곱 나라의 일을 가만히 살펴보건대 태사공은 한마디로 “이는 제후들이 크게 왕성하였는데 이는 조가 점진적 계책으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대개 고제(高帝·유방)가 나라를 봉해준 것은 제도에 지나쳤고 효경(孝景·효경제)의 군신들이 일을 처치한 것은 중도를 잃었으니 이는 말은 간략하면서도 의리는 갖춰져 있다[詞簡而義備]고 할 것이다. 이는 후세의 사가(史家)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한마디로 사평(史評)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