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남 정학연이 순조 어가 앞에서 격쟁… 순조, 유배에서 풀어 주라 명령
⊙ 해배 소식 알려지자 축하하는 친척·지인들과 편지 주고받아
⊙ 대사간 정관수·교리 홍명주 등 사직소 올리며 격렬하게 반대
⊙ 해배 무산되자 정신적 충격으로 풍이 와서 혀가 굳고 말이 헛나오는 등 고생
정민
1961년생. 한양대 국문과 졸업, 동 문학박사 / 한양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 문헌과해석사 사장 역임. 現 한양대 국문과 명예교수 / 저서 《다산선생지식경영법》 《한시미학산책》 《다산의 재발견》 《18세기 한중지식인의 문예공화국》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다산 증언첩》 《파란: 정민의 다산독본》 《다산과 강진 용혈》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다산의 일기장》 등. 지훈국학상(2012년), 월봉학술상(2015년), 백남석학상(2020년), 한국가톨릭번역상(2021년), 롯데출판문화대상(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선정 ‘한국의 가장 지혜로운 책’ 대상(2025년)
⊙ 해배 소식 알려지자 축하하는 친척·지인들과 편지 주고받아
⊙ 대사간 정관수·교리 홍명주 등 사직소 올리며 격렬하게 반대
⊙ 해배 무산되자 정신적 충격으로 풍이 와서 혀가 굳고 말이 헛나오는 등 고생
정민
1961년생. 한양대 국문과 졸업, 동 문학박사 / 한양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한국언어문화학회 회장, 문헌과해석사 사장 역임. 現 한양대 국문과 명예교수 / 저서 《다산선생지식경영법》 《한시미학산책》 《다산의 재발견》 《18세기 한중지식인의 문예공화국》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다산 증언첩》 《파란: 정민의 다산독본》 《다산과 강진 용혈》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다산의 일기장》 등. 지훈국학상(2012년), 월봉학술상(2015년), 백남석학상(2020년), 한국가톨릭번역상(2021년), 롯데출판문화대상(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선정 ‘한국의 가장 지혜로운 책’ 대상(2025년)

-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다산(茶山) 관련 자료가 보일 때마다 사진을 찍어 갈무리해 두니 여기저기서 모인 정보가 어느 순간 한 지점을 딱 짚어 가리킬 때가 있다. 그 겹치는 지점에 집중해야 잘 알기 어려웠던 한 시절의 속내가 피어난다.
강진 유배 10년 차 나던 1810년에 아들 정학연의 격쟁(擊錚·임금 행차 앞에서 징 등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함)으로 다산의 해배(解配) 명령이 떨어졌다. 석방의 기대에 부푼 것도 잠시, 이후 홍명주·이기경 등의 방해로 해배가 완전히 무산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 주는 몇 통의 편지를 이 글에서 함께 엮어 읽어 보기로 하자.
2008년 2월 인사동 한상봉 선생의 연락을 받고 그이의 사무실에 들러 다산의 친필 자료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한 선생이 다산 간찰 세 통을 내게 보여 주었다. 아주 얇은 종이에 나풀나풀 쓴 편지였다. 한몫에 나온 것으로 보아 한 사람에게 간 편지인 듯했는데, 피봉에 ‘봉사예려(奉謝汭旅)’라 하고, 또 다른 편지에는 ‘관성회경(冠城回敬)’이란 글자가 있었다. 다산이 강진에서 멀지 않은 장흥 관산(冠山)이나 예양강(汭陽江) 인근에 객으로 머물고 있던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였다. 나머지 한 통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이 세 통 중 피봉과 날짜가 없는 편지 한 통이 유독 내 눈길을 끌었다.
“홍소에 비지가 두터이 이르니…”
다산이 1810년 세밑에 이관기에게 보낸 편지.일전에 손수 쓴 글월을 받고, 객지 생활에 별고 없는 줄 알게 되어 아주 마음이 놓였습니다. 나는 변함없이 궁벽한 산속에서 세모에 문을 닫아걸고 고문(古文)을 보는 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홍소(洪疏)에 비지(批旨)가 두터이 이르니, 광명이 전날의 배나 됩니다. 땅에 엎드려 감읍할 뿐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차를 조금 보냅니다. 다만 이 물건은 원기를 크게 손상시키므로, 나도 고기를 먹어 체했을 때가 아니면 함부로 먹지 않습니다. 조심하고 조심하기 바랍니다. 잠시 다 갖추어 적지 못합니다. 병든 친척 돈수.
日前奉手字, 審旅履無恙, 慰釋良深. 戚依舊窮山歲暮, 作杜門看古文生活而已. 洪疏批旨隆至, 光明有倍前日. 伏地感泣, 尙復何言? 茶少許送之. 但此物大損元氣, 戚非食肉作滯, 未嘗輕服, 愼之愼之. 姑不宣式. 病戚頓首.
작성 시기도 알 수 없고 수신자도 안 나오는데, 다산은 자신을 ‘병척(病戚)’이라 썼다. 이 편지는 신유박해(1801년) 당시 천주교 문제로 장흥에 유배 와 있던 이관기(李寬基·1771~1831년)에게 보낸 것이다.
1810년 가을에 다산이 그에게 보낸 〈치교에게 부치다(寄穉敎)〉라는 장시가 《다산시문집》 권5에 실려 있다. 치교(穉敎)는 그의 자(字)이다. 시의 서두에서 다산은 “내 증조부가 그대의 증외조(我之曾祖父, 爾之曾外祖)”라 하여 둘 사이의 인척관계를 밝힌 바 있다. 이관기의 모친 나주 정씨(丁氏)가 다산의 부친 정재원과 사촌간이었다. 시를 보면 두 사람은 나란히 남쪽 땅에 귀양 와서 불과 30리 떨어진 거리에 있으면서도 십 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관기는 황사영(黃嗣永)의 외사촌이고 충주 지역의 교회 지도자였던 이기연(李箕延)의 종손(從孫)이었다.
다산은 신유년에 그가 장흥으로 유배 온 뒤 10년 가까이 혐의를 피해 일체 연락을 주고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1810년 가을에 다산이 그에게 처음으로 시를 보내 안부를 전했고, 이후 다산의 해배 소식을 들은 이관기가 1810년 세모에 다시 축하 편지를 보내왔던 듯하다. 편지 중간에 나오는 “홍소(洪疏)에 비지(批旨)가 두터이 이르니, 광명이 전날의 배나 됩니다”라는 구절로 인해 이관기의 편지를 받은 시점을 1810년 12월로 특정할 수 있다.
정학연의 격쟁
당시의 전후 사정을 파악하려면 주변 정보를 더 살펴야 한다. 《사암선생연보》를 보면 강진 유배 10년째 되던 1810년 9월에 다산의 큰아들 정학연이 격쟁하여 아버지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특별히 용서해 주라는 은총을 입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실제로는 8월 27일 임금 순조(純祖)가 화성(수원)으로 거둥하여 8월 30일 회정(回程)하는 길에 큰아들 정학연이 어가(御駕)를 막고 격쟁하였고, 9월 초에 다산을 강진 유배지에서 고향 집으로 추방하라는 명이 내렸던 정황이다. 이 소식은 바로 강진에 전해졌고, 다산은 이에 10년간의 유배 생활이 머잖아 끝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일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일성록(日省錄)》을 보면 1810년 9월 3일 격쟁 원정(原情), 즉 정학연의 호소에 대한 형조의 재가 요청이 있었다. 이 가운데 정학연의 원정 내용이 일부 나온다.
제 아비 약용이 남쪽 먼 지방에 유배 간 지가 지금에 10년이 되었습니다. 신유년의 사옥(邪獄)은 전말이 분명하여, 당초 옥관의 논계(論啓)가 공의(公議)를 환하게 밝히지 않음이 없었고, 그때 내리신 은교(恩敎)에는 매번 급히 구제하시려는 지극한 뜻이 많았습니다. 옥에 들어간 지 며칠 만에 이미 형구(刑具)를 벗었고, 보석으로 풀려난 지 열흘에는 기밀을 듣게 하였습니다. 감옥을 나올 때 또 덕스런 말씀으로 논하시기를 “너를 호남으로 보내는 것은 깊은 뜻이 있다. 너는 남방으로 가거든 나머지 근심이 없게끔 하라”고 하셨습니다. 제 아비의 심사를 선조(先朝)께서 이미 통촉하시었고, 죄명을 분명하게 벗게 해 주심이 또 이와 같았는데도 끝내 찬배되어 장기(瘴氣)가 있는 고장에 묻혀 있게 되었으니,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은혜 입기를 청합니다.
渠父若鏞編配南荒, 于今十年于玆矣. 辛酉邪獄, 顚末瞭如, 當初獄官之論啓, 無非昭晣之公議. 伊時判下之恩敎, 每多極拔之至意. 入獄數日, 已除枷杻, 保放一旬, 俾聞機密. 及其出獄之時, 又論以德音曰: “遣汝湖南, 蓋有深意. 汝到南方, 俾無餘憂.” 渠父心事, 先朝旣已洞燭, 昭脫罪名又如此, 而終被竄配沈淪瘴鄕, 乞蒙生還故土.
직후 형조와의 논의 과정에서 좌의정 김재찬의 석방 반대 의견이 있었음에도 9월 21일에 향리로 방축하라는 하명이 떨어졌다.
다산의 해배에 반대한 사람들
이튿날인 9월 22일에 부교리 서장보(徐長輔)가, 애초에 사형에 처할 것을 꾸며 대는 말에 속아 유배형에 그쳤는데 이제 무엄하게 그마저도 벗어나려 하니, 명을 거두어 달라는 차자를 올렸다. 23일에는 대사간 정관수(鄭觀綏)가 사직소를 올리며 다산의 석방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24일에는 부응교 이유명(李惟命)이 잇달아 상소를 제출했다.
다시 나흘 뒤인 9월 28일에 교리 홍명주(洪命周)가 사직을 청하며 상소문을 올렸다. 어조가 가장 격렬하였다. 그는 신유년의 일을 길게 적은 뒤 스르렁 칼을 뽑아 들었다.
정약용 같은 자는 다만 증거를 잡지 못해 가볍게 죄를 주어 좋은 지역에 유배 보냈으니, 그에 대해 은혜가 지극히 융숭하고 덕이 매우 두터웠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도 감히 어린 아들을 시켜 연로(輦路)에서 격쟁하게 하였으니, 전처럼 함부로 날뛰는 습성이 참으로 무엄합니다. 이는 그 죄가 합당한 형률을 시행해야 하건만 도리어 이같은 비상(非常)한 하교를 내리시니 이 어찌 신하들이 평소 전하께 바라던 일이겠습니까. 이 길이 한번 열리면 해도(海島)와 먼 변방에서 살아남아 숨 쉬고 있는 사악한 무리들이 머리를 쳐들고 요행을 바라 꽹과리를 치며 글을 올리지 않음이 없을 터이니, 어찌 크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如丁若鏞者, 特以未捉眞贓, 置之末勘, 薄竄善地, 在渠可謂恩至渥也德至厚也. 乃敢縱其穉子, 鳴錚輦路, 依舊跳踉之習, 萬萬無嚴. 此其罪合施當律, 而反有此非常之敎, 是豈犀下平日所仰望於殿下者哉. 此路一開, 則邪徒之戴頭假息於海島邊遠者, 莫不翹首希覬, 鳴金上言, 豈不大可寒心哉.
이에 대한 순조의 비답은 다음과 같았다.
대저 삿된 무리를 엄하게 물리침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만약 이 같은 범죄에 긴밀하게 관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았다면 또한 어찌 일률적으로 삿된 무리에다 돌리겠는가? 이후로 만에 하나 멋대로 날뛰는 자취가 있을 경우 나라의 법도가 절로 있어 반드시 전날의 일보다 열 배의 처벌이 있을 것이니 일개 약용이 무엇을 하겠는가? 또 이같이 한 뒤에 삿된 무리가 전처럼 방자하게 감히 분수에 넘치는 꾀를 부린다면 조정에 절로 공의(公議)가 있을 것이다. 내 어찌 여러 말을 하겠는가.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분을 살피라.
夫邪徒之嚴斥, 予豈不知. 若有明知不緊於此等罪犯, 則亦何有一例歸之於邪徒哉. 此後萬一有跳踉之跡, 國之和勻自在, 必有十倍於前日之事. 一若鏞何有? 且如是之後, 邪徒依舊放肆敢生希覬之計, 則朝廷自有公議, 予何費辭言之. 爾其勿辭察職.
순조는 석방을 명했지만…
임금은 다산의 석방 명령을 끝내 철회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산의 옛 친구인 이기경(李基慶)이 대계(臺啓)를 올려 반대 의견을 고수하였다. 결국 고향으로 쫓아 보내라는 왕명은 계속 발목을 잡혀 계류된 채 오래도록 집행되지 않았다.
위 다산의 편지에 나오는 ‘홍소(洪疏)’가 바로 홍명주의 상소문을 말하고, ‘비지(批旨)’는 이에 대한 임금의 답변을 가리킨다. 《일성록》 1810년 9월 3일자 기사를 보면 이때 서울 남부에 사는 이관기의 아들 이당구(李堂九)도 아버지의 석방을 탄원하는 격쟁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다산의 석방만 윤허되었고, 죄가 훨씬 가벼웠던 이관기의 석방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관기는 자신은 안 되고 다산의 석방만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추이를 지켜보다가 뒤늦게 다산에게 축하 편지를 보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관기의 최종 석방은 다산보다 조금 이른 1818년 2월에 이루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산은 자신의 석방이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석방 공문이 조만간 도착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홍명주의 흉악한 비방 상소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비지가 저토록 융숭하시니 너무도 기쁘고 영광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9월에 내린 다산에 대한 석방 명령은 해가 바뀌고도 어쩐 일인지 집행될 기미가 전혀 없었다.
14. “어디서 이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자료는 늘 어딘가 꽁꽁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튀어나온다. 마치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불쑥 나타난다. 위 편지와 함께 한상봉 선생이 《은봉집간(隱峯集柬)》이란 필사본 서첩의 복사본을 다시 불쑥 내밀었다. 이 책은 대둔사 승려 은봉(隱峯) 두운(斗芸·생몰년 미상)이 영남의 고승(高僧) 영파(影波) 성규(聖奎·1728~1812년)와 다산에게 받은 편지를 합첩해서 묶어 둔 서간첩이었다. 모두 19통의 편지가 실려 있었는데, 이 중 다산이 은봉에게 보낸 편지 세 통이 들어 있었다.
원본의 소재를 묻자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자료는 무엇보다 실물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바로 성보박물관의 관장 소임을 맡고 있던 흥선 스님께 연락을 드렸다. 《은봉집간》의 원본을 배관(拜觀)하고, 촬영해 연구 자료로 활용하고 싶다는 청을 넣었다. 흔쾌한 허락이 바로 떨어졌다.
2008년 3월 7일에 아내와 함께 김천으로 내려갔다. 학기 초라 경황이 없었지만 미룰 수가 없었다. 마침 강의가 빈 금요일이어서 약속을 그렇게 잡았다.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도착하니 수장고에 열람 공간을 마련해 두었고 서간첩과 함께 그 옆에 흰 장갑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스님의 성품이 보였다.
서간첩을 열자 막상 다산의 편지는 두 통뿐이었다. 한상봉 선생이 제공한 복사본에 실려 있던 한 통이 그사이에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중간 매도 과정에서 누군가 편지 한 장을 따로 떼어 낸 듯했다. 다른 두 통에는 ‘동호여인(東湖旅人)’이란 모호한 서명만 있었고, 따로 떼어 낸 한 장에만 ‘다산’이란 이름이 선명했기 때문인 듯했다.
결국 이 편지는 한상봉 선생의 복사본으로만 남고 원본은 현재 종적이 묘연한 상태다. 원본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전후 경위가 흐려지고, 《은봉집간》에 실린 두 통도 다산의 친필 여부를 확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료를 원본 실물로 확인하는 것이 이래서 중요하다.
사라지고 없는 편지는 내용이 대단히 짧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마주하여…”
1811년 1월 7일 다산이 대둔사 승려 은봉에게 보낸 편지.은봉에게 답함
편지가 와서 새해에 평안하심을 알아 마음이 놓입니다. 나는 병고(病苦)로 해를 넘기니 홀로 가련합니다. 은지(恩旨)는 이제껏 감읍하는데, 산인께선 어디서 이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이만 줄입니다. 신미년(1811) 인일(人日), 다산.
答隱峯. 書來知新年平安爲慰. 吾病苦經年, 自憐. 恩旨至今感泣. 山人何以聞此耶? 不具. 辛未人日, 茶山.
신미년 인일(人日), 즉 1811년 1월 7일에 쓴 편지다. 은지(恩旨)에 감읍한다는 말은 앞서 본 홍명주의 상소에 답한 비지를 가리킨다. 이때쯤에는 다산의 해배 소식이 인근에 쫙 퍼졌던 듯하다. 해가 바뀌어 은봉이 소식을 듣고 축하하는 편지를 보내 왔고, 다산은 자신의 해배 소식을 그가 이처럼 빨리 들은 것에 놀라며 짧게 답장했다. 은봉은 그 2년 전인 1809년에 다산초당으로 다산을 찾아와 《만일암지》의 편찬과 〈만일암중수기〉 등의 글을 부탁한 인연으로 왕래가 있던 터였다. 편지에서 다산은 말을 아끼는 기색이 역력하다.
1811년 4월 14일 은봉에게 보낸 편지.《은봉집간》에는 다시 석 달 뒤인 1811년 4월 14일에 보낸 편지 한 통이 더 있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은봉 선사께
헤어진 뒤로 계속 쓸데없이 바빠 편지 문안이 소원했으니 어찌 서글픔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어느덧 다시 초여름인데 법리(法履)는 편안하신지요. 진불암(眞佛菴)의 꽃나무와 부들방석에서 참선하는 모습이 마치 눈앞에 있는 듯하여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마주하여 회포를 풀기 바랍니다. 다시금 때에 맞춰 건강을 잘 살피십시오. 나머지는 줄이고 다 쓰지 못합니다. 4월 14일, 동호의 나그네가.
隱峰經几
別後一向忙冗, 有疎書問, 豈勝愧悵. 忽復初夏, 法履輕安否. 眞佛花木, 宴坐蒲團, 如在眼底, 不可忘也. 唯望北歸前面敍, 更乞以時自護. 餘匆匆, 書不盡意. 四月十四日, 東湖旅人.
북귀(北歸) 이전에 꼭 만나자고 한 것은 이때까지 다산이 자신의 해배 명령을 의심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다. 은봉이 머물고 있던 진불암의 모습을 떠올리며 떠나기 전 작별 만남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 만남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다산의 해배가 이로부터 무려 7년 뒤에 이루어졌고, 그사이에 은봉이 세상을 떴기 때문이었다. 대신 다산은 은봉이 세상을 뜨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비축문(茶毗祝文)〉을 지어 주었다. 이 글은 《다산시문집》에는 빠졌고 《동사열전(東師列傳)》과 《백열록(柏悅錄)》 속에 남아 있다.
15. 돌아가 누울 기약
다산이 1811년 2월 그믐에 보낸 수신자 불명의 편지.다산이 은봉에게 보낸 두 통 편지의 중간 시점에 수신자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쓴 편지 한 통이 더 남아 있다.
2월 28일에야 정월 16일에 보낸 편지를 받았네. 게다가 근래 평안하다는 소식까지 들으니 몹시 기쁘이. 여기는 봄 기운이 이미 깊어 묵은 병도 점차 나아 간다네. 은지가 이미 내려와 돌아가 누울 기약이 있고 보니 기쁘고 감격해서 여한이 없다네. 다만 자산(玆山)으로 고개를 돌려 보면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네. 믿는 바는 다만 그대 형제뿐이니 의지하고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네그려. 사람이 서로를 아는 것은 마음을 알아줌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라네. 처음부터 끝까지 이 같은 바람을 저버리지 말아 주게나. 부쳐 온 김은 지난번 인편에 온 듯 싶으이. 다 갖추지 못하네. 신미년(1811) 2월 그믐, 다산 병수(茶山病叟) 답장.
二月卄八, 得正月十六日書. 且聞近日平安信息, 欣慰深矣. 此春氣旣深, 宿病漸蘇. 恩旨旣降, 歸臥有期, 且欣且感, 無餘憾矣. 但回首玆山, 有淚沾臆. 所恃惟君之昆弟, 是倚是賴也. 人之相知, 貴相知心. 有始有終, 無殆此望焉. 寄來海衣, 頃便似來矣. 姑不具書. 辛未二月晦, 茶山病叟謝.
편지의 수신자가 1811년 1월 16일에 보낸 편지를 40여 일이 지난 2월 28일에야 받았다. 근래 평안하다는 말은 아마도 자산, 즉 흑산도에 귀양 가 있는 형님 정약전의 소식을 두고 한 표현이지 싶다. 그렇다면 수신자는 다산이 남긴 다른 편지에 ‘우이도의 문생(文生)’편에 소식을 전했던 그 사람인 듯하다. 다산은 당시 그에게 자신이 만든 떡차 50개를 선물했었다.
정약전의 시집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일부가 연세대 도서관 귀중본실 소장서 중 《잡고(雜稿)》(내제는 《여유당집》)에 실려 있다. 이 시집에 따르면 암태도 사람으로 정약전을 유난히 따랐던 박봉혁(朴鳳赫)이란 인물이 나온다. 그는 호를 계고재(稽古齋)로 썼던 사람이다. 정약전의 남은 시집 중에 그에게 준 시가 절반이나 된다. 우이도에서 생활할 당시 정약전을 지척에서 후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사위는 이공묵(李恭默)으로, 다산이 편지에서 ‘그대 형제’라고 한 것이 혹 이공묵과 그의 아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다산은 편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 누울 기약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그 생각만 하면 지난 10년간의 유배 생활도 아무런 유감이 없다고 썼다. 다만 형님 정약전을 흑산도에 남겨두고 혼자만 올라갈 생각을 하면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신자 형제에게 자신이 올라간 뒤에도 변함없이 지금처럼 형님을 잘 보살펴 줄 것을 거듭 당부했다. 이때쯤에는 다산의 석방 소식이 멀리 흑산도에까지 알려졌던 것이다.
기대는 사라지고…
하지만 4월이 지나도 석방 소식은 없었다. 1811년 내내 마음을 졸이는 동안 해배의 기대는 차츰 싸늘한 실망으로 식어 갔다. 이것이 마음을 침식하고 몸마저 허물어뜨려, 다산은 1811년 겨울에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점차 하던 작업을 수렴하고 마음 다스리는 공부에 힘을 쏟으려 합니다. 하물며 풍병(風病)은 뿌리가 이미 깊어 입가에 늘 맑은 침이 흐르고, 왼쪽 다리는 항상 마비 증세를 느낍니다. 머리 위로는 늘 두미협(斗尾峽) 얼음 위에서 잉어 낚는 늙은이들이 쓰는 솜 모자를 쓰며 지내지요. 근자에는 또 혀가 뻣뻣해져 말이 헛나오기까지 합니다. 스스로 살 해가 길지 않음을 알면서도 한결같이 바깥으로만 내달리니 이것은 주자(朱子)께서 만년에 뉘우쳤던 바였지요.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다만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맑게 하려 하면 세간의 잡념들이 천 가닥 만 갈래로 어지러이 일어나 붙들어 맬 수가 없는지라, 도리어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가 저술만 못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때문에 즉각 그만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漸欲收之斂之, 用力於治心之工. 況風病根已深, 口角常流淸涎, 左脚常覺不仁, 頭上常戴斗尾氷上釣鯉翁之絮帽. 近又舌彊語錯. 自知年壽不長, 一向外馳, 此朱子晚年所悔也. 豈不惕乎? 但靜坐澄心, 則世間雜念, 千頭萬緖, 紛紛擾擾, 不可把捉, 還覺治心之工, 莫如著述, 以此不得便止耳.
정신적 충격으로 풍이 와서 혀가 굳고 말이 헛나오며, 입가로 침이 흘렀다. 왼쪽 다리는 마비의 느낌이 늘 따라다녔다. 고요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지만 세간의 잡념이 종잡을 수 없이 일어나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태라고 고백했다. 그해 4월까지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다산은 이때 그간의 마음 고생으로 침몰 직전의 상태였다. 그나마 마음의 울화와 번민을 잊기 위해 온통 저술에만 몰입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다산의 해배와 관련된 논의는 1814년과 1816년에도 다시 점화되었지만 아무런 결과가 없었다. 해배 명령이 처음 내려지고 8년 뒤인 1818년 가을에야 그는 마침내 18년간의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상경할 수 있었다. 이사이에도 많은 곡절과 사연이 있으나, 지면 관계상 다른 글에 미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