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활용으로 기업 이익·GDP는 올라가지만 가계 소비력은 붕괴한다?
⊙ 한계효용 체감·수확 체감·제로섬 등 기존 경제학은 산업 시대의 법칙
⊙ AI의 제안에 따라 불과 3000달러로 맞춤형 백신 개발, 암에 걸린 개 치료 성공
유영진
1966년생. 서울대 경영학 학사 및 석사, 미국 메릴랜드대 경영정보학 박사 / 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 교수, 템플대 교수, 클리블랜드 유니버시티 호스피털(University Hospitals) 최고혁신설계책임자(Chief Innovation Architect) 역임. 現 런던정경대(LSE) 경영학과 교수, LSE 평생교육 디지털 프로그램 학술책임자, 굿이어타이어(Goodyear Tire)·펜스키(Penske)·셔윈 윌리엄스(Sherwin Williams)·프로그레시브 보험(Progressive Insurance)·키뱅크(Key Bank) 등 미국 기업 디지털 전략 자문,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삼성경제연구소 자문
⊙ 한계효용 체감·수확 체감·제로섬 등 기존 경제학은 산업 시대의 법칙
⊙ AI의 제안에 따라 불과 3000달러로 맞춤형 백신 개발, 암에 걸린 개 치료 성공
유영진
1966년생. 서울대 경영학 학사 및 석사, 미국 메릴랜드대 경영정보학 박사 / 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 교수, 템플대 교수, 클리블랜드 유니버시티 호스피털(University Hospitals) 최고혁신설계책임자(Chief Innovation Architect) 역임. 現 런던정경대(LSE) 경영학과 교수, LSE 평생교육 디지털 프로그램 학술책임자, 굿이어타이어(Goodyear Tire)·펜스키(Penske)·셔윈 윌리엄스(Sherwin Williams)·프로그레시브 보험(Progressive Insurance)·키뱅크(Key Bank) 등 미국 기업 디지털 전략 자문,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삼성경제연구소 자문

- 챗GPT를 활용해 자기가 기르는 개의 암 치료법을 발견한 폴 코닝엄. 사진=X
충격적인 것은 실업(失業)의 성격이었다. 과거의 경제 위기에서 먼저 쓰러진 것은 비숙련 노동자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였다. 신용점수 780점대의 ‘완벽한’ 채무자들이 모기지를 갚지 못했다. 금융 자문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중간관리자-인간의 지능이 가장 핵심적인 가치였던 직종들이 먼저 무너졌다. AI가 분석하고, 판단하고, 설득하고, 조정하는 능력-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을 대규모로 복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AI가 화이트칼라 노동을 대체하고, 기업 이익이 증가한다. 기업은 절감분을 다시 AI 인프라에 투자하고, 더 강력해진 AI가 더 많은 일자리를 대체한다. 해고된 노동자는 소비를 줄이고, 이에 따라 수요는 감소한다. 그런데 AI는 소비를 하지 않는다. 집도 사지 않고, 아이폰도 사지 않고, 여행도 가지 않는다. GDP는 올라가지만 가계(家計)의 소비력은 붕괴되는 구조-‘유령 GDP(Ghost GDP)’-만 쌓인다.
보고서는 발표 당일 월스트리트를 뒤흔들었다. 빅숏(Big Short)의 마이클 버리가 X(구 트위터)에 “나도 이보다 비관적이진 않았다(And you think I’m bearish)”라고 공유했고, 조회수 1600만을 넘겼다. IBM은 그날 주가가 13% 폭락했다. 소프트웨어 주식에서 일주일 만에 약 1조 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보고서를 투자자 불안의 핵심 촉매로 지목했다.
AI, 개의 암에 가능한 치료법 제안
두 번째 이야기. 2026년 3월, 시드니의 폴 코닝엄(Paul Conyngham)이라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뉴스에 등장했다. 그의 입양견 로지(Rosie)가 2024년에 비만세포암(mast cell cancer) 진단을 받았다. 통상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암이다. 수천 달러를 들여 수술과 항암치료를 했지만 종양은 줄어들지 않았다. 여명(餘命)은 1개월에서 6개월. 코닝엄은 챗 GPT에 물었다. “개의 비만세포암에 가능한 치료법이 있는가?”
AI는 면역요법을 제안했고,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대학(UNSW)의 유전체센터를 가리켰다. 코닝엄은 3000달러를 들여 종양의 DNA를 시퀀싱했고, 그 데이터를 AI 파이프라인에 넣었다. 챗GPT로 치료 전략을 브레인스토밍하고, 알파폴드(AlphaFold)로 돌연변이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고, 머신러닝 알고리듬으로 면역 반응을 유발할 수 있는 표적을 식별했다. UNSW 연구진이 그 설계를 바탕으로 맞춤형 mRNA 백신을 제작했다. 개에 대한 맞춤형 암 백신은 세계 최초였다.
2025년 12월 접종. 한 달 만에 종양이 75% 축소되었다. UNSW의 마틴 스미스(Martin Smith)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효과가 있었다(Holy crap, it worked)!”
그리고 덧붙였다.
“이걸 개한테 할 수 있다면, 왜 암에 걸린 모든 인간에게 하지 않는 거지?”
코닝엄은 생의학 학위가 없다. 생물학 배경이 전무하다. 그런데 그는 AI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전에 불가능했던 일을 해냈다. DNA 시퀀싱 의뢰에서 mRNA 백신 설계까지 2개월, 3000달러. 연구비 수십억을 쓰는 제약회사도 하지 못한 일을 개인이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코닝엄이 챗GPT를 열기 전에는 ‘개의 암에 맞춤화된 mRNA 백신을 설계한다’는 과업(task) 자체가 누구의 가능성 공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격이 너무 높아서 못 한 일이 아니고, 누군가가 비효율적으로 하고 있던 일도 아니다.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과업이 AI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현실화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과업이 존재하자, 앞으로 그에 대한 수요가 등장할 것이다.
맬서스가 틀린 이유
토머스 맬서스1798년, 영국의 토머스 맬서스가 《인구론》을 발표했다. 그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한다고 봤다. 따라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것은 수학적 필연이고, 기근과 질병이 인구를 일부 교정할 뿐 탈출구는 없다고 봤다. 맬서스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고, 다윈은 그에게서 자연선택의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맬서스는 틀렸다. 그가 상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기술이 식량 생산의 함수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버-보슈 공정이 공기에서 비료를 만들었고, 녹색혁명이 수확량을 수배로 늘렸고, 냉장 운송이 식량의 시공간적 제약을 깨뜨렸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공급 곡선의 이동’이라고 부른다. 기술 혁신이 생산 가능 영역의 경계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같은 투입으로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면 공급의 경계가 바깥쪽으로 이동한다. 솔로의 성장론, 로머의 내생적 성장론,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등을 관통하는 지난 200년간 경제학의 핵심 질문은 바로, 어떻게 하면 공급의 경계를 더 바깥으로 밀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시트리니의 보고서를 다시 보자. 맬서스와 구조는 동일하지만, 방향이 정반대다. 맬서스는 수요(인구)는 무한(無限) 증가하는 데 비해서 공급(식량)은 유한(有限)하고, 이에 따라 공급의 부족으로 경제가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비해서 시트리니는 공급(AI 생산 능력)은 무한 증가하지만 수요(인간의 소비)는 정체할 것이고, 이에 따라 수요 부족으로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맬서스는 공급을 고정했지만, 기술의 발달이 공급의 경계를 이동시키면서 틀렸다. 시트리니는 수요를 고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수요의 경계도 이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이동할 수 있다면, 무엇이 그것을 이동시키는가?
마르크스도 틀렸다
사실 이 질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필연적인 붕괴를 예언한 마르크스가 19세기 중반에 정확히 같은 문제를 진단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과잉생산의 위기’는 시트리니의 ‘유령 GDP’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끊임없이 확장하면서, 공장은 더 많이 만들고 기계는 더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이에 따라 공급의 경계는 계속 바깥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구매력은 억압되어 있다. 물건은 쌓이는데 살 사람이 없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자본주의의 치명적 내적 모순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마르크스도 틀렸다. 자본주의는 200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았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이것을 가장 날카롭게 분석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20세기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의 과잉생산 문제를 해결했는데, 더 많이 생산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원하게’ 만들어서 해결했다. 마케팅, 광고, 브랜딩이 기존에 없던 욕망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BMW를 사는 이유는 교통수단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BMW가 상징하는 것 때문이다. 소비는 물질적 필요의 충족이 아니라 기호(sign)의 소비가 되었다. 상징적 욕망의 창조를 통해서 수요의 경계가 바깥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런 보드리야르의 통찰은 강력하지만 한계가 있다. 마케팅이 만드는 수요는 기호(嗜好)의 조작에 불과하다. 그냥 껍질에 불과한 것이다. 제품도 소비자도 변하지 않는다. BMW의 로고를 떼면 남는 것은 다른 차와 같은 단순한 교통수단이다. 그래서 끝없는 패션 사이클, 계획적 진부화, 겉만 다른 ‘신제품’의 반복이 필요하게 된다. 보드리야르 자신도 이것을 결국 실체 없는 복제-시뮐라크르(simulacre)-의 세계로 보았다. 결정적으로, 마케팅은 인간이 수행하는 과업의 경계를 넓히지 않는다. 기존의 제품에 새로운 기호를 입힐 뿐이다. 인간이 ‘하는 일’의 목록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그 일이 ‘상징하는 것’뿐이다.
자동화에서 증강으로, 그다음은…
다론 아제모을루. 사진=AP/뉴시스이 프레임워크는 진정한 진전이다. ‘AI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단순한 서사를 넘어서, AI가 어떻게 배치되고 있으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더 생산적인 질문을 던진다. 기술 변화의 방향은 기술적 필연이 아니라 사회적 선택이라는 아제모을루의 주장은 정확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증강 시나리오에서도, 과업의 목록은 주어진 것으로 전제된다. 진료, 법률 분석, 금융 자문, 소프트웨어 개발-현재 경제 구조를 지탱하는 과업의 목록이 있고, AI를 통한 증강은 단지 인간이 그 일을 더 잘하게 해 주는 것으로 그친다. 여기서 던지는 질문은 기존의 과업을 누가,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서 그친다. 정작 자동화도 증강도 묻지 않고 있는 질문은, 과연 AI를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경제 구조 안에 새로운 과업이 등장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증강이 아무리 강력해도 공급 측면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AI가 의사를 증강해서 하루에 환자 50명 대신 100명을 진료할 수 있게 했다고 하자. 그런데 만일 진료 수요가 50명이면, 나머지 50명분의 생산 능력은 유휴(遊休) 상태가 된다. AI가 변호사의 계약서 검토 시간을 반으로 줄였다고 하자. 그런데 검토할 계약서가 늘지 않으면 빈 시간이 생길 뿐이다. 증강은 공급의 경계를 밀어낸다. 하지만 새로운 과업이 생기지 않고 과업의 경계가 고정되어 있으면, 수요의 경계도 따라가지 못하고 증강의 가치는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이것이 증강 프레임워크가 열어 놓았지만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이다. 자동화와 증강의 구분은 기존 과업의 목록 안에서 AI를 어떻게 배치할지를 알려 준다. 하지만 과업의 목록 자체가 어떻게 확장되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과업의 경계가 고정되면 수요의 경계도 고정된다. 수요의 경계가 고정되면, 아무리 완벽하게 증강된 경제도 결국 천장에 부딪친다.
재화도 소비자도 매번 달라진다면?
과업의 경계가 이토록 많은 프레임워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있다. 경제학의 가장 근본적인 가정 중 하나인 한계효용 체감(遞減)의 법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재화(財貨)를 계속 소비하면 추가적인 만족은 줄어든다. 수요 곡선이 우하향(右下向)하는 이유이고, 시장 균형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신고전파 경제학 전체가 서 있는 토대다.
한계효용 체감은 재화가 동일하고 소비자도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피자를 아무리 좋아해도 결국 질린다. 영화를 아무리 좋아해도 같은 영화를 열 번 보면 지겨워진다. 그리고 포화(飽和)가 필연이면,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일의 목록-과업의 경계-에도 자연적 천장이 있다. 소비의 한계가 바로 실질적인 과업을 통한 총생산의 한계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생산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AI가 기존 과업을 인간보다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는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할 수 있는 과업의 총량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다.
그런데 만약, 재화가 매번 달라지고 소비자도 매번 달라진다면 어떻게 되는가?
생성형 AI와의 상호작용에서 정확히 이런 일이 일어난다. 시스템은 당신을 학습한다. 당신의 맥락, 패턴, 변화하는 상태를 읽는다. 그리고 당신은 시스템에서 배운다. 새로운 패턴,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방식을 발견한다. 한쪽 상호작용에서 다음 상호작용으로 넘어갈 때, 제품도 사용자도 이전과 같지 않다. 한계효용 체감의 전제-동일한 재화의 동일한 소비자에 의한 반복 소비-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내생적 효용(endo-genous utility)’이라는 개념으로 이론화하고 있다. 표준 경제학에서 효용은 외생적(exogenous)이다. 고정된 선호가 고정된 재화에 작용해서 만족이 결정된다. 기술은 재화를 더 싸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지만,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바꾸지 못한다. 내생적 효용에서는, 사용자와 제품의 상호작용이 양쪽 모두를 변환시킨다. 사용자의 상태가 변하고, 제품의 상태가 변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품의 진화가 사용자의 축적된 경험에 기초한 기대를 체계적으로 초과한다. 나는 이것을 ‘예견적 초과(anticipatory excess)’라고 부른다. 시스템이 사용자가 몰랐던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 줄 때,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적 상호작용은 수렴(收斂)하지 않고 계속 전진한다.
효용이 내생적이면 과업의 경계는 고정될 수 없다. 사람이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확장된 역량을 가진 사람은 이전의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과업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과업은 새로운 수요를 만든다. 이것은 일회성 이동이 아니다. 매번의 공진화적 상호작용이 사용자의 역량을 확장하고, 확장된 역량이 새로운 과업의 상상을 가능하게 하고, 새로운 과업이 새로운 수요를 만든다. 과업의 경계가 복리로 확장되고, 수요의 경계도 함께 이동한다.
AI도 인간도 함께 진화
이 렌즈로 코닝엄의 이야기를 다시 보자. 코닝엄은 기존의 과업을 더 효율적으로 수행한 것이 아니다. 생물학자의 일을 자동화한 것도, 자신의 기존 업무를 증강한 것도 아니다. 더 근본적인 일이 일어났다. ‘공개된 AI 도구를 사용해 특정 개의 암에 대한 맞춤형 mRNA 백신을 설계한다’는 새로운 과업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코닝엄의 과업 경계에도, UNSW의 과업 경계에도, 제약 산업의 과업 경계에도 없던 것이었다. AI와 인간의 상호작용이 새로운 과업을 존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과업이 등장하면, 새로운 수요가 뒤따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인과(因果)의 방향이다. 수요가 먼저 이동한 것이 아니고, 과업의 경계가 확장되었고 수요는 그 결과로 확장된 것이다. 코닝엄이 맞춤형 mRNA 백신을 ‘원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것을 만드는 과업이 상상 가능해져야 했다. AI가 그것을 상상 가능하게 만들었다-과업을 대신 해 줘서가 아니라, 코닝엄이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변환시킴으로써.
그리고 이 변환이 정확히 내생적 효용이 묘사하는 것이다. 코닝엄과 AI의 상호작용은 고정된 소비자에 의한 고정된 재화의 소비가 아니었다. 매 단계에서 코닝엄이 변했다-면역학적 통찰을 얻고, 유전체학적 문해력을 쌓고, 단백질 구조에 대한 직관을 발전시키면서. 그리고 매 단계에서 AI가 코닝엄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변했다-더 역량 있는 대화 상대에게 반응하고 있었으니까. 공진화는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각 단계에서 AI는 코닝엄이 예상하지 못한 것을 보여 주었다. 상상하지 못한 치료 경로, 찾을 줄 몰랐던 단백질 표적, 존재를 몰랐던 연구실과의 연결. 예견적 초과가 상호작용을 앞으로 밀어낸 것이다-정체(停滯)시키지 않고.
생성적 외부성
여기서 진정한 과업 경계의 확장과 시뮐라크르를 구별하는 테스트가 가능하다. 시스템을 걷어 내면 무엇이 남는가? BMW의 로고를 떼면 상징적 가치가 사라진다. 소비자가 변하지 않았으니까. 코닝엄에게서 AI를 빼면, 확장된 생의학적 이해와 문제 해결 역량은 남는다. 사람이 변했으니까. 마케팅은 기존 과업에 새로운 기호를 입힌다. 공진화적 AI는 인간을 변환시킴으로써 새로운 과업을 존재하게 만든다.
그리고 코닝엄이 변했기 때문에, 그의 과업 경계는 계속 확장하고 있다. 유전체학을 이해하게 되자 그는 이제 두 번째 종양에 대한 새로운 백신을 설계하고 있다. 첫 번째 과업이 두 번째 과업을 위한 역량을 만들었다. 두 번째가 세 번째를 만들 것이다. 이것이 내생적 효용이 작동하는 모습이다-과업의 경계가 복리로 확장되고, 수요의 경계도 함께 확장된다.
같은 메커니즘이, 더 작은 규모에서, 일상적 AI 상호작용에서도 작동한다. 스포티파이를 1000시간 쓴 사람은 이전에 몰랐던 음악적 감수성이 생겼다. 해지(解止)해도 그 감수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변했고, 더 많은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된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기호의 조작이 아니라, 과업의 경계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메커니즘의 총체적 효과를 ‘생성적 외부성(Generative Externality)’이라고 부른다. 시스템이 사용자를 학습하고, 사용자의 맥락을 읽고, 사용자의 기대를 초과하는 경험을 구성할 때,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첫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치가 만들어진다. 둘째, 사용자의 역량이 확장된다-과업의 경계가 확장되고-새로운 수요가 생성된다. 수요의 경계가 기호의 조작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의 실질적 확장을 통해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맬서스를 틀리게 만든 공급 경계의 이동과 대칭적인, 수요 경계의 이동이다. 기술 혁신이 새로운 생산 방법을 가능하게 해서 공급의 경계를 밀어내듯, 생성적 외부성이 새로운 인간 활동을 가능하게 해서 수요의 경계를 밀어낸다. 그리고 이것이 증강 프레임워크가 열어 놓은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존 과업 안에서 AI를 어떻게 배치하느냐만이 아니라, AI가-사용자를 변환시키는 공진화적 상호작용을 통해-과업 자체의 목록을 어떻게 확장하느냐를 설명하는 것이다.
시트리니 보고서의 ‘유령 GDP’는 과업의 경계가 확장되지 않을 때의 시나리오다. AI의 공급 능력은 도입하면서, 인간을 위한 새로운 과업은 만들어지지 않을 때. AI가 자동화든 증강이든, 기존의 과업을 더 빠르고 싸게 수행하는 데만 쓰이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은 그대로일 때. 마르크스의 과잉생산 위기가 AI 버전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AI 죽음의 함정’이라 부른다.
그러나 맬서스가 틀린 이유를 정확히 기억해야 한다. 맬서스는 ‘자동으로’ 틀린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하버-보슈 공정을 발명하겠다고 결심했고, 누군가가 녹색혁명의 품종을 수십 년에 걸쳐 개발했고, 누군가가 냉장 운송 시스템을 설계했다. 기술은 가능성의 공간이고, 인간의 설계 선택이 결과를 결정했다.
코닝엄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것도 같은 구조다. AI가 자동으로 과업의 경계를 확장하지 않는다. 코닝엄이 질문을 던지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과학자들을 설득하고, 새로운 가치를 설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같은 챗GPT, 같은 알파폴드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코닝엄처럼 쓰지 않으면 새로운 과업은 생기지 않고, 수요의 경계는 이동하지 않는다. 차이는 AI의 능력에 있지 않다. AI로 무엇을 설계하느냐에 있다.
Z세대는 왜 미래가 두려운가
하버드 케네디스쿨이 2025년 가을에 발표한 청년 여론조사가 있다. 18~29세 미국인 204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압도적 다수가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답했다. 43%가 재정적으로 ‘겨우 버티고 있다(struggling or getting by)’고 했다. 정치 지도자에 대한 신뢰는 바닥이었고, 양대 정당 모두에 대한 평가는 ‘깊이 부정적(deeply negative)’이었다. 맥킨지의 2025년 미국 기회 조사에서는 Z세대(Gen Z)의 70%가 ‘집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라 했고, 33%는 ‘은퇴할 수 없을 것’이라 답했다. 모닝컨설트의 추적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들의 재정 전망 낙관도는 2025년 초 45%에서 하반기 38%로 떨어져 2018년 조사 시작 이래 최저를 기록했다. 2026년은 2020년 이후 신규 졸업자에게 최악의 취업 시장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한국의 상황은 더 암울하다. 청년 실업, 주거 불안, N포 세대. 이 지면의 독자들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20대의 60% 이상이 ‘노력해도 계층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있다. 부모 세대가 경험한 ‘열심히 하면 된다’는 서사가 이 세대에게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포천(Fortune)》지는 이것을 ‘환멸의 경제학(disillusionomics)’이라고 불렀다. Z세대가 전통적인 재정 건전성의 규범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축하고, 투자하고, 내 집을 마련하고, 은퇴를 준비하라는-부모 세대가 신봉한-경제적 생애 설계가 자기 세대에게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직관적 판단. 그래서 이들은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듀프(dupe) 문화’-명품(名品) 대신 대체재(代替財)를 찾는 소비 전략-를 발전시키고, 하나의 직업 대신 여러 소득원을 조합하는 ‘긱(gig·단기 일거리) 포트폴리오’ 전략을 택한다.
그런데 나는 이 현상을 세대론이나 경기 침체의 문제로만 읽지 않는다. 여기에는 더 깊은 구조적 원인이 있다고 본다.
Z세대가 학교에서, 뉴스에서, 사회적 담론에서 배운 경제학은-의식하든 무의식하든-본질적으로 ‘희소성(稀少性)의 경제학’이다. 일자리는 유한하다. 자원은 유한하다. 파이는 정해져 있고, 누군가 더 가지면 누군가는 덜 가진다. 기술이 생산성을 높이면 일자리가 줄어든다. 이것이 시트리니의 논리이고, 맬서스의 논리이고, 지난 3월과 4월 칼럼에서 내가 분석한 솔로-로머-포터의 공급 측면 이론이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세계관이다.
비관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Z세대에게, 그리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모든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들이 배운 경제학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한계효용 체감, 수확 체감, 제로섬-이것들은 산업 시대에서 성립하는 법칙이지, 우주의 보편 법칙이 아니다.
현재 AI에 대한 불안의 밑바닥에 깔린 숨겨진 전제는 수요가 고정되고, 더 나아가서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과업의 목록이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세상에서 과업의 경계는 고정된 적이 없다. 맬서스 시대에 누가 ‘웹사이트를 디자인한다’는 과업을 상상했겠는가? 아이폰이 나오기 전에 누가 ‘모바일 앱을 개발한다’는 과업을 상상했겠는가? 코닝엄이 챗GPT를 열기 전에 누가 ‘AI로 개의 맞춤형 mRNA 백신을 설계한다’는 과업을 상상했겠는가? 그 과업들은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기술과 인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과업이 존재하면, 새로운 수요가 뒤따른다-누군가 욕망을 제조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단기적으로 특정 직종의 파괴는 현실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순진한 낙관론이다. 시트리니의 보고서가 가치 있는 이유는, 과업의 경계를 확장하지 않고 AI를 도입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정밀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비관은 분석의 도구로서는 유용하지만, 세계관으로서는 위험하다. 과업의 경계가 고정되어 있다고 믿으면, 유한한 과업 목록을 두고 인간과 기계가 벌이는 제로섬 싸움이 보인다-인간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과업의 경계가 확장될 수 있다고 보면, 새로운 과업을 존재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수요와 새로운 산업과,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인간 번영을 만들어 내는 과업을 상상해 낼 수 있다.
‘AI 비관론’, 넘어설 수 있다
맬서스적 세계관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될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고 믿는 사회는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는 데 투자하지 않는다. 기존의 것을 최적화하고, 자동화하고, 증강할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효율에도 불구하고 왜 경제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시트리니의 세계와 코닝엄의 세계. 두 세계 모두에서 AI는 강력하다. 차이는 AI의 능력이 아니다. 차이는, AI가 인간 없이 기존 과업을 수행하는 데 쓰이느냐, 인간과 함께 새로운 과업을 존재하게 만드는 데 쓰이느냐에 있다. 공급의 경계만 밀어내느냐, 과업의 경계를-그리고 그와 함께 수요의 경계를-함께 확장하느냐에 있다.
맬서스는 공급의 경계가 고정이라고 전제했고, 틀렸다. 현재의 ‘AI 비관론’은 과업의 경계가 고정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그럴 필요는 없다. 과업의 경계가 확장되느냐 않느냐는 AI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에게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