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지(國共志): 장제스와 마오쩌둥 〈4〉 장제스, 《손자병법》의 ‘싸우지 않고 이긴다’로 천하 통일

  • 글 :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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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거하던 군벌, ‘밴드왜건 올라타기’ 식으로 장제스에게 붙어
⊙ 장제스, 당초 친공적 입장이었으나 우한정부와 대립하면서 ‘반공’으로 전향
⊙ 국민당 좌파 왕징웨이, 군권 장악한 장제스에게 굴복
⊙ 마오쩌둥, 후난성 농민운동 이끌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 “혁명은 폭동이다”

송재윤
1969년생. 고려대 철학과 졸업,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 중국사 전공 박사 /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 저서 《슬픈 중국》 3부작, 《Traces of Grand Peace: Classics and State Activism in Imperial China》 등
1928년 7월 6일 국민혁명군 총사령들이 베이징 서산(西山) 벽운사(碧雲寺)에 집결하여 제령(祭靈) 대전(大典)을 거행했다. 맨 앞줄 왼쪽부터 옌시산(閻錫山), 펑위샹(馮玉祥), 장제스, 리쭝런(李宗仁), 루중린(鹿鐘麟).
‘밴드왜건 올라타기’

  1926년 7월 9일 중국의 최남단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에서 북벌(北伐)의 기치를 내걸고 출병한 장제스(蔣介石)는 불과 9개월 만에 난징(南京)과 상하이(上海)까지 점령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역사적으로 전례(前例)를 찾기 힘든 군사적 대성공이었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장제스라는 걸출한 전략가의 용병술이었을까? 황푸군관학교에서 배출한 정예부대의 전투력이었을까? 쑨원(孫文)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계승한 국민정부의 이념적 정통성이었을까? 소련의 군사 지원과 코민테른의 자문이었을까? 국공합작(國共合作)의 시너지 효과였을까? 반외세 구국 투쟁에 나섰던 청년 세대의 애국심과 소명(召命)의식이었을까? 이성(理性)의 간지(奸智)였을까? 천명(天命)이었을까?
 
  이 모든 요인을 다 따져봐도 북벌의 대성공이 충분히 설명되진 않는다. 중국이란 거대한 대륙 국가가 2000년 넘게 통일 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정치공학적 원리가 하나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원리란 바로 관망하던 약체(弱體)들이 질주하는 최강자의 등에 올라타게 되는 ‘밴드왜건(bandwagon) 효과’를 이른다. 인간 사회 어느 방면에서든 권력투쟁이 벌어질 때면 군중은 섣불리 어느 일방을 지지하기보단 중립지대서 슬그머니 눈치만 살피다가 싸움의 판세가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가 오면 재빨리 그쪽으로 확 쏠리는 경향을 보인다. 국제 관계, 국내 정치, 부족 전쟁은 물론, 동네 싸움에서도 시류에 편승해 강자의 편에 줄을 서야 안 다치고 살아남을 수 있다. 바로 ‘밴드왜건 올라타기’다. 줏대 없이 흔들리고 얍삽하게 끼어드는 비겁한 행동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험난한 세파에 시달리는 개개인으로선 경험칙에 따른 합리적 생존 전략이다. 이 세상 어느 바보가 자기보다 센 적과 맞붙어 싸우고, 자기보다 약한 자의 밑에 들어가겠는가?
 
 
  ‘목숨을 건 도박’
 
  명(明)나라 소설 《수호전(水滸傳)》이 주는 교훈도 다르지 않다. 탐관오리에 반기를 든 양산박(梁山泊)의 백팔호걸(百八豪傑)이 송강(宋江)을 따라 결국 관군에 귀순하고, 어명을 받들어 방랍(方臘)의 반란군을 결국 토벌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다수는 전사(戰死)하거나 병사(病死)하거나 정치적 모함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양산박 백팔호걸이나 방랍의 반란군이나 처음엔 모두 불법적 ‘지방무력(地方武力·regional forces)’이었다. 다만 송강은 북송(北宋) 관군이 여전히 최강 세력이라 믿고서 투항했고, 방랍은 왕조 말기의 조짐을 읽고 반란을 이어갔다.
 
  정사에 기록된 방랍의 난(1120~ 1121년)은 북송이 여진족의 금(金)나라에 정복당해 패망하기 6년 전에 진압됐다. 만약 방랍의 반란이 여진족의 침략과 같은 시기에 터져서 북송의 멸망과 맞물렸다면, 송강과 방랍의 대결 구도는 충의(忠義)와 보국(輔國)의 역사 소설로는 성립될 수 없다. 만약 그랬더라면 양산박의 호걸들은 망한 정권에 빌붙은 반역 집단으로 평가되고, 방랍의 반란군은 부패 정권을 종식한 혁명 집단으로 기억됐으리라. 결국 역사의 대세를 전혀 다르게 읽었기에 송강은 관군에 귀순하고, 방랍은 반군(反軍)을 이끌고 저항하는 엇갈린 선택으로 나아갔던 것.
 
  1920년대 중국 전역에 독버섯처럼 무성하게 자라난 수많은 군벌(軍閥) 세력은 모두가 저마다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전국이 산산이 쪼개진 상황에서 할거(割據)하는 군벌로선 스스로 무리한 전쟁을 벌여 세를 확장하기보단, 미래의 최강자를 정확하게 알아보고 적절한 시의(時宜)에 유리한 조건으로 군사를 이끌고 투항하는 길이 가장 현명한 전략이었다. 최강자의 등에 잘 올라타면 송강의 반열에 오를 수 있지만, 혹시라도 최강자라 믿었던 인물이 무력한 패장으로 전락하게 되면 쫓기는 방랍의 신세를 모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복잡한 인간세(人間世)에서 과연 누가 최강자인지 판단하기가 지난(至難)하다는 점이다. 당시 중국은 여러 지역 무장 세력 간의 어지러운 합종연횡(合從連橫)이 예측불허로 전개되는 군벌 시대였다. 불의(不意)의 정변, 불시(不時)의 암살, 은밀히 진행되는 모반과 무시로 터지는 반란…. 말 그대로 반역의 시대이며 배신의 계절이었다. 이렇게 위태로운 현실에서 ‘밴드왜건 올라타기’란 목숨 건 도박이나 다를 바 없었다.
 
 
‘들어앉아 맞버티기’

 
1924년 말 우페이푸를 물리치고 베이징을 점령한 만주 군벌 장쭤린.
1924년 가을쯤만 해도 최강자라 여겨졌던 직계(直系) 군벌 우페이푸(吳佩孚·1874~1939년)는 제2차 직봉 전쟁에서 결정적 순간 가장 신뢰했던 기독교도 군벌 펑위샹(馮玉祥·1882~1948년)의 변심으로 주력군이 톈진서 아슬아슬하게 군함을 타고서 남방으로 탈주했다.
 
  베이징(北京)의 중앙무대에서 쫓겨난 우페이푸는 후난성(湖南省) 일대를 정복하고 재기를 노렸으나 이미 그가 끌던 밴드왜건에 올라탔던 군벌은 하나둘씩 뛰어내려 흩어진 후였다. 베이징을 거점으로 만주를 압박하며 천하 통일의 유망주로 떠올랐던 우페이푸의 갑작스러운 몰락으로 1925년 이후 중국의 정치·군사적 상황은 다자(多者)가 난립하는 혼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군벌을 꼽자면, 만주의 ‘대수(大帥)’ 군벌 장쭤린(張作霖·1875~1928년), 산시(陝西)·허난(河南)의 기독교도 군벌 펑위샹, 산시(山西)의 맹주 군벌 옌시산(閻錫山·1883~1960년), 산둥(山東)의 ‘개고기’ 군벌 장쭝창(張宗昌·1881~1932년), 장쑤(江蘇)·저장(浙江)을 거점으로 푸젠(福建)·장시(江西)·안후이(安徽) 지역까지 영향을 떨쳤던 쑨촨팡(孫傳芳·1885~1935년)을 들 수 있다. 우페이푸는 잔병을 수습하여 다시 후난, 후베이, 장시 일대를 장악했으나 그 지역의 토착 군벌은 이탈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장쭝창과 쑨촨팡은 장쭤린과 직결된 봉계(奉系) 군벌이었기에 1925년 당시 정세를 보면 장쭤린, 펑위샹, 옌시산, 우페이푸 등 4대 군벌이 부상(浮上)해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때 쑨원의 유지를 잇는 국민당 집단은 광저우에 중화민국을 재건한 후 북벌의 구호를 내걸고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으며 군사력을 강화해 가고 있었다.
 
 
  세력 균형
 
  이처럼 다자 혼전의 상황이 펼쳐졌기에 중국 각 지역의 군소 군벌은 섣불리 한 군벌에 투항하는 모험을 하기보다는 거리를 유지한 채 지역 기반을 굳히는 관망세로 돌아섰다. 최강자의 밴드왜건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으므로 전국의 군소 군벌은 현상 유지를 최선책으로 삼아 ‘들어앉아 맞버티기’를 연출했다.
 
  군벌 시기 중국에서 불안한 세력 균형의 상태가 지속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렵잖게 설명된다. 제아무리 강성한 군벌일지라도 지리·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낯선 지역에서 정복 전쟁을 펼치기란 쉽지 않았다. 산세가 험한 후난, 장시, 푸젠 등지에선 더더욱 몇 배나 강력한 군대를 투입해도 현지의 소수 병력을 제압하기 어려웠다.
 

  앞으로 차차 살펴보겠지만, 장제스가 중공의 장시 소비에트를 토벌하기 위해 1930년에서 1934년까지 5차례의 대규모 위초전(圍剿戰)을 펼쳤음에도 결국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독일인 군사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토치카를 세우면서 체계적으로 포위망을 좁혀갔던 장제스의 국군(國軍)이었지만,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험준한 산악 지형을 오르내리며 기민한 게릴라 전술을 펼치는 홍군(紅軍)을 토벌할 순 없었다. 특히 제5차 위초전(1933~1934년)에서 장제스는 무려 50만~70만 병력을 동원하여 기껏해야 10만 병력의 홍군을 압박하며 빈틈없이 포위망을 좁혀갔음에도 끝내 그들을 박멸할 순 없었다.
 
  중국 같은 광활한 대륙에선 군사력의 우위만으로는 천하 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가 없다. 누구든 천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선 들어앉아 맞버티는 지방 무력을 잘 설득하고 유인해서 밴드왜건에 태우고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 정치적 명분과 이념적 정당성, 투항자에 대한 정치적 보상과 반대급부 제공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지방 무력은 대세를 이끄는 강자의 밴드왜건에 흔쾌히 올라탈 수 있다.
 
 
지장(智將)은 싸우지 않고 이긴다

  장제스가 북벌을 개시하고 불과 2년 반 만에 중화 문명의 중심 무대인 동북(東北), 화북(華北), 화동(華東), 중남(中南) 지역 등을 아우르는 실질적인 천하 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강력한 군사력이나 이념적 정통성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이보단 오히려 군사적 충돌 없이 강성한 군벌 정권을 통째로 국민정부로 흡수할 수 있었던 그의 흡입력을 보아야 한다. 장제스란 인물의 정치적 설득력, 실무적 협상력, 인간적 카리스마를 빼고선 북벌의 대성공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는 뜻.
 
  북벌 개시 이전부터 광시(廣西) 군벌 리쭝런(李宗仁·1890~1969년), 바이충시(白崇禧·1893~1966년), 구이저우(貴州) 군벌 허잉친(何應欽·1890~1987년) 등은 이미 국민당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는 국민혁명군(이하 혁명군)에 들어가서 자신들의 군사를 그대로 지휘했다. 북벌 발발 직후 후난 군벌 탕성즈(唐生智·1889~1970년)와 청첸(程潛·1882~1968년)도 국민정부에 투항하여 이후 북벌의 주요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물론 이들이 국민정부에 동참한 이유를 장제스 일개인의 공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군사를 거느린 무장의 투항은 전혀 다른 새로운 명령 계통을 수용하겠다는 결심이다. 쉽게 말해, 자기 휘하 병력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유지한 채로 총사령관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전투를 수행하겠다는 자발적인 복종 의사의 표명이었다. 탕성즈와 청첸의 경우, 우페이푸라는 저무는 태양 대신 장제스라는 떠오르는 태양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반공이냐, 용공이냐’
 
  이렇게 여러 군벌의 자발적 투항이 있었기에 장제스는 1926년 7월 드디어 광저우에서 북벌을 개시할 수 있었다. 군벌이 발호(跋扈)하는 세상에서 천하 통일의 대망을 실현하려면 적대 세력을 아군으로 포섭하는 덧셈 전략이 필요했다. 과연 누가 어떻게 수백 가지 이몽(異夢)을 꾸고 있는 수백 개 무장 집단을 동시에 끌어당기는 마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모두를 끌어안으려 하면 결국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전쟁이든 정치든 인간세의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때론 적과 동지를 양분하는 극단적 조치가 필요하다. 무턱대고 동지의 개념을 협소하게 정의하면 고립을 자초할 뿐이다. 그렇다고 동지의 외연(外延)을 한정 없이 넓히면 분열과 혼란을 막을 수 없다.
 
  1927년 4월 난징과 상하이를 장악한 장제스는 적과 동지를 가르는 칼날 같은 기준으로 “용공(容共)이냐, 반공(反共)이냐?”를 빼어 들었다. 그는 용공은 정략적 노선일 뿐 정치적 원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련의 지원과 코민테른의 자문이 필요했던 1924년 상황에선 용공이 요구됐었지만, 공산당원이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1927년 상황에선 반공이 시급했다. 용공에서 반공으로 혁명 노선이 바뀐다 해도 민족·민권·민생을 원칙으로 삼는 국민당의 삼민주의는 한 치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에 관한 장제스의 생각은 1920년대 몇 년 사이 큰 변화를 거쳐갔다. 장제스의 일기를 보면, 1922년 당시 그는 러시아어를 공부하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을 탐독했다. 1923년 8월 쑨원의 당부로 3개월간 소련을 방문한 장제스는 사회주의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공산 사회를 살필 기회가 있었다. 1957년 뉴욕에서 출간된 회고록 《중국 속의 소련(Soviet Russia in China)》에서 장제스는 소련 방문 이후로 자신이 공산주의의 미몽에서 깨어났다고 자술했지만, 북벌 개시 직전까지도 그의 언행은 상당한 좌편향을 보이고 있었다.
 
 
  한때 소련보다 영국을 더 증오
 
1927년 우한에서 연설하는 보로딘(왼쪽).

  그의 적개심은 제국주의 영국을 향해 있었다. 1925년 5월 30일 상하이의 영국 경찰이 중국 시위대에 발포하여 1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후 장제스는 1년 넘게 날마다 “음번(陰番·영국의 멸칭)”을 향한 규탄과 증오의 언사로 일기를 시작했다.
 
  영국에 대한 그의 증오는 소련에 대한 동경으로 이해될 수 있다. 나아가 영국이 대표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반감과 소련이 대표하는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호감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영미권 사회에서 교육받으며 자유민주주의와 개인주의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쑨원을 위시한 대표적 국민당 영수들과는 달리 일본에서 한 3년 군사 훈련을 이수했던 장제스는 정치 철학적 기반이 허약했다. 구태여 1925~1926년 당시 장제스의 정치 사상을 논하자면, 중화 민족주의와 애국적 사명감 정도밖에는 없었다. 가령 1927년 1월 20일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국치(國恥)를 설복할 수도 없는데 내 어찌 나라를 욕되게 하랴. 오늘 같은 상황에선 한 목숨 바쳐 국난(國難)에 순국(殉國)하리라. 중화민족을 위하여 인격을 닦고, 삼민주의를 위하여 정신을 붙잡고, 전국 동포를 일으켜 위망(危亡)에서 구해내리라! 피압박 민족을 해방시킨 소련의 사상 역시 틀리지 않았음을 신뢰하지만, 중국에 온 보로딘(Mikhail Borodin·1894~1951년) 같은 자의 최근 행동을 보면 우리 중국인의 인격을 모독할뿐더러 몇 배나 더 억압적이며 그들의 (공산주의) 사상에도 전면 배치된다. 중국인들이 지각이 있다면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 소련 동지들이 진정 약소 민족을 해방하려 한다면, 제3 코민테른이 신용 파탄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들의 그릇된 방법을 당장 개정하여 제국 자본주의의 길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세계 혁명이 이뤄지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그게 아니라면 이 한 몸 죽는다고 해도 나라를 구하기에 부족할뿐더러 죽어 지하에 있는 동지를 볼 면목조차 없으리라. 간절히 바라건대 전국 동포들이 속히 일어나 독립과 자주를 도모하고, 쑨원 총리께서 혁명에 바치신 30년의 고심(古心)을 부디 저버리지 말기를!”
 
  이 당시 장제스는 보로딘 등 코민테른 요원의 고압적 태도에 치를 떨었지만,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과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호감을 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장제스는 그러나 불과 석 달도 못 지난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대숙청을 감행하여 공산 세력과 결별했다. 반년쯤 지나 장제스는 쑹메이링(宋美齡)과의 결혼을 달포 정도 앞두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그는 분명 더욱 완강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1930년대 그의 일기를 보면, 기독교를 “제국주의 침략 수단”이라 비하하는 공산주의자들을 개탄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비판하는 구절이 여럿 보인다. 가령 1931년 4월 16일 그는 일기에 “기독교 박애주의는 사랑에서 나왔지만, 마르크스교 공산주의는 모두 악(惡)과 노(怒)의 산물”이라 적었다. 이 시기는 장제스가 이미 공비(共匪) 토벌에 전념하고 있던 때였다.
 
  장제스가 반공투사로 거듭난 이유를 설명하려면, 1927년 봄 그가 겪은 사상적 돌변에 주목해야 한다. 그해 1월까지도 소련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던 장제스는 왜 갑자기 석 달 만에 반공의 깃발을 들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1927년 4월 장제스가 맹렬한 반공 노선을 취하게 된 근본 이유는 종교적·사상적 대오각성이 아니라 정치적·군사적 손익계산이었다.
 
 
  장제스, 자신을 악비에 비유
 
  그 당시 일기를 보면, 장제스가 면밀하게 주판알을 튕기며 반공의 정치공학적 득실을 따지고 또 따졌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그는 1927년 3월 초 무렵 이미 우한(武漢)의 국민정부와 갈라설 결심을 굳힌 듯하다. 천하 통일의 포부를 가진 전장(戰場)의 무장이라면 당연히 민간 정부의 꼭두각시 노릇을 달갑게 여길 리 없었다. 다만 쑨원의 계통을 잇는 국민정부에 맞서려면 그에 준하는 거대 명분이 필요했다. 장제스는 그 명분을 중국공산당과 코민테른의 배신에서 찾았다. 그가 보기에 코민테른의 지시 아래서 중국공산당과 공조를 펼치는 우한의 국민정부는 이미 모스크바 혁명 사령부의 지부나 다를 바 없었다. 1927년 3월 6일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전선에서 장병들이 추위와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데, 우한의 CP(공산당)와 본당(국민당)의 배신자들은 요언(謠言)을 퍼뜨려 민중을 현혹하고 있다. 그들의 파괴 행위와 음해 공작은 무소부지다. 그들은 현재 우리가 진행 중인 동남부 정벌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국민혁명이 실패하길 바랄 뿐이다. 그들의 목적은 당을 파괴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데에 있다. 지금 나의 처지는 문천상(文天祥·1236~1283년), 악비(岳飛·1103~1142년), 사가법(史可法·1602~1645년) 등이 처했던 암울한 지경과 같다. 예부터 지금까지 현명하고 호걸다운 인물들이 간신 모리배의 손에 당하는 양태가 마치 틀에서 찍어낸 듯하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이미 우한 국민정부와 갈라서기로 결심한 장제스로선 공산당원 비판보다 더 효과적인 명분은 없었다. 장제스는 소련의 군사 지원을 무기로 우한 국민정부를 압박하는 코민테른 요원 보로딘에 대해 개인적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소련과의 관계 악화가 큰 부담일 수 있지만, 코민테른 요원의 고압적 행태를 비판함으로써 직접적 대결은 피해 갈 수 있었다. 스탈린(1878~1953년)의 전략적 착오가 아니라 보로딘의 실무적 잘못이라는 정도에서 봉합할 수 있을 듯했다.
 
  국공합작 초기에는 소련의 지원과 코민테른의 자문이 절실했었으나, 이미 북벌이 절반 이상 성공하여 북방 군벌과의 협상만이 남은 상황에서 더는 소련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요컨대 반공의 깃발을 들면 소련의 지원이 끊기는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우한 국민정부를 제치고 스스로 권좌에 오르기 위해선 충분히 감당할 정도의 타격이었다.
 
 
반공이 천하 통일의 최고 전략?

  장제스가 반공의 기치를 들면 제일 먼저 모여들 세력이 바로 상하이 자본가들이었다. 1920년대 중국에서 가장 발달한 상하이에는 대규모 산업기지, 상업지대, 금융가가 형성돼 있었다. 이미 거부를 획득한 상하이 자본가들은 상하이 총상회, 상하이 은행동업공회, 상하이 각로상계총연합회 등의 이익단체를 결성하고 계급적 권익 보호를 위해 맹활약했다.
 
  이들은 공산당원의 지휘 아래 갈수록 조직화하는 상하이 노동운동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특히 1926년 가을부터 1927년 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상하이 총공회가 주도하여 일어난 대규모 무장봉기에 경악했다. 당장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생하여 자산을 몰수할 수도 있을 듯한 분위기였다.
 
  이에 상하이 자본가들은 아직 상하이에 입성하지 않은 장제스를 먼저 찾아가서 강력한 반공·반노조 노선을 취해달라 요구하며 대가로 군자금을 제공했다. 상하이뿐만이 아니었다. 우한, 광저우, 항저우(杭州) 등등 공장단지가 형성되고 있던 개항장에선 노동운동에 투입된 공산당원들의 활동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북벌의 과정에서 군자금 압박에 시달려온 장제스는 부르주아지와의 계급적 연대(連帶)가 주는 경제적 이득을 포기할 수 없었다.
 
 
  확산되는 반공 정서
 
  둘째로 그의 반공 노선을 지지할 세력은 북방의 군벌 세력이었다. 장제스는 특히 산시의 옌시산과 만주의 장쭤린을 염두에 뒀다.
 
  장쭤린은 일제가 건설한 남만주 철도를 통해 석탄, 철광석, 대두를 실어 나르며 엄청난 이득을 취해온 만주의 군벌이었다. 급속한 경제 개발의 수혜자였던 그로선 태업, 파업 등 단체 행동을 주도하는 공산당의 활동이 탐탁할 리 없었다. 실제로 그는 만주에서 공산당의 활동과 노동운동을 억압하고 있었다. 반공의 기치 아래라면 장제스와 장쭤린이 유혈 사태를 피하면서 대통합을 이루는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좌익 성향이 농후했던 기독교 군벌 펑위샹은 이미 우한의 국민정부를 지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반공 노선을 절대 용인하지 못할 친공산주의 분자는 아니었다. 또한 우한 국민정부를 지지하는 탕성즈 등의 군벌 세력 역시도 반공에 반대할 만큼 공산 세력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셋째로 그가 든 반공 기치를 환영할 세력은 우한 국민정부의 지휘를 받는 장성들이었다. 일단 그들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군사작전을 펼쳐왔지만, 장제스가 난징에 정부를 세운 이후부턴 언제든 수틀리면 명령 계통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후난과 후베이(湖北) 지역의 장성들은 노동자·농민을 선동하는 공산당원의 조직 활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북벌의 성공으로 군벌 통치가 무너진 상황에서 이 정치적 공백을 틈타 노동자·농민의 과격한 투쟁이 전 중국으로 확장되는 분위기였다. 농촌 현실에선 대지주는 물론 땅 몇 마지기 갖고 있는 농부들조차 농지 몰수와 재분배를 자행하는 과격한 농촌 조직들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제스는 분명히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반공 정서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왕징웨이의 귀국
 
1927년 봄 무렵 우한 국민정부의 영수들. 오른쪽부터 천유런(陳友仁), 쑹쯔원(宋子文), 왕징웨이, 보로딘.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 손익계산을 마친 장제스는 반공 투쟁의 개시가 막대한 정치적 이득을 가져올 ‘신(神)의 한 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장제스가 딱히 1927년 4월 12일을 디-데이로 정한 데에는 중요한 또 하나의 변수가 작용했다. 바로 이틀 전인 4월 10일은 1년여 해외를 떠돌던 국민당 좌파의 영수 왕징웨이(汪精衛·1883~1944년)가 귀국한 지 열흘 지나 마침내 우한에 도착한 날이었다. 중국공산당 역사가들은 왕징웨이가 4월 1일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장제스와 만나 이미 분공(分共, 공산당과의 분리)을 모의했으며, 4월 5일 왕징웨이가 중공 총서기 천두슈(陳獨秀·1879~1942년)와 발표한 공동선언문은 위장 전술이었다고 단정한다. 향후 전개되는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극한 대립을 보면 그런 주장은 사후적으로 꿰어맞춘 혐의가 짙다. 4월 10일 왕징웨이는 국민당원과 코민테른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우한 국민정부의 영수로 다시 옹립되었고, 불과 이틀 뒤 장제스는 상하이 대숙청을 감행했으며, 격분한 왕징웨이는 곧이어 장제스의 파면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국공지〉 제1회에서 이미 살펴봤지만, 1926년 3월 20일 장제스는 중산함(中山艦) 사건을 일으켜 광저우 지역에 계엄령을 내리고 공산당원들을 줄줄이 체포하는 정치적 스턴트를 감행했다. 바로 이 사건 직후 왕징웨이는 도망치듯 중국을 떠나 유럽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는 주로 파리에 체류하면서 국민당과 코민테른의 관계를 공고화하는 대외 선전과 외교 활동에 몰두했다. 비록 몸은 외국에 있었지만, 코민테른과의 유대(紐帶)를 통해 그는 우한 국민정부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정적(政敵) 관계의 왕징웨이가 꽃길을 밟으며 우한 국민정부의 영수로 옹립되는 장면은 장제스를 충분히 격동시킬 만했다. 결국 권좌 복귀 이틀 만에 왕징웨이는 상하이에서 장제스가 청당(淸黨)의 명분을 내걸고 공산당원을 숙청했다는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코민테른과의 긴밀한 협력 위에서 국공합작의 수위를 제고(提高)하려 했던 왕징웨이로선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당장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장제스를 모든 직위에서 파면하는 비상조치를 취했다. 우한정부의 긴급 조치에 코웃음이라도 치듯 장제스는 난징에서 또 하나의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그만큼 장제스는 여유만만했다.
 
  스스로 천하 통일의 최강자가 되었음을 느꼈던 것일까? 만약 그러했다면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불과 석 달 후 우한 국민정부 역시 국공합작 노선을 폐기하고 공산당원을 축출하는 청당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난징의 장제스가 발휘하는 강력한 흡입력에 우한정부를 지탱해 온 군부의 장성이 하나둘씩 빨려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북방의 군벌도 공식적으로 난징정부를 승인했기 때문이었다.
 
 
반공의 깃발 아래 모이는 군벌

  거듭 말하지만, 1927년 4월 18일 장제스는 난징에서 새로운 국민정부를 공식 출범시켰다. 이로써 중국에는 베이징 북양(北洋)정부, 우한의 국민정부와 더불어 모두 3개의 중화민국이 들어섰다. 여러 군벌 집단이 난립하던 상황이 3파전으로 바뀐 것이다. 이 세 정부 중에서 과연 어느 중화민국을 선택할 것인가? 전국 각지에 분산된 무장 집단은 살아남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1927년 중엽 북벌 전쟁에 참가 중이던 혁명군의 35~40개 군단 150~200개 사단의 지휘관들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우페이푸나 장쭤린은 여전히 베이징 북양정부를 공식적인 중화민국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 점에선 장쭤린과 직결된 산둥 군벌 장쭝창이나 상하이에서 막 밀려난 쑨촨팡도 마찬가지였다. 북벌은 본질적으로 국민정부의 중화민국과 북양정부의 중화민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하는 사건이었다. 역시 관건은 국민정부 내부의 분열을 과연 어떻게 수습하느냐였다.
 
 
  장제스 vs 왕징웨이
 
1927년 여름 장제스와 왕징웨이.

  북양 정권을 불법적 군벌 체제라 규정한 점에선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는 공동 목적을 지향했다.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대숙청 이후론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장제스가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면서 적과 동지의 판별 기준이 순식간에 달라졌기 때문이다. 갈라진 국민당 정부 앞에는 세 갈래 길이 펼쳐졌다. 1) 우한정부가 군권(軍權)을 장악해 중화민국의 공식 정부로 다시 일어서는 길 2) 장제스의 난징정부가 우한정부를 흡수해 정통 중화민국을 재건하는 길 3) 난징정부와 우한정부가 군사 대결로 최종 승부를 가리는 길이었다.
 
  이 세 갈래 길 중에서 마지막 길은 누구에게나 뻔히 보이는 공도동망(共倒同亡)의 나락이었다. 내전(內戰)을 무릅쓰고 이 험로를 갈 자는 어차피 거의 없었다. 반면 첫째 길은 국민당 좌파 인사들과 공산당원이 간절히 원하는 바였으나 장제스의 군권이 더욱 커진 당시 상황에선 이미 실현될 가능성이 지극히 낮았다. 목숨 걸고 전쟁을 치르는 군인의 관점에서 보면, 장제스의 편에 서는 두 번째 길이야말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천하 통일의 탄탄대로였다. 왕징웨이는 군벌 출신 장성들에게 실무적 군사 지휘를 위임한 민간인 정치가였지만, 장제스는 직접 대군을 통솔해 전장을 누비는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의 군권이 날로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대숙청부터 석 달에 걸쳐 우한의 좌파 국민정부는 반장제스의 깃발을 들고서 어떻게든 국공합작을 이어가려 했다. 귀국한 지 이틀 만에 장제스의 ‘쿠데타’를 겪으면서 군사적 열세를 절감한 왕징웨이는 5~6월에 걸쳐 군사적 출로를 모색했다. 그는 휘하 병력을 서북부로 올려보내 기독교도 군벌 펑위샹과 공동 전선을 펼치고자 했다. 펑위샹의 국민군(國民軍)과 연합해야만 장제스에 맞설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펑위샹
 
1928년 제2차 북벌 당시 장제스(좌측)와 펑위샹(우측).

  펑위샹은 북벌 개시 2개월쯤 지난 1926년 9월 17일 우위안(五原·현 네이멍구 바옌나오얼)에서 (우한) 국민정부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대략 20만, 많게 치면 30만 국민군(일명 서북군)을 거느린 펑위샹의 공식적인 지지 서약은 국민정부에 있어 천군만마를 얻는 호재였다. 펑위샹은 죽음을 석 달 앞둔 쑨원을 베이징으로 초빙하여 향후 국정을 논했을 만큼 친국민당 성향을 보였던 인물이었으나 우위안 선언 이후 실제로 그가 혁명군과 연합작전을 펼치기까지는 1년 반이 넘는 물밑 협상과 좌고우면이 필요했다.
 
  왕징웨이의 바람과는 달리 실제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산시와 간쑤를 지배하는 펑위샹이 같은 해 5월 초부터 허난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에 위협을 느낀 만주 군벌 장쭤린은 안국군(安國君)을 허난으로 파병했다. 안국군은 그가 북벌군을 막기 위해 1927년 봄부터 급히 조직한 여러 계통의 통합 부대였다.
 
  펑위샹과 장쭤린의 숙명적 대결은 향후 5~6개월 장기전으로 전개됐다. 펑위샹과 연합하여 장제스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려 했던 왕징웨이의 전술은 시작부터 어긋나 버린 셈이었다. 무엇보다 애초 우한 국민정부에 대해 지지를 서약했던 펑위샹 또한 무섭게 치고 오르는 장제스의 막강한 군사력을 직시하면서 변심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살펴보겠지만, 펑위샹은 1927년 6월 중순 우한 국민정부를 버리고 난징 국민정부를 승인했다. 이듬해 그는 장제스와 함께 제2차 북벌에 참전했다.
 
 
  문관과 무관의 싸움
 
  북방으로의 출로가 막힌 우한정부는 후베이와 후난의 병권조차 온전히 지킬 수 없었다. 상하이 대숙청 직후 우한정부는 장제스를 북벌군 총사령직에서 파면하는 극한 조치를 결의했다. 하지만 정작 우한정부를 떠받치는 군사 지휘관들은 슬금슬금 장제스 편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점점 더 궁지로 몰려가는 왕징웨이가 비빌 언덕이라곤 코민테른의 지원과 국공합작의 미명밖엔 없었다.
 
  바로 이때 장제스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 일격은 국공합작을 파기하고 코민테른과 결별하는 불가역(不可逆)의 신호탄이었다. 장제스가 반공의 깃발을 높이 드는 순간 이미 우한정부의 예하 군관들 사이에서 적잖은 호응이 있었다. 군부가 이미 급부상한 최강자를 따라 발 빠르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어중간한 용공 이데올로기를 붙들고 허울 좋은 국민정부를 이끄는 우한의 왕징웨이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점에서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대결은 본질적으로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의 싸움이었다. 문관이 무관을 지휘하고 무관이 문관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는 사례는 군의 정치 참여가 엄격하게 금지된 선진화된 입헌 민주주의 국가에서나 관찰되는 현상이다. 군사를 움직여 땅을 따먹는 군벌 시대에 그 어떤 문관이 펜의 힘으로 칼의 논리를 꺾을 수 있겠는가? 난세(亂世)를 움직이는 파워 게임에 익숙한 군인들로선 막강한 장제스를 배척하고 허약한 왕징웨이를 보위(保衛)할 까닭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장제스가 높이 든 반공의 깃발은 이미 과격한 노동운동과 농민 투쟁에 신물 나 있던 군부의 우경(右傾) 세력에게 우한정부를 버릴 수 있는 큰 명분을 제공했다. 천하대세는 이미 용공에서 반공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후베이와 후난의 민중운동

  북벌 개시 이래 우한과 후난의 성도 창사(長沙)에서 과격한 노조 활동과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노동쟁의를 엄격히 금지한 군벌 정권 치하에서 지하에 숨어 있던 노동자들은 1926년 9월 북벌군이 우한의 한양과 한커우를 점령하기 무섭게 총파업을 개시했다. 아울러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우한 총공회의 지원하에 노조에 가입하면서 노동운동은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우한 점령 1개월 안에 30회 이상 노조의 파업 투쟁이 벌어졌다. 노동자의 전투적 조직화에 공산당원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공산당원들은 우한에서 급성장한 노동조합원들의 전투적 투쟁에 고무되어 프롤레타리아 봉기를 모의하는 조급성을 보였다. 오히려 스탈린의 지시를 받는 코민테른 요원들이 공산당원의 섣부른 사회주의 혁명 운동을 견제하는 어색한 장면도 연출됐다.
 
  급기야 1927년 봄 우한에선 소위 ‘우한정부의 공산주의 시대’가 펼쳐졌다. 중국공산당 역사가들은 노동쟁의가 군벌 세력의 축출을 크게 도왔다고 기술하지만, 실제로 우한정부는 극심한 재정적 위기에 처했다. 연이은 파업의 효과로 임금과 물가가 치솟고 생필품 조달은 지체되었고, 도시의 산업과 상업이 저조해지자 우한정부의 세수(稅收) 역시 급감했다. 개항장 외국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과 과격한 파업으로 정부의 관세 수입도 대폭 줄어들었다.
 
 
  마오쩌둥의 등장
 
 
1927년 무렵의 마오쩌둥.
1926년 겨울에서 1927년 봄까지 후난 지역에서도 대규모 농민 투쟁이 펼쳐졌다. 수십만, 많게는 수백만 명의 지역민이 농민협회에 가입했다. 농민협회를 조직한 단체는 물론 중국공산당이었고, 이때 현장에서 활약했던 대표적 인물은 다름 아닌 마오쩌둥(毛澤東)이었다. 농민협회는 지주, 부농, 신사(紳士) 등 지방 엘리트를 공격하여 토지와 양식을 몰수해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정치집회를 열어 적대 세력을 단상에 세워놓고 조리돌림을 하고, 사당(祠堂)과 분묘(墳墓) 등을 훼손하는 원초적 계급 투쟁을 전개했다. 후난 농민 투쟁을 연출하고 지휘하며 세밀하게 관찰했던 마오쩌둥은 중국 농민의 계급적 혁명성을 칭송하며 감탄했다.
 
  1927년 3월 발표된 〈후난 농민운동 고찰 보고〉에서 마오쩌둥은 자신의 고향 후난성 샹탄(湘潭)을 포함한 다섯 현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조직화, 지주 타격, 반봉건 투쟁, 군사적 무장, 정치 선전, 문화운동 등등 농민 투쟁의 ‘14건 대사(大事)’를 조목조목 나열하고 분석했다. 서른네 살의 마오쩌둥이 이 보고서에서 규정한 혁명의 정의는 지금도 널리 인용되는 명언으로 꼽힌다. 농민의 무장 투쟁을 논하면서 그는 적었다.
 
  “혁명은 폭동이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넘어뜨리는 폭력적이고 맹렬한 행동이다.”
 
  1926~1927년 마오쩌둥의 혁명 활동에 관해선 앞으로 1927년 중국공산당의 무장봉기를 조명할 때 상세히 다뤄보자.
 
 
반공 깃발 아래로 모여드는 군인들

 
  물리적 작용엔 반작용이 따른다. 정치적 운동엔 반동(反動)이 뒤따른다. 후난에서 농민들의 조직적 폭력 투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자 혁명군 내부의 우파 세력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중공 중앙은 이를 혁명군의 북벌 전쟁을 지원하는 민중의 자발적 기의(起義)라 칭송했지만, 계급 갈등이 빚어진 만큼 직간접적 피해를 입은 군인들도 적지 않았다. 농민 조직의 배후에 중공 중앙이 개입했음을 꿰뚫어 본 혁명군 내부의 우파 군인들은 분노를 삭이며 보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때마침 상하이에서 장제스가 대숙청을 일으키며 반공 정국을 주도했다. 상하이에서 일어난 반공의 폭풍은 곧 인근 지역을 강타했다. 과격한 노동자·농민운동에 불만을 품고 있던 우한 국민정부 예하 장성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후난성 장사 혁명군 제35군 33사단장 쉬커샹(許克祥·1890~1964년)이 첫 포성을 울렸다. 그는 1927년 5월 21일 공산당원과 노조원들을 구속하여 백여 명을 즉결 처형하면서 공개적으로 장제스 반공 노선을 지지하고 나섰다. 말(午)의 날에 발생하여 마일사변(馬日事變)이라 불리는 이 대규모 숙청은 우한 국민정부 예하의 혁명군 부대가 공식적으로 지휘 계통에서 이탈한 최초의 사태였다. 이를 계기로 후난의 농민운동은 위축됐고 공산당원들은 공개적 활동을 멈추고 일단 지하로 숨어들었다.
 
 
  옌시산, ‘토공대동맹’ 주장
 
북벌 과정에서 장제스(중앙)에게 투항하여 연합 전선을 펼친 북방 양대 군벌 펑위샹(좌측)과 옌시산(우측).

  이렇게 군부의 지지 기반을 잃은 우한 국민정부는 정치적 내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당내에서도 장제스의 청당 작업에 보조를 맞춰 국공합작을 결렬시키고 공산당원을 축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왕징웨이가 점점 더 궁지로 몰리고 있을 때, 북방 군벌은 장제스를 향해 올리브 가지를 들어 보였다. 1년 넘게 북벌 과정을 관망하던 산시의 맹주(盟主) 옌시산이 가장 먼저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의 정통성을 승인했다. 무엇보다 그는 장제스가 꽂은 반공의 깃발에 적극적 찬성과 지지를 표명했다. 1927년 6월 초 그는 난징정부를 중심으로 각 지방이 연대하여 ‘토공(討共·공산당 토벌)대동맹’을 결성하자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옌시산은 군웅할거의 분열기가 저물고 난징의 장제스가 주도하는 ‘통일 천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내다봤다. 그는 만주의 장쉐량(張學良·1901~2001년)과 한린춘(韓麟春·1885~1930년) 등에게도 전보를 쳐서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를 인정하고 장쭤린의 안국군을 허베이 국민혁명군으로 개조하라 독려했다. 천하대세가 이미 결판난 셈이니 장제스가 몰고 가는 밴드왜건에 어서 올라타라는 충고였다.
 
  6월 5일 옌시산은 산시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한 후 공식적으로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에 귀속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가 자임한 직책은 ‘국민혁명군 북방 총사령’이었다. 그는 당장 산시 전역에 난징 국민정부의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를 내걸라고 통보했다. 바로 다음 날엔 비행기 부대를 동원해 전역에 ‘취임 선언문’을 뿌렸다. 산시 인민들에게 이제 그들이 난징에 수도를 두고 쑨원의 삼민주의를 계승한 중화민국의 새 국민이 되었음을 각인시키는 예식(禮式)이었다.
 
 
  장쉐량의 ‘역치’
 
 
장쉐량
옌시산의 혜안(慧眼)이었을까. 역사의 큰 물줄기는 그의 예측대로 흘러갔다. 옌시산이 산시의 10만 대군을 이끌고 혁명군에 들어간 후 불과 2주쯤 지난 6월 19일 장제스는 펑위샹과 장쑤성 쉬저우(徐州)에서 회담을 열고 군사적 제휴를 약속했다. 쉬저우 회담 직후 펑위샹은 7~8월 두 차례에 걸쳐 그의 국민군 내부에서 공산 세력을 소탕하는 소위 백색 테러를 이어갔다. 장제스의 반공 노선은 이미 시대의 대세로 굳어가고 있었다.
 
  왕징웨이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결국 1927년 7월 15일 우한 국민정부는 공식적으로 공산당원의 국민당원 자격을 박탈하고 그들을 모조리 축출하는 청당을 선언했다. 군부 장성들이 장제스의 반공 깃발 아래로 몰려가는 상황이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장제스가 몰고 가는 밴드왜건에 마침내 숙명의 정적 왕징웨이까지 일단 올라탄 셈이었다.
 
  반면 옌시산의 조언을 무시한 만주 군벌 장쭤린은 베이징을 장악한 채 1년을 더 버티다가 제2차 북벌이 개시되자 곧 군사적 위기에 봉착했다. 순식간에 전세(戰勢)가 기울어 급히 랴오닝으로 후퇴한 장쭤린은 일본군이 폭탄을 심어놓은 펑톈(奉天)의 철교를 지나다가 폭염에 휩싸였다.
 
  앞으로 차차 살펴보겠지만, 장제스의 밴드왜건에 올라탄 최후의 인물은 장쭤린 사후 만주를 통째로 상속한 27세의 ‘소수(少帥)’ 장쉐량이었다. 1928년 12월 29일 장쉐량은 국민정부에 투항 의사를 밝히면서 랴오닝성 펑톈의 관사에 펄럭이던 북양정부의 오색기를 내리고 난징정부의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게양했다. 이른바 ‘동북(東北) 역치(易幟·국기 바꿔 달기)’라 불리는 이 사건은 광활한 만주 지역이 공식적으로 난징에 수도를 둔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이로써 북벌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싸우지 않고 이긴다’
 
  쑨원의 적통(嫡統)을 자임했던 장제스는 삼민주의와 반공주의를 결합하여 새로운 국민정부의 이념으로 내걸었다. 표면상 그 노선이 북방 군벌에게 국민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옌시산과 펑위샹 등 강성한 북방 군벌을 국민정부로 흡수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시 반공 노선을 고집한 장제스의 군사적 합리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결국 우한 국민정부까지 반공 노선으로 돌아섰음을 상기하면 장제스의 정치 감각과 순발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다만 반공 그 자체는 적과 동지를 가르는 이분법적 명분일 뿐이었다. 장제스가 발휘한 흡입력의 근원은 막강한 그의 군사력이었다.
 
  2년 반에 걸친 북벌의 전 과정에서 장제스는 싸워야 할 때와 싸우지 않아야 할 때를 대체로 정확하게 구분했다. 불가피한 전쟁이라면 저돌적 선제(先制)공격을 감행했지만, 무익한 소모전엔 말려들지 않았다. 《손자병법》의 가르침대로 그는 상처뿐인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영광을 좇는 대신 “싸우지 않고서 상대의 군대를 굴복시키는(不戰而屈人之兵)” 슬기를 발휘했다. 손자가 말하는 전승(全勝·온전한 승리)의 전법이었다. 결국 오지에 들어앉아 맞버티던 지방 무력들은 장제스의 기세에서 천하 통일의 제세 영웅을 발견하고 스스로 달려와선 국민혁명의 밴드왜건에 앞을 다퉈 올라탔다. 장제스로선 최소한의 전투로 최대한의 전과를 올리는 ‘선지선책(善之善策)’이었다.
 
 
  스탈린 vs 트로츠키
 
  한편, 1927년 7월 15일 왕징웨이의 청당 선언으로 국공합작이 공식적으로 완전히 결렬된 이후 소련 모스크바에선 스탈린과 트로츠키(1879~ 1940년) 사이에서 중국 문제를 두고 일대의 사상전이 벌어졌다. 그때까지도 스탈린은 우한 국민정부를 부르주아 민주 혁명의 기지라고 칭송하면서 코민테른과 중공 중앙을 향해 국공합작 노선에서 절대 이탈하지 말라 요구하고 있었다. 반면 트로츠키는 중국 내 혁명적 노동자·농민 세력을 당장 군사 무장시켜서 프롤레타리아 혁명 투쟁을 벌일 때라고 역설했다. 장제스의 상하이 대숙청에서 왕징웨이의 청당 선언에 이르는 3개월 동안 중국에서 이어진 반공 랠리는 트로츠키의 사상적 승리를 증명하는 듯했는데, 돌연 1927년 8월 1일 중국공산당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장시성 난창(南昌)시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천만뜻밖의 군사적 이변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은 그 사태를 지켜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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