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지(國共志): 장제스와 마오쩌둥 〈2〉 장제스, 청방, 그리고 공산당

학살 명령은 장제스, 집행은 청방 두목 두웨성

  • 글 :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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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제스, 상하이 재계 인사들 접견 후 청방 두목과 만나
⊙ 공산당 거물 리리싼도 청방 가입
⊙ 청방의 ‘삼대형’, 황진룽·장샤오린·두웨성
⊙ 상하이 재계, 장제스에게 반공노선 대가로 군자금 지원 약속
⊙ 장제스, 상하이 입성 전 공산당이 무장봉기로 상하이 장악하자 초조
⊙ 공청(共靑) 합작… 공산당은 청방 이용해 노조 운동, 청방은 공산당원을 노사 협상에 활용

송재윤
1969년생. 고려대 철학과 졸업, 미국 하버드대 대학원 중국사 전공 박사 / 미국 테네시주립대 교수, 現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 저서 《슬픈 중국》 3부작
1927년 3월 22일 무장봉기로 상하이를 점령한 상하이 총공회의 노동자 규찰대.

  제2장: 상하이 레퀴엠
 
돌아온 장제스

  1927년 3월 26일 토요일 오후 1시, 국민혁명군 총사령 장제스(蔣介石)를 실은 중산함(中山艦)이 전날 한커우(漢口)에서 출발하여 양쯔강을 타고 내려와 마침내 황푸강 상하이(上海) 군수공장 앞에 정박했다. 군함의 깃대에는 ‘푸른 하늘(민족/자유)과 흰 태양(민권/평등)과 드넓은 붉은 대지(민생/박애)’를 상징하는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가 휘날리고 있었다. 베이징(北京) 중화민국(북양 정부)의 오색기(五色旗)와 차별되는 쑨원(孫文·1866~1925년)이 재건한 중화민국의 국기(國旗)였다. 북벌(北伐)이 개시된 지 9개월 만이었다. 전해 10월 10일 우한에 들어선 국민정부의 수장 왕징웨이(汪精衛·1883~1944년)와 코민테른 고문관 보로딘(M.M. Borodin·1884~1951년)은 장제스에게 계속 북상하여 20만 명의 사병(私兵)을 거느린 북방의 펑위샹(馮玉祥·1882~1948년)과 협상하라고 종용했지만, 난징(南京)과 상하이를 향한 장제스의 굳은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북벌군은 1926년 북벌 시작 당시 10만~12만 명 규모였으나 점령지가 확대될수록 투항한 군벌의 병력이 통합되어 1927년 초엔 이미 25만~30만 명을 헤아렸다. 이 큰 병력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려면 무엇보다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했다. 북벌군을 총지휘하는 장제스로선 양쯔강 하류 삼각주와 상하이의 재원을 놓칠 수 없었다. 이러한 군사적·경제적 고려 외에도 젊은 시절 그가 청춘을 바쳐 공화 혁명에 투신했음에도 결국 빈털터리가 되어 떠나야 했던 잔인한 그 도시에 대한 복수 의지도 그의 동진(東進)을 재촉했을 듯하다.
 
 
  청년 장제스
 
젊은 시절 장제스의 멘토였던 혁명 투사 천치메이.

  1911년 10월 10일 공화 혁명이 발발했을 때, 일본서 군사 훈련을 받던 장제스는 황급히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잠입했다. 당시 상하이에선 쑨원의 동지이자 장제스의 멘토였던 천치메이(陳其美·1878~1916년)가 군사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장제스는 천치메이와 함께 어부와 조폭 조직원들로 구성된 사병 부대를 이끌고 혁명 투쟁에 나섰다. 군사 테러와 요원 암살도 마다하지 않는 무서운 전쟁이었다.
 
  1913년 3월 22일 총선거에서 다수당을 차지한 국민당 총수 쑹자오런(宋敎仁·1882~1913년)이 상하이역에서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후, 쑨원은 제2혁명을 선포했다.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년)의 경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그는 일단 일본으로 넘어갔다. 천치메이와 장제스는 상하이의 지하로 숨어들어 혁명 활동을 이어갔다.
 
  1915년 가을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을 때, 천치메이는 11월 10일 두 명의 자객을 밀파하여 위안스카이에게 딱 붙은 상하이 군권(軍權)을 장악한 정루청(鄭汝成·1862~1915년)을 총살했다. 이때 장제스가 연루됐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듬해 천치메이는 아마도 위안스카이가 보냈을 듯한 자객의 흉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천치메이를 잃은 장제스는 상하이 골목을 전전하며 하염없이 방황했다. 상하이 최대의 범죄 조직 청방(靑幇)에 들어갔다는 설도 있고, 빚내서 증시에 투자했다가 더 큰 빚을 진 채로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장제스의 상하이 네트워크

1926년 북벌 당시의 장제스.

  1927년 3월 26일 오후 황푸강에 도착한 직후 장제스는 제일 먼저 어디로 향했을까? 장제스는 그날 일기에 전함에서 내려 바로 상하이 중심의 동남쪽 룽화(龍華) 북벌군 총지휘 본부로 갔다고만 기록했다. 반면 1925년부터 20년간 그를 경호했던 미시(密熙·1903~1987년)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전함 밖으로 나온 장제스는 2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룽화 부근 외교 공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곧바로 공공조계의 세이모어 거리(Road)로 가서 쑹쯔원(宋子文·1894~1971년)을 만났다.
 
  상하이 거부 집안에서 태어난 쑹쯔원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25년 이래 국민정부 재정장관으로 근무해 온 인물이었다. 바로 그해 12월 1일 장제스는 쑹쯔원의 셋째 누이 쑹메이링(宋美齡·1898~2003년)과 결혼했으므로 두 사람은 곧 처남·매부가 될 사이였다. 상하이 재계의 핵심 인물인 쑹쯔원은 앞으로도 계속 장제스에게 군자금과 통치 비용을 마련해 줄 금융통이었다. 장제스가 상하이 도착 후 제일 먼저 그를 찾아간 사실에선 무엇보다 상하이 재계를 파고들려는 장제스의 의지가 읽힌다.
 
 
  장제스, 청방 두목과 만나
 
  쑹쯔원을 면담한 후 장제스는 수행원 20여 명과 함께 프랑스 조계(租界)로 향했다. 당시 프랑스 조계와 화계(華界·중국령) 경계엔 강철 펜스가 설치돼 있었고 매일 저녁 중국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장제스를 수행하는 중무장 상태의 군용 차량 세 대가 프랑스 조계에 당도했을 때 펜스는 이미 닫혀 있었다. “북벌군 총사령”임을 알리며 문을 열어달라고 하자 경비원들은 상부에 보고했다. 약 15분이 지난 후 두 대의 오토바이가 장제스의 차량 세 대를 호송하여 프랑스 조계 안으로 인도했다. 그렇게 차를 타고 프랑스 조계를 둘러본 후 장제스는 다시 쑹쯔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한 시간쯤 지났을 때, 프랑스 군관이 아무 때나 조계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3장의 통행증을 보내왔다. 장제스가 상하이 도착 당일 곧바로 프랑스 조계 출입증을 받아냈다는 사실은 상하이 국제사회가 북벌군을 승인했음을 알리는 최초의 사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며칠간 장제스는 상하이 각계의 주요 인사들을 접견했다. 상하이 총상회(總商會) 회장 위차칭(虞洽卿·1867~1945년)과 몇 명의 상하이 기업인은 그때 이미 장제스에게 공산당과 절연하면 재정적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일설에 따르면, 장제스는 익히 잘 아는 청방 두목 ‘곰보’ 황진룽(黃金榮·1868~1953년)을 바로 만나 향후 계획을 논의했다. 또한 며칠 내 공공조계의 실질적 정부라 할 수 있는 상하이 공부국(工部局)의 위원장 페센덴(Sterling Fessenden·1875~1944년), 청방 둘째 두목 ‘큰 귀’ 두웨성(杜月笙·1888~1951년)과 만나 극비리에 3자 회담을 가졌다[F. Wakeman, Jr. Policing Shanghai 1927-1937, 122-123]. 이 과정에서 1927년 4월 12일의 대규모 숙청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탕자의 귀환’
 
장제스와 저우언라이(왼쪽). 황푸군관학교 생도들과 함께.

  ‘동방의 파리’라 불리던 1920년대 상하이는 동양과 서양이 요란하게 부딪히고, 전통과 현대가 현란하게 뒤섞이고, 천당과 지옥이 어지럽게 뒤엉키는 세상에 두 번 다시 생겨나기 힘든 기기묘묘한 도시였다. 외국 조계에는 최상급 호텔, 화려한 댄스홀, 고급 레스토랑, 그레이하운드 포구장(跑狗場·개경주장·canidrome)까지 들어서고 있었지만, 길 하나 건너 중국령 지역에는 결핵균이 창궐하여 거리에 시체가 한 해 2만~3만 구나 나뒹굴었다. 무정부의 혼란 속에서 암흑계가 정부를 대신했다. 아편굴과 사창가에서 일어난 상하이 범죄 조직 청방 두목들은 신변 보호를 약속하며 주민들의 돈을 갈취해 호화 생활을 누렸다. 1910~1930년 20년간 상하이 인구는 세 배나 급증해 300만 명에 달했는데, 이 중 대략 10만여 명이 암흑가 조직원이었다.
 
  장제스는 청방의 실태를 훤히 꿰고 있었다. 정설은 아니지만, 민간에선 청방 두목 황진룽이 장제스를 따라다니는 빚쟁이들을 다 불러 모아 말 한마디로 그 큰 빚을 다 탕감해 줬고, 장제스는 은혜를 베푼 황진룽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청방에 가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장제스가 10년 만에 수십만 대군을 거느린 군부(軍部)의 최고 실력자가 되어 상하이로 복귀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청방에 충성을 맹세한 조직원 장제스가 10년간 떠나 있다가 대군을 이끌고 청방의 소굴로 귀환한 셈이었다. 이 과정을 추적한 언론인 아이삭스(Harold Isaacs·1910~1986년)의 표현을 빌리자면, 화려한 ‘탕자의 귀환’이었다.
 
  놀랍게도 장제스가 북벌군을 이끌고 도시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공산당원들이 영도하는 상하이 총공회가 무기고를 털어 군사 무장을 하고 80만 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산둥의 ‘개고기(狗肉)’ 군벌 장쭝창(張宗昌·1881~1932년)의 중화기 병력을 몰아내고 도시를 점령한 상태였다. 도시 게릴라전으로 큰 전과를 올리고 장제스를 기다리던 중공 측 인물은 다름 아닌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년)였다. 바로 자기 밑에서 황푸군관학교 정치위원으로 있던 저우언라이가 상하이에 들어와서 노동자 무장봉기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접할 때 장제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공산당 숙청을 결심한 장제스의 심적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쯤에서 상하이 총공회의 3차례 무장 투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하이 노동자들의 무장봉기

  1926년 10월 중순 양쯔강 중류의 우한(武漢)과 난창(南昌)을 점령한 북벌군은 이후 다시금 동로군(東路軍), 중로군(中路軍), 서로군(西路軍)의 삼각대오를 갖추고서 양쯔강 하류로 진군했다. 북벌군의 진격에 보조를 맞춰 상하이 총공회는 1926년 10월 말부터 1927년 3월 말까지 3차례의 봉기를 일으켰다. 제1차 봉기는 북벌군이 우한과 난창을 점령하고 양쯔강 하류로 내려와서 머잖아 상하이를 장악할 듯한 전세가 감지됐던 10월 말에 일어났다. 봉기의 주동 세력은 상하이 총공회였으나 그 배후는 장제스가 파견한 국민당 대표 니우융젠(钮永建·1870~1965년)과 중공 중앙의 밀명(密命)을 받는 공산당원 활동가들이었다. 국공합작의 정신 아래 두 세력은 표면상 공조(共助)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노동자 집단을 장악하기 위한 물밑 세력 다툼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 당시 노동자 규찰대의 무장 상태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국민당이나 공산당이나 거사를 일으키려면 청방의 협조를 얻어내야만 했다. 니우융젠은 청방 두목 황진룽과 관계를 터 국민당 군자금을 주는 대가로 3600명의 사복조 행동대원을 확보했다. 동시에 그는 상하이 총상회 회장 위차칭과 협상해 500명의 무장 병력을 지원받았다. 노동자 규찰대가 선봉에 서고 총상회 무장 병력과 청방의 행동대원이 합세한다면, 군벌 쑨촨팡(孫傳芳·1885~1935년) 휘하의 1000명 군병력과 2000명의 경찰 부대를 기습 공격할 수 있을 듯했다.
 
 
  실패로 끝난 1차 봉기
 
  장제스의 북벌이 대성공을 거듭한 덕분에 일단 상하이 내부에선 반(反)군벌의 깃발 아래 국공(國共) 양당과 재계, 노동계, 암흑계가 힘을 합치는 진귀한 형국이 펼쳐졌다. 문제는 각 진영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니우융젠은 대규모 무장봉기를 흔쾌히 추진할 수 없었다. 큰 희생이 따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노조와 결합하여 세력을 키우려는 공산당의 속셈이 번연히 읽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장봉기를 유예한 채 우회적으로 쑨촨팡 부대를 내부에서 와해시켜 투항시키는 심리전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미 니우융젠은 쑨촨팡 치하 저장(浙江)성의 성장(省長) 샤차오(夏超·1882~1926년)와의 비밀 회담을 이어가고 있었다. 쑨촨팡에게서 등을 돌린 샤차오는 군을 이끌고 상하이로 진격하여 북벌군에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1926년 10월 13일 장제스의 북벌군이 장시(江西)성의 난창을 점령하자 바로 사흘 뒤 샤차오는 저장성의 독립과 국민당 지지를 선언했고, 다음 날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상하이로 진격했다. 한데 상하이에서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킨다는 니우융젠과의 사전 합의에 따른 결정이었으나 샤차오의 병력이 상하이 5km 전방까지 접근했는데도 무장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교전(交戰)을 피한 채 대치하던 쑨촨팡은 북방에서 증원병이 도착하자 곧 반격을 개시했고, 10월 23일 다시 항저우(杭州)를 점령했다.
 
  바로 이날 니우융젠은 무장봉기의 개시를 명령했는데, 통신 두절과 작전 착오로 봉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푸둥(浦東) 지역에서 136명의 규찰대가 12자루의 소총을 들고 모였다가 흩어지고, 몇 군데 경찰서 습격이 있었지만, 큰 타격을 주지 못한 채 노동자 시위대 몇 명이 구속되는 정도에 그쳤다[S.A. Smith, A Road is Made, chapter 8].
 
 
  2차 봉기
 
1928년 말 상하이 와이탄.

  제1차 봉기는 허망하게 끝이 났지만, 장제스 북벌군의 승세가 더욱 굳어지면서 상하이엔 다시금 혁명의 만조기(滿潮期)가 도래했다. 1927년 2월 19~23일 제2차 무장봉기가 일어났을 땐, 공산당원 활동가들의 주동적 역할이 두드러졌다. 1927년 1월 쑨촨팡의 군벌 정부는 급속하게 무너지는 체제를 지탱하고자 전단을 뿌리는 학생이나 노동자를 잡아 목을 치고 머리를 대나무 막대에 꽂거나 접시 위에 올려 전시하는 잔혹한 백색 테러를 자행했다. 2월 19~23일 군벌의 만행을 본 대중의 분노가 끓는점을 향해 갈 때,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상하이 총공회는 총파업을 개시했다.
 
  군벌 정부는 무관용의 강경 진압으로 여러 목숨을 빼앗았고, 이에 격분해 노동자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전단을 뿌리고 대중 연설만 해도 붙잡혀 처형당하는 참극이 이어졌으나 노동자들은 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을 감행했다. 상하이 총공회의 발표에 따르면, 2월 19~23일까지 나흘간 6000여 개 작업장에서 42만970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동참했다. 저우언라이의 사후 평가에 따르면,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의 대다수는 “북벌군 환영”을 외치고 있었다. 경제 투쟁이 아니라 정치 투쟁이었다는 의미다.
 
  그만큼 위협을 느낀 군벌 정부의 진압은 무자비했다. 2월 19~23일까지 나흘간 40명이 죽고 300명이 구속당했다. 무자비한 처형은 계속 이어져 3월 초까지 200명 정도가 죽임을 당했다. 이 당시 계엄사령관이 되어 백색 테러를 자행한 인물은 쑨촨팡의 직속 부하 리바오장(李寶章·1893~?)이었는데, 놀랍게도 1928년 가을 그는 국민당으로 귀순했고, 얼마 후 국민정부의 군사 참의(參議) 직을 맡았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좌파 역사가들은 장제스의 북벌군이 리바오장의 백색 테러를 고의로 방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같은 책].
 
  제2차 무장봉기 이후 상하이는 실질적인 내전(內戰) 상태로 돌입했다. 상하이 총공회는 이미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원의 치밀한 전략·전술에 따라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의 성장세는 가팔랐다. 1926년 말 2만 명을 돌파한 당원 수가 제2차, 제3차 봉기를 거치는 동안 6만 명을 넘어섰다. 군벌 정부의 백색 테러가 강화될수록 노동 계층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흡입력은 더욱 강해졌다. 상하이 고수가 난망해지자 쑨촨팡은 산둥의 군벌 장쭝창에게 SOS를 쳤다. 러시아인 용병부대가 포함된 장쭝창의 즈리(直隸)-산둥 연합 부대가 쑨촨팡의 부대를 대체한 시점은 3월 초였다. 북방 군벌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시민들의 반감은 몇 배나 커졌고, 공산당원들은 넓게 퍼진 반군벌 정서를 대중 선동에 이용했다.
 
 
  노동자 규찰대의 승리
 
1927년 3월 상하이 시위 군중.

  1927년 3월 21일 정오, 상하이 노동자 총동맹 파업이 선포됐다. 이 시각을 기해 상하이 전역 7개 구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동시에 상하이 80만 노동자들은 저우언라이 등 중공 활동가의 전략에 따라 총동맹 파업에 나섰다. 예정된 장소에 결집한 노동자 규찰대는 순식간에 도시의 70개 주요 경찰서를 습격했다. 건물 안에 난입한 규찰대는 경찰의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고를 털었다. 갈수록 더 많은 무기를 확보한 규찰대는 군벌 병력에 맞서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저녁 무렵 규찰대는 난시(南市), 후둥(滬東), 후시(滬西), 푸둥, 훙커우(虹口), 우쑹(吳淞) 등 여섯 구역을 완전히 점령했다. 자베이(閘北) 지역의 군벌 병력은 장갑차와 대포로 공격을 퍼부으며 반격했다. 공공조계의 영국군은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군벌 편에 서서 규찰대를 공격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반복적 쟁탈전을 펼친 끝에 22일 오후부터 상하이 북역(北驛)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노동자 계급의 손에 들어왔다. 저우언라이의 명령에 따라 규찰대는 북역을 향해 총공세를 퍼부었고, 군벌 병력은 끝내 패주했다. 3월 22일 오후 6시 무렵이었다. 상하이 노동자 계급은 마침내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 이틀 밤낮의 혈전을 통해 150자루의 총과 소량의 수류탄만으로 3000명의 군벌 병력과 2000명의 경찰 부대를 모두 물리쳤다. 난시에선 5만 명이 모여 북벌군 환영대회를 열었다.
 
 
  장제스, “마음이 조급해졌다”
 
1927년 3월 제3차 봉기의 성공을 경축하는 노동자들. 오른쪽 현수막엔 “노공(勞工)의 도사(導師)”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상하이 입성 후 그간의 상황을 상세히 보고받은 장제스는 심란했다. 3월 29일 일기에 아침부터 방문객을 접견하느라 “마음이 조급해졌다”고 썼다. 주요 참모들과 군사, 외교, 북사(北事·북방 사무), 당무(黨務)를 논하다 보니 오후 3시에야 밥을 먹고 밤늦은 시각이 되어서도 조금도 쉴 수 없었다. 이날 일기엔 “요언(謠言)이 날로 심해지고, 책임이 날로 중해진다”는 글도 적었는데, 정황상 요언이란 국민당 내 공산당원들이 퍼뜨리는 유언비어를 의미하는 듯하다[蔣中正日記, 1917-1936].
 
  장제스가 보기에 특히 상하이 총공회의 제3차 무장봉기는 ‘국민혁명군’ 총사령 장제스의 명령이 아닌 중공 중앙이 벌인 독자적 군사 작전이었다. 1926년 3월 20일 ‘중산함 사건’을 일으킨 후 코민테른과 합의할 때 장제스는 ‘공산당이 자기 당원들에게 명령을 내릴 땐 사전에 국민당에 통보하여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던 바 있다. 상하이 무장봉기는 국공합작의 원칙을 깨는 공산당의 혁명적 도발이었다.
 
  장제스는 그 무엇보다 80만 노동자를 동원해 도시를 장악한 공산당의 대중 동원력에 놀랐을 듯하다. 상하이뿐만이 아니었다. 북벌군이 군벌 세력을 몰아내고 국민정부를 세운 우한, 난창 등 거의 모든 도시에서 공산당원들은 대중과 연계하여 대규모 파업과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바이러스처럼 확산되는 공산당의 세력을 그대로 방치할 순 없었다.
 
  장제스에게는 무엇보다 우한에 들어선 왕징웨이(汪精衛·1883~1944년)의 국민당 좌파 정부와 코민테른의 유대가 심각한 위협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들이 중국공산당을 끌어들여 공동정부를 세운다면, 전장(戰場)에서 목숨 걸고 싸운 자신의 설 자리는 어디란 말인가.
 
  덧붙여 반공 노선을 취하면 군자금을 주겠다는 상하이 총상사 위차칭의 제안도 장제스의 마음을 움직였을 듯하다. 재원 마련을 위해선 상하이 산업계·금융가와의 결탁이 필수적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검토한 장제스는 비장한 심정으로 4·12 대숙청의 계획을 세웠다.
 
 
노조위원장과 암흑가 두목의 랑데부

  대학살 하루 전날이었다. 1927년 4월 11일 저녁 8시경 상하이 총공회 위원장 왕서우화(汪壽華·1901~ 1927년)는 운전사가 모는 차를 타고서 상하이 프랑스 조계 바그너 길(Rue Wagner)의 한 유럽풍 3층 맨션 앞으로 들어섰다. 정면의 흰색 대리석 외벽에 층층으로 발코니가 붙어 있는 프랑스식 ‘아르 데코(art deco)’ 건물이었다. 철문이 열리자 미끄러지듯 차가 맨션 안으로 쑥 들어갔다. 스스럼없이 차에서 내린 왕서우화는 정문 쪽으로 성큼 발을 떼었다. 말쑥한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중절모를 쓴 차림이었다. 워낙 익숙한 걸음새라 낯선 방문객이라기보단 전갈을 받고 뛰어온 조직원처럼 보였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는 초인종을 눌렀고, 문이 열리자 사뿐히 실내로 들어갔다. 바로 그 순간 두 명의 괴한이 그의 차로 들이닥쳐 운전사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는 헤드라이트를 끈 채 차를 후진시켜 집 밖으로 나가게 했다. 상하이 총공회 위원장의 운전사가 차를 몰고 연기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헛소문을 내기 위한 밑밥 깔기였다. 등 뒤에서 일어난 이 사실을 왕서우화는 낌새도 채지 못했다[Pan Ling, Old Shanghai: Gangsters in Paradise].
 
  궁전처럼 화려한 그 맨션은 상하이 암흑가를 지배하는 청방 두목의 거처이자 조직의 본부였다. 맨션의 정중앙엔 삼각형 페디먼트가 삐쭉 솟아 있고, 좌우 양편은 정확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맨션 중앙의 큰 벽을 사이에 두고서 ‘큰 귀’ 두웨성과 ‘돌주먹’ 장샤오린(張嘯林·1877~1940년)이 각각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청방의 ‘삼대형’
 
청방 두목 황진룽(오른쪽)과 장샤오린(왼쪽).

  한쪽 절반에선 두웨성이 본처와 쑤저우(蘇州) 출신 어린 두 첩을 각 층에 한 명씩 두고 생활했으며, 반대쪽 절반에선 ‘돌주먹’ 장샤오린이 갖은 호사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 나이는 장샤오린이 아홉 살이나 위였음에도 청방 내의 서열은 두웨성이 높았다. 한편 프랑스 조계의 사복형사 신분으로 청방의 두목이었던 ‘곰보’ 황진룽은 따로 근처에 으리으리한 저택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청방의 삼대형(三大亨·삼대 거두)이었다. 상하이 항설(巷說)에 따르면, 황진룽은 “돈을 밝혔고[貪財]”, 장샤오린은 “싸움을 잘했고[善打]”, 두웨성은 “사람을 잘 다뤘다[做人]”.
 
  청방 조직 내에서 인(人)의 네트워크를 가장 넓게 가진 인물은 두목 황진룽이었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문도(門徒)는 수백, 수천을 헤아렸다. 그 문도는 다시 대개 출신 지역에 따라 수 개의 파벌로 나뉘었고, 각 파벌의 꼭대기엔 또 수백, 수천을 거느린 새끼 두목이 있었다. 황진룽은 피라미드형 네트워크의 정점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여러 파벌을 견제하고 조정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Wakeman, Jr., 32]. 요컨대 황진룽의 권력은 상하이 외국 조계와 중국 재계와 암흑세계를 넘나들며 연결하는 그의 관계망과 처세술에서 나왔다.
 
청방 두목 “큰 귀” 두웨성.

  청방 2인자였던 두웨성은 머잖아 장샤오린과 힘을 합쳐 황진룽을 밀어내고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1927년 4·12 대학살 이후 두웨성은 소장(少將) 계급장을 달고 국민혁명군 영예 고문의 직위를 누렸다. 정관계와 폭력계 흑백(黑白)의 양도(兩道)를 넘나들며 합법과 불법과 반(半)합법의 공간에서 30년 넘게 종횡무진 그가 펼쳤던 파란만장한 무용담과 기상천외한 정치 행각은 그 자체로 현대사의 중요한 한 대목이다. 좋든 싫든 그의 악행과 무용담을 더 파헤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역사란 본래 고산 지대 청정수부터 비료공장 오염수까지 몽땅 다 끌어안고 쉼 없이 흘러가는 장강(長江) 물줄기처럼 도도(滔滔)하고 광막(廣漠)한 대서사다. 청탁(淸濁)의 혼효(混淆)랄까 성속(聖俗)의 착종(錯綜)이랄까, 선악(善惡)이 뒤섞이고 시비(是非)가 엇갈리는 모순과 반전, 역설과 미망의 연속극이다. 세속의 풍진(風塵)에 눈을 감는 수도승의 마음이나 더러운 말을 들으면 귀를 씻는 선비의 속내로는 역사 속 인간세(人間世)의 참모습을 볼 수가 없다.
 
  노동계 대표와 암흑가 보스를 엮는 인연의 사슬은 무엇이었을까. 이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기 위해선 우선 초창기 상하이에서 공산당과 청방 조직원들 사이에 생겨난 끈끈한 관계를 짚어봐야만 한다. 갱단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사건엔 중국 현대사의 급변을 알리는 복선이 깔려 있다.
 
 
청방 조직에 침투한 공산당원

  1920년대 상하이는 중국 전역에서 가장 발달한 산업도시였다. 1852년부터 1949년까지 불과 100년의 세월 동안 상하이 인구는 50만 명에서 500만 명으로 10배나 늘어났다. 1911년 중국 전역 모든 공장의 25%가 상하이에 있었는데, 1933년에 이르면 그 비율이 50%를 넘었고, 1949년엔 60%까지 상승했다[Elizabeth Perry, Shanghai on Strike, 17]. 공장지대가 늘어나면서 상하이 노동자들은 권익 보호를 위한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1920년 초 상하이에선 5000명의 전통 약제사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큰 파업을 벌였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엔 연합회를 조직하기도 했다[같은 책, 72-73].
 
  중국의 산업 수도 상하이는 노동운동의 발상지기도 했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창당됐다. 창당을 1년 앞둔 1920년 베이징대학 인문학 교수 천두슈(陳獨秀·1879~1942년. 중공 초대 총서기)는 상하이 공장지대를 찾아 노동 현장을 직접 답사한 후 상하이의 현실을 비꼬는 짧은 글을 발표했다.
 
  “상하이 사회를 분석해 보면, 빈곤과 고통 속에서 몸 팔아 먹고사는 일자무식의 노동자들이 대다수다. 그밖엔 외국 자본가 세력을 직간접으로 빨아 먹고사는 간사한 상인들, 가짜 양약이나 복권을 팔아먹는 사기꾼들, 매춘 업종 여인들, 무슨 악행이든 다 저지르는 부랑아, 썩어빠진 형사와 불한당이 바글댄다. 외설물, 미신 부적, 각종 보감(寶鑑)이나 비결 따위를 만들거나 해적판 잡지를 찍어서 돈을 갈취하는 흑막 문인과 책장수들이 설쳐대고, 부패하고 타락한 정객들도 넘쳐난다. 뜻있는 청년 학생은 극소수일 뿐이다. 이러한 환경에 처하면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우니 환경을 극복할 역량은 있을 수가 없다.… 내 생각으론, 국민대회가 열린다면, 상하이에선 절대로 개최되지 말아야 마땅하다.”[陳獨秀, “上海社會” ‘新靑年’ 8.1. 1920. 9.].
 
 
  범죄의 도시, 노동 계급의 허브
 
  범죄와 죄악으로 가득한 상하이를 직접 둘러본 천두슈의 이 발언은 당시 상하이를 “중국 여론의 중심, 문화의 중심”으로 미화하는 청년 공산당원의 낭만주의를 비판했으나 결국 중공 창당은 이듬해 여름 그 도시에서 거행됐다.
 
  상하이에서 창당식이 열린 이유는 상하이가 노동 계급의 허브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역시나 이론과 현실의 차이였다. 청년 공산당원들은 머릿속으로 노동자를 미화하지만, 현실의 노동자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다. 겁 없이 공산 혁명의 청운을 안고 상하이로 뛰어든 청년 혁명가들은 날마다 거지 떼에 휩싸이고, 깡패들에게 돈을 뜯기고, 창기들의 눈웃음에 정신이 팔리고, 생활고에 짓눌리며 방황하다가 대개 몇 개월 못 버티고 혁명운동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심각한 장애는 청방, 홍방 등 범죄 조직의 훼방이었다. 공산당원들은 토의 끝에 누군가 범죄 조직에 들어가 ‘관시(關係)’를 터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때 호방한 성격에 주먹도 쓸 줄 아는 리치한(李啓漢·1898~1927년)이 이 특무(特務)를 자임했다.
 
  후난성 장화(江華)현의 빈한한 가정에 태어나 어려서 약초를 캐며 집안 살림을 도왔던 리치한은 열두 살에 학교 공부를 모두 접고 어머니와 시장에서 행상을 하며 먹고살았다. 중키에 하얀 얼굴의 리치한은 어려서부터 무관(武館)에 드나들며 상당 수준의 무예를 익혔다. 하루는 비적 떼가 마을을 급습해 재물을 약탈하자 집성촌 일가 형제들을 규합해 그들을 내쫓았다고 한다. 가난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고학하여 1917년 후난성 창사(長沙)에서 중등학교에 입학한 리치한은 1919년 5·4운동을 거치면서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년)이 조직한 신민학회(新民學會)에 가입했고, 이후 베이징대학에서 청강도 했으나 이론에 탐닉하기보다 노동운동에 직접 투신하겠다는 뜻을 품고 1920년 봄 상하이로 갔다[林健栢 外 著 ‘李啓漢’].
 
 
  청공합작
 
  상하이에서 노동운동을 개시한 리치한은 공장 노동자들이 외국인 공장주의 ‘넘버원’ 타수(打手·앞잡이)가 되어 노동자들을 감독하고, 압박하고, 약탈하는 현실을 직시했다. 무력(無力)한 노동자들은 상하이 범죄 조직 청방에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리치한은 학교를 세우고 공회(工會·노조)를 조직했지만, 청방 조직원이 몰려와선 기물을 부수며 분탕을 쳤다. 암흑가의 권력을 체감한 리치한은 공회를 조직하기 위해 스스로 청방에 입회할 기회를 찾아다녔다. 그는 야학에서 알게 된 청방 소속의 여공(女工)에게 계속 접근해 그녀의 마음을 열었다. 노동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지속적인 노력으로 친분을 쌓은 리치한은 결국 그녀의 추천을 받아 청방에 가입할 수 있었다. 청방의 조직원이 되어 정치적 공간을 확보한 리치한은 면직공장과 담배공장에 들어가 노조 건설의 첫걸음을 떼었다.
 
  상하이 전 지역을 누비며 아편 밀매, 도박장 운영, 매춘 산업뿐만 아니라 인력거꾼과 거지 떼까지 모두 포섭해 거금을 쭉쭉 흡입하는 청방은 그야말로 악의 세력이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흠모하며 사회주의 혁명에 투신한 지식 청년들이 정치적 활동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부득이 갱단에 들어간다 한들 이중생활을 지속하기란 쉽지 않았다. 청방에 가입한 리치한은 7년의 세월 동안 상하이 노동운동의 기틀을 닦았지만, 1927년 4월 12일 대학살의 광풍 속에 빠져 29세로 사망했다. 청방은 그를 지켜주지 않았다. 공산당원이기 때문이었다.
 
  청방은 결국 그를 죽였지만, 청방에 들어간 덕분에 그는 7년 동안 상하이에서 노동운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청방에 가입한 공산당원 리치한은 설혹 배신당해 비참하게 죽었다 해도 노동운동의 기반을 닦는 정치적 목적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리치한의 뒤를 봐준 청방은 과연 그로부터 무엇을 뜯어냈을까? 주기만 하고 받는 게 없다면 대조직이 유지될 리 없다. 청방의 막강한 권력은 인적 네트워크에서 생겨났다. 당시 상하이에선 천지사방 각계각층 적재적소에 청방 조직원이 숨어들어 암약하고 있었다. 도박장, 매음굴 같은 암흑가는 말할 필요도 없고, 정관계, 은행가, 교육계, 운수업계, 유통조직, 군대, 경찰에까지 관민 구분 없이 청방이 안 스며든 곳이 없었다.
 
 
  리리싼과 류사오치
 
대중 연설을 하고 있는 리리싼. 1925년 5월 30일 추정.

  1920년대 상하이 현실에서 노조 활동에 투신한 공산당원은 청방 입장에서 커다란 쓸모가 있었다. 파업을 막으려는 공장주나 자본가와 노조의 단체행동을 놓고 협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청방과 공산당원 사이엔 공생(共生)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국공합작 이전에 이뤄진 청공(靑共)합작이었달까.
 
  이후에 중공 중앙의 명령을 받고 상하이에 투입된 중공 요원 중엔 리치한의 선례를 따라 청방에 가입한 사례가 적잖았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바로 상하이 노동계에서 영웅처럼 맹활약했던 중공당원 리리싼(李立三·1899~1967년)이었다. 리리싼과 류사오치(劉少奇·1898~1969년)는 1925년 당시 상하이 노동계에서 혜성처럼 떠오른 공산당원 지도자였다.
 
  마오쩌둥의 고향 후난성 창사 출신인 리리싼은 1919년 프랑스 마르세유로 가서 근로하며 고학(苦學)하는 ‘근공검학(勤工儉學)’ 과정을 밟은 후 192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어 그는 후베이, 장시 등지를 돌며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일찍부터 이런 경력을 인정받았다. 1924년 5월 중공 중앙은 리리싼을 중국 노동운동의 중심지 상하이에 파견했다.
 
 
  “청방·홍방, 리리싼에게 충성 맹세”
 
  유능한 혁명가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혁명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중국 노동운동의 분기점이 된 결정적 모멘트는 1925년 5월 30일에 만들어졌다. 공공조계 영국 경찰이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14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는데 이 사건으로 중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제국주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틀 전 리리싼은 중공 중앙 회의에 나가서 일본 면직공장에서 전개되는 파업 투쟁에 관해 상세히 보고하면서 혁명적 형세를 조성하기 위해선 학생층을 포함해 사회 각계의 참여가 필수적이라 역설했다. 이에 중공 중앙은 5월 30일 상하이 조계에서 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한 대규모 반제국주의 민족 투쟁을 기획했고, 리리싼은 비밀 지도부를 결성했다. 실제로 5월 30일 리리싼의 지휘를 받는 2000명의 학생이 공공조계로 몰려가서 ‘제국주의 타도!’ 문구가 인쇄된 전단을 뿌리면서 대규모 군중 시위의 조건을 만들었다. 이렇게 투쟁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서 5·30 참사가 발생했다[唐純良, ‘李立三傳’, 49-50].
 
  격분한 군중이 가세하여 동맹 파업, 동맹 휴교가 일어나면서 중국 전역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이 가열되자 중공 중앙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바로 다음 날인 5월 31일 21만 노동자를 대표하는 상하이 총공회가 결성됐다. 리리싼은 상하이 총공회 위원장으로 추대됐고, 얼마 후 류사오치는 총무 주임으로 임명됐다. 두 사람의 지도력에 힘입어 상하이 총공회는 순식간에 117개 노동조합 2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가입한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Perry, 81].
 

  과묵하고 치밀한 류사오치는 배후에서 실무를 맡아서 처리하는 관료형 지도자였다. 반면 키가 크고 강건한 인상의 리리싼은 전형적인 대중 운동가였다. 평민학교 창설, 직공 야학 활동, 노동 조직 결성, 집회·시위 주동 등등 수년간 다방면의 노동운동에 헌신한 리리싼은 군중의 심장에 불을 지르는 선동 연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그는 언제나 수명의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운전사가 모는 차를 타고 군중집회와 시위 현장을 찾아가 대중 앞에서 연설했다.
 
  얼마 후 청방 조직원이 리리싼에게 접근해 왔다. 그는 중공 중앙에 그 사실을 알리고 당의 승인을 받은 후 청방에 가입했다. 리치한이 이미 증명했듯 암흑계와의 긴밀한 관계는 노동운동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경험칙에 따른 것이다. 이런 정황을 파악한 영국인 경찰의 보고서엔 “청방과 홍방이 노동 시위대와 결탁하여 리리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정황상 리리싼이 청방에 충성을 맹세했음이 분명해 보인다[Perry, 81].
 
  청방은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누구든 이 조직에 가입하려면 까다로운 검증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검증을 거친 후엔 자신을 끌어준 사부(師父) 앞에 엎드려 바닥에 이마를 찧는 고두례(叩頭禮)를 3배(拜) 올리고, 청방 조상의 신상에 9배의 고두례를 올려야 했다. 이 과정을 거쳐 조직에 가입한 자는 한평생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주종(主從)의 의무 관계에 묶였다. 상하이에서 활약한 공산당원 노동운동가들은 청방을 이용해 정치 공간을 넓혔지만, 암흑세계와의 계약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이제 다시 두웨성의 맨션을 찾아간 왕서우화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생매장당한 총공회 위원장 왕서우화
 
왕서우화. 1927년 3월 봉기 후 상하이 총공회 위원장으로 선출되나 4월 11일 청방은 그를 살해한다.

  192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왕서우화는 이후 4년의 세월 동안 일관되게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특히 1927년 2월과 3월 대규모 파업 투쟁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하이 노동계 거물로 부상했다. 3월 27일 상하이 총공회 노동자 대표대회에서 그는 열정적인 연설로 청중을 사로잡았고, 바로 다음 날 상하이 총공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노동계의 거물이 두웨성의 부름을 받고서 청방의 소굴로 걸어 들어갔다는 사실은 그가 바로 그 조직에 깊이 연루돼 있었음을 방증한다.
 
  아무 걱정 없이 나타난 왕서우화는 바로 그 현장에서 생포됐다. 두웨성은 사전에 이미 수하들에게 왕서우화를 깨끗이 제거하고 암매장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다. 이 사건을 추적한 여러 연구에 따르면, 그는 결박당한 채로 상하이 교외로 끌려갔고, 살아 있는 채로 매장당했다. 두웨성의 수하가 일을 마치고 와서 두웨성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때는 밤 9시였다[Pan Ling, 51].
 
  두웨성의 목적은 다음 날 새벽 대학살에 앞서 상하이 총공회의 지도부를 미리 와해하기 위함이었다. 인간 사회 어떤 조직이든 우두머리가 제거되면 위기를 맞는다. 조직의 생리를 잘 아는 두웨성은 청방의 조직원인 왕서우화를 잔정에 얽매임 없이 일거에 제거했고, 다음 날 새벽 치밀한 계획에 따라 조직원들을 풀어서 대학살을 자행했다. 명령은 장제스, 집행은 두웨성의 짓이었다.
 
 
  상하이에서만 4000여 명 학살돼
 
  4월 12일 이른 새벽, 청방 행동대원들은 사전 협약에 따라 아무런 제재 없이 프랑스 조계에 결집했다. 청방은 급조한 황색 노동 단체의 이름을 과거 장제스의 멘토 천치메이가 결성한 혁명 조직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중화공진회(中華共進會)라 했다. 공진회 소속의 청방 행동대원들은 남색 데님 유니폼에 ‘工’자가 적힌 완장을 차고 프랑스 조계로 들어가 공공조계를 가로질러 자베이에 있는 상하이 총공회 본부를 타격했다. 수백 명의 공산당원과 노조원이 그날 학살당했다. 이틀 후인 4월 14일 국민혁명군 정치국은 상하이 총공회를 불법 단체화하고, 대신 ‘상하이 노조 통일위원회’를 결성하여 좌파 노조원들을 숙청했다.
 
  같은 날 장제스는 청당(淸黨) 위원회를 결성했고, 천췬(陳群·1890~ 1945년)을 위원장에 앉혔다. 천췬은 푸저우 고등경관학교 출신으로 191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쑨원의 혁명 활동에 동참하였고, 이후 쑨원 총통부 비서, 황푸군관학교 교원 등의 경력을 거쳐 1926년부터 국민당 정치위원으로 상하이에 침투해 활약해 온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두웨성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그 당시 장샤오린의 비서 노릇을 겸하고 있었다. 두웨성은 천췬에게 청방 행동대원들을 빌려줬다.
 
  그해 4월 말까지 이어진 대숙청으로 상하이 지역에서만 4000여 명의 ‘좌익 분자’가 학살당했고, 이후 연안 지역에서도 숙청이 이어져 수백 명이 더 잡혀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국공합작의 종언
 
  폭력으로 당을 청소한 장제스는 난징에 중화민국 정부를 다시 세우고 제2차 북벌을 준비했다. 난징에서 천하를 통일했던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1328~1398년)의 선례를 거울삼았음인지 장제스 역시 난징을 수도로 삼고 전 국토를 아우르는 통일 군주의 대망(大望)을 품었다.
 
  4·12 대학살로 국공합작은 피비린내 속에서 막을 내렸다. 군사 지원과 혁명 자문을 이어온 소련과의 관계도 자동 청산됐다.
 
  돌이켜 보면 국공합작이란 불가능한 꿈이었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 쑨원의 공화주의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융화될 수 없었다. 쑨원이 코민테른과 손을 잡고 국공합작을 기획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비참하게 막을 내린 국공합작은 국공내전의 발화점(發火點)이 되었다. 이제 내전의 시한폭탄이 장착될 수밖에 없었던 1923~1924년도 전 중국의 정치적 맥락과 군사적 역관계(力關係)를 차분히 들여다볼 차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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